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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3-11-10 13: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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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4-8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5절에 보면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라고 합니다.
구약전체를 한꺼번에 요약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 율법을 주시면서
“이것을 행하라. 행하면 의가 생기고 그 생긴 의로 말미암아 네가 의인이 되어서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해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의로운 사람만 합류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는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율법이 있잖아. 그 율법을 지키면 그 의로 인하여 네가 구원을 받는다.” 구약전체를 요약하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야기 끝난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간단하게 끝내는 거예요.
“의롭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하고 살 생각하지 말라. 내가 더러운 인간과 같이 살 더러운 하나님은 아니다. 완전하게 의로운 자여야 된다.
그리고 율법을 숙제로 주는데 율법을 받았다고 해서 의인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다 지켜야 의인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하나님의 뜻은 모세를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이 이야기가 구약이거든요.
구약만 있다고 치고 신약은 전혀 없다고 하고 우리가 교회 세워서 신앙생활 하겠다면 우리의 할 일은 뻔합니다.
구약 펴놓고 숙제검사 하는 겁니다.
“목사든 누구든 이 말씀대로 잘 지켰습니까?” 확인점검 들어가고 진도 어디까지 나갔는데 검사하면 되는 겁니다.
“목사님! 그런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다 예수 믿겠지요.” 그렇게 하는데 다 그런 교회뿐입니다.
그런 교회가 어디 있느냐하고 하는데 다 그런 교회뿐이에요.
그 의도가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기에 구약의 그 말씀도 우리가 무시할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면 되고 그 지시에 따른다는 것은 법대로 살면 되고 법대로 살면서 과연 의로운 열매가 맺혔느냐, 아니면 악한 열매가 맺혔느냐는 자기하기 나름이고 제대로 의로운 열매가 맺혔을 경우에만 천국가고 아니면 지옥 가는 겁니다. 그 판정은 누가 내리는가? 그 판정은 전문가가 내리고 전문가가 누구냐? 교회 목사지요. 목사 자기가 잘못하면? 그러면 좀 곤란하겠네요. 목사의 판단 기준이 틀린다면 좀 난처하지만 어쨌든 교회 목사라 하는 것은 목회하라고 친히, ‘친히’가 중요한데, 친히 세우신 분이기에 감히 평신도가 건드리면 안 되고 주님이 직접 다루실 것이라는 어린애 같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분위기가 되어 있습니다.
일반 집사끼리는 서로 간섭해도 감히, 오늘 ‘친히’ ‘감히’ 이런 용어가 막 나옵니다, 감히 어딜 주의 종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는 말입니까? 있을 수가 없지요. 그것은 굉장히 목사를 우대하는 것으로 보이지요? 사실은 우대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한계가 그것까지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를 믿을 능력을 없고 기껏 한계가 뭐냐, 살아 있고 눈에 보이는 목사를 주의 종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믿는 사람이 맞습니다.‘라는 판정을 따내기 위한 일반평신도의 한계를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주의 종이 아니고 신부의 종이거나 목사의 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제 입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이것이 틀린 이야기가 아니고 맞다고 나선다면 그 다음의 이야기, 6절의 이야기를 봐야 돼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라고 되어 있어요. 제가 8절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분명히 사도바울이 8절에서 언급했습니다만 듣는 우리 입장에서는 당최 이 말을 갑자기 왜 하는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고 의로운 자만 천국에 합류한다, 끝! 이러면 깔끔하게 이야기가 다 끝나는데 왜 8절의 이런 말씀을 또 언급하느냐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모세율법을 그동안 오해했다는 겁니다. 모세율법 가운데서 그동안 ‘율법을 지키면 의롭다.’ 이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에 있는 그 유명한 말씀을 알잖아요. “네가 이것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그 말씀. 복 이야기가 언제 나오는가를 기다리는 교인들에게 신명기 28장은 아주 기쁨의 소식이 되는 거예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는다.” 앞뒤에 있는 것은 다 빼버리고 ‘들어가도 복, 나와도 복.’ 세상에 이런 좋은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모든 말씀을 지킬 경우에만 들어가도 복, 나와도 복인데 그 뒤의 말씀은 뭐냐 하면, ‘들어가도 저주, 나와도 저주가 있다.’는 말씀이 무려 세배나 길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앞에 있는 말씀인 ‘들어가도 복, 나와도 복’ 이 말씀보다 세배나 많은 분량이 ‘들어가도 저주고 나와도 저주받는다.’는 말씀이에요. 따라서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노리는 것이 있어요.
‘내 인생은 언제나 나아지는가, 내 형편은 언제 나아지는가, 내 인생은 언제 대박 나는가? 지금껏 고생했는데 말년은 잘돼야지. 어느 대목을 지키면 내가 천국 가는 것은 기본이고 남은 생애 남한테 기대지 않고 내 힘으로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나? 여기에 부합되는 말씀은 어디 있을까?’ 그것을 찾으면서 먼저 노리면서 들어가기에 구약말씀에서 오해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해를 안 하면 어떻게 되는가? 오해 안하면 말씀을 지켜서 의롭다 하는 구절도 있고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는 구절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경박사들임에도 불구하고 구약을 보면서 그것을 찾아내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왜? 이미 노리면서 들어가기 때문에, 자기가 이미 성경보기 전에 목적을 가지고 노리면서 들어가기에 ‘어디에 그런 말씀이?’ 그런 말씀이 모세율법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 못한 거예요.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만 합격점을 주고 그 사람에게 의롭다, 하는 그 구절도 있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길도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기 때문에 설마 하나님이 한 입으로 두 말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서 하는 말이, ‘서로 상충되고 서로 대조가 되는 두 가지의 통로가 이미 통합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통합되어 있는 것을 끄집어내면 된다는 거예요. 그 구절을 소개하면서 로마서 10장 8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30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기 보기 전에 로마서 10장 8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신명기 30장 14절의 말씀을 인용한 겁니다.
제가 찬찬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입 앞에 말씀이 가까이 왔다고 보면 돼요. 내일이면 빼빼로데이라 과저 먹잖아요. 그러면 초콜릿 묻는 빼빼로 과자가 입에 점점 가까이 오잖아요. 입 앞에 빼빼로과자가 있는 거예요. 그렇게 가까이 있으니까 쏙 입에 넣어서 먹으면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 거예요. 코앞에 어른거리는 그 말씀 확 지켜버리면 말씀을 지킨 것이 되고 지키면 그것이 의가 되고 그 얻어진 의 가지고 의의 나라에 합류할 수 있다, 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그것을 축복으로 본 거지요.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그러면 입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 있는 것인가? 할 때 입이면 입이고 마음은 마음이고, 둘 중에 하나만 해야 될 것인데 성경 신명기 30장 14절에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입에 있는 것과 마음에 있는 것이 다릅니다. 입에 있는 것은 가까이 있다는 뜻이고 마음에 있다는 것은 쏙 들어온 거예요. 말씀이 네 입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 있는 것인가? 입에 있다면 내 마음에 없는 것이고 마음에 있다면 있다면 입에 있다는 그 자리를 떠나서 내 마음에 있는 것이고.
내 마음에 들어왔다면 내가 행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내 입에 있다면 이것을 삼켜야 되는 행함은 발휘되어야 되는 것이고. 어느 쪽이냐는 말이지요. 둘 다 있을 때 말씀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법칙을 적용해 버리면 이것을 따를 것인가, 저것을 따를 것인가, 판단하는 그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도 둘로 분열되기 마련입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이미 인간의 자아는 분열되었어요. 선으로 가면 악이 기억나고 악으로 가면 선이 기억나는 거예요. 여러분도 착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피로감이 누적되어서 ‘착한 일 너무 했는데 슬슬 이제 나쁜 짓좀 해 볼까?’ 하고 갑자기 나쁜 짓이 그리워질 때가 있어요.
시민단체가 봉사 많이 하면 어지간히 나쁜 짓 좀 해도 나쁘다고 하지 않을 거예요. 봉사를 워낙 많이 했으니까. 구제 많이 하면 횡령 좀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나쁜 짓을 너무 해도 그래요. 내가 봐도 너무 심하다 싶을 때는 지하철에 엎드려 구걸하는 사람을 위해서 돈 천 원 짜리 꺼내는 겁니다. 그걸로 자기가 도둑질 한 짓을 슬쩍 상쇄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말입니다. 예배시간에 좀 늦었다 싶으면 헌금 천원 더 보태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가요? 그것도 처음에 한 두 번이지요.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 선과 악은 합치되지 않습니다. 합치되면 어찌되었든 선악과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두 마음으로 쪼갬으로서 네 힘으로 결합될 수 없도록 만든 겁니다. 우리 마음은 결합되지 않지만 우리 몸은 이미 육신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결합된 거예요. 그런데 마음은 갈라졌으니 몸은 하나인데 마음은 둘이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말씀이 입 앞에 있는 것을 원하고 마음에 있다는 것은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갈라진 틈이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도바울은 주님의 계시, 이 뜻에 따라서 신명기 30장 14절을 바꿔버립니다. 무슨 권한으로? 감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사도바울이 주님의 계시에 의해서 바꿔버려요. 신명기 30장 14절의 말씀은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말씀은 네 앞에 있고 네 마음속에 말씀을 지킬 능력이 있으니까 네가 못 지킨다, 못 지킨다, 하지 말고 “이미 너는 행할 수 있느니라.” 할 수 있다!(can, be able to) “너는 그것을 할 수 있다. 왜? 네가 지킬 말씀은 네 코 앞에 있고 그것을 지킬 능력은 이미 네 속에 자생되어 있기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십계명 못 지킵니다. 말씀을 못 지킵니다.’라는 핑계 대지 말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신명기 30장 14절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나 모든 구약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사도바울의 십자가의미를 전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이미 할 수 있는데 왜 미쳤다고 또 믿어요? 제가 서울의존교회 디모데전서 강의할 때 했거든요.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 대목을 설명해 드렸어요.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이 인간이 아무리 그 말씀을 들여다봐도 구원이 안 되는 이유는 어떤 인간도 죄인이라는 것을 본인이 수긍하지 않습니다. 교회 까지 나왔는데 왜 죄인이고 누구 말대로, 누구 말대로 헌금을 하는데 왜 죄인이냐는 말이지요. 헌금을 하는데 그게 왜 죄가 되는가, 그 말입니다. 헌금을 하는데! 제가 헌금하는 것이 죄라고 하거든요. 납득을 못해요, 납득을!
죄인이 안 되고 싶은 충동이 우리 속에 있는 한 우리는 구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왔지 죄인인척 또는 죄인의 모양은 내도 사실은 내가 죄인인 것을 알기에 나는 구원될 거야, 라는 자를 구원하지는 않거든요. 아주 연기자를 길러요. 디모데전서 1장의 말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다고 할 때 그 죄인이라는 개념은 다 예수님이 하실 몫입니다. 우리가 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을 믿게 된 자가 구원된 자입니다. 참 우리가 기독교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칩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떤 음성을 들었다 칩시다.
그 음성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 외에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이거거든요. 부정적입니다. “나 이렇게 하면 들어간다.”가 아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는 그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말은 우리가 어디로 가지 아니하면 죽었다는 그 말이거든요. 하여튼 우리가 이 세상을 떠야 된대요. 어디로 갈까요? 미국으로 갈까요, 호주로 갈까요, 어디로 갈까요? 미국에 가도 거기서도 떠야 된답니다. 미국가도 소용없어요. 러시아에 가도 거기서도 떠나야 된다는 거예요.
떠나야 된다는 그 말에 어떤 말이 함축되어 있느냐 하면, 떠나고 난 뒤에 다시 돌아오게 되면 네가 살던 곳은 없다는 겁니다. 왜냐, 우리가 떠나기 전에 살았던 그 세계는 망상이었기에, 실제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떠나보지를 않았기에 우리는 망상이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꿈은 꿈에서만 꾸고 침대에서 내려오면 이미 현실은 개시되었다고 보거든요. 침대에서 내려와도 그것이 꿈의 연속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떠나지 않는 한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 세상이 꿈입니까, 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소멸되기 때문이라고.
20대 촌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직장 따라 서울에 갔는데 20년 만에 다시 고향에 와보니 고향이 없어졌어요. 4대강공사해서 다 날라 가버렸어요. 고향이 개발되어서 남아 있지를 않아요. 물론 옆집 순이는 말할 것도 없고. 꽃순이는 벌써 20년 전에 올라가 버렸고 꽃순이를 아시나요, 해 봐야 누군지를 몰라요. 느티나무는 벌써 잘려나갔는지 누구 집 정원수가 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이미 없어요. 고향이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예수님께서 고향이 아닌 곳에 다녀가심으로 말미암아 너도 이 세상은 고향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줘서 동감하면서 우리와 동행해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떠나자! 같이 가자.” 하는 겁니다.
이번에 책이 나왔습니다.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 1페이지를 본 사람은 압니다. 허무가 말하기를 “나와 같이 가자. 같이 가면서 왜 헛되고 헛된지, 모든 것이 헛된지를 절감하고 실감하면서 나와 같이 가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전도서는 예루살렘 왕의 가르침이다. 그는 허무를 말한다. 온통 허무를 뒤집어쓰고 우리 곁에 오신 분이다. 우리는 그를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우리가 행복을 찾아다니다 보니 예수님은 우리 곁을 지나쳐 간다. 그분이 우리 보고 “허무야!” 라고 불러줄 때만 우리는 의미를 얻게 된다. 허무한 것들을 살리기 위해서 허무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이 글을 통해서 또다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허무야, 같이 가자.”】
그래서 성경은 뭐냐 하면 여기가 살 곳이 못 된다는 겁니다. 떠나라는 겁니다. 떠날 때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떠날 곳이 없다는 겁니다. 결국 교회 나오겠다는 것은 떠나기 위한 첫걸음이지요. 교회 나올 때는 집에 있는 사람에게 영원한 작별인사를 하고 나와야 돼요. “떠납니다. 잘 먹고 잘 사세요. 이 허망한 세상에서. 나는 소멸하지 않는 세계로 간다.” “어디로 가는데? 너 교회 가잖아. 금방 다시 집에 올 거잖아.” 교회 와서 예수님 말씀 듣고 집에 가 버리면 이젠 그 집이 더 이상 집이 아니고 임시숙소, 임시거처가 될 뿐입니다.
왜? 올 때는 혼자 왔다가 돌아갈 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동행하면서 나그네인생을 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점을 알기에 사람들은 “가기는 가는데 어떻게 갑니까? 구약에는 율법 지켜야 의가 생기고 그 의를 챙긴 사람들에 한해서 천국 간다는데, 그것으로 구약이 전부인데 그러면 날이면 날마다 잘난 존재로 더욱 업그레이드해서 살아가면 되는데 왜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시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 말입니다.
놀랍게도 신명기 30장 14절의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는 말을 사도바울이 로마서 10장 8절에서 뭘 로 바꿨느냐 하면,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여기까지는 같은데 그 뒷부분을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렇게 해 놓았어요. 아니 원본을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 남북정상회담원본이 없다는데 누구 맘대로 원본을 삭제하고 바꾸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무엇이 원본이냐 하는 겁니다. 지금 로마서 10장 8절이 원본이고 신명기 30장 14절은 원본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사본, 사본이 나중에 오는 원본보다 그 원본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찍 온 거예요.
신명기 30장 14절의 “행할 수 있느니라.”하는 것은 사본인데 이 사본은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미리 인간과 접속하기 위해서 미리 제시한 주의 율법입니다. 그 사본에 인간은 걸려들어서 “행할 수 있다, 있다, 있다.” 해 봐야 결국은 선과 악의 균열된 자아로서 행하기에 합치되지 않아요. 인간은 합치되게 못했지만 예수님은 합치되게 한 겁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믿음으로 모든 행함이 완성된 것으로 쳐주시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약의 행하라, 행하라, 하지마라, 하지마라, 이 모든 것도 이미 다 완성된 것으로, “할 수 있느니라.” 그 말에 합격점을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다 충만하게 된 겁니다.
율법을 보면서 율법 내에서 행해서 그 의로움으로 구원 얻는다고 샅샅이 신명기를 찾아보는 그 유대인들, 그 유대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는지를 아시겠지요? 아주 단적으로 결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악마가 그렇게 시켰다는 거예요. 악마가 뭘 시켰는가? 율법에서 통합된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행하라, ‘행할 수 있느니라’, 이것만 보게 하고 그 행함의 모든 것이 믿는 자가 오신다는 사실을, 이 ‘행할 수 있느니라.’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합치될 수 없는 인간으로 발각될 수 있는 순수한 말씀이라는 것을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행할 수 있다고 하니 우리보고 행할 수 있다고 한 줄 알고 자꾸 행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우리보고 지시를 한 그분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하는데 그 마음이 있으려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만남이 이루어지려면 그 만남의 장소가 필요합니다.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말씀이 입에 있고 또 우리 마음에 있다고 했으니까 이것을 행하려고 하면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동일한 마음이 장착되어 있을 경우에만 코앞에 있는 말씀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말이 맞지요? 출제위원과 똑같은 수준 같으면 수능 만점 먹습니다. 그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는가?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돼요.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려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그 일에 성공할 수 있느냐, 그 문제로 문제가 전환됩니다. 오늘 참 복잡한데 하지만 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율법에서 갑자기 만남 이야기로 전환되는 거예요. 만나야 마음이 생기니까. ‘아, 당신이군요.’ 그 만남에 인간이 성공했느냐 하는 것인데 그 만남에 실패한 거예요. 욥기 23장 8절에서 욥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야, 이게 미치는 거예요. 왼편에서 일하는 줄 알면서도 만날 수는 없는 거예요. 심장이 뛰는데 그 심장을 뛰게 하는 손길을 내가 만나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가 오른 편으로 돌이키시나 내가 뵈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보고 싶은데, 보이지는 않으면서 지금 내 심장과 생명은 유지시켜주고, 환장하겠어요. 만나서 악수는 해야 되겠는데, 나를 만드시고 지금 살게 하시고 나중에 영광중에 천국 보내시는 그분을 만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의 가는 길을 그분이 아시는데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라고 욥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만날 수가 없습니까? 만날 수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는 그 방법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께서 우리식으로, 우리가 보는 식으로 만나주지 않는 것은, 주께서 보이지 않는 식으로 나타나시는 이유는 그 보이지 않는 것이 시력이 약하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도저히 상상도 못하는 방식으로만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뭐냐, 폭력입니다. 우리는 율법 잘 지켜서 점잖은 사람, 점잖은 나와 점잖은 하나님과 점잖은 자리에서 점잖게 만나는 것, 우리는 그것만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폭력사건을 통해서 나타날 줄이야, 우리가 싫어하는 그 폭력의 주인공으로 나타날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한쪽은 사람 죽도록 채찍으로 때리고 한쪽은 그 폭력에 의해서 얻어맞는 그 폭력의 현장,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되고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때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여러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폭력적이라고 생각해 본적 있습니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체인 들고 나타납니까? 우락부락하게 생겼습니까? 온 몸에 문신 새긴 우악스런 인간이 산타라고 나타나면 애들이 놀래버립니다.
진짜 신, 이 천지를 만드신 신, 하나님은 온 몸에 상처투성이고 흉터투성이, 사람에게 얻어맞은 잔인한 상처를 온 몸에 드러내면서 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그 방식 외에는 다른 주의 마음도 없고 다른 모습의 하나님도 없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느니라.” 네가 생각하는 점잖은 신은 네가 생각하는 악마가 진짜 폭력적인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임시적으로 조작해낸 이미지에 불과한 겁니다. 폭력의 현장에서 우리가 수사관이라면 우리는 수사에 나서야 됩니다. 누가 이 사람을 때려 죽였는가를봐야 돼요.
누가 때려죽였는가? 수사에 나선 우리가, 수사관 본인이, 강력계형사 본인이, 구원받는 우리가 범인이라니까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갈 길로 갔는데, 우리는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어떤 경우라도 이런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부인하고 갔는데 그 도망친 양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대신해서 아버지께 버림을 받아서 그들을 모든 율법을 다 지킨 의인으로서 우리 마음속에 율법을 완성상태로 바꾸어준 겁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무척 어려운데 뭐냐 하면, 우리가 망원경으로 달을 볼 때 그 달을 보는 순간 달이 내려옵니까? 서로 그 자리에 있으면서 우리가 하늘의 밝은 달을 보잖아요. 우리의 과학적인 세계에서는 달의 자리 고정되어 있고 우리 자리도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움직입니다. 바닷물이 바위를 치면 물결이 하얗게 부서지지요. 그런데 물결만 부서집니까, 바위도 부서집니까? 물결 부서지는 것은 하얗게 보이지만 바위 부서지는 것은 모르잖아요. 우리가 신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주님은 점점 더 깨어지는 모습으로, 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신을 찾아서 구원받겠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주님을 더욱더 아프게 하는 자체가 되는 거예요.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보면 봤다는 그것이 내 마음에 있을 것이고 내가 주님을 봤다는 그 마음이 있으면 내 코앞에 있는 십계명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폭력으로 몰아넣는 그 시도인 겁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같은 품성을 가진 인간의 후예인 우리도 매일같이 동일하게 움직입니다. 기도하면 무슨 결과가 나와야지 기도해놓고 응답이 없는데 기도는 왜 하는가, 하는 식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아프게 생각하고 그것을 주님이 괴롭게 생각한다니까요. 우리가 꿈적거리면 주님은 다 아파요.
왜? 내가 눈에 보고 납득이 되는 식이 아니면 나는 주님의 축복이 아니라 단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기 때문에 그래요. 착한 일을 할 때도 “보세요. 이만큼 했으니 이제 30배, 60배로 갚아주셔야 됩니다.”라는 시도가 항상 연결되어 있다니까요. 우리의 그 시도에서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서 죽었던 그 신, 그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바로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신의 진짜 모습입니다. 보이는 것의 반대말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고 보이는 것의 반대말이 안보고 싶은 것이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의 반대말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피 이야기 그만 하세요, 라고 우리가 더 이상 듣고 싶은 않은 것, 듣고 싶지 않는 이유는 보고 싶은 것이 따로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나의 욕심과 욕망으로 인하여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겁니다. 우리로부터 외면당하는 거예요. 사실은 거기에 의가 있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다.’ 천국은 거기에 있는데, 그게 만남의 장소인데. 우리는 내가 스스로 살기 위한 시도를 하다 보니 만날 수가 없어요. 만날 수가 없는 이유가 있어요. 엉뚱한 신을 찾다보니 안 만나지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그냥 하던 짓 그대로 해라. 내가 방문할게. 내가 방문하는데 그 방문하는 모양새는 너로 인하여 폭력의 희생자가 된 모습으로, 아프게 희생한 모습으로 내가 너를 위해서 방문할게. 그게 예수의 내 마음이 네 마음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은 “제가 행한 것이 구원에 아무것도 도움 되지 않았습니다.”라는 사실을 믿을 때 그게 바로 믿음의 말씀입니다. 방금 긴긴 설교를 했는데 그 긴 설교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서 미리 다 이땅을 헤치면서 다 경험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 예수님이 가르쳤던 제자들, 그들 가운데 일어났던 모든 관계는 지금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리바이벌 되고 있는 중입니다. 바리새인들 욕했던 것, 구약 이스라엘이 배반했던 그 모든 배반의 흔적들이 우리 짧은 인생 가운데서 지금도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계속 될 겁니다. 바로 그 사실을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겁니다. 10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이게 우리의 일상의 생활입니다. 하지만 일상의 생활이 십자가폭력사건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몰랐지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그 일들이 십자가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1장 이야기 다시 해 볼게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이거 교회 한 번이라도 나온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기어이 내가 자진해서 죄인 되기를 원치 않는데 그것은 마귀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 우리 주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의 의만 챙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셔서 바로 그 사실, 우리가 나밖에 모른다는 그 사실마저도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말씀을 완성하는 하나의 재료로서 개입시켰다는 사실,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지만 주님 홀로 이루시는 구원 작업에 말려들어서 같이 구원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활용될 수 있구나.” 죄가 있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빛을 내는데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제자의 자리가 그런 자리에요. 제자들은 철딱서니 없는데 그 철딱서니 없는 자리가 예수님만 증거 하는 사도의 자리로서 다 전환되는 겁니다. 우리도 같은 절차를 지금 밟았습니다. 지금 밟고 있습니다. 이 고귀한 자리, 말씀의 자리, 누구에게 영광 돌려야 되고 감사해야 됩니까?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교회 올 때 생각합니다. “하나님, 저를 보호하소서.”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자신만 보호하지 우리 자신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고 주를 통해서 주께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자기밖에 몰라요. 우리는 흉내 내서 ‘나는 나밖에 모른다.’ 하다가 얻어맞지요. 얻어맞는데 그 전에 하나님 먼저 얻어맞고 그 다음에 우리가 얻어맞습니다. 우리의 고향은 우리가 정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의 천국을 만들어놓으시고 우리보고 가자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합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느니라. 떠나라. 세상은 하나의 꿈이었단다. 네가 현실로 보지만 그 현실은 곧 소멸될 현실에 불과하고 영원한 것은 천국밖에 없기에 내가 일부러 이 땅에 뛰어내려왔다. 그리고 너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너의 본색을 드러냈고 너희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주께서 귀하게 여겨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십자가의 부활로 세상을 다시 읽어봐라. 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측정해라. 십자가와 부활입장에서 네가 살아온 인생을 다시 봐라. 너의 역할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말씀 앞에서, 주님 십자가 앞에서 죄인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구원받는 것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예수님 증거”로서 내가 가야 될 곳은, 내가 정하지는 않았지만 주께서 정해놓은 가야될 그 고향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지금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마음껏 죄를 지으시기 바랍니다. 끝이 이상하지만 하여튼 마음껏 죄를 지으시고 마음껏 십자가피만 자랑하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엉뚱한 하나님, 점잖은 하나님, 착한 하나님, 우리가 조작한 하나님인 것을 성령이 오고 십자가 영이 와야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내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인도하시는 인생이기에 범사에 감사하게 하시고 특히 하나님 스스로 보호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저희들이 보호대상으로 가담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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