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먹는 기쁨
2023년 2월 1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6:9-11
(6:9)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를 땀 같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시나니
(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6:11)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예레미야가 말을 하면 사람들은 자기들 보고 ‘욕한다’고 받아칩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 속에 백성들로부터 욕얻어 먹을 내용만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백성들로부터 미움받을 내용을 전하라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선지자 계열을 따라 최종 메시야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특별한 개인입니다. 새로운 보편성을 개시할 분이십니다. 기존에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전복(뒤엎음)시킬 분이십니다. 메시야가 인간들에게 최종적으로 보여줄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입니다. 이 사실이 그냥 겁주기 용도가 아닙니다. 정신 차려라고 훈계쪼로 주신 말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완벽하게 끊어져 있음을 특별한 개인인 메시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메시야 오기 이전부터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확정난 사실을 미리 알려주는 사명을 수행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확정된 것에 대해서 욕으로 대처하니 더욱더 과연 망할만한 자들이라는 점이 들통난 겁니다.
그 시대에 있는 자들은 아직도 최종적이고 확정된 것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최종성에 무지하다는 것은 지식이 모자란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도 자신에게 희망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못 놓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여전히 자기가 잘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과거로부터 유입된 기존의 보편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도하는 보편성은 기존의 보편성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끊어진 보편성입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인간과 하나님께서 끊어져 있다는 요소는 그 전의 시대에 이미 선지자의 내용에 대해 욕을 퍼붓는 현상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십니다. 한 분에게 일어난 일이 최후의 시대의 보편성으로 작용되는 그 사실을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즉 특별한 한 분을 뽑아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나서신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단호하게 처벌받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로서 모든 인류의 운명은 확정났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사실이 우리에게 욕으로 들릴까요 아니면 기쁜 소식, 곧 복음으로 들릴까요? 만약에 복음으로 들린다면 이 사람의 삶은 가볍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발설할 때, 욕으로 대응하는 것에 대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겁니다. 즉 어떤 이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그 사실이 곧 자신을 대신 보여주기 위한 조치인 것을 아는 사람은 더는 자신에 대해서 기대를 걸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을 제공하게 됩니다.
안약을 넣으려면 안경을 벗어야 하듯이 자기를 보호하는 것들이 벗겨져야 하나님의 최종 확정된 말씀이 들려집니다. 이미 인간은 망하기로 되어있고 여기에 그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인간이 처한 운명이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그렇디 않고 반항한다는 이는 복음이 자신을 향해 욕하는 것으로 들려질 겁니다.
평소에 인간은 끊임없이 신을 향하여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해당되는 답을 구합니다. 그런데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다면 어떻게 할겁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던지는 질문 자체가 틀렸음을 지적하십니다. 즉 인간들이 질문하기 전에 답부터 선지자를 통해서 전달하는 방식으로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인간은 질문대신 욕을 선지자에게 해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근원적으로 인간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본인들이 본인들에게 유일무이한 특별한 개인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점은 구약 욥에서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욕을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이 막상 욥에게 고난이 찾아들자 욥은 참지 않고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네 번째 친구 엘리후는 욥의 이러한 점을 보고 사정없이 욥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이제 너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욥 35:16) 욥이 말이 많아지게 된 것은 욥의 육체에 대해 직접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 찾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정신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실제적으로 자신의 육신 자체가 아팠던 겁니다. 자신이 아무리 몸부림 쳐봐자 자신의 육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부정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즉 악마가 후려치는 고난은 욥으로 하여금 점점 자신이 자기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여기에 대한 본능적 반응은 하소연을 하나님에게 많이 하는 겁니다.
이는 평소에 욥이 어떤 자세로 자신의 육신의 가치를 지켜놨는가를 드러내게 합니다. 즉 반듯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육체가 해악을 입지 않을 것이라는 가치관을 갖고 살아왔던 겁니다. 그게 하나님이 허락한 고난으로 인해 무너져버린 겁니다. 욥에게 마지막으로 직접 하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여기에 대한 욥의 반응은 즉각 나옵니다. 그것은 “제가 너무 많이 많았습니다.”입니다.(욥 42:3) 하나님께서 말씀을 많이 하시자, 욥은 한 마디로 대꾸하지 못하고 잠잠해졌습니다. 즉 더는 욥은 욥 자신을 비난하거나 저주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육체는, 진리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알 수 없는 무지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는 취지도 이와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1이 아니라 0으로 만드시려는 겁니다. ‘있음’에서 원래 ‘없음’으로 돌리시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허락하셨지만, 성전을 그저 껍질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웅장하거 성스러운 성전이지만 이스라엘 마음 속에 율법에 의해서 조정받는 바가 성사되지 않는다면 이 성전에서 도리어 추방될 것이라고 미리 경고하십니다.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왕상 9:6-7)
오늘날 성도의 육신과 마음이 곧 성전입니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말씀 완성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마음 안에 이미 완성된 말씀이 들어 있지 아니하면 그 인간은 저주받습니다. 이 화정된 말씀 안에는 인간은 결코 하나님과 관계할 최종적인 특별한 존재가 아님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가 곧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완성된 말씀이 작용하는 터전으로 받아들여서 우리의 가치가 튀어나올 때마다 주님께서 지적하시는 그 활동을 맛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8강-예레미야 6장 9~11절(욕 먹는 기쁨)23021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6장 9~11절입니다. 구약성경 1059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를 땀 같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시나니,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선지자의 존재는 항상 멸망되기 전에 선지자부터 먼저 보냅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나타났다 하면 ‘아, 이제 끝났구나. 세상 끝났구나’라고 이렇게 여기시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이 끝났다는 것이, 우리가 망했다는 것이, 이게 과연 슬픈 소식일까요?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대답은 ‘아닙니다’ 사람의 인생이 힘든 것은 최종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확정된 것을 모르기 때문에 힘든 겁니다.
뭔가 아직 여지가 남아있으면 그만큼 인간은 불안하고 두렵고 공포스러워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개인에게 모든 인간에게 확정된 운명을 그분을 통해 다 보여주었습니다. 그 특수한 개인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사실을 확정지었습니다. 그리고 확정 지은 예수님 이전에 누구를 보냈는가?
선지자를 보내죠. 선지자를 보내서 선지자 계통을 통해서 예수님 계통으로 이어지거든요. 그러면 선지자는 그 시대에 사람들로부터 욕이란 욕은 대단히 얻어먹습니다. 그 욕이 오늘 본문 10절에 나옵니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라고 되어있어요. 욕으로 여긴다. 왜 선지자의 말을 욕으로 여기는가. 선지자는 최종적인 것을 알고 있고, 선지자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직도 어떤 여지가 있다고 자꾸 생각하고 최종적으로 가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선지자는 욕을 얻어먹어도 이건 확정된 거니까 자기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자기 위주의 안경을 쓰고 보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안약을 넣으려면 안경 벗고 안약을 넣어야 해요. 자기 안경을 벗어야 안약을 집어넣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모를 때 결국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신 영생, 구원, 천국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접근하면 그 세계에 갈 수 있느냐는 이것을 우리들 입장에서는 듣고 싶은 거예요.
자꾸 욕이나 하지 말고, 자꾸 화내지 말고, 질책하거나 책망만 늘어놓지 말고, 어떻게 하면 그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그 방법을 알려달라는 거예요.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겁니다. 알려드릴게요.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여러분이 한번 맞춰보세요. 2500 킬로그램의 고래가 100 킬로그램의 오징어를 먹었어요. 거기에다가 고래가 100 킬로그램의 알을 낳았어요. 그러면 고래가 몇 킬로그램일까요?
이게 우영우 변호사 나오는 드라마에서 발췌한 이야기거든요. 이 문제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고래는 새끼를 낳지 알을 낳지 않거든요. 이것은 바로 내가 듣고 싶은 그 질문과 말이 이미 내가 잘못된, 망해야 할 인간에게서 나온 질문이라는 겁니다. 내가 궁금하고 ‘내가 선악과 과일 따 먹고 싶다’라는 그런 의욕을 마귀로부터 부추김을 받는 그 자체가 이것은 옳지 않은 겁니다. 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따먹고 안 먹고는 나중 문제이고 ‘따먹고 싶다. 그걸 얻고 싶다’라는 그 자체가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그 영생의 세계에, 천국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방법을 한 번 보세요.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가운데 특별한, 특수한 개인을 따로 뽑아내요. 여러분은 이것만 아시면 됩니다. 나 말고, 내가 궁금한 것 말고, 내가 원하는 것 말고, 우리 말고, 우리 대신 특수한 한 분을 딱 뽑아서, 그분과 하나님과 뭔가 일을 벌입니다.
그러면 확정된 거예요. 오케이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나 말고 다른 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나를 대신하는 관계인 거예요. 한 사람의 그 특수한 운명이 전체의 운명이 된다는 것이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라고 나옵니다. 한 사람, 샘플로 뽑은 한 사람이 죽었는데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네가 한평생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주목하지 말고, 내가 뭘 하고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뭘 열심히 하는지 그런 거 주목하지 말고, 너 말고 예수님이라는 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What happened?’, 도대체 그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란 말이죠. 가장 창의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말을 봉준호 감독이 했어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이 말을 한 거예요.
‘가장 창의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다’라는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한 사람이 없는 데서 어떤 창의적인 일을 만들면 그때부터는 그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보편화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특수한 한 사람에게 일어난 그 일이 우리가 그렇게 궁금해하는 ‘천국은 어떻게 들어가나, 지옥은 어떻게 생겼나, 사람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라는 식으로 자꾸 우리 자신을 거기에 집어넣으면 안 돼요.
우리 자신을 집어넣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우리는 알을 낳지만, 주님은 새끼를 낳잖아요. ‘내가 어떻게 합니까’라는 질문은 애초부터 하늘나라에서 거부당합니다. 너는 그런 질문할 자격조차 이미 박탈당한 것을 왜 모르느냐. 질문은 너와 하는 것이 아니야. 질문은 내가 선택한 내 언약 상대자와 질문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에게 선택된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그 일, 그 일이 바로 우리가 모르는, 우리를 덮치는 큰일로 여기자는 거죠.
터키에 지진 나듯이, 개인적 일을 완전히 묵사발 내잖아요. 지진이라는 그 앞에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은 거기서 안 통합니다. 시리아와 반군과 싸우고 있지만, 그 삐진 시리아 대통령이 지진 때문에 반군 지역까지 오잖아요. 아르메니아와 시리아가 서로 국경이 닫혀 있지만 지진 때문에 풀리잖아요. 꽉 닫혀 있는 내 마음, 나는 나만 위해서 산다는 내 마음이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지진으로 인해 그게 열리는 겁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우리를 욕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은 이미 우리가 닫혀 있다는 말이고 그렇게 욕으로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고 들어와서 예레미야의 말씀이 이제는 욕이 아니고 복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우리 안에 이루심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이제는 내 안이 내가 노는 마당이 아니고 주께서 노시는 마당이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예수님을 증거 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것은 평소에 자기 자신을 증거 하는 그동안 평소에 내가 살아왔던 방식, 내가 나를 증거 하는 그것은 주님에 의해서 그게 다 욕 얻어먹을 짓이 된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인정해야 하죠. 가장 창의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이 말은 ‘0’이 ‘1’보다 앞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0’이 없다는 겁니다. ‘0’이라는 것은 없는 것을 표현하는 숫자가 ‘0’이기 때문에 ‘0’은 없어요.
항상 있는 것은 ‘1’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없는 것이 ‘1’보다 더 앞선다는 것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지진이라는 큰일이 우리 사소한 일을 덮친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평소에 무심코 이런 큰일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놓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놓고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내가 뭘 하면 사랑을 받겠습니까? 자꾸 후차적인 나의 일부터 시작해서 큰일에 도달하려는 그러한 성향을 우리가 계속 보이는데 그건 계속해서 우리가 욕을 얻어먹어야 해요.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욕을 먹어야 해요.
제가 노래 가사를 한번 들려드릴 테니까 이 가사에 담긴 의미가 얼마나 깊은지 들어보세요. 그냥 쭉 읽어드릴 테니까 이게 깊은지 얕은지 잘 모르셔도 그냥 들어보세요.
찬바람이 불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
스쳐 가는 바람 뒤로 그리움만 남긴 체
한때는 내 어린 마음 흔들어 주던
그대의 따뜻한 눈빛이
그렇게도 차가웁게 변해버린 건
계절이 바뀌는 탓일까요
‘찬바람이 불면’이라는 노래 가사입니다. 김지연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거든요. 찬바람이 불기만 하면 유행했던 노래예요. 그런데 여기 한번 보세요. 찬바람이 부는 것은 우리 바깥에 큰 범주예요. 시베리아에서 북서풍이 불어오는 거지 우리 사적인,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겨울 되면 찬바람이 북서풍으로 불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찬바람이 불면 우리는 ‘아, 춥다’라고 이러면 되는데 무엇과 연관을 시키느냐 하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라는 사적인 문제와 연관시켜요.
‘한때는 내 어린 마음 흔들어 주던, 그대의 따뜻한 눈빛이, 그렇게도 차가웁게 변해버린 건, 계절이 바뀌는 탓일까요~’라고 하는데 계절이 바뀐 탓이 아니고 너의 탓이에요. 우리가 너무 개인적인 문제, 내 여린 마음을 누가 좀 따뜻하게 보듬어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언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느냐면 찬바람이 불면 나타나요. 찬바람이 불면, 찬바람과 아무 상관도 없는 내 일에 열중해 있다는 사실이 폭로 당하는 거예요.
제가 왜 ‘찬바람이 불면’이라는 가사를 이야기하느냐면 주님의 욕은 항상 그런 식이에요. 네가 너의 문제에 너무 몰두했다는 거예요. 제가 지난 강남 강의에서 후반부에 그런 이야기 했어요. 주님의 응답은 딴 게 아니에요. ‘네가 말이 많구나’ 우리는 왜 그리 말이 많은지요. 우리 교인들은 말이 너무 없어서 그것도 문제가 되는데. 뭐 기도하면서 ‘주여, 이것도 어렵고, 저것도 힘들고’라고 주저리주저리.
그렇다고 기도를 안 해도 자기 마음속에 방향이 항상 자기 쪽으로 향하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욥기에 보면 결국 욥이 깨달은 것은 ‘네가 말이 많구나’라는 이 한마디에 은혜받았어요. ‘제가 말이 많습니다. 앞으로 입 다물게요’ 말을 할 가치도 없는 것이 자꾸 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질문을 하나님이 응답해 주기를 원하는 내 주장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우리는 자꾸 하나님께 말을 겁니까? 그것은 자기가 정답이라고 우기고 싶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인간에게는 욕이 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에게 욕할 수밖에 없어요. “말이 많구나” 이게 욕이거든요. 내가 주는 대로 먹고, 살 때까지 살면 그러면 되잖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부패 식물이 있습니다. 장을 만드는 발효식품 사업인데요. 된장, 고추장, 간장, 이런 장들은 곰팡이로 썩어야 해요.
콩이 썩어야 맛이 나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썩도록 하시는 거예요. 썩을 때 잘 안 썩잖아요. 주께서는 욕을 퍼부을 수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서 욕을 하는 취지가 무엇이냐 하면 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너에게는 네가 아주 대단한 존재이고 특별한 존재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나 말고 그러면 특별한 존재가 누가 있습니까? 나 말고 예수님이잖아요. 그렇게 쉬운 이야기를, 이게 얼마나 쉬운 이야기입니까. 성경을 천 독 백 독 한다고 이게 알아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20장 8절에 보면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말할 때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이 나라가 망한다, 끝났다, 이런 말만 섞어서 이야기하라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끝났어. 희망은 없어’라는 이야기를 섞어서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왜냐?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왜 이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냐. 확정되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것이 확정된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희망? 그따위 마귀 유혹에 넘어가지 마세요. 인간은 희망 없습니다. 내 희망? 안 가져도 돼요. 가져도 소용없기 때문에. 확정된 것을 알아야 해요.
확정된 것이 뭐냐 하면 한 사람을 죽여서 그 사람의 죽음의 힘에 의해서 부활의 힘으로 말씀을 주어서 말씀으로 그 사람을 깨어나게 하는 거, 그거 확정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예수님을 죽여서, 그분이 죽어서, 그분이 이루신 일을, 이제는 죽어가고 있는, 아직까지 확정된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어서 살아난 그분의 삶, 부활의 능력을 우리에게 말씀을 주게 되면 그 말씀과 더불어 우리에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작용해서 하나님 예수님 덕분에 살게 하는 거, 이게 확정된 거예요.
그러면 그 확정된 절차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절차에 들어가느냐. 우리는 ‘말이 많구나’라는 욕 얻어먹는 절차에 들어가면 되잖아요. 이게 즐겁지 않습니까? 이게 기쁘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주께서는 거기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 인생을 가볍게 합니까. ‘내가 오늘 집사님에게 말을 잘못해서 어쩌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을’이라고 후회할 자격조차 없어요.
‘주님, 제가 오늘 집사님께 너무 못된 말을 했지요?’라고 하면 주께서는 ‘말이 많구나’라고 호통하시죠. 왜 자꾸 자기에게 신경을 쓰냐는 말이죠. ‘하나님, 제가 저 남편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10년 더 살겠습니까?’라고 하면 주께서는 ‘말이 많구나’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게 확정된 것이 아니잖아요. 찬바람 부는데 왜 자꾸 엮일 필요도 없는 네 사정을 자꾸 엮으려고 하느냐는 거죠.
예레미야 20장 9절을 또 보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왜냐 하면 말만 하면 그쪽에서 자꾸 달려드니까요. 그런데 말 안 하고 싶은데 이 말은 내 말이 아니고 주의 말이니까, 지금 듣고 계신 여러분 평소 생활과 똑같죠? 말 안 하고 싶어도 말씀이 자꾸 터져나오니까 멈출수가 없어요. 마치 딸꾹질 같아요.
다들 아시죠? 오가며 차 안에서 자꾸 딸꾹질하시잖아요? 포항에서 오면서 계속, 안 할 수가 없어. 이쪽은 들어주시고 이쪽은 계속 딸꾹질하시고. 그 병이 언제까지 갈지 두고 볼게요. 이게 도대체가 멈출 수가 없어요. 계속 읽어볼게요.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나와요. 그런데 예레미야 20장 10절이 중요해요.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그러니까 무리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예레미야 고소할 거야. 나도 고소할 거야. 나도...’라고 하면서 그들이 예레미야가 언제 타락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하고, 예레미야 지가 뭐가 잘났다고, 저거 언젠가 유혹받아서 타락할 거야, 우리가 그를 이겨 원수를 갚자고 하면서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참, 예레미야에게는 고통이죠. 그런데 예레미야가 그 시대에 특수하게 뽑혀 나온 사람인 것을 감안합시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바라보면서 이제는 ‘예레미야 안 됐다’라고 동정하지 마시고 바로 예레미야와 함께 하는 저 하나님이 내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진짜 하나님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경험하는구나. 예레미야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21세기에 예레미야가 되고, 대구에 예레미야, 부산의 예레미야, 서울의 예레미야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말하고 싶은 우리의 인생, 우리의 육체는 어떻게 되는가. 그거는 해답이 나와 있어요. 열왕기상 9장 7~8절에 나와 있어요. 열왕기상 9장 7절은 열왕기상 8장에서 성전이 완공돼요. 성전이 완공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겁니다. 기브온에서 전에는 꿈에 나타났는데 여기는 실제로 나타났어요. 나타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6~7절 보겠습니다.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그러니까 우리 육체라 하는 것은 일종에 성전이거든요.
하나님이 주신 거 맞아요. 이빨, 머리카락, 몸, 손, 건강, 이 모든 게 하나님 주신 거 맞습니다. 하지만 육체가 하나의 성전이고 그 안에 말씀이 있어야 해요. 껍데기 같은 성전, 내 몸이 나를 지켜야 하겠다는 것이 어디에 근거해서 결정되느냐면 내 안에 말씀이 제대로 말씀대로 드러나는 것에 방해되느냐, 아니면 이것이 작용 되느냐가 결정되는 거예요.
감사하게도 신약에 오면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에 대한 모든 다 이루심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비록 우리 육으로의 성전은 날아가도 새로운 성전, 하나님의 영광된 예수님의 하늘의 있는 성전의 영광은 우리에게 말씀 완성된 그곳에 덧입혀질 것입니다. 이게 말씀의 영광이에요. 이게 최종적이고 확정된 거예요. 말씀을 그냥 보지 마시고요, ‘앞으로 잘 될 거야. 열심히 해야지’라고 이렇게 보시면 이건 이단이고요, 그렇게 보지 말고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과 지금의 나의 어설픔과 연결시켜서, 이제는 주의 확정된 것이 내 위주로 살아가는 어설픔을 뭉개고 욕하시는 그 기쁨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제발 누가 나 좀 욕했으면 좋겠다’라는 즐거움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에게 욕 얻어먹지 말고 주님에게 날마다 욕 얻어먹는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다 이루었는데 뭘 걱정하냐는 그러한 꾸지람이 우리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