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니요
2023년 1월 2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26-29
(5:26) 내 백성 너희 중에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의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5:27) 조롱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창대하고 거부가 되어
(5:28) 살찌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송사를 공평히 판결치 아니하니
(5:29)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복수하시겠다고 나섭니다. 이는 그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께 대적하는 요인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골적으로 하나님에게 대적하면서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인간들을 상대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적인지 아니지를 가름하는 기준을 이스라엘 내부에 마련하셨습니다.
잠언 14:31에 보면,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같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모두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즉 올바른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그 외의 것을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모두들 같은 형편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조직내에서도 하나님의 적이 있어 하나님께서 친히 보복에 나서겠다는 것은 인간들로서 제대로 그 하나님의 적을 뽑아낼 능력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개인적으로 차이가 나도 모두 같은 하나님 믿는다면 설마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징벌할 리가 없다고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보는 것과 다른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왜 ’가난한 자를 학대했느냐“라는 겁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 정상적으로 이스라엘이 굴러가는 것이 아닙니까? 같은 인간들을 어떤 식으로 대하든 그것은 큰 문제될게 없는 것이 아닐까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장차 이 지상에 오실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같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신다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대부분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장 세우면서 자신의 야욕을 채우는데 이용합니다. 그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위의 권세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을 주신 증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원칙이 짓밟히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이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왜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내리시는지 인간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 가난한 자로 오실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평소 일상을 통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인지를 밝혀내시려고 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학교 운동회 할 때, 앞만 보고 냅다 질주합니다. 뒤에 엎어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도리어 고마워합니다. 그만큼 자신이 앞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엎어진 자가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래놓고 하늘에 영광스럽게 거룩하게 계신다고 여겨지는 하나님을 상상하면서 자기에게 하자없다고 우기실 겁니까?
하나님께서 소위 여호와 하나님을 다같이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스라엘 내부에서 자신의 적을 발췌해 내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내부에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심성을 담기 위해 그들의 세상적인 심성을 도려내기 위함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나-상실’ 상태로 만들려고 하시려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 것으로 꾹꾹 눌려담듯이 지니고 살아간다면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그는 빈 마음 상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신앙이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당신은 당신의 고된 인생과 자신의 죽음에 억울한 감정이 있습니까?”
사람이 뭔가 세상에 대해 억울한 감정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제대로 ‘나-상실’이 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자기만 쳐다보며 자기를 지키는 식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기 자리에 머무는 삶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찾아나서게 된 삶으로 독촉받습니다. [헨델과 그레텔]이라는 동화에 보면 새엄마가 아이 둘을 산에다 버립니다.
그러나 애들이 빵조각 대신 돌을 떨어뜨려 놓아서 기어이 아버지집에 찾아옵니다. 동화에서는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능력으로 아버지집에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자기 성공 경주에 심취하고 몰두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가 상실되기는커녕 성공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메시야를 만났던 신약의 성도들도 자기 챙기는 식으로 살았던 가요? 세례 요한의 경우, 그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다른 자들에게 자꾸만 ’나 ∼ 아니요‘라는 식으로 일관합니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요 1:20)
그리고 요한복음 3:30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왜 세례 요한은 이런 말을 합니까? 자신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애초에 무의미한 자기 자신을 자꾸만 긁어모아 의미있게 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자기 것으로 채우려는 행위입니다.
나다나엘 호손이 지은 단편소설인 [큰 바위의 얼굴]을 보게 되면, 마을 뒷산에 있는 사람 형상을 한 큰 배위의 인물이 언젠가는 우리 마을에 나타나 이 마을을 크게 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같은 것이 대대로 흘러내려 옵니다. ‘어니스트’라는 꼬마도 어릴 때부터 이 믿음과 희망을 품고 그 마을에서 줄곧 살아갑니다.
그가 성장하면서 온갖 사람들이 마음의 영웅 행세하면서 찾아듭니다. 개발업자도 있고, 정치가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마을 사람들에게 결국에서 실망을 알겨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이 우선이었습니다. 드디어 고대하는 영웅을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고 ‘어니스트’는 백발노인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황혼이 깃든 때, 큰 바위 얼굴에 비친 노을 빛이, 늙은 백발이 된 어니스트 얼굴에도 비췄습니다. 사람들이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 마음의 큰 바위 얼굴의 영웅은 바로 그 큰 바위를 기다린 당사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는 큰 바위를 기다린 일반인이기에 자신은 ‘나 영웅 아니요’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린 진정한 메시야는 이처럼 사람들이 무시당하기 위한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날 성도는 늘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 성공을 게워냄을 당한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우리로 인한 무시당하신 예수님만 계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5강-예레미야 5장 26~29절(나 아니요)23012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장 20~25절입니다. 구약성경 1059페이지입니다.
“내 백성 너희 중에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군의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조롱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창대하고 거부가 되어, 살찌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송사를 공평히 판결치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보복한다, 복수한다”라는 것은 같은 편에 속했을 때, 주님이 같은 편을 힘들게 했을 때 상대방에게 취하는 조치이죠. 하나님이 누구와 함께 있느냐, 하나님이 함께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 그 사람들이 여기에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고아와 빈민, 가난한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깔아놓았습니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깔아놓은 것은 그 지뢰를 밟으란 말이죠.
그 지뢰를 밟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오늘 본문 27~28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창대하고 거부가 되어, 살찌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라고 나와 있어요. 욥기에 보면 8장 7절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고 나와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 창대하리라 할 때 그게 욥이 한 말이 아니고 욥을 비난하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왜냐 하면 그 당시 욥은 형편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친구가 위로한답시고, 격려한답시고 ‘네가 지금은 형편없이 되었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네가 제대로 살면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도 나중에는 창대해질 것이다.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라는 식으로 친구 빌닷이 이야기했어요. 그 친구의 말은 잘못된 겁니다. 인간에게는 잘못된 말이 세상에서 어찌 그렇게 유명한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빌닷이 그렇게 말할 때 의도적으로 한 가지를 숨긴 것이 있어요. ‘나처럼 될 수 있다면’ 그러니까 욥 너는 벌 받는 것이 마땅하고 나는 지금 복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게 이 세상을 사는 즐거움 아니겠습니까? 잠언서 14장 31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 우리는 아주 불쾌해요.
아예 가난한 사람을 없애버리면 우리가 하나님이 깔아놓은 지뢰를 밟는 일도 없지 않겠느냐. 다 부자 만들면 하나님께 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할 자도 없을 텐데, 일부러 가난한 사람을 만들어놓고 ‘너는 왜 가난한 사람을 학대했느냐?’라고 하시면 이건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려고, 의도적으로 세상을 공격할 빌미를 만드시려고 하신 것이 되니까, 하나님의 행위가 당당하지 못하다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 점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가난하게 오셨다는 사실, 학대받는 분으로 오셨다는 사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위에 계시니까 잘 먹고, 잘살거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도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 복 받아서 하나님처럼 잘 먹고 잘사는 식으로, 지금 방향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복이라는 식으로 너도나도 전부 다 질주하고 있어요.
유치원 아이들이 운동회 할 때 50미터 달리기해서 1등 하면 공책 주고 한다고요. 요새도 그렇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준비~~땅!’하고 달리잖아요. 달릴 때 죽으라고 달리죠. 엄마나 할머니는 고구마 하나 들고 일등 하면 준다고 유인하면서 같이 막 달리는데 뒤에 아이는 달리다가 자빠질 때 ‘아이고, 저 누구 집 아이고? 안 됐다’라고 하면서 달리는데 그 자빠진 분이 주님이에요. 그게 하나님이에요.
모두가 지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어요. 사람들은 잘 되는 것이 복이라고 함으로써 복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치기해놓은 겁니다. 복은 가난하고 부자고 하는 것으로 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채는 그것이 복입니다. 그게 영생이에요. 그게 요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나와 있어요.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지금 아들을 모르니까 아버지를 모르는 거예요. 아들 제치고 하나님 안다고 우기는 자들이 대다수인데 그것은 너무 터무니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신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알아야 저곳에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 오늘 본문대로 본문을 다시 한번 보면 예레미야 5장 26~27절에 “내 백성 너희 중에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군의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조롱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집에 소위 가진 자들이 없는 사람을 빼먹기 위해서 사냥꾼이 사냥하듯이 딱 덫에 걸리도록, 사기 치도록 한 거예요. 돈 없는 사람들 돈을 훔치기 위해서 빌라왕 앞장세워서, 아무 자본도 없으면서 이쪽에 전세보증금 받아서, 저쪽에 다른 빌라 사서 다시 전세를 주니까, 이쪽은 나중에 전세금 못 돌려받는 식으로 사기를 친 거예요. 깡통전세 집 줘서 망하게 하는 거죠.
그게 덫이거든요. 이렇게 덫이 있는 세상에서 오늘 본문대로 한다면 주님이 인간들이 만든 덫에 의도적으로 걸립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주님은 ‘네가 잘 되기 위해서 어려운 사람에게 덫을 놓느냐. 그러면 내가 그 덫에 걸릴 게’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에요. 왜 덫에 의도적으로 걸리느냐 하면 그래야 내가 잘 됨으로써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겁니다.
여기는 부자가 없으니 맘 놓고 이야기합니다만, 내가 부자 됨으로써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어요. 복음이죠. 내가 잘살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어요. 이걸 아주 어렵게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의미가 없는데, 의미 없는 것을 잘난 체하려고 의미를 주섬주섬 모으는 순간 우리가 의미 없다는 사실을 잃어버려요. 놓쳐버려요. 의미 없는데 그저 환상이고 자기 착각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방법은 파괴하는 겁니다. 시편 127편 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그 뒤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그러면 주께서 세워주시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2절에 보면 그게 아니에요.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나와요. 무의미한 것이 자기한테 의미 있는 인생 메카니즘(mechanism), 그러니까 의미화 메카니즘 행세를 하는 거죠. 의미 없는 것이 의미 있는 행세 하려고 밤늦게까지 수고하고 애써보았자 그건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헛되도다. 내가 헛되게 만들어 줄게. 새로 시작하자”
아까 어떤 권사님이 그런 이야기 했어요. ‘이 나이 되어서 설날 되었는데, 나는 시댁도 없고 친정도 없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주 기분이 좋아서 하시는 말씀이죠. 갈 데가 없다는 거죠. 시댁도 없고 친정도 없다. 새로 시작하신다는 뜻이죠. 새로 시작해야 해요. 아무것도 없는 무의미부터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새로 시작하라고 주님께서 이 땅에 아무것도 없는 분으로 오셨거든요.
그러면 새로 시작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있는 것들을 부숴버려야 해요. 성도는 거기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지면 안 됩니다. 저는 많은 사람이 신앙인이라, 성도라 하는데 제가 일방적이긴 한데 생각하는 기준이 있어요. 저 사람이 신앙인이냐 성도냐를 판결하는 기준은 딱 이 질문 하나입니다. ‘당신의 고생과 죽음이 억울하십니까? 당신이 이 땅에서 고생하신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억울하지요. 내가 얼마나 수고하고 애썼는데 고작 이것밖에 못 건지고...’라고 하면 그건 아니에요. 당신은 성도가 아니에요. 당신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당신 아이가 이태원에 가서 까불다가 귀신 놀이하다가 죽은 것이 억울하십니까?’라고 물을 때 ‘억울하지요’라고 하신다면 그건 억울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억울함이 성립 안 되는 존재예요. 그 정도로 우리는 무의미해요.
어떤 여자분이 어떤 남자와 사귈 때 남자가 ‘네가 나한테 시집오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게’라고 했는데 그 여자분이 어디로 시집간 줄 알아요? 진해에 고기 잡는 집안으로 시집갔어요. 진해 바다 쪽으로 시집갔어요. 물도 보통 물이 아니고 파도가 쳐요.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두 번 죽입니다. 나를 대단하게 만드는 게임에서 패배자로 만들어 버려요.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게임을 해요. 놀이하거든요.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게임을 하는데 항상 승자가 되는 가능성 보고 그 게임에 뛰어듭니다. 취직하는 것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다 게임이에요. 게임인데 거기 주인공인 내가 ‘봐, 나 안 죽어야 하잖아. 고생 안 해야 하잖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요. 된 통으로 루저(loser), 패배자가 되게 만들어요.
실제로 그런 드라마가 있었어요. 환상의 커플이라는 옛날 드라마인데 거기 여자 주인공 역할을 한예슬이 맡았는데 이름이 너무 가슴에 와닿는 거예요. 참 복음적인데 성은 ‘나’ 씨고 이름은 ‘상실’이에요. 나 상실. 내가 상실되었어요. 물에 빠지면서 보트에 머리를 부딪쳐서 나의 기억이 하나도 없는 기억상실증에 걸렸어요. 그래서 그 여자를 구해준 게 오지호가 연기한 남자 주인공, 장철수예요.
보기에는 귀해 보이는 여잔데 이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과거도 다 잃어버리고. 그래서 이름을 지어줬어요. 나 상실. 나를 상실했다는 것이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그걸 어려운 말로 공백이라고 합니다. 빈자리. 나 상실이니까 뭐가 안 되냐 하면 억울한 죽음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공백에다가 뭔가 외부에서 새롭게 투입이 되어야 해요.
이 투입되는 방식이 재밌기도 하지만 굉장히 기이하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기도 하죠. 그 투입되는 방법을 제가 쉽게 하기위해서 옛날 동화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동화 제목은 헨젤과 그레텔. 새엄마가 와서 아이들이 꼴 보기 싫다고 둘 다를 산속에다 버렸어요. 버림받은 아이들이 새엄마라는 작자는 보고 싶지 않은데 아버지가 보고 싶은 거예요. 상당히 복음적이고 은혜롭죠. 아버지가 보고 싶은 거예요.
처음에는 떡을 떼서 흔적을 만들었는데 까마귀가 와서 다 먹어버린다는 것을 고려 못 했어요. 그다음에는 뭘 던져놨느냐 하면 돌멩이를 던져놨어요. 숲으로 들어가면서 돌멩이를 하나씩 하나씩 흘렸어요. 새들이 먹을 일이 없지요. 안 먹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아이들이 돌멩이를 따라서 아버지 집에 도착한 거예요. 그리고 결국 잘 먹고 잘산 거죠. ‘우리 아이들 내보낸 범인이 바로 너구나’라고 하면서 새엄마를 내쫓아버렸죠. 이렇게 사태가 잘 해결되고 아버지는 아이들과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잖아요.
성도가 뭐냐 하면 나 상실이에요. 뭐가 없느냐 하면 아버지가 없는 거예요. 도대체 누가 나를 만들었으며 나의 미래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책임자를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동화에서는 뭐냐 하면 자기가 땅에 있는 돌멩이를 주워서 자기가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돌멩이를 던지지만, 성경에서는 뭘 만드느냐 하면 자리를 만듭니다. 자리를 만들어요.
자리를 이렇게 만들면요, 그 자리의 시작이 나가 상실된 우리의 아무것도 없는 나의 무의미한 것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년~1864년)이라는 미국 작가의 유명한 단편소설에 제가 큰 깨우침을 얻은 단편소설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큰바위얼굴’이에요. 그 이야기를 미리 알고 보면 재미가 없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모른다고 치고 읽으면 어떤 마을에 사람 얼굴과 유사한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가 사람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내려오면서 ‘우리 마을이 언젠가는 흥할 것이다. 우리 마을에 위대한 영웅이 탄생할 것이고, 우리 마을에 대단한 사람이 태어나고, 정말 우리 말을 빛내고 크게 할 지도자가 나온다’라는 말을 주인공 어니스트라는 꼬마 소년이 어릴 때부터 쭉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언젠가는 그분이 오신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이죠. 언젠가는 그분이 오셔서 우리 마을을 크게 부흥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꾸준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 소년이 기특한 것이 뭐냐 하면 현재 여러 가지 고난과 역경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큰 바위 얼굴을 닮은 그분이 오실 거니까. 그 큰바위얼굴 앞에서 나는 작아도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아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걸 기다린 겁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것이라고. 사도바울의 편지에도 끝에 보면 그게 있어요. 주께서 오신다. 이 세상은 지옥이다. 힘들어도 그분께서 반드시 오신다. 기다려라. 큰바위얼굴을 기다리는 그 소년처럼 계속 기다린 겁니다. 기다리다가 사람들은 실망해요. 어른들은 ‘온다, 온다’하다가 ‘아이고, 안 올 거다’라고 하면서 포기해요.
그런데 나중에 점점 그 소년이 커서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세월이 60년도 더 지났어요.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계속 어릴 때 소년의 마음과 달라진 것이 없어요. 일관되어요. 마음이 똑같아요. 복음을 향하는 마음은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한결같습니다. 중간에 변덕 생기고 그런 거 없어요. 똑같아요. 왜 나 상실이니까. 나는 의미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소년이 그렇게 할아버지 될 때까지, 그전에 있던 어떤 그 마을에 대단한 사람들, 그 내용에 보면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유세 떠는 사람들이 왔다가 갔어요.
사람들이 행여나 하고 쳐다보니까 역시고, 행여나 하고 또 쳐다보면 뭐 개발하러 온 사람들이고 땅 투기 하러 온 사람들이고, 빌라왕이고, 뭐 그런 사람들만 찾아와서 도의원, 시의원 한다고 하고 자기들 이익만 챙기고 떠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사람들도 많이 실망을 했죠. 그래도 사람들은 저 큰바위얼굴, 그분이 오신다는 그거 하나 가지고 결속을 했고 마음을 하나로 맺은 겁니다.
그 단편소설 마지막은 여러분도 아는 이야기가 나와요. 어느 날이었어요. 해가 지면서 황혼을 맞이하는데, 이때 날씨가 맑아야 해요. 미세먼지같은 것이 있으면 안 돼요. 황혼이 지면서 주홍빛이 큰바위얼굴에 반사될 때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가 많이 든 어니스트의 얼굴, 그 할아버지 얼굴. 그 황혼이 큰바위얼굴과 어니스트 할아버지 얼굴 양쪽에 비칠 때 사람들이 소리친 거예요. ‘맞아. 바로 당신이야. 당신이 바로 우리 마을을 살릴 영웅이야’
그 단편소설이 우리에게 말하는 내용은 영웅은 일찍부터 우리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으로, 어려운 사람으로 함께 있었던 거예요. 메시아와 한 몸이 된 사람들이. 전부 다 큰 교회 장로, 집사, 목사 대단하다 할 때, 마음속으로 성령 받아서 집사도 아니요, 목사도 아니요, 요한복음 1장에서처럼 세례요한이 세례 주니까 성직자들이 와서 ‘너, 선지자야?’라고 하니까 ‘선지자 아니요’라고 하고 ‘그럼 제사장이야?’ 하니까 ‘제사장 아니요’라고 하고 ‘그러면 너 그리스도야?’ 하니까 ‘그리스도 아니야’라고 하죠.
“너는 ‘아니야’밖에 못해?” 그렇죠. 나는 쇠해야 하고 그분은 흥해야 하고, 나는 나 상실이니까 ‘아니야’만 이야기하면 돼요. 여러분도 그렇게 해요. ‘믿음 좋아?’ ‘아니야’, ‘봉사 많이 했어?’ ‘아니야’, ‘너 대단한 신앙인이야?’ ‘아니야’, ‘그럼 뭐야?’ ‘아니야’ 왜 그럴까요. 빈 마음이고 그 마음이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그러면 남들 보기에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네, 목사도 집사도 장로도 신자도, 아무것도 아니네’라고 하면 ‘그래. 나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 ‘아니야’를 고수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담긴 그릇에서 빼내 줘야 해요. ‘봉사 좀 했어? 전기랑 다 고쳤어?’라고 하면 ‘아니야’ 그걸 주께서 그때그때 사건을 통해서 빼내 주시는 거예요. ‘인터넷 연결해서 설교방송 했어?’ ‘아니야’ 오늘 주일 설교방송은 실패했잖아요. 이게 안 되면 안 되게 하시는 거예요. 잘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안 되는 것도 당연하다는 사실.
내가 실패하고 죽는 것도 당연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게 아까 신앙인이냐의 기준입니다. 내 인생 사는 것에서 실망할 것 없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주께서 창세 전에 예정해서 택한 겁니다. 우리가 없던 시절이에요. 우리가 아예 없었어요. 없었는데 주님의 선택만 있었고 말씀만 있었던 거예요.
그것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어느 날 찾아오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진짜 참 성도의 마음,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을 하신 거예요. “제발,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서로 시기해서 잘 되려고 하니까 주께서 너를 가만히 두겠느냐? 내가 가난한 자, 네가 구박한 가난한 자, 네가 학대한 어려운 사람 편에서 너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라고 하시죠.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것은 이스라엘 멸망이 아니고 그들이 가진 세상 적인 것을 다 드러내는 작업, 맨날 우리는 주 앞에 맡겨서, 내 속에 있는 내가 성공해야 한다는, ‘내가 아니야’가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것을 고수하는 여러분들을 갉아 내주는 주님의 귀한 큰바위얼굴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계속해서 드러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에 뭐가 있는지 알아도 우리 힘으로 긁어낼 수 없을 정도로 고집스러운 우리, 이기적인 우리,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우리, 주께서 친히 손대주시니, 아무것도 아닌 자로 만들어 주시니, 이 기쁨으로 감사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