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 너머
2023년 1월 2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30-31
(5:30)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5: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숨겨진 뜻과 이 세상 사람들의 뜻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고 차이가 난다는 점을 알려왔습니다. 선지자가 거짓을 아무리 말해도, 제사장이 권력을 행사해도 그것마저 좋아들 하는 그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기괴하다’고 평하십니다. 이는 원래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이스라엘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그들은 무엇이 거짓인지 아닌지, 무엇이 권력인지 아닌지에 관심 있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하면 그것으로 족했던 겁니다. “바로가 가로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너희가 벽돌을 여수히 바칠지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 5:17-21)
그러니까 그당시 이스라엘은, 자신을 구원하려 온 모세 아론이 그들의 적으로 여겨지고 반대로 자신을 학대한 바로의 정권은 자신의 보호자로 여겼던 겁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거론하는 것은 자기들 눈 앞에 보이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지 않은 여호와인 것으로서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악화시키지 않는 하나님을 그들을 믿었던 겁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 민족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족속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멸망시키고 제거해도 하등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주제 파악하기를 원하신 겁니다. 마치 시건방지게 사회 초년생자들이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골프를 배우기 시작하는 경우가 같습니다.
‘골프를 처음 배웠다→ 골프를 잘 치고 싶다(스스로 골프에 소질이 있다고 자부한다)→골프를 통해서 자신을 돋보이고 싶다→골프 내기에 뛰어들었다→큰 돈을 잃었다→망했다→주제 파악했다→구원받았다’
즉 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내부에 숨어 있다는 뜻에서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는 차이나는 점입니다. 참이스라엘을 뽑아내기 위해 겉 이스라엘은 망해야 하고, 망하는 이유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특정 선지자와 특정 제사장의 잘못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그런 거짓에 대해서 동조해야 하는 상황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집단적으로 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원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데 있어 이 망함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원칙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좋게 여긴다’는 말은 내부적인 감정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마음내부는 선악지식으로 체제잡혀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는 자신을 선한 자로 행세하는 노력을 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 집단은 내부적으로 촘촘한 법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법을 지킴’이 자신을 선한 자로 드러나고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예외없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의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 내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내부적인 노림수를 자극해 내고, 자신을 의로운 자로 행세하고 싶은 본능을 하나님의 거룩 수준에서 고발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 어떤 잘난 자라도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잘난 척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망하는 것이 마땅함을 계속 일깨워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율법과 더불어 제사법도 동반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제사법, 곧 희생양이 부각되기 위한 특수한 종족이 곧 이스라엘이었던 겁니다. 유대인 가운데 이방니라 와왕비가 나타났습니다. 에스더입니다. 하지만 이 왕비 자리의 의미는 세상 왕비로서 죽어야만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즉 무(=죽음)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참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 11:9-10)
곧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고, 그리고 그런 삶을 위해 노동이 가능한 ‘대낮’ 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음을 주님은 착안하십니다. 주님 보시기에 인간들의 그런 발상은 ‘대낮’이 아니라 실은 그것이 ‘어두움’이라는 겁니다. 그들 마음 속에 빛되시는 예수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둡다’는 말씀은 곧 ‘그들이 죽어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죽어있으면서 태양이 떠있는 낮 위주로 살기에 그들이 살아있다고 여깁니다. 태양 유무로 빛/어두움으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행함 위주로 빛/어두움이 나뉘어짐을 보이고자 여전히 숨붙어 있는 나사로가 숨 끊어질 때까지 주님은 대기하고 계셨던 겁니다.
즉 사적으로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 아니라 범 우주를 상대로 해서 예수님의 세계만이 유일한 빛의 세계임을 보이기 위해 나사로를 이용하신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버린 이 인간 세계는 결코 살아있는 세계가 아닌 어두움의 세계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희생하신 주님’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세계는 기껏 자막이 붙어 있는 인간영화의 세계, 곧 환상의 세계일 뿐입니다. 자막을 너머 서야 비로소 제대로 주님의 세계가 보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능력으로 자막을 넘어설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과거 시간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살아도 계속 과거만 생산할 뿐입니다.
영원한 현재는 인간으로는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무를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계획을 무산시키는 이유는, 무, 즉 자신의 죽음을 본인이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과 혼인하기 전에 먼저 못 생긴 레아와 사랑없는 혼인을 하게 하셨던 겁니다.
바로 이런 전개가 자막 너머, 인간의 언어이해 너머 하나님만이 행사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한 세계가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6강-예레미야 5장 30~31절(자막너머)23012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장 30~31절입니다. 구약성경 1059페이지입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기괴하고 이상한 일, 그 기괴하고 이상한 일이 어디서 이루어지는가. 이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기괴하고 놀라운 일 중에서, 여기에 세 가지가 나오는데 이 중에서 무엇이 기괴한지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1번 -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한다.
2번 - 제사장들은 권력을 모집해서 권력으로 남의 정신을 지배한다.
3번 -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긴다.
어느 것이 가장 기괴하냐. 3번이겠지요. 왜냐 하면 선지자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백성에게 없어요. 그리고 그 당시 제사장들은 치안을 담당했고 세금을 징수할 때 관여했던 사람이에요. 실제로 국가행정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왜냐 하면 제사장은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국가든 국가가 진행되고 유지되려면 그걸 법제화시키고 법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법안에서 움직여 줄 때 그 법에 동의하고 법을 인정하면서 질서가 잡히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이 왜 그러느냐 하면 악마가 우리 인간 안에 선악 체제를 집어넣어서 그래요. 선과 악을 집어넣어서 선은 좋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악은 나쁜 사람으로 간주해서 선악을 안다는 것은 내가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기 행동에 대한 자기 절제가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바깥에도 법이고 내 마음속에도 법이고. 둘 다 법이 있을 때 국가는 제대로 혼란스럽지 않게 굴러간다는 거예요.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 있다는 사실이 바로 법의 질서체제예요. 법의 질서체제이니까 옳고 그른 것을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법을 만든 결정자가 하는데 그 제정자가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세칙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법의 최고 자리에 앉은 자들이에요.
그걸 누가 동의하느냐 하면 백성들이 동의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자체를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참 기괴하다고 하시는 거예요. 기괴하다는 말은 정상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했던 이스라엘과 다르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해야 하냐면 반드시 어떤 요소가 나와야 하는가. 없음의 요소, 무(無)의 요소를 거쳐서 나왔던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법제화된 애굽이라는 강력한 법치국가에서 그 법의 권력자를 하나님이 쳤어요. 맏이를 죽였어요. 그게 유월절입니다. 유월절 날에 인간이 법을 토대로 구축한 법의 나라를 치고, 그리고 난 후에 이스라엘을 뽑아냈단 말이죠. 그 뒤에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것은 이 법을 경유 하라고 율법을 준 거예요. 인간의 법보다 더 철저한 법, 완벽한 법, 숨 막히는 법을 그들에게 줌으로써 그 법이 외부에 사회질서 치안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내부까지 법제화되어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법이 뭐냐 하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 주고 그다음에 시내산 올라가서 준 것이 바로 제사법입니다. 십계명 주고 그다음 제사법 준 거예요. 십계명은 못 지킨다를 알려주고 제사법은 못 지키는 인간 대신해서 희생해 준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렇게 법 없이 구원받고자 하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점을 알아야 해요. 반드시 내가 무(無)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내가 없는 데서, 그러니까 같은 말로 내가 죽었다는 말인데, 죽은 데서 살아났다는 사실을 늘 내부적으로 반복해서 유지해줘야 해요.
구약에서 유대인치고 왕비까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이 에스더인데요, 에스더는 별이라는 뜻입니다. 에스더가 처음에 왕비가 된 것은 미인대회에서 진, 선, 미 가운데 제일 이쁘다고 뽑은 ‘진’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해서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물론 에스더가 얼마나 이쁜지를 그 당시 사진이나 동영상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거 찾지 마세요.
보면 실망합니다. 왜냐 하면 시대마다 미인의 기준이 달라요. 양귀비는 보면 얼굴이 통통해서 못 봐줍니다. 당뇨 걸린 것도 아니고 얼굴이 펑퍼짐하고 북한의 미인 기준은 이설주도 아니고 ‘리설주’라면 남쪽의 미인 기준은 손예진이든 누구든 그렇습니다. 아무튼 미(美)의 기준은 다릅니다. 다른데 하나님의 미의 기준은 뭐냐 하면 미인대회를 하더라도 그건 아직 왕비가 아니에요.
왕비가 되려면 에스더 4장 16절을 거쳐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것을 거치지 아니하면 이건 하나님 보시기에 왕비가 아니에요. 그런데 인간이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권력을 쥐고 선지자들이 거짓말하는 이유가 뭐냐. 이들이 살려고 했고 거기에 대해서 백성들이 좋게 여긴다는 말은 그 선지자들의 말고 제사장들의 통치가 전부 다 자기 사는데 불리한 것이 아니고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에, 그걸 알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겁니다. 좁은 길을 피하고 싶은 거예요. 세상 나라, 그 주변에 있는 나라가 힘을 가지니까 이스라엘도 힘을 갖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힘 갖는 것을 제일 싫어하세요. 우리나라 옛날 동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할머니와 어린 손자가 깊은 산골에 사는데 아이가 막 우는 거예요. 우는데 희한한 타이밍인 것이 아이가 울 때 창가로 호랭이가, 호랑이도 아니고, 무서운 호랭이가 창가를 기웃거렸던 거예요.
그 타이밍도 모르고 할머니는 아이에게 겁을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자꾸 울면 호랭이가 온다’라고 했는데 아이는 더 크게 우는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가 뭐라고 하느냐면 ‘그러면 곶감 줄까?’라고 하니까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거든요. 그걸 듣고 있던 호랭이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호랭이는 나름 자기가 힘이 있다고 여겼는데, 그렇게 여긴 바로 그것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를 동화가 말해주는 겁니다. 물론 그런 깊은 의미까지 그 동화가 알지는 못했겠지만요.
힘이 있다는 것은 믿을 것이 힘밖에 없다는 것이고, 힘에서 조금이라도 더 힘센 존재가 등장하면 나는 졸지에 뭐로 미끄러지는가 하면 힘없는 존재로 미끄러질 가능성을 늘 품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아예 힘을 쭉 뺀 거예요. 힘이 필요치 않은 나라가 된 겁니다. 이게 얼마나 좋은 나라입니까. 힘이 필요치 않은 나라. 나를 지킬 자력적 힘이 없어도 되는 그런 존재가 진짜 꿈같은 존재 아닙니까?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 없어요? 힘없어도 되는 거. 제가 어려운 말을 할 테니 무슨 뜻인지 알아 맞춰보세요. ‘태산이 되기 전에 마지막 티끌이 되었다면(마지막 티끌 하나 더 보태서 태산을 이루었다면) 이미 이루어진 그 태산에서 티끌 하나 빼면 태산일까요, 아닐까요?’라는 질문입니다. 티끌 하나만 얹으면 태산 되는데 그 태산이 다 되고 난 뒤에 그 태산에서 티끌 하나를 빼버리면 세상에서는 태산이 아닙니다.
왜? 태산이 되려면 이 정도의 힘이 모여야 하는데 거기서 빼기(-) 1을 했으니까 태산이 되었더라도 미치지 못하는 거죠. 태산 되지 못하죠. 이게 바로 선악 체계입니다. 악마가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한 거예요.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해라. 예수 믿으면 당신은 성도다’라고 하면서 그다음부터 악마가 노리는 것은 ‘믿는지 안 믿는지 확인해 보세요. 믿음 없어요? 그러면 성도 아니네’
그러면 믿음 없는 빈칸을 믿음으로 마저 채워야겠지요? 그러면 기도원에 배터리 채우러 가는 거죠. 수련회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원에서 3박 4일 동안 열심히 기도해서 마지막에 잃어버린 그 빈칸을 자기가 채워야 다시 믿는 자라고 자부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교회에 진짜 믿음 대빵 와서 아마존 막 돌아다니고, 순교 막 하고, 아프리카 돌아다니다가 토인들에게 엉덩이에 화살 맞고 한 사람들 막 와서 간증 집회했다.
졸지에 잘난 교인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하죠. 그러고 한 달 후에 또 말기 암 4기까지 갔다가 기도 응답받은 사람 와서 간증 집회하면서, 그게 그 사람들 돈벌이니까, 와서 15년째 레퍼토리(repertory) 반복해서 써먹으면서 생계유지하는 사람들 와서 하게 되면 또 거기서 ‘나 정말 믿음 없어’라고 풀이 죽으니까 담임목사가 하는 말이 ‘여러분, 봤지요? 이 정도 되어야 믿음 아닙니까. 여러분 뭐 했습니까? 집구석만 생각하고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여러분은 모르잖아요. 좀 뭘 내야지. 돈을 좀 내야 이런 분들 모시고 은혜 주고 할 거 아닙니까’
갑자기 돈 이야기 나오면서 항상 끝에는 돈 내라고 하잖아요. 이게 모든 신천지고 구천지고 여호와 증인이고 뭐고 모든 단체가 다 그래요. 특히 ‘엄마 교회’인 안상홍도 빼놓을 수 없죠. 대순진리교도 마찬가지고 절간도 교회도 마찬가지고 모든 단체가 그렇게 흘러가요. 이상적인 태산, 하나님이 원하는 기준 설정해놓고 거기서 빠졌을 때(빈칸이 생길 때) ‘빨리 메우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우환 옵니다. 가정에 대대로 자식들에게 우환이 미쳐서 결혼도 못 하고 취직도 못 하고 저주받으면 좋겠습니까?’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저주성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 제대로 안 하면 몸 아프고, 암 걸리고, 그런 거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주님께서 기괴하다고 할 때는 인간들은 절대로 인간의 수준에서 못 벗어나는 해석만 내놓는다는 말입니다. 왜냐 하면 무(無)로 통과해 버리면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인간해석이 아니고 주님의 해석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해석으로 봐야 한다는 그 말을 다른 식으로 이야기한 사람이 있어요. 봉준호 감독입니다. ‘1인치(inch)의 장벽만 넘으면 여러분은 놀랍고 넓은 세계를 봅니다’라고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 수상 소감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1인치 장벽이 뭐냐. 자막입니다. 제가 볼 때 이 세상은 주님 일의 자막입니다. 주님이 찍은 영화의 자막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1인치가 2.54cm인데요, 1인치의 자막만 넘어서 버리면 무(無) 너머의 세계,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죽어서 펼쳐지는 세계가 나올 겁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그 1인치의 인생이라는 자막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해요.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합니다. 자막을 못 넘어선 그런 예가 실제로 대중가요 가사에도 나와요. 이 가사가 너무 특이해서 소개해 드립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저 연락선이 없었으면 쓰라린 이별이 없었을 것을...’ 이게 남진이 불렀던 ‘가슴 아프게’에 나오거든요. 1절 가사에는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이라고 나와요. 바다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그런데 연락선은 있으면 더 좋은 것이 아닐까요? 연락선을 타고 만나면 되잖아요. ‘당신과 나 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더라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이런 말 하지 말고 연락선 타고 가란 말이죠. 부산에서 시모노세키(일본의 항구도시)까지.
가면 되잖아요. 뭐 차비 아까워서 그런가요? 그러면 연락선 말고 차비가 아깝다고 노래해야죠. ‘당신과 나 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더라면 헤어짐이 없었을 건데’라고 하지 말고 따라가면 되잖아요. 왜 그 자막너머로 가지 못하느냔 말이죠.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했는데. 우리는 뭐가 아까워서 연락선 안 타겠다고 버팁니까? 타고 가면 되잖아요. 인간은 무(無)에 붙일 수 있는 기호가 없다는 뜻이에요.
언어가 없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모든 것은 나에게 붙일 단어와 언어를 장식하기 위해서 인간이 살아가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감추기 위해서 평생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사는 거예요. 내 자식이 잘되고, 손자가 잘되고, 우리 남편은 이렇고, 내 아내는 이렇다. 전부 다 자기를 꾸미고 장식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자막에 불과합니다. 자막너머로 가야 해요. 그 자막너머로 가는 방법이 뭐냐. 지금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건, 이 세상은 바로 시간으로 되어있다는 것이 성경적 방법이에요. 지금 이스라엘은 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원래부터 이스라엘은 망했는데 계속 주님께서 구실을 찾아요. 이스라엘을 일부러 이방 민족으로 둘러칩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지 않으면 안 될 수밖에 없는 요소를 만들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숨어있는 자기 내부의 우상성을 끄집어내죠. 그게 율법의 기능이니까 그런 거예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네가 다른 신을 섬길 수밖에 없는 요소를 네가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방 나라를 닮아가는 거예요. 왜? 그들은 힘을 좋아하니까.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법을 좋아하니까.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뭐로 사용했느냐 하면 구원받기 전에 모든 인간이 보여줬던, 구원받기 전에 과거의 샘플로써 이스라엘을 사용한 겁니다.
우주는 뭐로 되어있는가. 하나님의 우주는 바로 시소(seesaw)예요. 영어로 ‘see’라는 것은 현재 본다는 것이고 ‘saw’라는 것은 봤다는 뜻이에요. seesaw는 둘이 앉아서 ‘보이네. 안 보이네. 보이네. 안 보이네’(양쪽 끝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이렇게 타고 노는 어린아이들 놀이기구입니다. 주님께서는 과거를 가지고 과거를 현재와 같이 중첩 시켰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을 현재라 하고 인간이 사는 곳을 과거로 만들어버렸어요. 이정재가 영화 대사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왕이 될 상(相)인가?’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과거(過去)가 될 상(相)인가?’ 모든 인간은 과거 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거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과거밖에 없어요. 나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앞은 우리 소관 아니에요.
그래서 인간은 그 뒷모습 보여주면서 서서히 진짜 모습, 죽음의 모습으로 가죠. 죽음이 우리의 모습이니까. ‘아, 이게 죽음이라는 거구나’라는 것을 매일같이 느끼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는 근거가 요한복음 11장 9-10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0절에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지금 이 말씀 하는 것이 뭐냐 하면 12시예요. 대낮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면 해가 있으면 그게 낮이라 하고 해가 지면 밤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인간에게 밤은 보조요소이고 하루 일과에서 자기가 일하는 시간은 낮이기 때문에 낮이 주(主)가 되고 밤은 보조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이걸 반대로 바꿉니다. 어두운 밤이 인간에게 합당하고 밝은 대낮은 인간에게 합당치 않고 예수님에게만 합당하다고 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 때도 했지만 요한복음 11장에서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로 만들고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는 하나의 샘플로, 표적으로써 멀쩡하게 언제든지 나을 수 있는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를 죽여버렸어요. 기능적으로.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지금 너희들은 낮으로 보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두움이다. 그리고 밤이다. 그러나 어두움이 지나가야, 무(無)가 지나가야 비로소 너희가 상상도 못 한 빛의 세계가, 낮이 온다는 거예요. 그 낮의 세계는 바로 네 속에 빛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그 세계, 그 세계가 들어오면 비록 죽더라도 우리는 밤이 아니고 낮이 되는 빛의 백성이 된다는 이야기가 주님이 요한복음 11장에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낮에 주일학교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이와 같은 취지입니다. 야곱이 삼촌 집에 갔을 때 야곱에게 제일 눈에 띈 것은 바로 삼촌의 딸, 자기 사촌 동생이죠, 그러니까 이쁜 사촌 동생을 만난 거예요. 이쁘니까 자기 뇌리(머리)에 박혀서 헤어지기 싫은 거예요. 헤어짐에서 더 나아가서 한 몸이 되고 싶은 겁니다. 왜 야곱에게 그런 현상이 생기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망하게 하실 때 이렇게 망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방 나라처럼 큰 나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원래 작은 나라로 만들었는데 욕심을 내서 큰 나라가 되려고 계획하고, 그다음에 멸망하고, 그다음에 구원되고, 이렇게 멸망 다음에 구원이 오는 거예요. 요새 같으면 골프로 예를 들면 처음에 골프를 배워요. 아주 시건방지게 30대 초반에 좀 번다고, 친구랑 대화가 되려면 골프 좀 배워야 대화가 된다고 하면서 배우죠. 사업을 왜 골프장에서 사업을 합니까.
아무튼 골프 좀 배우고, 자기 친구랑 잘 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다음에 골프 내기하다가 골프로 몇천만 원 날리고, 자기 주제 파악하고, 그다음에 구원받기. 이게 인간의 코스예요. 이스라엘 코스고. 모든 인간은 이 코스를 밟아요. 구원받는 것까지는 안 가지만. 이 우주는 과거와 현재로 되어있는데 이게 중첩되어있거든요. 과거의 인간들이 왜 망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야곱에게 라헬이 너무 이뻤어요.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삼촌이라는 사업가가 그걸 노렸지요. ‘네가 내 딸과 결혼하고 싶나?’ ‘예’ ‘그러면 열심히 일해라’라고 하고 월급 안 줍니다. 야곱은 월급 안 줘도 좋아요. 그녀가 나의 아내가 될 수 있다면, 평생 살 수만 있다면. 그래서 14년간 무임금으로 봉사했어요. 나중에 결혼할 때가 되었을 때 삼촌이 결혼 첫날 밤까지 입을 다물었어요. 삼촌이 입이 참 무거운 사람이에요.
아침이 와서 보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고 못생긴 언니가 옆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야곱이 따지죠. ‘왜 이렇게 했습니까?’ 여기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가르치는 것이 뭐냐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네가 실패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거든요.
마태복음 22장 32절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며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아브라함 안에 하나님 살아있고, 이삭 안에 하나님 살아있고, 야곱 안에 하나님이 살아있는데, 그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살아있느냐.
아브라함 안에 망하는 하나님으로 살아있고, 이삭 안에 망하는 하나님으로 살아있고, 야곱 안에 망하는 하나님으로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 망하는 하나님과 마음이 연결되어야 해요.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해요. 그럴 때 무(無)를 통과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다린 거예요. 라헬과 혼인하고 싶은 야곱의 마음을 야곱을 실패자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원 플러스 원 행사용으로 언니를 갖다 딱 붙여놓은 거예요.
그다음부터 야곱은 언니랑 낳은 자식은 전부 다 눈에 꼴보기 싫어요. 그리고 라헬이 낳은 자식, 요셉이 태어나면서 그다음부터는 라헬이 낳은 자식 외에는 자식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 라헬이 두 번째 아이를 낳다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는 요셉에게 몰빵합니다. 백화점 가서 제일 비싼 옷을 사다가 입혀주죠. 그게 뭐냐 하면 그 죽은 라헬 안에 내가 아직도 안 망하고 있고, 내가 사랑하는 요셉 안에 내가 안 망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요셉마저 좋은 옷을 입혔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요셉이 죽습니다. 야곱에게는 요셉이 죽은 자예요. 이것은 바로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 하나님 언약의 원칙에 따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타고 전수되어서 계속 내려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신약의 십자가예요. 그 십자가 영이 성령입니다. 여러분 보는 우리는 주님에게는 과거지사고 과거에 해당되는 자막이에요. 주님의 자막.
우리 안에 자막을 넘어선 더 넓은 세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막에 울고불고하지 마세요. 성공했다 실패했다는 평을 자신에게 자평하지 마세요. 우리는 과거가 될 상입니다. 우리 모습은 과거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 과거를 과거 되게 하신 영원히 현재가 되는 주님, 그 주님이 계실 때 우리는 밤이 아니고 낮입니다. 주와 함께 다닐 수 있는 영원한 권리를 우리가 허락받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일과 우리 일이 이렇게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선지자가 거짓말하든 말든, 제사장이 권력을 이용하든 말든, 우리가 복 받아 부자 되고 잘 풀리면 그걸로 족하다는 우리의 이 모습을 우리가 서서히 기괴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