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완성
2023년 2월 26일 본문: 예레미야 6:16-21
(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6:17)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6:18) 그러므로 너희 열방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
(6:19)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6:20)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6:2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거침을 두리니 아비와 아들들이 한 가지로 거기 거치며 이웃과 그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
선지자는 마치 청문회 하듯이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명령을 하시면서도 적절한 답변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명령하는데 있어 위반할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계십니다. 즉 시작과 끝을 선지자를 통해서 통보하시는 겁니다. “너희들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입니다.
이처럼 미리 다 알고 계신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번거롭게 이스라엘에게 명령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이전의 ‘옛적 길’이 이스라엘에 와서 어떤 식으로 망가져가면서 하나님의 뜻의 최종 완성으로 치닫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과 점점 멀어져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겁니다.
예언은 새삼스럽게 인간을 바꾸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들이 예언을 통한 한 꾸중의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겁니다. 하지 말라고 하시기에 더욱 안 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생리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21:31-39에 보면,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수록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격화됩니다. 이는 창세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약조한 그 결과에 완벽하게 따르는 각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을 심판해서 재편하시려는 겁니다. 악마는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악마에 대한 영원한 심판을 위해 하나님께서 다른 심판 기준을 세우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심판주요 구원자로 등극시키시는 방법입니다. 즉 예수님에 대해서 가한 행위들을 두고서 전 우주를 심판하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1-22)
악마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 겁니까? 이를 위하여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피흘리심’의 경우를 유발토록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즉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들로 하여금 반대하는 수위를 극한까지 나오도록 끌어올리십니다.
마치 포도원 주인 상속자를 농부가 죽일 때까지, 여러 차례 종들을 사전에 보내듯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주저없이 죽일 수있게 된 것은, 예수님 오셔서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차없이 저주하고 부정하는 발언을 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힘으로 복음을 뜷고 천국에 들어올 수없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먼 이국에서 가져온 고급 수입품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4: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그리고 신명기에서 인간의 범죄를 다음과 같이 미리 예고했습니다.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신 32:15) 이런 예언들은, 인간들 속에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을 일체 나오지 않음을 분명히 합니다. 쓰레기통은 먼저 집어넣이 제일 바닥에 있고 나머지는 그 위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어떤 길을 갔는지는 히브리서 11장에 많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11:4에,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벨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에 속한 아벨’이 그 시대에 믿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지만 아벨은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의 선지들은 결코 자기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모세의 경우를 봐도 그러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모세가 훌륭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신이 드러내기 위해 모세을 그런 식으로 다루었던 겁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이러합니다. “일이 안 되면 안하면 되고, 죽게 될 지경이라면 안 살면됩니다”입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과연 인간들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자기에게 고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골라 하나님께 예배에 나섭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인간의 불가능함입니다. 그것이 ‘부자 천국가기’로 소개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즉 돈이 많은 것이 천국을 못가게 하는 요인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자됨을 포기하고 가난하게 되면 천국갈 수 있겠군요” 제자들은 이 대꾸 대신이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내세운 하나님의 구원 기준이라면 그 어느 존재도 구원에 이를 수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피’를 내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피’ 앞에서 악마와 함께 있는 인간상으로 노출됩니다. 인간을 전면적으로 심판하시는 바로 그 기준도 ‘피’요, 그래서 일방적인 사랑으로 구원하실 수 있는 기준도 예수님의 ‘피’입니다. 이것이 예언의 성취인 새언약 기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결정에 의해서 구원이 정해진 것을 감사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0강-예레미야 6장 16~21절(예언과 완성)23022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6장 16~21절입니다. 구약성경 1060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열방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거침을 두리니 아비와 아들들이 한가지로 거기 거치며 이웃과 그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답을 다 정해놨어요. 괜히 인간에게 묻는 것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한 겁니다. 꼭 청문회 하는 것 같아요. “장관님은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어놓고는 “아~답변하지 마. 하지 마”라는 식이에요. 물어봐 놓고 답변하지 말래요. 들어보나 마나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겁니다.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면 되느냐 하면 쓰레기통을 거꾸로 뒤집는 거예요.
쓰레기통을 거꾸로 뒤집는 것이 오늘 본문 16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옛적 길, 조상이 갔던 그 길은 쓰레기통 제일 마지막에, 제일 밑바닥에 그게 깔려있어요. 그러면 그 위에 쓰레기통 위에서 계속 차곡차곡 쌓이게 되겠죠? 그러면 조상들에게는 하나님의 원형이 이렇게 쌓여요. 이렇게 하는 게 옳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앞장세우고 그 뒤를 따라서 조상들에게 줬던 내용이 그 후손에 의해서 어떻게 무시당하는가를 주께서 어디까지 이끄는가. 신약시대까지 이끕니다. 예수님이 하신 비유 가운데 포도원 비유가 있어요. 누가복음 20장 9~14절에 보면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만드시고 농부들에게 포도 농사를 하게 했는데 종들을 보내니까 농부들이 건방져서 “우리가 일 했는데 자기가 주인이라고 삯을 받으러 오느냐”라고 하며 종들을 때렸습니다. 또 종 보내니까 종들을 때리는 정도가 아니고 때려 죽여서 보냈어요. 마지막에 주인이 아들을 보내는데 “아들은 존대하겠지”라고 하니까 그 농부들이 절호의 찬스라고 여긴 거예요.
자, 마지막 카드가 왔으니까 이 아들을 죽여버리면 이 포도원의 상속자가 사라지니까 이 포도원의 포도는 몽땅 우리 것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아들마저 죽여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포도원을 만들 때 사전에 방지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아요. 아들마저 죽이는 거, 아들마저 죽이게 하는 그것을 최후에 인간의 자기 본성으로 이미 확정을 지어놨어요.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공격하는 성향을 지녔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이것을 지녔는데 사람마다 ‘나에게는 그런 거 없어요. 예수님에게 제가 얼마나 잘 해주는데요’라고 위선을 떠는 분위기로 만들죠.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잘 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답변은 필요 없고, 내 아들 어떻게 했어? 내 아들? 내 아들 이미 살인사건 났잖아” 그걸로 너의 속성은 이미 결정 났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쓰레기통 안에 조상 때부터 이야기해놓았던 것을 차곡차곡 쌓아놓게 하고는 예레미야에 와서 한번 뒤집고, 또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에 와서 또 한 번 뒤집어 부어보고 이렇게 부어보는 겁니다. 부어버리면 여기 오늘 본문 내용대로 주님께서 내가 너희 이스라엘을 바벨론을 통해서, 여기에 바벨론이라고 언급은 없지만 21절에 “내가 이 백성 앞에 거침을 두리니”라는 거침이라는 말이 나와요.
이 백성 앞에 거침이 되게 한다. 그 거침의 결과가 뭐냐 하면 “아비와 아들들이 한가지로 거기 거치며 이웃과 그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라는 조치, 멸망하는 조치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어차피 너희는 멸망하니까, 생각을 달리 한번 해보라는 거예요. 세상일이 잘 안 되거든, 안 하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몸이 아프든지, 건강이 안 좋다든지, 경제성이 안 좋아서 굶어 죽게 되어있잖아요? 그러면, 그만 살면 됩니다. 문제가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억지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죽게 되어있는데 고집은 누가 부리느냐 하면, 이미 죽게 되어있는 운명과 숙명을 한번 바꿔보려고 애쓸 때, 인생은 더욱더 힘들어지는 거예요.
일이 안 되면 안 하면 되고, 죽으면 더는 안 살면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설날에 세배하고 세뱃돈을 받잖아요. 아이가 받아 보니까 신사임당도 있고, 배추도 있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아이들이 쓸데없는 걱정이 뭐냐 하면 ‘이 오만원권과 만 원권을 어떻게 감당하지?’라고 생각하는데 그거 감당하지 마세요. 그냥 엄마에게 주면 됩니다. 세뱃돈을 받았으면 그걸 본인이 감당하지 말고 그냥 주면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직 돈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돈을 주는 것은 너를 통해서 엄마에게 전달하라는 뜻입니다. 이게 주로부터 온 것은 받으신 분이 주님이에요. 그냥 우리를 경유 했을 뿐이지 주께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그냥 주께로 가거든요. 우리는 그중에 전달 매체로 그냥 그런 기능을 하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이미 창세 전부터 결정했어요.
에베소서 1장에 보면 내가, 그러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림으로써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한다. 이미 아버지와 약조가 끝난 거예요. 그러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 피 흘리기 위해서는 피 흘릴 만한 그런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마귀가 그 담당자예요. 마귀가 선악과를 심어놓았을 때 마귀가 유혹하게 했거든요. 주님께서는 마귀가 유혹하게 하는 것을 아시고는 일부러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한 겁니다.
마귀는 독립성이 강하니까, 누구 말을 안 듣는 것을 아니까, 그것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마귀를 늪에 빠지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악마가 부추겨서, 메시아가 와서, 피를 흘려서, 그렇게 생긴 피로 말미암아 주님의 아들이 주님이 되시고, 아버지가 했던 심판을 어디로 인계하느냐면 아들에게 모든 심판이 넘어옴으로써 그렇게 심판하는 이유가 악마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아주 신학적으로 어려운 문제인데, 야고보서에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고 무서워합니다. ‘너, 하나님 모르잖아’에서는 심판을 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을 아는데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죽여버리고, 영원한 지옥 불에 보내려면 하나님을 아는 것 말고 다른 기준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게 뭐냐면 아들에게 그 업무를 맡긴 거예요. 욥기에 보면 마귀가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스가랴에도 마찬가지고 마귀가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그래요.
‘하나님을 모른다, 안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 기준 말고 다른 기준, 다른 심판 기준을 하나님에서 예수님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악마가 꼭 필요했던 겁니다. 그러면 그걸 하늘나라에서 해결하지, 땅에 있는 인간까지 관여했는가. 주님께서는 만유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창조 자체마저 악마가 창조된 세계까지 뛰어 내려오도록 유도하셨고 그 창조된 세계에 에덴동산에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것과 결부되도록 조치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과 결부되도록 함으로 말미암아 천지 창조했던 그 모든 창조가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재료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했어요. 그 이야기가 히브리서 1장에 봅니다. 10절과 11절에 보면 참 신기해요. 여러분이 신기함으로 여러분의 인생 고민이 다 떨어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복음은 우리의 고민이 원래는 고민거리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우리를 도배해요. 덮어버려요.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이때까지는 주님도 좋고, 우리도 좋고, 다 좋아 보이죠. 그렇지 않습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인데,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그러니까 멸망하도록 만들었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모든 것을 멸망하도록 만들었어요. 그것이 이유가 뭐냐 하면 아들을 하나님의 오른편 자리, 주의 자리에 올려서 심판을 이제부터 영원히 아들 중심의 나라로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재편하시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아들 중심이에요. 그래서 천국은 아들의 나라에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쓰레기통을 마저 안 뒤집어서 그래요. 쓰레기통을 마저 뒤집어 버리면, 특히 요한복음 5장 같은 경우에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경우에는 아버지가 없다고 함으로써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아들 앞장세우고 자기는 들키지 않는 자리, 아들 뒤쪽으로 옮겨버렸어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악마에 의해서, 악마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도 입만 떼면 ‘주여, 주여, 하나님, 하나님,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섬기자, 경배하자, 전도하자, 선교하자, 예배드리자’라고 입만 떼면 하나님 위하는 것이 인간 피조물의 마땅한 도리라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인데. 왜 없는 하나님이냐.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직접 만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예수님 뒤에 숨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마귀를 앞장세우고, 우리가 마귀 뒤쪽으로 가야, 마귀와 예수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사건을 경유 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 만나는 것은 우리가 만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예수님을 어떻게 했느냐는 그 사건 안에서 나의 위상과 위치, 입장은 어디 쪽에 있는가가 응해져서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해요.
그래야 나의 존재가 주님의 존재를 만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존재와 예수님의 피와 만나는 거예요. 찬송가에 보면, 찬송가에 가끔~아주 가끔 복음적인 것이 있어요. 옛날 찬송가 186장(새 찬송가 254장)에 ‘내 주의 보혈은’이라는 찬송 4절 가사에 보면 놀라운 이야기가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내 주의 보혈은~” 맨날 유행가만 이야기하다가 여기서 찬송가를 하는데 “내 주의 보혈은~정하~고 정하다”라고 부르는데 4절 가사에 보면 “그~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라고 되어있어요.
최종적인 증거는 피뿐입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 아닙니다. 내가 어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것은 내 존재가 괜찮고 근사하다고 여길 때, 그러니까 내가 마귀 들린 것이 아니고 ‘마귀 저리 가! 나는 마귀도 이겼어’라는 그런 존재라 여기고 ‘주님, 나오세요. 나의 경배를 받으세요’라고 할 때는 내 존재를 확정 지을 때는 예수님의 존재를 요청하죠. 불러내서, ‘우리 다방에서 만납시다. 카페에서 만납시다’라고 하는데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피로써 나타나 버리시면 내가 내 존재로서 그 피를 마주할 수가 없죠. 왜? 나 때문에 흘린 피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탐욕 때문에 흘린 피거든요. 피를 흘린다는 말은 네가 죽지 아니하면 네가 나(주님)를 만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내(주님) 세계에 들어올 수 없다는 그런 뜻인데 멀쩡하게 ‘나 살아있는데 하나님 저 천국 넣어주세요’라는 것은 피가 거절합니다. 피가 받아주질 않아요. 바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는 이유는 이스라엘로하여금 갱신하는 거예요. 다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달리 이야기하면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는 겁니다. 수치스럽게 만들어요. 조상들은 하나님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조상들은 그 죄가 덜 무르익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조상들 이야기가 히브리서 11장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다 할 필요 없겠지만 11장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라고 되어있습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믿음이 아벨에게 더 나은 제사 드리게 하셨다는 겁니다. 아벨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아벨을 좌지우지했다는 겁니다. 왜 그래야만 하느냐. 그래야 아벨은 믿음의 증인이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믿음은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되어있어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거예요.
믿음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겁니다. 왜냐 하면 믿음은, 나는 보이니까 보이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나를 움직였다는 증거가 우리 자신이에요.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믿음에 보이는 증거가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아벨이에요. 아벨에게 ‘당신은 왜 형에게 맞아 죽었습니까?’라고 하면 ‘그건 제가 한 것이 아니에요. 제가 그런 훌륭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할 뿐이죠.
맞아 죽은 것이 훌륭한 일이 됩니다. 맞아 죽은 것이. 여기 선진들 보면 모세 나오죠. 11장 24~25절에 보면 모세 나오죠?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나오죠. 모세에게 물어보세요. ‘왜 당신은 그런 행동을 했습니까?’라고 하면 ‘제가 한 거 아니에요’
믿음의 동질성입니다. 아벨이나, 모세나, 그리고 그 뒤에 노아나 전부 다 똑같은 질에, 본질에, 성질에 그 시대에 맞도록 그 사람들을 사용하신 겁니다. 특징은 뭐냐, 믿음이 그렇게 했다는 것은 믿음의 선진들의 특징은 내 자체로서는 무가치하다는 겁니다. 아까 했던 것을 다시 말씀드리면 나는 안 해도 되고, 더 안 살아도 되는 거예요. 바로 그렇게 주님이 믿음으로 사람을 그렇게 만드시는 거예요.
더 안 살아도 되고, 그만 살면 된다는 거죠.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19절을 봅시다. 그러면 이렇게 살면 되는데 왜 이스라엘은 이렇게 못 살았느냐. 이것이 이방 민족의 영향을 받게 되면 하나님을 믿었다는 증거 자리에 돈이 들어갑니다. 사람이 돈이 없으면 부끄러워져요. 가난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수치스러운 거예요. 남들 앞에서 ‘나는 믿음이 좋아서 돈은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함부로 하지 마세요. 그 말은 잘못된 말이에요.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시바까지 2400km 떨어진 곳입니다. 엄청나죠. 에티오피아 그 동네예요. 그 먼 곳에서 이런 귀한 것을 가져온다는 말은 그걸 하나님께 귀한 거라고 멀리서 온 수입명품을 하나님의 제단에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의 희생을 내가 받지 아니한다. 이것은 너희들이 돈 자랑하는 것밖에 안 된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을 들으면 되지 않느냐. 본문 16~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라고 나옵니다.
파수꾼을 세워도 그들 선지자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하고 16절에도 아까 선배들 말씀했죠? 선진들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던 이런 걸 본받으라고 하니까 자기들은 그것을 본받지 않겠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청문회 하는 거랑 똑같다니까요. 그들이 스스로 본인들이 수치스럽지 않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돈으로 포장을 한 거예요.
돈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돈은 나를 위해서 쓰는 돈이 아니고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느냐 여부를 위해서 돈을 준 거거든요. 그런데 남들 보기에는 그게 부끄러워도 많이 부끄러운 거예요. 아직 예레미야에서 이 사람들은 고급 향품, 수입품을 희생물로 드리고자 했는데 좀 더 시간이 지나서 신약에 오게 되면, 그전에 호세아 4장 7절을 먼저 보면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인간들의 마지막 때에 인간의 마지막 작태를 호세아가 미리 예언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필히 그렇게 된다. 번창할수록 내게 범죄 한다. 시편 17편 19절에도 나옵니다.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풍족하니까 잘난 체하고 하나님을 멀리한다는 겁니다. 신명기 32장 15절에도 마찬가지예요. “그러한데 여수룬(이스라엘)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이거 청문회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겁니다. ‘너는 반드시 돈을 찾게 되어있고 나를 버리게 되어있다. 아~~ 답변하지 말고, 답변하지 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래서 너는 발로 차고 나는 십자가 피 흘리고 그다음부터는 천국을 누가 가느냐 안 가느냐는 너희 소원과 전혀 별개 문제고’라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걸 알기 때문에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고, 피만 자랑하고, 주님만 자랑하는 거예요.
처음 쓰레기통 마지막에 아벨이 죽었던 이유가 아벨은 자기가 무슨 믿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하나님이 믿음으로,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벨은 억울한 죽음을 죽었거든요. 우리 보기에는 억울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행적을 가장 농밀하게 보여줍니다. 깊이 있게 보여준 거예요. 사람은 길이로 살지 말고 깊이로 살라고 제가 말씀드렸죠?
믿음의 선조들의 특징이 전부 다 깊이가 있어요. 얼마나 길게 버티느냐가 아닙니다. 깊이가 있습니다. 끝으로 신약에 와서 돈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느냐는 누가복음 16장 13절에 보면 나옵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주께서 돈을 하나님 옆에 세우신 것은 결정 났다는 겁니다. “너희들의 본색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하게 되어있다. 땅!땅!땅!” 이렇게 치신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걱정되어서 ‘그러면 누가 천국을 갑니까’라고 나올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이 말씀 바로 뒤에 나오는 그 유명한 거지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거지나사로와 부자 이야기 나올 때 많은 사람이 오해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거지가 되면 천국 갈 수 있습니까?’라고 할 수 있거든요.
거지는 천국 가고 부자는 지옥 갔기 때문에 우리는 거지 되어서 아프기만 하면 되느냐고 주장할 수 있거든요. 이게 바로 쓰레기통을 몰라서 그래요. 어떤 인간도 천국 가기 위해서 가난하게 된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지를 않았어요. 어떤 인간도 돈 대신 천국 선택할 위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게 장담한 이유는 마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19장에 부자 청년 이야기하면서 24절에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라고 이런 말씀 하셨거든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낙타라고 치고요.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고자 시도하는 그런 낙타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딱 보면 알아요. 못 들어가는 거.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하느냐. 이런 말씀하신 예수님을 죽여버리면 되는 겁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하실 때, 악마가 부추긴 것이 뭐냐 하면 아예 그런 말이 하나님에게서 안 나오도록 선악과 자체를 없애버리면 된다는 겁니다. 그걸 따먹는 방법을 사용한 거예요. 그래서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라고 이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 당사자 자체를 이 땅에서 제거하면 이게 인간들의 해결책이에요.
그래서 인간들은 뭐냐. 아주 평화롭고, 마음 착하고, 인격적으로 선하고, 돈 잘 벌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걸로 설교 끝내면 큰일 나겠죠? 내가 아무 문제 없는 거예요. 왜? 적당하게 돈 좋아하고, 적당하게 열심히 노동해서 사는데 이게 뭐가 나쁘냐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바로 그 존재성을 문제 삼는 겁니다. 지금 네가 예수님은 자기 존재를 포기하고 피를 흘렸는데 인간들은 자기 존재를 그대로 천국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복음 뚫고 천국 갈 위인은 없습니다. 왜냐? 복음 자체가 그걸 거부하게 되어있어요. 인간이 들어오는 것을 피 복음이 밀어내게 되어있어요. 못갑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들었어요. ‘아, 아무도 못 간다’ 그리고 마태복음 19장 25절에 보면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이런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거예요.
우리 같으면 예수님 말씀을 잘 못 알아듣고 ‘아, 그러면 우리는 돈을 사랑 안 하고 돈을 버리면 되겠네’라고 하면 이건 예수님 말씀을 지금 엉뚱하게 잘못 들은 거예요. 인간이냐? 돈 좋아하게 되어있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하게 되어있고, 따라서 어떤 인간도 천국 못 간다. 땅!땅!땅! 끝~~이게 예수님 뜻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답변은 사이다죠, 속 시원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제가 미리 말씀드렸어요. 안 하면 되고, 살기 힘들면 죽으면 되는 겁니다. 이걸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6절에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러면 여기서 인간은 빠지고 예수님과 아버지의 거래, 아버지의 약속 성취, 그것을 새언약이라고 하고 그것의 증거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 피 속에서, 주께서 그 피가 내 마음속에 큰 증거가 될 때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부자 되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상한 심령, 예수님의 피 제사, 그게 마지막 약속으로 결국에는 다 확정된 사실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그동안 인간들이 쓸데없이 자기 행함으로 제사 드릴 때, 마지막으로 주께서 받으신 제사는 피 제사뿐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깊이 받아드리고 기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