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주님의 궤적

아빠와 함께 2023. 2. 5. 17:14

주님의 궤적 

2023년 2월 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6:1-5

(6:1) 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중에서 피난하라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기호를 들라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

(6:2) 아름답고 묘한 딸 시온을 내가 멸절하리니

(6:3) 목자들이 그 무리 양을 몰고 와서 그 사면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6:4) 너희는 그를 치기를 준비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볕 그늘이 길었구나

(6:5) 일어나라 우리가 밤으로 올라가서 그 전각들을 헐자 하도다

잔인하고 인정 사정 봐주지 않는 기계같은 군대들이 함부로 이스라엘 땅을 황폐화시킵니다. 마치 전에 그곳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누가 그렇게 이스라엘을 짓밟도록 한 겁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아름답고 묘한 딸 시온을 내가 멸절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철저하게 유린하도록 하십니다.

해가 지는 것도 아까와서 밤 근무까지 하게 하십니다. 철두철미하게 진멸토록 하는 이 북방의 군대는 이스라엘이 처음 생겨날 때의 천사들을 닮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로 형성되어 애굽에서 나오던 그 날 밤, 천사들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맏아들들은 다 죽었습니다. 소리없이 죽였습니다.

인간의 살해 능력을 능가하는 솜씨입니다. 마치 꼭 죽어야 해야 하는 것처럼 죽였습니다. 죽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음을 강조하듯이 죽였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라고 하면 인정 사정 다 봐줍니다. 죽일 때에는 인격적인 품위를 유지시켜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인간을 죽일 때는 이런게 전혀 없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마땅히 죽어야 하기에 죽이는 것 뿐입니다. 즉 안 죽고 버틸 이유가 인간에게는 찾을 길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죽이시는 겁니까? 그 이유가 로마서 10:2-3에 나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만 유일하게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격하는 표적은, ‘인간의 자기 의’가 형성되어 있는 곳입니다. 자기 의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격할 이유없습니다.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의를 공격해서 죽이시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할 때는 먼저 우리 자신에게 자기 의가 있음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덕분에 좀 살아보겠다’는 허망한 생각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나올 때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무슨 뜻인지를 혹독한 환경 속에서 실감했습니다. 인간은 결코 자기 의로 사는 것도 아니요 자기 열심히 버텨내는 것도 아님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동시에 인간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어디론가 이동 중에 있음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면서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최종점이라고 여겼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가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원래 이스라엘이 되게 한 ‘어린양의 대신 죽음’의 취지가 남아가 버린 겁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계속 살고자 한 겁니다.

자신들이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잃어버린 겁니다. 즉 유월절 그날 밤에는 애굽의 모든 자들은 죽은 자로 분명해졌습니다. 인간쪽에서 시도하는 그 어떤 저항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살고자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겁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겁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도착점에 가는 방식은 오직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야 합니다. 그 방식은 바로 두 축으로 진행됩니다. 마치 대서양을 통과하는 해류가 남극에서 북극으로 나아가서는 다시 북극에서 남극으로 이동합니다. 추운 남극에서 출발한 바닷물은 적도 부근에 와서 따뜻해집니다. 이것이 ‘멕시코 난류’입니다.

이 난류는 파나마 지협에 막혀 닫히는 바람에 태평양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때 소금 밀도가 높아져서 그린란드쪽으로 갑니다. 거기서 표층수에서 심층수가 바뀌게 됩니다. 그런 식으 로 계속 해류는 건베어 벨트처럼 두 축으로 순환을 반복합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마음 속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월절의 양으로 인하여 인간은 소리없이 죽음을 당하고 소리없이 살림을 당했습니다. 다시 사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 말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린 조치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을 이미 성도라고 자부해서 ‘이미 구원받았으니 세상 호강이나 하자’라는 식으로 그 자리에 멈출려고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악마를 보내어서 성도 내부에 어린양의 순환 절차를 반복시켜버립니다. ㅇ악마가 성도에게 내부적으로 묻는 질문은 딱 이것 하나입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마 4:3,6) 쉽게 말해서 이러합니다.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이제 나는 구원된 성도입니다’라고 떠벌리고 다니지만 솔직하게 네 자신에 물어봐아 네가 성도야?”

순수한 너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겁니다. 네가 성도 되려고 애쓰고 있는게 아닌가입니다. 즉 “너는 네가 성도되기를 애쓰고 있으며 여태껏 시도했던 그 모든 것에 근거해서 네가 성도되기를 멈추지 않고 노력하고 있는 것 맞잖아”라고 하면서 추궁합니다. 이게 바로 “네가 만일 성도라면?”라는 질문에 담긴 악마의 의도입니다.

이게 바로 자기 의입니다. 악마는 자꾸만 성도의 자기 의에 주목하게 만들고 거가에 의미를 두게 합니다. 이런 악마의 활동을 허락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벨론 군대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유린하도록 허락하시듯이 말입니다. 예루살렘 남쪽으로 피난 간 지역마저 일체 남기지 않고 다 삼키듯이 말입니다.

성도는, 입자가 되면 안 됩니다. 파동이 되어야 합니다. 명사로서는 성도가 아니라 동사로서의 성도이어야 합니다. “나는 성도다”가 아니라 내 안에 활동시고 궤적을 남시기는 분은 따로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20에 보면, “보라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방식은 끊어내고 이어짐을 오로지 어린양 되시는 분의 몫입니다. 그 어린양이 직접 사람이 되실 때까지 성도는 멈추지 않고 그분과 함께 하게 됩니다.  그분은 이땅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땅에서 자기 의로 모든 문제의 완결을 고대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2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식으로,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다”고 말하면 아니됩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언급해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이 죽었음을 포함한 십자가의 피를 드러내야 합니다. 죽이시고 살리시는 그 궤적이 성도 안에서 주님의 궤적으로 살아있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일을 하지 말고 우리 안에 주님의 일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7강-예레미야 6장 1~5절(주님의 궤적)23020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6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1059페이지입니다.

“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가운데로부터 피난하라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목자들이 그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일어나라 우리가 밤에 올라가서 그 요새들을 헐자 하도다”

러시아 군대 보고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면서 인정사정 보지 않고 우크라이나의 모든 각 지역을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우아한(묘한) 딸, 하나님의 자기 딸이지요,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우리를 죽이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가 빠져버린 종교, 그 대표적인 종교 중 하나가 천주교입니다. 요새는 기독교도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만. 천주교는 노골적으로 십자가를 빼지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많이 모집하기 위해서 인간의 이성에, 양심에 호소하는 그런 종교가 천주교입니다. 요새는 기독교도 그런 종교가 되었어요. 그런데 이런 종교는 천주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슬람도 마찬가지고, 불교도 마찬가지예요.

이슬람에 ‘인샬라’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모든 것이 알라(신)의 뜻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알라의 뜻이라는 거죠. 우리 식으로 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거죠. 이건 찬송가 가사에 나오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는 것과 비슷하지요. 우리가 믿음 있다고 할 때, 믿음이 저 사람에게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죽음을 언급해야 믿음이 있는 것이고 복음의 내용이거든요.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다는 말이 뭐냐 하면 ‘너의 아들을 바쳐라’라는 이겁니다. 인샬라도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건 믿음 아닙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은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이에요. 조상과 다른 믿음을 갖고 있다면 이것은 그 믿음의 후손 계열에 속할 수가 없죠. 아브라함은 없는 중에 바랐다는 거예요.

이건 아브라함 개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그 일은 어떤 일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아예 작살 내고 그의 대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가정에서 대가 끊기는 것은 저주를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뭘 느끼느냐 하면 아예 하나님이 작심하고 우리 대를 끊고자 하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인 것을 본인이 안 거예요.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노리고 들어오셨다는 거예요.

신께서 열심 있는 저주를 남도 아니고 아브라함 자신에게 꽂듯이, 미사일 쏘듯이 노리고 들어오시는 거, 이게 믿음입니다. 나를 아주 박살 내는 거죠. 노리는 지점이 어느 지점을 노리고 들어오느냐 하면 그것은 신약이 되어야 밝혀집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노리는 지점이 나와요. 로마서 10장 3절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하나님이 노리는 목표지점은 어디냐 하면 사람들의 자기 의를 노리고 공격합니다. ‘자기 의’ 하나님이 원하는 의는 오직 하나님의 의를 원해요. 하나님 자신의 의를 원한단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무슨 의를 믿느냐 하면 인간이 믿음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이만큼 착실하게 살아왔다는 그것을 믿고, 내가 훌륭하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그것을 믿어요. 이게 자기 의로 구축되어있어요.

그 의를 향하여 그 의가 뭔가 파괴되었다고 했을 때, 그건 감사해야 합니다. 왜? 주의 의가 미사일이 되어서 나의 의를 만나러 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너 인생 헛살았어’라고 해주는 분이 계시다는 거, 이게 바로 하나님의 우리 안에 현장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인생 헛살았다. 그런데 그 헛산 것이 새삼 고마울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말해서는 실감 안 나고, 나이 50세 되어서 다니는 직장에서 잘릴 때 ‘누가 이런 착실한 나를 잘라냈는가’를 조사해 보니까 우리 주님의 의가 그동안 딱딱하게 간 경화처럼 굳어져 있는 나의 의를 향해 더는 못 봐주겠다는 식으로 공격을 개시한 거예요. 세상에 이런 고마울 데가 있습니까. 내가 부술 수 없는 나의 의. 아무리 캐내도 빠지지 않는 나의 의를 친절하신 주님께서 ‘내가 너의 의를 지져줄게’라고 하시면서 ‘지지직’하면서 불로 지지시는 거예요.

아시죠? 드라마 ‘더 글로리’ 고데기로 아이를 지지면서 학폭(학교폭력) 저질러서 평생 상처가 남아있는 거. 온 인생 자체가 주께서 지지는 고데기 자국으로 남아있는 거예요. 머리~어깨~무릎~팔~다리, 전부 다 주님께서 지져버렸어요. “너는 이런 자기 의를 가지고 천국 가려고 그런 생각을 했어? 이게 천국이 뭔지도 모르는 모양이구나”라고 하시면서 친절하게 지져주시죠.

그래서 이걸 간단하게 줄이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죽음을 근거로 하지 아니하면 성경 해석이 되지 않는다’ 항상 주님께서 나를 죽이는 용도로 성경을 설명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진멸하리라”라는 그것도 오늘 본문에 보면 “묘한 딸”, 그러니까 묘하다는 것은 신비롭고 아름답다는 뜻이죠. 아름다운 내 딸 시온을, 누가?, 내가(주님이) 파멸하리라.

그런데 “내가(주님이) 파멸하리라”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온 것은 북방민족입니다. 1절에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라고 되어있죠. 북방민족이 이스라엘을 치는 겁니다. 베냐민 자손들,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은 피난해야 해요. 피난하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느냐. 북쪽에서 오니까 남쪽으로 가야죠.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라는 이 말이 뭐냐 하면 피난 갔는데 그 피난 간 곳까지 북방민족(바벨론)이 아주 충실하게 자기 업무를 차질없이 잘 수행해서 도망친 피난민까지 싹 쓸어서 다 죽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이렇게 성실하게 수행하는 그런 군대가 바로 이방 민족 바벨론 이에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 속에 일체 자기 의가 남지 않도록 철저하게 철저를 기하시는 이런 하나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내가 죽여줄게”라고 하시는 말은 ‘인샬라’나 불교에서 ‘나무아미타불 관셈보살’ 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보살이 한두 종류가 아닙니다. 그중에 하나가 관셈음 보살인데, 보살이라는 것은 옆에서 친근하게 잘 대해 주는, 석가모니 죽고 난 뒤에 나타난 세 번째 보살들이에요.

‘나무아미타불 관셈보살’ 하는 것은 새로 등장한 부처에게 귀의하는 거, 그러니까 주문을 외우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다 뭐냐 하면 결국 인샬라죠. ‘그저 부처의 뜻에 다 맡깁니다’라는 거죠. 맡긴다는 말은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이 ‘살려만 주이소’라는 거죠. 인샬라도 마찬가지죠. ‘알라신이 알아서 살리시겠지’라는 이런 살려만 달라는 마음이 밑에 다 깔려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마음 가지고 교회 오나 절에 오나 마찬가지입니다. 살겠다고 교회 오신 것은 이건 절간에 오신 겁니다. 그게 성당에 오신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끊어짐을 제공하시는 이유가 하나님 손으로 이으시려고 끊어지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기대감으로 천국과 이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나의 의를 가지고 천국에 이어보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방법은, 이으시는 방법은 뭐냐. 그 방법은 우리 속에 숨기고 있는 것을 들춰내는 방법을 사용하세요. 억압된 것은 되돌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숨기고, 감추고, 억압해도, 언젠가 계기가 되면 자기의 본 성질이 팍 터져 나오게 됩니다. ‘내가 그동안 많이 참았다. 내 성격대로 하면 너 벌써 갔지만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참았다’라고 하죠.

그러면 계속 참지 지금 와서 왜 터트려요. 인간은 억압된 것은 되돌아오기 때문에 아무리 눌러도 용수철처럼 튕겨 나오게 되어있어요. 아무리 좋게좋게 이야기해도 언젠가는 술 한잔 마시고 본심 나오게 되어있거든요. 여기 계신 분들은 술 안 먹으니까 세상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언젠가는 계기가 있으면 터져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죽여야 하는데 아무리 해도 자기를 죽일 수있는 방법이 없네요. 죽일 수가 없어요.

왜? 겉은 죽였지만, 속에 억압된 것은 펄펄 살아있기 때문에 억압된 것마저 내 손으로 죽일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걸 어떻게 하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바벨론이 등장해요. 바벨론 군대. 특징은 인정사정 보지 않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하는 딸 시온에 대해서 인정사정없고 아주 잔인하기 짝이 없는 바벨론 군대를 갖다 붙이는가.

그건 유월절을 반복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유월절, 그때 없었던 나라 이스라엘이 처음 생긴 날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그때 밤에, 남들은 다 잠들었어요. 다 잠들었는데 밤새 떼로 설치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인정사정없이 하나님의 지시만 받고 움직이는 천사들이 집집마다 모두 방문합니다. 도시가스 계량기 측정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찾아가서 맏아들은 그날 새벽 2시인지 3시인지 가리지 않고 다 죽여버립니다. 맏아들을.

죽이는 것도, 왜 죽이는지를 모르게 그냥 죽어있어요. 정말 아무 소리 없이 죽었어요. K2전차?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핵폭탄? 그런 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있는데 그냥 죽어요. 이게 하나님 방식이에요. 이제 아시겠죠?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는 방식을. 요란스럽게 암 걸리고, 교통사고 나고, 허리 아프고, 그런 번잡스러운 것이 아니고, 그냥 죽여요. 하나님께서는 그만한 능력이 있어요. 천사들이 와서 그냥 죽여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려요. 그것을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겁니다. 그런 경험을 품고 나라가 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죽였다. 누가 죽였냐? 하나님이 죽였다. 하나님이 죽였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살았으니까.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 그 바른 의미는 대신 죽어주는 거예요. 대신 죽어주는 것이 여러분 마음속에 오시거든 여러분은 죽다 살아난 줄 아시기 바랍니다.

대신 죽었다는 말이 뭐냐 하면 소리 없이 죽일 수 있었는데 주께서 소리 없이 살리신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살려놓은 이스라엘을 왜 새삼스럽게 갈대아 군대를 보내서 작살을 내느냐.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 부분인데요, 핵심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이야기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이 지구의 기후나 온도가 바다 온도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요.

바닷물이 움직이면서 기후나 날씨를 결정하는데 바닷물이 어디서 어디로 움직이느냐 하면 남극에서 북극으로 바닷물이 움직입니다. 그게 해류인데 남쪽에서 흘러오는 바닷물이 두 종류가 있는데 위에 있는 것을 표층수라고 하고 밑에 있는 것을 심층수라고 해요. 그런데 남극의 심층수가 적도 부근으로 이동하면서 온도가 높아지면서 소금의 농도가 같이 높아져요.

왜냐 하면 바닷물이 증발하니까요. 밑에 있는 바닷물이 소금농도가 올라오면서 따뜻한 난류가 됩니다. 따뜻한 해류가 되면서 현재의 쿠바, 도미니카, 아이티 부근으로 쭉 올라오는데 이게 파나마 쪽으로 가는데 파나마 운하가 막혀있으니까 태평양 쪽으로 가게 되면 온도가 다시 평균이 되는데 막혀서 그리고 가지 못하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북쪽에 그린란드까지 올라가요. 올라가면 그린란드는 굉장히 추운 곳이기 때문에 수온이 낮은 해류로 바뀌어요. 바뀌어서 그것이 다시 남쪽으로, 적도로 와서 다시 남극으로 내려가요. 그때는 다시 추운 표층수가 되어서 내려간다고요. 이게 남극과 북극을 두 축으로 해서 해양 컨베이어벨트(온도와 염분 차이에 의해 만들어지는 바닷물의 밀도 차이에 의해 유도되는 대규모 해양순환)로 순환하는 해류입니다.

특히 이게 대서양의 영향을 많이 줍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릴 것은 두 축인 거예요. 왜 이스라엘이 소리 없이 죽여놓고,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소리 없이 살렸을 때 당사자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대신 죽음이 품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어느 날 시들해져 버린 거예요. 안일해진 겁니다. 대신 죽어줬다는 그런 것은 잊어버리고 ‘인샬라, 나무아미타불 관셈보살’처럼 그냥 ‘내 살아있고 내 잘되면 고맙겠습니다. 하나님께 헌금 드리고 예배드리겠습니다’라고 나오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인데.

대신 죽은 분이 살아있기에 살아있는 것이지 본인은 죽어있는 거예요. 대신 살아있는 분이 그 안에 살아있지 않으면 그건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특수성이에요. 다른 민족은 그런 게 없어요. 이스라엘이 광야 때 계속 이동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이동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사 우리가 모르는 목적지로 간다는 것을 그들은 어느 정도 알았어요. 왜냐 하면 그들은 이동 중이니까.

그런데 약속의 땅에 정착이 되는 순간 이스라엘은 이동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입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하나의 점이 되는 거죠. 동사로 살아야 하는데 무엇에 만족하느냐 하면 명사가 되어서 만족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이동 중이다. 하나님이 움직이니까 하나님이 지구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계속 움직인다는 생각을 안 하고 ‘됐습니다. 그만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이 좋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다’라고 거기서 멈춰버린 거예요.

역사의 끝은 남아있는데 계속 동사로 남아있게 될 그 민족이 입자가 되어 그 명사로 굳히기 들어가는 거예요. 처음에 수학의 논쟁 중에서 유명한 논쟁이 뭐냐 하면 ‘점이 모여서 선이 된다’라고 할 때 거기에 대해 시비를 건 사람이 있었어요. 어떻게 점이 모여서 선이 되느냐? 부피도 없고 면적도 없는 점이 어떻게 모인다고 선이 될 수 있느냐는 거죠.

점은 아무리 모여봐야 선이 안 됩니다. 그런데 점이 선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궤적입니다. 점이 움직일 때는 선이 됩니다. 축구 초보자들, 농구 초보자들은 뭐만 보느냐 하면 공만 보잖아요. 그런데 축구나 농구를 잘하는 사람은 공이 어느 궤적을 따라서 어떻게 이동하다가 어느 지점에 공이 올 것이라는 그 궤적을 미리 당겨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 때 공은 보지 말고 공이 이동하는 동사, 그 절차, 그 과정을 봐야 해요. 대신 죽으신 분이 양이잖아요. 양이, 언제까지 양이겠습니까? 신약에 오면 양이 사람이 되어요. 그리고 그 사람 되신 분이 우리와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까? 뭔가 궤적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가셨잖아요. 하늘로 가셨잖아요. 그러면 성도라면 주님 가신 그 궤적을 따라서 계속 이동하는 삶을 살아야지 않습니까.

사람은 자기를 하나의 입자로 생각하고, 하나의 점으로 생각해서 ‘하나님, 저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된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 인생 돈이나 벌고 호강하면 된다’라고 거기서 주저앉는 거예요. 주님의 궤적을 따라가야 하는데 주저앉아 버린 거예요. 그리고 ‘인샬라, 인샬라, 모든 것은 주의 뜻입니다.

내 주여~뜻대로’라고 하긴 하는데 본인은 엉덩이가 무거워서 꿈쩍도 안 해요. 주여 나를 더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그래서 갈대아에서 대신 누가 등장해 주느냐 하면, 이건 고마운 건 아니지만 악마가, 마귀가 등장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주저앉지 말고 우리 있는 자리에서 입자를 파동으로 바꾸게 합니다. 자리를 떠나게 만들어요.

입자파동은 양자역학에서 실체가 없어요. 그저 움직임뿐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명사가 되지 말고 동사가 되게, 그냥 움직임만 남기는 존재가 되게 하는 거예요. 마귀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잘 들으셔야 해요. 이것만 잘 들으시면 됩니다. 마귀가 하는 말이 이겁니다. 마태복음 4장 3절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거예요. 만약(If). 가정법이에요. ‘만일 네가 성도라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너 알거든. 백날 성도 흉내 내봐야 너 실패할 거야. 너 성도 안 돼. 못 돼.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너는 너의 잘남을 포기 못 해. 그냥 진작에 포기하고 네 잘남으로 그냥 밀어붙여.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전부야’라고 마귀가 말하죠. ‘나는 헌금하는 일도 잘했고, 교회 나가는 일도 잘했고, 전도하는 일도 잘했고’라고 하면 마귀가 호응 막 해줍니다. ‘그렇지~그렇지. 그게 너에게 딱 맞아’

내가 평생동안 교회 다니고 봉사한 모든 것이 쌓여서, 이게 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이스라엘이 실패했으면 우리도 실패한 거예요. 그리고 마귀가 볼 때 예수님에게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라고 시험한 거예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이 떡 되게 해라” 이런 식으로 지금도 마귀가 하루에 어떤 사람은 746번, 어떤 사람은 76번, 어떤 사람은 25번, 이렇게 매일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의문을 제시하는 거예요.

‘네가 성도야? 웃기네. 너 자신은 못 속이잖아. 너 교회에서 성도라고 우겼잖아. 그런데 너 자신에게 물어봐. 너 성도 맞아?’ 그러면 ‘잘 모르겠는데~요’(영구버전으로) ‘그래, 너는 몰라. 대충해. 대충. 알아주는 사람 없어. 너는 너의 잘남으로 그냥 살아가는 거야. 좀 요란 떨지마. 성경 보는 거, 신학 논문같은 거 다 치워버려. 순수한 너 자신을 제대로 봐’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나는 믿고 천당 가려고 애쓰는 사람이죠. 성도는 아니에요. 그냥 노력하는 사람이잖아요.

백날 옆에서 차 타고 이야기해봤자 소용없어요. 노력은 해봐. 노력은 해 보지만 장담은 못 해. 내 인생의 끝 궤적을 나는 장담 못 해. 그냥 시도는 해 보는 거죠. 안 하려고 하니까 좀 찝찝하고. 그리고 그간 신앙생활 했던 가락은 있잖아요. 나의 의, 이걸 포기할 수 있겠어요. 이게 바로, 마귀는 지치지 않습니다. 40년 믿었다고요? 그다음 날 찾아옵니다. 60년? 그다음 날 찾아와요. 끊임없이 합니다. 마귀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방식은 무슨 방식이냐.

마태복음 28장 20절, 마태복음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그 대목과 같이 섞이게 하는 겁니다. 마귀의 말을 남극이라고 봅시다. 그리고 북극을 주님의 말씀으로 봅시다. 우리 성도의 내부구조는 입자가 아니에요. 주께서 순환 구조가 순환적으로 늘 컨베이어벨트처럼 순환하는 그 구조를 보여주는 자리가 바로 성도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렇게 묻지 않아요.

‘너 성도야?’라고 묻지요. ‘너는~이다’라는 식으로 묻잖아요. 그것에 그만 확 넘어가 버리는 거예요. ‘그래. 내가 성도냐, 아니냐? 내가 성도일까 아닐까?’ 주께서 순환 구조를 일으키시기 때문에 내가 성도일 필요도 없고 성도 아니라고 할 이야기도 없어요. 그냥 주께서 십자가에 끊어버리고 이어지면서 대신 죽으신 분만 활동하면 그만이에요.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너 혼자이냐, 네 속에서 순환되느냐?’를 묻는 거예요. ‘이제는 되었다. 성도다’라는 그게 아닙니다. 순환되는 겁니다. 남극과 북극으로 계속 해류가 순환되듯이, 그게 우리 내부의 기후와 날씨를 결정하듯이, 우리 마음가짐은 주께서 순환한 결과입니다.

어떤 때는 웃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울 때도 있죠. 전도서 3장에 보면 나옵니다. 1~8절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부부가 살면서 미워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사랑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미워하는 존재라고 이렇게 단정 짓지 마세요. 그냥 순환하는 겁니다. 지금이 파나마 운하 옆인지, 아니면 미국인지, 아니면 아르헨티나인지,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주께서 순환한다는 거, 우리를 하나의 자료로 만들어서 주께서 “네가 이렇게 된 인간을 내가 어린양의 피로 대신 순환한다”

그래서 결국 남는 것은 주님의 유월절 어린양 피밖에 없습니다. 마귀와는 이야기하지 말고요. 마귀 너는 네 할 일 하고. 우리는 주님에게 고백하면 됩니다. 십자가 피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네가 너에게 당부하노니 예수님의 피 외에는 아무것도 알 필요 없다고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 말씀, 그 북극의 말씀이, 항상 십자가와 함께 있는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에게 깜빡 또 넘어갔습니다. ‘네가 성도냐’라고 마귀가 물을 때 답변을 하려고 하지 말고 다시 한번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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