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김굿
2023년 2월 19일 본문: 예레미야 6:12-15
(6: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6: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6: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왜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평강을 말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이 세상에서 해서는 안 되는 질문으로 분류됩니다. 경솔하고 무례한 질문으로 간주됩니다. 사람이 되었으면 같은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위로하고 긍정적인 언사로서 상대방에게 힘 실어주어야 하는 것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마땅한 태도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은 의미있는 질문으로 여겨집니다. “왜 선지자라고 자처하면서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부정적인 발언을 해대는가?”라는 질문말입니다. 선지지가 ‘평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평강을 없애는 쪽’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평강이 없다’고 선지자들로 말하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냥 세상 돌아가는대로 방치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수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세상을 멸망할 거니까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망함을 언급하므로서 ‘차이’를 부각하려고 하시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두 개의 선택지를 주시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인간은 필히 화평이 없는 쪽을 선택하는 그런 내재적 속성을 발휘하게 됨을 하나님께서는 나타나게 하시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을 보내실 때에, 인간들은 필히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는 쪽으로 그들의 선택을 실시하게 됩니다.
인간들은 오로지 평소에 자신이 기대한 평강을 놓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망하기가 싫은 겁니다.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상에 부합되는 선지자를 찾아가거나 초청합니다. 사람은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돈 벌고, 좋아하는 일을 위하여 돈을 내놓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돈이 되는 식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모든 종교는 동일한 행위를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미가 3:11-12에 보면,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백성들이나 선지자들이나 마음이 일치된 겁니다. 하나님을 끌어당기되, 자신에게 올 재앙이나 지금 자신들에게 들이닥친 불행이 소멸되기를 위한 용도로 확정된 채 굿판을 여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기 인생 노선이 원활하게 잘 돌아가기를 바라는 뜻을 말합니다.
씻김굿이란 자기에게 붙어있는 불길한 기운을 떨어내는 굿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확고한 입장은 ‘차이남’을 보이시는 겁니다. 인간들이 예상한 세계와 이것과 확연하게 차이나는 다른 세계를 다 보여주는 겁니다. 기존의 노선과 오는 노선, 둘 다를 말하고 이 노선들에게는 그 어떤 연속성이 없음도 아울러 보여주시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결혼을 앞둔 여자에게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전 7:26-28)
혼기에 든 여자들은 누구나 아름다운 미래를 희망합니다. 자신이 너무 너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그 남자로부터 전폭적으로 사랑을 받고 늘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미리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자꾸만 상상으로 그 내용을 채울 뿐입니다.
사도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주신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대신 고린도후서 :10-11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게 바로 차이남의 진수이지요.
결혼이고 뭐고, 날마다 자신을 죽음에 넘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손해보지 않는 기존의 인생노선을 고수하기 위해 하나님의 제사나 예배까지 그대로 모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단호하십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1-23)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들이 돈을 밝히지 아니하면 참 선지자로 처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근원적으로 돈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말씀 성취’는 이 땅에 환란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하신 ‘차이남’은 환란 형식으로 정립됩니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암 6:5-6)
요셉의 환란은 요셉조차도 예상하거나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향하여 작용하는 말씀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의 자기 관리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는 마치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도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삼상 10:5-6)
아버지 명따라 암나귀 찾으려 갔다가 졸지에 사울은 선지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짧은 순간이기도 하지만 이것도 두 개의 차이남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예입니다. 구약의 이 세상 못함은 신약에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누가 의도를 가지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세상과 하늘의 차이남을 위하여 부름받은 자들 뿐입니다. 비록 가족들과 원수가 되는 상황이 온다할지라도 말입니다.(마 10:34-3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두 노선을 함께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39강-예레미야 6장 12~15절(씻김굿)23021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6장 12~15절입니다. 구약성경 1059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벌 받거나 징계를 받을 때 이유를 알아야 하겠죠.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벌 받는다고 하시면서 이야기할 때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겉으로 드러난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뭐라고 사기를 쳤느냐 하면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위로조로 사람들 마음을 좋게 했던 것이 벌 받는 이유가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 백성들을 위로하고 좋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다 이유가 있을 건데요.
저주를 말하기보다는 축복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다 의도가 있었던 겁니다.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어줘서 그들이 잘되게 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 하는 겁니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노선이 두 개가 되어야 하거든요. 하나가 되면 그냥 끝이에요. 노선이 이렇게 가다가 다른 노선으로 도약해야 합니다. 다른 노선을 만나서 그 노선으로 갈아타기가 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노선이 저주받을 노선이라면 마중 나오는 노선은 진짜 복 받을 노선인데 기존의 노선에서 연속되어 있지 않아서 복 받을 노선으로 옮겨 탈 수가 없어요. 갈아타기를 해야 하는데 끊어져 있어요. 서울역에 가보면 철로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수십 개가 되는데 어떤 경우는 둔덕이 있어서 트롤리로 밀어붙이려고 하다가는 탁 걸리기 마련이에요. 기차선로 잘못 조정하다가는 박을 수도 있잖아요.
통하는 곳으로 가야 하거든요. 노선을 변경할 때 기존 노선이 끊어졌고 너는 끝났다고 언급을 해주는 것이 바른 선지자의 도리입니다. 그러면 사람들로 하여금 ‘내 인생은 이렇게 줄곧 가면 안 되겠네’라는 그런 의도와 생각이 나타나도록 해야 하고요. 그렇게 하려면 앞으로 우리가 복과 만나는 노선도 소개를 해야 해요. 그러면 그 둘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겁니다. 오늘 설교는 그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차이를 통해야 그 진실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차이에 대해서 성경 고린도후서 4장 10~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몸의 인격이 두 개잖아요. 내가 죽고 내세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문경 장례식장에 참석해서 제가 안타까웠던 것은 죽어서 내세에 주를 만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두 개의 인격체가 같이 가야 해요. 그래서 방금 읽었던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처럼 ‘나는 살아있어. 살아있는 내가 예수를 위해서 항상 죽음으로 넘겨져야 할 이유는 이게 죽음에 넘겨짐으로써 차이나는 다른 몸이 우리 몸을 통해서 나타나게 함이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게 지금 조금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이게 사람을 위로해줄 문제도 아닙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진실을 말하지 여러분을 위로해주는 말이 아니에요. 사실을 사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같은 사도바울의 말인데 이걸 들어보게 되면 참 냉정하고 어떤 면에서는 참 독하고 못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보통 여자 나이가 스물 후반 또는 서른 가까이 되면 사랑하는 남자 만나서 평생 행복하게 결혼할 생각을 누구나 갖고 있어요.
누구나 갖고 있는데 사도바울은 가혹한 질문을 던집니다. 고린도전서 7장 26절에서 28절에 보면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지금 결혼하라는 말입니까, 말라는 말입니까? 지금 차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이 태어나서 여자가 성숙하면 다 결혼한다고 이렇게 부추겨주면 좀 어때요. 결혼해야 아이를 낳고 아이를 낳아야 국가 경쟁력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증가율이 마이너스(-) 되고 1퍼센트도 안 되는 상태가 되어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겁니까? 남자가 둘이 살고 아이도 하나도 안 낳는 이런 나라가 좋은 나라예요? 이슬람처럼 다섯 명이나 여섯 명 퍽퍽 낳아줘야 지진이 나든 말든 나라가 몇 명 죽어도 유지가 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보게 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집가고 싶어?” “가고 싶어요” “그러면 가~가~가긴 하는데 너는 이제 환란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 이건 악담을 해도 심한 악담을 하는 거죠. 그래서 못마땅한 어떤 신학자들은 사도바울에게 이렇게 욕을 해요. ‘지가 결혼을 안 해봤으니 독하게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자기가 결혼 못 했다고 남도 못 하게 방해한다’라고 그것도 신학자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분명히 여기서, 이 본문에서 “임박한 환란”이라고 언급했어요.
결코, 이 세상은 평화롭지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선택에 넘겨봤어요. 인간은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티비 프로그램 ‘나는 솔로’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모든 인간의 행동이 뭐냐 하면 ‘나는 예수를 선택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그 결정을 밑에 수반하고 있어요.
나는 내 인생을 선택하지 주의 인생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차이를 충분히 주었어요. 충분히 줬는데 인간은 그 차이점에 대해서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곱게 살다가 나중에 죽고 나서 내세에 오게 되면 그때 선택하고 지금은 선택 안 해도 된다고 하면서 그때 가서 선택하면 될 일을 이렇게 미리 하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들이 빠뜨린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강있다 평강있다’라고 하는 것이 나름대로 근거가 있어요. 그 근거가 여기 본문에서는 나오지 않는데 다른 본문을 찾아보겠습니다. 선지자 대목에서 먼저 보게 되면 미가 3장 11절에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라고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우리 재앙을 다 차단해 주신다. 우리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야.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있는 거야’라고 위로해 준 거예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설교 아닙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고 복 주는 하나님이 함께 있다. 복 주는 하나님이 함께 있고 여러분이 그런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재앙을 사전에 차단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오로지 복만 있고 재앙은 일체 오지않습니다’라고 이렇게 끝나면 좀 심심하잖아요. 그래서 뒤에 ‘믿습니까?’ 그래도 좀 심심하면 추임새까지 ‘할렐루야’
저는 오늘 본문같은 경우에 오늘 예레미야 본문은 어디에 적당하냐 하면 헌신예배에서 적당하다고 봅니다. ‘우리 가운데 평강의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당신은 거짓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헌신예배를 하다가는 나중에 차비도 못 받아요. 예레미야 지난번에 한 것에서 5장 12절에 보면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라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거짓 선지자들의 말 속에는 재앙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닌데 거짓 하나님을 도입시킨 겁니다. 왜? 삯을 받고, 돈을 받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을 빙자해서 돈벌이에 나서는 겁니다. 이건 바로 산업이에요. 종교 산업이고, 종교 사업이고. 보통 개척교회 하게 되면 온 집안 다 덤벼듭니다. 사모는 기본이고 아이들, 장모, 장인어른, 시아버지, 시어머니까지 지역교회 다 옮겨서 그 교회 숫자 채우려고 합니다.
자리 빠져있으면 너무 심심하니까. 자리가 뻥뻥 뚫려있으면 이 교회는 진리가 아니라고 오해살까 봐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선지자 입장에서 차이를 둔다는 말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두기 때문에 선지자 입장에서는 조금도 아쉽고 모자랄 것 없이 마음껏 외칩니다. 이왕 버린 몸인데 이 땅에서 환영받을 일은 전혀 없고요.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그냥 외칠 뿐이죠.
그냥 의도적으로 남을 약 올려서 일부러 부정적인 말을 해서 마치 유일하게 개혁적이고 복음적으로 살아있는 주의 종으로 위장하는 그러한 되지도 않는 꼼수 있잖아요. ‘십일조 하지 마세요’라는 이런 거. 제가 그 이야기 듣고 참 기가 차서, 자기가 뭔데 또 십일조 하지 말래. 십일조 없으면 참된 교회인가요? 참된 교회는 두 개를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특히 여기에 아모스같은 경우가 진짜 선지자인데 제가 지금 말을 계속 미루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왜 그들은 평강을 외쳤느냐는 겁니다. 왜?
그리고 돈도 돈이지만 더 깊은 뜻이 있어요. 왜 백성들은 돈을 이미 줬으면서 왜 그 소리를 듣기를 원하느냐. 사람은요 싫은 일을 하면서 돈 벌고요, 즐거운 일을 하면서 돈을 내게 되어있어요. 딱 그거입니다. 세상은 그것뿐이에요. 여러분은 돈 벌면서 좋은 일 하면서 돈 버는 일은 없어요. 돈을 번다는 것은 자기에게 즐거운 일에 마구 돈을 내는 거예요.
처음 부분에서 이중구조, 차이점을 이야기했는데 아모스에 보면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모스 5장 21~23절에 보면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 드리는 것이 싫다 하면서 제사 드리고 예배를 드려요. 아예 안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제사 드리는데, 문제는 그것이 사전에 하나님의 재앙이 오는 것을 커버(막는)하기 위한 용도로 예배드리고 교회 나오고 경배하고 찬미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이걸 가지고 씻김굿(지노귀새남)이라고 보죠. 예배가 아니고 일종의 굿판 벌이는 거예요.
우리 한국 사람이 굿판 벌일 때 막대한 돈을 들여서 굿판을 벌이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 동네 저쪽에 가보면 나란히 굿집들이 있어요. 가면 시끄러워요. 굿판 벌이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에게 올 저주나 재앙을, 있는 재앙은 빼놓고 올 재앙은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 귀신에게 미리 수 쓰는 거죠. 조상 제사도 마찬가지고요. 어떤 집은 한 달에 한 번씩 조상 제사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현대인들은요, 귀신들도 혀를 내둘러요. 독하다고. 왜냐 하면 제사 드릴 때 제주도 여행가거든요. 제주도나 하와이 놀러 가서 거기 마트에서 제사 물건 사서 제사 드려요. 와~~귀신이 얼마나 학을 떼겠습니까? 이건 귀신보다 더 세네. 제사 드릴 것은 드리면서 자기 놀 것은 다 챙기고. 거기에 대해서 아모스 6장 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화 있을찐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라고 되어있고 4~6절에는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핵심이 나와 있습니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그러니까 다윗은 시편에서 노래하면서 성신이 임해서 하나님의 신이 찬양하게 했던 것이 나왔어요.
그걸 흉내 내는 거예요. 옛날 조상 때 복 받았던 다윗의 흉내를 그대로 복사하는 겁니다. 컴퓨터 자판에 복사기능키(Ctrl + V)처럼 그대로 복사해서 똑같이 해보는 거예요. 일종의 씻김굿이니까. 그러면서 6절에 결정적인 것이 나오죠.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라는 이겁니다. 요셉의 환란에 대해서는 근심치 아니한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짜 신앙인은, 말씀에 준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를 역사 속에 제대로 보여줬어요. 이것은 요셉 본인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마땅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인생이 뭐가 잘못되었기에 내 인생은 날마다 더 아래로, 지하실 쪽으로, 감옥같은 지하로 멀쩡한 나를 멀쩡하지 못하게 이렇게 조지십니까? 내가 원하는 거 있는데 왜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하나님께서는 벌려놓으십니까?
그것은 사람이 찾아가지 못하는 노선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찾으려고 아무리 애쓰고 심지어 환란과 고난을 흉내 내서 스스로 치고, 기도원에서 금식하고, 백날 해도 찾아갈 수 없는 노선이 우리를 마중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노리는 평강을 제끼고, 그것을 꺾어버리고, 그것을 찢어버려야 비로소 내가 예상치도 못한 평강이 확 밀려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복음이 열리고 말씀이 열린다고 하는 겁니다.
감춰있던 것이 비로소 면면을 드러내는 거예요. 어떤 분이 말합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 자신은 있어도 평생 결혼할 자신은 없다고. 심지어 삼십 대인데 그런 발언을 막 해요. 그것은 내가 결혼을 선택했을 때의 후유증을 미리 씻김굿 하듯이 미리 차단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차이를 이야기해도 기존의 자기 노선에서 노선 바꾸기가 인간의 힘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보라는 것은 요셉을 본받으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건 인간이 본받을 수 없어요. 말씀이 자생적으로 자기 내부에서 용암 터지듯이 말씀이 터져 나오니까, 말씀이 자기를 데리고 우연적으로, 우발적으로 데리고 가는데 자기가 현기증 나요. 자기 인생에 자기가 당황스럽다고요. 다윗도 마찬가지지만 다윗 이전에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상 10장에 보면 사울의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서 찾아오라고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나귀를 찾으러 갔는데 가다가다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사무엘이 있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그럴 때 10장 5~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생각했던 자기 인생 노선은 자기 가족과 일부예요. 가족과 일부인데 이 가족과 이별하고 엉뚱한 데로 하나님께서 몰아넣습니다. 아래에 11절에 보면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라고 나옵니다.
사울이 사무엘처럼 예언하는 거예요. 예언한다는 것은 미리 내가 예상도 못 하고 상상도 못 한 다른 세계가 사울에게 덮친 거예요. 본인이 예상한 것이 아니에요. ‘나는 무병이 있느니, 이것은 무당이 되어야 고칠 병이다’라고 하는 것은 예상한 거예요. 지금 형편이 호전되고 지금 형편이 앞으로 더 나아진다는 거, 좋게 된다는 거, 일종의 평강이거든요. 좀더 좋게 된다는 의도를 가지고 뭔가 해보겠다고 시도한 것이 아니에요.
사울은 그냥 하나님의 신이 임한 거예요. 그럼 누가 보면 사울은 이제 새사람 되었으니까 이제 그는 땡잡았다고 생각하지만, 성경해석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시대가 그만큼 하나님 말씀의 시대와 차이가 나는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이게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시대라는 겁니다. 사울같은 그런 작자도, 선지자도 아닌 것이 하나님의 예언이 임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특별조치가 임했다는 겁니다.
이건 비상사태라는 뜻이에요. 그만큼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시대란 뜻이죠. 악하고 음란한 시대에 세상 사람 따라서 우르르 같이 좇아가서 그냥 세상 시대 따라, 시절 따라 그렇게 가게 한다는 것은 인생 완전히 버린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수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예상도 못 한 다른 복음적인 발언을 쏟아놓는 것은 정말 행운아 중에 행운아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고린도후서 4장 말씀처럼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게 함이라는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가 성경에서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들어서가 아니라, 이건 하고 싶지 않더라도 그냥 나오는 거, 그냥 나오는 팔자, 칠자도 아니고 팔자, 말씀을 전달하는 전달체입니다. 이 세상은 요한계시록 8장 13절에 보면 독수리도 이야기하죠.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오늘 본문에 “평강, 평강, 평강이 있으리로다”라고 하는데 평강은 없어요. 화가 있습니다. 화가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을 준비하셔서 우리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34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차이나죠. 화평과 검. 35~36절 보면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 말씀을 제가 언급하는 것은 제발 이렇게 흉내 내지 마시라는 겁니다. 내가 신자도 아닌데 신자인 척하면서 갑자기 집에 가서 부정적 발언을 하고, 싸우고, ‘엄마는 나빠. 이 원수들 다 가’라는 식으로 그렇게 흉내 내는 것도 거짓 선지자들 하는 짓거리예요. 고난받는다고 해서 고난 흉내 내지 말고 차라리 비파나 뜯어서 소화제 환이나 만들어 잡수세요. 그게 나아요. 평소에 하던 대로 하세요.
이 몫은 순전히 마중 나오시는 오는 세대의 주도자, 그분의 몫입니다. 성경 말씀은 주님이 지키는 것이지, 주님이 우리에게 실현하는 것이지, 내가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어떤 차이가 올 때는 도리어 감사하시고, 그 차이에서 ‘나는 이렇게 했다’라고 하지 마시고 주께서 의도적으로 나를 품어서 차이를 차이 되게 드러내게 하신 거, 그것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차이 남을 통해서 나를 파악하게 되는 겁니다. 그 가운데 주님과 서로 사랑한다면 사랑은 서로서로 속박되는 관계죠. 주님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도 주님 앞에 버림받지 않는 거, 오히려 그것을 평강이고 즐거움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악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하지만, 저주받는다는 것이 확정되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무슨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오는 세계의 영을 받고 보니 주님을 선택하지 않은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 세상인 것을 날마다 새삼 느끼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