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일

180218 송민선 녹취록 댓글

아빠와 함께 2023. 2. 9. 09:54

임청일 180218

수고 많으셨네요,아포가토 드셨겠죠?

송민선 180218

장로님~딱 걸리셨어요~누구 물어봐 주는 사람 없나 기다렸는데~ 아직 못 먹었어요~검색해서 눈으로만 실컷 먹었네요~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아포가토 한잔 사주세요~^^~ 결심이 아니라 결정이 되면 좋겠네요~

 

173강-신 32장 26–31절(대적)1802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2장 26–31절입니다. 구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내가 그들을 흩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으나, 대적을 격동할까 염려라 원수가 오해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수단이 높으며 여호와의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함이라,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지식이 없도다,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한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을까,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니 대적도 스스로 판단하도다”

항상 모세의 노래는 모든 것을 당겨서 집약해서 하다 보니까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짐작하기도 곤란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을 필히 의도적으로 망하게 했다는 겁니다.

자기 백성을 의도적으로 망하게 함으로써 거기에서 뭐가 유발되느냐 ‘그것 참 고소하다, 잘 됐네.’라고 망하는 이스라엘을 보고 비웃는 자들이 주변에 생겨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유도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예수님이 맥없이 인간에게 무너짐으로써, 뺨 맞기도 하고 옷도 빼앗기고 함으로 말미암아 ‘어디 감히 까불어’하는 매 맞는 예수님 주변에 그동안 점잖은 체 했다가 그 속내를 다 들통 나게 만드는 이것이 하나님의 교묘한 전략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종말이라 하는 것은, 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중지되는 것이 끝이 아니고 우리의 적이 출현될 때 종말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적이 출현될 때. 그리고 그게 사실 우리의 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적이에요. 하나님의 적이 출몰이 되면서 ‘아, 하나님은 우리를 다독거리고 다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꼼짝 마라‘하는 그 배후에 힘이 있어요. 그 힘이 우리로 하여금 그동안 숨도 못 쉬게 만들었습니다.

그걸 권력이라 하는데 권력이라 할 때에 힘을 물리적 힘과 관계없이 정치적 힘을 표현할 때 권력이라 해요. 권력이라 할 때에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사법적 체제를 갖고 있고 또 하나는 제도적 체제를 갖고 있어요. 사법적 체제, 제도적 체제.

그냥 간단한 낚시 모임이라고 봅시다. 낚시 모임의 회비는 월 2만원 낸다. 제도적 체제죠. 그러면 2만원 안내면 어떻게 하느냐, 2만원 안 낸 벌칙으로 장비를 운반할 때 운반한다. 이렇게 벌칙이 들어가요. 이게 사법적 체제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돼요.

우리는 권력의 그물망 속에 있는 겁니다. 사람은 혼자 있다고 생각하지만 보이지 않는 권력망 속에 이렇게 엮여 있어요. 비록 그게 보이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항상 그걸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문제는 인간이 아무리 살아도 나를 이렇게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그 보이지는 않지만 실존하는 그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몰라요.

제가 명절에 처갓집에 갔는데 처갓집 갈 때마다 나올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책상에 보니까 뭐가 있느냐 하면 칠곡에 행복한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나눠준 게 있어요. 기도 제목 100가지 적으세요. 보니까 우리 장모님은 하나도 안 적었던데. 기도 제목을 100가지를 적는 거예요. 사법적 체계 그리고 제도적 체계입니다. 그리고 그게 일종의 권력이죠. “목사 말 교회 말 안 들으면 때려 죽여도 천국 못 들어간다.”하는 이러한 권력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길이 들어 있어요. 교회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길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 정신을 그렇게 압박을 해도 티끌이면서 그거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들통이 나요.

그렇게 압박을 했던 그것이 우리 힘으로는 못 벗어났지만 주께서는 그걸 벗어나게 해줬다는 겁니다. 언제? 마지막 때에. 마지막 때에 그 정체를 드러내는 거예요. 기도 백가지 안 해도 오늘 밤에 낙원 간 사람이 있습니다. 강도입니다. 그 사람은 헌금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하고 강도짓만 했는데 천국 갔어요.

무엇을 시사하고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기존에 너를 옥죄던 그런 법적체제 속에 어떤 구멍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게 완벽해 보이는 힘, 우리로 하여금 굉장히 힘들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위축되게 하는 거기에 뭔가 선이 있는 거예요. 선이...

좀 어렵게 말씀 드릴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점이에요. 그런데 그게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이게 선이 됩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선이 됩니다. 선이 늘어나면 이게 면적이 돼요. 점과 선과 면적이에요.

면적이 쫙 형성되게 되면 그 면적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 안이죠. 예수님은 그냥 보면 대상화 되지만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는 십자가 사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자랑하기를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자랑한다.” 예수 안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사건이 있고 사건은 어떤 것이냐 하면 기존에 법으로부터 따로 뽑아 낸 사람의 집합.

기존의 법에 눌리지 않는 사람들의 집합이 예수 안에 있어요. 그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강도도 세리도 그 직업을 묻지 않습니다. 기생 라합도 상관없어요. 오직 십자가의 용서하심에 거기에 끌려오는 그 사람들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권력 안에서 우리 힘으로는 권력 밖으로 갈 수 없고 하나의 긴 침 같은 거, 한의사가 사용하는 긴 침 있죠? 그 침으로 쑤셔서 들어왔단 말이죠. 내시경 같이 쑤시고 들어오는 선 같은 거. 그 선이 뭐냐 하면 미리 당겨서 우리에게 알려준 종말 이야기입니다.

미리 당경서. 우리는 종말이 안됐는데 이미 종말이 우리한테 쑥 와 버린 거예요. 그러면 종말이 아닌 것의 특징이 뭐냐, 말이 많아요. 굉장히 말이 많아서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말이 많아요. 종말이 와 버리면 내가 말한다고, 내가 기도한다고 그대로 응답 안 하시는 주님인 줄 우리가 뻔히 알기 때문에 그냥 입을 다물게 하죠. 입을 다물고 결과만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지금 무슨 이야기 인줄 잘 모르죠.

그래서 제가 예를 들면 옛날에 김태정 이라는 여자 분이 부른 노래 가운데 이게 있어요. ‘백지로 보낸 편지’가 있어요. 이게 가사 내용이 뭐냐 하면 옛날에는 그게 복음적으로 생각 안했는데 지금은 굉장히 복음적 같아요.

그리울 때는 편지로 글을 쓰세요. 보고 싶고 그리울 때는. 그러나 그리움이 너무 많아서 다 말을 못 할 때는 백지로 고이 접어 보내세요. 그러면 상대방이 그 편지를 볼 때에 너무 말이 많아서,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말로 차마 못해서 그냥 백지로 보낸 편지가 되는 겁니다. 오늘 저녁에 유튜브에서 한번 들어 보세요. 그 가수 얼마 전에 죽었어요.

종말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욥처럼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왜냐하면 살아가는 게 종말을 보여주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게 이렇게 말이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조용해요. 매끈하게 인생을 살게 되요. 조용하고.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은 시끄러워요. 그런데 말이 없는 사람은 조용히 간다고요.

그런데 조용하지만 그 본네뜨 안에 있는 엔진은 굉장히 웅웅거리면서 요란스러워요. 곁으로는 조용하지만 우리 안에서는 온갖 일들이 우리에게 들어 닥치고 있습니다. 온갖 일들이. 아이를 낳는 달지, 이런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데 거기에 대해서 성도는 이미 종말에 속하기 때문에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할 별 말이 없어요.

종말이라 하는 것은 일이 마무리 지어 졌다는 거예요. 내가 내 인생에 손 댈 필요 없이 마무리 지어 졌다는 겁니다. 뭔가 마루리가 안 지어 지면 자기가 안타까워 가지고 ‘주님,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리 되는데 이미 그 선 따라 우리가 종말에 속해 버리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그런 것은 아예 묻지도 않거든요.

왜냐하면 내가 잘못이 아니고 주변에서 그렇게 잘못되게 이끌어 가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사법적 체계와 제도적 체계, 제도적이라 하는 것은 가정도 포함돼요, 우리 집안에 가정 가풍 이것도 포함되고요, 이런 것들이 나를 옥죄었다는 말이죠.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가정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게 뭡니까? 가정에서 부부싸움이 일어나고 고부간에 갈등이 왜 일어납니까? 지금 이 가정을 잘 해보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말합니다. ‘잘 할 거 뭐가 있냐? 잘 해도 종말인데.’ 제가 이야기 했죠. 부부는 이미 이혼하고 시작한다고.

뭐 새삼스럽게 잘 해보자는 없어요. 그냥 옆에 붙어 있으니 고맙고 감사할 뿐이지. 새삼스럽게 뭘 잘해요. 잘하긴. 시어머니 되어가지고 태국 며느리한테 “이거해라, 저거해라”하면서 잔소리 늘어놓고 하는데...태국 며느리 모르죠? 우리 형님의 친구 분의 시어머니랍니다. 그게 티비에 나왔어요. ‘태국 며느리’라고.

거기 보니까 너무 잔소리가 많아요. “우리 가정은 이래야 되고, 이래야 되고,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알려줄게.” 태국 며느리가 기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남편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남편은 일주일에 한 번씩 와요.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종말을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냥 고요하게 살아가지는 않아요. 하지만 우리 마음은 고요해요. 왜냐하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내가 어떻게 처치하거나 처리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말하기를 “너희들은 반드시 망한다, 망하지만 내가 너희를 망하게 한 이유는 너희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고소하다, 잘 됐다, 꼴좋다’하는 식으로 너희를 미끼로 던져서 진짜 하나님이 치시려고 하는 그 거짓된”, 여기서는 반석이라고 되어 있는데 돌판 입니다, “잘못된 기준과 기초 가지고 드디어 노골화 될 때 내가 너희를 그동안 욕했던 것을 빌미로 해서 쳐버리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이 종말이 아까 제가 이야기 한 것처럼 오늘 본문 30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한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을까” 이스라엘의 외부 적들이 한명이 왔는데 이스라엘 천명이 도망가고 두 명이 쳐들어가니까 만 명이 도망을 갔을 때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이스라엘보다 더 똑똑하고 힘이 세서 그렇다”라는 그러한 잘못된 기초, 그걸 여기 성경에서는 다른 반석이라 했어요, 대적의 반석, 적들의 반석, 뿌리, 그 인삼 뿌리 있지요?, 그 뿌리가 드러날 때, 거기 29절에 보면 “그들이 종말을 생각했다면, 자기 종말을 생각하였다면” 뿌리가 드러날 때 끝이 다 드러난 거예요. 그들이 평소에 하는 행동들이 어디서 나왔는가가 다 발각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할 것은 뭐냐? 그걸 제가 지금 말씀 드리겠습니다. 결정과 결단을 구분만 해주시면 돼요. 결정과 결단을. 결단부터 먼저 합니다. 결단은 뭐가 하느냐하면 이건 하나님의 적들이 하는 거예요. 결단은 뭐냐 하면 자기한테 계속해서 희망을 거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내 선택이 내 미래를 결정한다.’ 이게 결단이거든요, 결정이 아니고.

평소에 계속 결단하는 거예요. 내 결단으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이 될 거라고. 어떤 분이 저한테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목사님이 전한 복음이 복음이라고 믿기로 저는 결심했습니다.” 저는 안 믿지요. 왜? 본인이 결심했기 때문에. 본인이 결심한 거예요. 자칫하면요 “나는 이 목사님을 좋아합니다.” 해놓고 “나는 이 목사님 좋아하는데 이 목사님은 저를 좋아하지 않습니까?”라고 삐져서 결국 나가요.

또 뭐가 결정되었어요. 본인이 본인 결정한 거예요. “이정도 이렇게 바쳤으면 이정도로 나한테 붕붕 띄어 줘야지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뭘 띄워줍니까? 제가 먹는 커피가 아포가토입니다. 아포가토를 먹는데 약간 비싸긴 해요. 아포가토의 특징이 뭐냐 하면 뜨거운 커피에다가 아이스크림을 놓는 거거든요. 좀 있으면 아이스크림이 녹아요. 없어요. 예수님의 뜨거운 피에 나의 결단이 녹아가고 사라지는 그 모습이 종말을 아는 모습 아닙니까? 내가 이 땅에서 어떤 결론을 했고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길을 결정을 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개코로 여겼다는 사실. 전혀 주님은 거기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주님의 관심사는 내가 아니고 나를 붙잡고 있는 악마의 힘을 어떻게, 더운데 외투 벗듯이 확 벗겨 내느냐 거기에 관심이 있지, “너 똑바로 해!” 똑바로 하면 구원 받습니까? 오늘 집에 가서 할게 두 개 있어요. ‘백지로 보낸 편지’ 들어야 되고, 아포가토 한번 먹어 봐야 해요. 아이스크림 녹는 거 한번 보세요. 조금만 있으면 녹아 갑니다. 없어집니다. ‘나’라는 것이 점점 나이 60, 70, 80, 90 되어 가면 없어져요. 우리 어머니 벌써 없어 졌잖아요. 앞에 계시다가. 요양병원 가셔서 없어졌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모든 것이 빙산 녹듯이 수면 아래로 가버려요. 그러면 그걸 녹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게 종말을 종말이라고 알려주는 십자가의 피의 힘이 우리가 갖고 있던 법의 힘, 명예, 체면, 위신의 힘을 아포가토처럼, 오늘 제목을 아포가토라고 하고 싶은데, 이걸 녹여 버리는 겁니다.

“남 눈치 그만 봐라. 내 눈치를 봐야지.” 뭐, 주님 눈치는 볼 것도 없지만 왜 우리 주님 눈치 안 보고 왜 이렇게 하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남들 눈치보고 자꾸 그때그때 마다 자기 결심과 결정과 선택을 그때그때 마다 해야 돼요. 하는데 이게 자기도 나중에 하도 결심을 많이 해가지고 자기도 바뀌어요.

그러면 남은 문제는 이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결단에서 결정으로 바뀌느냐? 이게 바뀌어야 하거든요. 결정은 뭐냐 하면 나의 행함 관계없이 이미 종말에서 그렇게 되도록 몰아세운 거예요. 이게 결정이에요. 결정은 손 못 댑니다. 내 결단이 결정을 바꿀 수가 없어요.

자식이 말을 안 듣는다는 거. 자식이 말을 안 들을 때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내 말을 안 듣는 자식일 때는 내 쪽에서 자식에 대한 미련과 애정을 끊으라고 하나님께서 그런 결정을 주신 거예요. 자식에 대해서 자꾸 이렇게 애착을 갖고 있으니까 끊어 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식 배후에 누가 있느냐, 악마가 그렇게 약을 올리듯이 했다는 말이죠.

‘나는 딴 거 괜찮은데 자식 때문에 망했다’ 자식 때문에 망한 게 아니고 우리가 원래 망한 거예요. 원래. 그 사법적 체제, 제도적 체제 그걸 의식한다는 자체가 원래 망한 거예요. 그러면 남은 문제는 이건데, 이 이야기 안 하면 마무리가 안 지어져요.

뭐냐, 결단에서 맨달 결심으로 선택하는 이 결단에서 결정으로 어떻게 바뀌는가? 옛날에 한 천 년 전 멕시코나 아프리카의 고대 신화를 보게 되면 그때 각 민족마다 사원이 있어요. 신을 향하여. 앙코르와트에 사원 있지요? 그 사원에는 특징이 있어요. 사법적 체계와 제도적 체계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신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예를 들어서 쉽게 해 보면 캄보디아 나라에, 그 나라가 힌두교거든요, 힌두교 앙코르와트 그 사원에 천 몇 년 전에 제사를 드렸다 합시다. 종교 의식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숲속에 있는 표범이 거기에 난입을 했다고 칩시다. 이거 재미있는 거예요. 잘 들어 보세요. 지금 한창 신에게 제사 드리고 있는데 이 신성한 장소에 표범이 난입을 했어요. 그러면 엉망진창이 될 거죠. 지금 신이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기 목숨이 달아나게 되었단 말이죠. 그러면 그 사제가 나중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때 제사 드릴 때, 표범이 난입한 그것도 우리 신의 제사의 일부로 신이 그렇게 집어넣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다음 해에 제사 지낼 때는 그 전에 제사장이 표범 새끼를 사육을 해요. 사육을 해가지고 그때 난입했던 그 표범 중간 쯤 되가지고 이렇게 묶어 놓은 표범을 한 번 보는 겁니다. 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때 우리가 표범에 다 물려 죽을 뻔 했지만 이렇게 신의 은총으로 살아서 이렇게 신께 제사 지냅니다.”해서 그 다음부터 정기적으로 표범이 제사 드리는 절차에 일부로 계속 편입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지독한 법적 체제입니다. 무슨 일어나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정기적으로 하는 겁니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죽기 전날 밤에 주께서 떡을 떼고 잔을 주셨다는 겁니다. 주니까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제는 예배드릴 때 마다 성만찬을 정기적으로 하는 거예요. 마치 사원 속에 표범이 난입하는 것처럼 그게 들어가야 올바른 법적 체제를 갖춘 바른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병도 없이 안 아프게 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는 여전히 자기 결단 자기 선택을 신의 이름으로 옹호하는 겁니다.

천주교 신자들 방에 가보면 마리아상 있고 성경책 펴 놓고 묵주 이렇게 놓고 예수님 십자가도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미사를 가정 내에 가져와서 미사를 반복하는 거예요. 이런 반복을 한다는 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반복적인 법적 체계에 스스로 휘말려 가는 겁니다. 그런데 설교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뭘 로 선언했다? 종말로 선언했어요. 종말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종말이 점인데 십자가 점에서 선이 나오고 선에서 면이 나와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우리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의 하는 일의 일부가 되었지 우리가 우리 구원하는 데에 있어서 예수님이 일부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요소를 우리가 집어넣는다고 한다면 집어넣는다고 결심 했다면 그것이 어떤 예배이던 다 거짓입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의 예배에 부분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뭐가 예배냐? 신령과 진정으로. 그게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가, 그 고백이, 그 감사가, 그 고마움이 바로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되는 겁니다.

자식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요? 남편은 아내 때문에 성질나고, 또 나 때문에 성질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사 종말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거예요. 그럴 때 마다 우리가 처음에는 불평하죠, 화가 나죠, 하다가 그때는 주님 앞에 편지를 보내세요. 무슨 편지? 범사에 감사하는 편지. 그렇다고 ‘감사합니다’ 백 개 적지 마시고 그냥 백지로 보낸 편지처럼 ‘주께서 기도해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라고 보내 놓고, 따뜻한 물 끓여 가지고 아포가토 하나 잡수시면 그게 영적 예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정말 주께서 우리를 다루어서 주의 일을 하는데 참여 시킨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이 성도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차원에서 성령 받은 이 성령이 중요하고 주님이 중요한 것을 못난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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