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일

180225 이미아 녹취록 댓글

아빠와 함께 2023. 2. 9. 10:24

 

임청일 180225

평창올림픽 폐회식을 보다가 잠간 들렸더니 광주강의가 올라와있네요.
금요일저녁강의를  벌써 올리시다니 감탄이 아니라 존경합니다."피"에서 읽은 한귀절이 미아님께
어울리는 듯 싶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심장 뛰는 소리와 같은 진동수를 가져야 한다.예수님의 외로움과 서러움에
연결되어 같이 호흡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실존이다"

 

 

 

광주강의20180223a 마가복음11장 20절-25절(구사일생)-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1장 20-25절입니다.

 

20절,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21절,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 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구원하시려고 한다면 제자들만 구원하시면 되는데, 왜 애꿎은 무화과나무를 작살을 내시느냐, 그것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가 이어지려면, 그것을 매개라고 하는데, 연결체, 매개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는 그냥 제자들이 예수님 쪽으로 다가설 수가 없어요. 연결 될 수 있는 매개물, 또는 매개체가 있어야 되는데, 이 매개체로 동원이 된 것이 무화과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면 제자들은 알아듣는 척을 해요. 알아듣는 척을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만. 그렇다면 진짜 내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를 한 번 보자, 라는 예시로 등장한 것이 무화과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았다는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설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의 바탕에 분모와 분자가 있어요. 분자가 말씀이라면, 분모는 뭐냐 하면 저주가 깔려있어요. 저주 위에 말씀을 실어서 전달한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 입장에서는 “랍비여!”, 선생이라고 했으니까 좋은 관계로 여기는 겁니다. 우리 사이에는 뭐 이렇게 거치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베드로나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인간은 자기를 규정할 때 타인과 비교해서 규정을 해요. 나와 남들. 인간 대 인간으로 비교해서 나는 이 정도라고 자기 자신을 규정을 하는 겁니다. “너 너희 반에서 몇 등 하냐?” 이런 것. “선생님은 너를 예뻐해? 아니면 다른 아이를 예뻐해?”라고 이렇게 할 때,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나는가, 그런 것을 통해서 자기를 규정하고 자기 자신이 나는 누구라고 정립을 하게 됩니다.

 

근데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정립하는 그것은 대외용이에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남의 기분에 맞춰주려는 대외용이지, 본인이 뭐라고 확정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없어요. 이 사람 앞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 사람 앞에서는 저렇게 이야기를 해가지고, 자기주변 환경에 따라서 자기가 살아남는데 유리하게 작용하게 하려는 그것만 자꾸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도 없을 때는 정작 내가 누구냐? 라는 것은 몰라요. 인공지능 장난감이나 아이들이 노는 소꿉놀이나 어른들이 갖고 있는 개나 고양이, 이런 것들이 왜 있어야 하느냐 하면 사람이 대화를 하지 않고서는 본인이 본인을 정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대화가 없이는.

 

자기밖에 없다? 인공지능이라든지 뭐가 있어야 이야기가 되는 가운데 내가 어떤지를 알 수가 있거든요. 이번에 우리 손녀가 한 6개월 있으면서 소꿉놀이를 하더라 이 말이죠. 소꿉놀이를 할 때, 인형도 있고 주방기구도 있는데, 노는 것을 보게 되면 한결같이 대해주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성질이 나게 되면 조금 전까지 예뻐했던 인형도 그냥 패대기를 쳐요. 그리고 좀 기분이 좋으면 갑자기 그 인형들한테 잘해줍니다. 내가 기분이 좋다는 것을 그 인형에게 반영하고, 그 반영된 것을 도로 회수하면서 자기규정화, 자기정당성을 보장받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그게 안 되잖아요. 반려견을 키우는 것은 우울증 예방조치로 괜찮다고 하는데, 그게 일리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두뇌라는 것은 혼자서 마련된 것이 아니고 주변의 같은 두뇌를 쓰는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가운데서 공유를 느껴요. 공명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공명현상(특정 주파수에서 큰 진폭으로 진동하는 현상을 말한다. 진동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에는 에너지의 교환이 쉽게 이루어진다). 인간의 두뇌가 공명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쇼트트랙 계주를 하는데, 지금 2등으로 가고 있는 최민정이가 갑자기 추월을 하게 되면 갑자기 함께 달리고 있는 선수들이 우르르 막 달리죠. 이게 공명현상이 일어나서 그래요. 그 분위기에 훅 빠져버려요. 그 분위기에. 그래서 인간은 분위기 때문에 살아요. 분위기 때문에. 분위기를 같이 조성해줄 수 있는 사람 때문에 산다고요.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할 때 아주 신이 났어요. 왜? 스타를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이것은 완전히 대선투표로 결정이 난 그 마당에서, 그런 상황에서의 유력후보를 보좌관들이 보좌하고 있는 그 기분이죠. 유력후보를 보좌관들이 갖고 있는 그 기분, 보좌관의 그 위세가 있잖아요.

 

이제 세상은 내 세상이다. 그걸 만끽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분위기에 휩쓸려가지고 내가 누구냐를 모르는 거예요. 오히려 분위기에 잠식되고 만 것입니다. 식구라는 게, 가족이라는 게 이 두뇌가 하나로 공명된 상태에, 분위기속에 모여 있어요. 그들은 내가 누구냐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없고,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그 분위기에 같이 휩쓸릴 마음준비가 되어 있어요.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그 단체에, 그 집단에 항상 호응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죠. 그런데 그 중에서 누구 하나 배신한다든지 죽어버린다면 그 다음부터는 허탈한 겁니다. 내가 할 일이 없어지고 갑자기 멍해지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 대 인간을 비교하면서 자기를 규정하지만, 자기가 비교하는 그 인간종류, 인간 류(類)의 일부로서 편입된 상태입니다. 자기는 예수님의 제자고 너희들은 예수님 제자가 아니라고 으스댈지 모르지만, 자기가 정당하다는 것은 나는 예수님과 아는 사이고 너는 예수님과 모르는 사이잖아, 라는 그 인식 자체가 주님보시기에는 여전히 같은 인간류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간을 대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은 제대로 들을 수가 없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가가서야 되고, 또 다가간 다리를 통해서만 인간들은 예수님과 접근하고 합류가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나는 길이라고 했죠. 예수님이 길이라는 말은 인간에게는 길이 있다? 없다? 인간에게는 길이 없는 겁니다. 내가 길이요, 너희들과 같이 합쳐서 길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길이라면, 너희들이 나를 안다는 것은 전부 다 폐기처분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너희들 안목에서 예수님은 이런 분이고 저런 분이라는 것을 다 폐기처분해야 돼요.

 

그런데 폐기처분이라는 것은 일단 뭔가 새로운 것을 얻어놓고 난 뒤에 폐기처분을 해야 되는 거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폐기처분하면 나중에 깡통 되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폐기될 수가 없죠. 인간은 아무리 폐기해도 꾸준하게 뭔가 내놓는 것이 있는데, 그것마저 폐기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해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반드시 뭘 제거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예수 믿고 있다는 그것을 아는 요소는 이게 제거가 돼줘야 돼요.

 

여기 물이 있는데요, 나는 물을 먹는다고 할 때 그냥 물만 보여서 물만 먹으면 되는데, 이게 혼자 있을 때는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여러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내가 물을 먹으면서 물을 먹는 그것을 본인이 인식을 하게 돼요. 그러면 이거는 다른 사람이 있어서 그렇다든지, 아니면 물 먹고 난 다음에 할 일을 생각했다든지, ‘우선 물 먹고 뭘 하려고 했더라? 양치를 하려고 했나?’라는 이런 게 있다고요. 이럴 경우에는 나는 물을 먹는다는 것이 본인에게 인식이 돼버리죠.

 

물을 먹을 때는 그게 괜찮지만, 믿는다고 할 때는 내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그 내용은 빠져줘야 그 믿음의 내용이 온전하게, 예수님의 내용으로만 채워질 수 있잖아요. 그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22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기에 믿음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으라” 이 이야기를 여기 공식(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매개체)에다 맞춰버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제시한 길, 매개체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 쪽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시한 매개체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는 ‘그럼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라고 나올 거예요. 이건 쉬운 거예요. “예. 하나님이 하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그 매개체를 뭐라고 하십니까?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라는 매개체를 제시한 거예요.

 

인간이 산을 보고, 아! 산이 있다고 했는데 그 뒤에 바다가 있다고 봅시다. “저 산이 푹 들려서 바다에 빠지라고 하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할 경우에만, 이 경우에만 이게 믿음이라고 쳐주겠다고 이래 나오신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멩이를 들어서 바다에 던져 빠지게 하라는 이 예를 들었습니까? “니가 돌멩이를 들어 바다에 던져서 빠지면 내가 너의 믿음을 인정해주겠다.” 이랬습니까? 아니죠. 돌멩이 들어서 바다나 강물에 던지는 것은 이미 인간들 세계에서 인간들이 하고 있는 거잖아요. 다 하고 있단 말이죠. 애들이 물수제비뜬다고 탁탁 던지잖아요. 이미 하고 있는 거잖아요. 이미 하고 있는 것을 믿으라고 하면 그건 쉽죠.

 

그런데 믿으라고 하니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쉬운 것, 그러니까 “내가 하는 그것을 내가 믿을만한 경우에만 나는 믿는다는 행동으로 내세울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것으로 인간은 완전무장이 되어 있어요. 인간은. 인간이 믿는다는 것은, 내 쪽에서 얼마든지 결심해서 믿음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라는 그것이 확정된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새삼스럽게 믿으라고 하니까, “내가 지금 잘 믿고 있는데 또 뭘 믿어? 하나님이요? 아, 하나님 믿죠.”라고 나오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느 수준이냐 하면,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빠지라고 할 때 그대로 될 줄로 믿으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그것에 합당하다는 이런 수준인 거예요.

 

그러면 이런 인간에게서는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는 이런 믿음이 나올 수가 없죠. 나올 수가 없어요. 몰라요,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산을 깎아서 간척지 만든 그런 직업, 토목회사 사장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다른 것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뭐 뱀을 잡아서 오뎅을 만들라고. 인간으로서 평소에 자기가 나는 이 정도 할 수 있다고, 자신을 믿는 요소 말고 다른 요소를 집어넣었을 겁니다.

 

결국에 이거는,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설 때는 반드시 매개체를 거치는데, 그 매개체의 바탕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주에요. 쉽게 말해서 “너는 나를 믿을 때 네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가지고 나를 믿을 수가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을 들어서 바다에 빠지라고 하는 그것을 제시하기 전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거예요. 무화과나무 이게 저주 받을만했느냐? 라는 것을 인간들에게 그냥 토론으로 넘기는 거예요. 저 무화과나무가 예수님께 저주를 받았는데, 과연 우리가 무화과나무 입장이라면 저주받을 짓을 했는가를 보자 이 말이죠.

 

때가 안 됐는데 과실을 찾았어요. 때가, 과실 맺을 때가 아니었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과실을 원하는데, 과실 맺을 때가 안 되어서 과실이 없는데,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데, 예수님께서는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를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누가 황당하겠어요? 그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을 보고, ‘좀 심하다. 저건 너무한 게 아니야? 참, 무화과나무가 이성이 없고 감정이 없어서 참고 있지. 우리 같으면 저게 참을 일이냐? 아무리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분이지만 일방적인 폭거(몹시 거칠고 사나운 행동)다. 상대방을 개무시하는 짓이잖아.’라고 그들이 생각을 했다면, 그것이 진짜 하나님 앞에서 진짜 자기의 모습이에요.

 

그동안 인간과 인간들끼리 비교하다보니까, 뭐, 좀 착한일 하면 복 받고 나쁜 일하면 벌 받는다고, 뭐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잖아요. 성경에서 우리 성도에게 원하는 것은 착하지 말라는 거예요. 착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나쁜 짓 적게 하고, 이게 아니라 뭐냐 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이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누구의 증인이 되겠어요? 자기가 착한 일을 해놓고 그것을 잊어버리겠습니까?

 

길에서 돈다발이 떨어져있는데 그걸 주워보니까 2500만원이었다. 그것을 아낌없이 파출소에 가서 신고해서 주인을 찾아줬다. 뭐라고 해요? MBC, KBS에서 와가지고 “이거 참 착한 일을 하셨습니다. 정말 바른 시민으로서 바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때 보통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내가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라고 하거든요. “내가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2500만원이니까 주인 쪽에서 고맙다고 한 500만원을 주는데, “아이고, 이건 내가 할 바를 했을 뿐이니까 이거 안 받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 계속해서 뭐가 누적이 되느냐 하면, 인간은 집단속에서 자기를 파악하기 때문에, 자기는 남들하고 비교했을 때 남들이 못한 짓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남들이 못할 일 중 하나가 “이거는 남들이라도 다 했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이 겸손조차도 남들이 쉽게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이 만약에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천 국 갈 리가 없지만, 천국에 간다고 치면, 천국 가는데 뭐가 기여했다고 생각을 하겠어요? 내가 남들이 안 한 착한 일을 한 그것이 내가 예수를 믿는데, 천국에 가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겠죠.

 

그러면 뭐와 점점 멀어집니까? 이 일방적인 저주성, 일방적인 개무시가, 이게 점점 더 멀어지겠죠. 제 말에 약간은 동의를 안 하는듯한 얼굴인데, 만약에 길에서 2500만원을 주웠다고 하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고 차를 몰고 가다가 길에 술 취해서 누워있는 사람을 밟고 지나갔어요. 그 사람이 즉사했습니다. 체포가 됐죠. 요새는 CCTV가 다 있으니까. 몇 시에 차가 지나갔는지 조사하면 다 나오니까. 그때 주위에서 뭐라고 합니까? 우~하고 사람들이 나서서 “저 인간 죽여 버리지 왜 살려두느냐, 술 취한 인간은 인간이 아니냐, 왜 잔인하게 밟고 지나가느냐?”라고 하겠죠. 그러면 그 소리를 듣고 이 사람이 그걸 잊어버립니까? “뭐라고 했어요? 나는 도저히 기억이 안 나는데?” 인간이 이렇습니까?

 

유별나게 착한 일을 했거나 유별나게 나쁜 일을 했거나, 그걸 잊지를 못해요. 착한 일 했기 때문에 보상으로 기대하게 되고, 나쁜 짓했기 때문에 그 정신상태가 쫓기는 겁니다. 언젠가 누가 혹시 지난여름에 내가 한 일을 알게 되면 어떡하지? 늘 이렇게 뭔가에 평소에 쫓긴단 말이죠. 이윤택이 얼마나 쫓겼겠어요? 조민기도 그렇고. 조재현이도 그렇고. 이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심적으로 쫓겼겠습니까? 그런데 쫓기면서 위로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착한 일 한 것만 기억해놓고 나쁜 일 한 것은 무의식적으로 억압을 시켜버린 거예요. 억압을 시켜버리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날카로워지니까 술을 더 처먹고, 처먹으니까 개짓거리(성폭력)가 또 나오고.

 

결국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의 믿는 구석이라고는 내가 한 행위를 믿어요. 내가 한 행위를 믿는다고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은 자기가 나쁜 짓 한 것이 분명하고 과거에 진짜 입에 끄집어낼 수 없을 정도의 짓을 했는데, 그럼 어떻게 하면 사람이 됩니까? 하시는데, 그런 짓을 해도 괜찮다니까요. 누구만 증거 하라? 예수님만 증거 하라고 했잖아요. 방금 전에 기쁜 소식이 나갔는데요.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과거에. 예수님을 증거 하라니까요. 예수님을 증거. 안 되지요. 안 되니까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

 

심적인 압박감, 그것이 우울증으로 발전, 곧 자살 직전에 드디어 교회에 나왔다. 교회에 나와서 그 불길하고 쫓기던, 마귀에게 쫓기고, 주위사람들이 있는 곳에 늘 모자 쓰고 다니고, CCTV에 얼굴이 안 나오게 하고, 이렇게 불안 불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울고불고 회개하면서 이제는 새사람이 되어서 살 테니까 과거에 했던 일에 대해서 징벌이, 천벌이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누구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을 믿고 있어요. 본인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는 예수님, 하나님 뜻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베드로에게, 제자들에게 그렇게 많은 혜택을 준 것은, 베드로에게 자력으로 예수님을 떠나가도록 한 거예요. 베드로가 본인을 몰라요. 내가 이 세상과 한통속이라는 것을 인정을 한 하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다녔기 때문에. 세상과 떨어져서 이제는 예수님과 같은 세계에 있다고, 같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근데 이 자리가 인간을 만듭니다. 이 자리가. 예수님은 베드로가 아니라 새로운 베드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예수님 본인의 자리가 이 세상에 확고하게 최종적으로 확정이 되어야 해요. 예수님 자신의 자리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영이 나오고, 그 영이 나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영이 임한 순간, 전에 알던 본인의 자리는 죽고 예수님의 자리에다가, 십자가 안이죠. 예수 안. 그 자리에 들어온, 편입된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개인적으로 누구냐, 라고 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어요. 개인적으로 누구냐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내 이름이 뭐다, 라는 것은 필요 없어요. 예수님의 대리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나오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자, 옷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이죠. 안쪽을 덮어주는 바깥이잖아요. 외양, 형식, 형태라고 이야기해요. 또는 내부를 커버하는 거죠. 덮어주는 겁니다.

 

28절, “너희가 유대 인이나 헬라 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니가 헬리인이든, 헬라인이 유대인 될 필요 없고, 여자가 남자가 될 필요가 없어요. 하리수가 쓸데없는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될 필요가 없어요.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디에 있든 간에 그 자리가, 예수님이 마련한 그 자리가 그 사람이 어떤 직업에 있든, 어린애든 여자든 관계없이 그 사람은 성도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29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주님께서 구원을 해주는 조건은 주님 쪽에서 제시가 되어야 되지, 인간 쪽에서 주어진, 자기의 믿음이나 행함을 가지고 심사하지 않습니다. 심사대상이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그거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심사 자체가. 인간의 것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니가 우에 했는가 보자~! 라고 한다는 것은 지옥백성으로 간주할 때나 그렇게 된다고요. 지옥백성으로.

 

그러면 사탄이 하는 일이 뭐겠어요? 사탄 본인은 지옥 갈 거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어요. 그럼 사탄에게서 나올 성격은 뭐가 나오겠어요? 지옥 갈 성격만 나오겠지요. 그럼 지옥 갈 성격이 뭡니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서 보자~! 하고 살피는 것이죠. 길에서 2500만원 주웠는데 돌려줬느냐, 아니면 술 먹고 운전해서 사람을 죽였느냐, 보자~! 라고 누가 누굴 봐요? 내가 계속 나를 보는 거예요.

 

근데 방금 뭐 사탄이 본다고 했는데요? 인간에게는 사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모든 사고체계의 종결, 마지막 막으로,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종결을 시켜놓고 자기는 뒤에 숨어버린 거예요. 인간이 아무리해도 사탄이 안 나오죠.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종결시키도록 사탄이 그렇게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마음을 집어넣어줬거든요. 절대로 영적으로 못 오도록.

 

분석하고, 분석하고 따지고 따져봤자 사람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위해서, 끝이에요. 철학과 과학과 모든 학문은 인간으로 시작해서 어떻게 인간이 어떤 결실을 맺을 것인가, 그걸로 이야기가 끝난 겁니다. 종교라는 것도 인간을 위한 종교죠. 인간을 위한 종교 아닌 게 없어요. 모든 종교는 인간을 위한 거예요. 그래서 이성적이에요. 인간을 위한 것이라서 이성적인 거예요. 심지어 상상하는 것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에요.

 

만약에 천국을 생각한다면 그 천국은 어떻게 운영이 될 것인가, 이게 인간이 갖고 있는 합리성을 거기에다가 그대로 대입한 거잖아요. 말로 설명될 수가 없다가 아니라 말로 설명될 수 있는 천국생활을 그리도록 되어 있어요. 말로 설명이 되는. 인간의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아예 없는 겁니다. 인간이 꿈을 꿨다. 꿈을 뭐로 표현합니까? 언어로 표현하잖아요. 보세요. 언어로 표현된다니까요. 모든 게. 언어로 표현된다는 것은 꿈의 세계도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에요.

 

좀 불합리해서 절벽을 뛰어넘고 하더라도, 그 불합리처럼 보이는 그것도 사실은 합리에서 약간 추가된 거예요. 희망사항이죠.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는데 꿈에서나 좀 날아볼까 할 때는,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플러스 더 추가한 거예요. 추가한 것. 욕망이 그 일을 해요. 여분의 것, 잉여, 여분의 것이라고 합니다. 여분의 것이 되려면 기존의 것이 바탕이 되고 난 뒤에 플러스알파(+ᵅ)하면 여분의 것이 돼요. 인간의 모든 종교라는 것도 여분의 것이에요. 낯선 것이 아니고 여분의 것이라니까요.

 

낯선 것은 관계가 없는 거예요. 군에 갔던 아들이 “충성! 아버지 제대했습니다.” 이래 하면 이거는 있던 애가, 학교에 다니다 군에 갔다 온 잉여의 것을 했구나, 장하다고 하는데, 나중에 군에 갔다가 온 아들이 여자목소리로 “충성~! 저는 남자였는데 군에 가서 여자가 되어서 왔습니다.”하면 이거는 잉여가 아니고, “아가씨! 누구세요?”가 되죠. 이거는 여분의 것이 아니고 낯선 것이라니까요. 낯선 것은 뭐냐 하면 기괴함이에요. 기괴함. 이것을 인공지능 로봇에게 언캐니uncanny라고 하는데, 친근하지 않다는 거예요. 언캐니uncanny(‘불가사의한, 무시무시한, 신비로운, 으스스한, 기괴한, 기분 나쁜’)라고 하는데 기괴해요.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보면 메시야가 올 때 어떻게 옵니까? 낯설게 오잖아요. 인간의 호응을 전혀 받지 못한 그런 모습으로.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제자들에게 항상 충격이었어요. 왜냐하면 예상 못할 일이기 때문에. 예를 들면 바다 위를 배타고 간다. 이건 정상적이죠. 배가 흔들린다. 아주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바다를 보고 꾸짖는다는 것은, 뭐 사전에 조율이 된 게 있습니까? 제자들에게 납득이 될 만한 조율된 게 있어요? 없잖아요. 조율된 게 없죠.

 

성전세를 낼 때 고기 한 마리를 잡게 해가지고 그 고기 아가미를 벌려보니까 거기에 동전이 들어있어요. 어디 뭐 백화점 이벤트 경품잔치 합니까? 제가 만약에 백화점 주인이라면 백화점 이벤트 할 때, 20주년 기념이라고 큰 어항 만들어서 고기에다가 금 한 돈씩 집어넣어가지고 낚싯대로 금이 들어있는 고기를 잡으라고 하겠는데, 근데 이거는 예상이 되잖아요. “금이 들어있는 고기를 잡으세요.”라고 하니까, 이건 예상할 수 있죠. 근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게 없었어요.

 

특히 창기가 천국에 간다? 이게 지금 이퀄(=)이 돼요? 창기=천국? 창기는 어디에 적당합니까? 지옥이 적당하죠. 더러운 몸을 파는 여자는 어디에 갑니까? 지옥에 가야 되는데, 창기 이퀄(=) 천국이 될 때는 이거는 언캐니uncanny, 괴리한 거예요. 무화과나무를 주님께서 다룰 때,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다룰 때 제자들은 뭘 느끼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평소에 나를 다루다가 지금은 무화과나무를 다루는데, ‘나를 다루는 것과 무화과나무를 다루는 것과는 같은 예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동일하게 처리할 것이다.’라는 것을 느껴요. 이거는 맞아요.

 

동일하게 처리하기 때문에 아마 사랑으로,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더라도 사랑으로, “그래. 내가 성질이 급했네. 때가 안 됐는데, 요새는 내가 정신이 없어서 때가 안 된 것도 모르고 그냥 막무가내로 열매를 달라고 했구나. 내 쪽이 문제다.”라고 이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저주를 했으니까, 그럼 누구 쪽이 잘못이에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예수님의 그 처신이 낯설게 보이는 거예요. 제자들에게는. 낯설게 보인다는 것은 기존의 제자들이 갖고 있던 사고방식과 예수님의 사고방식이 이게 끊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거예요. 끊어져 있다는 느낌을.

 

자 그러면 이게 끊어져 있을 때에, 이게 단순히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무화과나무를 뭐 했습니까? 저주를 해버렸죠.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으니까, 저주받을 짓을 안 했어도 저주라는 결과가 나와 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떤 저주받을 짓을 했는지, 제자들은 억지로라도 찾아내야 돼요. ‘저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을 짓을 했는데 어떤 짓을 했을까?’ 찾아보니까 예수님이 제시한 저주받을 근거는 전혀 합당하지 않아요. 때가 안 됐기에 과실이 없었어요. 그럼 근거를 찾을 수가 있어요? 없어요? 못 찾죠.

 

이거는 내가 누구냐를 그들은 계속해서 모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를 모를 경우에는 인간은 매일같이 본인이 본인을 속입니다. 오늘은 어떤 사람이 됐다가 오늘은 또 어떤 사람이 됐다가, 오늘은 이렇게 됐다가, 오늘은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싹 쓸어버린 자랑스러운 선수가 속해있는 나라의 국민이라고 기대했다가, 모조리 한국선수들끼리 부딪쳐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해서 금메달이 아닌 노메달이 되어서, 범국가적인 창피를 느끼고, 갑자기 수치를 느끼고. 왜 갑자기 창피와 수치를 느끼죠? 쇼트트랙 금메달을 딸 그날에 못 땄으니까. 당연히 금메달을 딸 거라는 것을 당연시했잖아요. 못 땄잖아요.

 

근데 스피드 스케이팅 500미터에서 김태윤 선수가, 이거는 못 딴다고 했는데 은메달을 땄잖아요. 은메달 땄다고 자랑스러워서 난리라. 그리고 컬링에서 4강 진출했다고 해서 “갈릭garlic소녀! 마늘소녀! 의성 영미!”라고 하면서 난리죠.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지금껏 컬링에서 메달을 따 본 적이 없거든요. 인간은 상황 따라서 자기 자신이 변해요. 이걸 저는 속인다고 본 거예요. 속인다. 자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단어교체가 연발, 연발, 마치 연발총처럼. 인간은 계속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20대면 20대의 자화상, 30대면 30대의 자화상. 50, 60대의 자화상, 100세 때의 자화상은 뭐가 있을지, 귀신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자화상이 계속 바뀌어요.

 

그래서 언어에서 기표(記標, 귀로 감지할 수 있는 말의 외적 형식), 기의(記意,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가 있어요. 의미는 없고 그냥 기표만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언어학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은 그때 상황에서 적절한 단어를 뽑아낼 때 이미 기존의 단어는 물 건너갔다는 거예요. 이렇게 바꾼다는 것은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이죠. 모르면서 새로운 것을 바꿔놓고 “나는 이렇습니다.”라고 하니까, 이거는 뭐가 되겠어요? 속임이죠. 속임. 속이는 거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인간은.

 

인간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도 누군지 모르니까, 계속 가면을 교체를 해야 되니까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제일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신경 쓰이는 것이 뭐냐 하면 오늘은 어떤 가면으로 바꿀 것인가? 에요. 그것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우리 외손녀가 인형놀이 하는 것을 말씀드렸죠. 인형을 갖고 놀면서 성질난다고 툭 쳐놓고, “어쩌지?”하는 거예요. 본인이 해놓고 “어떡하지?”하면서 뭔가 큰일 난 것처럼 왜 그렇게 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엄마가 옆에 있다가 “니가 그랬다. 니가.” 소꿉놀이 하다가도 또 던져요. 폭력성이 있나? 던져놓고 이거 뭔가 잘못됐다 싶어서 또 웃어요. 기괴한 웃음을 지어요.

 

어른들은 그걸 하도 해왔기 때문에 그걸 정상이라고 하는데, 애들한테는 그게 새롭다고요. 그러니까 자아성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렇다고 자아성을 구축한다는 것은 하나를 콕 집어서 “이게 나다.”가 아니라, 그걸 계속 교체하고, 자기 속이고 남을 속이는 그러한 과정자체, 속이는 과정자체가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주체. 이게 인간의 주체에요. 속이는 과정.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그냥 항상 속이는 활동밖에 못해요. 그러면 뭐가 없어요? 중심체가 없어요. 중심체. 인간은 중심이 없어요. ‘60대면 중심 잡겠지. 뭐 퇴직하면 중심 잡겠지.’ 아니에요. 중심이 없어요. 중심이. 뭐가 중심인지를 찾지를 못하고 있어요.

 

중심을 찾지를 못하니까, 중심 찾는다고 여행도 가보고 별짓을 다 해요. 별짓(보통과 다른 행동)도 해보고 뻘짓(아무런 쓸모없이 헛되게 하는 짓)도 해보고. 온갖 짓을 다 하면서 내가 마음 편하게, ‘그래! 이거였어! 나는 이제 모든 마음의 짐을 다 풀고 여기서 편히 쉴래.’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바뀌니까. 주인공의 성질이 더러워요. 뭐 집샀다고 좋아해봤자 일 년도 안 되어서 더 큰집이 없냐고 하겠죠.

 

그래서 나라는 주인공이 늘 흔들리거든요. 늘 흔들리니까, 중심을 잡을 수 없으니까, 중심잡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데, 예수님과 나 사이의 매개체가 없이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이 안에 들어오지도 않겠지만, 들어왔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어지러워요. 이놈의 주인공이 늘 흔들리니까. 들어올 리도 없지만. 예수님은 매개체를 통해서 자기에게로 땡깁니다. 매개체가 뭐냐 하면 저주죠. 저주가지고 땡기죠.

 

인간을 저주한다는 것은 인간배후에서 꽉 껴안고 있는, 이걸 좋은 말로 백허그 나쁜 말로 성희롱인데, 뒤에서 뭔가 꽉 껴안고 있는 것이 있어요. 악마죠. 사탄이 인간을 꽉 껴안고 있었던 겁니다. 저주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악마와 더불어 있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늘 남을 속이고 자기를 속이고, 그러면서도 그 속이는 것을 안 속이는 척하면서 또 속이게 되는. 내가 지금 중심이 없다는 것을 안 들키기 위해서, 계속 뭔가 안정되어 있는 식으로 속이는 방법을 날마다 창안해야 되고, 발명해야 되고, 지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무화과나무를 깎아가지고 저주의 말뚝을 만들어서, 베드로에게 이 저주의 말뚝을 쑤셔버린 거예요. “너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쓰지 마라. 니가 어떤 자인가를 고백하라고, 지금 내가 너 혼자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어차피 사탄과 한패니까 그냥 저주대상이다. 따라서 네가 누구냐 하는 것을 내 쪽에서, 내 쪽에서 너를 아예 딱 지목해서 꽂아줄게.” 그냥 무화과나무로서 꽂아주는 거예요. 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로서.

 

그러면 무화과나무가 뭐냐 하면 예수님 쪽에서 인간에게 다가서는 매개체입니다. 그 무화과나무의매개체가 딴 걸로 매개체가 되고, 또 다른 매개체로 되고. 창기가 천국에 가는 것도 매개체죠. 인간들로 하여금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유튜브 강의에 나오는데, 양 백 마리 가운데서 아흔 아홉 마리는 제켜버리고 한 마리의 양에다가 집중한다는 것. 그런 것도 아흔 아홉 마리에게는 엉뚱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그 뒤에 탕자와 맏이가 있는데, 집나가서 그냥 성공하고 왔습니까? 집나간 탕자가 어떻게 왔습니까? 더 이상 속일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을 친 거예요. 뭐가 좀 있어야 속이든지 하지. 가면이란 가면은 다 드러났고, 이제 아들도 아니에요. “종이라도 해준다면 고맙겠습니다.” 그야말로 서서 온 게 아니에요. 기어서 온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게 바로 네가 있음에 내가 아버지답다. 비로소 아버지의 아버지다움이고, 니 모습이 바로 가장 아들다운 거라는 겁니다.

 

구원받은 자의 모습은, 저렇게 탕자의 모습이 그의 영원한 고향 또는 중심체가 되는 거예요. 부산의 이창섭 목사님께서 제가 이스라엘에 간다고 하니까 부탁을 했어요. 카메라가 자꾸 흔들리니까 카메라를 고정하는 것이 있답니다. 그게 한 십 만원 하는데, 그걸 사셔가지고 좋은 화질로 공급을 해달라고 저한테 부탁을 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까 이게 어떤 구조냐 하면은, 카메라 장착하는 뒤에 무거운 긴 추 같은 게 있어요. 무거운 이 추가 손가락이 흔들리는 영향을 최소한으로 줄여주는 거예요. 무거운 추가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에.

 

인간의 중심은 뭡니까? 그냥 탕자에요. “내가 인간이 아니옵나이다.” 이게 인간에게 중심이에요. 인간이기를 포기할 때, 인간이기를 포기할 때 더 이상 “나도 같은 인간입니다.”라는 그런 수고로움이 그냥 없어지는 거 있잖아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교회가 아닐 때 교회고, 신자가 아닐 때 신자라고. 내가 언제 엄마답습니까? 엄마이기를 포기했을 때. “니 눈에 내가 엄마로 보이느냐? 니 DNA검사해봐라.” 혹시 모르죠? 또 예성그룹의 딸하고 바꿔치기했는지. 그게 재벌자식 훔쳐가지고 바꿔치기 했는지도 모르죠. 황금빛 내 인생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도대체 하나님께서 만들었다면 죽을 일이 없잖아요. 그런 생각을 안 해봤습니까? 하나님이 만든 인간 죽을 리가 없잖아요. 근데 우리가 늙어죽잖아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우리가 인간이겠어요? 우리가 인간이라면 안 죽을 텐데, 우리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그냥 흙 조립품이잖아요. 진흙 조립품. 진흙 조립품이니까 나중에 힘 빠지면 도로 진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데, 설마 하나님이 진흙으로 만들려고 인간 모습을 만들었는가? 그렇죠. 하나님께서 진흙을 만들라고 인간을 형상으로 만든 것이 아니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마귀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거예요. 마귀로부터 백허그를 당하고 있어요. 마귀가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로부터 속이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인간이다. 인간이기에 인간다워야 해.’ 이걸 계속해서 반복, 반복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남들 보기에 인간답게 누리자. 남들 보기에 욕 얻어먹지 않게 하자. 근데 그 남들이 누구냐 하면 같은 진흙인데요?

 

그렇게 되니까 예수님께서 아흔 아홉 마리 양 놔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가는 것도 이해 못하고, 탕자에게만 아버지가 된다는 것도 이해 못하고,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더구나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어요. 불의한 청지기. ‘다스’라는 회사에서 200억이나 횡령한 아가씨에게 아주 훌륭한 일을 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회계장부를 맡은 아가씨가 200억을 횡령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너희들 모습이라고 했을 때, 그 횡령한 그 불의한 자와 내가 동일한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너희들은 천국에 올 자격이 없다고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도대체 논리가 어떤 논리에 의해서 이렇게 될 수 있는지를, 이게 기존의 것과 도저히 연결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럼 연결이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야 되고, 주님께서 주님에게 맞는 수준을 우리를 향해서 요청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그 요청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것이 들통 나면서, ‘아! 주님과 우리 사이는 주님이 보시기에 끊어진 사이고, 끊어진 그 사이는 저주라는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는 것이었구나!’ 이걸 통해서 주님께서는 생명나무로 가는 그 길을 차단시킨 그 원칙을, 꾸준하게 계속해서 지금도 똑같이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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