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흘린 죄
2013년 11월 6일 본문 말씀: 에스겔 22:1-5
(22:2) 인자야 네가 심판하려느냐 이 피흘린 성읍을 심판하려느냐 그리하려거든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이 알게 하라
(22:3) 너는 말하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자기 가운데에 피를 흘려 벌 받을 때가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22:4)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22:5) 너 이름이 더럽고 어지러움이 많은 자여 가까운 자나 먼 자나 다 너를 조롱하리라
하나님께서 나오시는 말씀의 주체는, 이 지상에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요구하고 싶은 내용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말씀을 하나님을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인기가 없는 이유는, 그들이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미래를 미리 알아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어합니다.
남이 모르는 미래계획을 미리 알게 되면 세상의 각양 좋은 것을 미리 선점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은 인생의 분홍빛하고는 상관없는 내용입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 생각과 인간들의 생각이 차이나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자기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그들 역시 본인들이 누군지도 모르기에 또한 참된 조언을 해 줄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정말 어떤 존재들인지 알리시는 방식은, 하나님쪽에서 어떤 분을 보내십니다. 그 보낸 자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이 곧 자신들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쓰시는 방식입니다. 막상 하나님께서 여럿 선지자를 보내시고 마지막에서 친히 자기 아들을 보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자기들이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는 정보만 전달한다고 분노합니다. 이들이 분노하는 그 바탕에는, 자신들이 잘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가치를 인정해주는 신만 상대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이 자기 잘난 맛에 살 처지가 못되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원하는 신은, 자기 자신들을 우대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주는 그런 신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입에 담긴 계시는 ‘피흘린 도성에 대한 저주 소식긱’입니다. 오늘 제가 만난 적이 있는 57세 먹은 어떤 이가 세상을 떴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교회도 안 다니고 하나님도 안 믿습니다. 연세 많은 분이 세상을 떠날 때는 섭섭한 감정이 들지 않았지만 저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죽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숨이 끊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라져서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까지 뭔가 있었다가 잠시 후에는 그 자리에 아무 것도 없다면 도대체 그동안 악차같이 살아온 보람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통째로 사라지기 위해 우리는 잠시 세상에 등장한 것 뿐입니다.
이런 허무한 존재를 향해, “너의 참된 모습을 내가 알려주마”라고 하나님쪽으로 제시해도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외면해버립니다. 마치 자신을 사라지지 않을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은 없어질 존재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서의 부정적 반응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23:37-38에 보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고 한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성사되는 고귀하고 거룩한 공간인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이 있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보호를 받고 관리를 받는다는 선별된 자부심을 주는 성읍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 성읍이 ‘피묻은 성읍’이랍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불러 들이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 26:20-23에 보면, 왕에게 직언을 한 우리야 선지자가 죽습니다.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하매
여호야김 왕과 그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이 그의 말을 듣고서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냈더니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
자, 이런 판국에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작업이 성사되겠습니까? 구원이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이동되는 겁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이 참혹하면 참혹할수록 이 세상에 대한 미련과 더불어 그 안에서 성공을 꿈꾸며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 자신들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여자 분은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화장실의 문고리가 고장나서 5일 동안 갇혀 있어 아사 직전에 있었는데 천만다행으로 구출되었답니다. 이 여자분은 처음부터 화장실에서 출생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화장실과 다른 현실을 맛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화장실 문이 고장났을 때 ‘갇혀있음’으로 이해한 겁니다.
만약에 화장실에 아기로 출생해서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면 ‘화장실 밖’에 또다른 현실이 있음을 인정치 않을 겁니다. 그 여자는 안에서 살려달라고, 구원해 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형편은 바깥 현실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알려집니다. 하나님의 먼저 주어진 율법에 의하면 성전에서 드리는 제물의 피에 곧 영생이 있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전 영역에 있어 짐승의 피는 하나님이 직접 관리하시겠답니다. 가축을 도축할 때는 거룩한 이스라엘 땅에 피를 흘려서 더럽히지 말고 오직 성막 앞에서 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흔한 피가 죄를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제사 제물의 그 ‘흠없는 피’만이 죄를 씻어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성전의 기능을 사회적으로 확대하시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 있는 자들이 무죄한 자를 피를 흘리게끔 해서 성전이 없는 시절에는 ‘억울한 피’가 흘러지는 그 사건 자체가 성전이 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현 세상의 영웅이란 딴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하지만 예수님의 피로만 거룩하게 되었음을 증거하는 그들입니다. 바로 이들 중심으로 새롭게 이스라엘이 구성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미움받고 핍박받으므로서 외롭고 쓸쓸한 길, 곧 영생에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지덕지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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