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벗겨지는 면류관(겔21;24-270이근호131023

아빠와 함께 2013. 10. 24. 09:10

 

벗겨진 면류관(에스겔 21: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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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0-23 20:59 
          벗겨지는 면류관

2013년 10월 23일                         본문 말씀: 에스겔 21:24-27

(21:24)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의 악이 기억을 되살리며 너희의 허물이 드러나며 너희 모든 행위의 죄가 나타났도다 너희가 기억한 바 되었은즉 그 손에 잡히리라

(21:25) 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마지막 때이니라

(21:26)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관을 제거하며 왕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21:27)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왕이 쓰는 면류관을 벗긴다는 것은 왕이 제 위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의해서 왕관이 박탈당합니다. 이런 조치가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실행된 작업인데 그 이유는 유다 나라 자체가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 위상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일국에 왕이 없다면 이웃한 나라가 필히 침공할 것입니다. 임자없는 나라를 먼저 차지하는 것이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마다 왕들을 두어서 자신의 영토와 나라를 지키려고 합니다. 이러한 국가체제는 곧 인간나라의 한계를 말해줍니다. 왕의 존재는 왕 자체가 아니라 자신들의 나라를 사수하기 위한 필수적인 자리가 된다고 다들 여기고 있습니다.

왕에 대한 이런 당연한 인식은 바로 이스라엘에게도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따로 생각해두신 왕제도의 의미를 이스라엘은 놓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바벨론 나라를 앞장 세워서 참된 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왕에 대한 곡해와 오해가 어디서 발생되는지를 밝혀내십니다.

창세기 49:10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12아들에게 각자 축복을 해주는 대목 중의 하나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타나면 그 왕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을 유다 지파의 속한 자들은 잊을 리가 없습니다. 유다 지파에 속한 왕족이 유다 나라의 왕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모두 야곱에게 허락하는 그 예언의 성취라고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경될 리가 없을 것이고 그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는 바로 그들의 나라, 곧 유다 나라는 이 지상에서 영원하리라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오해했습니다. 이 오해는 이스라엘이 아닌 일반 민족들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들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왕을 세워주신다’는 생각이 바로 이 오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과 소유를 지키기 위해 왕을 요구하게 됩니다.

순전히 자기 것 지키는 것이 우선되는 겁니다. 바로 이 선입견으로 세상적인 왕과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과 뜻 마저도 자기 생각을 옹호하기 위한 용도로 이해하게 됩니다. 즉 ‘나 잘되기 위해 왕을 주신다’ 는 겁니다. 혹은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고 일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게 오류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하는 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왜 책망해야만 할까요? 그것은 바로 왕의 자리, 곧 왕이 머리에 면류관을 쓸 때는 인간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고 나타날 때입니다.

왕이란 전쟁하는 자입니다. 전쟁의 주도해야 하는 자리가 왕의 자리입니다. 그 왕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 쓰는 것이 바로 왕관이요 면류관입니다. 전쟁에서 적이 등장하게 마련이고, 이 적은 오직 전쟁을 통해서 그 정체와 윤곽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오해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넘보고 탐내는 자기 주변국가들이 다 하나님의 적인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적은 창세기 3:15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뱀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이 ‘뱀의 후손’을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인간들은 항상 시작을 ‘자신의 적’으로부터 출발해서 자기 성공으로 귀착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이스라엘을 보여주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의 왕 자리를 ‘공백’의 자리로 만듭니다. 즉 ‘빈 자리’입니다. 민수기 24:2-4에 보면, 발람 선지자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하게 됩니다. 그 예언의 내용의 핵심은 장차 별이 나타나는데 그 별로 인하여 주변 나라들이 저주받게 된다는 겁니다.

민수기 24:17-18에 보면,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그의 원수 에돔은 그들의 유산이 되며 그의 원수 세일도 그들의 유산이 되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예언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백성들은 늘 오해하게 됩니다. 아말렉과 모압와 암몬과 앗수르 같은 민족들이 이스라엘에 대들다가 다 망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과 예언된 이스라엘이 같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원수는 바로 이스라엘 자체이요 유다 민족 자체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왕이 아니라 장차 오실 진정한 다윗 자손의 왕의 모형으로 이스라엘에게 넣어주신 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다윗왕입니다. 다윗왕은 백성들과 백성들이 원했던 왕에 의해서 희생과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는 평소에 사람들이 약속에 의한 ‘하나님의 원수’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인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강력하게 반발하는 세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세력이 작렬하는 그 장소를 하나님께서 박멸하고 공터로 만들지 않고서는 그들 눈에 진정한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왕을 원한다는 말은 실은 자기 자신만을 영원히 원한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자아가 있는 그 중심 자리를 하나님이 오셔서 후벼 파낸다면 사람들은 그분이 하나님이 할지라도 강하게 반발하게 마련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 자리입니다. 십자가 자리가 곧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되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비로소 보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누구나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피 복음을 훼방하는 자들, 그리고 자신의 공터를 비워놓지 않고 자신의 야심으로 메우려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근심과 걱정이 거짓된 나로 인해 채워진 사실에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2강-에스겔21장 24-27(벗겨진 면류관)13102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1장 24절에서 2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1:24-27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의 악이 기억을 일으키며 너희의 건과가 드러나며 너희 모든 행위의 죄가 나타났도다 너희가 기억한바 되었은즉 그 손에 잡히리라 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끝 때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길찌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유다나라 왕이 엎드러진다는 것이고 그 다음에 그 왕관이 벗겨질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왕관을 벗겨야 될 나라는 이미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한 바대로 바벨론 나라가 나타나서 유다를 치는 것으로서 유다나라 왕의 왕관이 벗겨지고 끌려가고 높은 자가 낮아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 모든 일의 주관자는 사람들 보기에는 바벨론이 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시나리오, 각본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는 무슨 의도를 가지고 유다나라 왕의 왕관을 벗기시는가를 알아야 되겠지요.


우리 생각은 유다나라 왕의 왕관을 벗기실 것 같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유다나라 왕이 없었으면, 왕관이나 면류관을 쓰는 일이 없었으면 좋을 뻔하였다, 라는 것이 우리 인간들 생각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왕 세우고 면류관 씌우고, 다 해놓고 그 면류관을 벗기는 그 작업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무진장 오해한 것, 잘못 생각한 것을 수정하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왕으로 세워놓고 그 왕관을 벗기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손수 벗기는 것이 아니고 바벨론나라, 하나님 믿지 않는 나라가 쳐들어와서 수치스럽고 치욕스럽게 유다왕의 존재를 없애버리는 그 일을 하나님이 조정해서 그 일을 일으키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유다나라백성들이 나름대로의 자신의 주관이 있어요. 그게 뭐냐, 이 모든 나라가운데서 우리 유다나라만큼은 하나님께서 고르고 골라서, 남기고 남겨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건지겠다는 그 약속의 나라이며 그런 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오직 유다나라뿐이다, 그렇게 장담을 했습니다. 자기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나라가 있다.’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나라는 반드시 있어야 할 나라이기에 있는 것이고 왕위는 영원해야 된다.’ 주장한 겁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거기에 야곱, 이스라엘이 열두 자식들에게 축복을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9절에 보면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왕이 왕권을 보여주는 지팡이가 홀입니다. 그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한다. 유다지파의 나라 곧 유다나라지요. 유다나라의 왕은 영원히 그 지팡이가 떠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이미 창세기 49장을 알고 있고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서 준 축복은 취소되거나 변경되거나 흐지부지 단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의 성실성에 입각해서 믿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내 뱉은 말은 도중에 흐지부지 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믿습니다. 그래서 유다나라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견고할 것이고 유다나라가 견고하다는 말은 그 왕의 자리도 절대로 타국에 빼앗기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생각 안하겠습니까? 에스겔 21장 10절에 보면 “그 칼이 날카로움은 살륙을 위함이요 마광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그리고 10절 뒤에 “내 아들의 홀이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 도다.” 여기서 내 아들이라 하는 것은 왕이지요. 하나님의 왕의 지팡이가 다른 민족을 업신여기는데 하나님께서는 칼을 갈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칼과 홀, 왕의 지팡이와의 만남이에요. 칼은 가는데 목적이 있어요. 칼은 왕의 지팡이를 잘라내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반짝거리도록 연단된 칼을 하나님이 친히 준비했다는 겁니다.


유다나라입장에서 봐서는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창세기 49장의 야곱이 한 축복이 무효화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만약 그것이 무효화되었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약속을 철회한 경우가 되기에 이것은 도저히 못 믿을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이 스스로 약속을 해놓고 “바보야! 그걸 믿나?” 이렇게 나오신다면 하나님 말씀의 어느 대목은 믿고 어느 대목은 안 믿고, 그것을 결정하기가 난처하지 않습니까? 유다가 보기에 이 당황스러운 말씀의 환경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겁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기도응답 믿습니다.” 했는데 기도응답대로 안되면 어떻게 할 건데요? 하나님 버릴 거예요? 제가 말한 것이 어느 쪽이 잘못되었느냐 하는 겁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이스라엘이 자기백성에게 축복한 이 축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아니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철석 같이 믿었던 유다나라가 잘못된 거예요? 어느 쪽이 잘못된 겁니까? 유다나라가 잘못된 거예요. 제 삼자인 우리가 보기에는 유다나라는 절대로 잘못된 게 없어요. 왜,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믿었기에.


그대로 믿은 것이 이게 화근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나라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있으니까 ‘아, 저기에 왕이 있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왕,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시드기야가 무너져야 그 배후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거든요. 그것을 하나님도 잘 아세요. 너희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어놓고,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라고 믿어놓고 나중에 그들 뜻대로 안되니까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들을 수정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믿을만한 것들을 허락해요.


그러면 그들은 축복이다, 얼씨구나, 하고 믿다가 그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일을 그런 식으로, 축복이라고 믿게 만들어놓고 그것을 부도수표로 처리되도록 하시는가? 사람들이 자기의 본 모습을 몰라요. 짧은 시간이지만 차근차근 이야기할 테니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싸우는 나라입니다. 이름 자체가 이스라엘이니까. 그 나라 중에 하나가 유다지파고 유다지파는 이스라엘이 싸워야 될 그 대장, 중심, 왕이 나올 지파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냥 싸우다가 승리해서 얻은 나라가 아니고 늘 상 싸워야 될 나라입니다.


싸워서 평화로우면 ‘이만하면 되었다.’ 이런 나라가 아니고 늘 싸워줘야 이스라엘, 세상 신과 싸운다는 그 말에 부합되는 겁니다. 그러면 늘 싸운다는 말은 그 왕이 나서서 전쟁의 선봉에 서서 싸워야 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적입니다. 면류관, 왕이 쓰는 왕관과 이스라엘의 면류관은 뭐냐 하면, 적과 싸워서 승리했다는 기념품으로 자기머리위에 쓰는 겁니다. 그러면 적이 있어야 돼요. 이렇게 보면 돼요. 왕의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적이 보이는 자리, 이스라엘의 적이 보이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아, 우리나라의 적, 우리 주변의 이방나라가 적이구나.’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거 아니거든요.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적을 드러나게 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의 왕을 통해서 전쟁하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전쟁하는 가운데서 그적들이 자기 주변에 있는 암몬이나 모압 같은 이방나라라고 생각하고 전쟁에 나갔는데 그 전쟁의 결과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적일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그런 것을 보여주는 최 정점의 역할을 할 때 그것이 진정한 면류관인 겁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이 면류관 빼앗겨 버렸어요. 면류관은 적이 제대로 보이는 자리에 써야 되는데 이것은 본인이 하나님의 적인 것도 모르면서 썼으니 하나님이 그 면류관을 벗겨내시는 겁니다. 이것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적, 사람의 적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적을 역사 속에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동원된 것이 이스라엘이고 유다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나오거든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문자적으로 철석같이 믿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여자의 후손이 누군지도 모르고 뱀의 후손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미리 알아챌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가지고 일을 하시다 보면 택한 백성과 하나님과 일을 하는 와중에서 택한 백성 주변에 그동안 몰랐던 뱀의 후손이 자기정체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의 경우입니다. 아벨이 하나님의 원수를 이미 아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아벨은 형에게 맞아죽어 가면서 뱀의 후손은 어떤 종류의 성질을 갖고 있으며 여자의 후손은 어떤 종류의 성질을 갖고 있는가, 아벨이 죽는 현장에서 비로소 그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4장 2-4절에 보면, 길기 때문에 제가 그냥 말씀드릴게요. 거기에 발람이라는 이방선지자가 나와요. 모압 선지자인데 하나님의 신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했다고 24장 2절에 나와 있어요. 그가 하나님의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방 선지자, 요즘으로 치면 박수무당쯤이니 전혀 기독교와 관계없는 점쟁이인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장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해야 될 일이 이방 선지자를 통해서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24장 17절에 보면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라고 되어 있어요.


‘한 별, 한 야곱’ 이스라엘에게 누가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왕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민수기 23장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하고 허물을 보지 않는 이유는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발람선지자를 요약해 보면 나중에 장차 한 별이 나오는데 그 별은 곧 그동안 이스라엘을 이끌어왔던 왕인 하나님 자신이 여기서 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크리스마스 때 되면 애들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동방박사가 별 따라 오지요. 별과 아기예수의 만남, 이것은 민수기 24장의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이룬 겁니다.


한 별이 이스라엘에게 오는 거예요. 그때 한 동방박사와 태어난 아기예수를 공격하는 그들이 바로 그동안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위장한 악마의 양태, 모습입니다. 악마가 교묘하지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악마는 교회 당회장의 이름으로, 목사의 이름으로, 사도의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까? 가장 경건하고 고상해 보이는데. 민수기 24장에서 이방인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직접 왕이라는 거예요. 그 말은 실상은 간이 이스라엘 왕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인간 왕을 준 것은 인간들이 이방민족을 모방하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어요. 인간이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나라가 든든하기를 기대하는 정치적 한계, 정치적 속성, 그것의 발로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없다고 봅시다. 다른 나라가 달려들고 일본 아베총리가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함대 보내고 북한은 불바다 만들려고 할 겁니다. 대통령이 있고 왕이 있고 권력의 중심이 있으니까 한 나라가 되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인간세계의 한계고 본 모습이에요.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하나님이 왕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왜, 뱀의 후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왕이라면 죽어라고 싫어하고 죽어라고 공격하고 죽어라고 핍박하고 죽어라고 미워합니다. 이미 그 본성은 모든 인간에게 다 들어 있고 유다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그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민수기 24장에서 예언을 하신 거예요. 한 별이 등장하는데 그 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 왕이 되셔서 그들을 이끌기에 주변 나라는 이스라엘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변 나라는 성경 예언대로 하면 ‘원수 에돔, 원수 세일, 아말렉, 가인족속, 앗수르, 전부 다 멸망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말, 민수기 24장의 이 말을 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듣고 오해를 한 거예요. 어떤 오해? 하나님이 왕이 되실 때 이스라엘만 축복받고 나머지는 저주받는다, 라고 이해해야 될 텐데 하나님이 세운 우리 이스라엘 유다지파에 한 홀이 나타나니까 유다지파에 소속되어 세습적으로 대를 이은 그 왕이 있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은 영원하고 다른 나라는 망한다고 곡해하고 오해한 겁니다. 성경말씀을 볼 때 자기중심적으로 해석을 한 거예요. 이것은 어느 누구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유다나라도 예외가 아니고 그렇게 해석했다가 지금 망하는 대목에 우리가 와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는 그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고 내가 이렇게 복 받았다는 것을 변명하듯이 성경해석을 하는데 묵상이든 Q.T든 뭘 해도 자기 쪽으로 적용을 시켜요. 우리교회 쪽으로, 우리나라 쪽으로 자꾸 적용시킵니다. 기독교 나라인 독일과 역시 기독교 나라인 영국이 축구하면 누가 이기게 해 주겠습니까? 둘 다 빡세게 기도하는데요. 두산하과 엘지하고 야구 준 플레이전 하는데 중계방송 할 때 보면 양쪽 팀 팬들이 전부 다 기도해서 그 기도발이 막 충돌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어느 편에 서서 싸웁니까?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이 왕이라는 것을 인식 못하고 하나님이 세워준 왕이 있으면 우리나라는 영원하다, 이런 식으로 곡해해서 이해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는 망하지 않는다. 왜,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가 있기에. 그래서 교인들은 그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에게 양떼를 맡겼으니까 우리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그냥 목사만 생각하면 교회 잘 될 것이다.’라고 우기는 거예요. 환장하지요. 그러면 그것이 잘 못이다, 라고 결론을 냈습니다. 잘못이라고 결론만 내면 안 되거든요.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알아채는가, 하는 겁니다. 공백입니다. 공백이란 텅텅 빈자리를 공백이라 하거든요. 성도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공백을 믿는 거예요. 너도 차지하면 안 되고 나도 점령하면 안 되는 자리, 교회라면 교회 목사랍시고 거길 차지하면 안 되고 장로랍시고 차지하면 안 되는 그 빈자리, 그건 바로 주님의 자리입니다. 성도라면, 교인이 아니고!……, 요새는 교인과 성도를 구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요. 교인이 아니고 성도라면 항상 그 교회에 보이지 않는 빈자리를 통해서 서로 대화가 오고가야 합니다.


그 빈자리는 뭘 로 채우는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지 어느 인간도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시드기야의 왕관을 벗기고 지팡이를 빼앗는 이유는 지금 하나님께서 빈자리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유다지파에 홀이 있다, 라고 하니 사람들은 육신적인 유다지파의 혈통과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만 붙들고 있으면 절대로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지금도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는 아브라함자손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말은 지옥으로 쫓겨날 자라는 뜻이에요. 헤롯당이라는 것은 마귀 앞잡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진 그 장소가 바로 마귀의 세력에 둘러싸인 장소에요. 십자가라는 것은 거기에 구멍을 뻥 뚫어버리는 거예요. 언젠가 제 발꿈치에 티눈이 나서 한 달 고생했는데 약 바르니까 나았는데 그 자리에 구멍이 뻥 뚫렸어요. 그렇게 아프게 하던 것이 구멍이 났어요. 우리가 인생 살면서 아직까지 그렇게 마음이 아픈 것은 아직까지 빈자리가 없어서, 구멍이 안 뚫려서 그래요. 가장 나다운 자리는 아예 뻥 하고 구멍이 뚫린 자리여야 돼요. 그 빈자리는 주님이 채워야 될 자리를 우리가 차지하고 있으니 아플 수밖에 없잖아요.


제가 시내 갔다가 집에 올 때 급행 1번 타고 오거든요. 타고 오는데 70대 후반쯤 되는 할머니가 아주 큰 소리로 하는데 안 들을 수가 없도록 떠드는 거예요. 제가 오지랖이 넓지만 연세 많은 분이 그러니 가만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다 들은 내용이 이겁니다. 시집와서 나 같이 고생한 여자가 없다는 거예요. 팔공산 기슭에서 밭농사 지었다는 것 같아요. 고생을 해서 돈을 좀 모아놓으니……, 그 다음 말이 아주 제 가슴에 와 닿았어요. 돈 좀 모아놓으니 넘보는 것들이 그렇게도 많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옆에 있는 한 65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같은 동네 사는 모양이죠. “넘보는 것들이 누구입니까?” “자식들이지 누구야.” 돈 좀 있다고 넘보는 것들이 그렇게도 많다는 거예요. 가슴에 확 와 닿는 거예요. 부모가 고생한 자리는 자기가 넘볼 자리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넘봐요. 나의 자리는 십자가 죽음의 자리, 우리가 죽음을 넘봐야 되는데 자꾸 축복을 넘보니까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 믿고 나 잘되기 위해서, 나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 믿으니까 이게 바로 성경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진짜 그 공백을 채우는 주님은 어떤 분인가? 사무엘상 2장에서 사무엘의 엄마 한나가 이런 예언을 합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하는 예언이 있어요. 이 예언은 나중에 마리아가 그대로 베껴서 하는 예언입니다. 물론 하나님 뜻에 의해서 하는 거지만. 거기에 보면 장차 기름부은 자가 오는데 7절에 보면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2장 끝에 보면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사무엘을 제사장으로 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 거예요. 없는 사무엘이 태어났으니까요. 제사장 앞에서 기름부음 받은 어떤 왕이 등장하는데 그 왕의 기능이 이전의 모든 왕들, 그리고 백성들을 낮추고 높이고, 죽이고 살리고, 하는 권한이 있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이 그 뒤에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영향이 퍼졌는가? 그것은 바로 희생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이 희생을 당해야 될 하나의 제물로서 왕의 자리가 있는 겁니다.


정리해 봅시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이야기하면 다 자기 좋으라고 해석합니다. 이래서는 인간 스스로 빈자리, 공백을 만들어내지 못해요.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왕을 보내요. 왕의 예표 되는 사람, 장차 오실 왕을 보여주는 사람을 보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욕심이 있거든요. 욕심이 있어서 그 왕을 왕으로 분간 못하고 죽여 버려요. 그럴 때 그 분을 하나님께서 언약 적으로 우대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왕관을 쓰게 되면 뭐가 보이는가 하면, 진정한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는 자리에 면류관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의 면류관을 썼잖아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뱀의 후손이 보이는 자리에요. 신약성도들은 다 이 면류관을 씁니다. 왜? 하나님의 원수가 누군지를 아니까. 그러면 그 원수가 누구냐? 바로 우리 옛사람입니다. 뭐든지 말씀을 우리 위주로, 내 행동 위주로, 내 구원 받는 위주로, 뭐든지 내 위주로 해석하는 것, 어떤 인간도 마찬가지거든요. 어떤 인간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성령이 오게 되면 그런 나 위주의 하나님, 날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는 그 생각을 홀라당 파서 완전히 공백, 빈자리를 만들어버립니다. 뻥 뚫어버려요.


그 자리를 십자가가 차지해야 되고 우리는 그 자리를 볼 때 마다 ‘나는 죄인이며 죄인 주제에 어떤 고민과 걱정과 염려와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다는 자체가 죄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뭔가 노리는 것이 있기에 공포스럽고, 노리는 것이 있기에 무섭고 절망되지 나는 원래 빈껍데기라고 여긴다면 모든 것이 감사와 기쁨뿐이고 항상 자기를 드리고 바칠 뿐입니다. 내가 주제넘게 왜 걱정을 하지요?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오늘 염려는 오늘 하라고 했는데.


바로 그 사람들만이 면류관 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는 자리,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예수님의 원수가 보이는 거예요. 복음의 원수, 십자가 피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들, 피 + 인간의 행함, 피에 인간의 행함이 들어가야 된다는 이런 원수들이 눈에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 이용해서 자기가 영원히 살겠다는 탐욕자,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고, 마땅히 저주받아야 함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이용할 대로 다 이용해먹겠다는 심보로 교회 오는 자들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 자기부터 텅 비어있는 사람에게만 눈에 보이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원한 왕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저희들이 알게 해주시고 왕을 모시기에 내 자리가 뚫려버린 그 자리에 우리 주님 차지하셔서 그것으로 매일같이 전쟁 일으키는 그 나라가 이스라엘인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