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 왕의 점괘
2013년 10월 16일 본문 말씀: 에스겔 21:18-23
(21:1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1:19) 인자야 너는 바벨론 왕의 칼이 올 두 길을 한 땅에서 나오도록 그리되 곧 성으로 들어가는 길 어귀에다가 길이 나뉘는 지시표를 하여
(21:20) 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의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
(21:21)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어귀에 서서 점을 치되 화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서
(21:22)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공성퇴를 설치하며 입을 벌리고 죽이며 소리를 높여 외치며 성문을 향하여 공성퇴를 설치하고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세우게 되었나니
(21:23) 전에 그들에게 맹약한 자들은 그것을 거짓 점괘로 여길 것이나 바벨론 왕은 그 죄악을 기억하고 그 무리를 잡으리라
점을 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는 겁니다. 앞일에 대해 사전에 정보를 얻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결정에 대해서 과연 정답이 있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정답이라는 것은 신만이 알기에 신의 결정을 맡긴다고 하면서 실은 그 정답을 사전에 미리 공유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인간이 미리 알아서 대처하겠다는 심보는 곧 “나는 손해보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일치되면 나에게는 손해되지 않고 이익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만약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예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때도 구태어 신의 뜻을 알 필요가 있을까요?
신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신의 뜻 속에 자신의 뜻이 개입되어버린 상황입니다. 즉 신의 뜻을 빙자해서 자신의 뜻을 슬쩍 끼어넣겠다는 의도에 해당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치기 전에 먼저 자기 신에게 점을 친 점궤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왜 꼭 알려주어야 합니까?
바벨론왕이 점쳐서 유다 예루살렘을 공격을 했다는 소식이 없더라도 결과적으로 유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동일한데 말입니다. 점치는 바벨론왕의 행동을 아는 것과 바벨론왕은 그저 여호와 하나님의 게획한대로 유다 나라를 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납니까?
결과적으로 동일한 결과인데도 말입니다.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그것이 곧 자기가 믿는 신에게 점을 치고 싶은 심성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왕이 점을 치는 의도는 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 일이 아니라 신의 일이 되기를 원해서 점을 친 겁니다.
이러한 의식은 유다 백성들이 평소에 여호와 하나님을 대하는 심성과 같은 겁니다. 소위 ‘신의 주권사상’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의식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오로지 신의 계획과 신의 의사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상입니다. 고상해보이고 깊은 신앙심처럼 간주되지만 실은 비-신앙적입니다.
왜냐하면 ‘신의 주권 사상’을 내세우는 의도 자체가 바로 바벨론왕이 점을 치는 의도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주권사상이란 모든 인간들이 ‘신’이란 개념을 떠오르면서 필수적으로 따라붙는 신적 속성에 속합니다. 신이라면 전지전능하고 앞길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어야 하는 겁니다.
앞길도 모르는 신은 이론상 도저히 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 사실을 인간들도 공유해서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신에 대해서 미리 예측하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신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일을 자신의 책임하에 계획대로 진행시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바벨론왕이 점치는 것이나 유대인들이 예배하는 일이나 교인들이 교회 다니면서 기도하는 일이나 모두 동일한 마음가짐에 비롯된 겁니다. 신의 주권사상이 인간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려면 천국에서 영원히 살 낯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낯선 마음이란 이 지상의 마음과 동일하게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마음으로 역전되어야 합니다. 주권 사상을 긍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주권 사상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부정의 부정이 곧 긍정이 아닙니다. 단지 서로 마주 볼 뿐이며 같은 바탕 위에, 같은 영역 위에서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전혀 다른 바탕에서 주어집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이해로부터의 차단입니다. 인간들은 뭔가 알고 있으며 그것은 곧 점을 치는 힌트거리가 됩니다. 신의 뜻을 미리 알고 싶어합니다. 미리 알므로서 자신에게 손해가 되지 않고 이익이 되고 손실과 실수가 미리 대비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떤 부모가 애지중지하고 키운 자식이 밖에 나가서 자꾸 사고만 칩니다. 결국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게 되니 부모가 자식을 면회 와서 가슴을 때리며 절규합니다. “네가 왜 그랬어 네가 왜 그랬어! 나는 너를 그런 자식으로 키우지도 않는데 너는 왜 후회될 그 나쁜 짓을 왜 그랬어!”
후회할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통곡해보지만 이런 마음가짐은 전혀 천국 갈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후회 안할 짓을 한다고 해서 그 마음이 곧 천국까지 이어질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마음은 완전히 이 지상에서 품고 살아가는 마음과 달라야 합니다.
통곡한다는 것은 여전히 자기 삶에 대해서 미련과 애착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음가짐은 천국의 합당한 마음가짐이 아닙니다. 통곡도 소용없고 울어도 소용없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런 시도조차 할 입장이 못됨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려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인간의 ‘점궤 봄’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찾아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점치는 인간을 구원하시므로서 인간이 알고자 하는 점궤 내용과 구원이 전혀 상관없음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점을 치는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이 알수 있는 그 정보와 결정은 실제 구원과 무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관함이 곧 참으로 천국가는 품성을 가질 수 있는 은혜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에스더의 경우를 봅시다. 에스더 4: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는 왕후가 평소에 일상적으로 자기 신세에 대해서 늘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왕후됨 자체도 소용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소용없는 황후 자체가 소용이 있게 된 것은 에스더의 예지력 때문이 아닙니다.
왕후됨은 인간들을 천국쪽으로 향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왕후이기에 뭔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왕후라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하만을 등장시키신 분도 하나님시오 그 하만 앞에 꿇어절하지 않는 모르드개의 행위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하만으로 하여금 무례한 모르드개가 어느 민족인가를 알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만은 점을 칩니다. 바사 나라 구석구석 모든 유대인들을 여호와라는 건방진 신을 믿기에 다 죽이려고 시도합니다. 이 하만의 조치는 합당한 것이 옳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장차 오실 유대인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을 죽어야 하기에 미리 유대인들도 다 죽는 것이 지당한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맨날 이 땅에서 예수 이름으로 점을 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성도는 마땅히 다 죽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조치를 수긍하는 자만이 천국갈 품성을 가진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려고 하지말고 자기 부인하면서 죽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1강-에스겔21장 18-23(바벨론왕의 정체)1310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1장 18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1:18-23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바벨론 왕의 칼이 올 두 길을 한 땅에서 나오도록 그리되 곧 성으로 들어가는 길 머리에다가 길이 나뉘는 지시표를 하여 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공성퇴를 베풀며 입을 벌리고 살륙하며 소리를 높여 외치며 성문을 향하여 공성퇴를 베풀고 토성을 쌓고 운제를 세우게 되었나니 전에 그들에게 맹약한 자들은 그것을 헛점으로 여길 것이나 바벨론 왕은 그 죄악을 기억하고 그 무리를 잡으리라.”
오늘 본문내용은 하나님께서 다 뜻이 있어서 바벨론 왕이 유다나라를 침공하는 그 과정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에게 점을 치게 하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신다는 것입니다. 점을 치는데 점을 치든 안치든, 혹은 점을 치되 점괘가 어떻게 나오든, 오른쪽으로 나오든 왼쪽으로 나오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다 조치를 그렇게 취하신 거예요. 그런데 이상스럽게 바벨론왕의 점괘가 오른쪽 길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쪽으로 나왔기에 예루살렘을 치고 왼쪽 길은 암몬족속을 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유다를 그냥 치면 ‘아, 우리가 우상숭배를 해서 하나님께서 벌을 내렸구나.’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벌 내린 것을 수용하면 그만인데 왜 바벨론 왕이 이렇게 유다나라를 치는 그 과정에 대해서 미리 선지자를 통해서 보이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포함 되어 있느냐 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바벨론 왕이 점을 치고 있는 그 광경을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알려줍니다.
바벨론 왕이 갈림길에 있어서 점을 치는데 그 시도가 이미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그 아는 것을 선지자에게 미리 알려줬고 그 선지자는 그 당시 멸망당하기 전의 백성들에게 알려줍니다. 왜 점을 쳐서 예루살렘을 점괘에 따라서 공격하는 그 양상, 왜 심판받고 멸망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양상을 보게 하시는가, 하는 겁니다. 우리가 간단하게 결론내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하나님께서 사전에 약속된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그들 맘대로 결정한다든지 혹은 그들이 여호와 말고 다른 신에게 빌어서 다른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움직였더라도 그 다른 신 자체가 애초부터 없는 신입니다. 없는 신을 그들은 점괘 받았다고 착각을 해서 그들은 행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하신 거예요. 예를 들면 꿈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왔다, ‘아하, 집안에 무슨 우환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든 꿈에 귀신이 나오든 안 나오든 아무 상관없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주 예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만 그 사실을 알면 되지 안 믿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 하는 것 까지 왜 우리한테 알려줘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떤 뜻이 있느냐 하면, 세상만사는 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그 믿음은 옳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이라는 것은 신앙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 있는 사람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믿음 없는 사람들이 신앙의 티를 내면서 도입된 것이 세상만사 주의 뜻대로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믿음 있어 보이는 이 사실이 결코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런 뜻으로 그런 것이 나와야 하느냐, 바벨론이 왕을 점쳐 행동에 나서는데 그 점치는 방법이 여기 나와 있지요? 21절에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여기서 ‘살을 흔들어’ 하는 것은 화살이나 나무작대기 같은 것을 흔들어서 거기서 무슨 의미나 해석을 갖다 붙이는 거예요. 그 다음에 “우상에게 묻고” 우상은 드라빔 같은 그런 종류가 있어요. 그 다음에 “희생의 간을 살펴서” 제물을 바치면서 그 제물의 간의 색깔을 보고 살펴서 어떤 행동, ‘이거다. 우리 예정된 앞으로 행할 코스다.’라고 하는 그 모습 하나하나가 그동안 유대인들이 하나님섬기면서 했던 그 짓거리를 그대로 그들도 똑같이 하는 것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바벨론이 점을 치는 이유가 뭘까요? 신의 뜻을 알고자 한다는 거거든요. 그 신의 뜻을 알아서 뭐하려는 거지요? 누구 좋으라고 신의 뜻을 알려고 하는데요? 신의 뜻을 앎으로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벨론 왕이 마르둑 신에게 점괘를 받으나 이스라엘사람들이 여호와께 점괘를 받으나 똑같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불신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지요. 바벨론이 점을 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을 유다에게 그대로 알려주는 것은 평소에 유대인들이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는 겁니다.
그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때는 뭔가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없는, 구원과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자기들 신에게 신앙생활 하는 것과는 뭔가 달라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달라야 되는데 어떤 점에서 달라야 되는지 그 점을 모르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은 절에 가는 사람과 달리 살아야 된다는데 절에 가는 사람과 예수 믿는 사람과 대 보면 사는 방식, 사고방식이 똑같아요. 자기 행복과 자기유익을 위해서 하나는 예수 믿고 하나는 부처를 믿거든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다는 그 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절에 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세상만사 다 부처님의 뜻에 의해서라고 하지요. 그게 인연설, 세상 모든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야만 하기에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게 불교의 주권사상 아닙니까? 모슬렘에게 물어보세요. 알라신의 뜻에 의해서, 라고 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알라신에게 무조건 감사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이슬람의 모토거든요.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것, 하나님 믿는다는 것이 다른 점이 뭡니까? 다른 점이 전혀 없어요. 질적으로 달라야 돼요.
오늘 말씀의 전개를 위해서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논리를 따라오기 힘드니까 결론부터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되면 천국에 가는 거거든요. 천국에 갈 때는 조건이 있어요. 이 세상에 살 때의 그 삶의 질과 완전히 역전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이 세상에서 하늘, 하나님을 바라봤던 그것이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어져야 돼요. 바뀌지 아니하면 천국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온 대로 육으로 나온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나온 것은 영인데 육과 영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있으면 안 됩니다.
절단되어야 됩니다. 세상만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아는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아는 것이거든요. 인간은 연약하고 미래를 예측 못하니 장래를 아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는 이것은 교회 안다니는 사람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 생각이 바뀌어야 돼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는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생각, 이것이 엉터리며 흉내 내기에 불과하며 이것이 전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알다시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데 은혜가 임하는 그 지점이 뭐냐는 거예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가 어떤 지점에 있을 때 은혜가 은혜로 깨닫게 되느냐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만약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이것은 우리가 익히 다 아는 것이기 때문에 이걸 알게 되면 ‘하나님, 우리가 이 정도 압니다. 그러니 저에게 더 이상 어려운 일 주지마세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알고 있던 그 성질을 그대로 하늘나라까지 가져가려는 사람에 불과한 겁니다.
바벨론 왕이 점을 칩니다. “신이시여, 어느 쪽이 계획된 겁니까?” 그 정도는 바벨론 왕도 할 줄 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신의 뜻대로 제가 순종하겠다는 그 정도는 바벨론왕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기껏 바벨론왕도 할 수 있는 그것을 여호와 믿는다는 그들이 해 왔지만 그들은 바벨론 왕이 점치는 것을 봐서 그들과 유다가 차이가 없음을 유다나라는 알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에게 점을 치게 하는 것은 차단의 효과가 있습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점을 치겠습니까? 점을 친다는 것은 인간이 내보일 수 있는 극단적인 마지막 선택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면서 점을 치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의 뜻대로 하면서 점을 치는 것이나, 신의 뜻대로 하면서 기도하는 것이나, 신의 뜻대로 하면서 예배참석하면서 전부다 바벨론 왕이 점을 치면서 점괘를 보는 행동의 되풀이에 불과한 겁니다. 바벨론 왕이 자기는 점괘를 받았다고는 하나 에스겔 선지자에 의하면 점치는 것조차 주의 뜻이었어요. 그리고 점괘는 점괘 내리는 것조차 여호와의 뜻이었습니다. 점치는 것도 주의 뜻이고 점괘 내리는 것도 여호와의 뜻이라면 이것은 점치나 안치나 상관없이 여호와께서 부리도록 되어 있는 인간은 반드시 점을 쳐야 되고, 점괘가 나와야 되고, 점괘대로 행동을 해야 되는데 이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작정한 그 코스대로 갈 뿐이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코스대로 갈 뿐인 그것을 미리 알기 위해서 기도하고 바벨론은 점을 치고 예배 참석하는 거예요. 뭐가 문제냐 하면, 그걸 미리 알고자 한 그 의도자체가 천국에 합당치 않는 마음가짐이라는 말입니다. 착한 일 따로 있고 나쁜 일 따로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착한 일은 하나님에게 속했고 나쁜 일은 우리에게 속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성격일 뿐이거든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보통 집안 보면 남편이 무슨 잘못을 했거나, 아내가 무슨 잘못을 했거나, 애가 무슨 잘못을 했을 경우에, 예를 들어 자식이 친구들과 싸우다가 사람을 죽였을 때, 그래서 경찰서에 와 있을 때 부모가 경찰서에 찾아와서 그 자식보고 “왜 그랬어, 왜 그랬어!” 통곡하면서 “내가 너 키운다고 그렇게도 애를 썼는데 왜 그랬어!” 하고 막 자식을 때리고 후회하고 절망하잖아요.
그런데 그 후회하는 모든 행동, 또는 본인이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가슴을 치면서 후회하는 것, 내가 그런 행동을 안해야 되는데 했다고 후회하면서 가슴 치는 그것이 천국 가는데 합당한 마음가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뭐가 잘못했을 때 “이놈의 자식아, 왜 그랬냐!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네가 사고를 치나.” 하면서 가슴을 치고 통곡할 때 그 사고방식은 아직도 자기와 자기자식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신이시여, 왼쪽입니까, 오른쪽입니까?” 점을 친다는 자체가 자기하는 일에 아직도 미련과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천국에 부합되지 않는 성질이고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옳지 않은 것을 주께서 하게 하시는 것은 주께서 의도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주신 계시는 차단의 효과가 있어요. 이 모든 말씀은 차단의 효과가 있습니다. 점을 친다는 것은 해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대한 해석, 변화에 대한 해석,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가의 해석인데 하나님께서 그 해석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알고자 하는 그 의식자체가 잘못이에요. 왜냐, 세상이 돌아가게 되면 우리도 같이 변화된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립니다.
나는 멈춰있고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고 오류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허물을 느끼는 것은 자기 주변에 어리고 젊을 때 알았던 사람들이 모두 다 변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고향에 가면 그 고향친구들 다 늙어있고 심지어 고향의 느티나무도 늙어 있고 내가 놀던 개울에 공단에 들어서서 강도 다 4대강공사해서 준설토로 덮여 있어요. 변하지 않은 옛날 그 모습이 그대로 있어야 내가 좋았던 그 시절을 유지할 텐데 내가 어릴 때 좋았던 그 모습, 어릴 때의 할아버지와 친구들, 아버지와 친구들. 엄마 계모임할 때의 그 아줌마들이 다 지금은 죽고 없다 그 말이지요.
어릴 때는 다 세상 살만한 기쁨을 느끼잖아요. 그런데 지금 만나보면 다 어디 갔습니까? 다 죽고 없고 공동묘지에 가 있거든요. 그것이 그렇게도 섭섭한데 섭섭할 것이 없는 것이 오늘 우리 자신도 계속 변하고 있어요. 따지고 보면 가슴 아픈 것이 뭐냐, 어제가 10월 15일이 없어요. 10월 15일은 날라 가 버렸어요. 몇 시간 차이라도 어제로 되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이 점괘를 보고 그대로 해도 예정된 코스대로 한다는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변화를 알고 내 자신을 알고, 이 모든 아는 그것이 결코 은혜를 받는 사전작업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없으면서도 우리는 기껏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시키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가? 분명히 차단되어 있잖아요. 차단되어 있기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던 그 행세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행세를 완전히 차단하고 천국에서 살 수 있는 행세, 천국에 부합하는 삶의 성격으로 바꿔치기 할 수가 있는가? 그 예들이 성경에 누누이 나와 있습니다만 그 한 예가 에스더 4장 66절에 보면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천국이 일으키는 사건은 우리의 해석에 포함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전에 예측하는 그 사건은 전혀 아니에요. 우리가 예상했던 사건은 일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가 접하는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왜냐, 미리 예측해 버리면 은혜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나의 예측력과 예상력이 섞이기 때문에 그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든, 또 다른 말로 점을 쳐서 어떤 결과가 나왔다면 그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나라에서 차단되었다는 사실, 차단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만 하나님께서 활용하십니다.
‘아마 내일은 분명히 이렇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나는 아주 기쁠 거야.’ 또는 ‘내일은 분명히 이럴 거야. 그러면 나는 슬플 거야.’라는 그 생각들은 이미 일종의 점을 치는 것 밖에 안돼요. 점을 치게 한 것은 너는 천국에서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는 사고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에스더의 경우에는 하만이 등장했는데 왕후라도 전혀 몰랐어요. 하만이라는 자가 자기유다민족을 몰살시키려 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냥 왕후로서 밥이나 먹고 살면 되는지 알았어요. 그런데 하만이라는 자가 유대인을 잡아 죽이고자 하는 경우도 이상한 경우에요.
사촌오빠인 모르드개가 하만이라는 사람이 왔을 때 다른 사람은 높은 사람이라고 절을 했는데 유독 모르드개가 절을 안했거든요. 그러니까 “저 인간은 절을 안 하네. 옥에 가두라.” 하면 될 텐데 하만이라는 그 못된 인간, 물론 유대인입장에서 못된 인간이지만 친구들 입장에서는 아주 출세한 사람이죠, 그 하만이 “모르드개 저 사람은 왜 절을 안 하나?” 하고 물으니까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모르드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절을 안합니다.”라고 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모르드개와 엮이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하신 겁니다.
따라서 그 소리를 듣고 하만이라는 사람이 그 유대인들, 여호와 하나님 믿는 그 민족을 다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 하만의 생각이 옳아요.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 다 몰살당해야 돼요. 왜? 장차 오실 유대인 한 분이,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이게 정답입니다. 성도는 살면 안돼요. 성도를 죽이는 하만이 이 세상에 등장해야 됩니다. 등장해서 “성도냐? 너 오늘 죽어 줘. 앞으로 한 달 뒤에 다 죽어.” 이렇게 성도는 하만 같은 인간들이 나와서 마땅히 다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고 싶어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한 계획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서 그 에스더 같은 상황, 진짜 구원상황을 잊어버리고 자꾸 하나님 덕분에 살려고 교회 와서 점을 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여, 어느 쪽이 내가 사는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어느 쪽이 나한테 유익이 되겠습니까? 어느 쪽이 천당 가는데 보탬이 되겠습니까?” 맨 날 점을 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그 목사를 통해서, 에스겔을 통해서 “저 일반사람들 점치는 것을 보여줘라. 그리고 점괘대로 네 교회 홀라당 불내버린다.” 어느 교회 시골교회 사모님, 법 없이도 사는 사모님이 교회 상담하러 온 아저씨한테 배에 세 번 칼에 찔려서 죽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다 칭찬해요. 그 사모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모고 너무 착하다고요. 아직까지 안 잡혀서 지명수배 내렸어요.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지요.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문제에요. 그 사람은 천국의 성질과 차단되어 있기에 안타까워하는 겁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이 등장했고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음으로 여호와가 개입되었습니다. 여호와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여호와를 믿는 이유 때문에 모르드개 뿐만 아니고 모든 유대인은 다 몰살당해야 됩니다. 대책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모르드개가 예상한 상황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유대인도 기도해서 응답받아본 적도 없고 어떤 유대인도 점쳐서 점괘로 그것을 예측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하만이 결정내린 것이고 하만은 예상했어요. 다 죽여 버린다고. 하만이 옳습니다. 하만은 유대인들 보기에 나쁜 인간이지만 그 하만의 결정은 옳은 결정이에요. 하만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정상적으로 그래야만 하는 겁니다. 왜, 장차 이 세상에 오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정상적이듯이 하만의 몰살작전은 정상적입니다. 왜 하만의 그런 일이 유대인들에게, 모르드개에게 일어나게 하는가? 모르드개가 유대인들이나 그 당시 왕궁에 있는 에스더나 전부 다 질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지 않으면 그들이 구원을 못 받습니다.
이 땅에서 빛과 소금으로 바른 역할을 해서 바르게 살면 천국 가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일반 점치는 종교하고 똑같은 종교에요. ‘지금 내가 너무 착한데 하나님은 이 너무 착한 나를 계속 살려주겠지. 왜, 하나님은 너무 선하시고 선한 하나님을 믿으니 나도 선하고 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도와줄 것이고 도와준다면 앞으로 내 예상은 잘 먹고 잘 살 것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고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모든 유대인들을 다 죽이고자 하고 심지어 모르드개 달아 죽이기 위해서 높은 장대까지 만들었어요.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 때 에스더가 하는 말이 “죽으면 죽으리이다.” 은혜가 임하는 장소는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다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온 자리입니다. 내가 기도해도 소용없고, 헌금해도 소용없고, 목사해도 소용없고, 선교사 해도 소용없고, 목사 안 해도, 소용없고 십일조 안 해도 소용없고, 해도 소용없고, 예배참석 안 해도 소용없고 해도 소용없고, 예수 믿어도 소용없고 안 믿어도 소용없음을 깨닫는 그 순간 그게 천국에서 요구하는 성격입니다.
매일 같이 “주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진즉에 사라져야 될 내가 아직도 있다니! 지금 사라진다 해도 저는 아무 탓 못합니다. 왜 사라져야 되는가? 맨 날 해석하고 맨 날 점치고 맨 날 기도하면서 내 이익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애쓰고 붙들고 기도했던 것이 이 세상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아직도 살면 살수록 강렬해지니 주여, 주여, 해도 천국 갈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고 이 땅에서 성공할 생각뿐이고 이 땅에서 편하게 살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것은 일반 사람들이 자기 신 믿고 점치는 그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똑같은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사상, 그거 백날 해봐야 소용없고요, 십자가 안다고 해봐야 그것도 소용없고, 구원의 능력은 우리가 십자가를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아는 나한테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는 늘 죽어야 되고 늘 사라지고 은퇴해야 되지요. 조금씩 조금씩 무대 뒤로 은퇴,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희미해져가고 있는 겁니다. 남들 사라지듯이 우리 자신도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벨론 왕이 점을 쳤더니 점괘가 나왔어요. 우리도 뭔가 기도하고 응답받습니다. 하지만 응답대로 되는 것 같지요? 진짜 응답은 “주여, 기도해서 응답받아도 그것이 구원에 소용없음을 아는 그 순간, 구원의 능력은 예수님이 스스로 일으키는 자기의 적용, 십자가 보혈의 피를 우리에게 적용시켜서 용서를 적용시키는 그 적용에 있지 우리가 소요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날마다 그렇게 적용되는 사람이고자 주께서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부인토록 하는 이 놀라운 기적, 그것이 은혜로 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부인해도 우리 능력으로 부인하는 것은 소용없고 우리로 하여금 살고자 하는 것이 다 죄라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 그동안 주의 은혜로 그냥 일방적인 주의 은혜로 살아온 것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천국에서 요구하는 성질이 바로 그것임을 저희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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