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으로서의 세상
2013년 11월 13일 본문 말씀: 에스겔 22:13-16
(22:13) 네가 불의를 행하여 이익을 얻은 일과 네 가운데에 피 흘린 일로 말미암아 내가 손뼉을 쳤나니 (22:14)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내가 이루리라 (22:15) 내가 너를 뭇 나라 가운데에 흩으며 각 나라에 헤치고 너의 더러운 것을 네 가운데에서 멸하리라 (22:16) 네가 자신 때문에 나라들의 목전에서 수치를 당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스겔 22:7-12의 말씀부터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셨는지 이유가 나와있습니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나그네를 학대했으며,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물품을 함부로 다루었으며
안식일을 경솔하게 지냈으며 사람을 상해하거나 죽이고 싶어 상호 이간시키는 짓을 했으며 높은 산에서 이방신에게 제사지냈으며 그 예배에서 음란한 의식을 행했으며, 근친강간과 부녀간에 남매간에 성관계를 했으며 월경중의 여인과도 동침했으며, 며느리를 욕보였으며 돈을 받고 타인을 대신 살해하는 청부살인도 서슴치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자 수입을 노리고 돈 놀이하는 자들도 저주를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쉽게 묻고 쉽게 답변 되는 질문 중의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천국갑니까?” 답변은 이러합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갑니다.” “어떻게 하면 지옥갑니까?” 답변은 이러합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갑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물이 이어집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당신이 본 적이 있습니까?” 답변은 이러합니다. “봤다든지 만난 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상상해서 믿습니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상상해서 믿다보면 사람마다 각기 다른 예수를 상상하게 마련이고 이는 어느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상에 부합되는지 곤란합니다.
믿음에 대해서 우리는 구약에서부터 올라오는 흐름을 차단해서는 아니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줄기입니다. 즉 지옥과 천국은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이미 개시를 하셨습니다. 단 그 곳이 오로지 언약이 주어진 백성, 곧 이스라엘이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지옥이 어떤 속성과 본질을 띠고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지옥이 고통이 극심하고 장기간 계속 이어지니 겁을 미리 집어먹고 그곳에 가지 않아야 한다는 식으로 지옥을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이란 죄를 지은 자라면 마땅히 당연히 가야만 하는 곳이라는 점을 대 이스라엘을 통해서 증거코자 하시는 겁니다.
에스겔 22:12에 보면, “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뇌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네가 변돈과 이자를 받았으며 이익을 탐하여 이웃을 속여 빼앗았으며 나를 잊어버렸도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나, 곧 여호와 하나님을 잊었도다’는 말씀에 유의해봅시다.
사람이 사는 데는 반드시 우선 순위를 두고 생각하거나 행동하게 마련입니다. 에스겔 22장에서 쭉 나열된 이스라엘의 범죄 항목들은 모두 인간들로서 즐거움이 동반되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즉 인간들이 느끼는 행복이란 자기 즐거움이 바탕이 되고, 인간들에게 있어 불행이란 자기 즐거움이 찾을 수 없는 환경을 말합니다.
이는,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에 있는 인간의 근원을 경유하고 나올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기(詐欺)란 인간의 근원과 바탕을 경유하지 않고 나오는 발언들입니다. 그러다보니 항상 행복과 즐거움을 제공하겠다 것이 우선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가장 즐거울 때는 죄를 지으면서도 그 누구에게 들키지 않고 실행되는 때이고,
반면에 인간이 가장 괴로울 때는, 그 나쁜 짓이 사람들에게 들킬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옥의 실태를 자기 백성을 통해서 알리기 위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범죄를 온 만국에 다 알려주는 방식으로 나오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당사자들은 죽지 않고도 이 세상에서 이미 지옥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어쩌면 이런 점이 이스라엘로서는 다행이라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방민족들에게는 아예 언약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율법이 없기에 내놓은 자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에게는 의도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죄가 있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냉혹하고 무시무시한 징벌을 몸소 겪게 합니다.
지옥에 들어서 보므로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바탕과 바닥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단에서 십자가 소개를 최종적인 결론으로 하지 않는 설교는 다 사기(詐欺)입니다. 왜냐하면 교인들로 하여금 다시금 자기네들 존재의 바닥에 서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후다닥 지옥에서 벗어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오늘 본인에 나오는 지적 같은 것보다 더 혹독한 계명이 주어집니다. 마음 속으로 간음을 품어도 간음죄요, 형제를 보고 미워해도 이미 살인자입니다. 그 어떤 것도 맹세해서는 아니되고,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는 자도 지옥갑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입니다. (로마서 3:10) 이 지상 생활에서 미리 지옥을 맛보게 되는 자들이 복된 자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가 따라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조치입니다. 징벌을 피할 생각 마시고 도리어 그 징벌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을 음성을 들읍시다. 14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내가 이루리라” 우리는 자꾸만 지옥과 천국, 혹은 여러 신을 놓고 자신이 골라잡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저주만 유발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현실을 자기 손으로 자신의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철석같이 믿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시면서 벌내리십니다. 과연 심판날의 너의 운명이 네 손에 의해서, 네 능력에 의해서 구원될 수 있느냐 하면서 물으시는 겁니다.
평소에 자기 인생을 자기 손으로 꾸려가겠다는 그 사고방식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바닥에 내려갑시다. 성령께서 십자가 자리로 데려가주시면 우리는 그 밑바닥에서 자신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지옥 한 가운데 자신이 놓여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님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의 모든 일생은 이처럼 십자가 달린 예수님이 보이도록 조치하신 주님이 조성하는 그 현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항상 바닥이 치면서 자기 주제를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고마워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에스겔 22:13-16
“너의 불의를 행하여 이를 얻은 일과 네 가운데 피 흘린 일을 인하여 내가 손뼉을 쳤나니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룰찌라 내가 너를 열국 중에 흩으며 각 나라에 헤치고 너의 더러운 것을 네 가운데서 멸하리라 네가 자기 까닭으로 열국의 목전에서 수치를 당하리니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에 대해서 저주하시면서 너희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내가 제대로 저주했기에 내가 기뻐한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주받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을 세상 각 나라 속으로 흩어지게 해서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망했는지,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서 자기 나라조차 없이 유리하고 고생하면서 세상을 살지’ 라는 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아주 특별한 일에 너희들을 적용시키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편안히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그들이 벌 받을 때도 하나님이 철저하게 남김없이 사용하시도 어떻게 하시는가?
이스라엘 말고 다른 나라로 다 들어가게 해서 그들이 자기 나라도 없이 고생하는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기에 자기백성을 이렇게도 모질게 추궁하시고 이렇게 대하시는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해 주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다른 신과 다른 민족의 관계하고 아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면,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 하나님께서 천국을 만드시고 지옥을 만드시지요. 천국과 지옥은 죽어봐야 알고 가봐야 알지 누가 본적 있느냐, 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그 지옥을 자기 백성을 통해서 이미 살아생전에 우리에게 보게 만드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지옥 없다는 소리 하지 마라. 내 백성도 저렇게 다루신다.” 그냥 지옥이 고생스럽다, 힘들다, 불탄다, 영원히 계속된다는 조로만 지옥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지옥이 무엇 때문에 있고 왜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사람들이 지옥에 가야 하는가, 그 내력을 이 세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기백성을 통해서 분명히 미리 다 보여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요. 지옥이라 하는 것은 죄 있는 자에게 벌을 내리는 겁니다. 흔히 상식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들이 지옥 갑니까?”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들은 것이 있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라고 할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천국 갑니까?”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라고 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생겼지요? 키는 어떻고 인물은 어떻습니까?”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믿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놓고 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몰라요.” “그러면 당신이 믿는 것은 당신이 일방적으로 상상한 존재를 믿는 것이니 당신이 믿는 것은 확인할 길이 없지 않는가?”라고 할 때는 할 말이 없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상상해서 믿으면 천국 간다, 이것은 아니거든요. 보이지 않는 분을 네가 상상해서 안 믿으면 지옥 간다, 그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먼저 신약 적으로 답변하지 말고 구약 적으로 답변해 보자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구약 적으로 먼저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해놓고 그것이 신약에 와서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가고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사람들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게 뭐냐, 사람들이 행함을 통하지 않고는 뭐든지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그냥 믿으라고 하면 자꾸 뭔가 지어내서 믿으니까 지옥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주님께서 일부러 행함을 사용해서 저주와 연결되도록 하시는데 그게 22장 6절에 나옵니다.
제가 그 항목들을 죽 나열해 보겠는데요, 이것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긴 겁니다.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부모를 업신여기면 지옥 갑니다. 그 다음에 “나그네를 학대하였으며” 나그네 학대하니까 지옥 가는 것이죠. 그 다음에 “네 가운데서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도다.” 고아와 과부를 해하니까 지옥 가는 것이고,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제사지내는 그 모든 행위와 의례에 대한 진지함이 없이 율법에 위반했으니 지옥 가는 것이고 그 다음에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안식일을 제대로 안 지켜서 지옥가고요, 그 다음에 이간질 붙이는 자도 지옥가고 산 위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도 지옥가고 음란하게 행하는 자도 지옥가고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자기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도” 지옥가고 달거리를 하는 여인과 성관계를 해도 지옥가고 그 다음에 11절에 보면 이웃의 아내와 음행한 자도 지옥가고 며느리를 더럽힌 자도 지옥가고 자매와 간음한 자도 지옥가고 돈 받고 살인해주는 살인청부업자도 지옥가고 그 다음에 이자 받고 돈 빌려주는 것도 지옥가고 이웃의 것을 사기 쳐서 얻어 챙기면 그것도 지옥가고.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나쁜 짓 할 때가 지옥입니까, 나쁜 짓 하다 들킬 때가 지옥입니까? 어느 것이 지옥이 감이 오는 겁니까? 연예인들이 인터넷 도박했다고 했지요. 그 연예인들이 인터넷 도박할 때 멀쩡했어요. 그런데 걸리고 난 뒤에 자진해서 전부 다 프로그램 다 하차했잖아요. 들킬 때가 지옥입니까, 행할 때가 지옥입니까? 행할 때는 천국입니다. 이것을 행할 때는 천국이에요. 사람이 가장 기쁘고 즐거울 때가 언제인가 하면 나쁜 짓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 들킬 때 너무나 즐겁고 사람이 괴로울 때가 나쁜 짓 한 족족 걸릴 때 사람이 가장 괴롭습니다.
지금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 이스라엘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게 뭐냐 하면, 이런 짓을 다른 민족들이 해도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축출당하거나 지적받지를 않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행인 것은 이런 일들을 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들킨다는 그 사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것이 지옥 간다, 그럴 것 같으면 펀드 넣는 사람들, 이자 받는 사람들 다 지옥가야 돼요. 지금 에스겔 22장이 이정도지요. 마태복음 5장, 6장을 보세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지옥가고 맹세하는 자도 지옥가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하는 것도 지옥가고 마음속으로 형제보고 ‘에이 씨’ 하고 욕하는 것도 지옥가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지옥에 누가 갑니까?” 할 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누가 천국 갑니까?”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이것은 심각하지도 않아요. 자기가 예수를 상상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실제로 인터넷 도박하다 걸려버리면 연예인 한 달에 수천만 원하던 수입 한꺼번에 다 날라 가버리지요. 세상에 그런 지옥이 어디 있습니까? 엄청난 지옥이잖아요. 자기가 행한 것은 안 따지고 “신이시여, 왜 남은 안 들켰는데 하필 제가 들키게 하십니까?” 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이렇게 해요. 항상 인간의 원천을 경유해서 일합니다.
사기꾼들이 다른 것이 사기가 아니고 인간의 기원, 인간의 모든 행동과 존재의 그 원천과 기원을 경유하지 않고, 그 바닥을 치지 않고 이야기하기에 그게 다 사기꾼들이에요.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바닥을 치고 인간의 원천을 접할 수 있느냐? 성령을 통해서 인간의 바닥이 옵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그래서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는 모든 목사는 다 사기꾼들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사기꾼이란 인간의 원천과 기원을 경유하지 않고 언급하는 것,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 것, 대표적인 경유가 신학박사들, 신학교교수들과 목사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전부 다 사기꾼들이에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신학교수가 설교를 하게 되면 항상 염두에 둬야 할 것이 뭐냐, “신학박사 받은 것도 죄입니다.”라고 나와야 돼요. 항상 바닥을 쳐야 돼요. 복음을 아는 목사는 내가 목사 하는 이것도 죄에 속한다고 바닥을 치고 설교해야 돼요. 선교사 같으면 “내가 필리핀에 선교 간 것도 죄입니다.” 라고 해야 돼요. SBS가 필리핀에 태풍이 오고 난 뒤에 직접 기자를 현지에 보냈어요. 기자를 보내서 인터뷰를 하는데 47세 된 선교사와 그 부인을 인터뷰했어요. 그런데 그 부인의 인터뷰 내용이 제 기억에 남습니다.]
자기 집이 2층인데 물이 1층까지 들어와서 이젠 죽었다 생각하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면서 천국 갈 준비를 했다는 거예요. 그런 뒤에 보니 물이 빠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안심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 선교사 부인이 큰 실수를 한 거예요. 천국 가는 것이 안심이지 이 지옥 같은 곳에 더 사는 것이 안심일까요? 못 들으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릴까요? 물이 1층까지 들어와서 2층으로 피해서 거기서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애들 붙들고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천국 갈 준비를 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천국 가기를 진짜 원하고 기도하고 찬송했다 할 것 같으면 물이 빠질 때 “에이, 갈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어야지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이러면 그 앞에 했던 기도와 찬양은 뭡니까?
사기에요, 사기. 조심해야 됩니다. 기도와 찬양할 때 긴장을 풀면 안돼요. 자신의 믿음 없음이 들통 날 수가 있다니까요? 선교사 부인이었어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께서는 지옥이 있다는 것을 겪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자체에서 지옥을 만들어내면서 지옥과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죽어서 예수 만나서 지옥 갈까, 천국 갈까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조성하신 그 지옥 속에 ‘아, 이것이 지옥이구나.’ 하는 것을 혹독하고 느끼면서 비로소 지옥 속에서 “주여, 저는 주의 나라 외에는 희망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만 제대로 예수 믿는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고,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태풍부니 마니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게 하는데 어떻게 믿게 하느냐 하면, 그 동안 우리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너무 푹 젖었고 너무 좋아들 했다는 것을 완전히 까발리는 겁니다. 지옥이지만 우린 지옥인줄도 몰랐기 때문에 돈 빌려 주고 이자 받고 자기 성질 내키는 대로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고, 이 모든 것, 여기 12절에 보면 “나를 잊었도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곧 지옥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에요. 뭐든지 세상에서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이나 예수님 이야기해가지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고 꼭 행함을 이야기하고 돈을 이야기하면 이야기가 참 잘 통해요. 사람은 돈 이야기하면 제일 이야기가 잘 통합니다. 오늘 아침에 꿈을 꾸었는데 꿈에 수요설교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안 나온 지 오래된 우리교회 성도가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당신은 오늘부로 잘렸습니다.” 지금 꿈 이야기입니다. 내가 성질이 나서 “나도 그만둔다.” 하고 나가보니 거기가 하양이라. 지금 꿈에, 꿈은 다 쓸데없다는 것을 알지만.
나가서 돌아다니면서 ‘아, 이젠 뭐 먹고 살지?’ 그러니까 사람은 누가 뭐래도 돈과 관련되면 제일 이해가 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 사람이 왜 날 보고 잘렸다고 했는지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이 ……, 지금 계속 꿈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제일 터줏대감이고 돈을 많이 냈어요. 결국 교회라 하는 것은 진리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돈을 많이 냈느냐, 오랫동안 자금을 많이 댔느냐, 그래서 목사가 맘에 안 맞으면 설교 중간에라도 “당신 잘렸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교회다. 내가 지금 30년 목회하면서 꿈을 통해서 처음으로 알았어요. 교회라는 것이 돈 많이 낸 사람이 오야붕이라는 것을 왜 몰랐느냐는 거지요.
맨날 교회 머리는 예수님이고 말씀이고,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런 것은 다 쓸데없는 하나의 껍데기라는 것, 누가 돈을 많이 냈느냐, 그 사람이 바로 대주주고 그 사람 말 한 마디에 목사도 댕강 목이 잘린다는 것을 11월 13일 새벽 한 네 시경이나 되었을까, 꿈을 통해서 확신했습니다. 교회는 통하지 않는 예수 이야기, 삼위일체 이야기, 성경 이야기 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고 통하는 이야기로 통하는구나. 돈 되는 사람 우대하고 오래 다닌 사람 우대하고 “착하게 사시면 구원받고 복 받습니다.” 하는 행함과 돈으로만 이야기해야 서로 통용되지 그동안 통용되지도 않는 에스겔, 마태복음, 로마서, 스가랴 이야기, 통하지도 않는 이야기, 믿지도 않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얼마나 실감나는 꿈이었는지 하루 종일 전율이었습니다. 바보지요 바보! 공부 좀 했다고 까불더니 알기는 뭘 압니까?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그래서 제가 지나온 교회들을 죽 보니까 진짜 그래요. “내가 돈 내서 세운 교회인데 왜 내 말 안 들어? 나가!” 이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할 때 목사가 돈 내는 법이 아니에요. 자기 교회 되니까. 지옥은 이 땅에서 주님이 만드십니다. 이 말은 뭐냐, 현실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찾아와요. 그 현실이 이스라엘에게는 남달라야 돼요. 지옥을 미리 보여주는 현실이 이스라엘에 미리 덮쳤습니다.
다른 민족 같으면 이런 짓을 해도 들키지 않습니다. 왜, 그것은 내놓은 자식이기에. 여호와의 말씀이 없다는 그자체가 이미 지옥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이 율법을 줬습니다. 줬을 때 그들은 그 율법을 가지고 안 들키려고, 율법은 위반하고 있으면서도 위반 안하는 척 하려고 보조규칙, 세칙들을 만들었는데 결국 이스라엘 자체가 망했다는 말은 그 중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 마세요. 이 세상 자체가 바로 지옥이었던 것입니다. 그 지옥이기에 예수님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제자들은 못 알아먹었어요. 왜, 지옥은 지옥만이 통하는 말이 있어요. 지옥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끼리 알아듣는 말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4장에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 그 다음에 인기와 기적, 그 다음에 세상권력, 세상권력과 인기와 돈과 경제적인 것, 양식 얻는 것, 이것에 대해서만 인간들끼리 서로 잘 소통이 되고 의견개진이 잘 돼요. 그것을 경유하지 않고, 그것을 주 내용으로 다루지 않고 십자가 이야기를 예수님이 해버리니까 가까이 있던 열두 제자도 당최 못 알아들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니까 제자들이 그 말을 못 알아들어서 “예수님, 예수님! 우리 가운데 누가 높은 사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경유해서 이야기해요. 돈과 인기와 권력, 권력에 대해서 제자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누가 천국가면 높은 자리에 앉을까?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통용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갈 수 없는 이유가 지옥 같은 세상이 예수님을 이미 추방했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음부에 가셨다가 부활했지만 주님께서 이 세상을 지옥 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그것을 십자가로서 이미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가 만든 하나님이 필요하지 진짜 하나님은 우리 속에 끼어들지 마세요. 하나님은 하나님끼리 놀고 이 세상에서는 우리끼리 놀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시고 일 하시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을 봐야 해요. 14절에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영원히 너를 멸망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에 힘이 있겠느냐.’라고 했어요.
이 말은 상당히 어려운 말인데요. 이 말씀이 어렵기에 제가 표현도 어렵게 하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내 편이 될 수가 없어요. 상당히 어렵지요? 나 자신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 이 말이 어렵지만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평소에 내 인생은 누가 챙기고 책임져야 되느냐 하면 우리 일상의 습관이고 버릇인데 이 14절 말씀,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너를 치겠다는데 네가 평소에 하는 행세대로 네가 너를 관리하는 것이 성사되겠느냐? 내가 너를 치는 그 속에서 네가 아무리 노력한들 네가 네 힘으로 거기서 너를 빼낼 수 있겠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 말은 마지막 때에 우리가 힘을 못 쓴다는 말이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그 습관과 사고방식 자체가 바로 내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관리하고 이끄는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을 전혀 모르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12절 끝에 나오는 대로 나만 생각하면서 여호와를 잊어버린 그 대가입니다. 14절 말씀이 왜 있는가 하면,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를 건져내겠습니까?”라고 누가 묻는다면……, 우리가 실컷 나쁜 짓 할 때는 신났는데 결국 들킬 때는 우리가 지옥에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스럽고 큰 일이 났다 싶지요.
그러면 여기서 나 자신을 빼내야 되는데 그 빼내는 그 방법이 뭡니까, 라고 물을 때 그 답변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나 여호와를 믿으라.”라고 답변하시는 것이 아니고……, 오늘 설교가 좀 어렵습니다, 그렇게 답변하시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네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이끌어 왔는지?” 그걸 묻는 거예요. 평소에는 내 인생 내가 책임지지요. 내가 집에서 놀고 있으면 누가 돈 대주는데, 내가 나가서 일해야 돈 나오지. 평소에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글쎄, 그걸 버리라” 그 말입니다.
참, 그걸 무슨 수로 버립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이야기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알아먹는 이야기를 해요. 그것은 구약 사람들은 행함과 돈, 행함으로 하나님 섬기고 행함으로 복도 얻고 잘 행해서 저주를 피하고, 모든 것을 행함으로 한 거예요. 그래서 행하려면 그 행동의 주체가 누구냐 하면 본인이 행해서 본인이 행한 그 결과로서 모든 이익과 축복이 자기에게로, 자기가 행했으니 남에게 가지 않고 자기에게 오는 식으로 행동을 한 겁니다.
그 행동했기에 그 행동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되 “똑바로 하란 말이다.” 라고 해서 아까 죽 나온 것들이 있지요. 그것은 “네가 평소에 네 행함으로 네가 살려고 하기에 네 행한 것이 정말 천국 갈 만큼 제대로 행했는지 보자.”라고 행함으로 언급을 하시는 거예요. 그 결론은 뭐냐? 멸망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신약 때 오게 되면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더 이상 내가 평소에 행동 잘해서,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되었다는 생각이 전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예수를 믿더라도 “나는 평소에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죄였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만드시면서 믿어지는 그 예수님,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네가 밥 먹고 살려고 한 짓이지.”라고 추궁하시고 “맞습니다. 내가 이 짓도 밥 먹고 살려고 한 내 육신적인 행동입니다.”라고 책망 받으면서, 자백하면서, 그렇게 책망하시는 그 주님을 믿을 때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믿음입니다. 부처를 믿을까, 예수를 믿을까, 난 예수를 믿겠어, 이렇게 자기가 선택해서 믿는 믿음은 14절에 위반됩니다. 이것은 천국 가는 믿음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가 언제 우리 행함 의지 안하고 주님만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냐? 이것이 오늘 설교에서 마지막 남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 말이 옳다면 ‘이것은 내가 행동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것이다.’라고 하루에 몇 번 해야 되는 것입니까, 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답변하지요. 예수님의 성령과 말씀이 오게 되면 항상 소급해서 전에 내가 했던 것조차도 주께서 일부러 나를 몰아댄 거예요. 왜냐하면 현실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찾아오기에. 내가 그런 행동, 그런 자백, 그런 책망 받을 짓, 그 현실마저 주께서 일부러 조성해주신 현실입니다.
왜, 그 가운데서 예수님만 믿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조치를 해주셨기에. 그래서 소급해서,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이 안 벌어졌으면 나는 나 잘난 체나 했는데 그런 일이 있음으로서 우리가 믿을 것은 오직 예수님의 행함뿐이지 내 행함은 아니다, 내 행함은 죄 뿐이다, 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시는 모든 행함도 주께서 만들고 조성하신 현실, 내가 만든 현실이 아니고 찾아든 현실, 주께서 일부러 일구어낸 현실, 우리는 그 현실을 항상 소급해서 뒤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겁니다.
5년 후에 성령이 오신다면 그 시점에서 소급해서 지금의 시점까지 전부 다 감사할 것밖에 없는, 한평생 죄만 지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그 감사, 그래서 십자가만이, 십자가 피 만이 우리 죄를 용서해서 우리가 의인된다는 것,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사실, 율법 외에 다른 의가 있는데 그 의를 믿음으로만 의라는 사실을 주께서 조성하신 현실 속에서 우리의 죄를 드러내면서 마땅히 멸망 받아야 될 것이 우리였는데 주님덕분에 우리는 살았습니다, 라는 고백을 할 때 그것이 바로 이미 조성된 천국의 시작입니다.
천국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땅에서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이 땅에서 지옥과 연결되어 있어요. 구약에서는 행함으로 죄었고 밀어붙였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천국과 지옥이 판가름되는 겁니다. 십자가 믿으면 천국이고 십자가 안 믿으면 지옥이고. 이제 처음에 이야기했던 그 이야기가 끝부분에 와서, 구약을 통하고 에스겔 22장을 통해서 다시 보니까 바로 바닥을 치고 우리의 십자가를 경유하니까 진짜 결론적으로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라는 것,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초대교회가 인사했던 것처럼 “마라나타, 주께서 오십니다.”라고 진정으로 주를 기다릴 수 있는 성령 받은 같은 성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나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의지로 말미암아 믿지 않을 수 없도록 조성된 신앙, 그래서 모든 신앙도 주의 선물이요 주님의 은총이고 주님의 사랑인 것을 날이 가면서 더욱더 깊게 주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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