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말씀
2013년 10월 30일 본문 말씀: 에스겔 21:28-32
(21:28) 인자야 너는 주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과 그의 능욕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다고 예언하라 너는 이르기를 칼이 뽑히도다 칼이 뽑히도다 죽이며 멸절하며 번개 같이 되기 위하여 빛났도다
(21:29) 네게 대하여 허무한 것을 보며 네게 대하여 거짓 복술을 하는 자가 너를 중상 당한 악인의 목 위에 두리니 이는 그의 날 곧 죄악의 마지막 때가 이름이로다
(21:30) 그러나 칼을 그 칼집에 꽂을지어다 네가 지음을 받은 곳에서, 네가 출생한 땅에서 내가 너를 심판하리로다
(21:31) 내가 내 분노를 네게 쏟으며 내 진노의 불을 네게 내뿜고 너를 짐승 같은 자 곧 멸하기에 익숙한 자의 손에 넘기리로다
(21:32) 네가 불에 섶과 같이 될 것이며 네 피가 나라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네가 다시 기억되지 못할 것이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라 하라
하나님과의 마주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우리들에게 보내십니다. 눈으로 봤을 때 하나님의 등장이 아니라 그냥 일개 사람의 등장으로만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기적을 받은 사람 같으면 하나님께 직접 바로 코 앞에서 그 말씀을 외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소박하게 기대하고 있는 꿈과 희망과 목표와 목적이 하나님 앞에서 다 깨어지고 와해되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경우, 하나님께서 진노의 불을 보낸다고 하실 때, 진노의 불 앞에서 집안의 대소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나를 향해 날아오는 돌직구라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어느 누가 전하느냐는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하는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당시 암몬자손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는 비켜 가리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암몬 자손들은 독자적으로 창조된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과의 연관성에서 나타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보통의 나라들은 자기 말고 그 어떤 나라의 취지를 위하여 자기 나라가 보조적인 역할을 하리라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그 나라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라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성격이 그대로 암몬 족속에도 있었기에 그들은 남의 나라 신인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분노와 징벌을 받는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이 이방나라는 이스라엘과 애초부터 엮인 운명인 것을 알려주십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엮여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창조의 원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원리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피조물들이 알아채거나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입장만 챙기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말로 해서 자기 일상에 푹 젖어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우선적인 것은 자기를 위한 자기 일상성입니다. 자신이 시간들의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남 우선이 아니라 나 우선으로 일상을 보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은 이들에게 있어 뭡니까? 신이라는 존재와 그 말씀은 인간 자기네들의 일상을 풍요롭고 여유롭게 해줄 의무를 지닌 전능자로 알고 있습니다.
즉 일상이 먼저이고 말씀은 나중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상 속에서는 원래 창조하실 때의 원리와 원칙과 비밀이 전혀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이왕 만들어졌으니 계속 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은 창조 원리상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민족 암몬에게 저주를 예언하시는 겁니다.
피조세계에서 일상이 우선되도록 하나님께서 방치하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신 겁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졌는가를 항상 바닥에 깔고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이 말씀 우선이 되지 아니하면 어느 민족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분노의 저주를 내리십니다. 말씀이 우선된다는 것은 창조의 원리와 원칙과 목적을 위해 피조물이 존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원리와 원칙과 목적인 인간들에게 철저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자기 일상을 기점으로 해서 아무리 탐구해도 이 창조원리는 밝혀지지 아니합니다. 이는 곧 피조물들의 모든 일상이 각자 자신의 자질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외부의 다른 원리에 의해서 유지되고 생존하고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이 외부 원리를 인간들이 밝혀낼 수가 없는 이유는, 인간이 그 어떤 탐색에 나서도 꼭 ‘자기 유리함’을 염두에 두고 따지기 때문입니다. 즉 생존 이전의 원리를 파헤쳐야 하는데 필히 ‘생존의 당연함’을 기조로해서 따지기 마련입니다. “나는 더 이상 안 살아도 돼”라는 정신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살지?”라는 식입니다.
이 세상에서 창조일을 하실 분은, 창조를 무(無)로 돌릴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있는 그 분뿐입니다. 곧 창조주이십니다. 무(無)로 돌린다는 말은 심판작업을 마무리 짓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창조주께서 자신을 무로 돌린다고 해서 할 말이 없이 지극히 당연한 조치라고 반길 수 있는 자만이 ‘창조 원리’ 위에 살아온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창조원리를 알려면, 기준의 인간이 애써 노력하고 땀을 흘려 가꾸고 저장해놓은 그 모든 것도 다 무(無)로 돌아가는 그 현장에서 드러내게 됩니다. 무의 자리에서만 창조 상황이 제대로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 만들겠다는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지 아니하시면 그분이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는 아니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망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웃 나라 암몬이 보여줍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에 암몬나라에서는 기뻐했습니다. 바벨론왕이 안 쳐들어 온 것도 기뻐할 일이지만 , 갈림길에서 바벨론 군대로 자기 나라 암몬 쪽이 아니라 이스라엘 쪽으로 공격하는 점궤룰 알고 기뻐했습니다. 이 사실을 암몬나라 점쟁이들도 알아낸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내의 선지자나 제사장처럼 그 나라에게 종교적 과업을 수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점궤의 승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암몬 자손들의 고소해함이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받아야 될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일상→말씀으로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일상으로 가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이스라엘 내부를 폭파시킵니다. 그 폭파의 자리는 곧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자리입니다. 인간 위주의 말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창조 원리인 예수님 고난 위주의 말씀이었던 것이요 그래서 이스라엘에 이 원리를 장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신앙인 같으면 자기 멸망 속에서 비로소 구원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옴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복음이 찾아와서 ‘일상’ 위주로 살아가는 우리 삶을 폭파하고 지나온 모든 일들이 다 십자가 희생에서 나온 배려인 것을 알게 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망하면서 구원된다는 점이, 같이 망해도 구원되지 못하는 비-언약민과 비교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일상을 따로 갖지 않도록 하나님의 지시를 직접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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