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납 같은 분노(겔22;17-22)이근호131120

아빠와 함께 2013. 11. 20. 21:24

납같은 분노(에스겔 22: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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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1-20 21:02 
        납 같은 분노


2013년 11월 20일                       본문 말씀: 에스겔 22:17-22

(22:17)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2:18)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내게 찌꺼기가 되었나니 곧 풀무 불 가운데에 있는 놋이나 주석이나 쇠나 납이며 은의 찌꺼기로다

(22:19)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다 찌꺼기가 되었은즉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가운데로 모으고

(22:20) 사람이 은이나 놋이나 쇠나 납이나 주석이나 모아서 풀무 불 속에 넣고 불을 불어 녹이는 것 같이 내가 노여움과 분으로 너희를 모아 거기에 두고 녹이리라

(22:21) 내가 너희를 모으고 내 분노의 불을 너희에게 불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되

(22:22) 은이 풀무 불 가운데에서 녹는 것 같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으리니 나 여호와가 분노를 너희 위에 쏟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대하여 ‘찌꺼기’라고 하십니다. 알맹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을 찾는 일반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시는 신을 골라라면 아무도 이런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선택하는 신은 자신들이 비는 대로 응답하시는 신입니다. 자신을 책망하고 꾸중하는 신이라면 사람들은 그 신을 기피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른 신과는 특별납니다. 세상의 모든 신은 인간들이 선택하는 신인 반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도리어 하나님이 선택해서 이스라엘이 등장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운명이란 이스라엘이 관여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찌꺼기 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곧 찌꺼기입니다. 알맹이를 곱게 드러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주변에서 달라붙다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의해서만 분리되어야 하는 그런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정작 인정해야 될 하나님이란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고 우긴 그 여호와가 아니라 도리어 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때, 비로소 참된 신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메시아와 한데 엉겨 붙었다고 여겼는데 실은 영구히 붙은 것이 아니라 떨어지기 위하여 임시로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차이를 차이답게 드러내는데 개입하시는 그 하나님의 모습이 그동안 이스라엘이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진면목이 됩니다. 빌립보서 3:8-9에 보면,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잃어버림이 없이는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잃어버릴 것은 바로 사도가 평생에 통해 귀하다고 여긴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사도가 되기 이전에 그는 따로 귀한 것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귀하게 여긴 것으로 인하여 진짜로 귀한 것을 천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귀한 것과 귀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7:1-2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그 언질을 주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는 곧 그 어느 인간도 예수님 앞에서 평가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겁니다. 사람이 누구를 평가할 때는 그 평가대상에서 자신은 쏙 빼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그는 그 누구도 비판할 자격자가 되지를 못합니다. 마태복음 6:28-29를 보게 되면,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누렸던 부귀영화는 모든 인간들의 부러움의 최극점에서나 나타날 것들입니다. 솔로몬이 받은 축복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냥 부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목표로 매진하게 만듭니다. 생의 의욕을 제공하는 계기가 됩니다. 솔로몬의 성공의 기준이 되기에 솔로몬이 누렸던 그 영화의 간격을 가지고 사람의 가치를 측정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영광과 멀리서 사는 자들은 버림받은 존재요, 가까이 근접했으면 가치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들에 핀 백합화가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낫다고 하십니다. 이로서 솔로몬을 이상형으로 삼고 사는 그 계열의 모든 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한꺼번에 지적받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을 사모한다는 것은 결국 그 목표점 획득에 방해되는 모든 것들이 본인의 결정에 의해서 제거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제거대상 중에 이미 예수님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전혀 귀한 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개인의 출세의 방해물로 분류되면서 제거된 그 메시아가 진정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감히 이 영광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 나라의 멸망은 바로 이 과정을 전개하는 중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귀한 것과 귀하지 않는 것은 분간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반대로 여긴 그 자들을 찌꺼기라고 지적하시면서 멸망시킬 때, 바로 모든 인간들이 이 유다나라와 더불어 같이 망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새로운 영광으로 복귀할 주님의 나타나심 과정의 일부로 편입됩니다. 은이 은답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찌꺼기 속에 둘러싸여서 보이지 않아야 하고, 그리고 맹렬한 불길로 인해서만 찌꺼기와 은이라는 금속이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다면 찌꺼기는 마땅히 찌꺼기로서의 역할에 감지덕지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7:36-38에 보면 그 예가 하나 나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여인의 자리는 찌꺼기의 자리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만 드러내신다면 그것으로 감지덕지하는 자리입니다. 성도란 이처럼 자신이 내놓은 그 어떤 행동에 대해서 평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평가만 듣는 자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고서는 “화로서 망하게 되었다”고 외쳤습니다.

즉 자신이 누구를 판단할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거룩에 직면한 순간, 그는 자기 존재를 무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선지자는 이러한 영광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받아드립니다. “하나님, 이 무지하고 교만한 백성들이 받는 징벌을 저에게 담당시켜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이제 신약에 와서 이 죄많은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을 씻어냅니다. 많은 용서받았기에 많이 사랑하는 중입니다. 자기도 자신에 대해 평할 입장이 못됨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합니다. 십자가 그 피흘리심 앞에서 우리는 모든 자의식을 내려놓습니다. 이것이 참 이스라엘의 역할입니다. 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복귀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만 고귀하게 드러내신 식으로 다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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