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 면류관
2013년 11월 17일 본문 말씀: 스가랴 6:9-15
(6:9)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6:10)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받되 (6:11)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6: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6: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6:14)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6:15)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현대인들은 과거인들이 하는 것을 이렇게 문자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생각합니다. “이들이 한 일이 오늘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라고 말입니다. 타인이 무슨 일을 하던 우리가 그대로 할 의무는 없다고 보는 겁니다. 만약에 이들이 이런 일을 해서 구원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도 은근히 그들이 하던 일을 따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요 모방한다고 해서 동일한 하나님의 사업인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스가랴 선지서에 나오는 내용을 우리가 왜 알아야 할까요? 그것은 그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모두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와서 사도는 이 ‘육신’이라는 용어로 모든 인간들을 복음적으로 통합시킵니다. 육신이라는 표현은 인간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육신아”라고 부르시면서 인간을 상대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육신으로 취급되기에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인간의 가치를 따로 쳐 줄 수가 것이 분명해집니다.
육신인 주제에 감히 무슨 일을 했다고 해서 자기 공적이나 공과로 되가져갈 수는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을 통해서 나타난 모든 일들은 그 육신에게 특별한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일관된 약속에 준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여러 육신이 나옵니다.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나옵니다.
이들의 입지가 특별한 이유는, 그들이 바벨론에서 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는 표면이 밋밋하게 깎인 도장과 같습니다. 아직 아무 것도 새겨지기 전의 도장의 윗면에 무엇이 새겨질 것인가 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 전개에 속한 문제입니다.
이 세 사람의 역할을 바로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을 경험했다는 점입니다. 곧 진혹한 하나님의 맹렬한 심판을 경험했다는 겁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잃습니다. 자기 것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땅도 없습니다. 대제국은 바사 나라의 속한 땅일 뿐입니다. 이처럼 심판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신약 시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예외적인 사항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음’ 상태로 전락된 이스라엘 나라는 스스로 움직일 여력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이 이끄는 대로 존재할 뿐입니다. 바로 이럴 때, 하나님의 계획이나 약속의 윤곽을 보다 분명히 드러나고 존중받게 됩니다. 곧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오늘날 신약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이 가질 것은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육신은 이 세상과 더불어 망해야 합니다. 따라서 천국이란 심판의 자리에서 다시 불러오는 능력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4:1에 보면,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출산할 태가 없는 여인의 자식이, 임신 능력을 가진, 달리 말해서 임산할 수 있는 육신의 자식보다 더 많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이 세상에서 벌릴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서로들 눈에 뜨이는 이 육신을 어떻게 처리되는 겁니까?
분명 육신이 부모의 육신으로부터 생겨 난 것입니다. 즉 ‘잉태할 수 있는 능력’으로 생산된 육신입니다. 따라서 이런 육신 가지고서는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그렇다면 ‘육신 바꿔 타기’가 일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바벨론에서 은과 금을 가져온 이 세 사람은 면류관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면류관을 가지고 여호수아라는 제사장 머리 위에 쒸웁니다. 바로 이와같은 행위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예언이 개시됩니다. 즉 ‘순’이 나올 것이라는 겁니다. ‘순’이란 이스라엘의 왕이 등장하는 그 출처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에게 주신 약속의 저촉을 받게 되는데 이는 다윗 언약에 의해서 나온 그 왕국이 곧 미래의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다윗언약에 의하면 ‘이새의 줄기’가 기본이 되어 특별한 왕이 등장하신다고 합니다.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1-2)
그런데 그 ‘이새의 줄기’가 나올 자리가 이제는 제사장 여호수아가 면류관 쓰는 그 자리입니다. 곧 제사장 여호수아가 쓴 그 면류관이어야지만 장차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그 왕이 쓰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제사장직분이 왕 직분과 결합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결합으로 일어난 결과가 뭐가 될까요?
곧 ‘육신 바꿔치기’가 성사됩니다. 이미 잉태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 자식의 육신 말고, 잉태치 못한 여인에게서 나온 자식의 육신에게로 바꿔타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제사장이 존재합니다. 창세기 14:18에 보면, 아브라함이 만났던 인물 중에 멜기세덱라는 분이 계십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육신적 노선에 멜기세덱의 노선이 결합되는 겁니다. 이 멜기세덱의 노선의 특징은 히브리서 7:3에 나옵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이 지상의 육신 족보와 그 어떠한 연결점을 갖지 못한 존재가 멜기세덱이고 이 멜기세덱의 역할은 바로 왕으로서 제사장직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은 바로 이 멜기세덱의 족보를 일반 육신적 족보에다 개입시키는 내용입니다. 마치 승냥이가 먹잇감 등 위에 올라타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 육신이 품고 있는 그 심판성이 일반 성도의 육신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면서 오직 제사장이요 왕이신 분만 찾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는 예수님과 더불어 ‘잉태치 못한 자의 자식’이 됩니다. 이것이 장차 세워질 새로운 성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육신됨에 있어 예수님을 소개하는 기능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6장 9절에서 1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17페이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받되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성경 말씀에 사람들 많이 나오죠. 이 말씀들이 어떤 일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 사람들이 이런 어떤 행동을 하고 면류관을 만들고 누가 바벨론에서 돌아왔고 그걸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의 머리 위에 씌웠고 나중에 그 자리가 제사장이 함께 있을 자리라 하는 이 사실, 그게 오늘날 21세기 한국 한반도에 사는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상관이 우리가 힘으로 이룰 수가 없어요. 이거는 우리하고 상관없는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편지에서 상관있게 하는 단어 하나를 집어넣어요. 그게 뭐냐? 육신이라는 겁니다. 나는 육신이고 스가랴 6장에 나오는 괜찮아 보이는 이런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그들도 육신이고, 이 육신이니까 도장을 파기 전에 밋밋한 그 면 있잖아요. 그걸 육신이라고 한다면 그 도장 파기 전에 밋밋한 그 평지에다 하나님께서 어떤 바바박! 하고 어떤 도장을 새겨버리면 그건 그쪽 스가랴 6장이 되고, 오늘날 21세기 우리에게 바바박! 말씀으로 새겨버리면 이거는 신약에 속한 신약 성도 우리가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 가지고 도장 표면에다 어떻게 새기느냐, 그 새기시는 그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면 오늘날 우리에다 새기시는 그 하나님이 또 야곱과 이스라엘과 우리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스가랴 6장에서는 이렇게 헬대와 도비야와 여디야에게 할 일을 새기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할 일을 새기는데 같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를 살려내시는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연결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연결되지 않고 옛날 사람들 성전 지었단다. 면류관 만들어 머리에 썼단다. 우리도 면류관 만들어서 머리에 쓰면 되겠네. 이거는 우리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일 이예요. 그 당시 사람들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따로 있어요. 괜히 흉내 내면 안 됩니다.
야곱이 별미를 바쳐서 아버지 드렸더니만 복을 받았다. 그러면 지금도 우리 아버지한테 소고기 사드리면 복 받습니까? 아버지가 이게 호주산이냐, 따지면 골치 아프고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구약은 모방하지도 마시고 흉내 내지도 마시고 우리 식으로 재현하지도 마세요. 지금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게 육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스가랴 6장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런 일을 맡겨 줄 때에 왜 무슨 취지로 그런 일을 했는가? 그것은 이렇습니다. 육신 옮겨 타기! 육신 바꿔 타기입니다. 육신을 바꿔 타는 거예요.
현재 우리가 조상한테 물려받은 육신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갑니다. 그래서 육신을 바꿔 타야 돼요. 바꿔 타는데 말이 허약하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이 인정한 육신으로 바꿔 타야 되는데 그 하나님이 인정한 육신에게는 뭣과 무슨 요소가 결합돼 있느냐 하면 왕과 제사장 요소가 결합돼 있는 육신을 따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 따로 만드는 사람이 뭐냐 하면 바로 여기에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가 되는 겁니다. 그 여호수아의 면류관이 거기에 같이 결합이 돼요.
스티븐 시걸이라는 유명한 미국의 영화배우가 있는데 그 사람이 나오는 ‘언더시즈‘ 원, 투, 쓰리는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영화 안 본 사람이 많을 텐데요. 그 영화내용이 이렇습니다. 범인들이 기차를 탈취해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무기를 싣고 가는데 그 기차에 휴가 중인 주인공 스티븐 스걸이 자기 조카와 같이 타고 가다가 야, 이게 수상하다는 걸 알고 특공대 본색을 해서 그 기차를 범인의 손에서 바꿔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우여곡절 끝에 하는데 스티브 시걸이 하는 대목 중에 어떤 게 기억나느냐 하면 기차 지붕에서 싸움하다가 떨어져 나가는데 기차 위로 다시 기차 지붕위에 올라가는 걸 봤어요. 그 대목을 이 대목과 접목을 시키려 합니다.
현재 이 육신은 걷잡을 수 없어요. 이 육신은 내 성질, 내 성깔, 이거는 달라지지도 않고 베드로도 죽을 때 자기 성질 다 부리고 죽었고 사도요한도 마찬가지고 인간의 성질이란 한번 준 성질은 DNA에서 박혔기 때문에 바뀌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다가 뭔가 새로운 게 입혀야 되는데 귀신 씌든가 돼야 되는데 왕과 제사장 겸직하는 왕의 기능과 제사장 겸직을 하고 있는 어떤 분이 와서 우리를 이렇게 덮치면 되겠죠. 마치 멧돼지 위에 호랑이가 덮쳐서 잡아먹듯이. 스티브 시걸이 열차 위에 덮쳐서 그 안에 있는 나쁜 인간들 전부 다 죽이고 결국은 무기까지 없애고 미국의 영웅이 되는 그런 영화잖아요. 아주 유명한 영화에요. 젊은 사람이 많이 보는데.
우리가 영웅 되지 말고 주께서 우리에게 덮쳐서 스폰지에 뭔가 수액을 집어넣듯이 우리 몸에 뭐를 스며들게 하느냐 하면 왕 + 제사장직을 스며들게 하면 되는 겁니다. 그 스며들게 하는 그 과정이 있어요. 그 과정이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다는 거예요.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와야 돼요.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분이 우리의 어깨를 덮쳐야 되는데, 바벨론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 받은 적이 있던 이스라엘 사람이 바벨론에 가 있어요. 하나님의 심판의 매서움,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 하나님은 절대로 봐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혹독하게 경험한 그 이스라엘, 멸망당해서 포로 잡혀서 자기 땅을 잃어버리고 남의 땅에서 포로생활하면서 눈물과 심한 고생 속에 있는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옴으로서 그들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한테 심판 받았다.’라는 그러한 정신과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죠.
우리가 살아가는데 우리 등허리에 어떤 분이 올라타면 그분은 어떤 경험을 한 분이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았다.’라는 경험을 갖고 계신 분이 우리 어깨 위에 우리 등허리 위에 올라타야 됩니다. 그래서 빨리 우리 육신을 예수님의 육신으로 이게 점령당해야 돼요. 참, 영화까지 이야기하면서 설명하려고 하니까 제가 어렵지만 성경은 더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한 대목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대목과 관련된 대목인데 이사야 54장 1절에 보면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아까 쉬는 시간에 우리 집사님께서 질문한 것이 이사야 26장 3절에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그 말씀 질문했잖아요. 그 질문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 믿으면 우리가 평강해 지잖아.’ 단 조건이 심지가 굳으면, 믿음이 굳어버리면 우리에게는 가정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평강이 찾아온다. 그러니까 성경 이사야 26장 3절을 큐티하면서 묵상하면서 ‘우리도 평강 얻자.’라는 식으로 하는데 그게 옳은 해석입니까? 저한테 질문을 했어요. 그래서 답변하기를 모든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뽑아낸다 했죠. 예수님을 뽑아내지 않으면 이건 유대교가 돼 버립니다. 유대교는 성경을 달달 외워요. 전부 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이고 자기는 행복해야 마땅한 존재로 전부 다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이 왜 이사야 54장 1절은 왜 손을 안 댔냐 이 말이죠. 잉태치 못한 자가 자식이 많다는 이야기를 왜 그들은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26장 3절에 ‘야, 평강하고 싶다. 나는 행복 하고 싶어.’ 어디 적절한 구절 없을까? 이사야 26장 3절, “네가 심지가 견고하면 평강이 온다.” ‘그래 이 말씀이 오늘 주신 말씀이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자신의 육신은 그 멧돼지는 그 멧돼지 육신 그대로 가요. 뭐 덮치는 것도 없고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평강 얻으면 되는 거예요.
기독교 서점에 가면 그런 것도 2014년 되면 또 나와요. 오늘의 운세 비슷한 거 나와서 3월 달에 평강, 이 구절, 애가 군에 갔을 때 이 구절 군에 갔을 때 네가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좋은 후방에 빠질 거다. 그런 내용들,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뽑아내지 못하고 유대교인들이 성경 달달 외우는 식으로 그렇게 적용하면서 은혜 받았다 하는 거거든요. 은혜 받는 그것을 우리는 치워버려야 돼요. 은혜 받을 생각하지 말고 아예 은혜 받을 거리도 없는 게 오히려 더 평강이라. 몸은 있고 은혜는 받아야 한다고 하면 골치 아파요. 은혜 받을 것도 걷어 차버려요. 아무것도 안 남기고 다 쫓아내버려요. ‘받기는 뭘 받아.’ 하고 쫓아내버려요.
잉태치 못한 여자가 지식이 많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자식이 육신이 있더라도 그걸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주께서 우리를 덤비시는 겁니다.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너는 나한테 없는 존재에요. 없는 존재, 하나의 그릇, 접시에 불과하고 접시는 백날 숟가락 긁어봐야 접시는 빈 접시는 아무것도 먹을 거 없어요. 하나님의 먹을 것은 그 다음부터는 채워주실 거예요. 뭐로? 왕과 제사장 직이 그 접시에 담길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우리가 담으면 그 접시는 깨져요. 필요 없는 접시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6장이 창세기는 아니잖아요. 신약도 아니고 창세기와 신약의 중간에 이사야가 끼어 있잖아요. 그러면 여기 왕과 제사장 직이 결합이 된다는 이 이야기가 중간쯤 나와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여기 왕과 제사장을 초반부터 이미 계획해놨던 그 대목에 가서 그 뿌리를 캐보면 원래 그 대목이 있어요.
그 대목이 뭐냐, 창세기 14장에 보면 멜기세덱이라고 나옵니다. 멜기세덱이란 그분이 히브리서 6장에 보면 멜기세덱이 나와요. 멜기세덱 그분이 어떤 분이냐 하면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이사야 54장에 보면 잉태치 못한 자가 오히려 자식이 잉태한 여인보다 더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 잉태치 못한 여인에게 쏟아져 나온 그 자식은 결국은 자식들 하나, 하나마다 잉태치 못한 여자가 낳은 자식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되 내가 낳았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불쑥 이 땅에 순풍, 순풍 태어난 그런 자식들만 모아서 천국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잉태치 못한 자식을 하려면 어디를 다녀와야 되느냐 하면 바벨론을 다녀와야 돼요. 바벨론을 다녀와서 아예 태반 자체가 완전히 죽어 와야 돼요.
바벨론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면 ‘이제는 내가 뭘 해서 그 한 것으로 내가 구원 받는다.’는 그러한 방식은 이제 주님 앞에 인정받지 못한 방식입니다. 고상을 떨어 봐도 신약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고상 떠는 기간도 만료된 거예요. 잘난 체하고 점잖은 체 해봐야 십자가 피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잘난 체하지 못합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 자국을 만질 때 도마가 뭘 자랑할 수 있고 뭘 내세울 수 있습니까? 그냥 깜짝 놀라서 ‘주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밖에 못하죠. 그 창자국과 못 자국을 만져볼 때에 그동안 자기가 나름대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옳은 조심과 반듯함과 자제와 절제와 모든 착함과 윤리 도덕 이런 거, 십자가 앞에서는 전부 다 쓰레기에 불과한 겁니다. 열심히 착하고 바르게 살고 어떻게 반듯하게 살고 요거 바벨론 포로 잡힐 때까지만 합시다. 이미 포로 잡혀 가게 되면 내가 죄 졌다고 생각하는 그 이상의 벌을 받아요. ‘아, 내가 이 정도까지 고상할 필요 없었는데’ 하는데 더 심한 징벌을 바벨론에서 받게 되는데 땅도 없고 절도 없고 토지도 없고 자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들을 가지고 데리고 나옵니다. 이제 그들에게 있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약속밖에 없습니다. “면류관 만들어서 여호수아 머리에 씌워라.” 단지 그들이 지시받은 것은 그것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 땅이요? 이스라엘 땅 아닙니다. 현재 스가랴 6장 이스라엘 땅 아니고 바사 나라 땅 이예요. 이스라엘 땅 아니에요. 땅도 없어요. 그냥 여기나, 저기나 총독이 와서 통치하는 것이지 자기 나라 없습니다. 있다는 것은 바로 장차 메시야가 온다는 약속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사실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은 여기 12절에 나옵니다.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그 다음에 굉장히 중요한 말씀 나오는데요.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순! 이건 김 중건 목사보고 하는 게 아닙니다.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요게 바로 잉태치 못한 여자가 찬송할 것이라고 하는 거와 통하는 겁니다. 순이란 사람은 왜 이름이 순이냐 하면 순이 피어난 그 자리에서 열매를 맺기 때문에 그런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이 맺혔다는 그 이름에 적합한 거예요. 어떤 외부의 도움이라든지 어떤 인간들의 도움과 협조에 의해서 말씀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뾰루지처럼 쏙, 쏙 돋아나는 스스로 자생하고 스스로 그 작용력에 의해서 활짝 만개하는 어떤 분이 있을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육신을 덮쳐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화분이 되고 그분이 우리를 화분 삼아서 그분의 꽃이 우리 속에서 만개될 것입니다. 그걸 오늘 본문 끝에는 그걸 성전이라. 성전!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계속 미루고 있느냐 하면 왕과 제사장이 어떻게 결합되느냐 그걸 계속 미루고 있어요. 이게 약간 난해한 부분에서 장소만 이야기합니다. 지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있는 것은 더러운 육신밖에 없습니다. 이 육신의 본성은 죽을 때까지 안 없어져요. 자기밖에 모르는 육신. 아주 진짜 바벨론에 포로 잡혀도 백번 포로 잡혀도 마땅한 육신, 하지만 바벨론 포로 잡혀서 모든 것을 잃어도 마땅한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금과 은을 가지고 여기 도비야나 여다야나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처럼 우리에게 면류관을 만들라 해서 네가 쓰지 말고 대제사장 찾아와서 스가랴 6장에서 여호수아 머리에 씌우게 되고 씌우면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그 면류관을 받은 사람은 대제사장인데 그 면류관을 대제사장이 쓰고 있으면 대제사장이 죽으면 대제사장이 썼던 그 면류관을 누구한테 씌우느냐 하면 그 다음에는 왕으로 오신 분이 쓰는 거예요. 제사장에게 썼던 면류관이 왕으로 오신 분에게 씌워버리면 비로소 제사장과 뭐의 만남? 왕 직. 왕과 제사장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만나서 뭐할 건데?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나서 뭐할 건데? 아무것도 없는 이 나라, 멸망한 이스라엘, 하지만 그들이 버티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렇고, 그 약속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매끈한 아무것도 없는 도장위에다 ‘면류관 만들라. 돌아오라. 여호수아에게 머리 씌워라.‘ 하는 그때 그 당시 스가랴 6장 당시의 어떤 역할들을 그 당시 육신에게 해주는 거예요. 우리 육신은 그런 일 할 필요 없어요. 그 당시 육신에게 이야기해주고 그 육신에게 해준 육신이 어디와 연결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그냥 연결된다 하면 무책임한 설교가 돼요. 그냥 연결합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은 잉태치 못한 자가 낳아야 되기 때문에. 비참하죠. 예수님을 낳았던 마리아는 인간의 힘으로 잉태치 못해요. 잉태치 못한 것도 성취해야 되고, 제사장이 썼던 그 면류관을 육신이 되는 왕이 되신 그분도 써야 되고, 이 말씀도 성취되고 잉태치 못한 자에게서 태어나야 되는 것도 성취돼야 되고, 육신으로 내려왔던 제사장과 왕 직이 잉태치 못한 사람들의 머리에 예수님의 머리에 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졸지에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 분명히 부모가 있지만, 어머니은 여기 또 계시지만 우리는 잉태치 못한 자식이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천국에 못 갑니다. 노선을 갈아타야 돼요. 노선을!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안 돼요.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을 거쳐 오되 그 육신은 제사장과 왕 직을 겸해서 한 육신 같으면 우리 육신을 대체할 수 있고 대신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을 얻는 육신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자격을 얻었다는 그 권리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제사장에 있어요. 제사장은 뭐냐 하면 제사장과 왕은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 멜기세덱에 의하면 이 땅에 제사장이 있더라도 제사장은 죽어야 되는 겁니다. 멜기세덱은 이 땅에 족보고 아비도 없거든요. 있더라도 없는 존재가 되듯이, 이거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제사장과 왕 직을 하면서 죽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죽어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 우리 죽을 육신을 예수님이 미리 가져간 게 돼요. “하나님 아버지, 쟤 택한 백성인데 쟤 이미 육신은 죽은 존재입니다. 죽은 존재니까 쟤 육신에 대해서 뭐라고 나오는 것은 언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쟤 육신과 나와 같이 결합이 됐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 못 박을 때 쟤 육신도 나와 함께 십자가 못 박은 걸로 간주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의 제사장과 왕 직이 결합이 돼요.
왕이라 하는 것은 왜 붙느냐 하면 제사장 직은 죽는 거고, 왕은 왜 붙느냐 하면 왕은 본인 하나가 잘 되면 다른 사람은 덤으로 같이 그 밑의 백성들은 똑같은 효과를 제공할 수 있는 자리가 왕의 자리입니다.
왕의 이름을 부른다. 왕이 있다는 말은 나 보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우리 왕이 내 대신 다 했어요.‘ 할 때 그분은 나의 주가 되고 왕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원래 왕 직을, 순이라 하는 것은 다윗의 왕 직이거든요.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그게 순 이예요. 이건 대대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자생하는 이어짐인데 그 왕이 이스라엘 왕은 되지도 못했어요. 이거는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서 ‘왕 치워라. 인간적인 왕은 치워라.’ 진짜 왕이 오게 되면 바로 이스라엘 왕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이란 말은 뭐냐 하면 백성들은 그저 왕 하나 잘 되면 그냥 가만히 앉아서 혜택을 입어보는 그 상태가 바로 이스라엘의 다윗 구조에요.
오후 기도하시는데 기도할 때는 제가 떨리는 것이 기도하는 분을 심판하는 느낌이 내가 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왜냐 하면 기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보고 기도하는데 제가 잘했다. 못했다. 할 입장이 못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렇게 육신을 다른 육신이 십자가 지지도 않은 다른 육신이 왕이 계시고 제사장 계시는 그 육신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관여하거나 터치하거나 심판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실 때 맘껏 기도하시면 돼요. 누구 눈치 보지 말고. 우리는 그냥 얻어먹는 부스러기 은혜 얻어먹고 아멘, 하면 되고요.
그러니까 왕이 누구냐 하면 우리 육신을 대신 없애주신 분을 찾으시면 되는 거예요. 이게 오늘의 설교 요지입니다. 여기에 스스로 태어났다. 제사장이다. 아니 쓸데없는 짓 하고 있네. 아니에요. 다 우리의 육신을 갈아타기 위해서, 우리의 육신을 없애 버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도장은 뭐냐, ‘저 육신은요, 이거 희망 없어요. 제 육신을 기대하지 마세요. 저한테 기대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약속만 기대하세요.’라는 그 역할만 하라고 지금 새겨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의 어린아이가 구약의 선지자보다 휠씬 많은 걸 알고 있어요. 이 사람들 이런 일 하면서 ‘내가 지금 면류관 썼으니까 아직까지 제사장하고 있지.’ 아직도 자기 육신에 기대가 있는데 신약 시대 우리는 아예! 나에 대해서 꿈을 접어버렸어요. 내 육신으로 뭐 한 게 있어서 그걸로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순이라는 사실, 그분께서 잉태치 못한 자에서 태어나서 우리 자신도 잉태치 못한 자식으로 편입시켜 줬다는 그 사실, 그것 때문에 제사장은 죽음, 제사장을 죽이거든요. 스스로 제사장이 되시고 스스로 제물로 죽으시고 왕으로 다시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왕과 제사장이 결합된 그 메시야를 믿는 우리가 그 혜택을, 왕이기 때문에 백성으로서 혜택을 입는 그 원칙을 스가랴 6장에서 미리 우리 앞에 제시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사람이나 오늘날 다 같은 육신이고 그들에게는 그 일을 맡겼고, 우리는 그냥 예수님만 증거 하면 살아가는 이 일을 맡겼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육신이기에 온통 실수요, 죄요, 건질만한 것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통해서 잉태치 않은데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된 것을 다시 한 번 믿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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