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칼
2013년 10월 9일 본문 말씀: 에스겔 21:1-5
(21: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1:2) 인자야 너는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성소를 향하여 소리내어 이스라엘 땅에게 예언하라
(21:3)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21:4)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21:5) 모든 육체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21:6)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이스라엘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당사자 이스라엘도 실패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오로지 자신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축복과 저주 가운데서 자신이 선택하고 싶어합니다. 축복을 선택하면 축복받고, 저주를 선택하면 저주받는다고 생각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의 여생을 꾸려나왔기 때문입니다. 숱한 사람들이 이 땅 위에서 태어났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네들 인생은 자신들의 결정에 의해서 진행되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땅’이라는 개념을 그런 시도를 무산시킵니다.
여기 나오는 땅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그런 보통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땅에 사는 거주민의 생존을 돕기 위해 있는 땅이 아니라 그들에게 덮쳐질 말씀의 내용을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땅입니다. 즉 ‘축복’이 무엇이며 ‘저주’의 실체가 진정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땅입니다.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은 축복과 저주를 알려주는 표식들입니다. 전쟁과 기근과 홍수와 지진과 풍년과 번창 같은 것들이 이런 내용들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칼’을 거론하시므로서 ‘전쟁’을 통해서 축복과 저주를 말씀하시려고 합니다. 전쟁이란 것은 단순히 인간들 끼리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쟁 유발자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말씀입니다. 축복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일어나야만 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약속, 본래의 성격은 인간들의 사회에서 볼 때, 항상 ‘반대되는 개념’으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생길‘을 언급하시면서 하나의 길만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다 인간들의 일상적인 선택성을 실어서 담습니다. 넓고 쉬운 쪽에서 자연스레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쪽이랍니다. 하지만 그 길은 함정입니다. 멸망으로 이어져있습니다. 반면에 좁고 작은 길은 찾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곳만이 생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대립되고 반대되는 두 가지 길을 나란히 언급하시는 이유는, 모든 말씀은 인간의 선호도에 부합하기 위해서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 취지를 품고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모든 선택으로 인하여 인간 자신들이 당연히 멸망당해도 싸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봐도 .악인이나 의인 모두 다 멸망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선인은 복받고 악인은 벌 받는다’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반대되는 내용을 보여줍니다. 즉 사람들의 선택과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말씀을 끌어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맙시다.
즉 예수님의 사회에 나가서 첫 경험은 ‘마귀로부터 시험받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람부터 만나거나 대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을 마귀와 대면토록 하십니다. 그것은 진정한 승부란 인간들이 하나님을 상대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시험에서 떡이냐 말씀이냐를 놓고 강요받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부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단이 그동안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인식시켜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가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겠다는 것이 인간들에게는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내가 죽어 없다면 하나님도 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논리 이전에 우리네들 몸 자체가 웅변으로 말해줍니다.
바로 이 점을 두고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한 겁니다. 예수님에게는 자신의 생존이 우선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곧 하나님의 약속이 우선입니다. 약속에게는 축복만 있는게 아닙니다. 저주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먼저 만나고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이미 인간들이 저주, 곧 하나님의 내리시는 천벌 안에 파묻혀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취지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이란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특별히 축복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신명기 27:12-26에 보면,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등등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관심사는 이 이스라엘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천벌이 대단하고 실제적인 사실인가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를 두 부분으로 나뉘어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게 하되, 주안점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있었습니다. 영원토록 저주를 철회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말씀의 취지가 이런 겁니다.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단과 대면해야만 하는 사실이 왜 당연히 작업코스인가를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생각은 이러합니다. 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갱신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축복과 저주의 갈림은 그런 식이 아닙니다. 감히 그 사회에서 죄인이다고 소문나고 의인이라고 소문나도 그런 승부들은 소용없이 다 멸망당한 다는 겁니다. 승부의 길이 아닙니다.
그 질이 6절에 나옵니다.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이 탄식은 예수님 십자가의 아픔입니다. 인간들이 갖고 있는 그 사고 방식 자체가 순전히 자기 우선인 것을 보고 탄식하시는 겁니다. 말씀이 갖고 있는 축복과 저주 그 자체를 위하여 인간들이 태어났음을 알지 못하고 사단에게 빠져 있는 현실을 보고 선지자는 예수님께서는 허리 끊어지도록 탄식하는 겁니다. 성령님의 탄식이 이런 종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간들 끼리의 승부욕과 승부결과를 부정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
60강-에스겔21장 1-5(여호와의 칼)13100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1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1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1:1-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성소를 향하여 소리 내어 이스라엘 땅을 쳐서 예언하라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찌라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집에서 빼어 무릇 혈기 있는 자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무릇 혈기 있는 자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집에서 빼어낸 줄을 알찌라 칼이 다시 꽂혀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스라엘이 살았던 땅, 보통 우리가 사는 이 땅과 외면상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농사짓는 보통 땅인데 그 땅이 무엇을 증거 하는가하면,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계셔서 축복을 해 주시는 증거를 보여주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땅이 이스라엘이 살던 땅입니다. 그래서 그 땅을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약속의 땅을 축복의 땅이라고 생각하는데 약속의 땅이란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저주를 보여줘야 할 땅도 되는 겁니다. 축복과 저주를 합쳐서 약속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사라지고 나면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고 둘 다 있을 때 그것을 약속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약속으로 다루시는 겁니다. 둘 다 다 있는 겁니다. 이렇게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상스럽게 지옥은 빼놓고, 저주는 빼놓고, 자기가 원하는 축복이라든지, 영생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그런 것을 먼저 귀담아 들으려고 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런 일방적인 오해를 방치하지 않겠지요. 약속에는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함께 있다고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저주가 있다는 것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제켜 놓아버리고 “축복이 있대. 교회가면 복 받는대.”
교회가 약속이 있는 곳이라면 교회 오면 저주받습니다. 그것도 감안해야 돼요. 이번에 U 튜브 동영상 올리는데 그 첫 번째 제목이 “천벌 받으세요.”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날 믿으면 영생 얻는다.” 하시면 다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 까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약속된 분이기에 두 가지 상반된 것을 다 이야기하기에 사람들에게 밉상을 받게 되지요.
인생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넓은 길이 있고 또 하나는 좁은 길이 있다고 합니다. 길을 하나만 이야기 하면 되는데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당히 민망하고 당황스럽게 만들어요. ‘길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넓은 길이고 한쪽은 아주 척박하고 좁은 길이다. 넓은 길은 편하고 좋아서 찾는 사람이 많고 좁은 길은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다.’ 그 뒤에 있는 것, 넓은 길을 갔을 때는 어떻게 되고 좁은 길을 갔을 때는 어떻게 된다는 그 이야기를 안 했다고 칩시다.
안했다 치고 ‘그 두 개의 길이 있는데 너희가 그 둘 중에 알아서 골라서 오라.’고 했다면 보나마나 전부 다 편하고 아스팔트 깔린 편하고 넓은 길, 많은 사람들이 같이 동행하니 친구도 되고 외롭지도 않고 힘도 나고 삶의 활기도 넘치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일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넓은 길로 사람들이 갔는데 그 길로 간 사람들 몽땅 저주의 길,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합류하겠나?” 라고 다그치는 식으로 우리에게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우리하고 똑같은 사고방식과 상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진리에 가깝고 소수는 진리에 멀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그 많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여기는 그 진리가 실은 멸망으로 이끄는 하나의 계기가 되지요. 지난 대구공부 때 제목을 “반대”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는 것, “축복 받을래, 저주 받을래?” 할 때 “축복받겠습니다.”하는 것은 주님의 반대원칙에 의해서 저주를 받고 주님이 “너, 축복받을래, 저주받을래?” 할 때 “저는 저주받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산다는 것 자체가 천벌 받아야 마땅하고 저주 받아야 마땅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반대지요. 우리가 이 반대라는 사실을 잊으면 우리는 너무나 세상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반대라는 것을 잊고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다 잊어버립니다. “예수님, 하나님, 날 도와주세요.” 이것만 남고 나머지는 다 잊어요. 그런데 ‘반대로’ 성령에 의해서 반대로 되어간다는 것을 알고 세상에 나서게 되면 신납니다. 유명한 시구처럼 “니들이 게 맛을 알아?” 하는 것처럼 “니가 복음 맛을 알아?” 반대로 살아가는 것을 아는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할 때 아무도 없다는 그것이 왠지 섭섭하기도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감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반대로 이야기를 하시는데 우리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생각과 반대다, 해서 제가 예수님 앞에 별명을 붙이겠습니다. ‘반대로 예수님, 뭐든지 반대로 하시는 예수님.’ 그 반대로 하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하시는 그 일이 곧 하나님 일이에요. 예수님, 내가 하는 것이 곧 아버지의 일이고 예수님이 하는 일 외에는 아버지의 일이 없거든요. 예수님이 하는 일이 아버지의 일이기에 그 아버지의 일이 우리에게 납득이 되어야 하는데 납득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되는 거예요.
그 반대로 하시는 예수님의 작업의 첫 작업이 뭐냐 하면, 마귀한테 시험받는 대목입니다. 사회를 나서서 첫 출근이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 일을 합니다. 왜 그런가, ‘반대로’를 굳히기 위함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반대로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를 첫걸음부터 그 이유에 대해서 아주 확실하게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여러분, 날 믿으세요. 구원받습니다.”라고 하기 이전에 먼저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사탄과 만나게 했다는 그것은 이미 세상은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예수님도 스스로 인식시키고 그 일을 하심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이 처음에 무슨 일을 했지?”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다.” “그래? 그러면 이 세상은 사탄의 세계지. 그러면 우리는 그 동안 속은 거지? 그러면 우리가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다 거짓이지. 우리가 거짓이라고 여긴 것은 진실 될 가능성이 있지.”
반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신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들은 상대할 수 없는 사탄을 상대하도록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탄과 만나게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고방식과 반대로 가도로. 왜? 세상은 이미 사탄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된다는 것은 사탄의 뜻이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받았던 시험, 사탄과 예수님 사이에서 주고받았던 내용은 이겁니다. 다른 인간에게 다 써먹었던 건데 “어쨌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유가 어떠하든, 종교가 어떠하든, 어느 신을 믿느냐 관계없이 신은 나중문제고, 우선은 살아 있으니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그것이 예수님이 당했던 첫 번째 시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내가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 사탄은 “당신이 살아야 되고, 당신이 메시아여야 되고, 당신은 성공해야 되고……”, 항상 사탄은 우리에게 “늘 자신이 잘 될 때 모든 것은 잘 되어 보인다. 당신이 잘 될 때 모든 것이 선한 것이고, 훌륭한 것이고, 진리고, 잘된 것이다.” 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 뜻, 말씀대로 행하러 왔다.” 설사 죽는다 할지라도 내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말씀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살아 있는 겁니다. 그 말씀이 약속이에요.
예수님이 받은 이 시험을 이미 받은 나라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절에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를 쓸 때에는 이스라엘 당사자들이 느끼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겨냥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님을 알고 새롭게 시작된 그 이스라엘이 지금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구약학자들이 백날 해도 이 뜻을 몰라요.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여기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이 구약말씀, 이 본문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항상 신약을 통해서 봐야 하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신약에 와야 비로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성령이 오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은 문자가 아니고 영으로 해석한다고 했지요. 고린도후서 3장에서 그렇게 했지요.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성령에 의해서 해석한다는 것은 내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위해서 쓰였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그 관점이 성령으로 해석하는 관점입니다. 이 성경 봐서 내가 얼마나 복 받고 이 성경 봐서 내가 얼마나 교회가 부흥되고 우리나라가 잘되는가, 그런 성경해석은 군목들이 어디서 하든, 교목들이 어디서 하든, 그리고 병원의 원목들이 환자들 모아놓고 어떤 기도를 하고 어떤 설교를 하든지 간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아니면 다 엉터리고 거짓말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자기가 놓인 그 자리가 자기를 살리는 자리가 된다면 이미 출발부터가 해석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로 부임되었다, 그 자리는 목사가 밥 먹고 사는 자리가 아니에요.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나야 할 자리지 자기가 살아서 자기 목회능력이 살아나고 자기를 과시하는 자리가 되고 그런 교회가 되면 안 되거든요. 내가 만일 중국에 갔다, 중국에서 그 말씀이 살아나야지 중국에 간 내가 살아나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선교사도 마찬가지죠. 모든 사람에게 다 마찬가지에요.
우리교회는 대 심방 하는 것이 겁이 나요.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대 심방 가서 하는 이야기나 여기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나 같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대 심방이 무슨 의미가 따로 없어요. ‘특별히 이 가정에’ 라는 것은 없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있기 때문에 3절에 있는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찌라.”라는 그 말씀, 그 당시 이스라엘에 의인도 있고 악인도 있는데 악인이든 의인이든 다 죽인다는 그 말씀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아, 좀 죽어 줘.” 그 말입니다.
우리네 상식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네 상식은 의인은 살아남고 악인은 저주받아 죽는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게 반대가 될 줄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의인이든 악인이든 다 죽이고 끊고 멸망시킨다.’ 하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이 마음에 두고 있는 그 이스라엘 하고 그 당시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과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 우리교회에 의인 몇 명이 있고 죄인 몇 명이 있는데 우리는 구원받지요?”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의인이고 죄인이고 다 지옥 보낸다.”라는 말씀을 하는 것과 똑같이 말씀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의인 악인을 차별하지 않고 다 죽여 버리는 것인가? 차별하지 않고 죽이는 것이 아니고 차별해요. 차별을 하는데, 의인도 악인도 분명히 따로 있고 의인은 구원받고 죄인은 지옥 가는데 그렇다 할지라도 그 나라가 망해야 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 말입니다. 어느 교회에 성도도 있고 성도 아닌 사람도 있는데 성도가 있든 없든 그 교회는 망해야 된다 그 말이에요. 교회가 망하는 것과 네가 구원받는 것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평소에 네가 알고 있어야 네가 진정한 의인이라는 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구약 신명기 29장을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상당히 난해한데요. 신명기 29장 21,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 책에 기록된 언약의 모든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 자손과 원방에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며.”라고 했는데 지금 이 대목을 제가 거론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이스라엘을 데려 오실 때 하나님이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저주를 기피하고 축복만 원하는지를 주께서 뻔히 아시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당부하는 것은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나는 이 이 말씀이 품고 있는 저주에 대해서 어떠한 부가점도 너희들에게 줄 의향이 없다.”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기 때문에 저주를 취소하거나 저주를 안준다는 그런 것은 일체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여호수아 8장에 보면 나와요. 하나님께서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서 거기서 두 패로 나눠놓고, 대체로 정실부인의 소생은 축복 산에 세우고 종의 자녀들은 저주 산에 세워놓고 선포한 그 말씀들을 보면 “……하면 반드시 저주한다.” 해서 열 가지 저주가 나와 버려요. 축복은 하나도 안 나옵니다. 언약궤는 어디에 있는가, 축복 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저주 산에 두고서 저주를 마음껏 퍼붓습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율법을 주시는 이유가 우리에게 저주의 저주를 더하기 위함입니다. 한국 사람이 아는 용어로 하면 천벌에 천벌을 더하기 위함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품고 있는 약속의 말씀이 뿜어내는 축복과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그 사실을 그들은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수긍하지 못했던 것을 탓하지 마세요. 우리라고 해서 수긍하겠습니까?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도 그것을 수긍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편이거든요. ‘그 말씀안의 내용에 축복도 있고 저주도 있는데 말씀이 그 두 가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사용하겠다. 네가 이 말씀을 지키면 복 받지만 못 지키면 내가 봐주지 않고 저주하겠다.’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저주하겠다는 것은 농담처럼 여기고 복주겠다는 것만 챙겨들으면서 희망을 갖는데 주님께서는 그 희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저주, 하나님의 천벌이 밑바닥에 꾸준히 깔려오면서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천벌 받는다고 하시는데 이것을 현대판으로 알기 쉽게 한다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의 다가 뭐냐, 교육입니다. 지금부터 상식적인 이야기,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데 하나님 저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국을 마련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 주신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백이면 백 다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육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시키기 전에는 몰랐던 것을 하나님이 교육시켜서 그 교육시킨 내용대로 하게 되면 우리는 가르침 받은 대로 천국에 갈 수 있다.’ 백이면 백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 안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19세나 20세쯤 되어야 다 자란다고 하지요. 물론 다 자라도 맨 마귀자식이지만. 어릴 때 애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부모가 늘 가르치는 애들은 그 가르치는 대로 행해서 착착 되는데 주위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없게 되면 자기가 행동을 해놓고 이것이 옳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분간 못해서 자기 맘대로 행동해요. 넓은 길로 가고 있는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그 애는 교육이 제대로 안 되어서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라고 했으면 가르치면 짐승이 아닌 이상 가르치는 대로 따라하게 되어 있고, 처음에는 안 되더라도 반복해서 하면 하게 되어 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때려가면서 하게 되면 알아듣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도 인간 교육할 때 말로 안 될 때는 회초리 들고 때리면 교육을 받아서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게 되어 있다.’라고 백이면 다 그렇게들 생각한다 그 말이지요.
‘평소에 자기 집에서 윤리 도덕을 가르쳐서 인간 만드는 것처럼 아마도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말씀으로 교육하게 되면 분명히 사람 만든다.’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모든 교회가 다 그러니까, 그것이 안 되면 목사가 설교하고 목회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여러분, 그 생각은 이미 이스라엘이 다 해 봤던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돼요. 교육에 교육을 더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면 할수록 사람에 대한 미련이 더욱 강해지고 집착이 더욱 강해지게 되어 있어요. 부모가 자식을 많이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그 집착이 점점 더 강렬해져요. 나중에 저 자식이 제대로 못되면 차라리 내가 죽고 싶은 심정이 돼요.
다시 성경으로 돌아와 봅시다. 본문 6절에 보면 “인자야 너는 탄식하되 허리가 끊어지는 듯이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제 오늘 본문의 핵심부분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은 교육하면 알아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 축복받고 저주받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경주해서 지면 지옥으로 떨어지고 이기면 승리해서 천국 가는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승부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일먼저 하는 작업이 뭐냐, 마귀한테 시험을 받지요. 이것은 마귀하고 해결할 문제지 하나님이 우리보고 닦달 낼 문제가 아닌 겁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마귀로부터 옴팍 세례를 받은 우리는 마귀는 염두에 두지 않고, 예수님이 첫 작업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 못하고 자기의 역량, 자기의 잘남, 자기의 깨끗함을 스스로 측정하고 뭔가 오기 부리듯이 자신이 말씀대로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승부, 게임에 나서요. 여러분, 구원받는 것은 승부의질이 다릅니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 도닦는 승부하고 차원이 다릅니다. 축복과 저주는 애초부터 우리가 결정할 문제도 아니고 우리가 목표로 삼을 문제도 아니에요. 그 증거가 어디 있는가? 그 증거가 6절에 나오잖아요. “인자야 너는 탄식하되 허리가 끊어지는 듯이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탄식은 곧 예수님 십자가의 아픔을 드러내는 겁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십자가의 아픔을 미리 맛본 사람이에요. 유대인,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교육을 안 받았겠습니까, 성경을 더듬더듬 읽었겠습니까?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도 이스라엘 자신은 에스겔 앞에서, 다른 말로 하면 주님 앞에서 탄식하고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통곡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인간의 실체요, 이것이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우리교회 청년이 저에게 질문했듯이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데 왜 성령께서는 탄식하십니까?”라는 질문,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데 십자가 피로 죄를 세척해 주는데 그 간단한 문제, 깨끗하고 말짱하게 끝나는 문제인데 탄식이라는 말을 왜 썼습니까?”
“이 탄식은 누구보고 탄식한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십자가 피로 구원받으면 깔끔하게 ‘너 구원 받았어.’라고 하면 끝날 문제를 가지고 왜 성령께서 탄식을 하는 겁니까? 혹시 우리 인간 행함에 미련을 가지고 ‘조금만 더 하면 잘 하면 할 수 있겠는데…….’ 하는 미련을 가지고 조금 더 노력하라는 뜻에서 탄식하는 것이 그 취지가 아니겠습니까?”라는 뜻으로 저에게 질문을 했어요. 제가 드린 해답은 그겁니다. “성도는 말짱하게 오는 것이 아니고 마귀에 속한 우리의 모든 육신이 너덜너덜 찢어져서 찢어질 때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아픔에 동참되는 식으로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질질 끌리듯이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라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아픔이며 그 아픔의 원인제공자가 바로 나이며 우리는 그것을 “우리는 예수 믿습니다, 피 믿습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이런 몇 마디로 때우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때우려고 하는 그 몇 마디는 듣지도 아니하시고 우리 인생 자체를 완전히 쥐포처럼 눌러서 조각조각 뜯어서 뜯길 때마다 나오는 우리의 악마적인 요소 사탄적인 요소를 우리가 보게 하는 겁니다. 그걸 우리도 보고 주님도 같이 보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탄식으로서 사탄에 속한 죄를 우리로 하여금 같이 볼 수 있도록 하는 장을 허락하는 겁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래야 우리는 주님의 공로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온 몸으로 발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식이 아니고 교육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괜찮게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상태라면 교육을 받게 되면 내 속에 있는 선한 것을 발동시켜서 그 말씀에 맞춰서 개선해 나갈 여지가 있는데 주님보시기에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통곡할 수밖에 없는 대상인 거예요. 우리는 그 현실도 모르고 “하나님, 말씀만 하시면 제가 잘 하겠습니다.”라고 철없이 나오니 그것자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통곡하며 눈물 흘릴 일이 되는 겁니다.
끝으로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 이스라엘의 의인이고 악인이고 간에 다 멸망시킨다는데 왜 오늘날 우리한테는 이런 멸망이 없는가? 지금 멸망중입니다. 지금 천벌 중이에요. 우리는 매일같이 천벌 받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이것은 좁은 길로 가는 사람한테만 해당되는 사항인데요,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몰라요.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죽을 때고 고난이 없고 웃음 지으며 죽습니다. 불교신자들은 죽을 때도 아무 탈 없이 죽어요. 그러나 좁은 길로 가는 사람들은 알아요. 이 세상사는 자체가 천벌인 것을.
태어나는 산부인과에서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취직, 나중에 늙어서 치매 걸리는 그 때까지 모든 것이 죄 값이고 이게 천벌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와 주님의 울음과 탄식소리가 귀에 들려올 때 우리는 이런 악마 속에 있는 인간을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했음을 감사하게 되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 천벌 받고 매일 되살아나고, 매일 천벌 받고 매일 은혜로 살고,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 나타나라고, 약속 드러나라고 사는 것을 비로소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