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불의 심판

아빠와 함께 2022. 12. 17. 08:53

서울의존강의20221215a 베드로후서 3장 10절(불의 심판)-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3장 10-13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게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극단적인 해체. 모든 것이 해체되는데 해체되는 방식은 불로써 모든 것이 해체된다는 거죠.【창조의 흔적이 사라진다=기쁜 소식】이에요. “모든 창조의 흔적이 다 사라진대. 아이고, 기뻐라. 아이고, 즐거워라. 우째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쁜 일을 마련해주셨지요?” 이런 거.

세상에 있는 존재의 모든 그림자는 다 불에 타 없어지고 결국 불도 없어지고. 여기 옛날에 뭐 있었어? 없었어. 아무 것도 남지 않도록 다 태워버리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에요. 두 자로 하면 이게 복음입니다. 극단적인 파탄의 소식. 모든 흔적이 다 사라지니까. 너도 없어지고 나도 없어지고 다 없어지고.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그동안 있음 때문에 얼마나 비교하고 경쟁했었습니까? 있음 때문에.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거든요. 이 모든 골칫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에 생긴 거예요. 살아있기를 소원하지 말고 나라는 흔적조차 없어지기를 소원한다면 얼마나 이게 기쁜 소식이 되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본인이 사라지게 되면 그건 기쁜 소식이 아니에요. 주께서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러면 ‘사라진다’니까【사라진다=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사라지는 것이 기쁜 소식이고 우리의 소원이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라지게 하지 못합니다. 내가 흔적 없이 없어지는 것이 우리 능력으로 안 된다는 것이 기쁜 소식의 반대말, 슬픈 소식이 되는 거예요.

엄마가 걱정이 돼서 우울해 있을 때 아들이 “엄마, 뭐 그리 걱정이 돼? 뭐가 근심돼?” “나를 없앨 능력이 나한테 없어서 그게 슬퍼.” 엄마 미쳤구나. 엄마 이제 아주 제대로 미쳤구나, 제대로. “엄마, 그러면 나를 대학까지는 보내주고 사라져야지.” “너도 없어져.”

모든 것을 없애버린다는 이러한 계시를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게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할 거냐 슬프게 하냐, 그런 것은 안중에 없고요. 일관된 주의 프로그램이니까 진행이 되어야 될 계획이니까 주저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모든 걸 사라지게 하신다 할 때 이것을 은근히 고대하고 기대했던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도적같이 온다’고 해요, 도적같이. 도적같이 들이닥치는 날에 세상 창조의 모든 흔적이 사라진다. 있음이 없음이 되는 그날이 도적같이 오는 거예요.

도적이 “내일 새벽 2시 40분에 갈게요.” 뭐 이렇게 예고하고 옵니까? 도적이 “내가 도적인데 물건 훔치러 가겠습니다. 경찰 병력 한 20명쯤 집에서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뭐 이런 연락을 안 하죠. “뭐라고요? 내가 가는 걸 미리 안다고요? 나 안 가.” 이렇게 되죠. 도적답다는 것은 몰래 오는 거예요.

이미 주님께서 일을 하실 때 도적같이 일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게 유월절이에요. 유월절 날 그때 히브리인들은 밤이죠, 한밤중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발라서 준비하고 있었지요. 누구한테 도적같이냐 하면 애굽 사람들한테는 도적같이 온 게 돼요, 애굽 사람들한테는.

그러면 ‘도적같이’라는 이 하나님의 계획이 정말 도적처럼 적절하려면 어떤 인간도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자질이나 대비할 수 있는 여지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죠. 주님은 도적같이 오고 그날은 도적같이 오고 모든 인간은 언제 올 줄도 몰라야 되고 그래야 이 ‘도적같이’라는 계획이 제대로 정확하게 성립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무슨 말이냐 하면 죽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한 말, ‘그래서 이거 막가자는 이야기죠.’ 이런 거 있잖아요. 막가자는 이야기죠. 그렇습니다. 막가자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여기 12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그렇게 되어있죠.

불로써 모든 것을 태운다. 자, 여기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어느 누가 불을 감당할 수 있겠나?】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인간으로 아담으로 태어나서 맨날 불 속에 기어들어가는 그런 사람 봤어요?

인간은 단백질로 되어 있어요. 불이 한 300도 내지 500도만 돼도 다 타버립니다. 특히 머리카락 타는 냄새, 아주 지독하게 싫죠. 머리카락은 단백질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막 꼬불꼬불 타 들어가면 인간의 세포, 모든 것도 불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야기합니다. “이 아담의 자손들아, 너희들이 불을 감당할 수 있겠어?”

그렇다면 구원받는 자는 이 내용을 그대로 집어넣으면 돼요. 구원받는 자는 ( )다. 불을 감당하는 자, 이 자가 구원받은 자에요. 왜냐하면 마지막에 불로써 심판하기 때문에 불을 이긴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고 불을 못 이기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들의 과학적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불을 이겨낼 수가 없어요. 잠시 소방수들이 화염복 입고 설칠 수는 있지만 온도를 높여버리면 아무도 불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려고 생각했더니만 갑자기 오늘 본문에 있어서 ‘불을 감당할 수 있느냐?’ 이렇게 물을 때, ‘그 조건은 사전에 없는 조건이잖아요. 조건을 왜 첨부합니까? 더 추가시킵니까?’ 이렇게 불만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 할 때 그 사람에게서 누락된 게 있어요.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이 불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처음 구원받은 사람이 예수님이에요.

다니엘 세 친구가 불에서 나온 것은 장차 올 예수님과 더불어 있기 때문에 불을 감당한 거예요. 그들이 불 속에 들어갈 때 막 물 처바르고 아이스팩으로 비닐 대서 몸 둘둘 감고 얼음가게에서 얼음 사서 두께 한 1m해서 자기 몸 스카치테이프 붙여서 하면 용광로 일곱 배나 뜨거운 불 앞에 그 얼음조각이 몇 초나 견디겠어요? 물 돼서 슬슬 내려가면 아이고, 뜨거워라 하고 튀어나올 거란 말이죠. 튀어나오지도 못하죠.

그 다니엘 세 친구+1이잖아요. 세 명 들어갔는데 거기에 한 명 더 계셨죠. (단 3:24-25) 그 분이 유일하게 불을 감당할 수 있는 분입니다. 자, 더 쉽게 가면 이렇습니다. 여기 베드로후서 3장 6절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렇게 되어 있죠.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다.

자, 한번 물어봅시다. 홍수 때 홍수를 감당했던 사람은 누구였죠? 홍수를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 힌트 줄까요? 여덟 명. 누구네 식구? 노아 식구. 노아 식구는 대규모 홍수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방주를 잠시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노아야, 홍수를 내리되 모든 사람 사는 지면이 다 덮일 정도로 홍수를 내리겠다. 네가 감당해봐라.” 라고 하나님께서 제시를 했을 때 노아가 준비할 수 있었던 건 뭐였습니까?

방주라는 아이디어는 생각 안하고 방주 외에 노아가 홍수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뭐 재해보험을 들어놓는다든지 안 그러면 배를 만든다든지 그렇게 하겠죠. 그 배 만들면 감당할 수 있겠어요? 아래에서 위로 샘이 터지고 위에서는 또 위에서 내리붓는데 배 만들어봐야 후딱 넘어가는 거죠. 따라서 방주라는 아이디어는 노아에게는 전에 전혀 없던 요소입니다, 방주가.

한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할 때 노아를 비롯해서 어떤 인간들도 심판을 면제할 수 있는 그러한 지혜는 인간 쪽에서는 나올 수가 없다.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따라서 노아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이미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자기 쪽에서 어떤 아이디어가 안 나오니까. 내 아이디어나 내 생각이 거부당하고 있다는 것은 그건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죽은 자로 간주했을 때나 가능한 거예요. 죽은 자가 무슨 입을 뻥끗합니까.

학교 아이들을 선생님이 가르치고 있는데 “자, 삼각함수 이 문제 나와서 풀 사람?” 애들이 “아이고, 그거 못 풀겠어요. 어려워요.” 그런데 저 뒤에 25년 전 그 교실에서 죽었던 유령이 “저요!” 하고 손들고 나와서 문제를 푼다면 “그래, 네가 나와서 풀어봐라.” 하잖아요. 그러면 그 학급은 무슨 세계입니까? 유령이 주도하는 세계죠.

어떤 집의 아이가 서울법대 시험을 쳤는데 수석 합격했어요. 공부도 별로 안했는데. 그래서 그 아이 할아버지가 “너 이번에 큰일을 했으니까 보상으로 뭐할래? 돈 얼마 줄까?” “저 돈 필요 없습니다.” “그럼 뭐?” “저 강남에 땅이 필요합니다.” “그래, 그럼 땅 해라.” 땅 사니까 그 땅값이 막 뛰어가지고 수조 원 됐거든요. 어떤 조건에서 그렇게 됐습니까?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송중기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재벌집 막내 아들의 경우에는 그게 가능한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이 뭐냐? 다시 처음부터 하겠습니다. 복음은 뭡니까? 한번 죽었던 자의 신분, 이게 복음이에요. 우리를 먼저 죽게 만들어서 그다음에 물이 오든 불이 오든 상관없게 만드는 그러한 신분. 신분자의 탄생, 등장. 이게 바로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 이것을 베드로후서 3장에서는 7절에 경건이라 했어요.

베드로후서 3장 7절에서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여기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은 물 심판, 불 심판 다 받죠.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은 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경건하고, 노아 때 경건한 사람은 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죠. 그럼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노아 당시에 노아가 살아남게 된 것은 하나님이 노아의 아이디어나 노아의 행실 같은 그것 때문이 아니죠.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았죠. 노아가 전혀 생각을 못한 것을 제공한 거예요. 그게 방주입니다.

그걸 창세기에 보면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운다 했어요. (창 6:18) 그럼 물이고 불이고 간에 물 심판, 불 심판 그게 신나서 하는 게 아니고 언약을 언약답게 부각하기 위한 보조적인 자연의 장치가 물 심판이고 불 심판이에요.

기쁜 소식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죠. 이 복음을 위해서 불이 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그들에게 십일조를 내라 했다면 복음을 아는 사람은 뭐만 감당하면 돼요? 수입의 십분의 일만 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새 언약 앞에서 경건이라 하는 것은 이 십일조를 받는 게 아니에요. 선교헌금을 받는 게 아니고 선교나 전도를 받는 게 아니고 “네가 불을 감당할 수 있겠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아이고, 뭐 불 좀 감당하고 예수 믿지.’ 이게 지금 인간으로서는 될 일이 아니다 이 말이죠. 썬텐 좀 하고...... 썬텐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 심판에 대해서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우리는 불 심판 앞에 마땅히 죽은 자로 드러난다는 그 요건을 근거로 예수 믿는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노아 홍수 당시에 일반인들, 홍수 직전까지 사람들은 뭘 했는지 그것은 마태복음 24장에 나와 있습니다. 24장 38절에 보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뭐 뭐 뭐 했다 이렇게 나와 있어요. 사람들이 먹었으며 마셨으며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다. 또 어떤 대목에는 사고팔고 했다.

39절에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기의 본업이 있었잖아요.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사람 사는 게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이게 전부 아닙니까. 이게 전부잖아요. 먹고 마시고 장가, 시집가서 애 낳고 애 키우고 뭐, 그거잖아요. 그 외에 뭐 필요한 게 있어요?

지금 여기 마태복음 24장 37절에서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임자의 임함의 형편을 ‘주께서 어떤 때 오십니까?’ 나한테 묻지 말고 노아의 때로 되돌아가서 그때는 어떠했는가, 그때 어떠했던가를 네가 한번 보라는 거예요. 그때 사람이나 지금 인간이나 달라질 거 없어요. 관심사가 동일해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똑같단 말이죠.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때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계획 잡은 거예요. 일단 하나님께서 물 심판을 했잖아요. 그럼 살아남은 것은 노아죠. 노아의 후손들이죠. 노아의 후손들이 할 역할이 있어요. 뭐냐 하면 노아의 홍수 이전에 했던 그 일을 노아의 후손들이 그걸 가지고 도배를 다시 새로 하는 거예요. 도배를.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그 행위는 어떤 행위냐 하면 물로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함을, 위에서 장판 깔듯이 그걸 깔아버리는 역할을 한 거예요. 누가? 인간들이요.

심판 없다. 영구 없다, 가 아니고 심판 없다. 뭐? 세상 뭐? 잘 돌아가는데 뭐가 문제야? 아무 일 없어. 괜찮아, 괜찮아. 노래 있잖아요. 잘 될 거야~ 응, 잘 될 거야. 잘 된다고 생각해. 그럼 일이 잘 돼.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고 잘 될 거야. 평소에 하던 대로 살아.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럼 기쁜 소식은요?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한다, 그게 기쁜 소식이 아니에요. 기쁜 소식은 뭐냐? 우리의 하는 모든 행세가 우리가 마땅히 처음부터 애초부터 멸망당해야 되는 것을 그걸 가리고 있다가 된통으로 불로써 이제는 아예 흔적조차 없애는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죠.

그날이 인간의 날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날이 아니에요. 인간들의 축제의 날이 아니고 파티의 날이 아닙니다. 그날은 인자의 날. 오직 예수님이 예수님답게 되는 유일한 날이에요. 예수님은 홀로 언약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지금 말 안하고 있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노아 때는 구원할 때 방주 만들었잖아요. 방주 만들었기 때문에 노아가 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홍수 시기의 조절은 노아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방주가 다치지 않기 위해서 방주로 하여금 무사히 드러난 새 땅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홍수 조절을 한 거예요. 심판 조절을 한 거예요.

왜냐하면 방주가 언약이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 심판이 조정되는 거예요. 창세기 6장에 노아보고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리라 했기 때문에. 창세기 6장 18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언약을 세우는 거예요, 언약을.

언약을 언약답게 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뭐냐 하면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을 죽은 자의 행세로 완전하게 규정하는 것, 그게 언약 조건이 되는 겁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어떤 아이디어가 언약에 끼어들 수 없다는 말은 언약 입장에서는 인간은 이미 먹고 마시든 즐기든 뭐하든 간에 이미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럼 기쁜 소식을 다섯 자로 적어보세요, 주관식. ‘내가 죽었다.’ 이게 기쁜 소식이죠. 그리고 “이 삼각함수 문제 풀 사람?”하면 산 사람들은 가만 앉아있으면서 “어려워요.”하는데 뒤에서 25년 전 그 교실에서 목매어 죽었던 그 귀신이 손들고 “제가 할게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거 제가 할게요. 제가 풀께요.” 왜? 느낌 아니까. 그 문제 아니까.

한번 죽었다 살아나니까 아는 거예요. 서울 법대 문제 뭐 나올지 다 알거든요. 그래서 서울 법대 수석 합격한 거죠. 비행기 KAL기 안 타고 할아버지가 미리 빠진 것도 마유미가 폭파한 거 미리 아니까 미얀마에서 추락하는 거 아니까 미리 뺀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노아가 똑똑하다는 게 아니라 노아를 태웠던 방주가 똑똑한 거죠. 미리 아니까. 미리 알고 대처한 거예요.

언약은 뭐를 끌고 오느냐? 심판을 끌고 와요. 심판을 끌고 오면서 심판되기 직전에 언약을 제공하고 그 언약 안에는 곧 들이닥칠 심판과 하나의 조를 이루는 겁니다. 하나의 조를 이루는 거예요. 조를 이룬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조를 이루는 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명절날 하는 거 있잖아요. 삼땡, 이땡, 장땡 그거 말하는 거예요. 난초 2장 오땡, 광 2장 광땡.

심판이 언약과 땡을 이루는 거예요, 땡. 오늘 강의 제목을 ‘땡’으로 할까. 심판 땡, 땡을 이루는 거예요, 땡을. 똑같은 거예요. 장땡, 또 화투에 12월 되면 노인네가 일본식 우산 쓰고 비 오는 거. 화투 내에 4장이 한 조를 이루잖아요. 1월 공산, 2월 홍단? 조를 이루죠.

4장이 아니고 2장이에요, 2장. 심판과 언약. 언약과 심판. 이게 기쁜 소식. 인간은 언약 앞에서 벌써 죽은 자들이에요. 벌써 죽은 자들입니다. 벌써 죽은 자들이라고 하고 벌써 죽은 자들이라고 미리 알려준 자가 언약에 참여할 수 있는 행운을 얻습니다, 노아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거 노아도 했어요. 장가갔으니까 애 낳았을 거 아닙니까. 아들 낳았잖아요. 이미 한 거예요. 그런데 노아에게 언약이 주어지니까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것이 나를 살릴 수 없다는 것, 이미 죽은 나를 내 행함이 먹고 마시는 것이 나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이 언약 앞에서 명쾌하게 드러나니까 이게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 나로 인하여 내 모든 운명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게 기쁜 소식이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노아 홍수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극단화를 내세웠습니다. 인간이 지상에서 무슨 업적을 이루고 어떤 큰 문명과 고상한 문화, 종교 이런 걸 했던 간에 물 앞에서는 무의미해져버린 거예요. 물 앞에서는. 다 덮어버리니까요, 다. 찰랑찰랑~ 전부다 완전히 다 덮어버리니까. 키다리 아저씨도 물 안에 잠겨버리고 서장훈도 다 들어가죠.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건은 인간에게 나온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에게 언약이 나와야 그게 하나님이 인정하는 경건이지, 하나님이 주신 게 나와야 되죠. 자기가 만든 것, 주시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열심히 노력한 것, 선악적 사고방식으로 노력한 것은 경건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건 언약에 대해 도발하는 거고 대드는 일이죠. 언약을 모른다는 것은 그 인생 종쳤다는 뜻이에요. 끝난 거예요.

에스겔 15장 6절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내가 수풀 가운데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화목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거민도 그같이 할찌라” 불에 던질 화목, 땔감. 또 다른 말로 하면 부지깽이. 구원을 받았는데 시커멓게 탔어. 너 어디서 기어나왔는데 이렇게 탔냐? 불에서 기어나온 거예요. 많이 그슬렸어. 불에 탔어요.

자, 그럼 물의 심판의 흔적을 가진 자가 노아가 되겠죠. 그렇다면 왜 물 심판으로 노아의 물 심판에서 노아 식구만 딱 건져서 왜 구원하지 않습니까? 또 다른 불 심판이 왜 있어야 되냐 이 말입니다. 또 다른 불 심판이 있어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이 원하는 그러한 거룩이 되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이 원할 만큼의 거룩.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이 어떤 것인가? 제가 여기에 쓰겠습니다.【심판의 불에도 견딜만한 거룩】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입니다. 심판의 불에도 견딜만한 거룩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24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면서 다시는 생명나무에 오지 말라고 무엇으로 차단시켜놨습니까? 두루 도는 화염검이죠. 불이죠. 불로 차단시켜놨어요. 그 불을 통과할 수 있어줘야 거룩이 돼요. 그래야 하나님이 하신 일에 일관성이 있으니까.

“오지 마. 생명나무 따먹지 마.” “따먹을래요.” “불이 너를 막을 거야. 불이 가서 너를 막을 거야. 네가 불을 통과할 수 있거든 따먹어라. 심판의 불을.” 인간이 통과할 수 없죠. 불이 홱홱 돌면 거기서 뭐 갈릴레오 갈릴레이나 뉴턴같이 똑똑한 과학자가 시간을 계산하는 거예요. 불이 한 번 돌 때마다 그 빈 틈, 보초가 잠시 조는 틈을 타서 쏙 들어갈 수 있다, 뭐 그런 과학적인 인식을 할만도 한데 불이 항상 두루 돌잖아요. 두루 돌기 때문에 빈 틈이 없어요.

그러니까 불로써 막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할 때 네가 무슨 수를 써도 불만큼은 통과 못한다는 그러한 요소를 지니고 아담과 하와를 만든 거예요. 그러니 어느 누구도 인간은 두 번 다시 생명나무는 이미 끝났어요. 먹지를 못해요. 먹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계속해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에요. 불을 감당할 수 있는 자만이 성도이고 구원받을 수 있고 경건한 사람이다, 그걸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노아는 물을 감당했지만 하나님이 원한 최종적인 거룩은 불을 감당할 수 있어야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올 때 물로 막은 것이 아니고 물 호스로 막은 게 아니고 불로 막았거든요. 물 호스로 막으면 우산 써서 가리고 들이밀죠. 몸이 좀 젖더라도. 불로써 막았다니까요, 불로써. 그건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불을 이길 수 없는 요소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만드신 분이 알기 때문에 불로써만 충분한 거예요. 막는 데 충분하다 이 말이죠.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3장 12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5절에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거룩한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고 에덴동산은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죠. 그래서 범죄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마실 나서듯이 생명나무 있는 에덴동산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가본 적이 없죠. 에덴동산에서 살았어요. 잠시 마실 나갔다 오겠습니다, 하고 잠깐 바깥 구경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이런 거 없어요.

그럼 에덴동산이라는, 하나님의 생명나무가 유효한 동산 주변에 두루 도는 불이 있었다. 불 천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쫓겨나기 전에는 몰랐어요. 쫓겨나니까 아, 생명나무는 불이 방어하는구나.

천국에 생명나무 보호하기 위해서 불로 만든 불 사단(team)이 있어요. 불 사단, 연대 규모, 사단 규모. 불로써 하는 방위부대,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생명 되시는 예수님이 활동할 때 예수님 주변에 여러 가지 천사들이 있지만 그중에 어떤 천사도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사역할 때 어떤 천사도 함께하겠어요? 방금 제가 힌트 팍팍 다 드렸는데, 어떤 천사도 함께 있겠습니까? 뭐를 다루는 천사와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 한번 뜨면 여기 뭐 통역하는 사람도 따라오고 보디가드도 있고 여러 가지 있잖아요.

예수님이 한번 떴다 했을 때 누구도 같이 동행하겠어요? 불을 맡고 있는 사역자도 함께 있겠죠. 그게 히브리서 1장 7절에 나옵니다. “또 천사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주님 주변에 불꽃으로 심판할 천사들이 주변에 배정되어있고 배치되어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그 천사들이 주님이 지상으로 이동하면서 같이 동행하게 되는 거예요. 생명나무가 움직이니까 거기에 생명나무 가는 길을 지키는 천사들도 불을 다루는 화염검 천사들도 같이 동행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불을 통과하고 감당하지 못하면 예수 믿는 것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역자들이 있기 때문에. “잠시 예수 믿기 위해서 찾아가겠습니다.” “오지 마.” 천사들이 보디가드가 딱 입구에 막고 있어요. “불을 이길 수 있겠어?” “제가 이런 것, 저런 것 이렇게 해서 주를 위해 열심히 어느 길에서 주를 가르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래, 네 공력 불을 감당할 수 있나 해보자.”

터 위에 공력을 밑에서 불로 확 지르니까 자기가 했다는 공력은 불에 다 타고 없어요. 네가 한 것이 봐라. 불을 통과 못했잖아. 불을 통과 못했다는 뜻은 불 심판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불 심판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냥 불로써 흔적이 사라지고 영원한 불, 지옥 불에 들어가야죠.

하나님의 은혜로 불을 감당했던 사람이 구약에 나옵니다. 여러 명 나오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가정. 소돔과 고모라에 하늘에서 엄청난 양의 불과 유황이 쏟아졌어요. 유황불이 쏟아진 겁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조카를 끄집어냈거든요.

아브라함이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하고 생명인가를, 불을 감당하고 불을 통과한 자만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이 됐고 그 패밀리, 가족이 됐고 천국 언약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조카를 소돔과 고모라에 살게 만들었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천사를 조카가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에 파견한 것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목격하게 만들었어요. 미리 알게 만들었어요.

아브라함은 다급하죠. 기도하죠. 아브라함의 기도는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선지자의 기도에요. 선지자의 기도란 그 뜻이 뭐냐 하면 언약의 효력에 대해서 언약의 효력을 실제적으로 역사화시키고 실제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중심에 아브라함이 있어요.

자, 여러분들 아브라함을 아시겠지만 이참에 한번 정리해봅시다. 아브라함에게서 두 가지가 나와요. 하나는 복이 나오고 하나는 저주가 나와요.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 너와 언약을 세운다. 아브라함이 꽂혀있다=언약이 꽂혀있다, 같은 뜻이잖아요.

언약이 꽂혀있어서 아브라함의 언약적 위상에 대해서 뭣도 모르고 달려든 사람들, 아비멜렉 같은 이런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자기 아내 삼으려 하다가 혼쭐났죠. 돈쭐난 게 아니고 혼쭐났어요. 혼쭐났다니까요. 갑자기 그 집안의 여자들이 전부다 태가 닫혀버리고 이건 대가 다 끊길 판이죠.

그럴 때 아비멜렉이 누구한테 부탁했습니까? 아브라함이여, 제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달라 하죠. 기도해주니까 태가 열렸어요. 열려라 참깨인가. 태가 열렸어요. 이건 아브라함의 재주가 아니죠. 아브라함한테 누가 함께 있습니까? 언약이 함께 있기 때문에.

자, 정리합시다. 언약이라는 것은 바로 상반되는 두 가지 결과를 낳는 효과를 보이게 된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조카가 소돔과 고모라에 있단 말이죠. 아브라함 언약이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가? 아브라함 언약 속에는 불도 감당할 수 있는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을 조카가 있던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을 내림으로써 아브라함 언약의 위상을 취지를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여러분한테 말씀드렸죠. 언약은 뭐라고요? 땡이다. 구땡, 장땡 땡이죠. 뭐와 뭐가 조를 이룬다. 심판과 구원이 조를 이뤘어요. 심판과 구원이 한 식구에요. 물론 하나님의 동일한 속성이기도 하고요. 한 식구죠.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번갯불이 어디서 나오는가? 언약궤에서 나와요. 하늘에 있는 언약궤에서 심판하는 게 나와요, 심판. (계 11:19) 요한계시록 8장에 보면 일곱 천사가 있는데 일곱 천사가 심판하는 천사들이에요. 요한계시록 14장에도 물론 심판이야기가 나오고 8장에도 일곱 천사가 나오는데 그 일곱 천사가 심판하는 기능자로서 활동합니다. 번개도 나오고 불도 나오고 하죠. 그것은 바로 언약에서 나온 겁니다.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언약은 불을 동반해서 불로써 하나님의 불을 통과할만한 거룩이냐, 아니면 불을 통과 못하는 것이냐를 구분하는 기능이 언약 안에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진짜 궁금한 것은 그러면 노아 때는 방주를 만들어서 노아를 살렸다면 불 심판, 불을 통과하는 거룩만 인정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럼 뭘 만들었습니까? 불에 견딜만한 두꺼운 철판으로 불을 견디는 방주 만들었어요? 그런 거 없죠. 그런 거 없어요.

자, 그러면 우리가 아이디어, 힌트를 어디서 얻느냐. 노아가 만든 게 뭐죠? 방주죠. 방주 설계도는 노아가 만든 게 아니죠.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지시대로 움직였죠. 지시대로 움직이고 노아는 지시에 따라서 뚝딱뚝딱 목수 일해서 방주 만들어냈을 뿐입니다.

뜸들이지 않고 미리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이 불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든 게 아니고 아기 예수를 만들었어요, 아기 예수. 노아는 시키는 대로 뭘 했는가? 설계도가 시키는 대로 방주를 만들었죠. 이 아기 예수 설계도에 시키는 대로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마리아. 마리에요, 마리아.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한 게 아니고 마리아로 하여금 예수님이 자기를 임신하도록 만들었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게 아니고 스스로 나시게 만들었어요. 그걸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아들을 품은 여인이라 해요. 아들을 품은 여자.

노아 홍수에 있어서의 언약은 방주입니다. 오늘날의 언약은 뭐냐? 예수님을 임신한 모든 자. 예수님의 성령을 받은 모든 자, 이들이 바로 오늘날 악마와 싸우는 교회입니다. 성령 받은 자들의 집합,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다 한결같이 예수님을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임신에 대해서 잘 나와 있는 것은 누가복음 1장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에 대해서 정말 잘 나온 데가 내가 아주 좋아하는 구절, 누가복음 2장입니다. 누가복음 2장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보기 전에 5분 쉽시다.

 

 

서울의존강의20221215b 베드로후서 3장 10절(불의 심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등장하죠. 2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자, 아기 예수가 방주입니다. 아기 예수가 방주라는 말은 예수님이 언약이라는 말이고, 그렇게 되어버리면 노아가 방주 만들 때는 방주가 노아를 대신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방주는 사물체이기 때문에. 물체거든요. 노아는 그 물체를 만들었어요. 잣나무로 만든 물체입니다. 사물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사물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말은 기존의 모든 사람을 대체하는 사람이 돼요. 이 말은 기존의 모든 인간은 불을 통과할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노아는 방주 안에 살아서 물 심판을 버텨내고 그걸 지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방주라면 모든 인간은 예수 안에 들어와야 되거든요.

사람이 새 집안에 들어간다, 그건 가능하죠. 집이니까. 딴 따다 단~ 새 집이면 보통 음악 나오잖아요. 딴 따단 딴~ 새 집에는 들어갈 수 있는데 내가 타인한테 들어갈 수 있습니까? 방주 만들면 들어가죠. 그것도 줄 서가지고 티켓 끊어가지고.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도 들어가는데 그걸 못 들어가겠어요? 그러나 아기 예수 속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못 들어가죠.

그러면 방법은 뭐냐 하면 아기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되는 겁니다. 그게 임신이에요. 그걸 마리아가 처음 한 거예요. 요한계시록 아까 언급했는데 그 대목을 한번 보면 12장 1-2절,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자가 아들을 임신했는데 여기에 누가 도와줬느냐 하면 하늘의 해와 달, 열두 별 면류관들이 거기에 포진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대자연이 스스로의 자체적인 그들의 운명의 끝, 그들의 최후를 몽땅 어디에다 거는가? 여자가 임신한 아기 예수한테 모든 걸 다 걸었다 이 말입니다. 도 아니면 모다 이 말이죠.

마귀도 마찬가지에요. 자신의 모든 힘과 능력을 어떻게 하면 아기 예수를 제거할까에 모든 능력을 다 쏟은 거예요. 인간만 바보같이 그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인간만 과외 받고 수능보고 서울대학에 올인하려고 이렇게 하지......

진짜 올인할 것은 어떻게 하면 아기 예수 안에 내가 들어설 수 있느냐, 같은 말, 어떻게 하면 내 안에 아기 예수가 들어서느냐. 똑같은 말이에요.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가야 되듯이 우리는 아기 예수 속에 들어가든지 아기 예수가 우리 속에 들어오든지 해야 돼요.

이걸 안양강의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거 알려면 나중에 안양강의 올려놓을 테니까 그거보시면 돼요. A(Ap) 공식. 외부성이 내 안에 외부성으로 place, 자리잡는다. 바깥에 있는 외부성이 내 안에서 외부성으로 자리 잡는 거예요. 괄호()가 내부이고, 내 안에 외부성(Ap)이 턱하니 place, 자리 잡는 것, 이게 성도입니다.

방주 안에는 노아가 들어갔잖아요.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는 들어오는데 어느 지점에, 심장에? 가슴에? 콩팥에? 어디에 들어오느냐? 우리 안에 우리의 영원한 타자, 타인의 힘, 악마죠, 악마가 있는 곳에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말은 우리 안에 이미 우리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의식해서 들어오는 겁니다. 자,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요한일서에 보면 아주 분명하게 명쾌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뭐하러 이 땅에 오셨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악마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고 되어 있어요.

요한일서 3장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그러니까 죄를 짓는 클래스, 계단에서 인간을 제키고 인간 위에 다른, 위상이 더 높은 계급으로 옮겨갑니다. 그게 뭐냐? 악마에요. 인간을 문제 삼는 게 아니고 인간을 죄짓게 만드는 악마를 문제 삼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인간을 닦달내야 돼요, 악마를 멸해야 됩니까? 악마를 멸해야죠. 악마가 있던 자리에 주님이 들어오시는 거예요, 악마가 있던 자리에. 그 악마가 우리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으라 하면서 선악체계를 줬잖아요. 선악체계 안에서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시도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선과 악을 아니까 인간들은 악을 원하겠어요, 선을 원하겠어요? 선을 원하죠. 그게 바로 자기 의잖아요. 악마는 인간에게 자기 의를 긍정하고 인정하게 했고 주님은 바로 그 자기 의를 공격하러 오시는 거예요.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은 “내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간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그거는 땡 탈락이고 옆에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리죠. 주여, 저는 고개를 못 들겠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눅 18:11-13) 다시 말해서 자기 의가 없는 거예요, 자기 의가.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뭐라고 합니까? 주님은 뭐를 보면서 옵니까? 네가 인물이 예쁘구나, 뭐 그런 거 봐요? 키가 크구나, 그거 안 보죠. 나는 너의 죄를 사하노라. 죄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을 정도의 요소가 없다는 뜻이거든요. 불을 통과해야 된다고요, 불을.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기 예수로 왔다는 것은 아기 예수가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그럼 아기 예수님이 뭐를 통과하겠어요? 불을 통과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이 이야기했듯이 저 분은 장차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 하잖아요. (마 3:11)

그 불세례주실 분이 본인이 그 불 속에, 불세례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누가복음 12장 49-50절에 나와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받을 세례가 있는데 이 세례가 바로 내가 불을 던지는, 그 불 속에 들어오는 세례. 십자가 세례거든요. 십자가입니다. 심판이에요, 심판. 최후의 심판에 스스로 주께서 들어가시는 거예요.

주님 내부에서 주님이 통과했던 그 심판의 불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부에서 분출되는 거예요.【불을 뿜는 우리 주님】. 그냥 주님 말고 우리 주님. 심형래 감독이 만든 영화, 꼬마들 보는 영화, 조잡하게 만든 공룡 속에서 뭐가 나옵니까? 적과 싸울 때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뭐가 나옵니까? 불이 막 나오죠. 용가리 같은 거요.

불을 뿜는 우리 주님, 이게 주님 보시기에 사랑의 극치, 최고의 사랑이에요. 최고의 사랑은 불을 뿜어서 심판의 불을 뿜어서 상대를 죽이게 만드는 거고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느니라. 우리를 심판으로 불에 태워 죽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뿜어내는 불은 이미 주의 심판을 통과하신 분이 내뿜는 불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이미 불의 공력을 감당하게 된 그 효과, 그 힘이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지키거나 실천하는 게 아니고 그냥 주의 말씀이 불덩이가 돼서 우리를 완전히 삼켜가지고 우리 속에 있는 자아 요소, 또는 우리 속에 있는 자기 의 요소, 또 우리 속에 자리 잡은 악마가 우리를 부추겨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긍정하고 너 잘한다, 훌륭하다, 더 완벽하고 철저하고 네 가치를 더 키워라. 넌 의미 있는 존재야, 이걸 주님의 십자가 불로써, 십자가 자체가 불세례니까, 심판의 세례니까 십자가 와서 우리를 홀라당 태울 때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부부 사랑? 부부 사랑 같은 소리하고 있네. 자기 나 사랑해? 하여튼 되지도 않는 그 사랑. 그런 건 개보고 사랑하라 하세요. 십자가에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그리스도만 살리는 이 사랑만을 사도 바울은 사랑이라 규정하고 전한 거예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주님이 불까지 감당할 수 있는 이 사랑을 줬기 때문에...... 불이 마지막 심판이거든요. 왜? 두루 도는 화염검이니까. 생명나무 못 따먹으면 무조건 심판이에요. 생명나무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도 그건 행복이 아니죠. 생명나무가 없는데... 그건 저주죠.

불보다 더 센 게 없잖아요. 그럼 불보다 더 센 게 성경에 없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서 이르기를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롬 8:35) 불을 이긴 그 사랑보다 더 세고 큰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이 땅에서 환난을 당하나 걱정하지 마라. 장차 올 영광과는 족히 비교되지 않기 때문에. (롬 8:18)

적당하게 교회 다녀가지고 ‘하나님 약속 믿습니다.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 가겠습니까?’ 안 돼! 그건 있을 수 없어요. 중간에 불이 개재되어야 돼요. 불이 개입돼야 돼요. 불은 우리 죄를 태운다.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태우죠. 그걸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불로 연단된 신앙이라 했어요.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오죠.

그러면 이 말은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불로 연단된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거예요. 불로 연단된 믿음이 되어 버리면 우리가 어떤 것을 알 수 있는가?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다음 나오는 말, “그리스도의 피 뿌림”입니다.

내가 극렬하다, 를 내세우는 게 아니고 뭐를 내세웁니까? 예수님의 피 뿌림을 내세우는 거예요. 피 뿌림. 우리가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임신하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셨다, 그런 뜻입니다. 들어오셨고 그럼으로써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올 때에 하나님의 언약을 앞장세워 들어오시거든요.

마태복음 26장에서 제자들에게 주께서 최후의 결정적 선물을 줍니다.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마시라. (마 26:26-28) 이걸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피 뿌림이라 했다 이 말이죠. 피를 그 사람한테 뿌린다는 말은 예수님의 거룩한 죽음에 같이 동참하는 거예요. 불 심판에 같이 동참시키는 겁니다.

임신이라는 걸 한번 생각해봅시다. 누가복음 1장에서 마리아에게 천사가 오죠. 그러면 오늘 낮에 했던 안양강의의 제목이 <초과>입니다. 마리아는 초과적인 현상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에요. 초과적 현상.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 인간을 넘어서는 초과적인 현상. 천사가 관여하는 거예요.

31절에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름까지 다 지어줍니다. 보통 이름은 부모가 짓게 되어있거든요. 초과적인 임신은 부모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그 부모자리에 주님의 약속 또는 주님의 초과적인 영역이 들어갑니다.

마치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람이 아닌 것처럼. 아브람 시절 때는 아브라함은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오게 되면 아브람이 없어요. 그렇게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결정적 요인을 집어넣는 것은 뭐냐? 아브람이 생각지도 못한 자식이 발생될 때 가능해요. 이삭을 딱 낳으니까 그때는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실질적으로 바뀌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전에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지만 실질적이 아니에요. 실질적으로 근거를 갖고 있는 아브라함이 되는 거예요. 그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온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아브라함보고 하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함께 임신되어 있고 동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리아의 임신이라는 말은 동행이요 동거입니다. 동행이고 동거에요. 누가 나와 함께 하겠느냐? 최성수? 아니죠 아니죠. 주님이 함께하는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해요. 함께 동행하니까 두 인격이 있으니까 이름이 두 개 되어야 되잖아요. 주께서는 이름을 하나로 몰아쳐버립니다.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받게 만들어요.

그러면 내 이름은? 내 이름은 히마리 없지 뭐. 이거는 부지깽이지 뭐요. 이사야 7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냥 부지깽이에요.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찌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사 7:4) 아무 쓸모가 없어요, 나는. 쓸모없는 인간 속에 아기 예수가 주님이 그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아무 쓸모없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아무 쓸모없습니다. 자체적으로 본인의 위치와 가치, 의미를 내세우는 시절은 끝나버려요. 그때부터 주님 들어가면 그 사람은 자기 증인이 아니고 자기에게 들어와 있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되도록 노력하라, 이 말이 아니에요. 필히 그렇게 된다. 다시 말해서 내부적으로 나는 네가 네 이름을 내세우고 네 자랑하는 것을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야무진 그런 사전조치입니다.

걸어가도 주의 이름으로 걷고 짬뽕 먹더라도 주의 이름으로 먹고. 굴짬뽕도 마찬가지에요. 주의 이름으로 먹게 하는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할 때 사나 죽으나 주의 이름으로 할 때만 영광이 되고 다른 경우로 영광되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이 지구를 사정없이 완전히 극단적인 파멸로 몰아세우기 위해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 것에 대해서 그들은 간곡하게 기다렸던 바였습니다. 하, 그거지 그거! 그래, 이거야! 왔다, 장보리 아니고 왔다, 주님. 바로 이거지, 바로. 이게 주님답지. 구름 타고 와서 작살내는 거.

왜? 왜 그걸 그렇게 고대합니까? 본인이 미리 당했거든요, 본인이. 본인이 미리 당했어요. 하는 일 족족 내 뜻대로 안되게 해주는 그것을 네 자로 ‘기쁜 소식’이라 해요. 주님 속에서 불이 나오는 그것이 뭐라고요? 사랑이고.

“네가 생각하고 한 것, 내가 불로 확 싸지를 거야.” “고마워요, 주님.” “너의 의미, 너의 의, 너의 가치, 무시무시한 심판의 불로 십자가 불로 내가 다 태워버릴 거야.” “주여, 미리 나를 사라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사라짐이 주의 능력으로 이름으로 매순간 내가 누군지를 잊어버리게 하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갔을 때에요. 뭐 여행을 갔는데 걸어서 세상 속으로, 그런 여행 아니고 비행기 타고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비행기 타고, 줄여서 뱅기 타고 갔는데 거기에 도착해보니까 거기 도착한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겠어요. 분명히 자기 자신인데.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모르는 어떤 사람이 삼층천에 올라갔다는 거예요. 이런 환상을 봤다는 겁니다. (고후 12:1-4)

그런데 지상으로 다시 내려와서는 네가 너무 자만하지 않기 위해서 자고하지 않기 위해서 사탄의 가시를 주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집어넣죠. 사도 바울은 괴로워서 빼달라고 세 번, 가시 빼달라고 사탄 물러가라고 세 번 기도했고 주님은 “됐네, 이 사람아.” 끝나버리죠. 그게 네 은혜야. 네가 약한 데서 강함이라. 제발 좀 약해줘. 가장 강한 것은 네가 약해질 때야. 그런 역설적인 말씀을 고린도후서 12장에서 하고 있죠. (고후 12: 7-10)

주님을 임신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 1장에서 천사가 오고난 뒤에 마리아가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해요. 거기서 천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친족 엘리사벳도 임신했다. 엘리사벳도 임신했어. 하나님께서 임신케 했고 마리아 너도 임신케 했다. 임신한 지 벌써 6개월 됐다고 36절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천사가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보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했어요. 이 말씀이 목표하는 게 뭡니까? 우리가 역시 못하는 게 없어, 우리를 향하여 그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우리 안에 계신 분을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우리 안에 계신 분이, 동행하고자 쓱 들어왔던 그분이 모든 말씀을 다 유일하게 이룰 수 있는 분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누가복음 2장 26절에서 시므온이 성령의 지시를 받고 네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볼 때가 올 것이라고 계시 받고 그러고 난 뒤에 27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마침. 마침 뒤에 한 자 더 붙입시다. 마침내 finally.

마침내 탕웨이는 웃었다, <헤어질 결심>에서. 저 웃는 거 봐. 웃는 거 봐. 자기 남편 죽었는데 웃는 것 봐. 마침내, 여자는 본색을 드러내대. 매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해서 주님 자신의 마침내를 매일같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를 작살내는데 매일같이 성공하시는 주님.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해주시는 이 사랑의 극치. 기다려. 내가 너 태워버릴 테니까. 저 불로 태워주세요. 그래서 주님의 공로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주께서 일하고 있음을 나타나게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자기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요한복음 21장에 나온 말씀이죠. 자기의 어떠한 죽음으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요 21:19)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거 베드로 손해잖아요. 손해 아닙니다. 군 제대하는 날이죠. 아니, 제대하는 사람보고 “아휴, 이제 세상에 나가서 뭐 할래? 군에 고만 말뚝 박지.” 이런 소리는 하는 게 아니에요. 제대 날짜는 지금 캘린더에 줄 그어놓은 게 석장 넉장 벌써 되는데... 요새 군대는요, 가자마자 그어요. 3년이 아니고 1년 6개월밖에 안되니까 가자마자 그을 수 있어요. 얼마나 부대 생활 그만하고 싶었겠어요, 얼마나. 그런 베드로 병장을 향하여 “고만 말뚝 박지.” 이거는... 베드로한테 욕을 해요, 욕을 차라리.

“어머님, 어머니 더 오래 사셔야 돼요. 제가 코에다 콧줄 꽂아드릴까요?” 거의 실성한 엄마가 벌떡 일어나가지고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지, 콧줄 꽂지 말라고. 그냥 죽도록 놔두라 했지? 병원 돈 벌게 해주지 말고. 너희들 다 골병든다. 뒤늦게 효도 코스프레 좀 하지 마라.” 이거 자기 의잖아요. 부모 생각 안하고 자기 잘남 생각하는 거예요. 누구한테 불효자라고 욕 얻어먹을까봐 자기 걱정부터 하는 거예요.

베드로에게 죽는다는 것은요.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에요. 지긋지긋하지 않습니까? 지긋지긋해요, 이 세상이. 물론 짬뽕이 맛있어요. 하지만 그것도 한 두 그릇이지. 물론 대게가 맛있는데 그것도 이틀치 먹어보세요. 대게 이틀은 먹겠다, 사흘치는 못 먹어요.

생각 없는 주부들이 남편이 우연히 배고파서 미역국 하나 해줬는데 맛있다 하니까 두 달 내내 연속 미역국해보세요. 그다음부터 미역국 바이바이입니다. 제발 살려줘. 당신 맛있게 먹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거든요, 그게.

주님께서 매일같이 오늘이 그날이다. 매일같이 오늘이 불타는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성도한테는 미리, 아침 7시부터 아침 눈뜰 때부터 그걸 미리 체험하게 해요. 그러니까 성도는 매일같이 그 하늘과 그 땅을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안 믿는 사람에게는 도적같이 오지만 성도는 그 도적하고 같이 동행하고 있는데? 늘 도둑이라. 자기 안에 계신 주님이 도둑이니까 누가 도둑 같아요? 성도 자체가 이 세상에서 도둑놈입니다. 대화가 안 통해요. 다른 사람하고 대화가 통할 수가 없어요. 세상 뭐 다 산 것처럼 이야기하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님 속에 있는 불이 성도한테는 미리 올라오죠. 계속 봅시다. 베드로후서 3장 11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경건 나오죠. 여기에 대해서 제가 언급했는데 다시 한번 언급해드리겠습니다.

이 경건한 사람이 누구냐? 아까 시므온 이야기했죠. 한 사람 더 나옵니다. 시므온 밑에 또 나와요. 이름이 한나가 아니고 안나. 과부된 지 84년. 성전을 떠나지 않으면서 누구를 기다렸던 거예요. 이스라엘이 기다려야 될 분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죠.

아까 공부했던 것 돌아서면 잊어버리니까 제가 또 복습 겸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안나 이야기. 누가복음 2장 보게 되면 36절에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하려고 했느냐 하면 이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노아 때 노아와 방주의 관계입니다. 방주 자체가 언약이죠, 언약. 그럼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언약을 맺었잖아요. 이삭을 바치면서.

그렇다면 언약이 그다음 언약, 그다음 언약으로 언약의 내용을 전달하는 거예요. 그럼 방주와 노아가 있다는 말은 방주 안에 노아가 들어있다, 동행을 의미합니다. 동행, 동거. 이스라엘은 언약과 동행을 해야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누구와 함께 동행해야 되는가? 사가랴, 사가랴가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데 사가랴가 예언을 합니다. 1장 69절,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여기 다윗이 등장해요. 다윗의 집이 등장해요. 다윗의 집이 이게 인물이에요. 어떤 건물이 아니고 건축 구조물이 아니고 인물이 돼요, 인물.

그리고 이 다윗의 집이 성전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인물이고 이 인물을 시므온은 성령에 의해서 다윗의 집이 구원의 뿔이거든요, 구원의 뿔을 만난다는 거예요. 구원의 뿔이 두 개입니까, 세 개입니까? 단 하나에요.

그러니까 시므온 입장에서는 한분만 보면 돼요, 한 사람만. 거울 속에 비친 나는 볼 필요도 없고 봐도 점점 늙어가고 비쩍 말라가는 그건 볼 필요도 없고 딱 한 사람만 만나면 돼요. 그런데 성령께서 만날 거라고 예언까지 해줬어요.

그러면 시므온과 비교해서 오늘날 우리를 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고대하는 내 인생의 의미, 목표, 계획 그것은 뭐로 축약되어야 됩니까? 딱 한분만 만나면 되죠. 죽어서 만나면 안 되고 살아서 만나야 돼요, 살아서. 시므온이 살아서 만났거든요.

안나라는 사람이 과부된 지 84년이라는 말이 있죠. (눅 2:36-37) 왜 84년이라는 말을 했는가? 살아 생전에 누구를 만난다는 거예요. 살아 생전에. 죽은 다음에 만나는 게 아니고. 쉽게 말해서 아기 예수 만날 때까지 안나는 늙어죽을 수가 없어요. 과부된 지 1년, 2년, 3년 하다가 84년까지 끌고 가게 된 거예요. 기어이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그러니까 과부된 지 84년의 안나,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네가 구원의 뿔을 만난다는 시므온. 그래서 안나가 아기 예수를 만났고 시므온도 아기 예수를 만났다는 말은 아기 예수님의 언약을 위해서 아기 예수 쪽에서 먼저 시므온과 안나 이들을 섭외했다고 보면 됩니다. 섭외했다, 를 영어로 하면 캐스팅했다. 캐스팅한 거예요.

여러분들을 캐스팅하기를 바랍니다. 또 주님한테 ‘나는 너를 캐스팅하길 원치 않는다.’ 뭐 이렇게 예능프로처럼 ‘나는 당신을 캐스팅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보통 문제 아니죠. 특히 오디션 나간 예비 가수들은 그 소리에 가슴이 제일 덜렁해요. ‘나는 너를 캐스팅하지 않겠습니다.’ 집에 가라 이 말이죠.

캐스팅했다는 증거가 뭐냐? 성령께서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보통 누가복음을 성령의 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의 저자가 사도행전까지 지었기 때문에.

그런데 2장 29절 보겠습니다. 2장 29절에서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것은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죠. 그 뒤에 말을 보세요. “내 눈이” 뭘 보았습니까? “주의 구원”. 주님이 하시는 구원을 보았사오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그 구원이 이렇게 인물화 되어서 인물이 되어서 구체적인...... 아기를 안았으니까 이게 감각적으로 오잖아요. 아기를 한 손으로 덜렁 이렇게 안은 게 아니잖아요. 두 팔로 감싸서 안았잖아요. 아기를 안고 이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이게 다윗에게 약속한, 언약대로 한 노아에게 방주 같은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안에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 오는 거예요. 구원의 뿔이 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가 접수하는 게 되느냐 하면 메시야가 이스라엘을 접수하는 그날이 오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를 쳐다볼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를 쳐다보면 안 되죠. 자기도 자기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감당 못해요. 인간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노아가 방주 바깥에서 창문 열고 바케스로 물 퍼내는 것과 똑같아요. 땅아 땅아, 빨리 땅이 열려라. 물을 줄이면 땅이 떠오르겠지. 쓸데없는 짓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노아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대로 아까 얘기한 것처럼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할 게 없어요. 엘리사벳이나 마리아는 캐스팅된 겁니다. 섭외된 거예요, 그냥. 이게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면 이말 알아듣고요. 주님 안 계시면 이게 뭐꼬? 무슨 말이야? 못 알아듣습니다.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은 경건이 뭐냐 하는 거예요, 경건. 누가복음 2장 36절에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과부로 84세인지 아니면 84년째 과부로 지냈다는 뜻인지 하여튼 나이 많은 건 확실하고 이 사람이 여자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과부니까.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아까도 했듯이 마침내. 27절에 시므온도 아기 예수 만날 때 “마침” 마침내. 여기 38절에도 “마침” 아기 예수를 만났다는 거예요. 그럼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은 한결같이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마침내.

‘마침내’라 하는 것은 죽지 않더라도 내가 인생을 다 살지 않더라도 나의 마지막 모습을 아기 예수 쪽에서 아기 예수께서 나한테 가져다주었고 알려주었다는 겁니다. 나의 마침, 나의 최후는 미리 당겨서 아기 예수님 혹은 예수님이 이미 다 우리한테 가져다 준 겁니다.

마침내 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디서? 십자가에서. 마침내. 그게 십자가에 마침내 들어간 상태의 사람이죠. 내가 커서 나중에 무엇이 될고?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라는 노래도 있지만 내가 무엇이 될고? 무엇이 되기는, 십자가의 강도가 되면 천만다행이죠. 십자가의 그것이 마침내 내 모습이에요. 오늘 제목은 ‘마침내’. 아까 ‘땡’은 너무하고 ‘마침내’.

그러니까 눈길에 걷는 것도,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도 마침내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고 모든 매 순간이 최후라는 그 그림을 장식하는 작은 타일 조각 하나 하나를 지금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타일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불신자한테는 ‘언제 오는데?’가 되지만 신자한테는 이미 “주의 날이 도적같이”라는 그 말씀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현재 우리 성도와 함께 살고 있어요. 이 말씀이. 베드로후서 3장이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도 안에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게 거룩한 행실이고 경건이에요. 최후 너머에 마지막 너머의 삶이 일찍부터 시작한 걸 가지고 거룩이라 하고 그리고 경건이라 합니다. 주와 함께 동행했을 때나 가능하죠.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그다음에 뭡니까? “간절히 사모하라” 끝으로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노아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다 했어요. 안 한 게 아니에요. 그러나 노아가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제공된 언약과 함께 물 심판을 받게 될 때에 노아는 더 이상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을, 나의 행함을 사모하지 않게 됩니다.

그 일을 안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벤츠 타라고 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으면 되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렇게 살면 안 돼, 가 아니고. 나의 행함, 나의 계획, 기대, 나의 의는 유일하게 불 심판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영, 성령께서 캐스팅하심으로써 미리 보게 하신 나의 최후,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난 거예요, 마침내.)

'서울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전체  (0) 2023.03.18
새 땅의 중심  (0) 2023.02.18
주님과의 일체성  (1) 2022.11.24
모두 멸망  (0) 2022.11.21
자기 조롱  (0) 2022.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