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모두 멸망

아빠와 함께 2022. 11. 21. 08:31

서울의존강의20221117a 베드로후서 3장 8절(모두 멸망)-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3장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 말씀에 대해서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그 뒤에 10절에 보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와서 심판이 이루어지는데【심판의 근거가 우리 인간에게 있지 않다】.

심판하는 근거가, 우리 인간보고 심판하는 게 아닙니다. 심판하는 근거는 주님 자체의 일에 근거해서 심판해요. 심판하는 이유가 우리를 닦달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보고 따지는 게 아니고 주님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주님 자신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심판을 해버립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든 간에 그것은 심판의 근거가 될 수 없어요. 어떤 짓을 했든 간에. 불쌍한 애 안고 사진을 찍든 말든 간에,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은 심판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남의 나라 쳐들어가서 전쟁을 하든 말든 핵폭탄을 만들든 말든 그것은 심판의 근거가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 심판의 근거를 제출할 권한이 없다.】내가 이렇게 잘못했으니까 저를 심판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주님은 안중에도 없어요. 주님께서는 그거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된 바는 예수님이 하신 그 일로 인하여 그것이 심판의 근거로서 작용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하는 걸 보고 심판을 할까 말까를 추후에 결정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근거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일을 마감하셨기 때문에 인간들이 어떤 짓을 추가적으로 하든 말든 심판은 그대로 주어질 뿐입니다.

심판조차도 아버지와 아들과의 계약이에요. 그게 9절에 “주의 약속”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의 약속대로. 이 점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 하면, 사람들이 교회 나가면서 “네가 그렇게 행동하니까 나중에 지옥 가는 거야. 네가 그렇게 행동하니까 네가 심판받고 저주받는 거야.”라고 개인을 닦달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성경에 없습니다. 네가 똑바로 하면 네가 구원받는다는 그런 구원의 근거 역시 인간에게 없습니다.

구원받는 근거도 인간에게 없고 저 인간이 지옥 가는 근거도 인간이 제시할 수가 없어요. 인간하고 상대 안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아요. 주님하고만 상대해서 결정지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럼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봐가지고 잘하면 천국 보내주시고 못하면 지옥 보내주세요.’라고 계속해서 자기의 행함을 자기 구원과 구원받지 않음을 결정짓는 행위로서 자꾸 하나님 앞에 자기 걸 들이밀어요. 들이민단 말이죠.

심지어 마귀조차도 심판받는 이유를 본인이 제시할 수가 없어요. 마귀조차도. “그래, 나 나쁜 짓했다. 날 쳐라.”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권한이 악마에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야, 입 다물고 있어라. 너를 심판하는 근거는 너에게 찾지 않고 내 아들 우리 주님에게서 찾아서 너를 심판하는 거예요. 악마는 자기 행위로 심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악마가 심판받는 겁니다. 그걸 ‘주의 이름으로 심판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구원도 마찬가지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고 교회 그만큼 오래 다녔다는 말은 그동안 헛짓한 거예요. 구원과 심판과 아무 상관도 없는데 본인들이 괜히 쫄았어. 괜히 주눅 든 거예요. 누가 주눅 들게 만들었습니까? 인간들을 누가 주눅 들게 만들었어요? 예수님의 하신 일을 근거로 제시하지 않고 네가 한 일이 네가 심판받고 저주받는 근거가 된다고 외쳤던 마귀들이 교회마다 그 짓을 한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 먹혀들었다는 말은 이미 인간들이 마귀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굳이 교회에서 나를 질책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본인이 본인들에게 매일같이 반성문 쓰고 질책하고 자기가 알아서 나쁜 짓 했으면 자기가 추가적으로 착한 일해가지고 자기 안에서 회계 처리하는 거예요. 장부정리 하는 거예요. 나쁜 일했으니까 내일은 좀 더 착하게 살아야지, 이런 거. 플러스 마이너스해가지고 본인이 구원받는 돈을 본인이 장만하려고 그렇게 애를 쓴 거예요.

그래놓고 다른 사람한테 또는 목사한테 묻는 거예요. “목사님, 저 어때요? 김 집사, 나 지금 살아가는 게 좀 어때? 천국 갈만해?” 이것은 본인이 본인 얼굴에 메이크업해놓고 나 오늘 화장발 잘됐어, 못됐어? 하는 것처럼 자꾸 타인에게 자기의 형편을 묻고 또 물어가지고 그것으로 자기를 규정화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주변사람이 필요하고 타인이 필요한 거예요. 그들을 사랑해서 주변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긍정을 위하여 그걸 호응해줄 다른 사람들을 찾는 거예요. 다른 사람 찾다가 정 없으면 개나 키우면서 개한테 묻는 거예요. “뽀삐야, 나 어때? 나 괜찮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뻐? 하는 것처럼.

주변에 나를 확인하기 위한 여러 가지, 내 업적을 괜찮게 포장해주고 증명해줄 것들을 찾는 겁니다. 시집갔으면 친정 어머니를 가끔 찾아간다든지 시가집에 좀 잘해준다든지. 남편 같으면 자기 남동생 어떻게 사나 선물 들고 귤 한 박스 들고 찾아가는 식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것은 진정으로 동생들을 사랑하고 주변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걱정돼서 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정을 안주고 그러면 다 지켜보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나를 나중에 책임 추궁하겠는가. 살아있을 때 착한 일 많~이 해가지고 주께서 너 왜 그렇게 살았냐고 하면 ‘이것도 했습니다. 저것도 했습니다.’ 하고 변명할 수 있는 거리를 많이 장만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 ‘오늘도 착하게 살자’ 하는 마음으로 성경 보는 거예요. 성경 보는 이유가 오늘도 차카게 살자. 조폭 구호죠. 차카게 살자. 오늘도 될 수 있는 한 여건, 형편이 되는 한 바르게 살자.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하여 최선의 삶을 살자.

방금 이야기한 것을 붉은 걸로 쓰면 이렇습니다.【구원은 나의 삶과 관련이 있다.】라는 종교를 인간들이 따로 자기가 만든 겁니다. 내 구원은 내 삶과 관련되어 있다고. 그렇다면 성경은 이게 구원의 또는 지옥 가는 근거가 안 되기 때문에 이걸 버리라 하겠죠. 나의 삶이 나를 살린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버리라 하겠죠.

그러나 이걸 버릴 수가 없어요. 왜 버릴 수가 없느냐 하면 아침부터 생각하는 전체가 only 오로지 어디에 관심 있습니까? 자신의 질적인 가치 향상에만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빠져버린 나는 진정 내가 아니무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진정 내가 아닌 거예요. 내 생각이 빠져버린 나는 내가 아닌 거예요.

정말 나라면 내 안에 가장 중심부에 나만 들어있어야 그게 나다운 거예요. 왜 그러냐? 인간들이 예수님을 인간세계에서 추방했기 때문에. 나는 당신하고 안 놉니다, 하고 추방시켜버렸어요. 예수님을 추방하고 밀치는 것이 특정 악한 자만의 소행이 아니고 기존 교회 장로가 주일 낮 대표기도 하듯이 어린아이부터 당회까지 모조리 다 예수님을 추방해요. 예수님을 추방하는 거예요. 어린아이도 어른들도, 인생을 짧게 살았든 길게 살았든 인간 속에는 최종 자기만 남기고 다른 것은 일체 다 들어내는 겁니다.

어떤 사람 보면요. 김치찌개를 시켜놓으면 김치찌개에서 돼지고기를 다 들어내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하나. 나중에 밥 먹고 나면 옆에 돼지고기가 이만큼 쌓여있어요. 어떤 사람은 잡채주면 돼지고기를 다 들어내서 돼지고기 없는 잡채만 먹는 사람이 있어요.

인간들의 하루 일과가 바로 그겁니다. 나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젓가락가지고 다 들어내요. 아침식사에만 점심식사에만 젓가락 쓰는 게 아니고 하루 종일 마음속의 젓가락이 나한테 이익 없는 것은 다 들어내요. 나한테 이익 있는 것만 거기에 남겨두는 겁니다. 철저하죠. 철저해요. 시키지도 않았어요. 누가 이거 학교에서 배워주지도 않았어요.

악마의 본성입니다. 그게 마귀의 본성이에요. 마귀의 본성으로 나한테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들어내기 때문에 교회 와서 만약에 예수를 믿는다면 그 예수도 내가 원하는 예수만 남기고 원하지 않는 예수는 벌써 다 내 나와바리, 내 영역에서 그런 예수는 내가 안 사귄다 하고 다 내보냈죠. 그래서 사람마다 예수님이 다 달라요. 사람 지문이 다르듯이 사람 DNA가 다르듯이 사람마다 예수님이 다 달라요.

똑같은 예수님은 한 분밖에 없는데 어떤 점에서 똑같으냐 하면 모든 인간으로부터 모두에게 배척받은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에요. 모든 인간으로부터 배척받은 예수님. 다시 그분의 영이 오지 아니하면 인간에게 진짜 예수를 받아들일 기회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과 구원의 근거를 인간이 자진해서 소환한다든지 요청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하고만 의논해서 모든 지구의 운명을 결정해버렸는데 인간은 마치 자기 삶의 주인이 본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삶의 주인이.

초등학교 4학년이 일기를 쓴다면 ‘오늘도 우크라이나 걱정이 된다. 젤렌스키는 어떻게 잘 대처할까?’ 이런 얘기 안 나와요. ‘오늘도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줬다.’ 전부다 자기 이야기죠. 우크라이나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죠. 자기가 종군기자도 아니고 그걸 왜 씁니까. 이제 어른 되면 일기를 안 써도 모든 사람은 마음속으로 매일같이 자기 일기를 일지를 쓰고 있어요, 매일같이.

일지 같은 거 이렇게 앉아서 꼼꼼하게 쓰진 않지만 하루 종일 왔던 문자 메시지 후루룩 훑어보면 그게 다 일지 아닙니까? 문자 메시지 답장 보낸 게 오늘 하루의 일과였잖아요. 일지이고 일과였단 말이죠. 김 집사님, 오늘 옷 2개 가져갔다. 그것도 외상이다. 그게 나의 하루 일지 아닙니까? 김 집사하고 우크라이나하고 무슨 관계있어요? 북한의 핵개발하고 관계없잖아요.

인간은 세상 전부를 아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내 삶에 유리한 것만 알면 그걸로 끝이에요. 내 삶에 유리한 것, 내 이익이 되는 그것만 알면 끝이라고요. 그러니까 인간은 본인의 신자에요. 누굴 믿는가? 본인을 믿어요. 본인의 삶을 믿는다고요. 믿씁니다. 누구? 내 이름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인생 챙기는데 거들고 후원해주면 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결국 그런 인간, 자기 삶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나오는 인간의 시간관은 뭐냐? 하루는 하루고 이틀이면 이틀이고 천년이면 천년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 3장 8절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주께서는 천년이 뭐 같고? 하루 같고. 하루가 뭐 같고? 천년 같고. 그것에 근거해서 주께서는 이 지구를 불바다 만드는 거예요. 심판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문제는 뭡니까? 하루는 하루고 이틀은 이틀이고 일년은 일년이고 이러한 시간개념을 낳게 만드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탈출할 필요가 있죠. 출애굽할 필요가 있다고요. 탈출할 필요가 있어요. 내 삶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지 않아야 돼요. 내 삶을 위하여.

이 말은 우리의 시간이라 하는 하루면 하루, 이틀이면 이틀, 일주일이면 일주일, 이것은 나를 위한 시간개념이라는 그 자체에서 우리는 탈출을 해야만 합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그것으로 탈출해야 돼요. 하루가 하루 같은 데서 벗어나서 일년이 일년 같은 데서 벗어나서.

그러면 다음 문제는 뭐겠어요? 어떻게 벗어나나, 그게 문제가 되겠죠. 무슨 수로 벗어나느냐? 분명히 심판은 천년이 하루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주님께 근거를 두고 심판하는데 우리의 하루하루 소박한 우리 일상은 내 삶에 근거해서 내가 최선을 다해보면 되겠지. 열심히 착하게 살면 되겠지, 라는 아직도 거기에서 헤매고 있고 못 벗어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이 심판의 근거, 구원의 근거도 아닌 걸 그 헛짓을 아직도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방어시스템으로 여기고 그걸 쥐고 있으니까 평생을 살아도 부질없는, 아무 소용없는 인생을 시간만 낭비한 거예요. 그래놓고 “나는 50년간 주님을 모셨습니다.” 이렇게 주님한테 자기 잘났다고 이야기를 하면 “50초?” “아니, 50년.” “내가 보기에는 50초도 안되는데.” 천년이 하루 같으면요. 90년 계산해봐야 몇 초되지도 않아요.

자기의 삶을 계속해서 긍정하고 그걸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시간계산에 몰두한 거예요. 열중한 겁니다. 잘못된 시간 계산속에서 자기 인생의 모든 걸 거기다 걸었던 겁니다. 저쪽에서 화투치고 있는데 이쪽 방에다가 돈을 건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한 거예요. 결정은 저쪽 화투판에서 결정 나는데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엉뚱한 데다가 자기 인생의 자존감과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그 모든 것을 왜 엉뚱한 데, 헛짓에 다 투자했냔 말이죠.

그럼 우리는 어디다가 투자했습니까? 이게 이제 오늘 두 번째 중요한 거예요. 첫 번째 중요한 것은 뭡니까? 심판과 구원의 근거는 어디 있다? 주님에게 있지, 우리한테 없다. 그게 첫 번째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게 있어요. 심판과 구원의 근거가 첫 번째고요. 두 번째는【우리는 이미 종말 처리된 존재 또는 대상이다】이게 두 번째 중요한 거예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이렇게 평범하게 살다가 회사에서 다툼이 있어가지고 너무 흥분해서 욱하는 성질 때문에 한번 쳤더니만 그 사람이 한 대 떡 맞고 자기 딴에 자세취한다고 하다가 책상 모서리 날카로운 데에 받쳐서 죽어버렸다. 그럼 나는 과실치사에 의한 폭행죄로 살인을 저지른 게 되죠.

그럼 세상에서 형벌을 어떻게 합니까? “너는 왜 예수를 믿었어? 사형!” 이럽니까? “너는 성경 말씀, 주의 약속을 왜 믿었어? 사형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뭐라고 이야기해요? “너는 왜 그 사람을 쳐가지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과실치사 했는가? 네가 거기에 대해 고의성이 없는 걸 봐서 한 10년간 살다 나와라.” 직장이고 뭐고 10년이면 가정도 이혼하고 파탄 나고 뭐 다 깨지겠죠.

자, 이러한 판결은 근거가 어디에요? 내가 그 사람을 때리지 않았고 그래서 그 사람이 멀쩡하게 그 다음날 헤헤 웃고 나타났으면 내가 10년간 살 필요 있어요, 없어요? 살 필요 없죠. 그럼 내 인생이 10년간 감옥생활 한다는 것은 내가 행위한 게 근거가 되어서 교도소생활 하잖아요. 그때 우리는 내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베드로후서 3장 초반에 보면 이미 만물은 뭐로 심판받습니까? 처음에는 뭐로 심판받아요? 물로 심판받죠, 물로. 마지막에는 뭐로 심판받습니까? 불로 심판받죠. 물로 심판할 때, 자기가 고의로 사람을 때려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한 사람은 전부다 나와. 내가 물로 심판하리라. 이게 노아홍수입니까? 여기서 성질부려가지고 사람 때려죽인 사람 다 나와. 내가 물에 빠뜨려서 죽이리라. 이게 노아심판의 근거에요? 여러분 성경 그 정도는 알게 아니겠습니까? 노아심판 받을 때 천하의 죄수들, 교도소만 찾아가서 전부다 바다에 들어가. 물에 빠져죽이리라. 이렇게 했습니까?

비가 왔는데, 여기는 그냥 천사같이 사는 거예요. 그냥 힘들게 신곡시장 여기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 하나 애 둘 키운다고 내놓고 하는 할머니 그런 사람하고, 나이트클럽에 껄렁거리면서 깐족거리면서 마약이나 하고 담배나 피우면서 까불고 있는 그런 사람 있을 때 노아 때 하늘에서 비가 막 오는데 비가 막 오다가 신곡시장에 있는 그 아주머니는 피하고 저 깡패한테 쏟아져가지고 깡패가 멀쩡한데 익사해서 죽었습니까? 그런 거예요? 답변해보세요. 그런 겁니까? 아니죠.

오늘 베드로후서 3장에서 물로 심판받을 때 도대체 그 인간은 무슨 죄로 심판받는 겁니까? 지금 제가 말하는 게 성경에 없는 이야기 아니죠. 노아홍수 심판받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이미 언급을 했어요. 그들은 뭘 했느냐 하면 먹었대요. 마셨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장사하며 애 키우고 그렇게 살았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심판의 물이 떨어져서 다 죽었대요.

인간들이 자기 삶을 근거로 해서, 나 착하게 살았으니까 구원받을 거야. 나 너무 나쁜 짓해서 나 지금 지옥 갈 거야. 그렇게 인간들을 교도소 집어넣는 의식을 가지고 그걸 확장시켜서 하나님도 우리를 이렇게 다룰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모른다는 죄목으로서 물 심판받고 불 심판받는 거예요.

왜 심판받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 심판의 근거를 몰라서 그래요. 심판의 근거를 몰라서 심판받는 거예요. 막 하나님이 때리는데 “왜 때립니까? 때리지 말고 먼저 나보고 ‘이걸 해라’ 했는데 말 안들을 때 때려주세요.” 라고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때리는 것부터 먼저 해요. 때리는 것부터 먼저 하고 “자, 때릴만하지?”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일괄 심판. 일괄 멸망. 멸망시켜놓고 “자, 이래도 멸망 받을만하지?” “왜요? 멸망하는 이유에 대해서 모르잖아요. 알려주면 되지 않습니까?” 알려주기 전에 네가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겁니다. 인간은 없는 것을 찾아야 될 존재입니다. 인간은 없는 것을 찾아야 될 존재에요.

그런데 없는데 무슨 수로 찾습니까? 그러니까 맞아야 되죠. 주께서 문제를 내는데 없는 것을 찾으라는 거예요. 그럼 있는 건 뭡니까? 있는 건 교회에 있죠. 신학책 있죠. 성경 있잖아요. 자꾸 성경보고 교회 다니고 신학공부하고 성경공부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두 손 모아 기도하고. 그건 있는 거예요. 있는 건 백날 해봐야 그건 안 됩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없는 것을 네가 찾아낼 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어느 인간이 없는 걸 찾아낼 수 있습니까? 없는 걸 찾아낼 수 있는 위인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늘 너무 조용하다. 답변 좀 해보세요. 없는 걸 찾아낼 수 있는 위인들이 인간 중에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래서 없는 걸 찾아내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저주받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판과 구원의 근거는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 예수님의 행하심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행하심과 내 삶 또는 나의 행함과 경쟁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경쟁관계. 어느 것을 신봉할 것인가, 에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할 때 그들은 어디에 마음 두었느냐 하면 본인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여기에 온 혼신의 마음을 다 둔 거예요.

그런데 노아는 어디에 근거를 두었습니까?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거든요. 은혜 입고난 뒤에 어디에 근거를 두었습니까? 바로 방주. 방주가 어느 시장에 팔아요? 방주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그 당시에 방주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방주가 전기차입니까? 테슬라처럼 팔게. 없죠. 없는데 없는 것이 노아를 통해서 있게 하는 것.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면 여러분들이 죽어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 여러분 안에 새록새록 새롭게 발생되고 생산되는 게 있어야 돼요. 그것이 여러분들을 구원하는 겁니다. 갑자기 구원받기 힘들어졌죠.

아니, 예수 믿으면 되잖아요. 문제는 예수가 벌써 많이 배포가 되어있고 사람들이 이미 익히 안다는 거예요. 예수가 식상해. 식상해졌고 너무 흔해 빠졌어요, 예수가. 물론 예수가 교회마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주님을 어디서 구입합니까?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 구입합니까? 주님이 어디 있어요? 없어요. 주님은 항상 자신이 없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노아는 왜 구원받았습니까? 노아는 왜 구원받았는가? 제가 아까 후딱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을 했어요. 노아는 왜 구원받았습니까? 누구 답변해보세요. 제가 하기 전에.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은혜를” 그다음에 뭡니까? “입었더라” 되어있죠. 옷 한번 벗어볼까요? 이 짓까지 해야 됩니까. 노아에게 낯선 언약이 입혀진 거예요. 언약이 주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선물이에요. 없는데 없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없는 것을 하나님이 제공한 거예요. 우리가 해낼 수 있고 우리가 아는 것은 주께서 선물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주께서는 생각도 못한 걸 준 거예요.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 믿는다.’ 예수님 믿는다, 이것을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 다닌 사람은 수십만 번 이상 들었어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예수를 믿으면 이것은 그 수십만 번 들었던 예수 믿는 것과 같이 어울리지 않고 없는 거예요.

내가 예수를 지식으로 믿었던, ‘예수 믿으면 나한테 유리할 거야. 예수 믿으면 날 천당 보내줄 거야. 그렇다면 내가 꼭 믿어야지. 이건 내게 필요한 거야.’ 왜? 인간의 삶은 자기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것만 챙기기 때문에. 내게 유리하기 때문에 챙기는 거예요. 예수보다 내 삶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예수는 경상도 말로 단디 챙기죠.

하지만 성령이 왔을 때 예수 믿는다는 것은 뭐를 지적하는가? 너는 지금껏 예수 믿는 너를 믿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식으로 성령이 선물로 와버리죠. 그러면 준 선물과 챙기려는 나를 완전히 바꿔야죠. 완전히 바꿔야 됩니다.

내가 있던 자리는 주님이 차지하고 나는 내가 추방했던 예수님처럼 내가 나를 추방시켜버려야죠. 나의 경험, 나의 선행, 나의 악행, 나의 잘못 다 추방해버려야 돼요. 나의 실수, 나의 오류, 나의 장점, 나의 주특기 다 추방해야 돼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시험입니까? 얼마나 큰 유혹인지 몰라요. 물론 저나 여러분 중에 해당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뭐 성공한 적이 있어야죠. 우리가 성공했다는 것은 우리가 뭔가 남들 보기에 부러울 만한 일이 됐다는 것은 그때부터는 그것이 나의 삶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럼 내가 성공한 것이 우리 집에 들어온 귀신이 돼버려요. 귀신이 된다고요. 신봉하게 돼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중학생인데 이상하게 천성적으로 팔 힘이 좋아가지고 전국 중학교 팔씨름대회에 우승했다면 그놈의 상장은 제일 잘 보이는 데다가 둬요. 차라리 그때 우승하지 않고 예선 탈락했으면 되는데 그때부터는 야, 내가 큰일 내겠네. 해가지고 딴 짓 안하고 팔씨름만 해서 1억 따려고 어디 시합 나가고... 이것만 한다면 내 삶은 나한테 훅 들어온 귀신이 정해준 거예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나를 높여줬던 귀신이 갖고 온 그 선물에 내가 완전히 올무처럼 그 종이 돼버린 겁니다.

그냥 학교 다니지, 랩 한다고 해가지고 쇼 미 더 머니, 뭐 나에게 돈을 보여줘, 하는 프로그램에 가서 자기가 뭐하나 써가지고 리듬 맞춰가지고 뭐 노랜지 아닌지...... 나도 그럼 해볼까, 랩 해볼까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이것을 너희에게 바라나니.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그거 좀 되고 나면 공부 이제 때려치우고 야, 이게 나의 삶에 쾌락을 준다, 하고 거기에 빠져버리죠. 그걸 향유(享有)라 하는데 예상 못한 즐거움이 와버리면 거기에 인간이 매료돼요. 인생을 버려버립니다.

아버지가 바둑 학원을 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바둑 학원을 해가지고 애한테 바둑을 가르쳐줬더니만 애가 6개월 만에 자기 아버지를 이겨버리네요. 그렇게 해서 사법고시보다 더 치열한 프로기사가 되고 난 뒤에 학교 공부고 뭐고 다 치우고 이제 바둑만 공부하는 거예요. 하루에 어떤 때는 18시간, 20시간까지 하루 종일 청소년들이. 프로기사가 됐다 칩시다. 반짝하겠죠.

20대 돼서 자진해서 프로기사를 그만둬버려요. 남자 이 동훈 9단, 여자 박 지연 4단, 이 세돌 9단 전부다 자진해서 스스로 자기 팔목을 자르는 것처럼 바둑을 잘라버려요. 이제는 젊은 후배들한테 실력으로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젊은 청춘을 바쳤는데 그 바친 청춘이 나를 평생 보장해줄 수 있는 밥벌이가 되지를 못한 거예요. 미혹된 거죠, 결국은. 관심사가 내가 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본인이 즐거운 것이......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요? 즐겨보세요. 거지꼴을 못 면하리, 뭐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인생은 즐기기 위해서 세상이 있는 게 아니에요. 뭔가 성공하려고 했는데 어릴 때부터 공룡 이름 달달 외워서 공룡박사 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자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 해. 전혀 이건 특징이라 할 수가 없어요. 나를 위해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가치나 의미를 발견 못했다는 거예요.

그럼 왜 나를 위해서 사느냐? 거울 보면 내가 보이잖아요. 보이는 것 중에서 괜찮은 것, 난데 저 친구가 더 마음에 든다면 나는 언젠가 10년 뒤에 저 친구를 따라잡겠다. 보이는 데에서 보이는 것만 자꾸 찾아다니는 거예요, 보이는 것만. 아줌마들 취미생활 하듯이. 꽃꽂이하다가 때려치우고 돈 더 들여가지고 홈쇼핑에서 뭐 하나 구입해서 리본 아트해볼까 하다가 그것도 또 재미없고. 이거 하다가 저거 하다가, 전부다 보이는 거예요.

뭐 남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치과의사하다 때려치우고 김밥하다가 김밥하다 때려치워버리고 딴 거, 뭐 랩하고 하여튼 집구석 돈 있으니까 굳이 내가 고생할 필요 없다 해가지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나밖에 없는 인생인데... 뭐 누구는 둘 되는 인생입니까? 하나밖에 없는 인생인데 원 없이 살겠다고. 원 없이 살다가 전부다 이렇게 돌아다니는 떠돌이처럼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럼 살면서 그동안 뭐했어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건가. 오로지 생각한다는 것이 자기 종교 만들어가지고 자기를 신으로 만들어놓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 외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보이는 것, 보이는 것, 보이는 것. 보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대체하면서 자기 욕망에 미진한 것을 보충하는 식으로 그렇게 세월을 보낸 거예요.

주님에게는 이미 구원과 멸망은 다 게임 오버, 결정됐어요. 결정됐습니다. 뭐 빽 써봐도 소용없어요. 결정나버린 겁니다. 그 결정난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이라 하고 오늘 본문 베드로후서 3장 9절에서는 ‘주의 약속’이라고 해요. 주의 약속. 언약, 주의 약속은 우리 인간세계에서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좋습니다. 인간세계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 인간세계를 완전히 섬멸해버렸다. 다 완전히 불바다 만들었다. 인간세계에 없는 것이 인간세계에 들이닥쳐 와서 다 섬멸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인간세계에 눈에 보이는 것만 구입하고 그것만 탐을 내면서 계속 더 좋은 것, 좋은 것 찾아다니는 인간은 이미 불바다 속을 여행하는 것밖에 안돼요. 거기서 빠져나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베드로후서 1장 17절, 지난 시간에 했지만 다시 한번 봅시다. 1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가 알게 한 것이” 그다음 말씀이 중요해요.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했죠.

보통 이 세상의 이야기, 담화라 하는데, 이야기를 만들려면 만든 사람이 있겠죠.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죠.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면 이 세상 이야기는 다 저자가 있고 만든 사람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게 신화가 되든 뭐가 되든 다 인간세계에 있는 것들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거예요. 백설공주도 마찬가지고 심청전도 마찬가지고 춘향전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들뿐이에요, 이 세상에. 그 이야기 내용이 뭐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누구는 잘됐다 그 이야기, 누구는 못됐다 하는 그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만났던 이야기는 인간이 만든 공교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17절에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다음에 뭡니까?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께서 누구 하나를 딱 지목한 거예요. 내 사랑하는 자, 내 기뻐하는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인간과 차별화시킨 거예요. 그 차별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구원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예수님과 그 외, 그 외를 대조시키는 겁니다. ‘그 외’ 속에 누구도 포함시키겠어요? 본인이 포함되겠죠, 본인이. 본인도 포함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특화시키면 나머지는 전부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자들의 집합이 되죠. 아닌 자들의 집합.

이럴 경우에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일대일 대응이 안 된다’고 합니다. 대응이 안 되면 동치(同値,equivalance), 동일하게 일치가 되지 않는 거예요. 이걸 수학에서는 ‘무한의 크기가 다르다’고 합니다. 인간세계의 무한은 유한을 크게 키우면 이게 무한 돼요. 766 끝, 하면 유한이잖아요. 그런데 766,…하면 무한 되거든요. 끝없이 가면. 인간은 766 다음에 767나올 거고 계속 나올 거잖아요. 무한과 유한 사이는 연속체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생각하는 무한, 이 무한 속에 인간의 종교가 들어있어요, 종교가. 인간들은 자기를 유한한 인간으로 간주하고 무한은 신의 영역으로 돌리는 거예요. 이 이야기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건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인간이 만들었어요? 인간이 공교하게 만든 거예요, 인간들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십계명 받은 것하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십계명 받았다는 이야기하고 같은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일과 예수님이 십자가 진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하고 같은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인간의 말만 믿어요. 성령이 없을 경우에는. 그런데 반대로 성령이 오게 되면 인간의 말은 무조건 안 믿어요, 인간의 말은. 알거 다 알아버렸는데 그거 믿어서 뭐합니까.

성령 받은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나 예수 믿는다.”하면 안 믿어요. “아니 진짜로 내가 너처럼 예수 믿는다니까.” “안 믿어.” 왜? 그 이야기는 내가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니까. 자기는 주님만 바라보지, 나는 너처럼 예수 믿는다는 이야기를 내가 들을 이유가 없죠.

그것은 사람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일 수밖에 없거든요. 너는 주 예수 믿으면 예수님하고 의논해. 나한테 그거 자랑질 하지 마. 딱 듣기 싫어. 왜 예수 믿는다는 것을 저렇게 광고합니까? 그것은 나의 삶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데서 자기의 주체성을 형성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흔히 인간들은 개 키우면서 이런 이야기하죠. 개도 주인이 예뻐하면 개들도 주인이 자기 예뻐하는 걸 안다는 거예요. 그 개한테 속아 넘어가신 겁니다. 개는 자기밖에 몰라요. ‘이렇게 내가 재롱부리면 나를 예뻐해주겠지.’ 라고 개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왜? 인간은 개보다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 자기 말고 다른 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주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개는 본성상 자기밖에 몰라요. 인간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방법 중 하나에요. 좋은 관계 맺어서 나한테 손해될 것 없으면 그렇게 해요. “아이고 손님, 옷 잘 어울립니다.” 어울릴 리가 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은혜라 하는 것은 모든 걸쳐진 인간관계를 쳐내는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쳐내는 것. 내 안에 주님의 심판과 구원, 주의 약속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가시덤불이 가리면 안되죠. 안되잖아요. 그게 또렷하게 드러나야 되죠.

그래서 주님 약속 외에는 일체 누구의 말도 믿지 않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그 누구 앞에서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를 비난할까봐, 그래서 그들 세계에 나를 안 넣어주고 나하고 안 놀아줄까봐, 왕따 당할까봐 완전히 그 사람들에게 내가 밉상 받으면 나는 못 산다, 라는 본인 생각에 본인 걱정이 되어서 아부하듯이 그 사람에게 빌빌 기는 거거든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공교하게 만든 것만 줘요.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줄 재주나 능력이 그들에게 없습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는 누구밖에 없어요?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 그때 이야기에요. 베드로가 좋다고 야, 이런 세계가 다 있었네. 이 눈부신 세계. 이거 뭐 놀이동산도 아니고 이런 황홀한 세계도 다 있나, 하고 거기에 빠져 있을 때 주님께서 정신 차려라! 하고 훅 날라가버려요. 모세고 엘리야고 다 날라가버리고 남는 것은 역시 초라한 행색의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런 초라한 행색의 예수님 뒤에서 하나님의 어떤 음성이 겹쳐지죠.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분의 말만 들어라. 근거가 베드로 너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근거는 너에게 없고 모든 근거는 아버지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 예수님의 언약 완성 그것만이 유일한 근거인 것을 네가 앞으로 알게 될 것이다. 끝. 10분 쉽시다.

 

 

서울의존강의20221117b 베드로후서 3장 8절(모두 멸망)-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노아홍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세계에 없는 것이 근거가 되어서 인간세계를 심판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하죠. 이야기해놓고 시험 쳐서 불합격한다면 심판에 대해 수긍을 하겠는데, 때려놓고 때릴만하다고 해버리면 이건 너무나 일방적인 심판이기 때문에 변호하거나 대처하거나 어떻게 항변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가 없는 겁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게 상당히 불합리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찾아야 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참인지, 거짓인지를 하나님이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입장에서 이것은 선이다, 악이다 하는 그 판단 구분자체를 주님께서는 완전히 근원적으로 그걸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첫째 시간에 두 가지 중요한 것 했죠. 벌써 다 잊어버렸지만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뭐냐 하면 심판의 근거에서 인간이 행한 것은 일체 없고 주님 자신이 행한 것이 심판과 구원의 근거가 된다.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되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이게 심판받는 근거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의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죠. 해방감을 주는 거예요.

마치 필리핀 민다나오 섬인가, 일본이 정벌하고 2차 대전 다 끝났는데, 남들은 다 끝났어요, 본인이 혼자 싸우고 있어요, 지금. 끝났다고 삐라 뿌려서 빨리 나오라 해도 날 속일 생각하지 마라. 그러니까 속지 않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 거예요, 그 인간은. 자기 꾀임에 자기가 빠진 거예요.

하나님이 어떠하든 내가 알고 있는 선악체제에 의하면 사람은 착하면 천국, 악하면 지옥. 난 이것에 확고부동한 증거를 쥐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이걸 부정할 생각하지 마라. 여기에 모든 걸, 내 몸과 정신을 다 던져 넣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선악과가 독약입니다. 뭔가 약 잘못 먹은 거예요. 약 잘못 먹고 완전히 인간이 미쳐버린 거예요. 자기 의로움에 내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 완전히 본인이 거기에 반해버린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는 지식인데 나도 같이 알게 되었다. 거기서 오는 자부심, 내가 모든 것을,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판결자, 재판관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그게 어리석은 것인지 모르고요.

두 번째 경우는 뭐냐 하면 이미 멸망당했음.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는 순간 이미 인간들은 벌써 멸망당한 겁니다. 인간들은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는가? 예수님이 하는 일을 이해 못했어요. 같이 동조할 수가 없어요. 모르니까 동조할 수 없는 거예요.

어떤 점이 동조가 안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약속의 내용이 예수님 본인의 죽음입니다. 이게 인간세계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시간의식은 인간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시간의식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살아있을 때 시간을 느끼다가 심장이 뛰다가 죽게 되면 삐-하는 것처럼 죽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시간은 의미가 없어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 간에 그건 하나의 흙이고 바짝 마른 회가루가 된 사람보고 당신은 지금 살아 계신 지 120년입니다, 하면 회가루가 놀라가지고 그래? 더 살고 싶어라, 뭐 이러지는 않거든요. 이미 죽었으면 시간도 같이 그 사람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었거든요. 그러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에서 예수님은 벌써 벗어난 거예요. 인간 시간에 예수님이 속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럼 이제 시간은 인간 몫이고 예수님은 인간세계에서 죽었으니까 죽은 거다. 이래서 모든 이야기가 만사가 끝난 걸로 여겼는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거예요.

부활을 해버리니까 예수님을 죽게 만든 인간들의 시간의식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시간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된 거예요. 너희들 시간 계산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하루가 하루고 이틀이 이틀이 아니라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경우는 어떤 사람에게 해당되느냐 하면 시간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이미 죽은 자에게 해당되잖아요. 그럼 죽은 자가 곱게 죽어있으면, 죽은 자는 천년이 하루 같든지 하루가 천년 같든지 시간이 관계없기 때문에 (살아 있는) 우리 시간이 중요하다 되는데, 이 죽은 자가 부활해서 살아나버리니까 기존의 인간시간과 경쟁관계가 돼서 어느 시간이 옳은 시간인가 판결에 따라서 심판이 결정돼버리는 거예요.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구약에 나온 예인데요. 레위기 25장 한번 보겠습니다. 레위기 25장 2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그다음에 뭡니까? “안식하게 하라” 했죠.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안식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에도 안식의 때가 남아있는데 못 들어간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오죠.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하시고 안식을 위하여 천지창조를 하신 거예요. ‘보기에 심히 좋았다’의 상태가 유지되면 하나님이 이제는 일을 그만하시고 쉬시려고 하는 겁니다. 안식에 이르지 못하면 계속 일하셔야 되니까.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그 차원과 이 땅은 안식에 이르지 못하는 그 차원, 안식에 이중성이 생긴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안식 못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내다보는, 안식하신 하나님이 안식의 차원에서 활동을 해버리는 거예요. 미완성, 다 이루지 못한 속에 다 이루신 분이 들어와서 이루지 못한 것과 이루심과의 그 차이를 드러내시는 거예요. 이루지 못한 것은 심판, 이룬 것은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안식을 할 때는 어떻게 안식을 하느냐? 시간을 가지고 그것을 설명해주신 거예요. 이제부터 굉장히 어렵습니다. 시간을 가지고 루틴(routine),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안식의 의지를 드러내신 거예요. 1,2,3,4,5,6 그다음에 무슨 날입니까? 안식일. 그럼 일주일이 무슨 날이 돼요? 일주일은 하루 같고 하루가 일주일 되는 거죠. 그 하루를 위해서 일주일이 있었으니까요. 인간세계에서는 일주일이 길어요. 하루는 짧아요. 그러나 너희들이 그 가치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미완성의 시간과 완성된 시간의 차이는 족히 비교가 안돼요.

그다음에 하루만 그런 게 아니고 3절에 봅시다.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4절에 “제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뭐하게 하라? “안식하게” 하라. 계속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그분이 지금 안식하지 못한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 백성의 안식을 완성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 율법으로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렵게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통해서 이 세상에 없는 시간관을 집어넣어서 세상에 없는 새로운 공간을 만드시려 하는 거예요. 새로운 공간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뭐가 되겠어요? 천국이 되겠죠.

천국은 이 시간 이 땅에 routine, 반복되는 새로운 시간의 법이 개입함으로써 천국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냥 죽었다가 ‘천당 갈래, 지옥 갈래?’ 이렇게 우리한테 맡기는 게 아니에요. 벌써 이 세상에 특이한 시간구조가 찾아오는 겁니다. 특이한 시간구조가.

하루가 일주일 같고 일주일이 하루 같은 그러한 새로운 시간구조가 오는 거예요. 육 년이 일 년 같고 일 년이 육 년 같은 시간구조가 오는 겁니다. 일 년을 위하여 풀어내면 육 년이 되고 육년을 모으면 그게 일 년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하루죠. 하지만 그 하루를 확장시켜버리면 천 년. 성경에서 천 년이라 하는 것은 무한이에요, 무한. 시간이 영원해버려요. 하루 안에 영원이 다 담겨있는 겁니다.

레코드판의 바늘 침,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뾰족한 침이 있다면 이 침과 레코드판이 만나 여기서 음악이 나오잖아요. 뾰족한 하루가, 이 침이 여기 있는 영원한 세계의 입구가 되고 그걸 대변해서 표현해주고 있는 겁니다.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얘기했듯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것은 뾰족한 인간으로 오신 분, 오직 한분이죠. 이것을 안양 강의에서는 다른 이름은 안돼요. 오직 무슨 이름? 주의 이름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주의 이름.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른 자는 무엇을 스스로 부정하게 됩니까? 자기 이름을 부정하게 돼요.

인간이 하루하루 살면서 인간이 기억나고 생겨나는 것은 자기 중심의 공간이 생겨나요, 나라는 공간. 내 인생이 형성된 내 공간. 내 공간을 다른 말로 하면 여러 가지 엮여있는 인간관계. 저분은 나의 사촌이고 저분은 나의 아버지고 어머니고 할머니고 하는 이런 인간관계.

인간은 이 인간관계를 통해서 연대의식과 유대의식을 키운다. 이거는 바로 이번 십자가마을 수련회 교재에 보면 나와 있어요, 초반에. 이번에 아주 쉽게 썼습니다. 교재 한번 읽어보세요. 서론 부분 한번 읽어보세요.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국가까지 확장되는지를. 국가를 좋아하는 것은 그 안에 자기 몫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예요. 내가 투자하고 내가 희망 거는, 내가 살아야 될 이유를, 의미를 이 국가가 나한테 보장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한테 헌신하는 겁니다.

손 흥민이 중국 사람입니까? 아니죠. 손 흥민이 중국 사람 아니죠.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손 흥민을 응원하는 거예요. 눈 빨리 나아서 필드 뛰어라. 방탄소년단이 북한 사람입니까? 아니죠. 내가 자랑할 만한 사람을 내 국가가 많이 양성하고 키워내고 거기에 포함됐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 나라의 국민 된 것에 어떤 자부심을 가질 때 나는 이 힘든 인생을 그나마도 위로받을 수 있는 거예요. 나라는 공간이 국가로 확장되면 거기서 나는 새로운 내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국가로 인하여 우리 주님이 쫓겨났는데요? 그러면 국가가 쫓아낸 겁니까? 그 중에 포함된 내가 주님을 쫓아낸 것일 수밖에 없어요. 그만큼 우리 자신에게 목적과 기대와 희망이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골칫거리에요. 이게 모든 성경을 왜곡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나름대로의 희망과 기대. 자기 우상화작업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을 통해서 안식할 때 조건을 붙여요. 할례를 행해야 된다는 거예요. 할례가 뭐냐 하면 나의 죽음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문신을 내 생식기 끝에다 두는 걸 가지고 할례라 합니다, 하례. 그게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다. 이게 마음의 할례에요.

레위기 25장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3절에,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찌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그러면 그 약속의 땅에 안식이 임한다는 것은,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공간입니까, 안 그러면 주님이 사는 공간이에요? 주님이 사시는 공간이 되겠죠. 그럼 주님이 사시는 공간이 안식의 땅이 돼요. 완성이 된다고요.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서 인간 속에 개입하는 방식이 율법이에요.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살고 싶어서 들어올 때 나오는 그 방식이 율법입니다. 안식하게 하신 주님이 들어와버리면 그게 안식의 땅이 돼요.

노아방주에는 누가 들어왔죠?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가 들어왔습니까? 거기에 정결한 짐승이 들어왔죠.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정결한 짐승이 스스로 자기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바칩니다. 희생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을 희생 제물이 대변해주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에게 희생을 드린 거예요. 이게 뭐냐? 모든 심판과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에게 있지,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철저히 우리를 배제해요.

그리고 난 뒤에 더 나아가서 레위기 25장에 가면 좀더 확장돼서 나중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진짜 최종적인 안식인 8절에,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7×7=49,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그다음 9절에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제오십년이 무슨 날이 되죠? 희년. 희년의 특징은 뭐냐? 개인의 소유를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주께서 보내주라면 보내줘. 왜요? 그건 네 노예가 아니고 내게 속한 내 종이기 때문에 내 지시에 따라야 돼요.

그러니 희년의 특징은 뭐냐? 내가 내게 내릴 지시를 일체 용납하지 않는 상태가 희년이에요. 내가 나한테 지시내리지 않아요. 마태복음 8장에 백부장 있죠. 백부장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렇게 하죠.

레위기 19장 23절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그 열매가 아직 할례 받지 못했다는 말은, 할례가 뭐라 했습니까? 죽음이죠. 인간이 죽음으로써 기존에 살아있을 때 모든 시간, 그 시간이 만들어낸 공간, 그 공간에서부터 죽은 자만이 새로운 율법 완성의 시간과 공간에 참여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할례가.

그러면 그 근거가 어디 나옵니까? 장차 오실 메시야 되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거기에 근거한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죽어도 사흘 만에 살아날 때 비로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 그분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뭐만 전했어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증거한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교하게 만들어낸 모든 이야기들 속에는 그냥 ‘부활하고 싶다. 살고 싶다.’ 가 있죠. 죽어도 다시 살고 싶다, 가 있죠. 하지만 실제로 살아난 상태에서 만든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목표와 기대를 갖고 시도해보는 거지만 내가 살고 싶다는 것은 내가 죽고 싶다, 라는 그 의사에 대해서 본인이 부정하는 거예요. 거부하는 거예요.

‘그래. 죽으면 죽어야지. 하지만 살고 싶다.’ 이 말은 무슨 말이에요? 내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나는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사랑이 많아서 죽은 나도 다시 살려주면 좋겠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건 하나님을 이용한 것밖에 안 되잖아요. 어디 꼼수를 쓰고 있어요, 꼼수를. 말이 안 되죠.

이 말은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어쨌거나 저쨌거나 절대로 나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하게 강조하는 거예요. 내가 비록 늙어 죽더라도 하나님 뭐 하노, 날 살려내야지. 왜? 난 가치 있으니까. 지금 이걸 자기가 큰소리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마음의 할례가 안 된 상태에요.

하나님은 인간이 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이 하는 것만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해줘요. 그럼 인간은 못하고 하나님만이 하신 게 뭡니까? 바로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 그것만이 하나님이 하시죠.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그걸 못해냅니다. 안 죽으려고 애쓸 뿐이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은 인간이 못해주죠.

새로운 공간, 새로운 시간을 거쳐 새로운 공간에서 주제는 뭐냐 하면 바로 【주님은 주님이시다】 에요. 주님은 주님이시다, 이것 하나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받으면 이렇게 됩니까? 되죠.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있어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봅시다, 고린도후서 12장. 자꾸 성경 찾으니까 좀 짜증나죠? 영생 받은 것에 비하면,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안 낫습니까? 그래도 좀 참아주세요. 12장 보면 제가 읽겠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이중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진짜 자기가 생각 못한, 인간세계에 없는 새로운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신 거예요. 그 은혜와 선물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자만하지 않기 위해서 그 뒤에 사도 바울로 하여금 사탄의 가시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게 바로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나와요. 이 가시 빼달라고 세 번 기도했지만 세 번 다 거절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을 구원하는 게 주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 바울에게 주님이 근거해서 제공된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야 돼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있는 겁니다.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거든요. 왜 그런 말을 합니까? 자기 죄인 된 것을 자랑하려고 한 게 아니고 정작 자랑할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자랑거리에서 배제시키는 거예요. 빠져나오는 겁니다.

이 말은 성도가 되었으면 성령을 받았으면 뭔가 인간이 만들지 못한 예상 못한 새로운 것을 내놔야 되죠. 새로운 것을 내놔야 돼요, 새로운 것을. 인간이 공교하게 만든 것 말고. 아까 이야기를 계속 해봅시다. 성도가 되었으면 은혜를 받았으면 사람에 대해서 일체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죠.

평소에 인간들 세계에서 인간의 시간과 인간의 공간에서는 나라는 것은 남들이 이렇다 저렇다 한 것을 종합해서 그게 나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남들의 평가를 모아서 그게 나로 규정되는 겁니다. 평생이 다 가도록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뭘 하는지 자기가 규정이 안 된다고요.

그런데 주님의 은혜가 임했잖아요. 주의 은혜가 임하면 아까 고린도후서 12장의 말씀처럼 그 사람이 누군지 나는 모르겠다 할 정도로 자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져버려요. 나의 삶에 대하여 내가 구원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굳이 내 삶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쓸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주님이 누구시냐가 중요해요. 주님이 누구시냐가 중요하지, 내가 누구냐는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보고 놀렸고 사도들도 많이 핍박을 받았잖아요. 얼레리 꼴레리. 특히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는 욕을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욕을 많이 얻어먹었는데 스데반 집사가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이유가 근거가 어디 있느냐? 돌 던진 사람을 용서해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앞에 누가 등장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죽는 순간에 누가 등장했죠? 예수님이 자기를 영접하려고 선 것을 봤죠.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걸로 된 거예요.

예수님에 근거해서 자기가 구원받은 거예요. 돌 맞아서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자기가 바른 설교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저분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돌로 치는 것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사람들은 돌 던지면서 돌 던지는 올림픽하겠죠. 나를 하나 타겟으로 삼아서. 자기들 취미인데 뭐.

그러니까 나 죽는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있느냐는 거예요. 내 죽고 사는 거 없거든요. 내가 죽어서 살아야 될 이유가 없어요. 나는 죽고 다른 나로 부활되죠. 아담으로 죽고 새 아담, 예수님의 형상으로 살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형상이라는 것이 우리 자체의 사적 형상이란 없고 아담의 형상을 물려받은 거예요. 우리 형상은 남의 것이에요.

너 누구 닮았냐? 너희 아버지 닮았네. 아니죠, 아버지의 아버지를 닮았겠죠.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냐?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또 누구의 아들이잖아요. 그럼 마지막에 가면 누구 닮았어요? 아담을 닮은 거예요. 아담의 형상을 우리가 계속 인수받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새로운 자아는 아담의 형상이 아니고 예수님의 형상을 인수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의 형상인 나로서는 상상을 할 수가 없죠.

성령 받은 사람은 상상하는 게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은 뭘 아느냐 하면 나는 일단 아니라는 것. 지금의 내가 부활되는 건 아니다, 그 정도는 알죠. 하나님 앞에 나를 받아주지는 않는다, 그 정도는 알죠. 주 안에서 만들어진 거니까.

부산 강의에서 그랬잖아요. 구원받는 것은 나무인데 나무의 열매로서 구원받는다고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열매거든요. 하나의 나무, 예수님의 열매라는 조건 하에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 나무에서 새롭게 맺힌 열매이어야 해요. 내가 노력하는 내 열매는 안 받습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주의 이름의 나무에 열매로서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 근거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두 번째 제가 중요한 근거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멸망당했다 했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은 종말 처리된 것, 종말 처리된 거예요. 종말 처리된 것을 발견하라는 이 말은 그 종말 처리된 중에 누가 포함됩니까? 우리 자신도 포함되잖아요.

제가 아까 예를 다시 한번 들어볼게요. 노아 홍수가 왔을 때 비가 내릴 때 착한 사람은 놔두고 나쁜 사람만 골라서 바게쓰에 물 붓듯이 에이, 물에 빠져 죽어라, 이렇게 온 게 아니잖아요.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에겐 다 왔어요.

나 착한데 설마 나를 주께서 물에 빠뜨릴까. 네가 착하다는 근거, 판단은 누가 내린 건데? 본인이 내리잖아요. 본인의 착함과 선함과 악함의 근거를 본인을 근거해서 하는 거예요. 본인 근거는 안 받습니다. 내가 반성하는 것, 회개하는 것 안 받습니다, 주께서는.

회개라는 것은 다른 세계, 그러니까 주님의 세계에서 나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그 평가가 회개여야지, 내가 반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에요. 사도행전 2장에 유대인들이 회개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어찌할꼬 (2:37). 자기가 할 도리 다 했는데 이제 이런 새로운 성령의 세계에서는 어찌할꼬.

다시 말해서 할 게 없다는 겁니다. 할 게 없기 때문에 할 게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를 부지런히 뭐라도 하게 하셨죠. 지금도 하고 있고요. 뭐라도 해요, 끊임없이. 인간은 잠시도 쉬지 않고 뭐라도 합니다. 딸내미 대학 하면 대학원 하겠다고 설치고. 뭐라도 해요. 대학원까지만 좀 키워주이소. 그다음부터는 내가 돈벌이할게. 뭐라도 한다고요.

모든 생각하는 것이 본인이 행한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어찌할꼬, 안합니다. 어찌할꼬 없어요. 뭐라도 합니다, 인간은. 그러다가 성령이 오게 되게 되면 아, 내가 마음의 할례를 안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내가 죽었다는 흔적을 문신처럼 새겨야 되는데 나는 죽은 적이 없다는 식으로 사람 행세하려고 한 것은 누구한테 보이기 위함이냐? 하나님께 보이기 위함이 아니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예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꾸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과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해요. 술 사주고 뭐 사주고 돈 줘가지고 자꾸 내 친구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냐고 물으면 흔히 그렇게 말하죠. 외로워서 그런다고. 외롭다는 거예요. 우싸우싸 해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혼자서는 외롭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자기에만 빠져있다는 것을 대변해주는 거예요. 나는 내 생각에만 빠져있는 거예요.

자, 그다음에 베드로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을 때 그럼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잖아요. 그럼 예수님은 평소에 이런 이야기를 안 하셨는가? 하셨어요. 하셨는데 사람들이 내가 못 알아보겠다고 그냥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마태복음 24장 봅시다. 마태복음 24장 29절에 보면,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자, 질문 들어갑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했습니까? 그 존재한 이유가 뭡니까? 사람들을 위함이에요, 안 그러면 인자를 위함입니까? 해와 달과 별은 이미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인간만 지금 소외되어 있는 거예요. 들의 짐승이나 모든 꽃도 이 세상의 해와 달도 지금 누구의 조종을 받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조종을 받고 있어요. 예수님과 관계가 이어져 있는 거예요.

인간들만 마귀한테 빠져가지고 잘난 체 해가지고 독립하겠다고 이렇게 하니까 인자와의 연관성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해와 달, 별 이걸 전부다 인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달에 가자. 그거 왜 가는데? 화성에 가자. 가서 뭐 할 건데? 뭐 할 건데? 화성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거기 왜 가는데? 로켓 쏘아 올리고. 그거 왜 쏘아 올립니까? 이야, 인간의 지혜가 이 정도다, 하니 뭐합니까? 교통사고 나서 죽어버렸는데. 죽잖아요, 인간은. 왜 죽는 것은 방비를 못해? 달에 갈 생각은 하면서. 인간의 수명을 그래도 백 년까지 키웠잖아. 성경에 보면 구백 년까지 사는데? 아홉 배나 더 증가해야 돼요, 아홉 배나.

세상 모든 것은 인자 중심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모든 심판과 구원의 근거는 인자가 하신 일에 근거되어 있어요, 인자가 하신 일에. 인자는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백성 만들어서 새로운 공간, 새로운 하늘나라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율법이다 이 말이죠.

그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죠.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어린 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율법의 제사법에 나오는 개념 아닙니까. 어린 양을 희생 드려서 이스라엘의 죄를 없앤다는 그 원칙에 맞추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어요, 하나님은. 봉 준호만 계획이 있는 게 아니에요. 네가 다 계획이 있구나.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는데 인간만 그 계획에서 소외된 겁니다. 자기한테 미쳐가지고. 자기 계획에 미쳐가지고.

계속 보면요. 마태복음 24장 30절,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예수님이 오신 입장에서 드디어 지구라는 것, 해와 달, 별, 예수님이 완성으로 왔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은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불에 타버리는 겁니다.

오늘 내가 여러 번 이야기하는데 다시 이야기하겠어요. 우리가 불에 타고 지옥 가는 것은 우리 행함의 근거가 아니고 예수님의 인자의 일방적 근거에 의해서 지옥이 되는 거고 불타버리는 겁니다. 그게 주의 약속이에요.

31절에,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택한 자들을. 자, 택했다는 것, 이것은 바로 노아 물의 심판 때에 택한 자인 노아에게 은혜가 임했죠.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여기 세상에 없는 것을 찾아라. 그걸 어떻게 찾는가? 하나님이 이 땅에 없는 것을 선물로 줄 때 아, 이게 없는 거구나, 알면서 그걸 받아들이게 돼요.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부정해버리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은 나를 살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신경 쓸 이유가 없죠. 있는 것 또는 인간관계 이것은 어디에 집중되어 있느냐 하면 나 하나에 집중되어 있어요. 나 잘되기 위해서 내 소유가 있고 나 잘되기 위해서 인간관계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나 말고 다른 나를 맞이했단 말이에요. 예수님 형상의 다른 나를 맞이해버리면 우리가 나 자체를 철폐해버리고 나의 있는 것과 내 인간관계, 이것은 그다지 신경 쓸 필요가 없죠. 주께서 오신다는데 주께서 나타나실 때, 뭐 탕수육해서 드릴 일 있습니까? 잡채해서 드릴까요? 그런 거 없거든요.

마태복음 24장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그래서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를. 왜?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예수님 자기 말이기 때문에 성령은 예수님의 마음이잖아요. 예수님의 마음이 오지 않으면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게 되면 예수님 인자 혼자 바빠. 갔다가 왔다가 갔다가 왔다가. 왜 있으려면 진작 있든지 가면 오질 말든지. 갔다가 오겠다는 거예요. 갔다가 오겠다는 말은 하나님이 너하고 상대 안 한다는 뜻이에요. 예수님 나하고 상대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너희들은 관심사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기 자신을 못 버리고 있는 거예요. 갈 곳도 없고 갔다 오지도 않는, 맨 그 자리에 있는 인간 주제에...... 갔다 오는 게 있어야 되는데 갔다 온 것도 없는 인간 주제에 뭐가 그게 귀합니까? 주님은 갔다 왔는데.

34절에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이 세대. 이 세대에 누가 포함되어 있어요? 인간의 모든 시간개념이 다 포함되어 있죠, 이 세대. 오는 세대, 묵시 세계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요. 예수님이 율법을 이루었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안식의 때가 안식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인간의 시간측정으로 보면 이게 하루다 천년이다 규정할 수 없는 그런 세계관. 인간의 시간개념으로 하자면 천년이 하루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그 외에 다른 표현이 있을 수 없어요. 아이고, 천년이네요. 아니, 하루다. 하루네요. 아니, 천년이야. 천년이라면 하루고 하루라면 천년이고.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 의식으로 네가 알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을 감히 규정하려고 들지 말라 이 말이에요.

그다음 35절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여기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라고 했는데 그 천지 안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다 포함되죠. 천지는 없어지겠다. 그러니까 나쁜 짓해서 벌 받는 게 아니고 없어질 세대에 속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다 한꺼번에 일괄적으로 없어지는 거예요. 한꺼번에 일괄적으로.

은혜 받은 사람, 다시 말해서 택함 받은 사람, 주의 약속이 구원과 심판의 근거인 것을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그 사람을 통해서, 베드로 같은 사람이죠 사도니까, 그 사람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 세상에 예수님의 활동이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자기 백성에게.

노아가 밥 먹은 것도 중요하고 노아가 술 먹은 것도 중요해요. 노아가 술 취해서 벌거벗게 했을 때 이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우사스러운 짓이죠. 그러나 노아가 술 먹고 벌거벗은 것조차도 주께서는 뭐로 사용합니까? 주의 계시로 사용해버린 거예요. 뭐로 계시하느냐? 아들 가운데 어떤 아들은 저주 받고 어떤 아들은 복 받는데, 저주 받고 복 받는 기준을 저주 받은 본인이나 구원 받은 본인이 노아가 술 먹고 하체 드러낼 때까지는 몰랐어요. 본인에 근거해서 나는 복 받을 것이다, 나는 저주 안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근거가 노아를 통해서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모르죠.

그러니까 노아에게는 벌거벗은 것이 준비된 근거라면, 제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에 나온 이야기니까요, 그럼 예수님에게 근거는 뭡니까? 노아에게 벌거벗은 일이 참 부끄러운 일이죠.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 중에서 인간이라면 가장 부끄러운 일이 뭐에요? 바로 사형수로 죽는 일이잖아요. 사형수로.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많은 죄, 큰 죄가 아니면 안 죽는 십자가. 저 인간은 더 이상 살려둘 가치조차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결정내린 사형수, 그게 십자가에요. 개과천선할 가능성 전혀 없다. 사람을 죽여도 너무 죽였다. 이 강도 같은 경우. 강도와 더불어서 같이 섞여서 강도 같은 죄목으로 죽은 것이 예수님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인간의 입장에서 가장 부끄러운 일. 가문의 영광입니까, 그게? 강도해서 사형당한 게 영광은 아니잖아요. 그럼 예수님은 그 가문의 영광도 안 되는 거예요. 수치스럽죠.

그 수치가 유일한 근거에요. 그 수치를 성령을 통해서 받아오는 겁니다. 내가 해낼 수 없는 수치를 주께서 나 대신 당했다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수치 수준만큼 내려갈 수 없는 나를 주께서는 함께 내려간 사람으로 이미 수치스러운 존재로서 규정해주시니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너는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대신 말씀해주시는 거예요. 죄인 중의 괴수가 구원받을 정당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수가 구원받을 근거는 없어요. 죄지었는데 무슨 염치도 없죠. 죄 지은 주제에 무슨 천당을 가려고 해요. 그런데 그 염치없는 그것이 주님에 의해서 알려질 때 주께서 일으키신 염치없음임을 알 때 우리는 염치없는 사람 된 것을 복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어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내가 천하의 염치없는 인간이라고 드디어 굳힐 때 비로소 나타나는 열매에요. 그걸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나오는 열매라 했어요, 갈라디아서에서(5:24).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내가 진정 아무것도 아니다. 그다음에 덧붙인다면 주여, 날마다 쉬지 않고 진정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이유를 나한테 통보해주시옵소서. 통보해주시옵소서. 그럼 주님께서 뭐라 합니까? 내일도 기다려봐. 내일 또 회사에 일 터질 거야. 네가 손님한테 우사 한번 당해봐야 아,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개한테 내가 한번 물려봐야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매사가...... 부부싸움 크게 해봐야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내 가치를 위해서 붙들고자 하는 것을 주께서 강제로 손가락을 벗겨서 떼어 내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냥 네가 있는 것은 다 하나하나가 은혜인 줄 알아라. 그렇다고 또 술 먹고 하체 드러내지 마시고요. 물론 은혜긴 은혜지만.

모든 일어나는 일이 나로 하여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일깨워줌으로써 하나님이 너를 십자가의 증인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늘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또 확인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주의 일이 벌써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을 향하여 마음껏 놀려도 괜찮습니다. 주의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도 본인들을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일들만 벌이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따로 관리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더 이상 세상 일어나는 일에 깜짝 깜짝 놀라지 말게 하시고 걱정하지 말게 하시고 두려워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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