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30216a 베드로후서 3장 13절(새 땅의 중심)-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3장 12, 13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지금 있는 하늘과 땅, 그냥 이대로 사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왜 이거 다 걷어내야 되죠? 왜 새 하늘과 새 땅이 따로 필요하냐는 거죠. 기존의 것을 수리해서 하면 되는데. 기존의 하늘과 땅을 수리하면 되잖아요. 깨끗하게 처리하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첫째, 구약의 무대장치는 그 용도가 끝났다. 구약의 무대장치인 기존의 땅, 기존의 하늘, 그 구약에 있는 하늘과 땅으로 만들어낸 모든 무대장치는 용도가 이제 마감이 된 겁니다.
‘구약의 무대장치’에서 구약은 첫 번째 만들어진 창조세계,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첫 번째 만든 그것이 나중 신약에서 보니까 이게 무대장치였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걸 몰랐죠.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하늘과 땅이 예수님이 활동하는 자기 활동 무대장치였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현재 팔레스타인 있잖아요, 이스라엘 땅 그 땅에 계속 개기면 된다고 생각해요. 거기서 기거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시공간은 활용도가 이제 다 끝났어요.
그 근거는 사도행전 1장에 나옵니다 (행 1:9). 예수님께서 구름 타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늘로 가버려요. 땅의 세계와의 바이바이. 그럼 하늘로 가버리면 하늘은 있어야 되지 않느냐. 땅은 폐기하더라도 하늘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예수님 가신 하늘이 어떤 곳이냐 하면, 이게 아버지의 처소입니다. 아버지의 처소로 돌아가요. 아버지의 처소라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언약이 완성되면 나타나는 거예요. 언약이 완성되면 나타나는 곳이 아버지의 세계에요, 아버지의 처소.
이것이 요한복음 14장에 나오죠. 아들과 아버지와 성령과 너희가 하나가 되는 그 처소. 기존의 하늘은 그걸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기존의 하늘과 땅이 왜 무너져야 되는가? 기존에 있는 하늘과 땅에 모두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끝까지 사무쳤던 거예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야 될 두 번째 이유는 언약과 관련되어 있는데, 기존의 땅과 하늘은 사람들이 살던 곳이에요. 사람들이란 아담의 후손들이에요. 아담의 후손들이 살던 곳은 더러워서 안 살아요. 아담의 후손들의 거주지이고 아담의 후손들이 보았던 하늘, 그 하늘의 일월성신, 하늘의 별 등을 통해서 신(神), 우상이죠, 가짜 신을 이미지화시켰던 겁니다. 그런 걸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둘 다 구약을 배경으로 합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이 구약 배경 전체를 한마디로 이렇게 했습니다. ‘어두움’이라고 얘기해요. 이 어두움이 있으니까 신약에 와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두움의 반대말인 뭐가 되죠? ‘빛’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빛의 세계이니까 기존의 하늘에 있는 달, 별, 해 그 빛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건 다 어두움에 속하니까. 햇빛도 어두움이고 달빛도 어두움이고 별빛도 어두움이에요. 그럼 빛은 어디서 나오는가? 빛은 예수님 자체에서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 자체에서 빛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새 하늘, 새 땅은 뭐냐? 간단히 줄여버리면 ‘예수님의 자기 공간의 확대 재생산’이에요. 예수님의 몸, 몸을 두기 위한 자기 공간의 재생산입니다. 확산된 재생산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 몸이 되면 되죠. 예수님 몸의 일부가 되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으로 구성된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야고보, 베드로, 요한 세 사람을 제자 중에 뽑아서 3대 3으로 만나게 해주죠. 땅에 있는 대표자 3명. 그리고 하늘에 속한 3명,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이게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빛의 영광에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때가 낮이죠. 물론 태양이 있었죠. 그러나 예수님 자체에서 발광되는 그 빛은 태양 빛이 아니에요. 태양 빛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자체에서 해같이 빛난다 했으니까 이건 예수님이 태양 빛을 반사 받아서 눈부시게 한 게 아닙니다.
인간이 보는 모든 빛은 파장으로만 인간에게 나타난다고 과학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빛의 내막을 알기 위해 프리즘을 통과시키면 스펙트럼이 나타나요, 빛이. 빛의 스펙트럼이 줄로 쭉 되어 있어요. 쉽게 말해서 무지개가 나오는 거죠. 그걸 조사해서 빛이 보여주는, 빛에 반사된 원소의 성분을 알아내게 됩니다. 과학 쪽에서 별까지의 거리나 그런 것들을 알아내는 방법은 빛의 스펙트럼 띠가 있는데 그 띠를 조사해서 이건 수소가 몇 %이고 헬륨이 몇 %인지 이렇게 알아내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에서 나왔습니까? 기존의 인간이 살던 무대, 인간이 살던 거주지에 제한된 빛이에요. 그래서 구약 성경은 예수님의 활동무대라 했지요. 활동무대를 통해서 해와 달과 별과 인간의 관계는 뭐냐? 인간과 모든 만물은 해와 달과 별이 없으면 못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빛의 발광체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다.’ 그렇게 연관시키도록 한 것이 구약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부지런히 또 따라오셔야 돼요. 역대하 36장 21절,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아까 말씀드린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리겠습니다. 구약은, 구약에서 기존의 땅과 하늘은 구약적인 그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무대장치라 했죠. 무대장치라는 것이 얼마나 모형적으로 알기 쉬운 모형으로 했는지, 애굽 나라 따로 있고 홍해도 있고 요단강 있고 약속의 땅이 이렇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수평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러면 구약을 그 수평 표면을 기어 다니는 개미군단 같은 걸로 보면 돼요. 앤트맨, 개미. 개미군단 같이 평면을 기어 다닙니다. 평면이 올라가면 올라가지고 내려가면 내려가지는 거예요. 곡률에 바짝 붙어서 기어가는 개미처럼 2차원적인 인간 모습을 드러내면서, 거기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550km에요. 부산서 서울보다 조금 더 멀죠. 그걸 40년 동안 헤맸습니다.
40년 동안 헤매면서 그들에겐 어떤 목적지가 있는데 아까 역대하 36장 21절에, 그 땅을 무슨 땅이라 부르냐 하면 ‘안식의 땅’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안식의 땅. 그러면 그 안식의 땅에 도달하지 못하면 고난의 땅이 되고 나그네 땅이 되고 안정적이지 못한 땅이 되겠죠.
그러면 애굽에서 나왔던 그들은 어떤 민족이냐 하면 땅 없는 민족이에요. 그냥 아무 데나 눌러 앉으면 안돼요. 그들은 약속의 땅을 찾아서 수평적으로 나아가는 개미군단. 개미 알죠? 주식에 투자하는 개미. 꼼지락거리면서 계속 가는 거예요. 하늘로 날지를 못해요. 그냥 수평을 기어가면서 그들이 기어가는 그 행적, 그리고 그들의 좌표가 하나님의 언약 구조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안식이라는 땅을 따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안식의 땅을 따로 만들었어요. 이것에 대해 설명이 좀 더 필요하겠죠. 창세기 1장에서 창조가 끝나고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안식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안식했다, 창세기 2장에 (창 2:3). 하나님이 공간적으로 안식했다. 안식했고 시간적으로 하나님이 특별한 시간을 만들었어요. 안식일을 만들었어요.
그럼 하나님의 안식을 설명하는 두 가지 요건으로 공간적 안식과 시간적 안식을 합치면 안식이 설명되겠죠. 공간적 안식은 뭐냐? 안식의 땅이에요. 시간적으로 안식은 안식일의 반복. 안식일을 되풀이하는 곳, 그곳이 어디겠습니까, 구약에서는? 바로 가나안 땅이 되겠죠. 가나안 땅.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율법에 되어 있고 땅은 약속의 땅이니까요.
하나님이 안식을 설명하는 특정 공간, 가나안 땅이라는 특정 공간을 설정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안식의 취지를 나타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다음에… 자, 오늘 첫 번째 중요한 것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땅과 하늘을 만드시고 창조했잖아요. 여기서 질문 나갑니다. 하나님이 만든 땅과 하늘의 중앙지 또는 중심지는 어디겠습니까?
왜 중심지를 묻느냐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중심지가 있어야 돼요. 중심지에서 분출하듯이 나오는 거예요. 마그마가 화산 중앙에서 분출되죠. 마그마, 용암이. 그래서 용암이 밖으로 나오면 그게 화성암이 되잖아요. 마그마가 굳어진 암석, 화성암. 바깥 지표면으로 펼쳐지듯이 흘러나와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떻게 만드는가? 그것은 중앙지를 쳐다보면 돼요. 중심지점을 찾으면 돼요. 중심이 뭐냐? 그것은 기존의 하늘과 땅, ‘구약에 있는 기존의 하늘과 땅의 중심지가 뭐냐?’와 동일한 중심지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 누가 했다고? 하나님이. 이걸 과학에서는 인정 안 해요. 자연은 저절로 되는 것이지, 누가 만든 게 아니라고 보는 거죠, 과학에서는.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하늘과 땅을 누가 만들었다는 거예요. 누가? 하나님이. 증거 대라. 증거를 뭐로 댈 겁니까? 이 하늘과 땅의 증거, 그 중심지.
옛날 중세 때는 그걸 지구라 했어요. 지구라고 했다가 완전히 우사 당했죠. 갈릴레오 갈릴레이한테 걸려가지고. 지구는 돈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고 태양이 중심이라고 반박하고 들이대니까 교회에서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교황이 나서서 잘못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기존에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중심지가 어디냐는 거예요, 중심지가. 성경에 나오잖아요. 중심지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어느 지점에서 인간을 만났느냐와 같은 질문이에요. 하나님이 어디서 만났어요? 약속의 땅에서 만났죠. 약속의 땅 어디? 가나안 땅 넓은데 그중에 어디냔 말이죠. 예루살렘. 예루살렘 중에서도 어디? 예루살렘이 다 너희 집이야? 이렇게 나와요. 예루살렘의 어디? 성전. 성전의 어디? 성전 가운데서 성소, 제단, 지성소 어딥니까? 지성소.
이 새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자가 세상을 아주 떠난 것이 아니고 친히 약속의 땅, 성전의 지성소에서 이 땅의 중심이 있는데 그 중심에 그냥 가만 앉아있는, 취미가 고독을 즐기는 하나님이었습니까, 아니면 거기서 무슨 활동을 했습니까, 그 중심지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중심지에 있으면서 뭘 했죠.
신명기 12장 잠시 한번 보겠습니다. 신명기 12장 5절, 6절에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이렇게 되어 있죠.
자,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는가? 자기 백성과 만난다. 그러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 뭐가 있다는 말이에요? 자기 백성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 백성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 따로 있는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이라고 하죠. 이스라엘.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냥 혼자 노시지. 아니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만나고자 하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날 때, 보통 여러분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날 때, 반갑다 할 때는 뭐를 내밉니까? 손을 내밀죠. 그걸 악수라 하죠. 손을 내밀 때, 한쪽은 내미는데 한쪽은 안 내밀면 이거 곤란하죠. 내가 손을 내밀면 저쪽도 손을 내밀어야 되잖아요. 그렇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하고 만날 때 그냥 빈손으로 오지 말고 뭘 내미느냐? 하나님의 번제, 이걸 내죠. 하나님 백성이 손을 내밀 듯이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도 희생의 손을 내밀고 있다는 뜻이에요. 주님이 내미는 그 손의 본질과 거기에 반응해서 인간이 악수할 때 내미는 손의 본질 사이에 통하는 게 있어야 됩니다. 그 통하는 것이 뭐냐? 희생이에요. 희생. 희생입니다.
희생은 다른 말로 죽음의 가현체죠. 이걸 줄여버리면 하나님 쪽에서 뭘 제시한다? 죽음을 제시하고 거기에 대응해서 인간은 뭐를 내놔야 된다? 자기 죽음을 내놔야 되죠, 자기 죽음을. 그게 하나님 만나는 방법이에요.
그 모션,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구약은 하나님의 옛 하늘과 옛 땅이라는 장치들을 통해서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땅과 이 하늘 장치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중심지에 와 있고 어떤 식으로 자기 백성을 만난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서술하고 있는 거예요. 알려주고 있는 거예요.
참 신기하죠. 용산에 있는 대통령실 거기서 만나는 게 아니에요. 특정 자리에서 만나긴 만나지만 그 특정 자리에 그냥 산 채로 만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이름을 만날 때 산 채로 만나면 안 돼요. 자신의 죽음을 갖고 들어가야 돼요.
자기의 죽음을 갖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기가 죽으면 못 움직이니까 안 되죠. 살아있는 채로 자기 죽음을 갖고 하나님을 만나려면, 자기 죽음을 위해서 대신 죽었던 죽음을 갖고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그게 희생제물입니다. 희생제물. 뭐 돈 들고 들어가고 부자 됐다고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그 점에 대해서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안양 공부에서 어떤 분이 이야기하셔서 제가 깜짝 놀랐는데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11절. 성도는 홀로 있는 게 아니죠. 자, 성도라 하는 것을 아까 제가 강의한 내용대로 정리해봅시다.
성도는 뭐다? 이 기존의 하늘과 땅 사이에, 눈에 보이는 세상 사이에 하나님께서 오셨는데 오셔서 한 일이 뭐냐? 자기 백성을 만나고 또 데리고 가는 일을 하시는데 그때 어떤 자를 자기 백성으로 하느냐를 설명해드렸고 구약에서 신명기 12장에서는 자기 백성 만날 때 번제물을 데리고 온다 했죠.
그런데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성도의 모양새입니다, 신약에서.
고린도후서 4장 14절에 보면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뭐냐? 자기 백성을 살려주기는 하는데 조건이 뭐냐 하면 내 아들과 함께 죽는다는 조건 하에 살려주는 거예요. 이 말은 곧 조건을 살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행했던 그 조건을 살리는 거예요.
주님의 몸 된 성도, 성도를 위해서 주께서 하신 일을 살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우리는 날마다 죽이고 날마다 죽임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조건을 날마다 하나님이 살리는 방식으로 우리를 살린다’ 이렇게 보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날마다 죽이고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은 날마다 살리는 식으로 우리를 살려내시는 거예요. 그냥 우리를 살려주면 안됩니까? 그렇게 되어버리면 하나님은 안 만나죠. 우리를 안 만나요. 대신 죽은 자를 살리기 때문에 우리를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앞장세우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는 거란 말이죠. 우리가 뭔가 드린 것 때문에 살리는 게 아니고,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조건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여러분 고민하지 말고 뭐를 기뻐해야 되느냐 하면, ‘아! 하나님이 살리시는구나.’ 그것 하나만 챙겨도 남는 장사에요. 아,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는구나. 살리는데 어떻게 살리느냐. ‘늙어 죽이는 방법으로 살리시는구나. 우리가 늙어 죽는 것이 이게 사는 길이구나. 사는 유일한 모습이 우리가 죽는 거구나.’ 이걸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14절에, 살려서 뭐할 건데요?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자, 이것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연관시켜봅시다. 새 하늘, 새 땅은 구약의 옛 하늘과 옛 땅 가지고 설명되었던 그 모든 하나님의 뜻이 이미 완성이 된 상태가 새 하늘과 새 땅이죠.
아까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본체에서 나오는 빛의 영광, 그걸로 가득 찬.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에는 해도 필요 없고 달도 필요 없어요. 이제 햇빛, 달빛 필요 없어요. 예수님의 빛으로만 충만한 나라가 새 하늘과 새 땅이에요.
그럼 그건 그렇게 됐고 그 땅에 들어가 사는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가? 백성들은 어떤 식으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아까 신명기에 보면 뭘 갖고 들어간다 했습니까? 제사 드리고 번제 드리고 이런다 했죠.
시편 51편 16절 한번 보겠습니다. 시편 51편 16절, 17절,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받으신다’라는 말 이전에 무엇을 안 받는다고 먼저 전제하죠. 뭘 안 받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상한 심령이 뭐에요? 상한 심령은, 더는 내가 살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상태를 상한 심령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백성은 고물 또는 쓰레기. 하나님께서는 쓰레기를 받으시는 거예요. 뭐 쓰레기가 제사해도 소용없고 십일조 해도 소용없겠죠. 하나님께선 우리의 쓰레기 같은 심령을 받으시는 겁니다. 재활용 확실하게 하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상당히 건방지지 않습니까? 앞에서는 하나님이 제사와 번제를 바치라 했는데, 자기가 뭔데 받지 않는다고 장담해가지고 흘러서 내려오는 그 모든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완전히 차단시키고 ‘그게 아니고 이겁니다’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이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구죠? 바로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합했으면 그 대표자가 등장하는데 그게 왕이에요. 그러면 모세 언약, 제사 드리라 하는 것은 모세에게 준 율법이잖아요. 모세에게 준 율법이 신약 쪽으로 가까이 오면 올수록 점점 더 그 윤곽이 뚜렷해지고 실상에, 진리에 가깝게 확실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율법은……, 모세 율법이 백성한테 준 거죠. 백성한테 주면서 백성에서 뭐가 등장하는가? 제사장만 있는 게 아니고 백성이 있는데 여기서 다윗 이전에 왕의 자리가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왕의 자리가 드러나고, 백성들을 제치고 백성들의 대표자로서 왕의 자리가 등장하고, 이 왕의 자리가 율법과 1대 1 매치를 해서 왕이 완성을 했을 경우에는 이 왕에 예속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이 백성은 왕에게 예속된 백성입니다, 이 이유 때문에 왕이 율법을 이루면 그들은 구원을 받는 거예요.
‘백성이란 왕에게 예속된다. 그럼 왕이 율법을 다 이루면 백성은 다 이룬 혜택 안에 들어있다.’ 이렇게 되죠. 혜택 안에 들어있어요. 그러면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모든 사람은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라’ 이렇게 했는데 왕의 등장으로 율법을 다 지킨 셈이 된다면 이 말은 율법 안에 뭐가 등장하는가, 점선으로? 스스로 율법 자체가 완성으로 응축이 되어버리면 율법 안에 왕의 자리가 (점선으로) 있다 이 말이죠.
율법 안에 왕의 자리가 있고 여기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다윗이죠. 다윗 언약이니까. 다윗이 나올 때 다윗은 자기를 상한 심령으로 본 거예요. 왕이 몇 명입니까? 눈에 보이는 왕(다윗)이 있고 여기 눈에 보이지 않는 (율법 안에 점선으로 된) 왕이 있죠.
이 다윗은 자기가 왕 됨을 믿었습니까, 아니면 자기는 상한 심령의 대표자로서 자기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었어요? 어느 쪽이에요? 자기만 상한 심령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상한 심령이에요. 왜냐하면 죄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출발이. 그러니까 다윗은 원점인 동시에 종점이 되는 거예요. 원점인 동시에 종점.
제가 부산 강의에서 솔로몬 이야기할 때 부산 강의 제목이 뭐였죠? <허무의 강>이죠. 솔로몬이 쓴 전도서에 보면 1장 2절부터 나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허무한 강을 솔로몬은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어요. 그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바람의 일부이고 강물의 일부거든요. 강물이 순환하는 것처럼 이 세상은 허무가 순환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솔로몬이 알아요. 그 허무의 강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부산 강의에서, 허무한 다윗의 확대죠. 다윗 정신의 확대입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니까. 다윗 취지의 확대에요. 진도만 빨리 나간다고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시편 39편 6절, 부산 강의에 있던 본문인데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4절부터, 평소에 안하는 짓 해봅시다. 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평소에 안 하는 거예요.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아, 다윗이 자기를 뭐라고 합니까? 나의 담대함과 대담함과 신앙 좋음을 알게 하소서, 이게 아니죠. 하나님이여, 제 신앙이 이 정도입니다, 라고 그걸 지금 하나님 앞에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자기의 연약함이죠.
5절 봅시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손바닥이죠. 손바닥은 펼치면 있는 것 같지만 손바닥을 다시 접으면 없잖아요. 손바닥이 가리워져서 없는 거예요. 인간은 손바닥 곡률 따라 움직이는 개미 같은 거예요. 인생이라는 그 곡률(공간의 표면)을 따라 살다가 나중에 몰락해버리면 화장터에 가서 죽으면 없죠.
내가 지난 화요일에 장례식장 가서 화장터 찍어왔어요. 찍는데 어떤 사람이 찍지 마라 하는 거예요. 화장터를 왜 찍지 마라 해? 그래서 봤어요. ‘찍지 마세요’ 그런 거 없어요. 음식물 반입하지 말라는 그런 건 있는데 화장터를 왜 찍지 마라 했지? 자기 마지막 모습이 부끄러운가? 없어요.
장례식 치른 사람 나이가 78이거든요. 목사님이신데. 78년 동안 살았다 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기억에 있죠. 그 78년 동안 산 사람 어디 갔습니까? 없어요. 한줌의 재가 돼서 날아가 버렸는데. 부활 동산인가 가서 뿌려져버렸는데. 없다니까요! 78년 살았는데 없어요. 송해가 96년 살아도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애초부터 없어요. 인간은 없는 거예요. 왜? 없기 위해서 태어났으니까. 사라지기 위해서 태어났으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까 고린도후서 4장 이야기했잖아요, 주님과 함께 살아야 돼요. 왜? 주님은 없는 분이니까. 주님이 없어졌잖아요. 주님은 기존의 시공간에서 없어졌으니까요. 새 하늘과 새 땅에 계시죠. 아버지의 처소에 있잖아요. 그럼 우리의 신분은 뭐냐? 기존의 땅과 하늘에서 놀 군번들이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놀 사람들이라고요.
자기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려줄 그런 자들과 함께 사세요. 그러니까 거기서 뭐가 탈락이냐 하면 개는 탈락이에요. 고양이 50마리 이런 건 다 탈락. 없어진 주님, 사라진 주님의 말씀과 함께 사시라 이 말입니다.
그다음 봅시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뭐뿐이다? “허사뿐이니이다” 허사라는 말은 헛것이다. 헛발질, 헛수고했다는 말이죠. 산다는 것 자체가 없어지기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애 키우고 공부하고 돈 벌고 하는 모든 것이 몸부림, 맘부림 치면서 점점 더 인간은 그 에너지에 의해서 닳아지는 겁니다. 사라지는 거예요.
6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그림자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거예요. 뭔가 실체가 없어요.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자기 죽어버렸는데 뭐. 주인이 없는데 주인이 사라져버렸는데 뭐.
이게 바로 율법이 소개하는 왕에 대해서, (율법) 안에 왕이 있다는 것을 비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다윗 언약을 마련하신 거예요. “다윗, 이리 와. 너 왕 해. 왕 해.” “왜요?” “네가 대표로 내가 상한 심령인 것을, 그리고 인생이란 헛방이라는 것을 네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이야기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다윗에게 백성이 있겠죠. 다윗에게 백성이 있다는 말은, 다윗이 헛되다는 말은 백성들도 헛되다는 거죠.
그럼 이스라엘은 다윗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다윗 언약을 통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언약을 통해서 구원받게 되면 여기 다윗 율법 안에 왕이 있어요. 다윗 같은 왕의 지위가 있다고요. 왕이 있다는 말은 곧 왕이 하는 일에 의해 백성이 있겠죠. 주님의 뜻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된 왕에 의해서 백성 만들기’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그 만나는 장소는 어디냐? 만나는 장소는 신약에 오면 어딥니까? 우리 왕 되시는 주님이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그럼 만나는 장소는 뭡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죠.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잖아요. 나오는데 그때 하늘에서 뭐가 내려와요. 만남의 장소가 내려와요. 자, 만남의 장소가 뭐라 했습니까? 아까 그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이 전부 너네 집이야? 군에 가면 이렇게 이상한 소리 하는데, 가나안 땅 중에서 만남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이 위에서 내려옵니다. 시온 성이 내려와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이죠. 농사짓습니다. 바다에 가면 어부들이 고기 잡습니다. 공장에 가면 일하죠. 이거 신기합니까, 신기하지 않습니까? 전혀 신기하지 않아요. 그리고 일 하다가 농사짓다가 아이고, 허리야, 하다가 나중엔 결국 늙어 죽죠. 신기합니까, 신기하지 않습니까? 신기하지 않습니다. 으레 수천 년 동안 해왔던 인간 세상입니다.
그럼 뭐가 신기합니까? 하나님의 상한 심령을, 하나님 앞에 자기가 상한 심령임을 안다는 자의 출현, 출몰.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이에요. 농사를 짓든 고기를 잡든 직장 일을 하든 회사를 하든 파이브 잡을 하든 그게 신기한 게 아니고 뭐가 신기하냐 하면 내가 이 세상 삶을 통해서 내가 헛되고 헛된 일을 한다는 것으로 내가 확인된다는 사실이에요. 이것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다윗이 갖고 있던, 다윗에게 있던 그 마음이잖아요.
다윗의 그 마음은 누구를 만나서 그래요? 성령을 만나서 율법 안에 나 같은 왕이 따로 있다는 걸, 나 말고 진짜 왕이 따로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시편 39편에 보면 나와요. 나의 소망은 장차 오실 여호와께 있다는 거예요.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7) 여호와께서 왕이 되시는 방법입니다.
전체적으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보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기존에 옛 하늘과 옛 땅에서는 세상에서는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게 인생사야. 그럼 골치 아플 게 없어.’ 우리는 휘리릭 남들 그렇게 사니까 그냥 대충 넘어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 보니까 이스라엘 보니까 기존에 그냥 우리가 보고 있는 해와 달과 별, 땅, 그냥 평범한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거기에 이름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만나는 희한한 소식이 성경에 구약에 들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걸 놓쳐서야 되겠어요? 그게 안식이에요, 안식. 안식의 땅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땅. 편히 쉬는 땅. 너무 만족해서 편히 쉬는 땅을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안식의 땅, 약속의 땅으로 설정한 거예요.
그리고 헉헉거리면서 애굽에서 나왔던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언약 따라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서 550km를 헉헉거리면서 죽을 동 살 동, 많이 죽었죠, 어디를 가고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자기들 생각 같으면 어디에 살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다는 거예요. 어떤 특정 방향을 향해서.
어디로 갑니까? 누굴 만나러 가는 거예요? 모세가 인도하면서 이야기하듯이 “가자!” “누구? 누구 만나러?” “하나님 만나러 가자.” “어떤 하나님?”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만나러 가자.” 그게 모세가 율법을 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기는 동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움직이게 한 동기였어요.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장 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3절에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5절에 보면 “또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안식에 못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은 결론적으로 안식이라는 게 있고 거기서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상봉이 분명히 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갖든 관계없이, 판사가 됐든 의사가 됐든 관계없이 안식에 하나님 만날 사람이 있다는 이것을 구약에서 벌써 언급했고 신약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뭐 때문에 살죠? 왜 존재합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보고 뭐 하라고 닦달 내는 게 아니고. 그런 것은 이미 구약 때 해서 실패로 끝난 걸 다 아시죠? 인간이 나서서 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냐하면 인간 중에 어떤 위대한 신앙인을 뽑아봤자 다윗이라는 경계를 못 넘어요. 다윗이 상한 심령이라면 어떤 인간도 상한 심령 아닌 자가 없습니다. 상한 심령 주제에 이미 상해버린……. 상했다는 말은 음식을 냉장고에 안 넣어놨어. 다 썩은 거예요. 부패한 거예요. 곰팡이 핀 거예요. 곰팡이를 하나님이 먹을 수 있겠어요? 안 먹죠.
하나님은 곰팡이 핀 것을 원하긴 하지만 먹진 않아요. 그 곰팡이 핀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아들이 결합되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죽음이 해소가 돼버려요. 우리의 목숨은 죽은 걸로 간주가 되고 날라가버리고 예수님의 목숨이 우리 목숨을 대체해버립니다. 그러면 그 주님의 목숨, 주님의 생명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빛의 세계, 새 하늘과 새 땅, 안식의 땅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럼 이제 두 번째 시간 하겠는데 두 번째 시간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겠다고 준비한 그 안식의 땅에서 주의 이름이 있는 곳에서 왜 인간들은, 예수님 빼놓고 말이죠, 자기 힘으로는 왜 그 주님을 만날 수가 없느냐? 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느냐? 그 점에 대해서 두 번째 시간에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수치스러워서 그래요. 더러워서 그래요. 새 하늘과 새 땅의 그 뉘앙스가 뭐냐? 맑고 깨끗함이에요. ‘맑고 깨끗한’ 그게 노래 가사에 있어요.
<겨울아이>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겨울에 태어난 사랑스런 당신은
눈처럼 맑은 나만의 당신
하지만 봄 여름과 가을 겨울
언제나 맑고 깨끗해
맑고 깨끗해. 맑고 깨끗한 뉘앙스 보세요. 뭐가 없습니까? 티끌이 없고 깔-끔하죠. 마치 눈이 확 온 거기에 어린 아이가 뛰놀게 되면 그것도 12월 생일을 가진 애가 뛰어놀면 뭐가 됩니까? 겨울아이 되죠. 맑고 깨끗해. 물론 12월에 태어났다고 다 맑고 깨끗하겠습니까만.
맑고 깨끗하다는 이 말은 기존에 주님이 주신 이 세계가 안식의 세계가 인간들로 인하여 추잡하고 더럽고 지저분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냄새나는 인간들이 놀던 그 땅과 하늘, 나는 거기서 놀기 싫다고 그걸 폐기처분 해버리는 거예요.
폐기처분할 때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율법이고 율법의 정신은 우상이죠.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게 뭐냐? 이것 하고 10분 쉽시다. 다른 신의 특징은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악수할 때 내민 희생이 없단 말입니다. 하나님 쪽이요. 인간의 희생 말고, 인간이 자기 목숨 바치는 것 말고 하나님 쪽의 희생이 없는 것, 어린 양의 피가 없는 것이 바로 다른 신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희생만 하지, 하나님의 희생은 왜 거부하느냐? 하나님이 희생했다는 말은 이건 자기 희생과 자기 의를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게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려버린 거예요. 인간은 분노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 전해도 인간은 분노하기 때문에 안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분노하는가? 10분 쉬고 합시다.
서울의존강의20230216b 베드로후서 3장 13절(새 땅의 중심)-이 근호 목사
다윗이 왕이죠. 왕인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했던 일이 뭐냐 하면 전쟁이었습니다. 전쟁할 때 명분이 뭐냐 하면 더럽다고 전쟁했거든요. 이방민족은 더럽다고. 왜 더러우냐?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언약이 없으니까.
그래서 성경에 보면 다윗이 가는 곳마다 이겼다고 되어 있어요. 다윗이 실력이 좋은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셨어요.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니까 다윗은 암몬과 전쟁할 때도 하나님께서 늘 이기게 하시니까요. 그래서 다윗이 전쟁할 때 우리아 장군이 나가고 언약궤도 거기 있죠. 다윗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어슬렁거리고. 어쨌든 다윗이 왕으로 있는 한 전쟁은 계속 승리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룩한 내 백성이라 해요. ‘내 백성’ 앞에 ‘거룩한’ 거예요. 거룩하다는 것은 맑고 깨끗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맑고 깨끗한 백성 이스라엘. 그러면 주변 이방민족은 하나님께서 거부하는 거예요. 우상을 섬기는 것은 기본이고 추잡하고 더럽다고 본 거예요. 추잡하고 더럽다.
자, 인간이 추잡하고 더럽다 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이냐? 무슨 기준이어야 한다는 거냐 하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된 요건이 ‘더럽다’와 ‘깨끗하다’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된 것.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이 말이 맞는가, 틀린가 한번 보세요. ‘율법대로 살면 깨끗하다’ 맞아요, 틀려요? 율법대로 살면 깨끗하다. 이거 틀린 말입니다. 이거 틀린 말이에요. 율법대로 살면 깨끗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드러나면 깨끗해지는 거예요. 율법이 드러나게 되면 깨끗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 드러난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여기 있다. 여기 계시다.’를 드러내는 게 깨끗함이에요. 이게 성스러운 것이고. 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아까 고린도후서 4장 봤죠?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드러난다? 그리스도가 드러나면 그걸 가지고, 성도(聖徒), 거룩한 사람. 깨끗한 사람. 12월달에 안 태어나도 맑고 깨끗한 사람 되는 거예요. 눈처럼 맑고 깨끗한.
전쟁의 기준이 윤리 도덕이 아니에요. 윤리 도덕이 아니고 ‘내 안에 하나님 있다’ 이 전쟁이에요. 내 안에 하나님 있다, 이 전쟁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 있다’ 하면 승리 주는데 여기 ‘나’가 문제에요. ‘내 안에 하나님 있다’ 할 때 이 ‘내’가 어떤 ‘내’냐 하면 쓰레기죠. 쓰레기이고 상한 심령. 상한 심령 안에 하나님 계시면 그게 승리가 되는 겁니다. 이게 다윗 언약이에요.
그 다윗 언약에 그러한 내용이 사사기부터 나와 있으니까 다윗 언약 이전에 사사기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사사기 6장 13절요. 여기 사사 기드온이 등장합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방금 제가 설명한 게 그대로 나오죠. 기드온이, 하나님은 우리 편에 속한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고 적들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승리는 누가 승리해야 되고 누가 강건해야 돼요?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은 이겨야 되고 적들은 망해야 되는데 그 당시에 기드온이 보니까 미디안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이겨버렸어요.
그러니까 기드온이 도대체 자기가 알던 하나님의 법칙과 틀려지니까 의문을 제시하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와 함께 있는데 어찌하여 미디안이 우리를 이렇게 공격합니까?” 뒤에 붙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렇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냈을 때 그 기적이 우리는 지금도 그것이 유효하고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은, 옛날 애굽에서 나오게 한 기적이 지금도 계속 이어져 나오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라고 기드온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기드온의 뭐가 문제가 되겠죠? 기드온은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 하나님의 기적을 누가 방해하느냐? 이방민족이 방해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이 함께 있는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생각을 기드온은 지금 상상도 못합니다.
전쟁을 해야 되는데, 이스라엘이 전쟁을 승리하잖아요. 하나님이 누구한테 질 리는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은 져버린 거예요. 도대체 어디서 사달난 거예요? 하나님을 이길 신은 없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와 붙어도 진다. 뭐가 문제입니까?
‘이스라엘이 한 전쟁은 이스라엘 바깥과 한 전쟁이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이다’, 그 사실을 말해주는 거예요. ‘뭐 교회 다녔는데. 교회 다니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해서 구원하겠지.’ 이런 사고방식이 뭐가 문제에요? ‘내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나와 함께 있으니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겠지.’ 자, 이게 기드온 생각이에요.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싸운다는 생각을 그 사람은 못하는 거예요. 자꾸 자기가 신자라고 우기면서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싸운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 분노하는 경우가 있어요. 분노하는 경우가 뭐냐? 우상을 섬길 때 분노합니다. 우상을 누가 섬깁니까? 우상 믿는 사람이 섬겨요? 그건 기본이고요. 우상밖에 없으니까 우상 섬기죠. 우상을 섬긴다고 화내는 그 자리는 이방민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예레미야 44장. 여기 분노가 너무 많이 나와요. 찾지 마세요. 찾는다고 시간 더 가니까. 6절부터, “나의 분과 나의 노를 쏟아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를 살랐더니” 하나님의 분노를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하는 예루살렘에다가 터트려버린 거예요. 예루살렘에 지진이 일어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여기 예레미야 44장에 여인들이 나오는데 24절, 25절.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이 분노해요. 여러분들이 그 점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상 좀 섬기면 어때요? 돈 번다고 일한다고 피곤한데… “아이고, 재민데 올해 운세나 한번 보자.”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집사님이 그런 거 봐도 됩니까? 점 봐도 됩니까?” “좀 보자. 왜? 응? 좀 보면 어때?” 아니, 안 그래도 지금 사는 게 스트레스 받아 힘들어 죽겠는데. 멀미도 나고 지하철도 못 타고. 그 가운데 돈벌이하려고 지금 애쓰고 있는데 좀 보자, 좀. 속 터져서…. 우리 애는 어떻게 되고 취직 할 건지, 결혼은 할 건지 뭐 속 터져서 한번 보면 어때? 그것도 못 보냐? 하나님이 용서해준다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한다면서? 예수 믿어줄게. 주여, 믿습니다. 됐습니까? 믿습니다, 믿습니다. 좀 봅시다, 점.
지금 여기 그게 나와요. 24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다시 모든 백성과 모든 여인에게 말하되 애굽 땅에서 사는 모든 유다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와 너희 아내들이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이루려 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서원한 대로 반드시 이행하여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전제를 드리리라 하였은즉 너희 서원을 성립하며 너희 서원을 이행하라 하시느니라”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할 때는 만사가 형통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 말 듣고 하늘 여신을 안 섬기고 여호와를 섬기니까 그날부터 조져놨다는 거예요. 사는 게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래도 우상 안 섬기게 돼 있나, 이 말이에요.
결국 결론이 뭐냐? 하나님 뜻대로 믿어봤는데 되는 일이 없어. 그래서 다시 우상을 섬기니까 만사형통해. 하나님이 좀 말리지 그래. 왜 안 말렸어? 우리가 신도 아니고 뭐 연약한 인간인데 연약하고 유약한 인간이 우상 섬기면서 뭔가 살아보려고 애쓰는 거 그거 가련하지도 않나? 그럼 하나님이 그렇게 보기 싫으면 좀 도와주던지. 우상 섬기기 전에 팍팍 돈을 주던지. 어렵게 해놓고는 우상 섬기지 말라. 어떤 이익도 없고 보상도 없으면서 우상 섬기지 말라 하면 이게 통하냔 말이죠.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거 우상 섬기고 망하자. 이렇게 배짱으로 나올 게 뻔한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분노한다. 그 태도에 대해서 분노한다는 거예요. 이게 어제 설교에 나온 내용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우상 안 섬기면 복 주고 우상 섬기면 저주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우상 안 섬길 위인이 없다는 것을 확인차 주님께서는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준 이유는 ‘모든 인간은, 이방이든 이스라엘이든 관계없이 다 예외없이 모든 인간은 전부다 우상숭배자가 되어서 마땅히 저주받아도 할 말이 없는 작자들이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하나님하고 노닥거리고 거래하라고 준 게 아닙니다. ‘하나님, 잘하면 복 줄 거죠?’ 지금 하나님은 우리의 거래대상이 아니에요. 우리 주제파악을 못해서 그래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다행한 점은 인간의 바닥까지 다 뜯어냅니다, 바닥까지. 세무서에서 와가지고 분명히 저 집 세금 안 냈는데 잘 먹고 살더라. 뭔가 있다. 그래서 출동해가지고 뜯어, 바닥! 바닥 뜯으니까 바닥에서 막 금괴가 나오듯이. 주님께선 우리의 바닥까지 다 뜯어버려요.
도대체 인간은 뭘 믿고 그토록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도 안 믿고 지독하게 안 믿는 이유가 뭐냐? 인간은 참 징글징글하다. 독하다, 독해.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을 안 믿기로 아주 독하게 마음먹는 그 근거가 뭐냐? 그게 이스라엘 내에 하나님의 적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여자의 후손의 적은 누구입니까? 뱀의 후손이죠. 뱀이 들어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악마가 하나님을 거부하도록 뒤에서 부추긴 거예요. 그 악마가 광야에 약속의 땅에 등장하잖아요. 그래서 성령께서, 악마가 예수님을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하도록 정면으로 만나도록 주선을 해준 거죠. 마귀가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마귀의 자식이 바로 바리새인이고요.
자, 사사기 한번 봅시다. 기드온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같이 이야기하니까 미디안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맞아도 싸다 이 말이에요. 그다음에 사사기 7장 2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계속 떠나지 않습니다.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한계를 보여주고 문제점을 보여주면서 떠나는데 7장 2절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 보면 이스라엘이 누구를 거스른다고요? 여호와를 거스르죠.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가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이에요. 미디안 그거는 보조 엑스트라들이에요. 지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만나죠. 미디안 백성 구원하려고 하나님이 일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백성을 자기 백성답게 다루기 위해서 미디안 군사를 뒤에 그냥 잡아당겼다 집어넣었다 이렇게 보조 맞추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는 거예요. 구약의 모든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무대장치니까요.
기드온이 모집을 했는데 몇 명 왔느냐? 삼만 이천 명 왔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삼만 이천 명 중 이만 이천 명을 돌려보냈어요 (삿 7:3). 왜? 숫자가 많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숫자가 많다는 건 도대체 얼마가 되어야 하나님의 적정 숫자에 해당되느냐.
7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삼백 명이라 하는 것은, 거기에 남은 자가 만 명이었는데 만 명 중에서 가장 적은 숫자의 행동을 하는 무리가 뭐냐. 물을 핥아먹는 사람, 이 사람이 가장 적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개처럼 물을 핥아먹는 자체가 흔한 행동이 아니거든요. 드문 행동이에요. 가장 숫자가 적은 것.
그러니까 여러분, 처음부터 300명을 모집했습니까, 아니면 32,000명 왔습니까? 처음에 300명이 아니고 32,000명이었습니다. 32,000명이죠. 32,000명 중에서 22,000명 달아나고 10,000명 남았죠. 그럼 300하고 10,000 비교할 때 뒤에 동그라미 두 개 뗍시다. 떼면 3 남고 여기 100 남았죠. 그러면 100-3=97명이죠.
그러니까 100명 중에서 97명 돌려보낸 거예요. 달랑 몇 명 남았어요? 3명 남았어요. 일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3명 남고 97명이 집에 갔다는 말은 인간들끼리 결집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거예요. 이걸 무슨 전쟁이라 하느냐 하면 사람이 할 수 없는 전쟁을 하나님께서는, 7장 7절에 나와 있는데 그걸 ‘붙이심의 전쟁’이라 해요. 붙여주시는 전쟁. 붙이시매 전쟁.
오늘 베드로후서 3장 본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언급했어요.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하면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들어갈 수 있느냐. 지금 우리가 그 문제를 계속 구약의 하늘과 땅을 가지고 하는 겁니다. 구약의 하늘과 땅에서 그 약속의 땅은 그냥 가만히 있는 고정된 땅이 아니고 거기서 쉴 새 없이 뭐가 일어나는 땅입니까? 붙여주는 전쟁이 일어나는 땅이에요.
약속이라는 것이 이 땅에 와서 ‘자, 여기 약속의 땅이다. 들어가라.’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그 땅이 전쟁터에요. 왜? 기존에 무슨 세력이 있기 때문에? 뱀의 후손, 악마가 그 땅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악마의 족쇄에서 못 벗어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모집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뭐를 치고 뽑아내야 돼요? 그 악마의 힘 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하여금 그걸 뽑아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만나고 그 백성을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뽑아 나올 때에, 그 뽑히는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단결하면 돼요, 안돼요? 단결하면 안 되죠. 모세가 처음에 독립운동 실패한 게 그거잖아요. 애굽의 힘에 힘으로 대항하다가 실패했잖아요. 실패했어요. 그 힘에서 뽑혀 나오는 것은 우리 개인이 하질 못합니다. 단체가 하질 못해요. 이것은 주님만 하십니다.
주님이 어떤 차원에서 하느냐 하면 “이 추잡하고 더러운 것들아, 나가!” 이런 방식으로 뽑아내는 거예요. 그러면 “아, 추잡하고 더러운 거? 그럼 나네. 나도 지옥 가겠네.” “너는 잠깐 거기 서 있고. 잠깐 스톱! 서!” “저 더러워요. 저 상한 심령입니다.” “그러니까 이리 와. 너는 합격이야. 너는 카투사로 빠져. 전방 가지 말고.” 카투사 들어가니까, “너 누구 빽으로 왔나?” 주님 빽으로 왔지 뭐. 누구 빽으로 왔겠어요.
전쟁하는 것은, 미디안하고 전쟁하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내부전쟁이 중요해요. 기드온과 그리고 하나님과의 전쟁. 하나님의 방식은 붙여주는 전쟁이에요. 붙여주는 전쟁은 내가 가진 힘으로 내가 구원될 수 없음을 그대로 인정하는 겁니다. 그대로.
100명 가운데 97명은 집에 가버리고 3명 남았죠. 그럼 320명 가운데서 3명 남았잖아요. 그렇죠? 동그라미 2개 뗐으니까. 처음부터 3명 뽑았으면, “어이, 삼총사. 우리는 하나님의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삼형제다. 크로스!” 이래가지고 자기끼리 힘을 단결하겠는데 처음에는 320명 왔는데 차 빼고 포 빼고 다 빼버리고 덜렁 3명 남아있으니까 그들의 느낌은 무슨 느낌이겠습니까? 이 전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겠죠.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간의 마음 상태로 집어 넣어봅시다. 그러면 다윗의 고백이 나오죠. 나는 상한 심령이다. 썩을 대로 썩은 상한 심령이라는 그 상태가 바로 하나의 외부적인 전쟁 형태로 나타난 게 달랑 남은 300명이에요.
300명 용사요? 그게 용사입니까? 무슨 그런 용사가 있어요. 300명 용사 아닙니다. 300명 찌꺼기죠. 300명 찌꺼기에요, 찌꺼기. 찌끼 같은 거예요. 자체적인 아무 능력이 없어요.
그러면 300명이 적들을 어떻게 하느냐? 135,000명이 300명하고 붙어요. 32,000명 정도가 아닙니다. 미디안 적들은 135,000명이 있어요. 135,000명 대 300명. 이것도 숫자 헤아려봅시다. 135,000명 대 300명. 뒤에 동그라미 2개 뗍니다. 그럼 몇 대 몇입니까? 1350 대 3. 3으로 1350을 나누면, 460대 1.
이게 지금 싸우자는 이야기에요? 만나서 어디 미팅합니까? 노닥거리는 거예요? 이게 뭐에요, 이게? 아니, 누가 누구를 죽입니까? 나중에 손목에 힘이 없어서 못 죽이겠다. 무슨 힘으로 죽입니까? 죽이는데 어떻게 죽이느냐. 미디안 군사가 자기들끼리 자기들 칼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죽이는 방법을 썼죠.
이런 방법을 사전에 300명한테 기드온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적들은 자체적으로 폭파되게 되어 있어요. 지진이 일어나서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이 미디안 군사야, 너희들 저주받아라. 퉤퉤, 침 뱉고 돌 던지고 이런 거 없어요. 그냥 놔둬. 하나님이 안 만나주는 민족은 자체적으로 폭파 중입니다. 폭파해도 안 무너져요? 3,000회 여진이 일어나죠. 7.2, 7.5 여진으로 흔들어서 완전히 다 무너뜨립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은 무너지기 위해서 운영되는 세계에요. 무너지기 위해서. 이유가 뭐냐? 그들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요령 부린다고 해요. 삶의 요령을 부리는 거예요.
사사기 7장 12절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衆多)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 미디안 사람의 숫자가 많은 것, 거기다가 아말렉 사람까지 동원해서 아말렉, 미디안 사람의 그 연합체 숫자가 뭐 같다고 했습니까? 무엇의 중다함 같다고 했습니까? 메뚜기. 그냥 메뚜기에요. 그들은 그냥 메뚜기로 보시면 됩니다. 지금 이 세상 사람을 그냥 메뚜기로 보세요. 메뚜기는 볶으면 맛이나 있지.
그러니까 이 세상은 체로 걸러내면 삼백 명만 달랑 남고, 참, 삼백 명+1이죠, 기드온도 있으니까. 삼백 명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다 저주의 독약을 마시고 같이 지옥 갈 자들이에요. 이게 함께 섞여 있으니까 대단해 보이지만 주께서 복음의 언약의 체로 떠내게 되면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복음 안에 들어온 귀한 신분은. 어디 개돼지하고 비교해요? 비교가 안 되죠.
삼백 명에게는 어떤 무기가 없습니다.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게 한 거예요. 이것은 횃불 들고 항아리 들고 나팔 분 본인들도 납득이 안 되는, 오늘 납득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게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이게. 미쳤지, 이걸 왜 들고 있어.
하나님의 붙이시는 그 전쟁에 참여 된 하나님 백성의 특징은 내 인생을 내가 평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내가 괜찮은 인생이다, 못한 인생이다 라는 평 자체에서 벗어나게 만들어버립니다. 다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본인도 납득이 안 될 정도에요.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오히려 그게 의심이 될 정도에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계속 그거에요. 새 하늘과 새 땅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전쟁 없이는 못 들어가요. 누구하고 전쟁이냐? 마귀하고의 전쟁이죠. 마귀가 어디 있는데? 마귀는 바로 인간 스스로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살도록 부추기기 때문에 내 힘으로 열심히 한번 살아보자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마귀에 속한 자들이죠, 그게.
여기서 나온 결론은 뭐냐? 성도란 자기를 위한 전쟁을 못하는 사람. 이미 상한 심령인데 무슨 전쟁을 해요? 상한 심령이 전쟁한다고 인생살이 나아지겠어요? 아니에요. 자기 전쟁을 못하는 사람이에요. 아니, 할 필요 없는 사람. 그러고 보니까 오늘 안 온 사람들 많네요. 뭐 자기 전쟁 때문에 참석 못하시는가.
나를 위한 하나님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걸 알아요. 나를 위한 하나님은 없어요. 나를 사용하는 하나님은 있어요. 그러나 나를 사용한다고 내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나를 지켜주지도 않고 나를 위하지도 않고. 오히려 기존에 있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우리보고 촉구합니다. 이 땅의 삶을 네가 접어라. 포기하라.
주께서 우리를 이끄시는데, 우리를 통해서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를 이끄시거든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하나님이 벌이는 전쟁을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걸 느끼면서 살게 만들어요. 우리를 조용하게 살게 하지 않습니다. 느끼면서 살게 하죠. 느끼면서 살게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포기하게 만들죠. 이 세상에서 승리자 되지 않게 하죠.
그럴 때 우리가 육신적으로 느끼는 것은 뭐냐? 뭘 느끼는가? 수치감을 느낍니다. 남보다 약하고 남보다 건강하지 못하고 돈 없고 가난하고 출세 못하고 권력 없는 것을 우리는 그걸 수치라고 여깁니다. 이게 바로 악마에 길들여진 자녀 모습이죠. 우리의 모습이죠.
그런데 제가 아까 새 하늘과 새 땅을 뭐라 했습니까? 맑고 깨끗하죠. 수치가 없죠.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의를 아나니 하나님의 의를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의 가난과 이런 것들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더 큰 부끄럽지 않은 것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느끼지 않는 그 틈새에 그런 것들을 느끼기 마련이에요. 아이고, 지금까지 내가 이 나이 되도록 뭐했노.
결국 전쟁은 뭐냐? 자기가 자기를 수치스러운 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수치의 대상으로 보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하는 거죠. 부끄럽사옵나이다. 뭐가 부끄러운데? 너 복음 없나? 하나님의 의 없어?
네가 네 수치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전쟁 기준이 아니고 마귀가 준 그 기준을 계속 쥐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세상의 기준을 계속 쥐고 있으니까 버젓이 내세울 게 없다는 게 부끄러운 요소가 돼버린 거예요.
주님께서는 너한테 천하의 뭐가 와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세상적으로 부끄러운 사태에 우리를 푹 젖게 만드는 거예요. 적시게 만들어버려요. 남들이 와서 “너 같으면 벌써 난 자살했다. 우에 그리 사노.” 이런 식으로.
어떤 정신과 의사가 이런 이야기했답니다. 자기가 14년 동안 정신과 공부하면서 자살 시도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한테 왔는데 자살 직전에 되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 자기가 물었대요. “자살하려다 되살아나니까 기분 어떻습니까?” “아이고, 사는 게 이렇게 좋고 다행스러운지 몰랐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려 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에요.
왜 죽느냐? 부끄러워서 죽는 거예요. 부끄러움 없이 그냥 이 땅에 살면 되는데 부끄럽다고 자아를 도피하는 거예요. 자기를 마지막 숨기는 방법이 마포대교, 번개탄. 남들한테도 부끄럽지만 내가 나 보기에도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느냐 뭐 이런 식으로.
그러나 그 사람은 굳이 자살해야 죽은 자가 아니라 죽기 전부터 이미 죽은 자에요. 하나님이 악수를 내민 쪽이 아니라 이 말이죠. 자, 또 다 잊어버렸죠. 하나님께서 악수를 내밀 때 뭘 내밀었다 했습니까? 희생이죠, 희생. 하나님 쪽에서 내민 건 희생입니다. 희생에 담긴 의미가 뭡니까? 대신 죽으심이잖아요, 대신.
부끄럽냐? 나도 부끄럽다! 이런 거요. 주님도 부끄러운 죽음을 죽었잖아요. 주님을 믿는다는 말은 주님의 부끄러움을 믿는다는 뜻이거든요. ‘저 부끄러움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그게 성도의 소원 아닙니까? 저 부끄러움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주님의 당당함에 같이 참여하고 싶다. 그게 아버지의 뜻이니까요. 성령의 뜻이니까요.
뭐 성경에 새 하늘과 새 땅 나오니까 뭐 하여튼 신났어. 우리가 뭐 키즈카페 왔습니까? 이제는 뭐 둥둥 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심판. 부산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저주가 가득 차 있어요, 이 세상은.
저주가 가득 차 있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성도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희생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데 그들은 마치 돈이 없어서 부끄럽고 이 땅에서 성공 못해서 부끄럽다고 여기는 것, 세상은 그게 전부입니다. 남한테 내세울 만한 버젓한 게 없다고 좌절하고 그것도 있으면 자랑질하는 거예요.
검찰, 검사들? 몽골에 땅 사서 돈 벌어가지고 검찰청 전부 다 완전히 날려버렸죠. <법쩐>이라는 드라마 끝났어요, 12회로. 몽골에 땅 투기하는 사람이 검찰을 완전히 쇄신하는 그런 드라마 내용입니다.
썩어빠진 검찰. 썩어빠졌다니, 누가 누구를 썩었다고 한단 말입니까? 이 땅에는 안 썩은 자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희생하신 겁니다. 십자가 죽으신 거예요. 인간다운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 앞에서 너무 기죽지 마세요.
주님이 이 땅에서 수치스럽게 떠났잖아요. 이건 뭐냐? 사람이 살던 땅을 내가 기피하노라, 이 뜻이에요. 사람이 살던 땅을 내가 기피한다. 더러워서 못 살겠다. 인간 사는 동네를 내가 기피한다. 이게 왕의 땅입니다.
자, 방금 이야기한 것을 성경으로 근거를 찾아봐야겠죠. 에스겔 46장 16절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왕이 만일 한 아들에게 선물을 준즉 그의 기업이 되어 그 자손에게 속하나니 이는 그 기업을 이어받음이어니와”
하나님에 의해 새 성전이 마련되게 되면 그 새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그 양쪽에 무슨 특정 토지가 주어지느냐 하면 왕의 토지가 주어집니다. 그 왕을 에스겔에서는 다윗이라 해요, 다윗. 다윗으로 오신 왕이, 왕이 오셔서 성전을 일으킨다.
아까 우리가 강의 들어보면 대충 윤곽이 드러나죠. 성전은 뭡니까? 하나님이 안식했다는 것을 완성했다는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로 만든 것이 성전이라 했죠. 주의 이름이 있는 곳에.
그런데 그 율법의 완성, 주의 이름으로 완성된 것을 보니까 그게 다윗이 알고 있던 바, 누가 왕이에요? 다윗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새로운 왕이 아니고 율법 안에 계신 분이 다윗 같은 진정한 왕이 되는 겁니다.
다윗 같이 왕이 된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다시 또 정리해드리면, 왕이 된다는 것은 백성을 새롭게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이 왕에게 있다는 말이에요. 세상에서 백성의 대표자가 왕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한테는 백성은 없고 왕만 있어요. 왕이 백성을 새롭게 모집해나가는데 그 모집 방식은 왕에게 구성된 모든 것 다 이루었음을 이렇게 적용시켜서 왕이 백성 되게 하는 거예요. 적용시켜서 백성 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약속하기를, 내가 다윗을 너희 왕으로 보내겠다고 했거든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나와요. 37장 24절,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이게.
백성보고 닦달 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 안에 준비된 왕을 주면서 그 율법을 다 이루신 왕이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데 그 모집하는 방법이, 다윗이 하나님의 왕 앞에서 뭐라 했습니까? 자기가 상한 심령이라 했죠. 하나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하지 않아요. 상한 심령을 원한다고요. 그 상한 심령 되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래서 멀쩡하게 따라오는 사람 놔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잃어버린 양 모집할 때 그 모집하는 방식이 뭐냐? 전쟁이에요. 치열한 전쟁입니다. 뭐 양들은 그것도 모르죠. 그런데 목자는 전쟁 벌이고 있는 거예요. 가짜들과. 아이고, 예수님이 뜨면요. 악마가 모든 역량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못 듣도록 저지하잖아요.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고 복음 못 전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권세를 다 동원해서 저지합니다.
왜 저지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 세상은 이미 저주받도록 확정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8장 13절의 말씀인데 그냥 제가 말씀드릴게요.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땅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거 뭐 세 번씩이나 저주를 해버리면 끝난 거죠. 땅에 있는 자에게.
그럼 하늘은 멀쩡하지 않느냐. 12절에 보면 “네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하늘에 있는 해 삼분의 일, 달 삼분의 일, 별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땅으로 떨어져버리죠.
옛 땅과 옛 하늘은 다 찌그러져요. 뭉개져 버리고 찌그러져 버려요. 여기에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예요. 지진도 일어나고 구호물자 보내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공격하고. 우리는 그걸 매일 뉴스로 보고 있죠. 이재명 영장 받냐 안 받냐 지금 그거 하고 있고. 윤석열은 지금 기름값 보조해준다 하고.
우리가 일상으로 대하는 거. 아니, 사는 게 그렇지 뭐. 사는 게. 이 땅에 태어나가지고 살만큼 살다가 늙어서 요양병원에서 늙어 죽으면 그만이지. 이게 지금 하나님의 분노를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거예요. 구약에 있는, 구약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무대장치로 만들어준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완전히 배제해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백성 만나러 온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거기서 자기 백성을 만나요. 그러나 사람은 그런 건 안중에 없어요. 왜? 마귀가 그런 소리를 못 듣게 만들어버렸거든요. 못 듣도록.
나 하나 건사해서 밥 먹고 살만큼은 이렇게… 연금? 연금 뭐 꼭 필요한가. 한 달에 연금 500만원만 주면 되지. 그런 식으로 인생 살아가고 나머지 할 일 없으면 크루즈 여행이나 어디 놀러 다니며 사는 그게 인생이지. 이게 마이웨이지 뭐. 내 인생 이렇게 살았다, 내 방식대로.
그것도 뭐 상담해준다고, 그러지 말고 착실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착실하게 살라고 하는 그게 상담이 되겠어요? 자살하지 마시고 다시 돌아오세요. 자살 실패한 것도 죽음이고요. 자살 성공한 것도 죽음이에요. 아이고, 큰일 날 뻔했습니다. 뭘 큰일 날 뻔했어. 그냥 살아있어도 큰일이고 죽어도 큰일인데. 자살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안식의 때에 참여 못하는 게 자살보다 더 무서운 일이죠.
궁극적으로 주님이 하시는 전쟁의 방식을 몰라서 그래요. 전쟁의 방식은 우리보고 전쟁하라 하지 않고 예수님 한분의 전쟁에서 이미 확정되었어요. 이걸 다시 쓰겠습니다. 자,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 생애의 자기 확장이에요. 예수님 생애의 자기 확장.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번듯하게 오신 게 아니에요. 죄인의 모습으로 왔잖아요. 죄인의 모습으로 와서 죽으시고 부활해서 영광 받았죠. 그 영광스러운 나라, 그게 새 하늘과 새 땅이에요.
그 안에 뭐만 남겨져 있습니까? 예수님의 일대기가 남겨졌고 그 일대기가 누구를 이겼기 때문에? 누구 때문에 고난받고 누구를 이겼습니까? 마귀 때문에 고난받았고 그 마귀가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그 죽음이 사흘 만에 성령에 의해서 다시 살아남으로써 그야말로 ‘승리했다. 다 이루었다’가 성립되도록 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분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왕이죠. 왕만 덜렁 있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에스겔에 의하면 왕은 백성의 모집에 나서죠. 그래서 에스겔 46장에 보면 왕의 처소, 영토가 있어요. 중간에.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생명의 물이 나오고요. 에덴동산처럼 물이 나오고 48장에 보면 각 지파마다 왕 중심의, 왕에게 배정받고 할당받은 그 땅 중심으로 해서 열두 지파가 거기에 같이 모여 사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 제일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여호와 삼마 (겔 48:35).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다는 거예요. 자기 백성들 가운데 계시는 거예요. 이걸 처소 또는 성전이라 하는 거예요. 그게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거기에 주님의 빛 된 영광성이 나오니까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거기서 물이 흘러요. 22장에 보면 생명수가 흘러요, 에스겔 47장처럼. 흐르고 거기서 가로수로 생명 나무가 환하게 펼쳐집니다.
그렇게 따먹지 말라고 쫓아내놓고 이제 와서 생명 나무가 열렸다는 말은 우리가 따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아니라 왕 되시는 분의 동네이기 때문에 그 왕이 초청한 백성만이 그 생명 나무 과실을 따먹으면서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되어 있어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참, 소설치고는 아주 대단한 소설이라 하는데 이게 소설이 아니고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실제적 사건에 근거한 거예요. 이게 소설 같으면 제가 여기서 이야기할 필요 없습니다. 소설책 소개하려고 돌아다닐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게 소설 같으면 재미로 보지, 믿을 필요 없어요.
소설이 아니고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실제로 삼 일 만에 살아났죠. 주님이 살아났으면 내가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다’는 말에서 빼주세요. 내가 살아있다, 죽어있다는 주님이 살아있는 이상 그건 무의미한 이야기입니다.
날마다 죽어도 괜찮고 날마다 살아있어도 괜찮고. 그러나 저러나 그게 무슨 대수냐 이 말이죠. 내가 살아있다, 부자 되었다, 출세했다 그게 뭔 대수입니까? 주님이 번듯하게 살아있으면 네가 가난하게 살거나 부하게 살거나 그런 다른 이방 민족, 우상 섬기는 자들의 이야기는 듣지도 마세요.
너나 잘하세요, 너나. 당신 죽었어. 십자가 부활도 모르면서. 그건 인간도 아니죠. 복음이 나오지 않으면 십자가 나오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같이 사는 것. 끝으로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세를 어떻게 하느냐. 내세가 아니에요. 왕과 지금 같이 동거하고 있습니다. 죽고 나면 내세에 어떻게 하느냐, 그건 보람 상조한테 찾으라 하세요. 우리는 죽고 난 뒤가 아니라, 지금 주님은 살았고 나는 사나 죽으나 그건 주의 것이 되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사람이 지어내고 아이디어를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서 알아봤사오니 이제는 세상에 어떤 일을 당해도 꿀릴 것 없이 담대하게 당당하고 신나게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