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자기 조롱

아빠와 함께 2022. 9. 18. 08:40

서울의존강의20220915a 베드로후서 3장 3절(자기 조롱)-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3장 1절부터,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사도가 자기의 임무와 사명에 아주 충실합니다. 나는 주가 아니다. 나는 주가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내려줬는데 여기 본문에서는 계시라 하지 않고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고 되어있죠. 베드로가 유대인이잖아요. 유대인이라서 예언의 말씀이 계시라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의 말씀은 예언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 기존의 우리 인간 세계가 있는 시간, 공간과 어떤 차이가 나느냐. 그 차이 나는 것.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 기존의 우리의 시간과 공간 이 사이에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 네가 아느냐 모르느냐를 이 차이로 알 수 있어요.

인간이 알고 있는 주님, 인간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인가, 아니면 낯선 시간 낯선 공간에서 파악되는 주님인가. 성도라면 그 둘의 차이를 다 파악할 수 있단 말이죠. 예수님을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에서 주님으로 파악하려면 그 성도 자체도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의 적용을 받아야 되겠죠.

‘우리 아는 사람 미국 갔다.’ 하고 ‘내가 미국에 살고 있다.’ 하고 다르죠. ‘우리 아는 사람 미국 갔어.’ 이거하고 ‘지금 내가 미국에 와 있어.’ 하고 다르겠죠. 미국에 와 있으면서 미국 이야기하는 것하고 내가 아는 사람이 미국에 갔는데 미국이 이렇다더라, 이것하고 다르겠죠.

그래서 예수님이 만약에 미국 가셨다면, 미국에 가서 아는 예수님하고 한국에 있으면서 미국 간 예수님을 아는 것하고 이게 다르거든요. 그 양쪽 차이점을 전부다 알고 있어야 성도라 이 말입니다, 그 차이점을 알고 있어야.

그러면 이 낯선 공간, 낯선 시간에서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알려면 성도는 어디에 휩싸여야 하느냐. 예언의 말씀에 포섭되어야 되고 휩싸여야 되는 거예요. 그 말씀을 베드로가 편지로 전한다 그 이야기입니다.

방금 이야기 들어보니까 인간이 뭔가 생각하고 노력하는 게 아니고 인간, 너라는 그 주변의 환경이 어떤 시간이고 어떤 공간이냐를 지금 이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너는 어떤 시간과 어떤 공간을 경험하고 있는가, 지금 묻고 있어요. 지금 네가 경험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어떤 것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럼 답변은 이렇게 되어야 돼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경험했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공간과 시간을 제가 같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답변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간과 공간은 제가 ‘낯선’이라는 단어를 써가지고 기존에 성령이 없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차별화시킨 겁니다, 방금.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 그러나 성도는 낯설지 않겠죠. 하지만 세상이 볼 때는 “너의 시간관은 이상하고 너의 공간관은 참 이상해.” 라고 그러한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3장 3절에서는 이걸 이렇게 두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빨간 걸로 써볼게요. 그걸 ‘기롱’이라 해요.

조롱한다, 조롱. 조롱하고 기롱하는 거예요. 얼레리 꼴레리한다 이 말입니다. “무슨 낯선 공간이 있고 낯선 시간이 있어?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꾸 내 앞에서 해대는 거야? 너 지금 억지 부리는 거 아니야?” 이런 조롱의 멸시와 무시를 당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우리 성도의 대처는 이런 겁니다. 남한테 조롱과 무시를 당할 때, “아니야 아니야.”라고 하지 마시고요. 남이 나를 조롱하는 것보다 더 독하게 본인을 조롱하세요. 눈물이 확 쏟아지도록. 더 지독하게. 그러니까 내가 나를 심하게 구박하는 거예요. 살지 마. 그래서 너 더 살 가치도 없어.

그렇게 내가 나를 심하게 몰아붙여도 되는 이유는 낯선 공간, 낯선 시간이 있기 때문이에요. 기존에 이 복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공격하고 조롱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거 있어, 라고 이야기하지 마시고요. 우리는 낯선 시간 낯선 공간에 있어, 자꾸 이렇게 변명해버리면 이게 어떤 단점이 있느냐 하면 주님이 나를 위한,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주님이 되어버려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나를 슬프지 않게 만들어주는 그런 주님으로 되어버린다고요.

주님이 낯선 시간, 낯선 공간을 언급한 것은 나, 너라는 구분 자체가 이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에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 그래요. 성립되지 않는데 이걸 크게 쓰겠습니다. 초반에 등장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번 써보겠습니다.【남들이 나에게 뭐라든 상관없는 이야기가 예언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은 남들이 나에게 무슨 소리를 해도 상관할 필요 없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준 거예요. 그게 낯선 시간, 낯선 공간에게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저 불신자가 성도보고 복음에 대해서 조롱을 할 때 그들의 마음가짐은 뭐겠습니까? 나는 내가 하는 말과 내 행동이 나의 행복과 내 가치와 관련성 있는 그런 세상관, 현실관을 가지고 나는 너를 조롱한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왜? 내가 중요하니까. 세상 사람들은 본인이 중요해요. 남들이 나를 뭐라고 평가하는 게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내가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너도 나하고 똑같이 중요할 거야.” 라고 이야기할 때 여러분 그 수법에 말려들면 안돼요. “나는 안 중요해. 나는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에 있어.” 라고 반응을 나타내버리면 이건 결국 제3자가 볼 때 뭡니까? “너도 마찬가지로 너 좋으라고 복음을 이용했잖아.” 라는 말을 하고 조롱을 할 때 “나는 이 복음이 나한테 좋았어.” 라고 답변한 바가 된다 이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여러분 지금 알아듣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나가 분명히 있는 쪽에서 공격하는 그것을 방어한답시고 내가 나서서 나는 행복하다는 방어가 돼버리면 그것은 주님이 주신 계시가 아니지요. 기롱한다는 것을 조롱한다는 뜻으로 합시다. 기롱이란 말이 어렵기 때문에.

세상이 나를 조롱할 때에, 나는 버티고 이겨내야지. 이거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들이 조롱하는 이유는 ‘나는 나를 지키고 싶어.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내 인생은 나를 지키는 거야.’ 세상 사람들은 그럴 수 있죠. 그렇다면 차이난다는 뜻은 뭐냐. 성도는 ‘나를 지키고 싶어’가 있다, 없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거예요. 없기 때문에 방어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방어할 이유가 없죠.

베드로가 편지를 쓰면서 성도인 자와 성도 아닌 자를 갈라내는 데에 도사에요. 이것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이 아니고 “너 아니잖아. 네가 여기 있을 자리가 아니잖아. 넌 네 자리 가.” 그걸 가려내는 데 예언의 말씀, 이 두 번째 편지를 보내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도라면 세상에서 평하는, 세상에서 생각하고 있는 이 복음은 반드시 조롱하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여러분들을 복음 안다고 조롱하면 여러분들의 대처방법은, 제가 아까 언급했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너 천당 가기 위해서 네가 복음 받아들이지?” 라고 조롱을 해요. 복음은 그런 뜻이 아닌데. 조롱을 하면 우리 자신이 평소에 내가, 저쪽에서 하는 이야기로 내가 나를 가지고 심하게 구박들을 해와야 됩니다. ‘너 천당 가려고 성경 보지? 구원 받으려고 성경 공부하지?’ 그런 조롱의 말을 내가 나한테 심하게 해야 된단 말이죠.

자꾸 나를 두둔해버리면, 중간에 누가 세상에서 훅하고 들어와버리면, 내가 쌓아놨던 모든 구원의 체제, 나름대로의 천당 가는 체제가 일거에 와르르 다 무너집니다. 그런 예가 바로 열두 제자의 조직의 와해에요. 열두 제자가 12명이잖아요. 12명이 1/n로 동등하게 힘을 가졌다 생각하겠죠, 열두 명이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구조로 12명을 구성한 게 아니에요. 하나를 건드리니까 다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를 건드리니까.

그것은 평소에 그 하나 되는 인간 있잖아요, 가룟 유다. 가룟 유다의 사고방식과 다른 제자들의 사고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기 전까지. 주님의 영이 오기 전까지. 낯선 시간, 낯선 공간이 오기 전까지는 인간들이 어떤 경우를 해도 저것은 나에게 도움이 될까, 도움이 되지 않을까를 계산하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거예요. 예수님이 나에게 이익일까, 손해일까. 그것이 그만 발각된 겁니다. 들통난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편해서 좋아요. 권력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이걸 아까 안양강의에서 둘로 나눴습니다. 안양 강의에서 했는데 무리와 군중의 차이. 군중은 지도자를 원하고 있어요. 뭔가 중심 잡아주는 사람이 있기를 원합니다. 무리는 자기들끼리 돌아다녀요, 자기들끼리. 사람들은 무리를 짐승이라고 해요. 그리고 군중은 합리적인 법적 체계이니까 이게 바로 인간들의 이성적인 인간다움. 짐승과는 차이나는 정말 인격적인 모임이고 인간다움이에요.

이게 창세기 11장에 뭐가 되죠? 무슨 탑을 세우죠. 무슨 탑입니까? 바벨탑이에요. 주님께서는 주님의 십자가 가는 길에 무리가 앞을 가로막을까요, 군중이 앞을 가로막을까요? 군중이죠. 그 군중들은 지도자 한 마디에 전부다 끽소리 못하고 따라갔어요. 이것이 다윗과 사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발적으로 다윗을 만만이라 했던 그 군중들이 위에서 사울이 고함지르니까 전부다 다윗 여기 있어요, 막 신고 들어오고 그랬어요.

그러면 불신자 입장에서는 어떤 경우라도 어느 게 현실입니까? 복음이 현실입니까, 아니면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가 현실입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굳게 믿죠. 그게 바로 하나밖에 없는 시간과 하나밖에 없는 공간으로 짜여진 세계에요.

낯선 시간, 낯선 공간은 터무니없이 들리는 겁니다, 터무니없이.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다윗, 사울 시대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들이 이 예언의 말씀에 대해서 베드로의 예언에 대해서 계속 조롱, 기롱하며 놀려대는 거예요. 정신 차리라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한 50년 교회 다녔나? 이제는 은퇴할만하잖아. 60까지 교회 다녔으면 60부터는 이젠 쉬어야지. 교회는 젊은 사람들한테 맡겨놓고 이제는 슬슬 놀러나 다니고 낚시나 하면서 여생을 즐기고 그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조롱하는 거예요. “너 교회에서 들을 거 다 들었잖아. 목사 설교 새로운 게 있드나?” “없더라.” “봐. 없잖아, 그래. 그만큼 다녔으니까 했던 거 또 베끼고 했던 거 또 써먹고 새로운 거 없어. 그냥 노인네들 놀러 다니는 것이지. 돈 모아서 여가시설 만들어놓고 놀러 다니는 그게 교회야. 내 말 딱 맞지?” “응. 맞아.” “이제 나이 70넘었으니까 그 교회에서 은퇴하고 은퇴 장로 돼서 나오라 이 말이야. 우리 같이 놀자. 그동안 50년 끊었으면 술 많이 끊은 거니까 이제부터 술 한 잔씩 하고.”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러한 것에 “아니야. 나는 주님을 버려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걸?” 어디서 들은 건 또 있어가지고. 경건서적보고 본 건 있어가지고. 그것은요. 불쌍한 반항하는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주께서 그렇게 해줬는데 내 쪽에서 어떻게 반항을 해?” 가룟 유다가 했던 짓이 바로 그 짓이거든요. 주님이 나를 배신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배신해? 이 이야기하다보니까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같아요. 나왔던 이야기 같아요. 베드로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인가.

신앙생활 그거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그게 아니에요. 왜 평소에 혹독하게 자기를 다루지 않았습니까? 남이 욕하기 전에 내가 나를 욕해야 돼요. 너 지금 억지 부리고 있지, 성경 보면서? 흉내내기하고 있잖아. 너는 몰라도 나는 너 너무 잘 알아. 어차피 힘들게 이중생활 할 거 없이 이중생활 하지 말고 단중생활, 하나만 해 하나만 그냥.

이건 어떤 예가 적절하느냐 하면, 턱걸이할 때 경찰관한다고 하거나 군인 하사한다고 턱걸이하거든요. 오빠가 집안 일으키겠다고, 내가 공직해서 월급 따박따박 받아서 우리 못사는 집안에서 너 공부시켜줄게, 해보지도 않은 턱걸이를 열심히 할 때, 꼭 얄미운 여동생이 등장해서 “오빠, 치워라 고만. 되지도 않는 걸 뭘 해. 그만 내려온나. 그거 말고 우리 장사하자. 카페하자.” 이렇게 된다니까요. “그래, 니 말이 맞다.” 그러고 팍 놔버려요.

그러니까 주변에서 우리의 신앙을 조롱하는 그들이 등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한테 고마운 일인지 몰라요.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왜 감사하냐. 그게 베드로후서 3장 3절의 현실성이니까요. 세상은 보세요. 딱이잖아요. 딱 말씀 그대로 아닙니까. 세상이 너희를 조롱할 것이다. 이거 뭐 물어보살도 아니고 딱 들어맞잖아요. 세상은 너를 조롱할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이 말씀을 세상이 조롱하기 전에 이 말씀에 나오는 조롱하는 불신자 역할이 있죠, 그 역할을 평소에 성경말씀 읽으면서 내가 그 역할을 담당하는 거예요, 내가. 내가 바리새인 역할 하고요. 내가 가룟 유다 역할하고. 하여튼 못된 역할은 우리가 도맡아하면 돼요. 해서 누구를 긁는가? 나를 긁어버려요.

결국 이런 이야기는 이 하나의 물음 안에 다 들어있어요. 이 물음을 매일같이 우리 자신에게 묻는 겁니다. 이 물음을 여러분들이 한번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기억하지 마세요. 기억하라 하면 또 기억 안한다. 그냥 들으세요.【신과 나는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

신과 나는 무슨 관련성이 있습니까? 뭐 있어요? 지금 있다고 생각합니까, 신이? 옛날 고대국가는 신과 그 고대국가의 백성들이 관련성이 있었어요. 왜 있었는가. 본인들이 신을 정했기 때문에요. 고대국가는 쪼개진 국가에요. 그걸 도시국가라 합니다. 인류의 문명은 도시국가부터 시작했어요, 창세기 4장에 가인의 후예들이. 도시국가를 하면서 그 당시에 유명하다고 소문난 큰 신 있잖아요. 그 신전을 그 도시의 한복판에 전부다 수입해서 모시는 거예요. 그걸 솔로몬도 했어요. 신전을 다 모시는 거예요. 뭐 아무나 걸려라 이 말이죠, 아무나.

복권이 각각 다른 종류 10장이면 10장 다 사는 거예요. 복권 살 때 누가 선택합니까? 본인이 선택하죠. 본인이 선택하면서 왜 복권을 사죠? 또 다른 말로 하면, 왜 신을 도입하죠? 신을 믿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 지금 이 질문을 보세요. 이 질문이 왜 중요한가 보세요. 여기 ‘나’가 나오죠, 나. 신은 나와 무슨 관련성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정답을 제가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미리 알려드리겠어요.

신은 나와 관련성이 없어요. 지금 예언의 말씀이 그걸 증명하는 거예요. 신은 나와 관련성이 없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나와 관련성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이유가 반드시 ‘나’라 할 때는 ‘남’을 끌어당겨서 남과 나의 구조 안에서의 나이기 때문에 그래요. 저거는 남이고 나는 나다, 이런 구조 안에서 신이에요, 인간은. 나한테 행운이 주어지고 나한테 도움이 된다면 괜찮은 신들은 다 도입해요,

 

신의 방법은.

그걸 구약의 이스라엘이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여러분, 이스라엘 책 대부분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상 섬기지 말라는 이야기로 꽉 채워져 있어요. 거의 대부분 80%는 우상 섬기지 말라,로 채워져 있어요, 구약 전체가. 잔소리도 그런 잔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안 봐요. 한 소리 또 하고. 우상 섬기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다른 신을 섬겨서 간음하지 마라, 우상 섬기지 마라, 계속 그 이야기하고 있어요. 우리 같으면 그렇게 선지자 보내서 잔소리 들었으면 좀 안하면 되는데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자신을 나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걸 사회의 주체화라고 합니다, 사회의 주체화. 아까 군중은 뭘 요구한다? 지도자를 요구하죠. 군중 하나를 하나의 주체라 하면 주체는 나잖아요. 사회 덩어리 자체가 우리 또는 나라고 한다면 나를 이끌 수 있는 주체자, 지도자를 우리가 선택한 신으로부터 하사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우리의 지도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도자를 보내서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회의 주체자 속에 있는 나와 그들과 동질인 거예요. 영국 국가(國歌)의 내용이 뭐였죠? 엘리자베스 2세가 죽었죠. 죽었을 때 그 앞에 사람들이 노래 부른 게 영국 국가입니다. 국가의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신이시여 여왕을 지켜주소서. 신이시여 여왕을 지켜주소서. 가락은 여러분 아시죠? 헨델 노래 있잖아요. 그게 영국 국가에요. 신이시여, 누구를 지켜달라? 여왕을 지켜달라. 여왕은 누구의 대변자? 사회의 주체의 대변자. 그럴 때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짐승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 전체, 국가 전체에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개별 단위,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가정에서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 코로나 걸리지 않게 건강을 지켜주옵소서. 그래야 우리 가정에 우환이 없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과 나 사이에 관련성 있어요, 없어요? 생겨버렸죠.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에 강아지를 지켜주옵소서. 이거 뭐에요? 강아지 병들지 않게 하옵소서. 뭐 돈이 많이 들어서 그렇겠죠. 또 수술해야 되고 강아지 백신도 맞아야 되고 돈이 많이 들어요. 미용도 해야 되고.

분명히 하나님은 나와 관련성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나와 너는 거기에 우리를 끼워넣어 주지를 않아요. 하나님이 나이고 예수님이 너에요. 끝이에요, 그걸로. 그걸로 끝이다 이 말이죠. 인간은 신을 선택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만 선택했어요. 우리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어요. 그게 낯선 공간, 낯선 시간이에요. 죽어야 들어갈 수 있는 데. 나가 살아있으면 안 되는 곳. 절대로 나가 살아있으면 안 되는 동네에요. 그런데 우리는 육신이 있기 때문에 날마다 나가 살아나잖아요. 그러니까 복음을 조롱하는 자보다 더 독하게 더 심하게 매일같이 나를 조롱해야죠. 꼴값 떨고 있네, 이런 식으로. 너 같은 게 예수 믿으면 아무나 다 천당 가겠다.

계속 나를 조롱해줘야 돼요. 방어할 생각하지 말고. 나를 공격하세요. 나를 공격하는 그것은 별로 돈도 안 들고요. 아픔도 없어요. 내가 내 맴매하니까 그거 뭐 기분 나쁘지도 않아요. 본인이 안 때리니까 천국은 들어가야 되겠고 인간은 안 달라지고. 본인이 안 때리니까 남을 통해서 때려버리는 거예요, 남을 통해서. “사기 당했어.” 주께서 보냈다.

평소에 내가 이런 군중, 눈에 보이는 군중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는 뭐 기복신앙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라고 자기를 변호하지 마세요. 십자가만 자랑하다가 돈 나가면 이제부터 십자가만 자랑 안 했다는 것이 들통나버립니다.

그 이야기가 아주 친절하게, 참 성경은 주님은 참 친절해요, 친절하게도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욥기에 보면 나옵니다. 욥이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리고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주신 자도 하나님이고 가져간 자도 하나님이라고 스스로 고백했지요. 그런데 그런 욥에게 친구가 와서 조롱을 해요. 욥기 12장 4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조롱을 할 때 욥이 하나님이 때리는 것은 참아도 친구가 조롱하는 것은 못 견딥니다.

무슨 이런 조화가 다 있어요. 이게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가까운 친구가 더 하나님 같아. 더 실존적이에요. 현실감각 그대로에요. 느낌 같은 느낌이에요. 진짜 느낌 그대로 하나님은 멀리 있고 친구는 가까이 있어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아프게 상처를 주고 목에 가시를 집어넣는 거예요. 뭐 갈치 잡쉈어요? 뭐가 목에 걸렸어.

우리교회에 신천지 할아버지가 한 칠십 된 분이 왔었어요. 자꾸 오는 거예요. 추수하려고 자꾸 오는데 한 한달 전에 일이에요. 오랫동안 왔어요. 나는 뭐 베지밀 하나 얻어먹었어요. 갑자기 청문회를 앞두고 내가 고백합니다. 베지밀 하나 얻어먹었어요. 그런데 저 할아버지를 어떻게 처리하면 되는가.

우리교회 이 집사님이 쓱 가가지고, 자기가 감리교 장로라 했으니까 장로라 합시다, 감리교 장로라 했는데 그건 위장이고 장로긴 장로인데 사실은 신천지에 푹 젖어있는 장로에요, “장로님께서는 평소에 도대체 뭘 주장하는 겁니까?” “예수 믿으시면 바르게 살아야 되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라 저는 믿고 아주 강조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내가 지금 무슨 소리해도 장로님은 바르게 살기 때문에 화 안 날거죠?” 딱 해놓고 그다음부터는 실실 화를 돋워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신천지 장로가 화를 내는 거예요.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거 봐. 지금 화내잖아. 본인의 신학, 본인의 사상을 바로 본인이 지금 부정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가 “그래, 참. 나 화 안 내야지.” 이러고 있단 말이죠. “거 보세요. 주관이 뚜렷하지 않네요. 내 말 한마디 했다고 벌써 또 이렇게 참는 거 보세요.” 그러고 난 뒤에 안 왔어요.

그러니까 아까 세상적인 적용은 뭡니까? 신과 나는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 거예요. 신과 나는 관련성이 있다는 거예요. 관련성이 없는데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이 베드로에게 주신 계시가 왜 우리하고 관련성이 없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라는 것은 홀로 내가 있을 때 나가 되는 게 아니에요. 나가 아닌 다른 남이 있을 때 비로소 나가 부각되는 겁니다. 내 의미가 새로 생겨나는 거예요, 남이 있을 때.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나가 등장하게 되고 남이 등장하게 되면 여기서 필히 나만 구원 받아야 되겠다, 이런 욕구와 목적의식이 발생되게 되어 있어요. 나만 구원 받아야 되겠다. 난 살아야 되겠다.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이렇게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내가 구원받는데 주님 제가 뭘 하면 구원 받겠습니까? 이게 나오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자, 지금까지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이니까 이렇게 하고 아까 중요한 것 다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안다 치고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안다 칩시다. 예언의 말씀은 복음입니다.【복음은 남들의 평가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주어진다.】남들의 평가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주어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여기서 뭐가 탈락이죠? 남이 탈락됐죠? 남이 없으면요. 그렇게 떼놓으려 해도 못 떼어놨던 나도 같이, 남 떨어지면 나도 같이 떨어져요.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어요.

그게 베드로후서 1장 16절, 1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절 계속 읽어보세요.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그 영광, 인간이 만들어낸 거예요?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서 만들어낸 겁니까? 아니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자, 아버지 등장하죠. 아버지가 누구 보고 이야기합니까? 제자들 앞에서 누구를 소개하죠? 아들 이야기하죠. 여기서 이 나는 없죠. 그냥 예언의 세계가, 내 의식을 주께서는 완전히 깔아 뭉개버렸죠. 예언이 나를 뭉개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게 위엄과 큰 영광이잖아요.

그 앞에서 베드로 본인의 자세는 ‘나 어때요?’ 가 성립 안 되죠. 그냥 농막인지 처소 만들어서 자기 것 챙기는 게 아니고 세 분, 예수님 엘리야 모세에게 갖다 그냥 안기죠. 안기는 거예요.

그 비슷한 예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강도 있잖아요. 강도가 밑에서 궁시렁 궁시렁 하는 소리가 들립니까, 안 들립니까? 마지막 순간에. 들을 필요 없죠. 왜? 당신의 나라 임할 때 저를 생각해 달라 할 때 타인들의 평가는 완전 개무시 당하는 거죠, 강도한테. 상관없어요.

그런데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 준하면 예수님은 지금 죽어요. 인간이 누구나 아는 그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거예요. 그동안 인생 산 거 다 소멸되는 거예요. 그런데 강도가 뭐라고 합니까? 소멸된다고 이야기합니까, 당신의 나라 임할 때라고 이야기합니까? 당신의 나라 임할 때, 그 이야기하죠. 당신의 나라 임할 때. 벌써 이 강도를 통해서 서로 질이 다른 두 개의 세계, 그 중에 예수님의 세계는 세상 사람 보기에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으로 등장한다 이 말입니다.

베드로가 봤던 그 영광스러운 시간 공간, 그걸 지금 베드로가 1장에서 언급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조롱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조롱할 줄 다 알고 16절에 이것은 우리가 교묘하게 지어낸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 모든 인간, 나와 너를 완전히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가 바로 둘째 편지의 내용입니다. 예언입니다.

그래서 3장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를 미리 보면 7절에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되어있죠. 3장 7절에. 그러면 개인과 전체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둘다 지옥불에 다 들어가는 거예요. 나와 너, 이 구별 자체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이 뭐라 하든 그것과 상관없는 이야기가 불로 심판받는 이야기잖아요. 남들의 평가와 상관없는, 불에 심판받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그냥 주님의 이야기, 스토리, 불심판 그걸 쳐다보고 있는데 세상에서는 그걸 모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남들이 뭐라고 뒤에서 옷을 잡아당기든 발을 잡아당기든 그냥 떨치면 되죠. 그래, 너 좋은 대로 이야기해. 난 지금 바빠. 이러면 끝날 문제다 이 말이죠. 왜 거기에 다 맞장구쳐주고 거기에 동조하고...... 거기에서 뭘 얻겠다고 동조하고 맞장구쳐줘요? 나는 지금 주님 바라보고 있는데. 주의 말씀 보고 있는데.

“너 한달 수입이 얼마고?” “한달 수입 70만원.” “아이고, 너 그래서 우에 사노.” “시끄럽다, 고만. 우에 살든 내 알아서 살게. 뭐 1000만원 벌면 하늘나라 천국 들어가나?” 그러면 그들은 쑥떡거리면서 “저 봐, 미쳤다.” 조롱하죠.

그러니까 그 조롱을 그런 소리 듣는 것을 평소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심하게 조롱을 해보란 말이죠. 우리 자신을 향하여. 우리 자신을 향해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돼요. 복음, 복음해도 네가 돈 좋아하면 다 떠날 게 아니냐. 내가 나한테 미리 그것을 계속 해대는 거예요.

그걸 백신이라 합니다. 백신을 1차, 2차, 3차, 4차 전부 다 맞아서 앓아누워야 돼요. 내가 날마다 나에게 마약같이 주사를 놓는 거예요. 아이고, 네가 천당 가면 악마도 천당 가겠다. 내가 나한테 궁시렁 궁시렁 하면서 계속 주사를 놔야 된다 이 말이죠. 남들이 조롱하는 게 그렇게 낯설지 않게. 그게 생소하지 않게.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싸다 하는 그런 마음을 평소에 갖고 있어야 돼요.

베드로후서 3장에서 기롱한다, 조롱한다는 그 말을 하면서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너, 얼굴이냐 세계냐?” 지금 어느 운명에 대해서 네가 이야기를 하느냐, 라고 묻는 거예요, 우리한테. 네 낯짝이냐, 네 몸 하나냐. 안 그러면 너, 나 따질 것도 없이 세상 통째로 날아가버리는 이야기를 네가 예언으로 했느냐.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1장에 나왔듯이 공교하게 만든 게 아니죠.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그때 예수님의 영광 중에 본 것을, 교묘하게 만들어낸 농담이나 조작된 이야기가 아닌 그것을 그대로 받았던 사람을 오늘 본문 3장 1절과 2절에서는 우리 사도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사도로 보는 거예요, 사도가 바로 그 이야기해요. 교묘하게 만들지 않은 그것이 그 말씀이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세상에 고스란히 온전하게 유지되는 그 역할, 파이프 역할이 사도라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가, 마지막에 불로서 심판받는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이것이 베드로의 개인적인 아이디어입니까? 그렇게 해서 베드로가 나는 지금 너보다 낫다, 그런 자랑질 하려고 만들어낸 거예요? 아니죠. 베드로가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베드로가 알아요. 이 이야기가 불신자들한테 신자가 조롱받아도 천번 만번 조롱받을 만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롱하는 자가 조롱하는 자가 이 말씀의 현장에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놀라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거다 이 말이에요. 오늘 표정들을 보니까 별로 위로가 안 되는 모양이에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조롱을 할 때,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릴게요. 자, 기존의 시간입니다. 기존에 인간들이 아는 공간이에요. 그런데 여기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낯선 시간, 낯선 공간이죠. 그럼 이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은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니까 이걸 구름으로 처리합시다. 구름 안에 있다고 봅시다. 그런데 베드로가 키다리라. 키다리가 되어가지고 베드로가 구름 위에서부터 구름을 몸이 관통해서 발은 지상에 있어요.

구름 안팎에 베드로가 다 들어있어요. 양쪽 다 보고 있어요, 양쪽 다. 완전히 계시를 관통해서 양쪽 다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같이 다 느낌을 아는 겁니다.

베드로가 이러한 낯선 세계에도 속하고 기존 세계에도 다 속해있는 이러한 양상은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실 때 그 양상과 똑같은 거예요. 아버지에게도 속하고 죄악 된 세상에서도 속해있는 겁니다. 속하면서 이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들은 베드로 다리만 보이죠. 그들은 베드로 다리만 보이죠.

그들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조롱합니다. 조롱하는 방법은 이렇게 돼요. 시간과 공간에 있는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냐 하면 각자 본인이 자기의 주인이에요. 각자 주인이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의 유일한 주인이다. 물론 국가가 있지만 그건 협조차원에서 협조해주는 거고 진정으로 돌아서면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나의 주인인 입장에서 베드로가 하는 이 주장을 들어보니까 베드로는 주인이 따로 있어요. 본인이 본인의 주인이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런 베드로를 보고 굉장히 안타깝게 여기는 겁니다. 인간이 되어서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고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해야 나중에 인간 승리했을 때 남들로부터 장하다, 훌륭하다, 고생했다, 수고했다, 그만한 성과 얻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느냐. 칭찬이라도 받고 존경이라도 받고 살면서 고생한 보람도 느끼는데 만약에 본인이 주인이 아니라면 그럼 기곈가, 로봇인가? 이러한 조롱을 또 받을 수 있겠죠.

그런데 베드로가 자기는 자유라 하거든요. 이게 자유거든요. 자유란 내가 주인 되는 게 자유가 아니고 다른 주인을 모시는 게 자유입니다. 내가 주인 되는 게 자유가 아니고, 기존에는 악마가 나의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베드로후서 3장 2절에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그다음에 뭐가 되었다? “주 되신 구주께서”

그러니까 사람이 나에게 주인이 있다는 것이 여러분 이게 서글프고 슬픈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환희와 희열로 고함쳐야 될 이야기에요? 어느 것이 안정감이 있어요? 어느 게 안정감이 있습니까?

나이 40넘도록 시집도 안 가고 맨날 취미가 돈 좀 벌면 보따리 싸서 해외여행 가는 거. 그런데 친구는 결혼해서 아이 둘 놓고 잘 살고. 이건 세속적인 예입니다만, 누가 봐도 어느 것이 안정적이어보입니까? “친구야, 나 봐라. 케냐 와있다.” 이게 그렇게 부러워요? “넌 어디 있는데?” “우린 애들 둘 다 학교 가있다.” 이거하고 케냐의 무슨 공원에 혼자서 배낭 메고 있는 그 자유가 그렇게...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부럽듯이 그게 그렇게 부럽던가요, 그게?

왜 주인을 주인으로 대우를 안 해줘요? 자꾸 혼자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고 끙끙거리고 혼자 고민 처리하려고 합니까? 홀로 하는 게 자유가 아니고 듬직한 분에게 그냥 ‘딸랑딸랑딸랑 당신의 영원한 종입니다’ 이게 자유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진리가 너의 주인이다 (요 8:32). 그게 자유다. 전에는 진리 밖에서 종이 되었는데 너는 이제 진리 안에 들어온 자체가 원래 인간이 되었다, 원래 인간. 창조주를 만나고 구주를 만났던 원래 인간. 세상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서울의존강의20220915b 베드로후서 3장 3절(자기 조롱)-이 근호 목사

우리 주님은 자기 백성이 끝까지 타인을 신경 안 쓰는 이야기만 들려줬어요. 다 불질러버리는 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과격하죠. 물로 싹쓸이해버리고 불로 싹쓸이해버리는데 남이고 뭐고 어디 있어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남 없으면 나도 같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남을 무시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도 무시해준다는 거예요. 나를 무시해도 괜찮아요. 나는 나를 무시한 분의 종이기 때문에 영광스럽기 때문에 그 관계 자체가 감사하기 때문에 날 무시해줘도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나를 무시해주면 줄수록 더욱더 주인님이 빛나죠. 야, 역시 주인답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조롱이라 할 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조롱한다는 것은 그들 수준에서 조롱하는 거거든요. 그들의 세상 보기의 기준에 맞춰서 우리를 조롱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기준 자체를 주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 기준인 것을 우리가 아셔야 돼요.

그 기준을 제거할 때 이렇게 이 문장을 보시면 이해하기 쉬워요. 비 오면 우산 쓰죠. 비 오면 우산 씁니다. 그러면 나는 우산 안이 나의 세계 전부에요. 그런데 비가 그쳤다. 그럼 계속 쓰고 있으면 안 되죠. 우산 걷고 뭘 봐야 됩니까? 하늘을 보라 이 말이죠.

우산을 쓰고 있으면 이 우산 안이 하늘이 돼버려요. 이 안에서 울고불고 난리라. 우산 안에서. 그런데 이 우산을 왜 씁니까?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남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니에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예수 믿고 교회 가고 신을 믿고 하는 거예요.

나와 신이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를 우리는 계속 탐구하는 거예요. 어제 기도했는데 기도 효과는 나에게 어떤 이익으로 주어지나, 계속 그 성과를 찾고 있는 거예요. 성경 공부했는데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왜 그런 짓 하는데? 내가 주인이니까. 나에게 주인이 따로 없으니까.

그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본인들이 신을 선택한 거예요. 오늘부터 나의 주인 되라고. 그러니까 신을 다섯이나 믿는다는 뜻은 좋은 우산 다섯 개 쓰고 이 신이 나를 지켜줄 것인가, 저 신이 나를 지켜줄 것인가와 똑같은 거예요.

물론 현대인들은 그 신을 보험으로 대체하지만. 보험 한 10개 들어가지고 이거할 때 이걸로 막아주고 저거할 때 저걸로 막아주고. 보험은 통계적이고 과학적이지만 신은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보험도 들고 그다음에 신도 믿고.

옛날 우산 쓰고 새 우산도 쓰고. 그 안에서 숨이라도 쉬어보려고 하는 거예요, 숨. 숨은요. 주님이 쉬게 하는 것이지, 자기가 쉬고 싶다고 숨 쉬는 게 아닙니다. 숨 쉬게 하시는 분 따로 있어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숨 쉬는 방법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숨 쉬는 방법을 알려드리면, 제가 첫째 시간에 예고한 대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조롱할 때 어떻게 조롱하는가를 우리 자신도 미리 알아서 그 조롱방법을 우리 자신에게 한번 적용해보겠습니다.

강의가 너무 어렵지 않도록 쉬운 동화 같은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있는데 못된 할머니가 성질 더러운 할머니가 지옥 갔어요. 성질이 더러우니 지옥 갔겠죠. 갔는데 천사가 그 할머니를 불쌍히 여겨서 마지막 기회를 하나 준 거예요. 천사가 찾아왔어요. 컴퓨터로 조회해보니까 그 할머니가 늘 성질이 나빴는데 딱 한 가지, 착한 일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할머니가 젊었을 때 어려운 사람에게 양파를 준 게 있어요. 그 외에는 착한 일이 없어요. 얼마나 성질이 못됐던지.

그래서 그 천사가 마지막에 기회를 주기 위해서 양파 준 선행 하나를 검색해가지고 찾아내가지고 당신 진짜 이렇게 가면 지옥불에서 영원히 못 빠져나오니까 당신을 천국 보내줄려고 당신이 한 선행을 내가 찾아냈다. 그래서 이 양파를 가지고, 천사가 양파를 쥐고 할머니는 양파 끝을 쥐고 양파를 잡아 당길테니까 딸려오면 되는데 조건이 있다. 절대로 끊어지면 안 되는 조건 하에 따라오면 된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아이고, 감사히 여기면서 따라갔어요. 따라가서 거의 다 왔어요. 지옥에서 벗어나는 경계선에 거의 다 왔는데 그때 다른 지옥 간 사람이 할머니 뒤에 갖다 붙은 거예요. 어? 지옥에서 빠져나가네. 야,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는 수가 있구나. 하고 붙으니까 할머니가 뭘 걱정하느냐 하면 그 무게에 의해서 양파가 끊어질까봐 걱정이 되가지고 발로 뒤에 온 사람을 막 차는 거예요. 차면서 “이 양파는 내 거야!” 하고 떨어뜨렸습니다. 떨쳐냈는데 그 순간 양파가 끊어져서 할머니는 영원히 지옥불 들어갔다는 이야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이 비슷한 이야기가 불교에도 나와요. 한국의 불교에서도 나오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게 왜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조롱하는 방법이 되느냐 하면요, 방금 한 이야기에서 이런 요소가 들어있어요.

첫째, 천사가 할머니를 동정하고 있어요, 연민. 연민인데 연민할 때 단서가 붙어있는 동정을 합니다. 양파가 끊어지면 안 된다. 그런데 동정에는 근거가 있어요. 착한 일을 한 가지라도 했다는 그것마저 없으면 동정할 수 있는 기회도 없는데 착한 일 한 게 있기 때문에 그 착한 일을 살리기 위해서 양파 줬던 그 양파를 가지고 동정한 거예요.

두 번째, 할머니가 끊어진 결정적 이유는 뭐냐 하면 ‘이 양파는 내 것이다’에요. 그러니까 이 양파는 나를 구원하는 용도의 양파지, 너를 같이 구원하는 용도의 양파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성경을 다 읽고 성경을 아무리 백독 천독을 해도 이 두 가지 요소가 우리 육신 속에 계속 꾸역꾸역 위산 과다할 때 갑자기 욱하고 올라오듯이 끊임없이 지금 우리 내부에서 이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완전히 이걸 저는 선악체계로 보는 거예요, 선악체계. 선악체계를 다시 한번 잠깐 설명하게 되면 선악체계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벌하시고 선한 자에게 복을 주는 게 선악체계입니다. 그걸 수요일에 도덕신이라 했죠, 도덕신.

그런데 제가 수요 설교에서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벌하고 착한 사람은 복 주는 게 아니고 선이고 악이고 모조리 다 심판해버립니다. 왜냐하면 선악지식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잘 나가나 못 나가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식으로 모든 것이 심판 받을만한 인간으로 이미 성경적으로 확정됐죠. 그럼 그 확정된 이유가 뭐냐? 선악체계 때문에 그러죠. 이게 바로 선악체계잖아요. 이게 우리한테 없을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이런 구원관이.

특히 여기서 첫째로 뭐라 했습니까? 뭐라도 동정을 받고 사랑을 받으려면 뭐 하나 착한 건덕지가 있어야 된다는 이 한 사실과 두 번째, 이 양파는 누구 구원하는 용도다? 나를 개인 구원해요, 개인 구원. 나를 구원하는 용도로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이 두 가지 요소.

이 두 가지 요소가, 우리 자신이 충분히 우리 자신을 조롱할만한 이유가 돼요. 너 아직도 복음, 복음, 십자가 하지만 너 선악체제 그대로 있잖아, 있어. 남들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이걸 계속해서 추궁해보세요. 들쑤셔보세요. 우리가 들쑤시지 않아도 일이 터지면 들쑤셔져요.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갑자기,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 말 자체가 잘못됐어요. 이미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잘못되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뭐가 잘못되었느냐. 이번에는 실수고 다른 일은 잘못된 게 아니잖아, 그런 뜻이에요, 이게. 이 선악체제가 무심코 모든 행동과 말씨에서 선악체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상대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를 상대해서 구원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의 양파로 생각한다니까요. 나를 구원하는 양파. 그것도 조건부로 끊어지면 안 된다는 조건.

그리고 또 한 가지 보탠다면 천사가 할머니한테 제안을 했잖아요. 그럼 구원문제는 누구 결단에 달렸습니까, 그 다음부터는? 할머니 나한테 달린 거예요. 그러면 선악체계는 맨날 누구를 살펴야 돼요? 내 행동을 살펴야 돼요, 내 행동을. 살피는 이유가 뭡니까? 더 망하라고 살피는 게 아니에요. 혹시나 착한 일을 무심코 할 수도 있잖아. 그거 있으면 그거 하나 근거로 구원을 해야겠다는 생각, 그 생각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산입니다. 그 우산 뒤에 하늘이 있다는 건 모르고 우산 서너 개 해가지고 깜깜해. 어두움이에요. 내 세계가 항상 어두워요. 우산으로 둘러싸였거든요. 이거 오면 이걸로 커버하고 저거 오면 저걸로 커버하고 방패가 너무 많아요. 열댓 개 있어.

자기가 완전히 지구 지키는 영웅들 영화, 그 영웅들의 특징이 뭐에요? 완전히 공격 수비가 다 되는 갑옷 입고 돌아다니잖아요. 방패라든지 무슨 마스크라든지 있잖아요. 심장이 기계로 되어있다든지. 어벤져스 영화. 독수리 5형제도 아니고. 왜 그 영화를 보느냐 하면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주인이 필요치 않아요. 내가 주인 되길 원해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지키는 그게 우리가 편해요. 그 속에 결단과 결심은 내가 하고 다만 주께서는 동정이라든지 연민, 사랑 어떤 제안만 하면 하나님은 그걸로 멈추라는 겁니다.

사무엘하 6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참... 언약이 어려운 점이 여기에도 나와요. 사무엘하 6장. 6장 끝에 보게 되면 6장 20절. 누가 한번 읽어보라고 말하기도 싫어요. 전부다 지금 침묵하고 있으니.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쉽게 말해서, 왕이 주인이고 거기에 있는 여종은 종인데 어떻게 주인님의 벌거벗은 신체를 그 하녀들 앞에서 그 몸을 드러냅니까. 무슨 뜻입니까? 이 다윗이 언약궤 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춤을 추려고 하니까 왕복이 거슬린 거예요. 브레이크 댄스 하려고 하는데 이게 안 되니까 옷을 가볍게 입고 춤을 췄다 이 말이죠. 신체가 약간 노출됐겠죠.

“어떻게 체신머리도 없이 그런 짓을 합니까? 천한 것들이 다 보고 있는데.” 이게 지금 누가 누구를 조롱하는 거죠? 왕비가 다윗 왕을 지금 조롱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다윗이 “어이쿠, 내가 정신이 없었구나.” 이랬습니까? 21절,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러니까 사람 앞에서 한 게 아니죠. 아까 제가 말했죠. 하나님의 예언은 너, 나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어난 이야기로 되어 있다고. 그들의 평가와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는 이야기에요. 누가 궁시렁 궁시렁하고 누가 평할 때 그것을 귀담아 듣지 말라 이 말입니다. 지금 주께서 시킨 일인데 주님 앞에서 내가 종으로 하는 일에 주님만 보이지 다른 사람은 눈에 보이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절 한번 들어보세요.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이게 낯선 공간이잖아요. 낯선 공간이죠. 다른 사람들은, 미갈의 눈에는 사람들만 있는 공간이죠. 이건 다 익히 아는 공간이에요. 그러나 다윗은 여기다가 낯선 공간인 다윗 세계를 형성합니다. 이게 언약의 공간이에요.

언약은 이런 거예요. 언약은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언약을 조롱하는 자도 같이 자기 정체가 들통나게 되어 있습니다. 언약은 적들의 정체를 들통내지 않으면 언약이 활동하지 않아요. 다윗이 그것을 오히려 기쁘게 내가 남한테 욕을 얻어먹더라도 언약이 나를 강권적으로 작용하는 것에 다윗은 너무 좋아서 염치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옷을 벗고 춤을 춘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니까.

그다음에 23절 봅시다. 드디어 벌칙이 주어지죠.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이렇게 되어있죠. 자,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하면 돼요. 제가 방금 20절, 21절, 22절, 23절 이렇게 했잖아요. 그렇게 하지 마시고 23절부터 딱 먼저 표제로 거는 거예요. 수능 국어 제7번 문제. 사무엘하 6장 23절을 딱 제시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딱 해놓고 그다음에 뭘 제시하느냐 하면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는 이유를 대세요, 라고 주관식으로 써보라 하는 거예요. 주관식으로. 이게 신앙 아닙니까. 이게 신앙 있음과 없음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럼 문제를 바꿔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여,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말하면서 돌아가셨어요. 자, 그게 문제입니다. 다음 중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를 주관식으로 쓰세요. 한번 써보세요. 뭐라고 씁니까? 1번, 정치꾼에게 대들다가 너무 경솔했다. 좀 참을 걸... 우리는 그런 식으로 답안을 작성해요. 그런 식으로 작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 되기 위해서 그는 죽어야 됐다.’는 말을 쓰는 순간, 출제자인 하나님이 “맞아. 그다음 네 차례다.”라고 그다음에 나를 잡아당길 수가 있어요. 정답 이야기해서 자칫하면 그 길을 갑자기 강제로 끌려갈 수가 있다니까요. 차마 말을 못하고 침묵하죠.

아까 누가 성경 읽어보자고 하니까 전부다 침묵하는 것처럼 말을 안 해. 말을 안 해요. 성경 한 절 읽었다고, 성경도 그렇게 알면서 왜 네가 읽은 말씀대로 안 지켜, 또 이렇게 나올까 싶어서 겁나가지고 입을 다물고 있는 거예요, 전부다. 그걸 가지고 세 자로 뺀질이라 합니다. 요령꾼. 우리는 뺀질이, 요령꾼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뺀질뺀질해요. 얼마나 뺀질뺀질한지 눈이 부실 정도로 요령꾼들이에요.

우산 내리면 되잖아요. 왜 자꾸 우산을 씁니까? 나를 지키는 우산을. 우산에다가 ‘성경말씀 읽었음’ 이런 것 써놓고... ‘기도했음’, ‘헌금했음’ 그 우산을 왜 자꾸 갖고 있느냔 말이죠. 그걸 내려야 하늘이 다 보이는데, 우산 쓰면 자기가 행한 그 천장이 자기 하늘의 전부에요. 내 세계의 천장이 자기가 행한 것으로 가득 차있어요. 우산을 칼로 찢든지 무슨 조치를 해야 되겠죠.

바로 언약이 인간이 내세운 하늘을 대체합니다.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이 대체하면서 우리가 왜 사울의 딸 미갈처럼 우리가 그 현장에 있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 여러분,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한테 이렇게 반격 들어왔죠. 그때 이 여종보다 내가 더 천하게 할지라도 나는 여종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을 본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런 이야기할 때 그 현장에서 사울의 딸이 회개했겠습니까? “아이고, 여보. 내가 잘못됐어.” 이렇게 나왔겠어요? 택도 없는 소리에요. 회개했으면 자식이 생겼어요. 안 생겼다는 말은 그 고집이 대단하죠. 이 이야기 주일 낮 설교 때...... 바쁜 가운데 챙겨야 되죠. 안 그러면 다 잊어버리니까. 주일 낮 설교 본문하고 딱이에요.

이제 우리가 우리를 조롱해야 되죠. 그럼 우리는 잠시 사울의 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의 딸의 관심사는 뭡니까? 우리 남편은 임금이다. 따라서 우리 남편이 어디 현장에 가는 것은 나를 대신해서 나의 위신과 체면을 대신해서 나서기 때문에 왕이 만약에 우사를 당하면 그 우사스러움은 왕비인 나한테 다 오기 때문에 항상 남편 단도리를 해야 되겠죠.

그런데 그 대단한 남편이 자기보다 한참 계급이 낮은, 왕궁에서 일하는 천한 여자 종 앞에서 나한테도 너무나 귀하고 귀한 남편이 천한 여자 앞에서 행동을 그 천함보다 아주 더 낮춰서 했잖아요. 그럴 때 우리가 그걸 그냥 지켜봅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갑자기 왕비가 나서서 “전부 다 눈 감아! 눈 감아.” 일단 눈 감게 만들고. “눈 가려!” “예, 왕비 마마.” 이미 다 봤는데...... “당신 옷 좀 입고. 당신 내가 이해해.” 또 이해한대, 또. 당신이 하나님만 사랑하고 어떻게 복음을 사랑하고 다 이해하는데 행동을 그렇게 주체 못하게 경솔하게 하면 안 되지. 남들 보는 눈이 있잖아.

참 중요한 말이다. 남들 보는 눈이 있잖아. 이게 우리들의 진리 아닙니까. 남들 보는 눈, 이 눈이 진리 아니에요? 남들 보는 눈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나가 되잖아요. 남이 있을 때 나가 되잖아요. 남들 보기에, 망했다. 아이고 나 같으면 진즉 죽었다. 그렇게 우에 사노. 쯧쯧쯧. 이거. 남들 보는 눈이 있는데 남들 보는 눈은요, 남들이 나를 보지 않고 내 안에 내재되어 있고 내장되어 있어요, 이 장치가 육신 안에. 이게 손으로 후벼도 빼내지를 못해요. 남들 보는 눈.

그러니까 이 성경에 나오는 사울의 딸 미갈의 행동은 지금 우리 안에 살아있는 겁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냐. 이런 관점에서 누구를 조롱한다고요? 우리 자신을 조롱해야죠. 그게 말씀의 작용이잖아요. 말로만 죄인 중의 괴수 아니잖아요, 말로만.

자꾸 조롱거리를 감추지 마세요. 위선자가 됩니다. 독하게 조롱하고 앞으로 취미를 바꾸세요. 취미가 뭐고? 나 조롱하는 거. 나를 낮추는 것, 고상하게 말해서 나를 낮추는 것. 나를 아예 천하디 천하게 만드는 것. 나로 하여금 남들에게 전혀 내세울 게 없는 존재인 것을 내가 실감나게 만드는 게 나의 취미다.

남들 보는 눈이 있잖아요. 그게 바깥에 보이는 남이 아니고 내 안에 남이 있어요. 그 남 안에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눈이 박혀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 자손치고 정신병 아닌 자가 없어요. 전부다 정신병 환자에요. 남들의 눈이 내 허락도 없이 내 안에 박혀있으니까 이거 뭐 꼼짝마라죠.

그 중에 한 사람이 누구였다 했습니까? 욥이었어요. 욥이 기가 찼죠. 심지어 욥은 나중에 몸이 너무 아파가지고 욥기 19장 18절에 보면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나를 업신여긴다고 하나님 앞에 대들고 있어요. 하나님, 내가 전에 가르쳤던 내 제자들이, 그 당시에 어르신네니까, 나한테 교훈 배웠던 애들이 이제는 역전되어가지고 나를 조롱하나이다. 나 이거 견딜 수 없습니다. 이럴려면 저를 빨리 이 세상에서 나를 일찍 죽여주옵소서.

아, 요 근래 자기 죽여 달라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그만큼 살기가 빡빡한 모양이죠. 복음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면 되잖아요. 그럼 더 살 수 있는데. 수고하고 무거운 복음 들고 가려다 보니까 살라고 하니까 복음대로 못 살고 안 살라 하니까 복음이 무섭고. 이 갈등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뭐 죽으면 해결되는 줄 알아요?

그런데 복음은 기쁜 소식이잖아요. 이렇게 나로서는 한계에 이르렀어요. 내 안에 남이 이렇게 볼까봐 두려워하는 그 눈 때문에 내가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창세기 16장 4절에 보게 되면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그 여주인을 멸시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조롱하는 것은 세상 자체의 본질이에요. 세상 자체의 본질입니다. 방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임신을 못하고 종은 임신이 되가지고 주인님의 아들 가졌다고 으스대면서 유세떨면서 본 부인 사라를 멸시하는 것, 이거 뭐 타고났죠. 어느 인간도 나는 아닙니다, 할 수가 없어요. 타고난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언약으로 일할 때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옛날에는 물로 심판한다. 우리는 “그 당시에 저는 빼줘야 됩니다.” 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럴 잽이 못됩니다. 물로 심판받을 때 심판 다 받았어요. 노아도 마찬가지고 물로 심판받아야 되는데 방주 취지를 살리기 위한 용도로 노아를 건진 거예요. 언약을 위해서.

우리도 지옥 가야되는데 예수님이 천국 갔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뽑아서 그리스도 안에 구원시켜준 겁니다. 우리 문제가 아니에요, 아버지와 아들 문제이지. 우리는 그냥 걸려든 거예요.

구원은 어떻게 하는가? 이 한마디로 구원은 끝났어요. 뭐 나 혼자 일방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강제로 끌려들어간 거예요. 주께서 강제로 위에서 잡아당겨버려요. 강제입니다, 강제. 강제로 끌려들어갑니다.

강제란 자발적이 아니다 이 말이죠. 무슨 자발적이 있어요?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면 우리는 지옥가야 되지. 우리의 자발성과 주님의 강제 중 항상 누가 이긴다? 주님의 강제가 나의 자발성을 이기면서 구원의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전체 이야기에요.

멸시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하나님이 여기서 강제로 어떻게 하는가. 하갈과 사라의 운명을 잘 됐다, 둘을 전부다 끊어내 버려요. 갈라서게 딱 끊어내 버려요. 한쪽은 주님께서 강제로 구원하고 한쪽은 내어버려두고.

그렇게 할 때 그들을 강제로 끌어당기는 기준, 그건 아브라함 때는 잘 안 나타나죠. 물론 우리가 설명은 해요. 이삭을 바치는 쪽이 아브라함과 사라 쪽이다, 설명은 가능한데 보다 구체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53장 3절 보겠습니다.

이사야 53장 펼치면 저는 벌써 이거 펼칠 때부터... 손 보입니까? 부들부들 떱니다. 떠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빌립 집사하고 에디오피아 내시가 만났을 때 성경의 어느 대목부터 시작해서 전체로 잉크 퍼지듯이 확 성경해석을 다 풀이했는가. 바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사야 53장 이거에요. 성령이 이것 질문하게 했고 이 질문에 답변하면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세례 받고 구원받았어요.

2절부터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주님의 작전이죠. 주님의 작전입니다. 우리가 흥미롭고 당길 게 없는 거예요. 선악과처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지도 않아요. 선악과와 정반대입니다. 선악과는 아름답지만 생명나무는 아름답지 않아요.

아름다움은커녕 3절에 봅시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무슨 뜻이냐. 예수님을 자발적으로, 자발적으로 우리의 본성에 입각해서 자발적으로 예수님께 찾아 나올 사람은 의도적으로 단 한사람도 없게 만들었어요. 자발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강제입니다. 강제지, 자발적이 아니에요. 자발적으로 나올 수 없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조치를 하신 거예요.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했던 겁니다. 그러면 그분은 메시아는 구원자는 일단 인간세계에서 왕따 당하고 멸시받은 거죠. 따로 노는 거예요. 같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 멸시받는 메시아를 통해서 인간들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태도를 보이든 간에 인간의 결심과 결정의 성격은 메시아하고 전혀 무관한 결정을 내렸다고 판정이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혀 우리와 우리의 결정과 관련 없습니다. 일방적인 주님의 의지입니다. 이거 감격스러워야 돼요, 정말. 우리의 결심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우리의 각오하고 관계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결정한 거예요.

주님의 결정이 이 더럽고 더러운 내 안에까지 들어왔다는 것이 이게 놀랍고 신기할 지경이에요. 신기할 지경. 나를 잃어버리고 남의 평가를 잃어버리고 내 평가도 잃어버릴 정도로 신기해요, 이게. 왜 들어오십니까, 우리 집에. 이런 식이에요.

마치 삭개오가 자기 집에 오라 했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들어가겠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이야기했죠. “삭개오야,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되겠다.” 나무 위에 있는 거 딱 쳐다보고. 지금 여리고에 가면 삭개오의 뽕나무가 이천 년 된 나무가 있답니다. 구라를 쳐도 참. 관광가려 하면 가겠죠. 그 소리 듣고 올라가고 싶었어요. 삭개오 옷도 팔고 다 팔아요, 거기. 그런데 올라간 나무가 한 나무가 아니고 여러 나무 돼요. 그러니까 어느 나무인지 몰라요, 지금. 우리가 봤던 그 나무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데 가면 다른 나무 있고 그래요. 하여튼 둘 다 수령이 이천 년 됐다는데......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겠다. 그때부터 삭개오는 더 이상 자기가 홀로 살지 않습니다. 자기는 주님께 예속된 종이 되는 겁니다. 주인님이 찾아온 거예요. 주인님이 알아서 찾아온 거예요. 우리 집에. 이 안에. 사울의 딸 미갈의 집에, 돈만 아는 삭개오 집에 주님이 오신 거예요.

왜 그렇게 오시느냐. 너의 그 본능, 본질을 누가 이긴다? 나의 강제성이 이긴다는 것을 너를 통해서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너같이 고집 세고 너같이 너밖에 모르는 거. 내가 너를 기어이 데려갈게. “저는 고집이 굉장히 센데요.” 주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너만 세냐? 다 세. 남보다 더 세다고 하지 마. 둘 다 다 아담의 후손들이야. 똑같은 인간들이야.” 똑같은 인간들인데 일방적으로 집에 오신 거예요.

구원이 너희에게 이르렀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구원이 너희에게 이르렀다. 내가 믿어서 쟁취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을 칭하여서 구원이에요. 예수님이 움직인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 움직여서 우리 집까지 들어와서 내 속까지 들어왔다. 내 속에 주님의 구원이 들어오신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독하고 신나게 우리 자신을 주님의 안목으로 조롱 좀 하세요. 괜찮아요. 벌써 구원이 이르렀으니까 조롱해도 괜찮습니다. 조롱할 때 어떻게 조롱하라 했습니까? 또 다 잊어버렸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세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조롱할 때. 나는 무슨 착한 일 있어서 주께서 오셨다는 것. 두 번째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거는 내 주님이야. 니 주님 아니야. 나의 주님, 나의 십자가야. 나 구원하려고 왔어. 이거하고 세 번째 마지막 뭐라고 했습니까? 이제부터 구원은 내가 관리해. 내 결심과 내 열심으로 들어온 구원은 내가 관리한다. 이 세 가지.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첫째, 뭔가 의미 있는 착한 일을 했을 것이다. 두 번째, 내 양파야. 내 구원보다 기억하기 쉬우니까 내 양파라 하면 돼요. 이건 내가 착한 일한 내 양파야. 세 번째는, 이제부터 구원 관리는 누가 한다? 내가 열심을 내서 내가 한다. 라고 했던 나를 이렇게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롱의 드라마의 끝은 늘 그렇게 끝나시기 바랍니다. 실컷 나를 조롱하고 놀리면서 나를 그렇게 기만하면서 끝은 그렇게 다 이루었다, 로 끝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이사야 53장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유명한 구절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그 다음에 뭡니까? 아... 그거 놓치면 안돼요, 그 다음 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아무리 침묵이지만 침묵의 수도원이지만 이야기해보세요. 그다음 뭡니까? “제 갈 길”

아까 내 양파죠. 제 갈 길. 24시간 자기밖에 몰라요, 몰라. 주님 생각 안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거예요. 제 갈 길. 이게 양의 양다움이에요. 이거 알았으니까 마음 놓고 이제 우리 자신을 놀려먹어도 괜찮죠? 매일 놀리세요. 니가 예수를 믿어? 내가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 이런 식으로. 너밖에 모르는 인간이 무슨 예수를 믿어? 마음껏 놀리세요. 실컷 놀리세요. 어차피 감사할 걸.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하니까 마음껏 놀리란 말이죠.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그릇 행하여할 때는 나는 나쁜 짓 안했는지 여기까지 되죠. 그다음에 그릇 행한 게 뭐냐 하면 제 갈 길 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그릇 행하는 거예요. 모르는 영어지만 여기서 영어하나 써야 되겠죠. 크게 쓰겠습니다. 제 갈 길, 영어로 뭡니까? My way. 프랑크 시나트라 노래 .

나가 없어요. 주님의 길이지, 내 길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조롱할 때는 나는 나밖에 모른다고 조롱하세요. 어차피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에요, 해프닝. 나중에 싱긋이 웃죠. 그럼 내가 나한테 얘기해요. 벌써 밤 10시 넘었다. 잘 때 되었는데 이제 조롱 고만 해라. 우리 같이 오늘 웃고 나머지는 또 내일 하자. 이런 식으로 그렇게 좋게 자기하고 화해하시면 돼요. 조롱 많이 했지? 많이 뜯어먹었지. 오늘 그냥 자자, 그만. 자고 내일 또 으싸으싸하자. 내일 또 시작하면 또 시작할 거리를 주셔요.

그다음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갑자기 강제로 누가 투입됩니까? 여호와께서 누구를 파견시켰어요? 예수님을 파견시켰죠. 그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기위한 장소로서 삭개오 집이, 또 우리 집이, 그리고 베드로가, 베드로의 길다란 신장이 긴 다리가, 주께서 베드로를 이용하신 겁니다. 사도로서.

그 사도가 전한 내용은 너, 나를 무시하고 이미 확정된 사실을 그냥 갔다 거기다가 깔아버리죠. 너는 믿든 안 믿든 내 소관 아니고 이런 식으로 모든 스케줄은 잡혀있다. 그냥 밀어버려요. 그냥 밀어버려요. 이게 베드로가 바로 변화산에서 영광 중에 봤던, 본인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주님이 해같이 빛났던... 그렇게 해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부끄럽게 만들 듯이 똑같이 부끄럽게 만드는 계시를 장차 이제 불바다 된다고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뭐 신나죠. 이것보다 속 시원하고 신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정말 신나죠.

이제 신약에 한번 들어와 봅시다. 신약에 들어와서 고린도전서 1장 28절,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그다음에 뭡니까?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까 그 다윗이 한 이야기하고 맥락이 똑같죠. 미갈은 하나님 앞에 서질 않았고 남들 앞에 섰어요. 그러나 다윗은 본인이 언약맨이니까 언약 사람이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 육신, 더러운 육신 가지고 뭘 할 것인가를 생각한 겁니다.

남들한테 의논할 필요 있다, 없다? 없어요. 여보, 나 춤추려고 하는데 옷 어디까지 벗으면 되나? 아내하고 의논할 필요 없어요. 아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시킨 거예요. 남들이 여러분을 시키지 않도록 하세요. 제가 주일 낮 설교 때 했잖아요. 죽은 자의 명령을 들으라고. 산 자의 명령을 듣지 말고 죽은 자의 명령과 지시를 받으세요. 그게 언약입니다. 언약 설명할 때 그렇게 설명되는 거예요.

이제 정리 한번 해보겠습니다. 시편 22편 6절에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언약 사람 다윗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었습니까? 벌레로 다뤘고 사람 취급 못 받고 사람에게 훼방거리로 만들었고 백성의 조롱거리로 만들었죠.

노아는 그냥 방주를 뚝딱뚝딱 제작해서 잣나무로 만들면 돼요. 그러나 다윗의 언약은 다윗의 몸으로서 언약을 만들어내야 돼요. 주께서 그런 식으로 만드는 겁니다. 이 다윗이 만드는 방식이 시편이고 시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그대로 말씀을 이루어서 십자가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시면서 돌아가셨죠. 그게 새 언약이죠.

그러면 새 언약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구원이 되는 거예요. 새 언약이 들어와버리면. 우리는 벌레 되기 싫고 난 사람 대우받고 싶고 남한테 조롱받기 싫어요. 그것과 새로 우리 안에 들어오는 주님의 조롱받으심과 같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들어와서 우리가 나는 아니요 예수님입니다, 라고 말하게 만드는 그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정리하면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 복음을 말씀을 듣게 되면 필히 너희들은 세상으로부터 기롱, 놀림의 대상이 될 것이다.” 라고 아주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본인이 그렇게 사도로서 경험했고 베드로와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도 베드로와 똑같은 그러한 대우를 주님 떠나버린 이 세상에서 그대로 받게 되어 있어요.

이제 총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중요한 것 다시 한번 쓰겠어요. 말로 적을게요. 너무 중요해서. 베드로가 둘째 편지를 통해서 전달한 내용은 세 자로 이야기하면 이겁니다.【끝까지】 또는【끝까지 가는 예언】 인간의 어떤 훼방이나 방해나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이미 끝까지 가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확정나버린 사실이에요. 이게 바로 현실이 되는 겁니다. 이게 현실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 인간은 이미 선악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죠, 이거 받아들이겠습니까? 못 받아들이죠. 뭔가 착한 일이 있어야 되고 이건 내 구원이어야 되고 그리고 내가 관리해야 되기 때문에 ‘끝까지’라는 것이 보장될 수가 없어요. 열심히 하면 몰라, 가능성 있을지도. 이렇게 돼요.

그러나 이미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너하고 상관없이 끝까지 가요. 끝까지 가는데 여기에 뭐가 따라붙어요? 끝까지 밀어붙이면 주변에서 갑자기 있는 귀신들이 뭐라고 해요? 조롱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끝까지 가는 복음이 얼마나 귀하냐 이 말입니다. 이 끝까지 가는 이것.

끝까지 간다는 것은...... 진짜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나와 무엇을 고려하지 않는다? 나와 남을 고려하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계시하신 일만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나와 남을 고려하지 않아요.

그래서 계시가 계시답게 우리에게 발현이 되게 되면 무엇이 잘립니까? 나도 잘려야 되고 남도 그냥 잘려야 되죠. 나도 잘리고 남도 잘리는. 거기에 대해서 이쪽 세상은 드디어 나와 남을 잘라내니까 세상은 가만있지 않죠. 발악을 하죠. 남들이 나보고 조롱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너는 왜 이상하게 살아가느냐. 너는 배알도 없냐?

주님이 들었던 그 조롱과 멸시를 희한하게 같은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똑같이 느껴지는 느낌 같은 느낌, 진짜 똑같은 느낌을 베드로가 갖고 오늘날 우리가 지금 그 길로 가도록 구원이 우리 속에 강제로 쑥 들어왔습니다. 그냥 쓱 들어와버린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갔는지. 독하디 독한 나 지킴, 나 느낌... 주여 이걸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진행하는 끝까지 가는 계시. 변화산의 그 주님의 영광스러움, 우리가 눈을 들어 그것이 진짜 하늘인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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