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주님과의 일체성

아빠와 함께 2022. 11. 24. 10:16

서울의존강의20221013a 베드로후서 3장 6절(주님과의 일체성)-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3장 3절,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놀리는 거죠, 주의 강림을. 이 놀리는 사람들은 주님이 강림을 안 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하는 말이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여기 4절에서, 주의 강림과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만물이 그냥 있기 때문에 주의 강림은 안 온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주님이 강림한다는 약속이 없어야 될 이유가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기 때문이다.

한번 적어볼게요.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부터 그대로 있다’ 이것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강림이 오면 안 된다,라는 주장을 하는 거예요. 3절에 말세에 기롱하는 자, 조롱하는 자. 지난번에 했잖아요.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의 주장이 뭐냐 하면 그들이 아무 것도 안 믿는 게 아니고 뭘 믿느냐 하면 이걸 믿어요. ‘만물은 그냥 그대로 있다’ 이것을 믿습니다. 그들은 이걸 믿고 있어요. 이걸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는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부터 그대로 있다’는 이걸 조롱하는 자, 놀리는 자들의 주장으로 안 좋게 봤거든요. 베드로 사도가 안 좋게 봤다 이 말이죠. 그러면 만물이 처음 창조한 그대로 있다는 것을 지탱하고 이걸 진리로서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기 뭐가 아쉬워서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부터 그대로 있어야 돼. 암, 그렇게 있어줘야 돼.” 그걸 주장하느냔 말이죠.

도대체 뭐가 불편해서, 만물이 그대로 있지 않으면 어떤 점이 자기한테 손해가 되고 불편하냐 이 말입니다. 만물이 그대로 안 있으면 어떻게 할 건데? 만물이 그대로 있음에서 나온 이익은 어떤 것인가? 무엇이 이익일까요, 만물이 그대로 있으면?

내가 이대로 살아도 괜찮다, 라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내가 이런 형식으로 지금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 만물이 처음 상태 그대로 있다면 만물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나도 안 변해도 된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내가 지금 이대로 그냥 살래. 무엇처럼? 만물처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 만물처럼.

그러면 여기 ‘나’라는 건 인간이잖아요. 인간의 소망은, please 제발 지금 이대로! 지금 이대로 줄곧 가자. 내가 나 됨의 모든 조건은 세상이 지금 있는 그대로 유지된다는 조건 하에 난 거기서 인생을 설계하든 무슨 계획을 하든 그렇게 지금 이 상태로 그냥 살기로 마음먹겠다, 라고 하는 겁니다.

만물이 그렇게 있으면 변동이 없죠. ‘변동하지 않는 만물을 토대로 해서 나는 내 인생을 설계해왔다. 그런데 만물을 흔들어버리면 내 설계가 어떻게 돼. 나는 또 무슨 장단에 춤을 춰야 돼. 또 내가 지금 아닌 다른 삶을 살도록 억지로 강요받는 것이 나는 힘들어. 내가 어떻게 지금 삶 말고 다른 삶으로 굳이 바뀌어야 될 필요가 있느냐.’ 그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어떤 단단한 토대가 있는데 이 토대에서 나무가 싹을 틔웠다면 이 식물이 제일 염려하는 것은 이 토대가 그대로 있어줘야 여기서 싹을 피운 나 자신도 현상유지가 가능하다, 라고 해서 이 토대하고 자기운명을 일체화시키는 거예요. 하나로 묶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묶어내면서 그들이 노리는 게 있어요. 4절에 나옵니다. 조상들이 나오죠, 조상들.

아르메니아(Armenia)라는 나라가 있거든요. 여러분들은 잘 안 들어봤을 거예요. 터키와 그 위에 있는 흑해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에요. 조그마한 나라입니다. 그 아르메니아가 옛날에는 유명했어요.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전체가 기독교였어요. 국가 자체가 기독교를 국교로 한 나라는 아르메니아가 세계 처음입니다. 카스피 해와 흑해 바다 사이, 터키 북쪽에 아르메니아가 있어요.

아르메니아에 야지디교(Yazidism, 야지드교)라는 특수한 종교를 갖고 있는데 조로아스터교, 기독교도 섞여서 있어요. 어쨌든 아르메니아 중 소수민족들이 뭐를 걱정하느냐 하면...... 이 내용이 다큐멘터리로 찍혀 나온 게 있어요. <인간의 땅>이라는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인사이트 아시아-인간의 땅>, 2009.6.21~12.18 KBS1에서 방영)인데 1,2,3편 중 3편이 야즈단(Yazdan)이라고 불리는 유일신을 믿는 야지디족(Yazidis)에 관한 건데요.

그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도 있고 특수한 그들만의 종교가 있는데 전에는 2,500만 명이었는데 지금은 100만 명 남았어요. 쿠르드족(Kurd)의 일종이라 보면 돼요. 쿠르드족이라 해서 이라크, 터키 이 방면에 나라도 갖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시리아한테 구박당하고 이라크한테 구박당하고 터키한테 구박당하고 특히 터키한테서 구박을 많이 받죠.

국가가 없으니까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군대가 없잖아요. 군대가 없으니까 계속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핍박을 피해서. 피할 때마다 자기들은 자유롭게 유목생활하고 싶은데 사방을 둘러봐도 전부 국가가 있는 거예요. 국가는 법이 있죠. 법은 세금 내야 되죠. 국가의 명령 따라서 군에 징집당해야 되죠. 그게 싫은 거예요.

우리끼리 산다는 게,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 우리 조상이 살던 땅, 이 땅에서 그냥 살래. 그럼 이 조상은 죽은 조상이에요. 죽은 조상의 땅에 그들은 뭐를 이루느냐 하면, 국가가 아닙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거예요, 공동체.

그런데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제일 큰 요건이 뭐냐. 공동체 숫자가 계속 어느 정도 되어야 되는데, 노래도 자기들끼리 부르면서 노래 가사가 이래요. ‘우리 조상이 있는 땅 그 조상이 살던 땅 우리는 그 조상의 후손들’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단합을 하는데 노래 끝나고 난 뒤에 일종의 축제죠, 소수 공동체가 모여서 노래 부르면서 단합들을 하는데, 술 한잔 먹고 끝내면서 어떤 40대가 또 이야기합니다. “나 다음 주로 떠날 거야.” 그러니까 거기 공동체 구성원들이 “왜? 우리 방금 노래 불렀잖아? 우리 조상이 있는 땅, 우리는 떠나지 않기로 했잖아. 왜 떠나야 돼?” “돈이 없어. 돈이 없어서 이대로는 못 살아. 자식들이 뭐 사달라고 하면 살 돈이 없어. 나 돈 벌러 가야돼.”

그렇게 공동체 일원이 하나 없어지거든요. 그다음 장면이 뭐냐. 또 누구 노인네 죽어요. 죽으니까 또 이 공동체 성원이 또 하나 죽는 거예요. 그러니 그 사람들이 떠나버리면...... 그 사람들은 그동안 강력하게 이슬람한테 개종을 요구받았는데 버티고 있었거든요. 기독교라 하지만 사실은 기독교가 아니에요. 이상한 종교, 혼합된 종교인데 이들이 점점 더 닳아지는 거예요. 이제 공동체 자체가 없어지는 거예요.

원래 인간은 공동체가 용납되지 않아요. 공동체는 어디 소속이냐 하면 현대에 들어서는 국가에 전부다 소속이 됩니다. 국가 없는 공동체는 이 현대사회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걸 도저히 용납 못하는 거예요. 우리 조상들의 땅에 내가 산다는데 국가 네가 뭔데 왜 공격하느냐.

여기 오늘 4절에 보면 조상들이 있던 땅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친구들이 그래요. 우리 그냥 양 치고 살자. 양 치는데 시장에 가니까 시세가 떨어져가지고 양 서른 마리에 150만원 주고 팔았어요. 양 한 마리당 5만원. 220만원 받으려다가 흥정에 실패해서 150만원밖에 못 받았어요. 그러면 150만원가지고 그 가족들, 식구도 많아요, 전부다 옷 하나 해주고 그런 식으로 사는 거예요.

친구들이 하나씩 떠날 때마다 그들은 고민에 빠지는 겁니다. 조상이 있는 땅인데 우리가 어떻게 떠날 권한이 있는가? 우리는 조상이 토대가 되는데. 그러니 그들의 주장은 뭐냐? 조상이 있고 땅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터전이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조상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있을 때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혈육이라고 하는 거예요. 혈육, 종족, 국가 이전의 공동체. 무슨 공동체? 혈육 공동체. 집안끼리만 모여 있는 씨족사회. 또는 좀 크다 싶으면 부족사회. 국가 이전에 사회 모양새가 씨족이었고 부족이었어요.

인디언들이 메이플라워호타고 온 영국의 사람들하고 싸워서 많이 죽었어요. 그 인디언들은 자기 땅이 없어요. 이건 공동체보다 더 해요. 그 땅은 신의 땅이기 때문에 신의 땅을 우리가 선물로 받은 겁니다, 선물로. 그러니까 인디언들한테는 부동산 투기 같은 그런 건 없어요. 전세사기 이런 게 있을 수가 없어요. 어느 누구도 땅은 개인의 소유, 부족의 소유가 아니라 그냥 신으로부터 잠시 있으라고 부여받았기 때문에 또 다른, 양이 먹을 초지가 있으면 이쪽 신에서 저쪽 신으로 가면 돼요.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하고 떠나면 돼요.

그 인디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학살당했죠, 백인들에게. 백인들에게 학살당했고 결국 그들이 간 곳은 감옥 아닌 감옥. 그게 인디언 레져베이션(Indian Reservation). 인디언 보호구역. 미국에도 있고 캐나다에도 있어요. 캐나다에서 얼마 전 발굴하는데 인디언 애들 학살당한 현장이 나타났거든요. (1977, 독일 그룹 Orlando Riva Sound 발표) 1970년대에 나온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빰 빠밤 빰 하는 Indian Reservation 노래, 나중에 한번 찾아보세요. 인디언 보호구역.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마오리족을 뉴질랜드에서 보호하듯이......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에서 뭐하며 먹고 사느냐 하면 가슴 치면서 먹고 살아요. 우가 우가 우가 탁! 탁! 이래가지고 관광객들 상대로 해서 가슴 치면서 인상 찡그려가지고 그거 끝나고 나면 식당에서 음식팔고. 땅속에다 뜨거운 지열을 이용한 고기 구워서 그거 내와서 먹거든요. 나라에서는 생활보조금 다 줍니다. 그걸로 전부다 마약해가지고 정신 헬렐레해서...... 공짜 돈이니까 전부다 뭔가 제정신이 아닌 거예요.

뭐를 모른다? 변화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거예요. 인간이 변화에 대해서. 왜 자연은 변하지 않는데...... 인간은 자연 질서대로 사는데 자연 질서가 변하지 않아요. 자연 질서가 변하지 않으면 누구도 변하지 않아야 되는 겁니까? 그들의 씨족 공동체도 한결 같아야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런 공동체가 없어졌잖아요, 다. 다 없어졌다고요.

아르메니아라는 국가가 있어요. 있지만 공동체는 그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만약에 청년들이 아르메니아 수도에 간다 하면 이건 타락한 거예요. 거기는 술과 모든 마약과 온갖 유혹이 있는데 이건 우리 공동체의 문화가 아니라는 거예요. 순수하게 자연과 벗하면서 돈 없어도 없는 대로 그냥 살다가 아프면 아픈 대로 죽는 것이 우리 고유 문화인데 거기서 온갖 서양의 나이키부터해서 K-pop부터 시장의 고급스러운 물품들이 나오니까 일단은 그걸 돈 주고 살 수는 없어요. 돈이 있어야 돼요. 돈도 없는데. 양 30마리 팔아서 150만원 가지고 그걸로 얼마나 견디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변하지 말아야 될 것은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변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들의 주장은. 확정되었기 때문에. 자연과 더불어서 확정된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물어야 되겠죠. 인간은 이렇게 씨족, 부족으로 살면 되는데 국가가 왜 등장했습니까? 그것도 근대국가가. 국가가 왜 등장한 거죠? 만물이 달라졌습니까? 예수님께서 강림하셔서 국가가 생긴 거예요? 아니에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만물이 처음 그대로 있다. 지금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전통대로 살아야 되고 조상 살았던 대로 살아야 되지, 우리도 달라져서는 안 된다. 이게 씨족, 부족의 의식입니다. 특히 동양사상 같은 데에는 이게 철두철미하죠. 조상 제사 드리면서.

그런데 여기서 과학이 발달했어요. 과학이 발달했으니까, ‘만물이 처음 그대로 있다’에서 그들은 ‘만물이 그대로 있는 이유가 뭘까?’. 여기서 만유인력으로부터 시작해서 과학적인 법칙을 뽑아내는 거예요. 과학적인 법칙을 뽑아내는 순간 누가 달라집니까? 인간들이, 만물은 그대로 있는데 거기서 법칙을 뽑아내는 거예요, 법칙을.

밤에는 자야 되는데 물이 낙하하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기로 훤하게 밝아져버린 거예요. 전에는 아르메니아 산에서 목축하던 사람이 “밤이다. 이거는 신께서 우리보고 자라 하는 거야. 하나님께서 자라 하는 거니까 자자.” 이렇게 됐는데 훤하게 대낮같이 밝으니까 밤에 나가서 춤도 추고 하는 거예요.

벌써 과학의 혜택을 입는 겁니다. 여기 자연에 있는 모든 자연법칙을 끄집어내니까 한쪽에서는 작대기가지고 양을 치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총, 대포, 특히 노벨이 크게 키운 화약개발을 하죠. 석탄으로 배를 몰다가 석탄 떼서 하던 것이 석유로 바뀌면서 드디어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가 영국의 주목을 받고 영국의 주목을 받으니까 여기에 미국이 관심있어가지고 사우디아라비아하고 이란하고 석유체결해가지고 그다음부터 사우디아라비아는 사막에 살다가 두바이나 이런 데서 갑자기 고층빌딩 막 올리고 하는 게 뭐냐 하면, 자연은 그대로 있되 인디언처럼 자연따라 공동체로 사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힘을 뽑아내는 거예요, 힘.

이제는 자연의 힘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과학기술과 지혜와 합리성으로 우리 인간들의 세계를 따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대로 사는 게 아니고 자연을 정복하면서 튀어나온 게 바로 근대국가에요. 근대국가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정복하는 그런 재주나 학문이나 기술이나 그런 데 협조하지 않으려거든 너는 이 국가의 번영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자로 낙인찍혀서 교도소 가야되죠.

우가 우가 우가! 이렇게 하는 거 있잖아요. 거기다가 그런 거 하지 말고 그 힘 가지고 건축 자재 좀 날라서 35층 짓는 데 보태라하면, “우리 조상들은 그런 일 없다!” 하거든요. 조상들은 그런 일 없으면 그럼 뭐 돈 한 푼도 없지 뭐. 돈 한 푼도 없으니까 버스비도 없겠죠. 없으면 뭐하겠어요? 이제 슬슬 도둑질이나 하죠. 그래서 교도소 가는 거예요.

물건을 하나 살 때 옛날에는 100원 주고 샀다면 주위에 있는 기술과학 발전이 물가를 인상시켜버리면 자기가 갖고 있는 돈 가지고 동일한 물건을 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외부환경에 이끌리는 것을 피해서 독자적으로 살 수가 없어요.

TV에 자연인들 나오죠? 옛날에 사업하다 다 말아먹은 사람들이에요, 그거. 처음부터 자연이 좋아, 이런 거 아니에요. 말아먹고 아내하고도 살기 싫고 해서 아내는 산밑에 살고 자기는 산위에 살면서 그냥 세월 보내는 사람이고 돈푼이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게. 뭐 자연을 어떻게... 그런 거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과학기술로 하여금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정복하면서 그러한 재화(財貨)라 하는데 금융적인 돈의 흐름을 경제라 하는 거예요. 이 과학에 기초해서 경제가 발전되고 경제를 관리하면서 정치가 되니까 결국은 돈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이 땅에서 죽으라 이 말이에요! 갑자기 큰 소리 치네. 돈 없으면 죽어버려라 이 말이에요. 돈 없는 게 왜 인간대우 받으려하냐. 이 땅에서는 돈 없으면 사람 대우 못 받습니다.

국가발전에 보탬이 되어야 주민등록이라도 받아요. 국가발전에 보탬이 안 되는 것은 교도소나 보내버리죠. 항상 국가에서 돈 주고 취직할 때 묻는 것은 국가발전을 위해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야? 컴퓨터, 영어, 뭐야? 네가 할 줄 아는 거 내놔봐. 그거하고 돈하고 바꿔줄게. 사람 사는 게 이거거든요, 이거. 자식들 공부시키는 이유도 그거고요.

아르메니아에서 떠나는 사람들은, 나는 못 산다. 조상의 땅에서 못 산다. 나는 돈 벌러 간다. 돈 벌러 어디로 가느냐? 도시로 가거나 안 그러면 해외로 가겠죠. 난민으로 가요. 전쟁난민이 아니라도 취직난민들이 전 세계에 많이 돌아다니니까. 그래서 한국 와서 일하고 돈모아가지고 자기 나라 송금하고 그러잖아요. 그게 뭐냐. 공동체는 사라졌어요. 국가밖에 없어요.

옛날에는 신에 대해서 신에 대한 일체성은 있었어요. 일체성. 첫 번째, 신과의 일체성. 이것이 더 발전하면 두 번째, 자연과의 일체성.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현대는 뭐냐. 세 번째, 국가와의 일체성.

국가가 유목민들을 보호하지만 만약에 외국에서 적이 왔을 때 러시아 쳐들어왔을 때 여기 양 쳐야 될 젊은 유목민들, 첫째 아들, 둘째 아들은 국가에서 징집을 해버려요. 징집해서 총알받이 하죠. 양만 치던 애들이 뭘 할 줄 알겠습니까? 우크라이나 근처 가서 총알 나르고 받아주면 명태 하나 줄게. 러시아 징집할 때 명태 하나 주고 간대요. 명태 하나 받아 집에 갖다 주고 너는 군대 가라. 왜 그래야 됩니까? 너는 국가와 일체니까. 국가 없는 너는 없고 국가 없이는 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러시아에 스탈린이 와서 종족들 사는 데 와서 자기 마음대로 기차에 태워서 다 바꿨어요. 백만 명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러시아 저 엉뚱한 데 다 가버렸어요. 이미 그만큼 옛날에 수모를 많이 당했어요. 스탈린 때. 우리 한국에 있는 조선족도 어디 갔습니까? 카자흐스탄에 갔잖아요. 이동하면서 삼분의 일 다 죽었어요, 삼분의 일이, 기차타고 오면서.

그러니까 지금 4절에 대해 이걸 조롱한다고 하는데 주의 강림에 대해 완전히 빼놓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강림의 의미가 뭐냐? 이렇게 설명했으니까 여러분들 감 잡았겠죠. 주의 강림의 의미가 뭐냐. 인간은, 자연 안에 자연 밑에 있는 이 인간들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는 거예요(전1:2). 인간은 그 자체에 아무런 의미 없는 겁니다.

주님께서 인간이 자연과 일체화된 이 토대 자체를 주의 강림으로 이걸 없애버립니다. 없애버리려는 취지는 뭐냐 하면 주님만 오직 주님만 의미 있고 가치 있지, 인간은 무가치한 거예요. 이 세상에 가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나머지는 가치 없어요.

뭐도 가치 없다고 보면 됩니까? 이 자연이라는 것, 이 자체가 가치 없어요. 그럼 과학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눈에 보이는 자연에서 법칙 뽑아놨잖아요. 자연에서 법칙 뽑아놓은 이것도 가치 없습니다.

지구를 돌고 있는 혜성이 있는데 또 이 혜성을 돌고 있는 소행성이 있어요. 미국 나사(NASA)에서 실험적으로 우주선을 소행성에 충돌시켜서 궤도가 바뀐다는 것을 실습해봤는데 과연 궤도를 바꾸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게 과학이거든요. 이 우주선 보내서 궤도 바꾸기 위해 소행성 충돌하는 거, 이거 왜 했어요? 한 이유가 뭡니까? 자기가 무가치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까, 아니면 인간만이 유일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겁니까? 인간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을 토대로 해서 자연이 있어줘야 거기서 법칙을 뽑아내고 인간만의 세계를 건설하는데 보탬이 된다고 계속 진행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명제가 필요하냐 하면 ‘이 세상에 인간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걸 인간사회의 명제로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게 맞아요? 인간의 생명보다 더 귀한 건 없습니까? 뭐 찬송가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하는데.

여기 보면 찬송가도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 찬송은 그렇게 하는데 예수님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제가 찬송해드릴 테니까 내 목숨 좀 귀하게 봐주면 안돼요? 뭐 딜하는 거지. 거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노림수가 있는 거예요.

그동안 인간이 자연과 일체화시켰는데 성경 말씀과 인간을 일체화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에 자연과 인간이 일체화된 이것이 자연과 더불어서 무너져 내려야 된다는 겁니다. 무너져 내리면서 아까 전도서 언급했지만 인간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인간이 계획하는 거, 생각하는 거, 그거 인간 마음대로 안 된다. 다 때가 되고 사랑할 때 미워할 때 태어날 때 죽을 때 그 때는 인간 손에 달린 게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 보면 5절에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되어있죠, 6절에.

물이 넘쳐서 세상이 멸망했다, 라는 이런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려면 현재 인간에게서 무엇이 벗겨져야 이 하나님의 계시가 확 와 닿겠습니까? 뭐가 사라져야. 그동안 우리는 이런 말씀을 줘도 이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는 그 원인이 어디 있죠? 세상은 물로써 다 죽었다, 거기에 대해서 ‘아 그렇구나.’ 이렇게 끝나면 안 되고 ‘뭐지, 나는? 그럼 나는 뭐야?’ 라고 자기 문제로 진지하게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그동안 뭔가 내 주변에 얼기설기 얽혀있는 그 관계의 정리가 필요하겠죠.

자, 물로써 멸망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에요. 크게 쓰겠어요.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 안 한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 안 해요.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문제 삼아야 돼요, 우리 스스로? 인간이 인간하고 상대하고 자연하고 상대하고 인간이 하나님하고 상대하려고 하는 이 시도, 이 시도가 거두어져야 돼요. 걷어져야 된다. 이걸 문제 삼아야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과 상대한다, 이건 뭐 이런 사람 별로 없고. 인간이 자연과 상대한다, 이것도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인간의 대부분의 활동은 뭡니까? 인간이 누구하고 상대해요? 인간하고 상대하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뜻대로 안되니까 뭐라고 합니까? “이 인간아” 이렇게 하죠.

“아침에 빨리 일어나서 좀 씻고 밥 먹고 학교 가야지.” “싫어, 엄마.”하면 “아이고 이 인간아.” 하잖아요. 엄마가 애를 깨웁니다. 누구하고 상대하는 거예요? 인간이 인간하고 상대하는 거예요. 그런데 걔가 너무 똑똑해. 똑똑해서 잠은 더 자고 싶고 엄마는 깨울 때 걔가 그냥 잠자리에서 하는 말이 “엄마는 나를 상대하려고 하는 이유가 뭐지?” 그렇게 묻는 아이도 없겠지만.

그럼 엄마는 이야기하겠죠. “빨리 학교 가야지.” “학교를 왜 가야되는데?” 그거부터 시작해가지고 시간 끌기 작전에 들어가는 거예요. “학교 안 가면 안돼?” “학교 안가면 너는 나중에 굶어 죽어.” “굶어 죽지 뭐. 굶어죽으면 되잖아” “너 굶어죽으면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냐?” 아이가 하는 말이 “엄마도 같이 굶어죽으면 되지, 옆에서.” 그러면 할 말 없으면 “자식이라고 키워줬더니만 엄마한테 한다는 소리가...” 별 대꾸가 안 되니까 막히니까 그래도 권위는 있어가지고 안 지려고 한마디 한다는 게 그런 거예요. “자식 키워줬더니 소용없어. 엄마가 실컷 키워줬더니만...” “엄마도 내 옆에서 죽으면 되잖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서 밥 먹어라. 엄마도 바쁘다.” 이래가지고 유야무야 그냥 또 넘어가죠.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에요. “아 아침에 이렇게 맑구나.” 그걸로 하루 일과 시작됩니까? “빨리 일어나라!” 이걸로 시작되지. “오늘도 참 맑구나.” 이걸로 시작되는 게 아니잖아요. 자연과 상대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또 기도하는 분들도 더러 있을 거예요.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고 또 큐티도 하고 이렇게 개시해야 오늘도 재수, 혹시 아나 또 행운이 찾아오고 재수 좋을지.

지금 이 인간이 하나님 상대하고 자연을 상대할 때는 뭐를 잊어버렸느냐 하면 물로써 세상이 멸망했다는 그 본래의 취지를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노아 홍수 이야기, 나중에 불심판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 사람들은 이걸 안 믿지, 라고 세상 사람들을 욕할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물심판, 불심판 알게 됨부터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고 달라져야 하는가,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가 예상한 대로 변경되지 말고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경되어야 돼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아까 후딱 언급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말씀과의 연합. 말씀과의 일체성 또는 삶의 계시화】삶의 계시화라 하는 것은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요, 그 반대에요. 말씀이 나에게 그냥 덮친 겁니다.

그냥 말씀이 덮치는데 표준이 뭐냐? 표준이 물이고 불이에요. 멀쩡한 물과 불이 누구 말 듣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죠. 왜 우리는 그렇게 못 사냐 이 말입니다. 물은 자기의 자존심도 없고 불은 자기의 개성도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퍼부으라’ 하면 퍼붓고 ‘화산아, 터져라’ 하면 터지는 거예요.

물과 불, 빛과 공기 이 전부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움직이고 변화하는 겁니다. 전도서 같은 경우에 바람도 마찬가지고요. 태양도 마찬가지고 대자연 모든 것이 주님의 지시대로 움직입니다. 말씀대로 움직이는 사람, 대표적인 사람이 시편 105편에 나오고 창세기에도 나오죠. 이름은 들어봤습니까, 요셉이라고.

시편 105편에 보면 요셉이 말씀이 응할 때까지 말씀에 꽁꽁 묶여있다고 되어있어요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말씀의 밧줄로 꽁꽁 묶은 거예요. 밧줄로 묶어라~ 하는 거 있죠. 오늘 좀 꺾이죠? 사랑의 밧줄로 나를 꽁꽁 묶어라. 김용임이 부른 노랜가 모르겠어요. 그것까지 알 필요 없고요. 요셉은 말씀에 의해서 꽁꽁 묶인 거예요. 묶였다 이 말이죠. 마치 뭐와 같이? 물과 같이. 그리고 장차 흠뻑 주어질 불과 같이.

그런데 인간들은, 과학하는 인간이나 인디언 같은 사람은 뭐보고 대화하느냐? 자연보고 대화해요. 이 자연종교가 바알종교거든요. 바알종교의 원천은 가나안 땅에 있는 엘(El)이라는 종교가 있어요. 원래 인류가 에덴동산부터 시작했으니까 그때부터 엘이라는 것, 어떤 사람은 엘의 원조는 야훼라고 했다가 신을 보고 야훼 한 게 엘로 변했다, 뭐 온갖 가설을 이야기하는데 하여튼 심심하면 무슨 짓을 못해요. 그것이 이집트나 사방에 다 퍼진 거예요.

옛날 바벨탑에 하나님을 알았잖아요. 창세기 4장 한번 봅시다. 4장 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을 불렀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뜻이거든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등장했다.

그전에 인간들은 자연 그 자체를 신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신들은 전부다 자연의 신이에요. 그리고 그리스의 제우스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어느 수요일에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 계통을 언급해드렸지요. 혼돈(Chaos)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땅 등장하고 시간 등장하고. 하나의 자연 자체가 신으로서 등장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연의 하수 신들이 할당되고 배치되었다. 자연의 세계가 배치된 신들의 위원회, 신들의 비상대책 위원회처럼 신들의 세계에 인간들은 그냥 피조물로써 있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했냐? 그래야 납득이 돼요. 합리적으로 설명이 된다고요. 인간의 조상, 조상 따져봐야 그 조상은 누가 만들었는데? 이렇게 되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인간의 처음은 신과 신의 혼인으로서 인간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남신도 있고 여신도 있고 이 둘이 결혼해서 인간이 생겼고 인간이 생기고 난 뒤에 그 인간과 신들이 결혼하면서 여기서 영웅이 생겼고 나중에 인간이 인간하고만 결혼해서 오늘날에 인종을 이렇게 퍼뜨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처음이 뭐냐, 처음? 근원이 뭐냐? 이걸 뭔가 후손들에게 일러줘야 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래야 노선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자식들이 아버지의 권위에 대해서 종교적인 신령한 힘을 그들이 가질 수가 있어요. 가정 내에 아버지가 신령한 힘을 갖게 되면 자식들은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얻습니다.

어른이 있으면 애들은 어른이 있다는 그 자체로부터 자기가 안정감을 느끼고 보호를 느끼면서 동시에 목표와 목적을 거기서 만들어내요. 나 아버지처럼 살래. 나 엄마처럼 살래. 그러면 그들은 자연의 질서에 더 확대된 자기 내부의 정서의 질서도 갖춰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요. “너 왜 사냐?” “몰라.” 이러면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까 아르메니아 사람들 얘기한 4절, 이제 이해되시죠? 조상이 있어 이 땅을, 이 공동체를 우리는 떠날 수 없다. 가난해서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조상의 땅을 지켜야 된다. 이 공동체, 우리의 혈육의 공동체를 지켜야 된다. 노래 만들어내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국가도 간섭하지 말고 외국 나라도 간섭하지 마라. 이렇게 살다가 그냥 죽을래. 세금이고 뭐고 그런 소리하지 말고 그냥 살다 죽을래.

이렇게 버티지만 그렇게 버티다 보니까 숫자가 점점 더...... 늙어죽고 맞아죽고 심지어 테러당해서, 이라크한테 테러까지 당해요, 쿠르드족한테 테러당해요, 테러하는 이유가 이슬람교로 개종하라고 그거 반대하니까 온 마을을 이슬람 테러단체가 다 죽여버렸어요. 동네 밥이에요. 어디 가나 다 얻어맞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뭘 포기해서 그런 수모를 당했는가? 힘을 포기했죠. 그럼 힘은 어디에 있느냐? 국가가 지켜준다는데. 국가의 힘이에요. 국가의 힘을 얻는 대신 국가에게 복속되어야 되고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 일꾼으로 가입이 되어야 되죠. 저와 여러분들은 어때요? 군대 가라 하는데 거부했습니까, 집사님? 안했죠. 이래나 저래나 완전히 국가와 한패네요.

그렇게 국가의 일원이 되면 국가가 지켜주고 나는 나대로 산다. 아니에요. 할당되고 배치 받아요. 너는 이 자리, 너는 이 자리에 있어야 되고 너는 이 자리를 떠나면 안 돼. 국가가 배당을 해줘요. 배치를 해준다고요.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대안학교 출신은 소용없어요. 검정고시 같은 이런 제도. 계속 법들을 만들어요. 만들어서 국가의 말을 안 들으면 안 되도록 하는 거예요.

경찰이 와서 제일 먼저 보는 게, 주민등록증 봅시다. “주민등록증이 뭐에요? 우리는 우리 조상의 땅에 사는데.” 필요 없어요. 주민등록이 있어야 돼요. “조상은 제사할 때 찾고 주민등록 있습니까?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없으면 체포당하죠. 내 하던 일을 멈춰야 됩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은 인간하고 대화하거든요. 헛된 것들이 헛된 것들과 대화합니다. 그렇게 대화하는 가운데서 물이 우리 주님의 말을 듣고 이 땅에서 노아 때 완전히 전 세계 모든 인간들이 다 죽었다는 원인에 대해서, 이 기롱하는 자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는 왜 노아 홍수가 왔느냐? 그걸 우리가 알아야 돼요. 노아 홍수가 왜 오게 되었는가.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멀쩡한 하늘에 비가 오되 적당히 와야지, 이렇게 쏟아질 이유가 없습니다. 둘째 시간까지 갈 것도 없이 시간 조금 남았으니까 미리 한번 해보겠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雨露)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그 땅에 이슬이나 비가 오고 안 오고 그 지시는 누구의 지시에 따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다, 뜻이 뭐다, 라고 전달하는 전달자가 누구냐? 디셉 사람 엘리야, 바로 선지자입니다. 이 엘리야는 여러분 알다시피 죽을 때 그냥 곱게 죽지 않고 그 시체가 있었습니까? 시체 찾았는데 시체가 없죠. 시체 자체가 없어요, 시체 자체가. 왜냐하면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갔는데 1번- 구름타고 올라갔다, 2번- 불수레 타고 올라갔다. 불수레 타고 올라가죠.

불수레라는 것이 자연현상 가운데 그런 게 있습니까? 불수레 갈려면 불이 하나님 말을 들어야 되잖아요. 그러나 인간은 불을 숭배했죠. 배화교나 조로아스터교. 불을 숭배했죠. 불을 자기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건 알아요, 옛날에 화산 터졌을 때에.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 불을 신으로 보는 거예요.

자연에 고개 숙이고 엎드릴 줄 알았지, 그 자연도 누구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압니까? 모르면 10분 휴식하죠.

 

 

서울의존강의20221013b 베드로후서 3장 6절(주님과의 일체성)-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중요한 것은 물과 불은 사람 말을 안 듣는다는 거예요. 다른 데서 지시받아요. 그런데 인간은 인간하고 상대하죠. 뭔가 핀트가 틀린 거예요. 사람이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은 어쨌든 간에 이 안정된 자연 안에서 자기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자기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하는데 자연 자체가 안정하지 않아요. 주님의 지시에 따른다고요.

그러면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물과 불은 어떤 원리와 어떤 원칙에 의해서 주님의 어떤 원리와 원칙에 의해서 그들은 움직이느냐. 그 원칙만 알면 되는데 그들은 원칙 알 생각은 안하고 자연이 안정적이기만 하면 우리는 그냥 잘만 하면 거기에 맞춰서 살 수 있다고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조롱하는 자가 그거에요. 조상 때부터 그냥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별나게 설칠, 이런 약속을 받을 이유가 뭐가 있느냐 하는 거죠. 조상 때부터 이 대자연은 너무나 안정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이 말이죠, 이 대자연이.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반박하기를 “전에 노아 홍수 있었잖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노아 홍수가 있다는 말은 물이 주어졌다는 말이고 그 물은 누구의 지시를 받았다는 뜻인데 누가 지시했으며 어떤 원칙에 의해서 지시에 따랐는가 하는 그 점을 성도가 미리 알아야 되겠죠.

열왕기상 18장 1절에 보면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되어있어요. 17장 1절에서는 수년 동안이라고 되어있죠. 삼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18장 1절에 보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비를 내린다는 겁니다.

이 비 내리고 엘리야가 관여하고 있는 이 공간은 전 세계적인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특별한 지역에만 국한되는 계시를 준 거예요. 특별한 지역에 엘리야가. 그럼 다른 민족은?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자연의 질서 아닌 하나님의 자체적인 질서, 이것은 다른 민족에게는 알려준 바가 없고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주는데 알려주는 방식이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줬고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가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현 상태와 거기에 대처하는 하나님의 대처, 이 두 가지를 다 알아야 하나님의 원칙을 여기서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비가 오지 않는 이스라엘, 그들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야기가 이것부터 출발해야 돼요. 우상, 이것은 거짓된 신입니다. 거짓된 신. 하나님은 이것을 신이 아니다, 했어요. 신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우상을 섬기는 게 아니에요. 신을 섬기죠. 나 이제부터 우상 섬길래. 이런 인간 없잖아요.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 절대자를 섬긴다. 그러니까 인간이 신을 섬길 때는 무엇을 내다보느냐 하면 이 자연에 대해서 발언권을 가지고 통제권이 있는 신이라고 여기고 그 신에게 잘함으로써 이 자연이 자기 존재가 생존하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라고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골랐던 신, 바알신이죠, 신과 인간 사이에 모르는 바가 있습니까? 서로 뭔가 틀어지는 게 있어요, 없어요? 없죠. 둘 사이에 다른 본질이 있느냐 이 말이죠. 나는 신을 섬기고 신은 신을 섬기는 나에게 내가 원하는 걸 채워준다. 이 둘 사이가 죽이 잘 맞죠. 뭔가 이질적인 것이 들어있지 않죠.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신은 뭡니까? 우상이 되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원칙이 뭐냐 그걸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원칙을 알려면 먼저 인간들이 신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느냐를 알고 ‘이건 아니지’ 가 되어야 돼요. 이건 우상이지, 가 되어야 돼요. 엘리야는 이걸 우상으로 봤다고요.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뭐부터 거쳐 와야 돼요? 우상 섬김부터 거쳐 와야 하나님의 진짜 뜻을 알 수가 있는 거예요. 우상이라 하는 것은 인간과 신이 서로 잘 통하는 게 우상이에요. 인간의 소원, 인간의 애씀, 인간의 노력, 인간의 아이디어, 인간의 양심 여기서 긍정적으로 그것을 받아주는 신, 그게 우상입니다.

그리스 제우스 같은 신들은 신들의 연합체가 되었는데 거기는 신들이 인간하고 똑같아요. 질투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연애하고 바람피우고 전부다 똑같이 해요, 똑같이. 복수하고. 그렇게 하니까 신과 인간이 잘 내통하고 서로 거리낌 없이 필요할 때는 요청하고 또 들어주고 하는 일들이 있는 겁니다. 그게 그리스 로마 신화에요.

다른 민족에도 다 신화가 있잖아요. 신들이. 그 신들의 공통점이 뭡니까? 인간이 갖고 있던 인간의 마음과 그 신의 마음이 한결같이 서로 잘 통한다는 데에 있어요. 그러니까 신을 섬긴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죠. 자연을 섬긴다는 것은 자연 자체가 신이 움직이는 계시로 보기 때문에, 태양신, 달신, 별신에게 그저 인간으로서는 자기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자인하고 부족하지만 도와주소서, 이렇게 하면 흔쾌히 도와주시는 신.

오늘날 한국 교회 신이죠. 한국 교회. 그래서 교회 나가시라 이 말입니다. 그게 왜 우상인지, 그게 왜 엉터리고 거짓인지를 교회를 다녀봐야 알죠. 그거 안 다녀보면...... 교회하고 절하고 서로 싸우는데 싸울 필요 없어요. 둘 다 우상이에요. 부처나. 부처가 무슨 신을 믿어요. 그러나 부처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부처가 신이 돼버린 거예요.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인도엔 힌두교가 거의 90% 되고 불교는 흔적만 남아있어요. 왜 그럴까요? 힌두교 자체가 모든 잡신들을 연합하는 연합체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불교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이유가 부처도 또 한 신이니까 지금 신을 잘 믿고 있는데 또 부처신으로 바꿀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불교가 별 인기가 없는 거예요.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로마서 1장에 나온 것처럼 인간은 자연을 우러러보면서 자연스럽게 우상을 신을 섬기게 되어있는 존재입니다. 구체적으로 경전이 있어서 구체적으로 신을 세분화하지 않더라도 그냥 마음 자체가 조상신이든 무슨 신이든 절대적인 신에 대해서 의존하고 싶고 기대고 싶고 그 신에게 빌고 싶은 게 본심이거든요.

지금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우상 여기서 멈추면 안 되겠죠. 우상과 대결했다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우상을 마주해서 우상과 대결한 거예요. 어디에서? 다른 나라에서? 아니요. 다른 나라는 내어버려둬요, 그냥. 원체 버린 인간인데 그거 뭘 거쳐요. 여기는 뭐냐?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땅에서 비가 오고 안 오고가, 첫 번째 바알에게 빌어서냐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비가 오고 안 오고냐. 비는 누구 말 듣느냐 하는 그 싸움을 한 거예요, 엘리야를 통해서.

그러면 우리가 이스라엘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선지자가 이렇게 나오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렇게 나오면 우리는 편하게 생각해서 그럼 여호와 믿지. 이러잖아요. 그럼 여호와 믿으면 되잖아,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런데 그 당시 인간들이 바알 신을 섬겼잖아요. 신을 섬겼으면 하나님이 이 신을 공격하는 타겟이 어디까지 이어져야 되겠어요? 인간에게 가는 거예요, 인간에게. 인간에게 가면서 뭐를 하나님이 요구하느냐 하면 네가 믿는 신을 네가 철회하라는 거예요. 바알 신을 철회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이걸 요구하는 거예요.

문제는 인간이 그 바알 신, 자연 신을 철회할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철회할 마음도 없고 방법도 없고 어떤 식으로 철회되는지 그 수단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여호와께 돌아오면 되는데 돌아올 수가 없어요, 여호와께. 이거 어떻게 하면 좋죠?

오늘 본문으로 가봅시다. 옛날에 물로 심판받은 것처럼 앞으로는 불로써 전 세계가 불바다 된다. 오케이, 믿습니다. 문제는 그걸 믿을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불이 오겠지. 불오면 완전히 다 타지. 타면 되지. 지구도 탄다니까 같이 타지 뭐. 그게 대책입니까?

아주 쉽게 하겠어요. 지금 물심판, 불심판이 있잖아요. 그럼 인간 자체가 어떤 인간만 구원받느냐 하면 물에서 건짐 받은 사람, 불에서 건진 사람만 구원되는 거예요. 불에서 건진 사람 누가 있죠? 다니엘 세 친구죠. 물에서 건진 사람 누굽니까? 노아죠. 그럼 노아 방주가 노아 아이디어에서 나왔습니까? 아니죠.

이걸 지금 못하는 거예요. 물이 왔다는 것은 물에서 건져낸 자만 구원받는다는 뜻이고 불을 보낸다는 것은 불속에서 건짐 받는 자만 구원받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무슨 수로 물에서 건짐 받고 불에서 건짐 받습니까? 해군의 UDT도 안 되겠다. 물속에 잠수해서 한 5분은 모르겠지만 2시간동안 물에 숨 안 쉬고 있습니까? 안되잖아요. 죽잖아요.

그러니 지금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엄청난 이야기를.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 우리가 어떻게 물에서 건짐 받고 불에서 건짐 받습니까?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손들고 이야기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방법이 있어요? 이때는 잠수함 만든다, 이런 거. 불에서는 불길을 막을 수 있는 특수복을 제작해서 입는다. 무슨 불이 특수 제작한 옷으로 견딜 수 있는 불이 오겠어요. 지구도 태운다는데. 모든 원소, 110개의 원소를 다 태운다는데 뭐로 제작을 해요? 제작을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제작할 게 없는데요.

방법에 대해서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보니까 물심판, 불심판이 보통 심각한 이야기가 아니죠. 오면 그만이지, 가 아닙니다.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구원된 자가 아니라는 뜻이죠.

거기에 대한 대책은 여기 마태복음 24장 27절에 보면 있습니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인자의 임함.

대책은 뭐냐 하면 엘리야가 하늘로 갈 때 하늘에서 불수레가 준비된 것처럼. 그럼 엘리야는 어떻게 돼요? 불수레가 준비됐다는 말은 엘리야는 불속에서 건짐 받는다는 거예요. 그거 뜨거워서 어떻게 타요? 좌석도 불일텐데.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인자의 임함. 하나님께서 준비한 것은 불수레도 아니고 방주도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준비한 것은 인자, 예수님 그 자체가 오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 이것을 강림이라고 하는 거예요. 강림, 오시는 것. 그럼 예수님께서 첫 번째 이 땅에 오실 때는 강림이 아니고 그건 출생이죠. 이 땅에 태어난 거죠. 문제는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서 어른이 되어 활동했을 때 제자들뿐만 아니고 보통 인간 가운데서도 그 분이 장차 올 불심판에서 우리를 건져 낼 사람이라는 것을, 불수레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택시 불러서 택시 왔는데 택시 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알아야 동행을 하든지 예수님 가신 길을 가게 될 텐데 제자들도, 예수님 네가 가라. 당신이나 가세요. 이렇게 된 거예요. 너는 어디 가나? 난 고기 잡으러 갈란다. 예수님 근처에 안 가기 운동. 뭐 운동까지는 아니지만. 열두 제자 중 하나 팔아먹은 자는 물론이고 나머지 열한 제자가 예수님 잡힐 때 했던 행동은 뭡니까? 예수님 곁에서 도망치기였어요. 예수님 곁에서 도망치기. 하나님께서 불수레 보냈는데 안 타고 도망치기. 그런 거예요.

그럼 아까 열왕기상 이야기처럼 인간이 생각해놓은 신과 그 중보자 메시아는 도대체 어떤 내용입니까? 도대체 제자들이 생각하는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이나 용어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하나님이라는 그분과 그리고 그분이 구원한다는 메시아. 메시아가 어떤 메시아에요? 메시아 믿는다고 다 구원받는 거 아니거든요. 어떤 메시아를 믿는가, 그들이.

왜 예수님 곁에서 도망쳤어요? 그는 내가 원하는 메시아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여호와가 아니기 때문에 도망친 거예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는 생명이 없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6:53)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나한테, 예수님을 방주로 본다면 또 광야의 만나로 본다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나는 만나다. 나는 방주다.” 소개한다고 “아이고, 기다렸습니다.” 올 위인은 있다, 없다?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무도.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6:65)

그래서 자연 안에 물과 불로 이루어진 대자연 안에 산다는 걸 뭐로 규정해야하느냐 하면 【이미 심판 안에 산다】라고 규정을 해야 이 문제가 풀립니다. 나 지금 숨 쉬고 사는데 장차 죽고 난 뒤에 천당 가기 위해서 뭘 하지? 교회 다닐까? 지금 이래가지고는 문제가 안 풀려요. 뭐부터 알아야 되는가. 여기 에베소서 2장 1절 한번 보겠습니다.                   

지금 교회 다녀서 예배 출석하고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너희의 허물과 죄로 ( ) 되어 있죠. 너희의 허물과 죄로 네가 어떻게 됐어요? 이미 죽은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안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 언약을 줄 때 어떤 안목으로 주느냐? “아이고, 그동안 살아있었구나. 언약 받아라.”가 아니라 죽은 자에요, 죽은 자. 에스겔 37장에 보면 그 인자되는 에스겔을 데리고 해골 있는 골짜기로 데려갔죠. 그리고 묻습니다. “쟤들이 살겠느냐?” 하나님이 질문한 거예요. “저들이 살겠느냐?” 그 질문이나 “주의 강림이 과연 오시겠습니까?” 그 질문과 맥락이 같아요. 오시면 우리가 마중 나가면 되지. 지금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어디까지 일을 하느냐. 어디‘까지’ 일을 한다는 걸 알아야 돼요. 어디까지. 우리한테 와서 좋은 설교하고 우리에게 은혜 주고 우리 잘 살게 취직시켜주고 우리에게 양식 주고 그 일하는 게 아니고, 우리를 살았다는 우리를 ‘나는 죽었다’까지 일을 하셔요. 너는 이미 죽었다, 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확실하게 하는 그 일을 누가 하신다? 우리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겁니다.

인간은 내가 뭘 해야 되는지, 뭘 할 수 있고 어디까지 되고 어디까지 안 되는 조차도 몰라요. 뭐 얼추 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인간들의 문제 가운데서 여러 가지 문제 있지만 그중에 참 못 고치는 일이...... 모기를 잡아야 되는데...... 못 고치는 일이 뭐냐 하면, 내가 모기를 잡을 수 있다 이런 거예요. 내가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자꾸 끄집어내는 일을 한다는 거예요. 내가 행할 수 있다.

남편이 아프다. 아내가 뭐합니까? “여보, 걱정하지 마. 내가 돈 벌어줄게.” 무심코 나오죠. “당신 아파도 내가 당신 키워줄게. 걱정하지 마.” “당신은 정말 훌륭하고 지혜로운 여인 같아. 여호와의 여인 같아.” 하나님께서, 둘 다 참 놀고 있다. 둘 다 죽은 존재들이. 뭘 할 수 있는데?

인간은 인간하고 상대합니다. 인간하고 상대하니까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까지 안 할 수 있다는 그 사항을 어디서 골라내느냐 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골라내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람은 저렇게 하는데 나는 못할까? 아, 저 사람은 나보다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나는 못한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한 게임에 두 골 넣는다. 발리킥 했다. 아, 저건 손흥민만 할 수 있어. 나는 못해. 되게 겸손해요. 난 동네 조기축구는 할 수 있어. 저건 못해.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인간이 24시간 생각하는 게 그거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비행기 한번 몰아보시겠습니까? 아 그건 안 돼. 비행기 가는 건 내가 맨날 봐, 이 동네에 살면서. 가는 건 보지만 비행기 몰고 가는 건 난 못 해. 하지만, 아르바이트 하시겠습니까? 오 그건 하지. 내가 할 줄 아는 거.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모기 잡는 것도 못한다, 난. 인간이 지금 어디에 막혀 있느냐 하면 내가 이런 일은 할 수 있고 이런 일은 못한다는 것을 본인이 결정한 것 때문에 자기가 여전히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는 거예요. 산 자 티를 내고 산 자 값을 하는 거예요.

B.C. 3세기 경, 구체적으로 B.C. 220년 경에 중국에 진시황제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진시황제가 하도 잘난 척하니까 어떤 사람이 농담 삼아 약을 올릴 겸해서 그리고 황제니까 까불면 또 죽으니까 진지하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임금님은, 아니 임금이 아니라 황제죠, 최초의 황제를 쓴 것이 진시황이니까. “황제님인 진인(眞人)과 같습니다.”

참 진(眞)자 써서, 진인(眞人)과 같습니다. 하니까 그 황제가 진인, 안 들어본 용어니까 궁금한 거예요. “진인이 뭐냐?” 이렇게 하니까 그 사람이 이렇게 설명했어요. “진인이란 물에 들어가도 안 젖고 불에 들어가도 안 타고 구름을 탈 수 있고 천지와 함께 영원히 존재하는 신선을 진인이라 하는데 당신이 바로 황제님이 바로 진인입니다.” 이렇게 아부를 떤 거예요. 아부를 떨어도 진담인지 안 그러면 농담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부를 떨었어요. 중국 역사책에 나오니까 실제 있는 사실이고요.

자, 여기 한번 봅시다. 물에 들어가도 안 젖고 불에 들어가도 안 타고 구름을 타고 다니고 그다음에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는 신선과 같다고 했을 때 이게 결국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인간의 마음속에 이런 희망과 여망이 들어있다는 거잖아요.

이게 바로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이게 죽은 거예요. 신이 될 수 있고 신선이 될 수 있고 진인이 될 수 있고 할 수만 있다면 구름까지는 안 타겠지만 요새는 비행기타고 다니죠. 비행기를 라이트 형제가 만들었잖아요. 그 형제가 비행기 그거 왜 만듭니까? 나는 죽었어. 죄로 말미암아. 그래서 만들었습니까? 아니죠.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측정하고 싶은 거예요.

그 비행기 만들어가지고 1차 대전 때 써먹었습니다. 처음에는 영국에서 비행기를 정찰하면서 비행기 타서 손으로 폭탄을 밑으로 내리는 아주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했죠. 이게 2차 대전 때는 폭격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폭격기 없는 나라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서 점령당하게 되어 있죠.

일본이 마치 한국을 지배하듯이. 2차 대전 때 우리나라 독립군이 비행기가 몇 대 있었습니까? 무슨 비행기가 있겠어요. 발각되면 다 폭파당하죠. 비행기가 있을 수 있었습니까? 없죠. 비행기 없으면 딱콩 딱콩, 그거가지고 일본을 이깁니까? 한국이 일본을 이긴 이유가 뭐에요? 독립운동해서 이겼습니까? 아이고, 요새 이 발언 새면 안 되는데. 정치적 발언. 큰일 난다, 이거. 일본보다 더 무기가 발달된 미국과 러시아에 의해서, 사실은 미국이에요. 왜냐하면 러시아가 참전한 것은 미국이 핵폭탄 터트리고 난 뒤에 참전했기 때문에. 나가사키 히로시마 떨어지고 난 뒤에 뒤늦게 이건 완전히 거저 먹기로 해서 들어온 거예요, 스탈린이.

그러니 더 구름 많이 타고, 물에 들어가 안 젖는 것은 방수복이잖아요. 불에 안 타는 것은 요새 소방관들이 입는 그 옷이죠. 영원과 함께 있다, 이건 DNA저장하면 되죠. 인간의 DNA저장. 보세요. 옛날에 진인이라고 여겼던 것이 지금은 점점 더 이걸 인간이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거예요. 하늘로 뚫고 지나가는 건 로켓이죠. 달까지 갔잖아요, 달까지. 구름은 아니지만 우주선 타고 달까지 갔잖아요.

이런 인간들보고 Stop, 멈춰라. 됩니까? 더 쉽게 말해서 인간이 주를 십자가를 믿겠어요? 안 믿죠.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왜 믿어요,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인간이 살아있으면서도 믿고 천당 갈 수 있는 방법을 교회가 제공해야 교회가 유지 가능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전부다 왜곡된 가짜 예수, 가짜 십자가, 가짜 복음, 가짜 성령 전하는 거예요. 가짜 삼위일체. 삼위일체는 가짜가 아니고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그건 가짜라 할 것도 없어요, 설명하는 사람도 모르니까. 그냥 삼위일체.

그렇게 해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뭐냐? 교회가 있어야 우리가 구원받는다. 그거잖아요. 교회 중심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특별한 목사가 있어서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이 중요하다고 하는 주장도 있어요. 복음이 뭔데? 복음이 뭔데? 또 몰라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 믿으면 된다. 어떤 인간이? 살아있는 인간이. 그러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살아있는 인간은요 우상밖에 안돼요. 이게 십자가든 피든 언약이든 예수님의 재림이든 어떤 성경구절을 갖다대도 본인이 살아있다고 여기는 한 그건 전부다 우상으로 다 변해버립니다.

에스겔 37장을 다시 얘기한다면 에스겔이 뭘 보게 하느냐 하면 언약적 안목에서 보게 해요. 언약적 안목에서. 우리도 한번 봅시다. 에스겔 37장. 지금 제가 진도 어디까지 나갔느냐 하면요. 여러분 또 잊을까봐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물에서 건짐 받지 못하면 물에서 건짐 받지 못하죠. 똑같은 말이니까. 불에서 건짐 받지 못하면 불에서 건짐 받지 못하죠. 똑같으니까. A는 A이고 B는 B. 똑같은 말이니까.

그 불세례가 뭐냐? 십자가에요. 왜? 예수님부터 먼저 물에서 건짐 받고 예수님부터 먼저 불에서 나와야 돼요. 그게 물세례이고 그게 불세례에요. 인자부터 먼저 해야 돼요. 그 인자부터 먼저 하는데 인자도 인자되신 예수님이 본인 의지로 했습니까, 아니면 성령 충만해서 했습니까? 성령 충만해서 했죠.

이제 모든 비밀이 풀렸네요. 예수님께서 이뤄놓은 그 업적이 주님의 그 십자가 다 이루었음이 성령을 통해서 오지 아니하면 불심판이고 물심판이고 어느 누구도 살아남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 성령 받지 않는 자는 무슨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성령 받지 않은 자는 죽은 자에요. 믿거나 말거나요. 뭐 그게 맞는데.

여기 에스겔 37장 봅시다. 3절에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물었죠. 그러니까 에스겔이 하는 말이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건 뭐냐 하면 비나 불이 누구 말 듣습니까? 주님 말 듣죠. 마찬가지로 인자라는 특수한 관계 속에 있는 선지자도 누구 말 먼저 들어요? 모든 권한, 주도권을 여호와께 돌립니다. 이걸 이 문장으로 한번 써볼게요.

【인간은 말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내가 말하는 게 아니고 말이 나로 하여금 말이 나오도록 해준다, 말이. 하나님의 계시가 나오도록 해줘요. 지금 인간의 문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본인이 뭐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자부하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에요.

‘예수 믿고 어떻게 삽니까? 양심껏 살면 안 되겠습니까?’ 예수 믿고 양심껏 살게 되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예수 믿는 것도 본인이 할 수 있는 거고 양심껏 사는 것도 본인이 하겠다는 거예요. 네가 그걸 왜 하는데? 제가 살아있거든요. 네가 어딜 봐서 살아있는데? 어딜 봐서 살아있어요? 왜 본인이 살아있어요, 본인이? 왜 본인이 살아있습니까? 본인은 죽고 그 안에 누가 살아있어야 돼요? 인자가 살아있어야 되죠. 예수님이 살아있어야 되죠. 우리는 예수님을 태우는 불수레에 불과한 거거든요. 가마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는 주님의 운반꾼이죠.

그래서 다시 에스겔 돌아와서, 지금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에스겔에 보면 언약에 내가 내 신을 너한테 보낸다고 하는 대목이 나와요, 에스겔에 (겔36:27, 37:14). 그리고 에스겔 37장 4절,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방금 제가 쓴 게 이거잖아요. 인간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통해서 말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왜 말을 못해야 되는가? 바짝 마른 뼈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뼈가 어떻게 말을 해? 뼈는 말을 못하죠. 그러나 말해질 수는 있죠. 누구 힘으로? 주의 힘으로. 주의 말씀으로. 인간을 사용해서 말이 나올 수는 있죠. 그럴 때 그것을 가지고, 주님의 일이 나오는 것을 가지고 세 자로 ‘살았다’고 해요. 살았다.

그래서 에스겔 37장 10절에 보니까 그렇게 살았을 때에 그들이 개인적으로 살았어요, 안 그러면 뭐로 살았습니까? 개인적으로 살았습니까, 뭐로 살았죠? 개인이 아니고 뭡니까? 하나님의 군대로 살았죠, 10절에.

여기 10절에 보면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군대죠. 군대는 개인의 자격으로 움직일 수 없어요. 군대는 지시체제가 따로 있습니다. 움직일 때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할당이고 배치이고 배당이 되는 겁니다. 너는 이 땅에서 이거하고 살라고 하나님께서 할당을 주고 배당을 주는 거예요. 그걸 은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에스겔 37장 11절을 봅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런데 12절에 보면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의 무엇을 열고 나오라? “무덤을 열고 나오라”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심판 없는 구원은 없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물에서 건지고 불에서 건지기 위해서는 심판을 몸에 장착하고 있어야 돼요. 구원 되고 난 뒤에 이런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 몸에 장착되어야 돼요. 그걸 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이 말이죠.

십자가가 나를 심판할 때 십자가거든요. 십자가는 죄수를 매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십자가에 매달려야 될 인간이었더랬습니다. 그게 내게 합당했습니다.’라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고 이미 십자가 죽었던 나를 십자가로 살리신 그 분의 외침으로서 내가 이렇게 외칩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다시 산 자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함이라.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게 없어요.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자기를 위해 살면 예수가 됐든 여호와가 됐든 그건 뭐가 돼요? 우상이 돼버려요, 우상이. 뭐 신학을 다 하고 성경을 외워도 그건 우상입니다. 왜? 항상 그 목적의 끝은 뭡니까? 이래서 나는 살았다,가 되니까. 내가 사는 것은 끝났어요. 끝났다니까. 내가 자랑하는 것은 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자랑하죠. 죄인의 자격으로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를 자랑할 때 같이 섞여서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12절에 보면 너희가 무덤을 열고 거기서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런데 무덤을 열 때 자기가 알아서 나옵니까? 그럼 자기가 죽은 자가 아니죠. ‘여기 무덤의 입구가 어디더라?’ 이렇게 나오면 그건 죽은 자가 아니죠. 바짝 마른 뼈가 어떻게 저절로 결합이 됩니까? 그럼 어떻게 하느냐.

여기에 하나님의 신을 두어서 살린다. 그게 14절에 나옵니다.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바로 우리가 이것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못 지켜요. 방금 이 본문 자체를 누가 지키는가. 인자 되신 예수님이 이 코스대로 그대로 온 거예요.

마태복음 24장 27절에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자,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함으로써 번개부터 해서 번개고 태양이고 별이고 하늘이고 이 세상 자연세계는 다 누구의 지시를 받게 되어 있어요? 주님의 지시를 받는 거예요. 주님의 지시를.

그러면 이 자연 세계는 뭐를 묘사하고 뭐를 표현하기 위해서 여전히 활동하느냐. 주님의 강림하심을 대비하고 주님의 강림하심의 흔적을 전달하기 위해서 이 자연세계는 나름 굉장히 분주하고 바쁘죠. 번개도 바빠요. 심지어 28절에 독수리도 바빠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자연세계 모두가 잔칫집 같아요. 뭐 자기 맡은 역할에서 되게 바빠요.

마태복음 24장 29절 읽겠습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이런 사실을 모르고 보게 되면 야, 신기하다 하죠. 그런데 주께서 모든 경우를 거쳐서 주께서 주가 되고 난 뒤에 다시 보니까 이게 신기한 겁니까, 마땅한 거예요? 마땅하죠.

여기 컵이 있는데 컵이 두 개 나란히 있잖아요. 제가 컵을 하나 옮겼어요. 옮기니까 한쪽 컵이 “야, 너 무슨 수로 옮겼어? 되게 신기하다.” 이렇게 하거든요. 뭐가 신기해? 내 컵 내가 옮기는데 뭐. 이게 신기합니까? 하나도 신기하지 않아요. “너도 해줄까? 너도 옮겨줄게. 신기하냐? 너 지옥 가. 신기하냐? 너 천국 가. 신기하냐?” “주의 합당한 주되심입니다.” “그렇지, 그렇지.”

이걸 구원 받은 사람은 알고요. 지옥 가는 사람은 아직도 뭐가 뭔지 내가 왜 지옥에 와 있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거예요. 나중에 지옥 가보면 알아요. 이게 인간의 일이 아니고 남보다 나쁜 짓을 더 많이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일방적 자기 선택이라는 사실을. 일방적 자기 조치라는 사실을 알죠.

다시 베드로후서로 돌아가 봅시다. 사람들은 대자연이 잠잠하게 있으니까 때를 기다리는 걸 모르고 시기를 기다리는 것도 모르고 원래 대자연은 그냥 잠잠히 있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이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우상적 사고방식이에요.

5절에 보면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게 창세기 1장 이야기고요. 6절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창세기 노아 홍수 때, 7장 8장 이야기죠. 노아 홍수 때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다.

자, 여기서 한번 물어봅시다. 오늘 강의 잘 이해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물이 넘친 게 신기한 겁니까, 이것은 마땅한 거예요? 어떻습니까? 물로 되어서 물이 넘치는 게 자연스럽죠. 진짜 이게 내추럴, 자연스러운 거예요. 쉽게 말해서 세상이 물로 심판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극히 자연스럽죠.

내가 빌딩을 샀는데 빌딩이 물에 휩쓸려 다 쓸어져버렸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하면 안 되고 ‘참,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했다.’ 누가 누구처럼 했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하나님처럼 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박수~ 잘 하셨습니다.

계단에 올라가다 엎어져서 계단에 정강이가 다쳤다. 참 하나님, 하나님처럼 하셨습니다. 이래야 되지, 왜 저한테 이런 일이...! 네가 뭔데, 네가? 네가 뭔데? 죽은 인간 정강이 좀 깐다고 해서 네가 그렇게 죽은 게 사라지고 갑자기 산 자 돼버렸구나, 네가.

그러니까, 나는 베드로후서 3장 6절 믿습니다, 그런 말 믿지 마세요. 그건 지식으로 안다는 뜻이고 이거 아니까 나한테 불행이 안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사전에 자기 단도리 하는 거 밖에 안돼요. 비겁한 변명밖에 안 되는 거예요.

7절에 봅시다. 7절은 아주 진짜 신바람 나요, 이거는. 7절 보고 모든 우울증은 다 날라가야 됩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전에는 물로 심판받았지만 앞으로는 뭐로 심판받는다? 동일한 말씀이에요, 동일한 말씀.

물을 보냈던 그 말씀이, 말씀이 말씀 값을 할 때는 전에는 물이었지만 지금은 말씀이 말씀 값하기 위해서는 물로써는 안하고 불로써 한다. 거기에 대해서 간수되었다는 말은 지금 대기상태에 있다 이 말이에요.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다. 이걸 한번 설명해봐야 되겠죠.

내가 받을 불세례가 남아있다. 불세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함축해서 소개했어요. 그가 오시면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준다. (마3:11)세례 요한 나는 물로써 세례주지만 그분이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보기에 불과 성령은 시간적인 거리가 있는 게 아니고 동시에 일어나는 걸로 보는 거예요. 불과 성령으로 온다는 말은 성령 받은 사람은 알곡이 되고 불세례를 받은 사람은 지옥 불에 간다라고 세례 요한은 시간을 압축해서 보는 겁니다.

산이 이렇게 겹겹이 있는데 A라는 산, B라는 산, C라는 산 다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볼 때는 가족사진 같이 바로 뒤에 딱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시간이 이렇게 응축되어 보이는 거예요. 이게 얼마 후에 되는가는 세례 요한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게 언제 일어나든 관계없이 동일한 말씀이다. 어떤 말씀? 물로 내렸던 동일한 말씀. 물을 내린 말씀이 불은 안 내리랴? 내리죠.

그러면 그 동일한 말씀이 있다면 이게 물이 되든 불이 되든 멀쩡하든 우리는 뭘 쳐다봐요? 말씀만 쳐다보는 이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 하고 이 사람은 세례 요한처럼 시간을 압축해서 봐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거예요. 그 시간의 흐름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중요한 것은 말씀인데.

그 말씀이 내가 말씀을 말한 게 아니고 말씀이 나로 하여금 말씀되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그 와중에서 우리는 내가 했다,를 일체 허용하지 않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없으면 좋은 점이 뭐냐 하면 내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어요. 내가 뭐 한 게 있어야 죄를 짓지. 논리가 그렇게 되잖아요. 뭔가 내가 한 게 있어야 죄를 짓지. 그럼 죄는 뭐냐? 내가 한 게 있다는 자체가 죄가 되어버렸죠.

왜 죄책감을 느끼느냐? 내가 한 게 있다는 기억 때문에 그래요. 오늘은 애들한테 밥해줬지. 밥해줬으니까 밥해줬겠죠. 그런데 애가 맛있게 먹어. 난 역시 잘했어. 이 자체가, 그렇게 하고 있을 때 복음을 들어보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 그러면 밥해주는 것은 헛됨에서 뺄까요, 집어넣을까요? 어떻게 할까요? 집어넣어야죠. 바짝 마른 뼈가 밥도 잘하더라, 이렇게 되면 곤란하잖아요. 바짝 마른 뼉다구를 통해서 자식에게 밥해주는 뼉다구가 되게 하셨어요.

주께서 하시지, 우리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그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버려요. 새털같이 가볍게 만듭니다. 우리가 한 게 없어요. 그러면 공부마치고 갈 때 내일 아침부터 우리는 뭐하면 됩니까? 주님한테 물어볼까요? 그 물어볼까요, 가 내가 하는 일이거든요. 그것도 하지 마. ‘물어볼까’도 하지 마.

그런데 자꾸 물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합니까. 저거는 내가 안하는 게 아니고 할 것 같은데. 멀리서 차가 온다. 피해라, 피해라. 피하고 싶어요. 안 피하면 아플 것 같아. 아프다가 30분 내에 죽을 것 같아. 내 본능에 그냥 피하죠. 본능에 피했다 이 말이죠. 죽은 자가 산 척 했구나. 이미 죽은 자인데 또 살라고 무슨 행동을 했구나.

그런 책망을 우리는 평생 들어야 됩니다. 고칠 필요 없이 ‘주께서 이미 고쳤다’ 라는 확인만 하시면 됩니다. 내가 사업구상을 하고 뭘 해도 이 사업구상을 하고 다음엔 뭘 해야지. 오후 2시에는 뭐하고 오후 4시에는 뭐 해야지. 이 고질병을 이미 고쳤다, 라는 상태에서 그 고질병이 도져서 계속 나오는 겁니다. 오늘은 반찬 뭐하고 아침에는 뭐해야지. 내일 아침에는, 냉장고 넣어놨다, 얘야.

전부다 뭡니까? 이미 우리의 모든, 내가 했다는 이 고질병을, 고쳐진 상태에서 주의 말씀을 경유해 볼 때 굳이 그런 거 하나 안하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을 경유해서 발견하는 것. 이게 경건한 사람이고 이게 불로써 이미 구원 받으심이요 물로써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게 뭐냐? 주님과의 일체화. 오늘 제목은 <주님과의 일체화>입니다. 자연과의 일체화가 아니라 주님과의 일체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물심판 불심판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오히려 두려워하기는커녕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내 안에서 살게 할 만큼 산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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