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3장 25절 (말씀의 온전함) 221122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3장 25절부터 보겠습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문이 이렇게 있으면 주님이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럼 여기는 뭐냐 하면은 시간이 종결, 시간이 멈췄습니다. 그런데 문 밖에는 시간이 흐르고 있어요.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시간이 살아있어요. 살아있으니까 여기 있는 사람이 뭐냐 하면은 자기의 과거라는 게 있고 그들의 지금 현재 자기 모습이 있고 현재는 우리가 과거에 주를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라는 시간을 가지고 문 열어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 자체가 시간을 거론하게 되면 이 문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문 안에 있는 이 세계는 시간과 무관합니다. 어디서 무얼 했는지 전혀 묻지를 않아요. 시간과 무관한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 사랑을 하게 되면 거기서 시간 요소는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 말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웠다 하더라도 일단 사랑 속에 들어와버리면 그 힘들고 어려운 그 시기가 사랑 속에는 없지요.
요한복음 15장인가 보면 애기가 엄마 몸에서 출산을 할 때는 고통의 시간이 있어요. 그러나 일단 출산하고 난 뒤에는 뭐를 잊어버리느냐 하면은 과거의 아팠던 그 시기, 그 지난날이 잊어버리게 되는 거에요. 이게 없어져요. 지금 인간들은 옛날에 많이 했잖아, 옛날에 많이 한 것을 근거로 지금 내가 나를 천국에 넣어주세요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시간 동안에 자기가 열심 내고 주를 위해서 했던 것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밑천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천국의 근거는 뭡니까? 나의 행함이 되죠. 나의 행함. 그러나 이 문 안에서는 시간이 날라가버린다는 말은 과거의 내가 뭘 했는가, 뭘 열심히 봉사했는가 그 자체가 이게 전부 다 필요치 않지요. 그게 필요하지 않아요. 과거에 뭘 했는지. 다시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 천국을 이야기할 때 문이라는 요소를 주인 되시는 분이 일방적으로 설정을 했다는 것이 중요해요. 문이라는 걸.
문이 인간들이 결정하고 저 사람 들어오지 말도록 문 닫읍시다 라고 인간들이 의견을 제시하는 게 아니에요. 의견을 제시하는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문으로 차단해버린 거에요. 문, 차단성 또는 차단막. 차단해버리는 겁니다. 그 차단할 때 의도적으로 차단을 해버리는 거에요. 어떤 걸 차단을 해버리느냐 하면은 인간의 기억 속에 자기의 과거 시간을 품고 있는 그 의식 있잖아요. 시간 의식. 그 시간 의식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문, 이 안을 무슨 세계라고 했습니까 아까? 무슨 세계? 사랑의 세계죠. 사랑을 사랑답게 지켜주기 위해서 뭘 걸어 닫았다? 문을 걸어 닫은 거에요.
그러면 이 문밖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행함이지 뭐는 아니다? 사랑은 아니다 라는 거에요. 여기서 행함은 인간이 누구 사랑? 자기가 자기 사랑하는 거죠. 자기가 자기 사랑한다는 것 이거요 자기 구원을 자기가 막는 바가 이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본인 사랑하기 때문에. 요한복음 12장에는 미워하라고 했잖아요. 본인이 본인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한테 온 밥그릇도 차버려요. 내가 내 구원을 막는 그 근거가 본인에게 있어요. 본인에게. 본인을 놓지를 못하니까. 본인에 대한 집착을 놓지를 못하니까. 본인의 행함을 덩달아 놓지를 못하는 거에요. 본인의 행함을.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시작을 내가 시작한 일이 괜찮은 결과로 마감이고 싶어 하는 거에요. 인간은. 내가 시작한 것이 중도에 거부 안 당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모든 기도가 그거에요. 내가 시작한 일이 헛방, 헛일되지 않게 해주옵소서. 내가 실천한 일이 좋은 결과로 맺어지게 하옵소서. 차라리 노골적으로 내가 날 사랑하는 그 사랑을 주께서 인정해달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될 텐데 노골적으로 그 이야기는 못하고 주를 위해서 했다고 오늘 본문에 26절에 나오죠. “우리가 주를 위해서 했습니다.”
자, 이것이 뭐가 문제인지를 지금부터 글로써 적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간단하죠. 내가 살아있으면 주님이 죽어있는 바가 되고 주님이 살아있으면 나는 죽은 자로 간주된다. 이 문장으로 정리하시면 됩니다. 이 문장으로 왜 정리하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내가 살아있으면 인간은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기준을 본인이 만들어내요. 천국 가는 기준, 지옥 가는 기준을 본인이 괜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냥 가만히 마네킹처럼 살아있습니까? 나 죽었다 이렇게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요. 살아있을 때는 내가 살아있는 의미를 피어내면서 그것을 냄새피우면서 살아있어요. 내가 살아있다는 걸.
보통 집안 어른이나 조직 사회에서 회식할 때 상사가 술 한잔할 때 큰 소리 칠 때 하는 말이 뭡니까? 나 안 죽었어! 이렇게 하잖아요. 나 안 죽었다는 말은 뭡니까? 나를 개무시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명절날 집안 모일 때에 왕년에 큰소리 좀 쳤던 왕년에 좀 잘 나갔던 집안 어른들이 평소에는 말 못하고 술 한잔 청주 일본말로 정종 한 댓 병 먹으면서 술김에 자기 본심 드러낼 때 보면 “나 안 죽었어! 너희들 나 늙었다고 무시하는데 나 안 죽었단 말이야!” 하면서 그냥 또 말만 하는 게 아니에요. 상을 엎지요. 상을 엎어버려요.
퍼포먼스를 해가지고 아주 자극적인 퍼포먼스 상을 엎어버려요. 발로 차가지고 엎어버려요. 나를 대충대충 띄엄띄엄 보지 마 이러면서 횡포를 부리지요. 그러면 부인되시는 분이 아 이 양반은 술만 먹으면 이런다고 어깨를 치고 평소에 안 그러더니 오늘 왜 이래. 둘이 연기를 벌여요 연기를. 그런 짓하면 아래 친척 조카들은 집에 가 집에 가자. 이참에 잘됐다. 집에 가자. 안녕히 계십시오. 빠져나올 핑계로 잘 된 거죠. 꼭 객기 부리는 게 하나 있으면 그 다음은 파장 분위기 되지요.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과 지옥 가는 기준을 본인이 고집스럽게 설정을 해버려요. 설정을 해서 일단은 나는 무조건 집어넣어. 천국 가는데. 나는 무조건 집어넣어요. 그리고 나처럼 되지 않으면 전부 다 지옥가요. 그러면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은 죽어계시잖아요. 본인이 살아있다는 것은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나는 최종 내가 안다 가 돼요. 나만. 누구 알고 누구 알고 아는데 대통령 알고 손흥민도 알고 아는데 알아도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확실하게 잘 안다 이렇게 되죠.
그러면 나 말고 다른 것은 뭡니까? 재끼는 거죠. 알기는 아는데 희미하게 알고 알기는 아는데 제대로 모르는 게 되죠. 그 재끼는 가운데 누구까지 재낍니까? 누가 재껴지죠. 누굴 제해야 됩니까? 예수님이죠. 이 말은 뭐냐? 내 살아가는 내 기준을 정한다는 말은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겠다는 고백이에요. 나 예수님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게 확 와닿는 것은 나는 이런 식으로 구원 받는다 그것만큼은 확실한데 주님이 어떤 기준을 설정했는지는 그거는 내가 잘 모르겠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뭐냐 하면은 주님은 내가 날 아는 만큼 나는 주님을 모르는 자가 되지요. 주님은 내가 모르는 자가 되고 주님이 설정한 그 기준은 내 기준에 대해서 핍박을 받아버려요. 내 기준에 대해서 제거하고 치워 치워 하고 치워버리는 게 돼요. 치워버리는 것. 그런 경우들이 기도할 때 나와요. ‘주님 내가 인생 한 평생 살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줄 아십니까?’
자, 아십니까 라고 이야기했지요. 아십니까? 할 때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나는 내가 한 평생 지독하게 고생했다는 것은 나는 지독하게 알고 있는데 주님은 내가 이렇게 고생한 것 아는 것만큼 알고 계십니까 라고 묻는 게 아니에요. 주님 잘 모르지요? 그렇죠? 이런 뜻이에요. 주님은 내 사정 잘 모르지요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25절 26절 한번 보세요. 26절에서 뭐냐 하면은 그들은 주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할 때 이게 주장이 누구 주장이에요? 본인이 본인을 너무 잘 안다는 자의 주장이죠. 여기 주님이 무조건 내 주장에 동의하라는 윽박지름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나 너 몰라” 이렇게 된 거에요.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어요. 교회 열심히 충성했는데 ‘나 너 모른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에도 나와 있지요. “주를 위해서 귀신 쫓아내고 뭐 다 했습니다.” “누가?” “제가요.” “누구에요? 몰라 나 너 몰라.”
나 너 모른다는 말은 네가 내 앞에서 주님이 하는 그 기준을 너한테 적용을 시켜야 돼요. ‘주님 저 몰라요’ 이렇게 돼야 돼요. “주님 저에 대해서 저 아무것도 몰라요” 이렇게 돼야 돼요. 내가 나 모르면 무슨 기준을 함부로 내세울 수 없습니까? 내가 내세우는 기준이 이게 엉터리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이죠. 내가 끄집어내는 내 기준에는 반드시 나를 천국에 포함됐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기준이거든요. 그 기준을 인간은 생각할 수 있어요. 인간은 자유주의니까.
생각하는 건 좋은데 그거는 아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이죠 그것도. 내가 내세운 기준, 무조건 나는 내 편이라는 그 기준은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먹히지 않는다 라는 것을 인정하자는 겁니다. 사도 바울도 그걸 인정했지요.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한번 적어볼게요. 나는 [ ] 하지 않았다. ‘나는’ 과 ‘않다’를 연결시켰습니다. 나는 뭐하지 않았다. 나는 십자가지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장 13절 나는 하지 않았다. 나는 무엇 무엇 하지 않았다를 증거함으로서 유일하게 구원의 근거에 있는 십자가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는 주님 하는 일에 내가 거들 수 없다는 그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나를 은혜로 택했다는 거죠. 이게 성령 받은 사람에게 나올 수 있는 이야기에요.
아까 경우 예를 들어봅시다. “주님이여 내가 이 땅에 살면서 복음 때문에 얼마나 고생한줄 아십니까?” 라고 할 때 지금 뭐가 빠져버린 거에요? “내가 주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26절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쳤습니다” 에서 뭐가 누락된 거에요? 나는 무엇 무엇 하지 않았다가 누락이 되어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천국 문 바깥의 사람. 천국 문 바깥에 있는 사람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포함된 기준을 본인이 부인을 하지를 못하고 있어요. 자기를 내치치 못하고 있어요. 왜? 본인이 자기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자가 주님이 아니고 누구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 자신 있다는 이 말이거든요.
지금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한번 이렇게 비교를 해보세요. 무심코 들리는 것을 한번 비교를 해보세요. 그들의 말에서 본인이 섞이는지 본인이 재껴지는지 본인이 빠졌는지를 한번 보시라 이 말입니다. 그들의 평소의 행동과 태도를 통해서. 목사님, 이 정도까지 봉사하면 됩니까? 라는 그 물음 자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제가 이 정도까지 헌신하고 봉사하면 됩니까? 지금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물음 속에서 지금 자기를 뺄 생각이 전혀 없어요.
왜 못 빼는가? 나를 빼면 내가 한 일에 의미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있으나 마나 하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 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럼 나는 묻고 싶어요. “왜 당신이 있으나 마나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그 질문에 차마 답변 못합니다. 딱 감추지요. 그 답변은 벌써 다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나는 예수 믿는 것이 나 구원받기 위해서 믿습니다.’ 그 이야기에요.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예수 믿습니다.’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평소의 행동 말씨에 다 나옴에도 불구하고 차마 자기 입으로는 그 이야기를 못합니다. 자기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기 노력한 것을 시간적 순서에 맞춰서 딱 이렇게 기록되어있어요. 마치 가족관계증명서 보세요. 자기 식구 쫙 나와 있잖아요. 그런 서류를 본인이 갖고 있는 거에요. 기록하고 있는 거에요. 내가 10년 전에 뭐 했고 뭐 했고 헌금 5천만원 했고 이게 전부 다 있어요. 자기 생활기록부가 있다고요. 회사에 인사부에 보면 뭐가 들어있습니까? 걔가 언제 입사했고 언제 대리되고 이런 거 다 나와있지요. 그 서류를 서류철을 자기가 갖고 있다니까요. 본인이. 그게 자기 자아고요. 그게 시간 요소거든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문 있잖아요 문. 그 천국 문, 그 문은 인간이 설정한 게 아니에요. 그거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완전히 셔터문을 닫은 거에요. 일방적으로.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사랑인데 왜 사랑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시간요소를 없애는 방법이 사랑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시간 속에는 나의 행함의 행적들이 나열되어있어요. 서류철이 있듯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주를 사랑한 게 아니잖아요. 내가 주를 사랑한 경력들이 아니라고요.
우리는 우리 사랑하기 바빠가지고 내 사랑만 정신이 빠져가지고 내가 나 사랑하는데 본인이 감동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 감동하는데 미쳐가지고 일방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내 사랑에 막혀버리고 없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했다는 말은 그때부터는 네 사랑을 접어라는 뜻이거든요 이게. 네가 너 사랑했던 것, 네가 예수님 사랑했던 것을 이제는 그것은 폐기처분하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당신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아주 가벼운 존재, 너무 너무 나는 무엇 무엇 아닙니다 라는 ‘나는’ 뒤에 ‘아닙니다’를 하고 또 그냥 ‘아닙니다’ 하면 안 되지요. 겸손 떨죠. 중간에 뭐냐 하면은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집어넣어서 ‘아닙니다’가 돼요.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집어넣어서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식사했잖아요. 그러면 나는 오늘 내 힘으로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식사하도록 조성하고 힘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식사하도록 힘 안주시면 죽 먹어야 돼요. 그것도 제대로 숟가락 못 듭니다.
특히 잠자는 것에 대해서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내 힘으로 잠을 푹 자지 않았습니다. 이게 뭡니까? 주님의 힘으로 푹 자게 해줘서 고맙다는 감사하는 뜻이에요. ‘나는’ 뒤에 ‘않다’ 거기에다가 매사를 그 중간에다가 다 집어넣는 겁니다. 갈치나 고등어의 그 맛은 머리에 있지 않습니다. 꼬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건 괜히 중간을 지가 먹을라고 하는 거지. 진짜는 토실토실한 그 중간에 살에 거기 다 들어있어요.
핵심 부분은 핵심 엔진부분은 우리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내부에 텅텅 비게 하고 거기에다가 삼성 공장 반도체 보면 사람이 집어넣지 않지요. 로봇기계가 탁탁탁 심지요. 그렇죠? 우리를 하나의 반도체 펜이라고 보고 반도체 칩을 주님이 사랑으로 탁탁탁탁 다 심었다고 보세요. 사랑, 사랑, 사랑, 모든 게 사랑으로 심어 넣는 거에요. 주께서. 어제 12개 심었고 오늘 30개 심었다 하지 마세요. 사랑은 아무리 세월이 바뀌어도 사랑은 이렇게 시간 요소를 없애버립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지금 사랑한 것이 다음에 사랑한 것과 동일한 사랑으로 주어지는 거에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사랑할 때 사랑만 놓는 게 아니고 시간을 넘어선 시간을 극복하신 주님이 그 사랑 속에 함께 들어와서 우리의 주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만 덜렁주고 그냥 알아서 하라가 아니라 사랑, 예수님 자체가 우리 안에 그냥 슥 들어오시는 거에요. 우리의 주인으로서.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말도 되지만 사나 죽으나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다고 하는 거에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자, 다시 봅시다. 주님이 계시면 나는 의미 없지요. 만약에 주님이 안계시면 주님이 안계시기 때문에 이 허전함을 뭘로 채워야 되겠어요? 내 행함으로 채워서 그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한 것 가지고 억지로 그걸 붙들고 있어야 되지요. 믿을 것은 주를 위해 행한 내 행함 밖에 없으니까 그걸 붙들고 있어야 되는 거에요. 만약 그걸 누가 복음으로 부정한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뭡니까?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자, 분노라는 말 나왔습니다. 아까 유투브 강의할 때 분노라는 말 했습니다만 분노 또는 기쁘다, 감사하다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기본 감정에 속하는 겁니다. 나타나는 감정에 속하는 겁니다. 기분. 화난다, 기쁘다, 감사하다 또는 슬프다. 감정이죠. 어떤 사람이 나는 기쁘다 할 때 물어보세요. 왜? 왜 기쁜데? 그 다음 말이 중요한 거에요. 자, 기쁘다. 왜 기쁜데? 왜 기쁜데? 그 다음 말이 뭐가 나와야 돼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나 지금 행복해” 할 때 “왜 행복한데?” 물어보세요. 여러분한테 묻고 싶다 정말. 왜 행복한데? 왜 행복합니까? 대장금에 그런 거 나오지요. 무슨 맛이냐 하니까 아이가 홍시 맛입니다. 그게 왜 홍시 맛이지? 홍시 먹고 홍시 맛이라고 하는데 홍시 맛이라고 하지 뭐라고 합니까 라는 비슷한 대사가 나오는데 왜 행복하죠? 왜 화 나지요? 왜 슬프지요? 왜 기쁘지요? 왜 그렇습니까? 여기서 두 유형의 차이 나는 두 유형의 답변이 나옵니다. 왜?
1. 내가 행복하기를 고대하고 기대했는데 그래서 행복해서 기쁘다 이렇게 돼요. 답변이. 또는 분노하는 것도 내가 행복하기를 기대했는데 행복스럽지 않고 내 뜻대로 안되어서 나는 분노하고 나는 슬프다. 불행하다 이렇게 돼요. 이게 첫 번째 답변입니다. 물론 당연히 천국 문 바깥에 있지요. 25절 봅시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열어달라고 했지요.
자, 문 밖에 있는 사람이 문 열어달라고 했습니다. 너무 어려운 대목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묻겠어요. 자, 문이 닫혀있는데 문 밖에 있는 사람이 열어달라고 했지요. 제 질문은 이겁니다. 왜 열어달라고 했지요? 왜? 주께서 문 닫아서 안 열어주면 ‘알겠습니다’ 하고 집에 가지 왜 열어달라고 했을까요? 왜? 왜 열어달라고 합니까.
주님께서 문 밖에 있는 자들이 은근히 뭘 노리고 있는 것을 주께서 알았어요? 몰랐어요? 다 알고있어요. 그러니까 본인 생각밖에 없는 거에요. 나 구원받으면 참 행복할텐데 라는 그들의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걸 거절한 거에요. 그걸 거부한 거에요. 나는 내가 구원받았으면 천국 갔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걸 완전히 이렇게 밀어내는 거에요. 그러니까 열어달라는 것은 지금 분통 터트리고 있는 거에요. 진짜 발로 차는 거에요. ‘하나님 네가 뭔데! 주님 네가 뭔데!’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왜 주님이 하나님이고 창조주라면 지옥 보내면 고분고분 지옥 가셔야지 이게 창조자 앞에 있는 피조물의 마땅한 도리 아닙니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왜 피조물 주제에 본인의 기대가 있고 본인이 고대한 목적을 그걸 왜 갖고 있느냐는 거에요. 왜. 그걸 왜 갖고 있느냐 피조물 주제에. 시작을 본인이 시작할 권한이 없어요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시작을 해도 창조주가 시작을 해야지. 피조물이 왜 시작을 합니까.
아까 질문입니다. 왜 화냅니까? 내 뜻대로 안돼서. 네 뜻이 뭔데? 시건방지게 네 뜻을 네가 왜 갖고 있느냐. 네 뜻을 가지고 있는 순간 누구 뜻은 완전히 무시당합니까? 주님의 고유의 주님의 일방적 뜻이 피조물 주제에 내 뜻이 있다는 거에요. 뭐야 너. 네가 뭔데. 창조주도 아니고. 네가 창세전에 예정했어? 하나님과 의논된 사람이야? 언약 대상이야? 아니지요. 아닌 것이 네가 네 뜻이 왜 있어야 돼? 이게 보통 건방진 게 아니구나. 내가 아니라면 끝났지 네가 뭔데. 제 뜻은 그게 아니고요. 그 입 다물라! 그 입 다물라. 어디서 궁시렁 궁시렁 어디서 쓸데없는 뒷말이 왜 있느냐 이 말이죠. 내가 문 닫으면 끝나는 것이지.
사람들은 이런 버전, 자기 뜻을 고집하는 이 버전. 그러니까 사랑이 옴으로서 인간은 얼마나 평소에 하나님은 사랑이고 그런 건 다 핑계고 자기만 사랑했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들통내는 거에요. 자기만 사랑하는 것을 들통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자기만 사랑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 사랑이 절대로 못 들어오는 문을 만든 거에요. 인간이 자기 사랑하는 자들을 결코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문이 그 문이에요. 그게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만약에 어떤 사람이 문밖에 있는 자가 자기는 천국에서 쫓겨났잖아요. 어떤 사람은 커트라인 되가지고 누구는 천국에 문 안에 들어갔단 말이죠. 그럴 때 그 사람들 문 밖에 있는 사람들 하는 짓이 똑같아요. “그러면 쟤는요?!” 이러고 있다고요. “쟤는 왜 넣어줍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자, 그렇게 항의하는 심보는 여러분들이 충분히 분석할 수 있어요.
쟤는 왜 들어갑니까? 이 말은 뭐를 완전히 도외시하느냐 하면은 문이 사랑의 문이라는 것을 완전히 도외시해버리고 누가 주님을 더 사랑했느냐 여부에 따라서 많이 사랑하면 넣어주고 적게 사랑하면 안 열어준다는 평소의 자기 행함을 전제로 한 그것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거에요. 이 정신머리를 도끼로 부셔야 됩니까? 이건 뭐 부수지도 못하고 가르친다고 이게 바뀝니까? 지독한 자기 사랑을 뺨 때린다고 인간이 달라지겠어요. 마귀가 집어넣은 걸 인간이 그걸 고칩니까? 못 고칩니다. 마귀가 집어넣은 거에요.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자기가 자기 사랑을 고칠 수가 없어요.
자기가 뭐 사흘 동안 굶고 철야하고 절벽 가서 나 변하지 않으면 뛰어내릴 거야 하면 마귀가 뛰어내려라 뛰어내려. 그렇게 뛰어내려서 천당 갈 거 같으면 다 뛰어내리겠다. 삼천궁녀도 뛰어내리는데. 뛰어내려서 자유낙하 5초 후 10초 후 되도 납작하게 빈대떡 되고 시체 되도 안 변해요. 인간이 자기 사랑이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왜 구원받았습니까? 주님 뜻은 뭐냐. “내 맘대로다 왜?! 내 맘대로다” 라는 그게 성경에 뭐냐 하면은 ‘죄를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주님의 사랑이 왔을 때 주님의 사랑받은 사람이 문 밖에 있는 사람하고 둘 다 똑같애. 인간은 똑같거든요. 똑같은데 어느 날 사랑이 찾아와요. 사랑이 찾아온다고요. SSG 쓱. 쓱 사랑이 찾아온다고요. 사랑이 쓱 들어와버리면 졸지에 내가 아무 근거도 없이 무조건 죄인이에요. 무조건 죄인인데 인간이 바뀌지는 않아요. 바뀌지는 않는데 죄인인 이유는 알아요. 아 지독한 내 사랑. 이거는 내가 예수를 믿든 천번을 믿든 이거는 바뀔 요소가 아닌 것을 압니다.
다윗이 고백했잖아요. 모친의 죄 중에서 나를 만들었다. 다윗이 뭐 바뀌었습니까? 바뀐 것은 뭐냐 하면은 뭐가 바뀌느냐 하면은 자기가 바뀐 게 아니에요. 자기 범주 있잖아요. 범주. 바깥에 있는 시선을 알게 된 거에요. ‘나’라는 동그라미 말고 너 넓은 동그라미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알았어요. 나를 죄인으로 보는 눈을 알았던 거에요. 내가 아는 범위 말고 나보다 더 크게 보는 어떤 안목에 의해서 우리가 걸려든 겁니다. 그럼 안목이 두 개가 되지요. 지독하게 나를 지킬려는 천하보다 귀한 게 ‘나’라는 안목, 이건 무슨 안목이냐 하면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가 작동하는 내 안목. 이거 없어지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계속 돼요.
그런데 그걸 통째로 죄라고 규정해주시는 고마움. 통째로. 그래서 나는 [ ] 아니다 이 말입니다. 나는 [ ] 아니에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죄 짓는 것만 가능해요. 그러나 죄를 벗어난다든지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은 이건 내 몫이 아닙니다. 죄 짓도록 그냥 둬요. 두고 그것을 전체로 이렇게 쌈 싸먹듯이 싸버리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싸개’. 성경에 이 말 나옵니다. 사무엘상 25장 29절.
사무엘상 25장 29절 누가 한번 찾아보세요.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여기 단어 나오지요. 네 자. 무슨 싸개? 오줌싸개 아닙니다. 생명 보자기 안에 다윗을 어떻게 한다? 애기를 싸듯이 폭 싸는 거에요. 둘러치는 거에요. 더 큰 사랑의 범주 안에. 생명이라는 범주 안에.
이거는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인간은 어디서 끊어졌습니까? 생명에서 끊어졌지요. 그런데 언약이 찾아와요. 다윗에게. 언약이 찾아와서 다윗은 그 생명을 받거나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냥 벌거벗은 몸이에요. 지난 주일 낮 설교에 했지요. 인간이 벌거벗은 이유가 우리의 갖고 있는 것은 외부적인 것, 마귀적인 것이라서 주께서 그거 벗겨내지요. 벌거벗은 것을 어떻게 합니까? 주님께서 생명 싸개로 감싸줘요. 체온 떨어지지 않게. 사랑의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따스하게. 땃땃하게. 우리 자체의 발열 열 말고 생명 싸개에서 나오는 그 에너지로 따뜻하게 하는 거에요. 우리가 설친다고 그 열기로 버티는 게 아닙니다. 우리 행함의 열심이 아니라. 딱 감싸주는 거에요.
시편에 보면 나오지요. 시편 131편인가. 거기에 보면 젖먹이 아이가 엄마 품에서 만족스럽게 다 먹고 난 뒤에 엄마만 쳐다보고 있죠. 자기를 쳐다보지 않지요. 왜? 나는 주님 안에서 영원한 어린아이가 되고 싶어. 딸랑딸랑. 당신의 영원한 종이 되고 싶어요. 딸랑딸랑. 주께서 먹이시는 자식이 되고 싶어요. 젖먹이가 되고 싶어요. 내가 나를 먹이는 게 아니고 주께서 먹이시는. 먹이시는 조건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조건. 내가 어떤 죄인입니까? 내가 지독하게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죄인이라는 조건 하에 먹이시는 겁니다.
그럼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뭐 밖에 없느냐 하면은 나는 나를 관리하고 지켜야 한다 그것만 있지요. 왜? 먹이시는 엄마가 없잖아요. 성령이 없으니까 엄마가 없잖아요. 탯줄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30년 50년 신학 공부하고 열심히 교회 다녔지만 없어요. 항상 본인에게 본인이 자기 경계선이 전부에요. 마지막 철조망 끝까지 나만 있어요. 나의 행함만 있어요. 나의 과거의 기억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경계선을 치고 있습니다. 중간에 없어요. 예수 아는 지식 들어있고 신학 했던 지식 들어있고 성경 지식 들어있고 성경 구절 외우는 지식이 들어있지요.
지식의 보유자가 누굽니까? 본인. 지식이 본인이라고요. 맨날 성경 외우고 QT 하고 내가 지식의 보유자에요. 그 외에는 없어요. 그럼 평소에 은밀하게 본인만 알고 있지요. 본인만 알고 있다가 누가 복음을 이야기해버리잖아요. 복음을 이야기할 때 인상이 확 가버리죠. 갑자기 분노합니다. 내가 예수님 십자가 믿고 구원받겠다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는 거에요. 혹시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습니까? 내가 교회 열심히 해서 말씀대로 해서 구원받겠다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 에요.
우리는 묻지요. 왜 기분 나쁘냐 묻지요. 그게 왜 기분 나쁘냐 물어 보세요. 왜 기분 나쁜지. 그게 왜 기분 나쁜지 물어보세요. 그 뒤에 말을 잇지를 못합니다. 그동안 예수 믿고 하는 것이 다 누구를 위해서? 나의 의도와 나의 계획, 나의 인생 계획, 나의 인생 고대. 이걸 위해서 필요한 정보들을 거기에 쑤셔넣은 거에요. 거기에 다 집어넣은 겁니다. 혹시 그게 모자람이 있을까 싶어서. 열심히 성경공부 다니고 완벽하게 그 조건들을 맞추기 위해서 노력한 거에요.
그래서 주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했거든요. 뭐를 모르느냐 하면은 본인이 예수님 사랑하는 것은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데 내가 주님께 봉사하고 하는 그것을 완전히 그걸 의미 없음으로 되돌리는 강력한 사랑의 침투, 내가 노력한 그것마저 그걸 죄라고 규정하는 그 규정에 빠져버린 거에요. 내가 주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그것이 죄였다고 규정하는 그 규정이 아직 안 들어왔어요. 그래서 복음 아는 사람이 그것도 죄인 줄 몰라요? 그 한마디 했다고, 한마디 했다고 그 다음부터는 발작을 일으켜요. 발작을 일으키죠.
버티기에 망한다. 버티기 때문에 망하는 거에요. 버틴다는 것은 시작점, 시작점을 누가 시작한다? 나부터 시작해서 점점점 어떤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던 거에요. 내가 시작한 결과, 이걸 가지고 뭐냐? 내가 만든 구원 스케줄이에요. 스케줄. 이게 구원의 기준입니다. 내가 만든 구원의 기준이죠. 그 기준을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어요.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기준과 전혀 다른 의외의 기준을 정해버렸습니다.
이런 기준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 문을 닫아놓고 그 안에 들어온 사람으로 하여금 내 모든 기준은 이게 바로 죄였습니다를 고백하게 만들죠. 그중에 여러 가지 사람이 있지만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죠. 사도 바울은 구원받아놓고 그냥 나 구원받았다 하지 않고 뒤에 아까 뭘 붙였다? 나는 십자가 지지 않았다. 나는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요. 나는 [ ] 아니라고 이야기해버리죠. 그래서 뭘 보이느냐 하면은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하나의 수학적 기호로서 설명 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x라면 나는 –x다. 이런 식으로 해서 주님은 무한이고 하나님이고 나는 약한 죄인이다. 이거는 무슨 사상이냐 하면은 주권 사상입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주권 사상이에요. x와 –x를 대비한 것. 이거는 틀렸습니다. 나는 주님만큼 잘하지 못한다. 지금 이런 주장하는 것은 이건 전혀 신앙이 아니에요. 주님은 x가 아니라 주님은 이미 확정했어요. 1. 나는 1-x에요.
다시 말해서 나는 주님을 훼방하는 죄인이다 이렇게 돼야 돼요. 죄인이다. 주님의 공로를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를 내가 훼방하지 않게 하옵소서. 훼방하지 않게 하옵소서. 나는 주님의 공로에 방해자만 될 뿐입니다. 이런 고백, 이런 고백이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나올 고백입니까 이게. 사람으로 나올 수 없는 고백이에요. 나는 주님의 짐만 될 뿐입니다. 이게 자기가 부인 안 되고 나올 고백입니까?
주님을 사랑한 만큼 주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전부 이럴 수 있다고요. 주님이 마음 낮추라고 해서 내가 지금 얼마나 마음 낮췄다고요. 지금 이렇게 나온다고요. 지금 그게 아니고 내 마음 낮추는 것이 무슨 일의 방해다? 내 마음 낮추는 것이 주님의 다 이루심을 방해하는 방해로서 저는 마음 낮추기를 했습니다. 나는 [ ]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가 살아있는데 살아있어야 될 이유가 훼방자로 살아있는 거에요. 내가 훼방자로.
그러니까 내가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행복해도 뭐를 해도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의 일방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주께서 이런 반응을 유발시켰습니다. 항상 1-x 이기 때문에 항상 1이 살아있지요. 나는 –x. 이게 결합되어 있거든요. 1-x. 그냥 나는 못났음이 되어버리면 이 자체가 절대화돼요. 이 자체가 믿음의 내용이 되어버려요.
부흥사들 늘 강조하는 것은 목소리 쫙 깔고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그냥 마이너스잖아요. 주님을 증거해야지요. 주님을 증거해야지. 주님이 다 이루었는데 나는 너무나 부족해서 주님을 훼방했을 뿐입니다 라고 했을 때 이 고백은 성령 안 받으면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나는 십자가 지지 않았다. 십자가를 그런 식으로 증거하는 거에요. 십자가 다 이룸 앞에 나는 십자가 –x로 나오는 거에요. 나는 훌륭하다가 아니지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3장 25절 (말씀의 온전함) 221122b-이근호 목사
인간 속에 퍼져있는 이 악마의 힘은 인간은 뱀을 이기지 못합니다. 왜냐? 세상 신이기 때문에 거기에 푹 젖어있죠. 젖어있으면서 땜질하듯이 지식으로서 이걸 덮는다고 해가지고 주님은 그걸 신앙이라고 안 해줍니다. 마귀가 덮은 것은 마귀보다 쎄신 분이 그걸 처리를 해줘야지 마귀한테 져서 묻은 마귀의 뜻을 이미 자기가 패배한 상태에서 자기를 덮친 자를 이길 수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뭐냐 하면은 타인으로 와요. 타인인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낯선 타인으로 와요. ‘낯선 타인’, 낯선 이방인으로 오십니다. 보통 인간들이 어떤 외부에 손님 오게 되면 손님에 대해서 판단하고 평가해야 돼요. 왜냐하면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해야 내 자체 방어가 돼요. 저 사람이 나한테 해코지할 사람인지 아니면 도움줄 사람인지 이걸 알아야 영접할 것인지 배척할 것인지 결정할게 아니겠습니까. 이게 인간의 타고난 본능인데.
그런데 주님께서 오실 때는 그냥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고 법을 타고 와요. 법. 법은 뭐냐 하면은 금지입니다. 법은. 금지이니까 여기서 뭘 요구하느냐 하면은 처벌이 뒤따릅니다. 하지 마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뭐냐? 만약에 하지 마 라고 했는데 했을 경우에는 너의 전부는 무효가 된다. 너는 저주받는다. 이 법을 동반해서 오신 타인이에요.
그러면 인간은 자체 내에서 인간은 뭐를 하느냐 하면은 자기를 법제화시키고 있습니다. 법제화. 자아의 법제화에요. 내가 입법기관입니다. 법을 내가 만들어요. 법을 내가 만들면 최종적으로 누가 의인되겠어요? 왕이 법을 만들 때 왕은 범죄인입니까? 자기가 최종 판단자인 동시에 의인이 되는 거에요? 자기가 의인이라는 조건을 지켜내기 위해서 법이 나오지요. 자기가 만든 법이 자기가 죄인 되는 그런 모순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은 본인 스스로가 자기가 법을 만들어요.
그 사춘기 애한테 “오늘 너 왜 늦게 왔어?” 하면 애가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제가 정하거든요!” 이러거든요. 법제화잖아요 법제화. 나도 알만큼 알고 클 만큼 컸습니다. 결혼식 할 때 주례 잘 안하지요. 왜냐하면 본인의 결혼에 본인의 법을 내게 맞는 내가 이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그 결정의 정당성을 기반으로 깔린 주례를 본인이 하겠다는 거에요. 다른 사람은 그냥 들러리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내가 결혼하겠다는데 누가 간섭질해 이거에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내가 우리 잘 나서 결혼하는데 당신은 그냥 하객으로 참석하세요. 사진 하나 찍고 축의금이나 내고. 축의금 만원 내면 오만원 어치 먹지 말고 그것도 둘이 와서 하지 말고.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이게 무슨 사회? 민주주의 사회에요. 민주주의란 짐승의 속성이 이게 벌써 우리 몸에 배겼어요. 배겨버렸어요. 교회든 뭐든 간에 어떤 것도 법도 드디어 먹히질 않습니다. 나의 법제화에 전부 다 되받쳐나가요. 되받쳐나갑니다. 나 잘한다 훌륭하다 뛰어나다 믿음 좋다 그것만 인정이 돼요. 허용이 되고 나머지는 다 나가요. 전부 다 내보내는 그런 시대에 있습니다.
주일날 설교 그런 이야기했지요. 아직도 바보같이 예수 믿느냐고. 너 요새 교회 다닌다면서? 아직까지 바보같이 예수 믿어? 그 소리 들으니까 상대방이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믿기는 뭘 믿어. 사실은 예수는 연구하는 거고 사실은 너도 나도 사실은 나 자신을 최종적으로 믿어. 나를 믿어. 이렇게 되지요. 그래서 신자냐 불신자냐 하는 것은 교회에서 알 수 없고 바로 불신세계에서 귀신같이 알아요. 불신 세계에서. 너 나하고 똑같네 뭐.
자,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에 법을 타고 오셨다. 자, 법은 금지된 것이다. 금지된 것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인간이 금지된 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이라면 주께서 법을 내리십니까? 안 내리십니까? 안 내리죠. 왜? 금지가 금지로서 유효할려면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어떤 말씀도 주께서는 제시한 적이 없지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다. 오른손이 한 것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모든 예수님의 말씀이 인간은 지킬 수 없는 거에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미 인간은 자기가 최종적인 의미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최종적인 의미에 나하고 나와 같이 나란히 같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럼 최종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지막 결승전은 치러야 할 게 아닙니까. 브라질 아르헨티나 공동 우승 이런 건 없어요. 둘 중에 하나는 결판나게 되어있다니까요.
자, 그렇다면 그 법을 이기고 그 금지를 이기고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복을 받은 사람 이 세상에서 누가 있겠는가? 그럼 천국은 텅텅 비겠다. 아무도 없겠다. 그럼 엘리야 모세도 천국 안 간 게 되겠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잖아요. 자, 이러한 반발에서 뭐가 문제냐 하면은 내가 여기 있는데 주님께서 금지의 법을 가지고 온 거에요. 예수님의 산상설교 전부 다 그거란 말이죠.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 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 마음밖에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12제자 심령 가난하지 않았어요. 이 금지법을 넘어서서 처벌 받지 않은 인간이 아무도 없는 거에요.
금지법이 왔을 때 당황하게 되고 나중에는 뭐냐? 주님에 대해서 뭡니까? 없어버리자. 아예 법을 없애버리자 법을. 마치 이것은 선악과가 잔소리 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선악과를 아예 과실을 먹어서 없애버리잖아요. 먹어서. 됐냐?! 어디서 잔소리질이야. 먹어버린 거에요. 더 이상 잔소리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을 없애버렸잖아요. 그게 해결책 됩니까?
악마에 속한 인간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지금 나 있잖아요. ‘나’. 지금 나를 천국에 보내는 오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금지의 법을 주심으로서 이 나는 나로 끝나고 다른 나를 주께서는 만드시는데 그걸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거에요. 새로운 피조물. 인간은 육에서 난 나거든요. 육에서 난 육의 나를 주장한다고요. 이걸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시작부터가 인간의 기준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시작을 하나님부터 시작하는 것, 그걸 제가 주일날 설교에 로마서 5장에 두 번째 아담의 형상부터 시작했다는 거에요. 인간은 첫 번째 흙에 속한 형상을 입었거든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제는 흙에 속한 형상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형상부터 새롭게 만들어 지는 나. 그 나. 그 나는 내가 단독으로 내세우는 나는 아니고요 예수님을 증거하는 조건 하에 나가 돼요. ‘언약적 나’가 돼요.
예수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의 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나, 그게 ‘나’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형상을 입은 나로 다시 태어나는데 이건 니고데모가 난감한 태도를 보였던 거에요.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지금 이 몸을 가지고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기껏 이미 태어난 이 몸을 어찌 해볼라고 하는 거에요. 그걸 버릴 생각은 안하고 그걸 포기할 생각을 안 해요. 거기에 자꾸 의미를 부여할려고 해요.
의미에 물을 자꾸 주고 거기서 열매를 피울려고 하는데 그 열매는 육의 열매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애초부터 생명나무를 차단시킨 것처럼 그거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새로운 육의 기초를 주께서 영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기반을 새로 만들어야 되고 예수님의 육이 대신한 육이 되요. 아담의 육 대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육이 율법을 다 이룬 육이 새로운 육의 영광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그 안에서 나온다고요.
일종의 예수님이 우리 어머니에요. 자식은 누구 닮았다? 엄마 닮았잖아요. 새로운 엄마가 등장하는 거에요. 성령으로 태어나는 거에요. 이게 어렵습니까? 이게 어려워요? 자기의 육을 버리자 이러면 끝나는 문제인데 자기 육에 미련을 갖고 있으면 어려운 문제에요. 뉴올리언즈에서 비행기가 날아와서 어느 곳으로 가다가 비행기가 골프장에 불시착했어요. 몇 명 죽었나 싶어서 막 앰뷸런스 와서 보니까 거기서 개 53마리가 기어 나왔어요. 개를 태운 비행기였어요. 개를 태운 비행기. 개가 53마리 나온 거에요.
천국이라는 비행기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걸어 나온 거에요. 새로운 피조물이. 사랑 덩어리가 나왔어요. 사랑 덩어리.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로마서에 사랑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지요. 모든 율법은 사랑 안에 완성된 사랑을 품은 자들이 비행기가 천국에 도착하니까 거기서 아장아장 병아리처럼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 비행기가 뭐가 되겠어요? ‘예수 안’이 되겠지요. 예수 안에서 처소가 마련된 성령 받은 12제자 나오듯이 나오는 겁니다.
들어보니까 참 쉽지요. 쉬운데 이상하게 만화 이야기같이 우리가 평소에 관심 없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이렇게 친절하게 해줘도 나는요?! 이러면 완전 그럼 내가 노력하는 것은 뭐가 됩니까 이렇게 되지요. 허망하지요. 우리 인생은 서글픕니다. 원래 인생은 허망하고 서글퍼요. 나한테 희망을 건다면 그래요. 나한테 희망을.
왜 그러느냐 하면은 세상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우리 욕망이 멈추지 않아서 그래요. 우리의 욕망이 하나를 얻으면 둘을 얻고 싶고 둘을 얻으면 넷을 얻고 싶어요. 몸 편하면 돈 얻고 싶고요 몸 아프면 돈이 뭐고 몸만 건강했으면 좋겠다 해요. 자식이 잘하면 당연한 거고요 자식이 애 먹이면 우리 애만 잘되면 소원이 없겠다 이러고 있어요. 인간은 본인을 몰라요. 환경 따라서 원하는 바가 그때그때 달라요.
그런데 그 환경 조성은 누가 하는가? 주님이 해요. 환경을 우리가 조성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맨날 변해요. 환경 따라 변합니다. 한국에 있으면 한국에 기대하는 게 있고 미국 가면 또 뭘 또 원할지 두고 보겠어요. 뭘 또 새롭게 또 욕심내고 기대를 해야 될지.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여기 27절에 보면 “나가! 꺼져 이 행악하는 자들아” 이렇게 한 것은 아까 한 것 말씀이 온 것은 반드시 뭘로 온다? 금지가 오지요.
금지의 법이 온 것은 지킬 수 있다가 아니라 결국 우리로 하여금 행악자로 드러내는 거에요. 왜? 예수님 빼놓고는 예수님 주신 말씀을 지킬 위인이 한 사람도 없어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미 사랑의 문 안에 들어와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도 여기 해당됩니까? 이렇게 묻고 싶지요? 해당됩니다. 아니 이미 구원받았는데 행악자라는 말은 너무 심하지 않겠습니까? 또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그 사람은 뭘 놓쳤느냐 하면은 이게 중요해요.
나의 존재 바닥 자체를 걷어내고 말씀의 장판으로 새로 깔아버립니다. 챙길 거 챙겼으니까 나는 휴~ 다행이다 이게 아니라 나 구원받는 게 내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바닥 장판을 뜯어내요. 여러분 장판은 이쁜 장판 알록달록 있잖아요. 하지만 그걸 뜯어내면 싸늘한 시멘트만 딱 있지요. 시멘트만 있다 하면 거기 시멘트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처음에 시멘트 시공했던 그 일꾼의 노동력만 남아있지요. 왜? 오랜 역사의 장판, 애들 낙서한 장판 다 뜯어냈으니까. 우리 애가 낙서했고 우리 애가 7살 때까지 컸고 이걸 벽지 장판 다 뜯어내버리면 남는 것은 뭡니까?
그 집 처음 지을 때에 노가다 했던 일꾼들의 노력만 있을 뿐이죠. 아직 이사하기 전이니까. 집주인이 애 세 명 데리고 이사하기 전이기 때문에 애들의 추억이라든지 애들의 흔적은 뜯어내버리면 남는 것은 처음 집 지을 때 그 날 것, 날 것. 그것만 노출되잖아요. 처음 자리. 원래의 자리. 나를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러한 요소를 다 뜯어냅니다. 뭐로? 말씀으로 뜯어냅니다. 말씀으로 다 뜯어내지요.
그럼 처음 자리가 뭐냐? 그것은 바로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육은 선악과 따먹은 육이죠. 그 따먹은 육이 예수 믿는다고 우리의 육성이 사라집니까? 안 사라집니까? 죽을 때까지 계속 있지요. 이게 노출되는 거에요. 예수 믿고 뭘 해도 성질은 변하지 않아요. 성질은 변하지 않아요. 남자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여자와 결혼해가지고 내가 여자한테 잘 해주면 여자는 감동해가지고 그 본래의 성격이 순하게 달라질 거라는 그 말도 안 되는 오해. 아멘 좀 하지.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의 영향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건 배우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연기하는 것이고요. 인간의 속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장판 한 쪽 두 쪽 다 뜯기는 거죠. 너나 나나 전부 다 아담의 동일한 아담의 본성을 지닌 똑같은 종류의 존재라는 사실. 똑같은 죄인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것을 그걸 진리라고 우기는 인간들 그게 결혼한다고 바뀌겠어요?
예를 들면 당신은 옳고 나는 틀렸다 라는 말을 내가 해주니 기분 좋지?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당신은 옳고 나는 틀렸다 이 말한 나는 당신보다 더 진리답다는 주장 아닙니까. 당신은 참 평생 돈벌이하느라 고생 많았지? 무슨 뜻이에요? 당신 고생 알아주는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그런 뜻이죠. 계산 간단한 계산이에요.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자기를 부인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성경을 보면서 나는 구원 받았다 그래서 이 행악자는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 마세요. 행악자라는 누가복음 13장 27절을 이제는 나의 꽃무늬 장판으로 내 바닥에다 깔아버리세요. 전에 내가 아담일 때는 이 행악자를 일부러 빼고 싶어. 나는 나를 좋은 편에 세우고 싶어요. 말씀을 이용하고 싶지, 말씀 자체가 내 존재로 깔리는 것을 우리가 버거워했고 부담스러워했다니까요. 바리새인 저리가! 나 바리새인하고 안 놀아 이러고 싶은 거에요.
하지만 네가 바리새인이야. 놓치지 마라. 그걸 주께서는 아예 바닥재로 아예 인테리어를 해버린다니까요. 그럼 나는 내가 존재했던 자리에 뭐가 남습니까? 말씀 자체가 들어가버린 거에요. 말씀 자체가. 나는 없고 말씀이 내 자리를 차지해버린 겁니다. 그게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게 안돼요. 좋은 것만 얻을려고 해요. 좋은 것만. 나쁜 것은 버리고 내 구원만 유리한 것만 챙겨서 내 비밀 항아리에 담아가지고 주님 재림하실 때 저 이렇습니다 하고 드리고 싶은 거에요. 항아리 한번 깨져봐야 내가 주를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할 때 너 누구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너 누구야?
나는 말씀을 깔기를 원했지 말씀대로 살기를 원한 게 아니에요. 주께서는. 나는 존재 살아있어 이 말씀 저 말씀 지키는걸 하나님이 원하지 않아요. 아예 우리 자체를 말씀과 밀어버리고 뜯겨나가서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하는 그 모습, 연출된 것 그걸 뜯어내고 나의 말씀에 있어서 모든 것이 말씀이 말씀대로 되었을 뿐입니다 하는 그 고백만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거에요.
그걸 이 땅에서 최초로 누가 하셨느냐. 그게 바로 광야 때 예수님이 마귀한테 시험 받으시면서 그겁니다. 마귀야 너 나한테 시비 걸지 말고 주님한테 물어봐라. 모든 것은 주의 말씀대로 될 뿐이다. 끝. 너는 자꾸 날 붙들고 지켜봐라 살아봐라 너 한번 해봐라 하는데 말씀은 말씀대로 될 뿐이에요. 사람은 떡으로만 살고. 떡으로만 산다는 것은 말씀 지켜서 산다는 말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대로 그냥 이루어질 뿐이에요. 말씀이 내 존재의 장판으로 꽃무늬 장판으로 새로 까는 거에요.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냐? 아닙니다. 이제부터 진짜 이거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피곤하시더라도 조금 참으시고 이 어려운 이야기니까. 우선 질문 하나 하고 답변을 엮어나가겠습니다. 문밖에 있는 사람들. 이걸 줄이면 문밖의 여인. 박강성이 부른 문밖의 여인. 문밖에 있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가?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문밖에 있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가?
어렵기 때문에 우선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진리 찾다가 지식 챙기고 돌아옵니다. 진리와 지식을 구분할 줄 알아야죠. 진리 찾는데 진리는 접근하지도 못하고 지식만 모아서 끌어 모아서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요. 날이 갈수록 지식만 자꾸 커지는 거에요. 지식만.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누가 진리라고 했어요?
자,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를 뭐라고 했느냐 내가 진리라고 했지요. 예수님 진리라고 할 때 나 말고도 진리가 있어 라는 뜻일까요? 나만 진리라는 뜻입니까? 나만 진리라는 뜻이죠. 그러면 그 당시에 그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찾지 않았습니까? 찾았지요. 그런데 예수님만이 진리가 되어버리면 그들은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그 무엇, 그걸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지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그것.
그러면 진리에 도달한 자와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차이점은 진리에 도달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이 땅에서 죄로 인하여 죽었지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죽었잖아요. 그러면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진리라고 우기면서 진리와 더불어서 진리를 품에 안고 그 진리로 인하여 본인이 살고자 하겠지요. 그런 차이가 있는 거에요.
한쪽은 진리만 살면 되는데 한쪽은 진리 덕분에 내가 산다는 괜찮은 결과가 도출되어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 이게 바로 비진리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비진리 또는 비언약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어요. 너희는 아무리 해도 지식에 이를 뿐이지 진리에 이르지 못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뽑았고 사람들에게 주신 거에요. 진리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 특징은 뭐냐? 문 열어달라는 거에요. 문 열어주세요.
자, 문 열어달라는 것은 그 사람들은 알고 있어요. 닫혔다는 것. 그런데 이상하지요. 문 열어달라고 이야기를 주님은 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 당사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안했지요. 쫓아냈기 때문에. 쫓아낸 분 보고 열어주세요 하지 않지요. 아이고 속 시원하다 이렇게 되지요. 속 시원하다 이렇게 되지 열어달라고 자기가 쫓아낸 사람한테 부탁하지는 않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거는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거에요. 이거는 주님의 세운 안목에 의해서 우리가 눈치 채야 될 문제지 이 말씀대로 이렇게 우리가 파악할 순 없어요. 우리가 파악한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한테 유리하냐 불리하냐 그것만 계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렵다고 엄포 놨는데 뭐 별로 어려운 것도 없네 이렇게 이야기하실 거에요.
자, 어려운 거 시작합니다. 왜 그들은 문밖에 있느냐? 문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냥 가만 있지 않지요. 뭔가 노력했잖아요. 그 노력을 어떤 노력을 하면서 문밖에 있는가? 이 문제입니다. 누가 질문하고 누가 답변하나. 평소에 여러분들이 질문을 누가합니까? 내가 질문하지요. 그리고 내가 질문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질문한 것에 대해서 답변하기를 요청하지요. 질문은 내가 하고. 내가 궁금한 게 있으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이걸 바꿔버려요. 주님이 질문하고 우리가 뭐하느냐 하면은 답변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주님이 질문하는 것을 우리가 못 느껴요. 왜? 우리는 빈번하게 내가 먼저 주님한테 질문하기 바빠가지고 주님이 질문한 것을 우리가 언제 했습니까? 나 질문 못 들었는데? 이렇게 해버려요. 그런데 이 말씀 자체가 우리한테 질문하는 말씀이에요. 이 모든 말씀이 질문하는 말씀이에요.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것은 그 질문을 어떤 취지로 질문하는지를 제가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네가 답변해봐라. 네가 누구인지. 이 질문을 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평소에는 질문 안 해요. 질문이 기도입니다. 평소에 기도 안 하다가 자기가 아쉬우면 어려울 때 하나님 응답을 주옵소서 해답을 주옵소서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렇게 자꾸 기도 나오니까 뭐를 놓치느냐 하면은 내가 진정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자꾸 이거는 지연되어 버려요. 내가 누구냐에 대해서 우리는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그 자체가 복이고요 찾아오셔도 그냥 찾아오시는 아니라 빈손으로 찾아오는 게 아니고 질문을 하는 거에요. 질문은 뭐냐 하면은 나는 너를 모른다. 네가 답변해봐라. 네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너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없잖아 이런 뜻이에요.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서울에 이모님이 사시는데 그 이모님이 재벌, 부동산 해가지고 땅이 한 십만 평 있고 건물도 강남에 대치동에 건물이 열 채 있다 합시다. 그런 이모가 살고 있다. 서울이나 촌에 살다가 어려울 때에 돈 100만원 있었으면 좋겠는데 할 때 아! 이모님이 계셨지. 엄마 돌아가실 때 이모가 도와준다고 했지. 그래가지고 이모한테 찾아간다고요. 이모님 이런 이런 사정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자, 질문 누가 했습니까? 어려운 조카가 질문을 했지요. 질문을 할 때 그 자체가 뭐냐 하면은 질문한 나는 아는데 이모가 내 사정을 모른다 해서 일방적으로 도와달라고 한 거에요. 그런데 이모가 하는 말이 나는 너 모르겠다 하면서 너는 나를 아느냐고 묻는 거에요. 지금 조카는 이모에 대해서 관심 없어요. 이모가 도와줘서 지금보다 더 괜찮게 된, 처음에도 나만 챙기고 도와주는 결과도 나만 챙기면 그만이에요. 이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은 나를 안 자가 아버지를 아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는 모든 말씀은 들쑤셔놓는 거에요. 우리로 하여금. 뭐하도록? 우리로 하여금 아쉬워서 주 앞에 기도하도록 들쑤셔놔요. 들쑤셔놓으면서 얼마나 우리가 주님 자체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나만 관심 있고 나에 대해서 내가 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게 문제가 되는 거에요. 주님 보시기에 문제가 되는 거에요.
나는 주님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자기 사랑하는 백성이 나만 알도록 그냥 놔두지를 않아요. 이참에 네가 누군지를 알도록 사태를 이렇게 유발시켜버립니다.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문을 닫아버려요. 문을 닫아버리고 그 다음에 문밖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합니까? “내가 이렇게 봉사하고 수고했는데 왜 저를 내칩니까” 할 때에 “이 악한 자여 나를 떠나라” 하지요. 그 말씀을 이게 누가복음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그 말씀에 대해서 우리 보고 물어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물어요.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문밖에 있는 행악자하고 나는 관계없어요. 저는 이미 예수님을 사랑해서 이 문 안에 있는데 저하고 관계 없습니다 라고 한다면 아직도 우리 자신을 모르는 거에요. 우리 자신을 모르고 나 필요한 것만 골라버리면 나는 알게 되지요. 그럼 첫째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아는 것 때문에 뭐가 막힌다? 주께서 나를 아는 게 다 막혀버리는 거에요. 주님은 어떤 차원에서 어떤 관점에서 나를 보고 있느냐를 내가 나를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게 다 막혀버린 거에요.
나는 나에 대해서 알고요 지옥 가는 인간들 나하고 무슨 상관 있습니까 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주께서 주신 이 말씀을 가지고 다시 나한테 묻는 거에요. 물을 때 꿈에 한 새벽 두시에 이 말 듣는가? 아닙니다. 새벽 두시에 나타나가지고 누가복음 13장 읽어주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가가가가~~~ 이래가지고 동굴 속에 울림처럼 그렇게 오는 게 아니고 우리 인생을 망쳐버리는 거에요. 난데없이.
교회에서 봉사했는데 욕만 돌아왔지요. 우리는 가만있지를 못하고 따지고 싶지요. 사람한테 안 먹히니까 우리는 사람을 개무시하지요. 그럼 마지막에 사사기처럼 기댈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이모님. 돈 많은 이모님. 이 조카 불쌍히 여겨달라고 너무 억울하다고 이모한테 요청을 구하지요. 내가 예수님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주께서는 누가복음 13장 25절, 26절, 27절을 우리에게 적용시켜버렸어요. “꺼져. 이 행악한 자야 네가 누구야?” 이렇게 나온다고요.
자기는 천당 간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누가복음 13장에 행악자 해당되는 이야기가 쓱 나한테 왔단 말이죠. 그럼 우리는 저 말씀은 나한테 해당 안 되는데요 이렇게 하니까 주님께서 이건 말씀 아니야 답변해봐. 네가 이런 사정이라면 너는 어떻게 변명할거야? 답변해봐. 답변해보라고. 자기는 천하없어도 구원받는다고 여겼는데 이 말씀이 왔을 때 이거는 나하고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할 때 이 말씀을 들이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답변합니까?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가 원하는 쪽 말씀을 골라낼 수 있는 권한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말씀은 내 존재를 지키기 위한 말씀이 아니에요. 내 존재를 뜯어내는 겁니다. 뜯어내는 겁니다.
자,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것 둘로 분간해보겠습니다. 1. 이모님 날 도와주세요. 잘 사는 이모님 날 도와주세요. 삼촌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는데 왜 이모님이냐? 작은아씨들 드라마 보면 나와요. 이모님 날 도와주세요 할 때 이런 것 저런 것 도와주세요 라고 시작하지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정신병자. 이게 정신병자에요. 정신병자. 정신병의 특징은 뭐냐? 결여에 미친 자. 자기 존재의 결여에 미친 자에요.
결여라는 것은 모자람이죠. 모자라니까 불만이죠. 뭐가 누락됐습니까? 범사에 감사가 누락되었죠. 평소에 성경말씀대로 우리는 감사하고 싶어요.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상태가 나를 감사하도록 만들지를 않아요. 감사하도록 만들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감사하고 싶은데 주께서 방해했잖아 이렇게 돼요. 나는 착해가지고 감사하고 싶어도 이런 일까지 일어나는데 내가 무슨 수로 감사합니까 라고 불만을 제기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감사하겠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 결여를 주께서 늘 채워주셔야 될 책임이 주님한테 있잖아요. 왜 텅 비게 만듭니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텅 비게 만듭니까. 이렇게 보니까 뭡니까.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철저하게 자기 말씀대로 집어넣기 위해서 충분하게 활용하고 이용하고 사용하지요.
그러니까 인간들로 하여금 이만하면 됐다를 한시도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피조물이 피조물 자체로 만족한 경우를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어요. 피조물의 만족은 창조주의 만족에 참여해야 되지 피조물이 독자적으로 만족하는 경우를 주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자기한테 만족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니까. 아니에요.
아까 했지요 엄마의 품 안에서 만족해야 되지 엄마의 것으로 만족해야 되지 내가 원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결여. 모자람. 모자람이라고 하는 것은 왜 생기는가? 모자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생기는가? 이 모자람이 생기는 것은 내가 속해 있는 환경 자체를 내가 전부를 가지지 못해서 생기는. 전부 다를 못 가져서. 전부 다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나는 욕심이 없어 가지고 나는 두 개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이게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든지 또는 지금 주님을 상대로 사기치고 있는 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이 점점 더 커가면서 뭐도 커가느냐 하면은 이 세상이 어느 정도까지 범위가 퍼져있는가를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기대할게 많아져요. 갖고 싶은 게 많아진다고요. 갖고 싶은 게.
전에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촌에 조그만 교회에 한 500명 다니는 교회에 젊은 총각이 한 10명 있다면 그 마을에 교회에 올갠 치는 반주하는 아가씨 하나가 있으면 10:1입니다. 예배시간에 목사 설교는 안 들리고 반주하는 그 모습이 딱 보이거든요. 뒷모습. 그 반주하는 아가씨가 머리까지 이렇게 길어보세요. 긴 머리 소녀가 돼요. 다 탐을 내고 있다고요. 전부 다 마음속으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기들끼리 난리도 아니에요. 그런데 10명의 총각들, 그런데 그 아가씨가 최진사댁 셋째 딸이라고 합시다.
10명 총각 중 하나가 서울에 강남, 대치동에 가봤다 왔어요. 간 뒤에 다시 촌에 놀러왔거든요 그 경쟁에서 나 빼줘. 나 빼줘 빼줘 빼줘. 갑자기 새로운 더 넓은 환경에서 저것은 욕구의 대상이 안 되어버리는 거에요. 그걸 철이 났다. 그걸 철들었다 하는 거에요. 욕구의 대상이 아니에요. 애들 딱지 하잖아요. 애들은 딱지 하고 어른 되면 비트코인해요. 딱지 갖고 놀면 안돼요. 이건 이상해요.
거기서 오는 결여. 세상 점점 더 갖고 갈게 많다는 말은 점점 더 모자람이 더 증가하는 거에요. 행복하지 않아요. 오년 전에 이만 하면 좋겠다 했는데 오년 뒤에는 그것 가지고 모자라요. 만족스럽지 않아요. 남자들이 결혼할 때 자기 아내가 최고의 미인이거든요. 6개월도 안 되가지고 식상하다 이러고 있다고요. 새롭지 않는 것은 분노를 유발하는 거죠. 새롭지 않는 것. 뻔한 것은 아름답지도 않고 뻔한 것은 사랑스럽지도 않아요. 나는 그냥 가만있을 뿐인데 너의 미모는 뻔하다는 거에요. 나는 그냥 가만 있었어요. 아무것도 안했어요. 갑자기 저쪽에서 결여가 생긴 거에요. 욕망이 생긴 겁니다.
금지된 낯선 타인이 몰고 온 금지된 법은 그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지요. 법은 완전함, 인간은 결여됨 모자람.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합니까? 그 모자람을 억지로 채울려고 나름대로의 법 지켰다고 우기고 싶겠지요. 마귀에 걸려든 거에요. 완전히 마귀의 시험에 걸려든 겁니다. 억지 감사, 억지 웃음, 억지 행복, 주께서 새로 주신 상황 앞에서 그거 시효 얼마 안갑니다. 5분도 안가요. 그거 소용없어요. 그 유명한 노래, 김완선이 부른 유명한 노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조작이고 사기치고 위장하고 그런 겁니다.
결여 때문에 그런 거죠. 결여 때문에 미칠 때 결여를 채울 수 있는 것을 모든 걸 만족 채워지기를 바라고 있어요. 모든 걸 만족하도록 채워질 수 있기를 원하죠. 그런데 인간은 그걸 받아들일 때 뭐로 받아들이는가. 지식으로 받아들여요. 지식으로. 다시 말해서 지식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내가 소유할 수 있도록 받아들이죠.
그러면 소유자인 내가 나를 규정할 수 있습니까? 너무 귀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자체를 내가 완전히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있어요? 없어요? 부정 못하지요. 그러니까 기도 아무리 해도 응답 아무리 받아도 이거는 전부 다 사기에요. 연출된 거에요. 종교란 이름에 연출된 거에요. 아무 소용없는 거에요.
지식과 진리가 일치되지 않는다. 그러면 정답은 뭐냐 하면은 주님의 하실 일과 내가 일치되죠. 이러면 어떻게 됩니까? 결여된 ‘나’가 완성된 ‘나’가 되는 겁니다. 날마다 모자람을 느끼고 부정함을 느낀 ‘나’가 주님의 작품이에요. 그래야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빨리 나를 떠나고 이 세상을 떠나기를 소원하게 되겠지요. 떠날 때 그냥 떠나지 말고 이 미친 짓을 반복해야 돼요. 미친 짓을 반복해야 돼요.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해서 자꾸 반성하거든요. 계속 반성한다고요. 계속 끊임없이 반성해요. 잘했나 못했나. 그런데 주님의 성령이 임한 사람은 이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이게 최종 해답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최종 해답으로 주어지니까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킵니까? 주님 쪽에서 지켰어요? 주님께서 지켰기 때문에 우리가 결여됐기 때문에 이 말씀으로 우리의 존재의 바닥을 갈아치우게 하는 거에요. 갈아치우게 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누가복음 13장 25,26,27절이 계속 살아나면서 나는 죄인 중에 뭐가 됩니까? 죄인 중에 괴수가 된다는 그 자체가 결여가 아니라 그게 온전함이 되지요. 말씀 자체는 어떤 경우에라도 말씀 자체에 하자가 없었음을 계속 고백하는 거에요. 나는 십자가 질수도 없고 지지도 않는 존재인 자체의 고백이 완전히 되는 겁니다. 완전히 성립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그게 오늘치 만나잖아요. 오늘치 말씀이라고요. 내일 되면 오늘 이렇게 됐잖아요. 완전해 나 기뻐. 내일 되면 내일 또 준비된 사건이 있어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또 결여를 느끼고 또 못난 우리 존재가 완성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오늘치의 말씀도 완성이 될 뿐만 아니라 내일 되면 내일치의 말씀도 완성이 되니 말씀 완성에 참여하게 된 피조물,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 속한 예수님의 품안에 있는 우리의 피조물의 해야 될 일입니다.
이걸 가지고 결여의 해석됨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의 해석됨입니다. 모든 해석은 나의 모자람과 부족함과 나의 탐욕과 탐익 그것을 경유하면서 십자가만 온전해지는 그 언약 완성을 위해서 비언약적인 우리 요소를 계속해서 가동시키고 사용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모든 영광을 누구한테 돌립니까? 주님께 돌리지요. 주님 기쁘지요.
그럼 주님 기쁘면 나도 기쁘지요. 주님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죠. 주님을 이용해서 내 기쁨 할려고 하다가 이 결여가 소용없다는 게 또 등장하지요. 우리는 진리를 원했는데 기껏 나를 위한 지식만 원하다가 다시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죄인 됨을 깨닫게 되게 되면 주님이 기뻐한다면 그걸로 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지요.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애가 이미 엄마와 한 몸이 됐잖아요. 그럼 애는 배부른 자기를 쳐다보는 게 아니고 엄마를 쳐다봐요. 주신 분을 쳐다보잖아요. 그 짧은 순간이 온전한 순간이 되는 겁니다. 왜? 내가 지워지니까. 내가 온전하냐 나는 뭐가 부족하냐 이미 이모님한테 도움 받으면 이모님 소유가 되지 조카 나는 생각하면 안돼요.
이모님 얻어가지고 독립할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그게 오래 안가요. 왜냐하면 내일 되면 내일치의 말썽꾸러기 조카가 또 돼요. 그럼 그렇게 하든 말든 중요한 것은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말씀대로 살아있으면 그걸로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있으면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잖아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뭔가 크게 오해하고 뭔가 잘못 생각했던 것 우리 타고난 우리 본성이 참 마귀에 속했음을 다시 한번 자백합니다. 스스로 힘을 못 빠져나온걸 너무나 실감하면서 못 빠져 나온 그 자체를 이미 빠져나온 현상으로 사용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만 공로를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