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3장 16절 (피의 실제성) 221018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3장 6절,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이 대목입니다.
자, 이 6절에서 9절까지 핵심은 요청하는 주님. 우리 자신에게 누군가 요청한다는 것. 요청한다는 것은 우리가 모든 의미의 시작이 아니다 라는 뜻이죠. 당당히 우리한테 뭘 달라고 요청한다는 것은 나 이전에 누군가 먼저 계실 경우에만 성립되는 겁니다.
서울에 언덕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밑에 아늑한 집들이 보이잖아요. 저녁 노을이 있을 때 홀로 산책하면서 언덕 올라와서 밑을 볼 때에 그 밑에 있는 마을에 있는 건물들 또는 그 세상이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우리한테 뭐 요청하던가요? 세상이 여러분들에게 뭘 요청하던가요? 언덕에 있는데 저 밑에서 “어이~이거” 해달라고 요청하던가요? 요청 안하지요.
세상은 내 인생 내가 홀로 사는 것이지 누가 요청받아서 사는 게 아니에요. 내 인생은 나만 챙기면 된다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길들여져 온 우리의 마음인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오늘 누가복음 16장 6절 딱 보게 되게 되면 우리는 상당히 낯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왔더니 그 주인이 와서 내가 삼년동안 와서 살펴봤는데 열매가 없으니까 땅만 버린다. 그러니까 그 직원이 하는 말이 주인이여 그러지 마소서. 한 해만 더 두고 보시고 그래도 안 되거든 그 후에 찍던지 하던지 마음대로 하세요 라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 있어요. 뭘 요청하느냐? 이 6절에서 9절에 의하면 요청하는 것은 열매를 요청합니다. 열매. 열매 없으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찍어버린다. 가차 없지요. 단호하지 않습니까. 찍어버린다. 찍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여기 있음이 뭐로 변하느냐 하면은 졸지에 없음이 돼요. 어디에서? 이 땅에서.
영적세계의 영토화를 염두에 둬야 합니다. 영적세계도 하나의 땅처럼 그려놓고 놔두고 주님께서는 그 영적세계의 영토에서 벌어지고 일어나야 되고 거기서 결과로 나올 것을 지금 말씀해주고 있는 거에요. 영적세계에서. 영적세계하고 육적세계는 뭐냐 하면은 제가 아까 서울 언덕 이야기했잖아요. 육적세계에서는 내 인생 내가 챙기면 돼요. 그러다가 못 먹고 살면 굶어죽으면 되고. 굶어죽으면 되는 거에요. 먹을 것 없으면.
서양에서 기원전 BC 4세기경에 스토아학파가 있는데 그 2대 스토아학파의 클레안테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클레안테스라는 사람이 스토아학파의 2대 스승이에요. 이 사람이 99세까지 살고 죽었는데 죽을 때 어떻게 죽었느냐 하면은 굶어죽었어요. 이상하죠. 99세에 굶어죽는다. 그럼 98세 때 잘 먹고 잘 산 게 되잖아요. 그렇죠?
9살 때 굶어죽는다고 하면 어후 너무 안됐다. 20살 때 한창인데 굶어죽었다면 너무 안됐다가 되는데 99세에 굶어죽었다. 뭔가 그동안 호강했네. 살만큼 살았네 이렇게 되지요. 이렇게 99세에 굶어죽은 사람도 있어요. 100세 못 채워서 안타까운가요? 이 세상에는 우리가 굶어죽던 어떻게 죽던 세상은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자기 살기 바빠가지고.
아무도 내 인생에 대해서 우리에게 요청한 사람이 없어요. 왜? 영적영토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죠. 내가 있고 없고에 대해서 나 말고 다른 쪽에서 그것을 관장할 다른 주도권자가 없습니다. 영적세계 아닌 곳에는. 그러나 영적세계에서는 내가 죽고 사는 것까지 이유 있어요. 이유 있고 이유 없는 죽고 태어남이 없게 되어있어요. 이 영적세계에서는.
그래서 여기에 영적세계의 영토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7절에 보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그 다음에 무슨 단어가 나오느냐 하면은 “땅만 버린다” 땅만 버린다. 땅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적 영토의 땅 이야기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땅이 먼저 있었고 땅을 버릴래? 안 버릴래? 땅의 속성과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거기서 사람을 심었다는 이야기에요.
레고랜드 애들 갖고 노는 장난감 보면 무슨 도시 게임이나 뭘 할 때 사람들 이렇게 꽂아놓잖아요. 모내기하듯이 꽂듯이 영적세계의 주도권을 가진 분의 본래의 땅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서 사람을 꽂아넣았다는 것이 예수님의 의견입니다. 예수님의 안목이에요. 우리가 믿는다는 예수님의 안목이 그 안목이에요.
우리 위주가 아니고 너 자꾸 땅 버릴래? 이런 식으로 너 자꾸 이 땅을 더럽게 할래? 추잡하게 만들래? 이런 식으로 관심사가 주님이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니고 땅에 있습니다. 영적 땅이에요. 물론 지금 땅은 뭐냐 하면은 불사를 땅이기 때문에 의미 없어요. 주님께서 설계해놓은 영적 땅이 있어요. 약속의 땅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렇게 영적 땅의 가치와 의미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후손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을 때 당장 죽이지 않았어요. 당장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아담과 하와를 왜 죽이지 않습니까? 거기 16절에 봅시다. 13장 16절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여기 사탄이라는 말 나오지요. 사탄. 그렇지요?
그러면 아담을 왜 안 죽였는가? 아담의 후손을 하나의 지휘봉 같은 작대기라면 아담의 후손 그 전체를 하나의 작대기로 봐가지고 그 작대기로 어디를 겨냥 지적하게 만드느냐. 사탄에게 딱 도달될 때까지 아담의 후손을 이용하시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어요. 끝까지 가보자. 끝까지 가자. 아담의 노선 따라 끝까지 가자.
아담의 노선의 끝이 거기에 뭐가 나오는가? 선악과 따먹으라고 부추기는 사탄이 나오고 악마가 나오는 거에요. 사탄이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면 좀 더 구체적으로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탄은 반드시 어떤 모습인가? 적그리스도 모습이에요. 적그리스도의 모습. 적그리스도의 양상으로 등장합니다. 사탄이. 악마라고 한다면 모호해요. 하나님을 대적한다 이렇게 되잖아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를 못살게 군다 이렇게 되잖아요. 모호하게 구체적으로 겨냥 하는 게 없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에 역사 끝에 아담의 후손의 끝에 예수 그리스도로 옴으로 말미암아 악마는 아주 실제적이에요. 실제적. 실제적으로 악마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어떤 모습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그 하신 일, 복음이죠. 다 이루었다. 그 ‘다 이루었다’를 공격하게 되면 그건 악마가 실제적으로 이 세상에 등장하는 모습입니다. 악마가 궁금해요? 악마가 어떤 악마인지 알아요? 우리는 몰라요. 인간은 몰라요.
왜냐하면 사탄에게 18년 동안 매여 있기 때문에. 사탄에게 인간은 매여 있어요. 아담의 자손 전체가 사탄에게 지배를 받아야 돼요. 에베소서 2장 1절에처럼. 세상 신에게 매인 바 돼야 돼요. 매인 바 될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악마는 영이기 때문에 우리가 못 보는데 악마가 구체적으로 자기를 더 이상 자기를 숨기지 못하고 숨다 숨다 결국은 못 숨고 뭔가 툭 하고 자기 정체를 밝히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 경우가 어떤 경우냐?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 현장이에요. 그리스도가 하신 일, 다 이루었다 하는 그 일에 대해서 반기 들고 반항하고 대들고 하는. 악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모호하고 제대로 이야기하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적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선 자 악마입니다. 이게 악마에요.
그렇다면 이건 뭐냐 하면은 이게 왜 이 세상 땅이 아니고 영적 세계 영토냐? 왜 땅이 아니냐? 인간은 적그리스도 관계에 이미 엮어들어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를 맺혀드릴 수가 없습니다. 맺혀드릴 수가 없어요. 오늘 여기 본문 보면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할 때 인간은 마땅히 찍힘을 당하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왜 안 찍냐? 왜 안 찍고 여기 6절에서 9절에 보면 “그냥 그대로 두소서” 라는 말을 왜 하느냐 하면은 8절 말씀드릴까요.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왜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이야기하느냐? 지금 인간 하나 찍어 내고 안 찍어 내고가 주님의 일의 목표가 아니에요. 아담의 자손에 겨냥한 게 있는데 아담의 자손은 “정녕 죽으리라” 해 놓고 아담의 후손들을 계속 살려두는 이유는 악마의 정체를 노출할 때까지 활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세요” 라고 한 것은 여기에 만약에 실과가 발언권이 있다면 이건 뭐 내 인생 내 운명 두고 왜 다른 분이 주인이면 다냐! 왜. 농사꾼이면 다냐. 내 문제 내가 알아서 할 건데 왜 다른 사람이 관여해요 이렇게 대들 거에요.
그러나 여기에 보면 무화과나무는 아무런 발언권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발언권 없어요. 그 이야기하는 거에요. 열매를 요청하고 그런데 무화과나무 열매를 열어드릴 능력은 없어요. 이미 사탄에게 매인 바 되었으니까. 그럼 사탄에게 매인 바 되었으니까 그 운명이라는 것은 당연하게 9절에 나온 것처럼 찍어버리소서 여기에 해당되지요. “찍어버리소서.”
찍어버리는데 지금은 안 찍어버리겠다는 거에요. 일단 금년에는 그대로 두고 그 다음에 금년 지나면 찍어버리겠다는 거에요. 참 오늘 강의 어렵지요. 제가 어렵게 하는 게 아니고 말씀 자체가 어려워요. 이것을 쉽게 예를 들면 이렇게 하면 쉽지요. 수학에서 선분. 선분은 선하고 다릅니다. 선은 이렇게 쭉 가는 게 선이고 선분은 뭐냐 하면은 시작과 끝을 동강내는 것, 이게 선분이에요. 선분. 시작과 끝이 있어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운명입니다. 인간의 시작과 끝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딱 정해져있어요. 아담의 시작이 마귀로부터 시작했다면 아담의 끝도 ‘정녕 죽으리라’ “네가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는 주님의 자기 선언, 자기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사건의 전문은 어떻게 됩니까? 다 드러내고 죽일 때 죽여야지요.
네가 열매 없다는 것이 확실하게 결정 나야 그 다음에 찍어도 찍는 거에요. 열매 없다는 게. 선분이 시작과 끝이니까 시간 요소. 시간 요소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것을 사건이라고 하는 거에요. ‘사건’. ‘Thing’. 세상을 볼 때에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thing, 사물이죠. 사물의 총체.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사물들의 총체. 이걸 세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때는 어떤 경우냐 하면은 명사, 형용사로 세상을 묘사할 때는 사물들의 총체에요. 아름답다, 이쁘다, 저건 빵이다, 자전거다 이렇게 사물. 이건 사건들의 총체. 이 사건들의 총체는 사물 중심이 아니라 사건 중심으로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은 동사입니다. 뭐가 움직인다, 뭐가 한다, 무엇이 끝난다, 무엇이 시작된다. 동사 중심, 움직임 중심으로 봐서 움직임, 사건들의 전부를 이걸 세상으로 볼 수가 있어요.
이건 동사고 이것은 사건이라면 사물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존재가 됩니다. 있음이 되는 겁니다. 있는 것이 없게 된다. 없는 것이 있게 된다 할 때에 이걸 무화과나무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인간의 사물 말고 다른 존재자, 다른 존재가 있어야 돼요. 주님이든 하나님이든. 그러면 다른 존재자와 인간이라는 이 명사, 사물 사이에는 뭐가 있어야 되는가? 동사. 사건이 있어야 되죠.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교회가 있다. 사물 중심의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사물 중심의 교회. 우선 건축물이 있고 강대상이 있고 의자 있고 파이프 오르간 있고 성가대 있고 사람들 있고. 사람들이 존재하고 이런 뜻이죠. 탁자가 존재하고 피아노가 존재하고 헌금함이 존재하고 그게 뭡니까? 사물 중심의 교회가 되겠지요. 그러나 사건 중심의 교회는 뭐냐? 뭐 없지요. 사건 중심의 교회는 저 교회가 어떻게 시작했다가 어떻게 끝장나는가.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대로 한다면 열매를 보일 수 있느냐. 열매를 보이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정한 시간에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것은 열매가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 현재 있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에요. 우리가 예배당 짓는 것도 정당하고 우리가 예배 참석할 수 있는 것도 옳은 일이다. 자기 존재를 정당화할 때는 사물 중심의 교회에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오늘 누가복음 16장 6절에서 9절 사이에서 여러분들이 뭐를 느낄 수 있습니까? 6절에서 영적세계 영토화 작업에 있어서 뭐를 여러분들이 발견해야 하느냐 하면은 바로 부정성을 발견해야 돼요. ‘부정성’. 내가 사물 중심의 교회 같으면 내가 교회 왔다 예배시간에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설교 들었다. 끝났다 집에 간다. 이거는 어떤 부정성이 없어요. 맞춰서 다 했기 때문에 제대로 스케줄대로 했기 때문에.
그러나 부정성은 뭐냐? ~~는 틀렸다, ~~는 아니다, 그건 아니지, 그래서는 안되지 이게 부정성이에요. 오늘 13장 6절에서 9절 보세요. 이게 긍정으로 쭉 갑니까? 중간에 부정 있어요? 없어요? 부정성이 있지요. 주님께서 영적 세계 영토화를 하면서 이 말씀하면서 예수님이 이 예를 들면서 모든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거기에 뭐가 들어 있다? 부정성이 들어있어요. 부정성.
부정성이 들어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심판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를 이 땅에 만들어놨다 이 말입니다. 주민등록에 나온 것처럼 천구백얼마. 뭐로 시작될 때 1945년에 태어났다 하잖아요. 그렇게 태어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거기서 태어났는데 시작이 태어났잖아요. 끝은 뭡니까? 선분이죠. 시작, 끝은 죽음이잖아요. 죽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부정한다는 말입니까? 긍정한다는 말입니까? 부정성이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다 그 안에 흐르고 있었다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교회 예배는 뭡니까? 그 부정성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그런 모임이 예배지요. 우리는 어제부로 끝나야 되는데 어제부로 죽어야 되는데 왜 살아있지를 어제부로 찍혀야 되는데 오늘 한해 더 봐주는 구나. 봐준다는 말 자체가 이미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본다는 말이죠.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뭐로 본다? 부정적인데 주님께서 무슨 뜻이 있어서 살려준다.
그 뜻이 무슨 뜻인가? 구체적으로 모르는데 여기 나오잖아요. 16절에 그 뜻은 우리를 통해서 적그리스도의 실제함과 만나라. 적그리스도의 실제함과. 왜냐하면 지금은 신약시대이기 때문에. 지금 구약시대가 아니거든요. 신약시대라는 말은 역사는 끝났다는 거에요. 인간이 할 도리는 다 끝났다. 인간이 성전도 짓고 선교도 하고 율법도 지키고 할 것 다 해봤는데 어떻게 했다? 모조리 다 부정적이었다. 어느 인간도 인간 같은 인간, 구원받을 인간 단 한명도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리스도가 오셔야 알아요. 그리스도가 모르면 그거 아무도 몰라요. 왜? 악마에 매여있으니까. 악마는 인간 긍정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니까. 왜? 악마는 우상이니까요. 아까 했지요. 우상은 뭘 해준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 우상이에요. 우리의 소원을. 뭘 잊어버리라고?
우리가 따먹지 말아야 할 것을 따먹었다. 그 따먹지 말아야 할 것을 따먹었던 그 조치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있고 하나님이 그것을 죽여버린다는 쪽으로 쫒아오고 있다는 이 사실을 우리 인생 가운데서 그런 부정성을 덮어버리고 없애버리고 찢어버리고 그거 나 몰라라 하게 만드는 그 신. 그 신이 뭐냐? 그게 우상이잖아요. 이름이 뭐 여호와가 되든 예수가 되든 관계없어요. 그 내용이 우상이라니까요.
여기 11절 봅시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이게 얼마나 부정적입니까? 너무 부정적이라 성경을 안보나 사람들이? 18년 동안 귀신들렸다. 이게 얼마나 부정적이에요. 11절 이야기하면서 6절에서 9절까지 이야기 뭡니까? 열매 없다. 열매가 없는 거에요. 열매 없는 이유를 찾아가보니까 귀신 들렸네. 악마에 매였네. 지금 그런 말씀 하시는 거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영토에 계획이 다 있어요. 있고 열매를 원하는 겁니다. 열매. 하나님이 주신 열매가 뭡니까? 질문하지 마세요. 뭐부터 해야 되느냐 하면은 요청 한다는 그 사실. 뭔가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는 것. 나는 뭔가 요청받고 있는 대상이라는 것.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뭔가 요청받고 있다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내 인생 내가 설계할 수 있는 권한 있다? 없다? 내 인생 내가 설계할 수 없어요. 나이 20대 초반 군대에 갔다 와가지고 자기 고향에는 변변찮은 직장 없어가지고 “어머니 성공하겠습니다” 하고 서울 와가지고 서울역에 내려서 그 뒤에 서대문에 언덕이 많아요. 언덕에 노을 보면서 이 많은 집 중에서 내 집 어디 있느냐? 하고 할 때 그 밑에 집이 요청하던가요? 지금 본인이 서울을 향하여 요청하고 있어요.
나에게 집을 달라. 나에게 일자리를 달라. 내가 촌에 고향 버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너희들처럼 언젠가는 성공하고 말리라. 그게 바로 존재의 의미 아닙니까. 존재의 의미. 배달까지 해가면서. 다른 건 다 잃어버려요 손에 꼭 그 애 사진은 안 놓잖아요. 미안해 곧 달려갈거야. 오랜만에 하는 거에요. “언젠간 달려갈거야 너에게로.” 김종환이 달려갔잖아요. 자기 마누라랑 결혼했잖아요. 피곤해서 쓰러져 자면서.
촌에서 고등학교 마치고 딸내미 하나가 집안 하나 일으키겠다고 서울 와가지고 20대에 평택에 제빵 공장에서 일하면서 파리바게트 공장 일하면서 돈 벌겠다고 하다가 자다가 빨려들어가가지고 죽었어요. 그거 왜 했어요? 평택 공장이 요청하던가요? 아니지요. 본인이 본인을 요청한 거에요. 본인이. 본인이 본인을 요청한다니까요. 본인을. 내가 언젠가는 성공하겠다고.
왜? 여럿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들 사는데 나도 끼어들고 싶은 거에요. 만약에 그 아가씨가 우성 아파트 와보세요. 아파트 이렇게 많은데 왜 내 아파트는 없지 할 거에요. 젊은 사람들 그걸 가지고 꿈이라고 해요. 꿈. 한자리 넣어 주이소. 촌은 안 되고 서울 변두리라도 좋으니 하나 넣어주세요. 다리 끼고 들어가는 거에요. 부천이라든지 부평이라든지. 땅 값 비싸서 못 오고 저쪽으로 튕겨지죠.
그저 서울 들어갈라고. 왜? 그래야 사람대우 받잖아요. 내가 인간대우 받잖아요. 인간대우. 누가 요청하는데? 내가 날 요청했죠. 내가. 똑바로 살아. 잔업해. 돈 더 벌어야지. 빨리 집 하나 살게 아니야. 내가 나한테 요청했지요. 누가 요청하는? 아무도 요청 안했어요. 내가 열심히 하면 살 수 있다 그것뿐이에요. 그런 사람이 이거 보면 너무 부정적이죠.
열매가 없구나. 인간에게는 열매가 누가 열매인줄 알아요? 본인이 노력한 만큼 자기가 출세한 본인이 열매에요. 내 열매는 내가 키워요. 주께서 그 열매 안 받습니다. 주께서는 우리 열매 안 받고 주께서는 영적 열매 달라고 하니까 이 열매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안 나오죠. 그러니까 당장에 지금이라도 호통 쳐서 어떻게 하느냐? “찍어버려라!” 찍어버릴 대상이죠.
그런데 세상에 여기서 어떤 분이 찍지 마시고요 올해만 한번 두고 봅시다. 몇 년 했습니까? 7 절에. 몇 년 동안 두고 봤지요? ‘3년’. 그런데 포도원 직원은 몇 년? 금년만 해봅시다. 3:1 3에서 뭘 뽑아낸다? 1을 뽑아내겠다. 기어이 열매 맺고야 말겠습니다. 열매. 그럼 이 열매는 뭐냐? 인간에서 인간으로 온 열매는 여기서 안 받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께 드린 열매, 안 받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은 이미 찢겨버릴 대상이에요. 너무나 부정적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누구지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오셔서 이 말씀하셨잖아요. 예수님이 이 땅에 자기 백성을 경유하면서 여기서 없던 열매가 생산됩니다. 3에서 1을 뽑아내요. 큰일 날 뻔했어요. 올해 지나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영적세계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이 곳이 하나님이 원하는 유일한 열매를 맺는 작업의 현장입니다. 작업의 현장.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열매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 그런데 그 열매라는 의미를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요청하면서 뭐를 경유하느냐 하면은 열매있을 수 없는 인간을 경유해서 나온 열매, 부정성이 뭐로 바뀐다? 하나님의 긍정으로 바뀌어야 될려면 여기는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은 ‘agent’가 있어야 돼요. ‘대행자’, ‘중보자’가 있어야 돼요. 중보자.
예수님 자신이 다 이루었다 했거든요. 그럼 뭘 이뤘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뭘 이뤘어요? 열매를 원하는 아버지에게 합당한 열매를 누가 중보자에요? 주님이 중보자가 되셔서 아버지의 열매를 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열매가 뭐냐? 주께서 원하는 열매가 뭐냐? 사탄으로부터 매여 있는 자를 풀어내는 거고요 그 풀어내는 것에 해당되는 율법이 뭐겠습니까? 14절에.
14절에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 안식일. 율법이라는 안식일을 통해서 안식의 의미에 합당한 안식이라는 것은 다 이루었다 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말은 보기 심히 좋았더라 만족한다 다 이루었다는 뜻이에요. 그 안식일의 취지에 합당한 열매를 사람들은 안식일에 바쁘다 해서 열매는 없고 자기 안식일 지켰다는 자기 정당성만 내보이는데 반해서 예수님께서는 실질적으로 안식일 날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만족에서 하나님이 안식할만한 만족스런 결과를 열매를 주께서 에이전트가 되어서 제시해드린 거에요. 그 작업의 현장에 인간은 해내지 못하는 현장이어야 하지요. 영적상태에서.
그러면 인간은 왜 못하느냐? 몇 번 이야기합니까. 16절에 18년 동안 어디에 매여 있다? 사탄에게 매였으니까 이게 될 리가 있어요? 악마한테 매인 상태에서 무슨 열매가 나옵니까. 나올 수가 없지요. 그냥 찍어버려도 마땅하지요. 왜? 땅만 버리니까. 그런데 16절에 보면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무슨 날에 푼답니까?
안식일에 풀어야 안식일 율법의 완성이 되는 동시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6절에서 9절까지 나오는 그 무화과나무를 심은 그 땅의 효과를 그대로 반영해주는 땅의 거룩을 그대로 열매로서 이렇게 맺히게 만드는 그 역할은 그 영적인 땅에 합당한 영적인 분, 예수님 외에는 다른 사람 없습니다. 다른 사람 없어요.
또 이 이야기 듣고 그럼 내가 안했으니까 나 소외됐네 하지 마세요. 내가 안해야 되지요. 오히려 반대로 하세요. 혹시 내가 영적 열매에 내가 내 솜씨가 끼어들고 내 수고와 희생이 끼어 들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야지요. 이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 어디 감히 주께서 다 이루신 것에 내가 왜 낍니까? 거기 끼면 안 되지요. 그게 마땅하지요.
그런데 끼어들어라. 도와줘라. 도와줘라. 옆에서 부추기는 건 누가 부추깁니까? 대구강의에서 했는데 누가 부추겨요? 주의 일에 협조해야지 누가 부추깁니까? 적그리스도죠. 그리스도가 홀로 다 이뤄놓은 모든 사람은 못하고 그리스도만 하신 그 홀로 한 일에 자꾸 끼어들어가지고 해라 해라 하고 부추긴 것은 누가 그래요? 적그리스도가 그렇게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을 여러분 섭섭히 여기지 마세요. 왜? 적그리스도가 실제로 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은 오늘 강의에서 하이라이트다 정말. 적그리스도가 눈에 띄이기 시작한다는 말은 피의 효력이 눈에 띄이기 시작한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흘린 십자가 피의 효력이. 이게 실제적으로 드디어 감지가 된다는 뜻이에요.
왜? 십자가 피가 이게 다 이루었다 거든요. 너 죽을 거 내가 죽는다 이거잖아요. 말은 맞는데 이게 실제적으로 일상생활에 깊숙이 순간순간 감지되느냐 이 말이죠. 감지 안 되지요. 왜냐? 가게에 적그리스도가 안 와서 그래요. 그런데 가끔은 가게에 누가 오느냐? 적그리스도가 오는 겁니다.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고 영적인 생활을 해야 됩니다 이런 적그리스도가 온다고요. 그러면 아 저건 아닌 거 같은데. 아닌 거 같은데 그러면서도 전에 들었는데 뭐라고 반박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때 가서 노트 보지 말고. 그거 볼 것도 없어요. 사실 매일 들이닥쳐요. 매일. 가까운 식구가 들어닥치고 밤에 잘 때 누가 적그리스도냐 하면은 내가 적그리스도에요. 내가. 내가 적그리스도에요.
30년, 40년 목회했는데 예수 안 믿는 거 아닌가? 이런 의심과 의문 새벽 3시고 4시고 막 나와요. 무슨 소용 있나. 내가 믿는지 안 믿는지 감이 왔다 갔다 하는데. 지금 이 나이에 믿는지 안 믿는지 80대 돼서 치매 걸리면 어떻게 되는가. 나 그럼 진짜 신앙생활한 거 말짱 끝나는데 안돼!!! 혼자서 땀을 흘리면서 안돼!!! 이러고 있다고요. 원래 너 안돼. 원래. 새삼스럽게 안돼 하지 말고 처음부터 안돼. 처음부터 안돼였어 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적그리스도가 적그리스도 아닌 척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자신이 적그리스도인데 불구하고 아닌 척하기 때문에 자꾸 회의가 드는 거에요. 건전하게 더 노력하면 건전하게 될 희망 있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들을 하는 거에요. 정 그렇다면 도끼하나 들고 자기를 찍어버리던지 해야 돼요 정말. 도끼 하나 들고 뒤에 집어넣어놓고.
20대 청년에 서울 와서 언덕에서 내려 보면서 내 머리 둘 곳 하나 없구나 나 도대체 반겨줄 직장은 어디 있지? 이러지 말고 세상의 현실, 실상을 알아야 돼요. 세상의 실상을 한꺼번에 다 알아야 돼요. 세상의 실상을. 그게 뭐냐? 바로 사물 중심의 세상이에요. 명사. 내 것, 이름 붙이는 명사 중심의 세상이에요. 너 몇 개 가졌나? 나 몇 개 가졌다. 명사가 되어야 숫자가 붙잖아요. 숫자는 돈처럼 액수화시킬 수 있어요. 그걸 통계화시킬 수 있고요. 숫자가. 레고랜드 자체가 장난감 숫자를 채우는 거잖아요. 그렇죠? 하나하나씩.
그러나 인간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냥 주님이 벌이신 사건에 휘말리는 거에요. 자꾸 우리 보고 뭔가 주님께서는 요청하는 그 대상자가 돼요. 열매 내놔라. 열매 못 내놓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누가복음 18장에 나와요. 저쪽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자랑질하고 난리인데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바쁜데 여기 세리 앞에 주님이 딱 있으니까 “주님 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납작 엎드려버렸어요.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내가 내놓을 것은 없습니다. 내 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여기 의인 하나 추가요! 여기 의인 하나 추가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 바로 agency 또는 agent 대행자의 역할을 그게 하나님이 아니고 누가 하느냐? 그리스도가 하는 거에요. 그러면 악마는 하나님 믿어요? 안 믿어요? 야고보서 2장에 나오잖아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분인줄 알고 믿고 떨지요.
그러나 악마가 제일 배척하는 것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기에 보면 사탄이 하나님과 이야기해요.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고 누굴 배척합니까? 그리스도를 배척해요. 인간들을 아주 율법대로 조져버리세요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악마가. 그게 정죄하는 자, 고소하는 자거든요. 로마서 8장에. 그러면서 인간한테 다가와서는 뭐냐? 열심히 해봐라. 말씀 지켜야지. 은혜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리자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계속해서 우리에게 아직도 배 12척이 있다는 거에요. 12척 뭐할라고? 그거 12척 해서 뭐 할라고요. 아직도 배 12척이 있습니다. 결국 그 소리하다가 이순신 장군 죽었잖아요. 네가 죽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너 찍혀봐야 정신 차리지. 그거는 네가 네 욕망에서 욕망이 너한테 요청하는 거에요. 내 욕심과 내 욕망, 이 넓은 서울 바닥에 내 집 하나 없나. 이건 내가 나한테 요청하는 겁니다. 그 요청에 멍 때리고 요청에 잔업하고 난리도 아니죠. 아껴 쓰고 바꿔 쓰고 하면서 요청 때문에 한 푼이라도 아끼고 하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내가 남하고 같이 서울 시민 일원이 되기 위해서. 그 중의 한사람이 되기 위해서. 서울 사람들은요 서울 시민의 그 귀함을 몰라요. 바깥에 있는 사람들만 한성에 들러올라고 온갖 노력 다 합니다. 특히 초등학교 교사들. 발령받을려고. 빨리 서울 시내에 들어와야 자기 자식이라도 강남에다가 학군 좋은데 가지. 맨날 경기도, 강원도 섬으로 돌아다니면 자기 애는 공부 못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낸 것은 아까도 썼지만 끝까지 가자. 끝까지. 아담의 끝자락까지. 아담의 끝에 뭐가 사는가? 아담의 끝까지 데려가기 위해서 뭘 줬는가? 안식일을 줬고 이스라엘 줬습니다. 그리고 율법준 거에요. 이스라엘이 있다면 여기에다가 율법을 얹히고 그 다음부터 “이랴!” 하고 이스라엘을 몰고 가는 거에요. 어디까지? 이스라엘이 인류의 대표거든요. 이스라엘 망할 때까지. 하나님의 택한 백성 공중분해될 때까지.
아무도 택한 백성 없어요. 공중분해 정도가 아닙니다. 택한 민족이 누굴 죽였어요? 메시아를 죽였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심은 거에요. 예수님이 안 오시면 3년이고 4년이고 3년 지나면 그냥 찍어버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해, 3년에 3년째 되는 마지막 날에 금년에 누가 왔습니까?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이 땅을 방문했잖아요. 에이전트. 중보자, 대행자로 오신 겁니다. 자 가자. 가자. 내가 손 볼게 가자. 가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뭐를 대행하느냐? 뭐를 대행하느냐 이걸 알아야 되겠지요. 뭐를 대행하느냐? 심판을 대행하는 겁니다. 심판을. 열매 없는 인간을 향하여 열매 없는 인간을 주께서 자기가 거두어버려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열매는 나올래야 나올 건덕지가 없기에 받아주는 거에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도 마찬가지고요. 일체 열매는 없어요.
일체 열매가 없기 때문에 그 열매 없는 자에게 열매가 나온다면 그 열매는 100% 누구 열매입니까? 예수님 단독 열매가 되는 거에요. 그걸 바로 누가 참지 못하고 그걸 누가 공격하느냐 하면은 악마가 공격할 수밖에 없지요. 왜? 악마는 이미 인간을 누구 편으로 빼돌렸습니까? 자기편으로 빼돌렸는데 자기편으로 빼돌려서 악마는 인간 뒤에 숨어있어요.
나를 치려거든 인간을 쳐라 이렇게 되거든요. 나 치던지 인간 치던지 둘 다 치든지 이런 식으로 빼돌린 거에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악마는 자신만만해요. 고소하는 자니까. 어떤 인간도 다 고소하는데 악마는 빈틈이 없다. 정확하게 고소해요. 네가 지난 여름에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요. 확실하게 고소합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죄책감이죠. 철저하게 죄책감을 가지고 율법을 가지고 밀어붙입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명령과 지시를 가지고 밀어붙여요. 악마가. 왜? 영적이니까.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 통하잖아요. 사도 바울의 편지가 영적 편지에요.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옵니다. 이건 문자로 읽으면 안 되고 영으로 읽어야 돼요. 그래서 신학 자체가 소용없어요. 신학은 전부다 원어부터해서 문자도 됐기 때문에.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 알기 때문에 인간을 영적으로 몰아세우면 인간 내부에서 계속해서 무엇이 반복되느냐 하면은 자신의 한계가 계속 나와요. 그러면 악마가 “더더더더 더.” “내가 금식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악마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기도할 때 꿇어앉아서 기도했어? 서서 기도했어?” 이렇게 나와요.
이게 배부르구나. 꿇어앉아서 해야지. 손깍지 모았어? 아니면 손 펴고 기도했어? 이상하게 우리가 손깍지 아프게 하는 것이 손 펴서 하는 것보다 더 정성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본인이 받아요. 본인이. 본인이 더 극한 체험 있잖아요. 자기를 더욱 더 학대하고 더욱더 고통스럽게 하면 할수록 그걸 비례해서 우리에게는 아픔에서 오는 희열이 있어요.
그걸 ‘주이상스’라고 해요. 정신분석학에서.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쾌락인데 그 쾌락은 놀랍게도 고통에서 와요. 희생과 고통. 참 인간 괴물입니다 정말. 끝나기 전에 광고 하나 해드릴게요. 오늘부로 여기서는 일본말로 ‘시마이’입니다. 11월 달에는 전에 했던 대치동, 한티역 내려서 롯데백화점 옆에 5층 건물. 학원에서 강남강의 해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3장 16절 (피의 실제성) 221018b-이근호 목사
자, 첫째 시간 일단 요약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인류가 마지막으로 만나야 될 그 증거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 그건 아담의 후손이 마지막으로 만나야 될 거에요. 적그리스도가 예수님 당시에는 하나에요. 그런데 마지막 때가 되면 이게 다수입니다. 확 퍼져있어요. 적그리스도가. 왜냐하면 성도가 다수이기 때문에. 성도가 만나야 될 실제성, 아까 적그리스도 실제성 했지요.
복음에 대해서 다른 복음, 다른 성령,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을 성도는 실제적으로 목격함으로서 바로 예수님과 똑같은 상황에서 주의 일이 한결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감지되지요. 그럴 때 사도 요한의 편지 같은 것에 보게 되면 요한일서 1장부터 5장 끝까지 보면 처음부터 1장부터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피’가 나와요.
누구든지 죄 없다 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로 해가지고 오직 피로 말미암아, 5장에도 “피와 물과 성령으로서” 주님께서 적그리스도가 아닌 이유, 예수님만이 피 흘린 자 만이 성령 주시는 자만이 물 흘린 자만이 진짜 메시아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요. 그만큼 요한일서에 보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등장하니까, 적그리스도가 단수가 아니고 복수죠.
이 말은 뭐냐? 각 시대마다 적그리스도 나왔다는 것은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남아있는 시간을 전부 다 하나로 모아서 묶어버리면 그게 종말이에요. 지난해도 종말이고 올해도 종말이고 종말, 종말, 종말 계속 종말이에요. 종말이라는 말은 적그리스도가 이미 나타났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이미 나타났고 세상을 끝장낸 거에요. 끝장냈기 때문에 그 나머지는 뭐냐? 끝장의 메아리죠. 끝장장장장~~~.
끝장냈다는 그걸 가지고 ‘십자가의 단회성’이라고 해요. 십자가로 끝난 거에요. 십자가. 그 십자가의 안의 시간성이 뭐냐 하면은 3에서 1로 가거든요. 3은 예수님의 시간 안에서 3은 어떤 시간이냐 하면은 세상과 하늘나라는 단절되었음이 확정됐음. 끝났다. 끊어진 거에요. 왜? 아무도 이 세상에서 주님께로 갈 수 없기 때문에.
3일 동안 십자가에서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사도행전 20장 28절에 의하면 누가 죽었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죽었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피에요. 스스로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으니까 인간 쪽에서 하나님이 죽었으니까 하나님이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이 없는 거에요.
그럼 있는 하나님, 그 당시의 여호와든 신이든 알라든 신은 뭡니까? 전부 다 이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전체 신을 우상 만들기 위해서 진짜 하나님은 죽어버린 거에요. 인간들이 극단적으로 안 나가니까 하나님 쪽에서 극단적으로 나와버린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죽었다니까. 내가 누구냐?” “신”. “신이 죽었어. 죽었는데 뭘 신을 믿어. 인간아. 신이 죽었는데. 신이 죽어 없는데 뭘 믿어.”
죽은 신을 믿습니다. 죽은 신을 믿을려면 주님과 함께 성령 받아서 부활이 되어야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요. 이게 뭐냐? 3에서 새로운 1, 완성된 1이 나오는 거에요. 금년만, 금년만 참으세요. 그 금년이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에요. 금년이. 끝났는데 생겨난 새로운 금년. 부활의 세계죠. 3이라는 부정성. 맞죠? 부정성 맞지요? 3년 동안 봤는데 열매 없다. 3이라는 부정성 속에서 뭐가 나온다? 부정성 속에서 긍정이 나오지요. 부정의 토대가 없으면 긍정이 안 나오죠.
그런데 그 부정성은 미리 내다보는 부정성은 부정성이 아닙니다. 실눈 뜨고 보는 거에요. 실눈 뜨고 봐가지고 이런 건 안돼요. 하나님이 죽었다는 말은 부활의 영의 입장에서는 성령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죽었다는 뜻이에요. 왜? agent니까 대행자니까. 주님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뜻이거든요. 우리가 죽은 자가 다시 살려고 꿈틀대고 욕망한다는 그 자체가 이거는 부정성이에요. 이거는 하나님께서 열매라고 인정을 안 해줍니다.
열매는 100% 주님이 거저 건져주심이에요. 그것을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그걸 무슨 열매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거에요.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 설명하면서 성령의 열매 어떻게 나오는가? 갈라디아서 5장에 이렇게 해요. 네 육신과 영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한번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자, 이제 질문합니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지요? 분명히. 그러면 우리가 살아나는 겁니까? 십자가라는 사건이 살아나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십자가라는 사건이 살아나지요. 제가 이렇게 말해도 참 이걸 이해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십자가 믿는 내가 살아났다 이렇게 우긴다고요.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네가 주도권이 없고 십자가에 주도권이 있다는 거에요. 그러면 살아나면 주도권 살아나고 우리는 뭡니까? 종이 되야지요. 종.
종이 뭐냐? 누가복음 17장 10절에 보니까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종이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죠. 종은 주인이 아니잖아요. 종을 지난 설교 때 집사라고 했어요. 집사는 본인 이름이 없어요. 누구 누구의 집사.
좀 잘 사는 집에 보면 집사들 있잖아요. 김 집사 있잖아요. 메이드 뭐 영어로 하지만. 집사 있잖아요. 집사는 그 집, 자기 집 아니에요. 스케줄 자기가 짜는 거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내 인생 스케줄 내가 짜는 거 아니에요. 우리의 목표와 목적을 십자가 목적과 목표가 완전히 다 덮어버렸어요.
월남전 밀림을 완전 폭탄 하나가 전부 다 잿더미 만들듯이 주님의 복음의 목적이 우리의 사소한 목적과 목표를 다 전부 다 없애버렸어요. 우리의 목적과 목표 없애버린다고요. 우리의 목적과 목표가 사라지면 뭐가 사라져요? 고민과 걱정과 염려와 안절부절, 의기소침, 우울증. 만사형통이에요. 우황청심원인가.
십자가 살아있음이 십자가 살아있다는 것은 나 살아있음을 대신하자는 거에요. 어떤 드라마 이런 드라마가 있을 수 있어요. 아가씨가 친구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데 편의점에 물건 갖다주는 택배 기사가 술 먹고 행패를 부리면서 편의점을 쑥대밭 만들고 엉망으로 했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아저씨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러시면 나중에 고발당합니다 하니까 남자가 고발해! 고발해! 이랬단 말이죠. 착한 순한 아가씨. 그러고 난 뒤에 몇 일 뒤에 택배기사가 사법당국에 고발당해서 걸렸어요.
왜냐하면 그 아가씨가 판사인데 잠시 아르바이트한 거에요. 친구 집에 아르바이트했어요. 제대로 걸린 거에요. 그런 드라마 제가 한번 지어내봤습니다. 그 비슷한 드라마가 있긴 있는 거 같아요. 아까 실제성이라는 것, 적그리스도의 실제성이라는 것 그거는 실제로 어떤 영화에 보면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오면서 자기 집이라고 치고 애들 있고 자기 아내 있는데 자기는 쫒겨다니는 입장에서 현상범 입장에서 오랜만에 자기 집에 몰래 가가지고 내가 다녀갔다는 표시를 뭘로 했느냐? 식당에 있는 소금 그것만 딱 들고 간 거에요.
딱 들고 가니까 엄마는 몰랐지요. 엄마는 모르고 어? 소금이 어디 갔지? 이렇게 하니까 아이가 하는 말이 ET가 다녀갔어. ET가. 자기 아빠인데. 애가 말을 안 한 거에요. 아빠가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 소금만 부재하지요. 소금만 없지요. 이 세상에서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시장 다른 거 다 팔아요. 안 파는 것이 있어요. 뭘 안 팝니까? 십자가를 안 팝니다. 십자가 피를 안 팔지요. 그것만 부재하지요.
왜? 그건 영적인 분이 다녀가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모든 걸 이야기해요. 그러나 하나를 이야기 안 해요. 뭐냐 하면은 십자가 피가 이 교회 전체를 대행한다는 이야기를 안 하지요. 우리 예배, 선교, 헌금, 교회건축 이 모든 행사, 바자회 이 모든 것을 뭐로 바꿔야 한다? 십자가 피로 다 이루었다로 바꾼다는 이야기를 교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야기 안하지요.
왜? 적그리스도니까. 교회도 적그리스도다 우회적으로 이야기하기 싫어요. 이제 그런 것도 짜증나. 그냥 적그리스도에요. 그냥 적그리스도에요. 그 교회는 목표가 있어요. 그 목표가 뭐냐? 교회 부흥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주님의 목표 앞에 모조리 전부 다 싹쓸이 재가 돼야 마땅해요 그거는. 구원 참 쉬워요. 십자가 피만 믿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의 어느 한 순간 이 십자가 피를 방해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아침에 눈 떠서 하루 일과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십자가 다 이루었다만 방해하는 걸로 꽉 차 있습니다.
왜? 사탄에 매여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다른 건 다 허락해줄게. 그러나 이것은 안돼. 적그리스도가 이건 안 된다 하는 것이 뭐냐? 다 이루었다는 그건 안 된다는 거에요. 그 인류의 마지막 이러한 부정성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를 곳곳에서 출몰하는 적그리스도를 우리는 늘 매일같이 우리는 만나고 있습니다. 길거리 전도하는 사람도 보고 하지요.
자, 그렇다면 이제 남아있는 게 뭐냐 하면은 아까 언급했지만 끝까지 가보자. 끝까지 가보자. 끝에 뭐가 있는지. 오늘 본문 16절 보겠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그 다음에 무슨 딸입니까? 아브라함의 딸이죠. “아브라함의 딸”. 사탄, 아브라함, 안식일 이 세 단어의 연결이 누구로부터 완성이 되느냐 하면은 바로 중보자로 오신 예수님 대행자로부터 완성이 돼요. 사탄의 정체를 실제적으로 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 말고 누구에게만?
택한 백성, 아브라함의 딸에게만 어떤 취지로? 우리 아버지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흡족해 하시고 만족해하는 그 날, 무슨 날? “안식일 날의 완성을 내가 실제로 내가 보여줄게” 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날 말고 안식일 날 18년간 귀신들린 딸을 귀신, 악마를 나가게 해줬습니다. 11절에 보면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이렇게 시작하지요.
그러니까 이 자체가 18년 동안 귀신들린 이 아주머니가 그냥 본인이 낫게 해달라고 했습니까 아니면 일방적으로 했던 겁니까? 예를 들어서 제가 모션으로 보여준다면 꼬부라졌어요. 보니까 예수님이 계십니다. 병 잘 고치고 귀신 쫓아내기로 소문난 분이 있어가지고 여자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렇게 서가지고 “제가 보시다시피 18년 동안 꼬부라져서 귀신들려서 이렇게 못 일어납니다 고쳐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전에는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지금은 제가 이렇게 있습니다.” 이게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전에는 이렇게 잘됐는데 요즘에 이렇게 됩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정신병 걸렸다고 군대에 빠질려고 군에 진단서 가져온 사람이 있는데 “글씨 써봐라.” “저는 글씨도 못 씁니다.” “이 글 내용이 뭐야?” “글 내용도 모릅니다.”“얘는 진짜 안 되겠다. 정신 나갔구나 합격!” 하니까 와!!! 이렇게 하고 있다니까. 우리의 본심에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백날 해도 이만큼은 남아있는 게 긍정성이 있어요.
작으나마 딸딸 긁는다고 긁었는데 그대로 긍정성이 있어요. “이것까지는 내가 죄인인 것은 인정해주는데 이것보다 더 죄인이라고 하게 되면 저는 못 참습니다. 왜 죄인입니까” 라고 하는 그 마지노선이 있어요. 마지노선. 더 이상 밀고 들어오지 말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가 알아서 회개하고 반성하고 손들고 다 할 테니까 더 이상 진짜 내 인생 정말 끝납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아브라함 따라 우리 끝까지 가자. 끝까지 가자.
그러니까 사탄으로 하여금 귀신으로 하여금 이 여자에게 들어온 것은 그 여자한테는 이게 뭐냐 하면은 행운이죠. 행운치고는 꼴사납다만은. 행운인 거에요. 이걸 제가 전에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은 자크를 끝까지 내려서 괴도에서 이탈시키자 하는 이런 예를 여러 번 들었어요. 자크를 내릴 때 끝까지 내려버려요. 끝까지 더 내려버려. 그러면 자크는 터지고 밖으로 나오지요. 그때부터 새로 시작하세요.
그러면 내가 의도한 나의 구원, 나의 천당 가는 계획, 자기 구원받는 계획 자체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겠지요. 그게 뭐냐? 끝까지 가는 거에요. 끝까지. 끝까지 가서 궤도이탈 해버리는 거에요. 궤도이탈. 롤러코스터 타는데 너무 타서 궤도이탈해서 튀어나왔어요. 그럴 때 뭡니까? “악!!!” 하겠지요. 그때까지 가자 이 말입니다. 왜 그때까지 가야하느냐? 그때까지 갈 때 나의 어떤 것도 악마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그게 나였음을 발견하는 거에요.
어떤 경우라도 악마가 주는 주눅, 악마가 주는 희망과 포부, 비전 이것이 항상 내 자리에 항상 이게 친근감을 가지고 내 안에 포개지듯이 늘 차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내 힘으로 뭘 열매를 드리고 이거는 안 되는 겁니다. 끝까지 가는 방법이 있어요. 뭐냐? 성경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오늘은 여호수아를 가지고 설명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23장, 실제적 이스라엘 역사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개인적인 것인 개인적인 특수성 때문에 개인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에.
여호수아 23장 13절에서 16절. 여호수아 23장 16절 제일 끝에 네 자 나오는데 뭡니까? “망하리라” 망하리라 되어있지요. 앞에 두 자 첨부하면 뭡니까? “속히 망하리라” 이게 끝까지 가는 거에요. 13절 끝에 “이 아름다운 땅에서” 그 다음에 뭡니까? “멸절하리라” 16절에 보면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
지금 뭐를 주님께서 뭐를 철거 안한 거에요? “속히 망하리라 멸절하리라” 15절 끝에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되어있거든요. 이 “멸절하리라 망하리라” 요건을 여호수아에게 그걸 뺐습니까 그냥 두었습니까? 그냥 두었지요. 그거 왜 그냥 둡니까? 그게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을 준 것은 율법이 있어줘야 이게 끝가지 가요. 율법이 있어줘야 끝까지 간다고요.
오늘날 성도는 율법이 끝까지 갑니까? 십자가가 끝까지 갑니까? 십자가 끝까지 가니까 네가 어떤 죄를 지어도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한번 보자. 결국은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이게 십자가의 실제성이에요. 십자가의 실제성. 십자가 피의 실제성. 피의 효과가 실제적으로 있다는 거에요.
그걸 어떻게 아는가? 우리 주변에 놀랍게도 이 사실을 어떤 짓을 해도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은 안 믿는 적그리스도에 속한 그 모든 것들을 매일같이 우리는 수십 명씩 수백 명씩 만나고 있으니까요. 매일같이. 열심히 하자 노력하자 성과 있을 것이다. 내가 나를 부추기고 나에게 희망과 격려를 주고 그렇게 하는 거에요.
자, 그러면 여호수아 이렇게 망할 거 같으면 이 땅에 왜 했는가? 여호수아의 전쟁의 의미가 기생 라합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나타나있습니다. 그 여호수아 전쟁에서 제일 먼저 정복한 성이 여리고성이거든요. 여리고성에서 기생 라합이 행한 태도 한번 보세요. 기생 라합은 자신과 자기 가족과 그리고 모든 민족이 이미 죽은 목숨인 것을 인정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뭔가 노력해서 팔자 고칠 일은 없다는 일을 발견한 겁니다.
지금 쳐들어오는 이스라엘, 여호와 앞장세워서 쳐들어오는 그 이스라엘 앞에서는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인 것을 미리 일찍 그걸 인정해버렸어요. 그럴 때 구원은 전적으로 어디서 오는 겁니까? 죽은 내가 어떤 조치를 못하지요. 여기서 명사가 아니고 사물이 아니고 동사 이어지는 겁니다. 누군가 우연히 어떤 분이 정탐꾼 두 명이 우연히 자기 집에 왔지요. 2명이 우연히 왔지요. 우연히.
그러니까 십자가를 알게 된 것이 교회 와서 십자가를 배워서 알게 된 것이 아니고 우연히. 그냥 우연히 온 거에요. 우연히. 우연히 아니고 내가 성경공부해서 알았는데요 하면 주님께서 성령께서 이게 우연히 온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경공부해서 알았던 십자가가 무용지물로 만드는 사태를 계속 일으켜버려요. “십자가 안다고? 꼬라지하고는. 잘났다 그게 십자가 아는 거야?” 계속 십자가 아는 것을 무용지물 만드는 사태로 계속 만들어버려요.
십자가 알아서 뭐 고민과 걱정 없다. 무슨 없기는 뭐가 없어. 더 큰 게 날라오는데. 공부해도 십자가 소용없구나 밤잠 못자고 주여 어찌하오리까. 이거는 쌩 떼 써가지고 공부해서 얻은 십자가지 우연히 찾아온 십자가 아니거든요. 우연한 십자가는 그냥 공중에 두 팔 벌리고 그냥 날라버린 거에요. 내 인생 끝났다.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끝나버린 거에요.
그럼 독수리 날개가 밑에 딱 받쳐주지요. 십자가라는 독수리 날개가 딱 받쳐가지고 이제부터는 너의 모든 목적은 없고 내 목적 너는 종으로 가야된다. 종의 특징은 뭐냐? 어떤 일을 해도 우리는 마땅히 할 뿐입니다. 이거해서 얼마 줍니까 그런 거 따지지 마. 마땅히 할 뿐이에요. 마땅히. 왜? 내 일이 아니니까. 내가 원해서 종 된 게 아니고 주님이 원해서 종 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알아서 이끄실 거에요.
여러분 잘 아시는 시편 23편 3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 보세요. 주인공이 누굽니까?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지요. 목자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내 이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목자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어떤 길로? ‘의의 길로’.
그러니까 목자가 빠지면 우리는 어떤 길로 못 간다? 의의 길 그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몰랐고 지금 내가 의의 길인지 알 수도 없어요. 목자가 와서 4절에 보면 “사망의 음침한 길로” 다니게 함으로서 비로소 내가 믿는 십자가가 아니라 주께서 우연히 찾아온 십자가가 나를 건지는 거에요. 그래야 공로가 100% 주님 공로만 돌려지는 거에요.
여리고 성에서 기생 라합이 죽은 자라고 했을 때 죽은 자라고 간주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정탐꾼이 와서 살려줬잖아요. 그럼 그 전쟁의 초점은 그거에요. 뭐냐? 모든 이스라엘아 똑바로 봐라.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이 이방 여인을 통해서 내가 보여주마. 심판 가운데 심판하시는 심판 행위죠. “찍어버리라”는 뭡니까? 심판이죠. 심판에 합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에요.
누가? 기생 라합이. 어떤 모습으로. 내가 심판 받아 마땅한 모습으로 뛰어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 기생 라합의 사고방식을 유지해줘야 돼요. 여호수아 그 집단을 심판 사건 속에 이스라엘을 데리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는 모든 전쟁은 무슨 전쟁 되겠어요? 이방민족을 심판하는 전쟁. 전쟁을 하는 거에요.
여호수아 21장 44절 지금 끝까지 가자 그 대목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음이니라” 45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그러니까 말씀대로 되어지는 거에요. 말씀대로.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목적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중보자 보내서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를 중보자 손에서 가지고 오는 것, 만들어 오는 것. 그게 하나님의 말씀의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사람 빠지고 중보자 보내셔서 중보자로 하여금 안식하도록 영원히 안식하도록 흡족한 열매를 그 아들을 통해서 끄집어내는데 그 와중에서 데리고 오는 자는 부정성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주님이 구원한 자가 100% 부정해야 돼요.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야 됩니다. 스스로 노력한 게 섞여버리면 이것은 ‘다 이루었다’에 그건 훼방하는 거에요. 그게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거에요.
여호수아를 좀 더 보겠습니다. 그 다음에 여호수아 5장 3절이요. 시간 좀 가더라도 이스라엘 심판 전쟁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봐야 됩니다. 5장 3절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요단강 건너가고 난 뒤에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부싯돌로 칼을 만드는 거에요. 칼을 만들어서 그 칼을 어디에 사용합니까? 이스라엘 자손에게 할례를 행하는 거에요.
자, 이 뜻은 뭐냐 하면은 적들에게는 뭐가 없다? 이스라엘과 싸우는 적들에게는 할례가 없고 하나님 편에 속한 자는 뭐가 있다? 할례가 있는 거에요. 할례라는 뜻은 끊어버리는 겁니다. 뭐를 끊어버리느냐? 자기 육신을 끊어버리는 거에요. 이게 마음의 할례도 되고 육신의 할례도 되는데 할례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가 이왕 죽은 자로 만들어버리는 거에요.
명사, 형용사, 동사. 명사 이 사물 자체가 thing이라는 사물 자체가 죽은 사물이에요. 죽은 자를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동사가 되셔가지고 어떻게 죽은 자를 가지고 소위 살았다는 자에게 승리하는지를 너희들이 똑똑히 나와 함께 해서 목격하라 그리고 그 증인이 되어라. 왜? 나의 종이니까. 그들은 나의 종이 되어야 하니까. 주인이 하는 걸 보고 종은 이렇게 했습니다를 증거하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 다음에 여호수아 6장 23절 유명한 여리고 성인데, “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 무리가”, 그 다음에 보세요. 나머지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나 보세요. “그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라고 되어있지요.
이게 뭐에요? 이게 심판이에요. 곳간에 있다는 것은 심판했다는 증거품들이죠. 그러면 기생 라합과 그 가족은 뭐가 되느냐? 전리품이 되겠지요. 그 전리품이 되어야 구원받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도 전쟁하면서 뭐가 되느냐? 본인들이 전쟁한 당사자가 아니라 본인들이 전리품이라는 사실을 그 전쟁을 통해서 그걸 체험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못하는데 주께서 해내신다. 주께서 하는 지금 전쟁을 뭡니까? 하나님의 원수라고 했지요. 그게 신약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신약 성경에 역사의 마지막이 되면 뭐라고 나옵니까? 하나님의 적이 아니고 뭐라고 나옵니까? 적그리스도. 왜? 그리스도가 이미 나타났기 때문에.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의 일은 예수님 안에 다 들어있어요. 예수님이 하는 일이 아버지 일이에요. 아무도 못 알아봤어요. 아무도 못 알아들었어요.
유대인? 자기 아버지는 악마인데. “너희 아비는 악마다. 너는 악마의 자식들이야.” “왜?” “나를 안 믿으니까.” 주님의 뜻은 아주 간단해요. “나를 알아?” “몰라요.” “악마구나.” 이겁니다. 그럼 “주님을 압니다.” “알아? 진짜 알아?” “예 압니다.” 그럼 나 떠날게 알아서 해라. 떠나니까 뭡니까? 전부 다 배신자, 도망치기 바빴지요. 그게 아는 거에요? 모르죠.
그러니까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육신과 정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려서 십자가 자체가 우리를 대신해서 동사로 움직일 때 그때 등장하는 믿음이 뭐냐? 바로 ‘주님은 그리스도십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사울은 십자가 안에 숨어들어갔어요. 좀 비겁하지만.
냉동고 있잖아요. 냉동고. 얼음 어는 냉동고. 만화같은 거 보면 냉동고 있는데 실수 해가지고 문을 닫으면 한 두시간 뒤에 문을 열어 보니까 사람이 있는데 이 사각형 안에 얼굴 하얗게 되고 얼음덩어리 돼서 나오는 거 있지요. 이 정도 되면 사람 죽지만 만화이기 때문에 걸어나오는 거에요. “김 대리 네가 왜 거기 들어갔지?” “과장님이 문 닫았잖아요.” 와보니까 김 대리가 얼음 되어있단 말이죠.
이 사각형이 뭐냐? 십자가고 이 안에 들어있는 게 바로 성도가 되는 거에요. 성도. 이게 바로 갈라디아서 6장에서 말하는 ‘내가 십자가 안에서 나는 이미 죽었다’고 되어있어요. 나는 죽고 세상은 내게 대해서 이미 죽은 자고 서로가 서로를 죽은 자로 마주 보는 거에요. 뭐를 중간에 두고? 십자가를 두고. 이게 성경에 다 있는 이야기에요.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뭡니까? 우리는 나는 이 땅에서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다? 하늘에 보관되어 있다는 거에요. 하늘에 보관되어 있다. 그걸 지난 낮설교에서는 뭐냐 하면은 사람이 우르르 몰려간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자리가 있어야 된다고 했지요. 처소가 없으면요 수천명 수만명 와도 십사만사천 와도 안돼요. 자리가 없어요. 자리 없다는 말은 애초부터 천국에는 인간을 위한 자리는 없어요. 노인을 위한 나라도 없을 뿐더러 인간을 위한 자리는 없어요.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우리가 실제성을 그걸 느껴야 돼요. 그리고 그걸 느낀 사람만이 자리가 마련됐음을 아는 자만이 나를 위한 자리는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돼요. 이 땅 천국에는. 주님의 종의 자리고 주님과 함께 있는 형제의 자리지 주님의 신부의 자리지 내가 원했던 내가 이 땅에서 상상하고 생각했던 그 자리는 없어요. 나를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개는 훌륭하다는 그 프로가 있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프로그램이 개 나오는. 그 개는 훌륭하다 그 프로에 보면은 개가 있는데 두 종류의 개가 있어요. 하나는 명랑한 개가 있고 하나는 우울증 걸린 개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그 프로를 보고 나한테 얘기해줬는데 그 개도 나처럼 우울증 걸렸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우리를 개로 한번 봅시다. 개로 본다면 명랑한 개 있고요 같은 개인데 이상하게 명랑해. 같이 죽어가면서도 되게 명랑해요.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지금 늙어가고 있으면서도 되게 명랑해요.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되게 명랑해요. 그런데 멀쩡하게 돌아다니면서 굉장히 우울해요. 이유가 뭐냐? 자기 목적과 기대와 희망이 그대로 있으니까 우울한 거에요. 안되면 어떻게 되느냐 말이죠. 자기 소원 안 이루어지면 나는 무슨 재미로 더 사냔 말이죠. 나는 그럼 어떻게 살라고.
옛날에 이현세 만화 같은 거 있잖아요. 언덕이 있는데 언덕에 마을 집이 있는데 여기 산에 뉘엿뉘엿 그것도 그냥 지는 게 아니고 뉘엿뉘엿 해가 지면서 노을이 있잖아요. 나 어떻게 살지?! 오늘밤 어떻게 지내나. 보니까 돈 1200원 있는데. 또 어디 공원 벤치에 누워 자나 라는 신세 한탄 있잖아요. 이게 만약 25살이라고 봅시다.
이 25살이 여기 고층 45층 아파트에 살면서 그것도 제일 로얄석에 살면서 뉘엿뉘엿 지는 북한산입니까? 아니면 인왕산 곁에 해질 때 지금 100평짜리 아파트 잘 살아요. 살면서 다음에 결제는 어떻게 하지? 이러고 있다니까. 이 25세가 56세라도 달라진 거 하나도 없어요. 내일 어떻게 견디지 하고 있다고요. 우리 애가 전교 2등 하는데 1등은 언제하지 이러고 있다고 지금. 고민이야 이러고 있다고 고민이야. 또 어느 수학 선생을 붙여야 되나. 고민하고 있다 이 말이죠.
26살 먹은 이 청년이 집 없다고 고민하는 게 아니라 집 있고 차 두 대 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고생 여전해요.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목적과 목표를 깔아뭉개버릴 완전히 세상 끝까지 가서 끝장 끝장을 봤던 그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 메시아의 에이전트를 모르기 때문에 이건 백날 자기 딴에 출세했다 해도 소용없는 짓입니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묶던지 안 지게 하던지 그런 조치를 해야 되겠지요.
자, 여호수아 계속 봅시다. 여호수아 4장에 보면 돌멩이 하나씩 들고 나오는 게 있어요. 4장에 보면 2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8절에 보면 같은 이야기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가 명령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의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에서” 돌 몇 개를 취합니까? 12개인데요 한 대표가 와서 하나씩 들고 하는 거에요.
자, 이게 주님의 언약을 앞장세워서 벌리는 그 심판에 한 지파도 예외 없이 모조리 다 심판 전쟁에 참전하는 병기가 되고 용사가 되는 거에요. 돌로서 돌 들고. 돌 하나에 지파 하나에요. 돌을 모으는데 돌이 12이죠. 다 모으니까 탑이 두 개입니까? 세 개입니까? 달랑 하나밖에 없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12는 12 각자에 속한 1은 이거는 1이 아니에요. 이거는 무의미한 겁니다. 11이 없는 나만의 1은 이거는 소용없어요. 12을 다 채워야 하나가 돼요. 12를 다 채워야.
그래서 여호수아에 보면 아간 있잖아요. 이건 대구강의에서 했는데 아간이 반칙하니까 누가 죽입니까? 12지파가 다 달려들어서 그 하나를 죽이죠. 그러면 뭐가 회복돼요? 하나가 날라가 버리고 어떻게 돼요? 12가 하나가 온전히 되었지요.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은 이 질문을 하고 싶은 거에요 여러분들에게.
우리 자신의 존재에서 어떤 것을 미흡함으로 느낍니까? 이걸 평소에 살아가면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자신에게 어떤 것을 아직 모자란다 부족하다 미흡하다고 느낍니까?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누구의 종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우리 자신의 존재에서 어떤 미흡함을 느낀다는 자체가 종한테는 이거 주인 들었으면 화 낼 일이에요. 반칙이에요. 어떤 미흡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실제 일상생활에서 보면 우리는 단 한 시간도 미흡함을 안 느낄 때가 없지요. 버스가 빨리 와야 될 텐데. 오자마자 가는 게 어딨어. 그건 반칙이지.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좀 기다리면 되는데 성질 급해가지고. 여러분 잘 알지요. 성질 급한 사람 누군지. 맨날 엎어지고 자빠지고 정강이 다 까지고.
우리가 어떤 점에서 자꾸 미흡함을 느낄 때 그 한 사건 미흡함을 느끼는 사건을 놓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주께서는 그게 우리가 유한이거든요. 유한. 우리로 하여금 계속 유한케 하게 하시는 것이 우리 안에 무한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주님이 십자가만을 드러내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내 자체적으로 내가 욕심을 부리던 탐심을 내던 어떤 미흡함을 자꾸만 느끼는 거에요. 매일같이. 순간적으로. 복음 듣고 돌아서도 미흡함 느끼고.
그런데 12는 13을 원하지 않습니다. 14를 원하지 않아요. 12 자체가 이미 하나가 되어있으니까 하나라는 것은 더 이상 보탤 필요가 없는 거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 12를 언제 경험하느냐? 전쟁할 때 경험하는 거에요. 전쟁할 때 어떤 전쟁? 심판 전쟁이죠.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게 바로 여호수아에서는 신명기에도 나오지만 전멸.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상대를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 이 사람들을 전멸시켜야 됩니다. 저쪽을 전멸시킨다 이 말은 저쪽 가운데서 나의 미흡함을 보충 받을 것이 일체 들어있지 않다는 심판적 안목이에요. 주님의 입장에서 주님의 기준에서 십자가 없다고 처단한 것, 내가 그 사람한테 아 저건 아깝다. 십자가만 몰랐다 뿐이지 인품 하나는 끝내준다. 저 사람은 정말. 우리 신랑 십자가는 몰라도 나한테 잘해주는 거는 이건 뭐 공주보다 잘해준다 이런 거 있잖아요.
우리 아내 살림 잘하고 밥 잘하고 요리 잘하고 싹싹하고 성격 좋고 건강하고 특히 돈 잘 벌어 오는데 단지 뭘 모르느냐. 십자가 하나 모른다. 그거 하나마저 채웠으면 나한테 얼마나 내가 행복하겠느냐. 바로 이 전쟁. 내가 나에게 하는 전쟁. 내가 나를 상대로 벌리는 이 십자가 전쟁. 주께서 이걸 바로 우리를 유한한, 우리를 육신으로 아직까지 이 세상에 남겨진 이유입니다. 계속 우리가 유한해야 돼요.
그래야 무한한 것은 내가 아니고 온전한 내가 아니라 뭐만 온전합니까? 나를 끝까지 구원해 주신 오늘밤 내가 낙원에 있게 해주신 그 피의 실제성을 우리가 느끼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매일 우리의 일상은 뭐냐?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고 있으니까 매일 우리의 삶은 적그리스도 요소를 우리가 찾아보는 그런 재미? 나에게서 끄집어낼 수 있는 적그리스도적인 그거 캐치하는 찾아내는 즐거움. 이게 성도의 즐거움이고 이게 범사에 감사지요.
그럼 여러분이 26살 먹은 막 촌에서 올라온 청년이다 칩시다. 그리고 해가 지는 언덕 위에 나는 1200원 밖에 없는데 나는 오늘도 어디서 잠을 자지. 이 더러운 인생 나는 어떻게 살지? 하면서 씨익 웃는 거에요. 주여 오늘밤에 데려가셔도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그 청년이 나이가 26이라면 지금 26살이 세월이 바뀌어도 일상이니까 일상이 매일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니까 이게 46이 50, 60이 되고 66, 76이 되도 매일 그 인간이 그 모습 그대로에요.
그러니까 조금도 스스로 완벽하거나 완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대구강의 마지막에 묻는 거잖아요. 온전해질렵니까? 아니면 감사할렵니까? 딱 둘 중에. 온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제 말이 아니고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네가 부족할 때 온전하여짐이라 네가 안에 사탄의 가시가 있을 때 낫게 하지 말라. 됐다 네 은혜 네게 족하다. 네가 부족할 때 온전하여 짐이라. 은혜가 온전해진다.’
그게 바로 우리의 육신 가지고 아직도 우리가 버티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늘 부족하고 늘 성경에 나오는 적그리스도 모습이 내 모습이고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깨닫는 것은 이미 거기서 벗어났기 때문에 성경적 안목으로 말씀이 끝난 안목으로 나를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에 주께서 주의 종으로 제대로 주의 증인하라고 이런 육신을 이런 적그리스도 같은 이 육신을 그대로 주께서 66, 76, 86 계속 끌고 가고 있는 주의 선하신 뜻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어짐을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사건적으로 깨닫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연히라도 모든 것이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 기쁨과 환희와 즐거움으로 다가설 수 있는 그런 주님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저희들 남은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