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성도가 비유다

아빠와 함께 2022. 11. 21. 16:08

강남-누가복음 13장 19절 (성도가 비유다) 221108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3장 18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라고 되어있지요.


여기 앞에 천국이라는 말을 뺍시다. 천국이라는 말 빼고 어떤 채소밭에 겨자씨 하나 심어놨더니만 나무가 컸고 나무 커지니까 자연적으로 공중의 새들이 들어왔다. 앞에 천국 빼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이게 이 세상으로 이해될까요? 천국으로 이해될까요?


그냥 이 세상의 자연 현상이죠. 그냥 알 수 없는 자연 현상이죠. 그러니까 방금 제 말은 뭡니까? 천국이라는 말을 예수님이 붙였을 뿐이지 천국 말하지 않고 빼고 그냥 이야기해버리면 이 세상이 뭐가 되어버리느냐 하면은 이 세상 현상이 천국 현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천국이라는 말 빼고 그럼 일반적으로 농사지을 때 풍경이 그대로 묘사되고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천국은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세상 현상하고 일치되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어려운거에요. 어느 누가 이 세상을 천국이라고 합니까. 어딜 봐서 천국이에요. 천국 아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면 천국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뿌렸더니만 나중에 나무처럼 되었고 각종 새가 와서 깃들였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 세상에서 천국을 따로 뽑아낼 수 없었던 이 세상은 주님이 천국이라는 말을 붙임으로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왜 너 뽑아낼 줄 몰라. 모르지. 나는 뽑아냈잖아. 나는 이 세상에서 천국이 이런 식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나는 뽑아냈는데 왜 뽑아내는가? 그들은 이 세상은 이 세상이지 천국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천국이라면 천국이 되는 거에요. 그리고 예수님이 천국이라고 하는 그 점에 대해서 인간들은 완전히 배제됩니다. 인간들은 배제돼요. 인간들은 아무리 봐도 천국이냐 아니냐를 구분을 못해요. 너무나 평범하게 오셨기 때문에 아무리 깊이 골똘하게 연구해도 이 땅에서 이건 천국이고 이건 세상이라고 떼어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능력 없으니까 심판받아야지요. 능력 없으면 심판받아야 되는 겁니다.


자, 인간세계에서 천국은 뭐냐. 문제해결책입니다. 문제해결책. 인간에게서 천국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 어떤 어려움과 우울한 것, 원통한 것, 분통한 것, 아쉬운 거 있으면 하나님이 천국에서 갚아주세요 이렇게 하지요. 인간은 문제해결책이에요. 주님께서 천국은 뭐냐 하면은 문제 제시. 없던 문제를 만들어 버려요. 이 세상에 문제 있다. 이 세상에. 나는 이 세상 가지고 천국을 설명할 수 있는데 너는 이 세상 현상 가지고 천국을 설명 못하니까 너희들은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거에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문제가 있는가?


20절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19절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이렇게 되어있단 말이죠.


왜 인간들은 천국을 뽑아낼 수 없는가. 인간 자체가 이게 명사에요. ‘명사’. 명사라는 말을 어려운 말로 하면 존재입니다. ‘존재’. 자기 존재 위주로 천국을 생각하는 거에요. 나 천국 보내줄거요? 말거요? 이게 인간이 자기 존재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나 죽어서 지옥이라는 존재에 갑니까? 천국이라는 존재에 갑니까? 나라는 존재는? 뭐든지 나라는 명사는 지옥이라는 명사에 갑니까? 천국이라는 명사에 갑니까? 이렇게 돼요.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19절 20절은 뭐냐 하면은 동사입니다. 움직임이에요. ‘움직임’. 천국은 그냥 움직이는 거에요. 움직임이 될려면 자기의 명사됨을 존재됨을 포기하고 자기가 동사화 돼야 되겠지요. 그 흐름에 같이 뛰어들어야 되겠지요. 내가 뭘 한다가 아니라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중이다가 돼요. ‘나는 뭘 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강조되고 내가 명사적인 존재로 뭘 한다가 아니라 어떤 분에 의해서 내가 휘둘리고 있고 휩쓸려 있다 이렇게 돼야 되지요. 이게 자기를 동사로 보는 겁니다.


그럼 지옥은 뭐냐? 전부 다 명사지요. 보는 사람도 내가 보고 판단도 내가 하는 거에요. 그래서 명사적 더 쉬운 말로 자기 존재, 존재, 존재, 존재들만 뭉쳐있고 존재들의 공동체만 생각하는 거기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천국은 너희들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내가 제시하는 내가 보고 있는 천국은 파악이 안 된다는 겁니다. 천국은 파악이 안 되는 세계에요. 또는 천국은 파악이 안 되는 질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천국은 인간들이 파악할 수 없는 질서.


주님께서 천국을 봐도 인간들이 자기 존재로 그걸 이해하고 해석하는 거에요. 저 움직임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까? 전부 다 자기 존재 위주로 생각하면 저걸 내가 알게 되면 나에게 유리할거야. 구원받는데 더 유리하게 작용할거야. 자기 이익 중심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주일날 설교 때 제목이 뭐였지요? 오기와 감사였죠. 감사가 생기지 않으면 오기만 있어요.


오기는 뭐냐 하면은 나중에 이익이냐? 손실인가 꼭 이렇게 결산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오늘은 내가 어떤 이익이 있을까? 오늘 어느 손실을 봤을까. 성경에서 감사라고 하는 것은 어떤 분의 혜택을 입었거든요. 혜택, 그분의 혜택. 그분만이 존재가 되고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그분의 혜택을 덧입은 것이 되니까 내 존재를 생각하면 안되지요. 그 감사의 은혜에 내가 희석돼야 되고 녹아져야 되니까요. 감사를 매일같이 모아야 되니까요. 감사를 모으는 거에요.


성도를 쫙 갈라보면 안에 받았던 감사가 막 나오고 은혜들이 선물들이 막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감사는 선물이거든요. 그런데 선물 받은 적이 없으면 본인이 이익과 손실을 나중에 본인이 계산하고 결산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은 아까 동사, 명사로 생각한 것. 명사, 자기 존재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뭘로 표현했습니까? 동사로 표시하는 거에요. 동사로. 그건 의도적으로 인간들이 알 수 없는 세계, 인간들의 판단력을 피해서 천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 같은 경우 비유로 이야기할 때는 뜻이 뭐냐 하면은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비유로 이야기합니다. 그게 이런 점이 어려운데요 “나는 너에게 비유로 이야기한다” 에서 그 비유를 빼버립시다. 그러면 “나는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하면 사람들은 비유로 이야기한 것을 빼버리고 그 이야기를 바로 들어버리면 100% 전부 다 오해하는 거죠.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릴 때 예수님이 이야기하면 아! 저거 농사짓는 일이다. 분명히 비유라고 단서를 붙였는데 비유 빼버리니까 농사짓는 일이니까 이게 이해가 되는 거에요. 인간극장 보면 이해가 다 돼요. 거기 농사짓는 사람 많이 나와요.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거기서 대추나무 열리면 그거 뭐 이해 못할게 없죠. 온 식구 달려 들어서 대추밭에서 일한다 뭐 이렇게 다투기도 하고 서로 나중에 대추 퍼준다 그게 그렇게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런데 똑같은 이야기, 온 가족끼리 대추나무 해서 대추 나눠줬는데 “이게 비유니라” 이렇게 하면 그 다음부터는 멍~~~하죠. 이게 비유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계선을 넘어야 진리가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그 너머에 또 다른 숨어 있는 뜻이 명확해서 이미 명확한 뜻이 있기 때문에 저 뜻 말고 따로 남겨진 뜻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버리는 겁니다.


보기는 보아도, 사람들이 예수님 봤지요. 보기는 보아도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는 거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예수 이야기 들어도 우리가 이해하는 식으로 이해해버리니까 이게 비유여야 할 말씀이 비유가 아니고 아 우리 좋아라고 하신 말, 이렇게 하면 천당 간다는 말씀이구나 이렇게 곡해들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 곡해의 결과가 뭐냐?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질서에 대해서 결국 판단을 누가 해버렸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판단했지요. 그 판단의 결과가 뭐였습니까? 예수님은 사형 당했습니다. 그 사형이 죽음이 비유의 실제 본 내용이었어요. 그게 실제 본 내용이었습니다. 오해했다는 사실이 본 내용이에요.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 안 할 위인은 없다. 이게 비유의 본 내용입니다.


비유의 모든 뜻의 공통점은 뭐냐? 거기 예수님의 죽음이 거기에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 곧 하나님의 죽음이죠. 자, 그 시작을 왜 이렇게 예수님의 비유로 이야기했는가. 그 시작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받으실 때부터 시작이 되는데요 초반부터 어려운 이야기지만 여러분들은 감당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4장 한번 보겠습니다.


4장 6절에 보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는 그 대목이에요. 5절부터 보면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 다음 마귀의 말 한번 보세요.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이야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이야기를 왜 집어넣었느냐. 그냥 뛰어내리라 해도 되는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이해할 때 꼭 이 멘트를 먼저 집어넣고 예수님을 이해한다는 거에요. 모든 인간이.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마귀로부터 온 수하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그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나의 피를 믿으면 내 피로 죄 사함 받으면 너는 죄 없이 천국 간다” 라는 성경귀절이 있잖아요.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성경구절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그 말이 진실이라면, 그 말이 참말이라면’ 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성경해석을 접근해가게 되어있어요. 모든 인간은.


마귀가 인간이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미리 땡겨서 마귀가 대표적으로 예수님께 이 멘트를 날리는 겁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마귀가 이런 말했다는 것은 마귀 말고 나머지 모든 인간들도 예수님을 대할 때 반드시 이 생각을 집어놓고 이야기를 하고 성경을 봐도 이 말씀을 집어넣고 이해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말씀이 맞다는 그 내용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예수님은 우리는 틀렸고 예수님은 맞다는 생각이 인간에게는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셔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의 그 비유를 그 비유에 담긴 뜻을 알지 못해야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감히 도전하고 있어요. 우리는 몰아야 되는데 우리는 도전하고 있는 거거든요. 이 말씀 보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할 때 이 말씀을 사람들이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이 말씀 내 믿음에 나한테 무슨 이익이 옵니까를 생각해서 본다니까요. 이걸. 지금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고 있는 눈치를 하는데.


자, 우리가 아는 상식이라고 봅시다. 세상은 말씀대로 됩니다.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이에요.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나를 위하여 세상이 말씀대로 되었으면 좋겠네 가 돼요. 앞에 이걸 빼지를 못해요. ‘나를 위해서’가. 이 ‘나를 위해서’ 누가 집어넣었습니까? 이건 마귀가 집어넣은 거에요. 우리는 마귀 입장에서 성경을 보고 있는 거에요.


그냥 말씀이 말씀대로 되면 되는데 우리는 나의 검증 시스템을 일단 거쳐야 한다고 고집하는 거에요. 일단 내 검증 시스템. 그 다음에 검증 시스템을 해놓고 ‘내가 믿어지면’이 아니고 나한테 내가 이익이 되면 나는 그걸 미끼로 누가 결정하느냐? 내가 결정해버려요. 그걸 미끼로 내가 결정해버려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이런 악마에 속했다는 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알지요. 아니까 그걸 비켜가는 방식으로 비유로 이야기한 거에요.


그래서 비유해석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이거는 정답이 있을 수가 없지요. 나 빼야 되고 나의 이익 다 빼야 되고 다 빼버려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마귀가 어떤 의미에서는 마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존재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예수님 앞에서 거침없이 자기의 본색을 다 드러냈어요.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다 라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것 없이 마귀 내가 마귀 내 검증 시스템을 통과해야 된다 이런 뜻이란 말이죠.


“너도 신이냐? 그럼 나도 신이다” 이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잖아” 라는 뜻도 포함돼요.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잖아.” 그럼 하나님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에 맞도록 한번 나한테 한번 테스트해볼래? 성경 말씀에 뛰어내리면 누가 와서 받들어 준다? 천사들이 확 몰려와서 떨어지는 그 순간 발을 딱 받쳐가지고 발이 안 다치도록 딱 해주는 것, 이 이미지를 악마가 이미 그려내고 있어요. 인간들도 그려내고 있어요.


뭘 보고? 시편 92편 거기에 보면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받아준다는 그 본문 말씀을 유대인들이 봤잖아요. 봤으면 그 본 것을 대변자가 누가 되느냐 하면은 대변자가 인간이 갖고 있는 마음의 대변을 단독으로 마귀가 예수님께 나가서 인간들의 의사를 대신 전달해주는 양상으로 마귀가 인간들 안에 들었으니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이죠. 인간들이 갖고 있는 솔직한 마음을 그냥 마귀가 대신해서 예수님 앞에 그냥 내놓는 거에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우리가 이렇게 검증 시스템의 세 가지를 통과하면 우리가 믿어줄게. 주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네가 비유를 알아? 네가 게맛을 알아? 네가? 네가 비유 맛을 알아? 이렇게 나오시는 거에요. 그래서 비유라는 것은 정체 모를 천국이죠. 인간들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천국이 온 겁니다. 정체도 알 수 없으면서 천국 가겠다는 것, 이것 자체가 이미 오류가 된 거에요. 잘못된 거에요. 천국이 뭔지 알긴 알아? 몰라. 그런데 천국에 갈래. 그 천국이 지옥이라면 어떻게 할 거에요.


자, 여기서부터 어렵습니다. 이 본문이 참 어려워요. 이 채소밭에 떨어진 이 겨자씨. 이것은 겨자씨는 겨자씨 존재는 겨자씨 존재로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이게 뭡니까? 동사라고 했지요. 움직임을 보는 거에요. 움직임을. 움직임을 나타내요. 그 움직임을 나타내는데 자, 처음에 있는 겨자씨는 어디에 속합니까? 그 밭에 속하지요. 그 밭에 작은 일부를 차지합니다. 처음에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느냐 하면은요 천국은 반드시 지옥을 동반해서 등장해요. 인간은 천국갈래? 지옥갈래? 나 천국갈래 할 때는 지옥은 완전히 생각 안하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 나타내는 천국은 반드시 천국을 지옥과 같이 등장을 시켜요. 천국만 등장하지 않고 지옥도 같이 등장해요. 이게 언약의 원칙이에요. 언약은 복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뭘 한다? 저주받는 거에요.


그래서 비유로 이야기할 때 네가 알아채면 복 받는다가 아니라 네가 깨닫지 못할 경우에 네가 버림받고 저주 받는다라는 이미 그 항목이 나와 있어요. 비유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뭘 받는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반드시 저주가 찾아오는 방식이 되기 때문에 나는 좋은 것만 받을래요 그럴 자격 없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만 받을 자격 없어요. 이 밭에 비해서 겨자씨는 작습니다. 작아서 존재감이 떨어져요. 존재감이 떨어지죠. 밭에서 겨자씨 찾을려면 힘들어요.


그런데 움직임의 끝이 뭐냐 하면은 깃들인다 에요. 깃들인다. 깃들인다는 사방에서 모여서 거기를 안식처로 여긴다 이 말아닙니까. 자, 깃들일 때 그 밭에 새들이 그 밭을 보고 몰려온 거에요? 나무를 보고 몰려온 거에요? 나무를 보고 몰려왔지요. 그 겨자씨 없었을 때는 그 밭에 나무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그러면 깃들인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새들이 만족스럽다는 뜻이에요. 그냥 새들이 아낌없이 자기 한 몸을 다 맡겨도 괜찮은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다 맡겨도 되겠네. 이게 깃들이는 거에요. 깃들이는 것. 갑자기 나무가 주목을 받지요. 그 밭의 존재감이 뭐가 됐습니까? 갑자기 나무가 된 거에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새들이 와서 깃든다는 이 말은 새들이 올 때 여기 올려면 입장료 얼마에요? 물어보겠어요? 깃든다는 말은 그냥 날개 짓해서 그냥 그쪽을 향하여 푹 안겨버리죠. 모든 걸 맡겨버리죠 거기에. 겨자씨 있던 밭에 새들이 모든 걸 맡깁니까? 아니지요. 그냥 밭이지요. 그냥 밭이에요. 그냥 밭인데 밭에 새들의 최종적 안식처 등장했지요. 그냥 밭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새들의 최종적 안식처로 변했잖아요.


그런데 이게 처음에 밭에 이게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겨자씨 뿌리기 전에 이게 없었지요. 그럼 새들의 안식처 이걸 가지고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천국이죠. 그럼 그냥 밭은 뭐냐? 이 밭은 밭의 저주성이죠. 곧 이 밭은 바로 저주 받은 밭을 이야기하지요. 저주 받은 밭. 아무 새들도 깃들고 싶지 않은 그냥 순진무구한 따지지 않고 순진무구한 새들이 안심 놓고 모든 걸 맡길 수 있는 그것은 거기서 어떤 움직임에 변화가 있어서 그 변화의 결과로서 새들이 와서 여기에 이 나무에 깃들이는 거에요 이거는.


이거는 내가 노력해서 했다 이런 소리 안하지요. 그냥 공짜니까 모든 걸 맡기는 식으로 그냥 깃들여 버리는 거에요. 예수님은 이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걸. 천국이에요. 그런데 그 천국의 시작은 어디입니까? 씨도 없고 씨도 없으니까 나무도 없지요. 어떤 새로운 변화가 없는 곳. 그 곳은 천국이다? 아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그거는 천국이 아닌 거에요. 천국은 깃들일 수 없는 이 곳에서 어떤 깃들일만한 변화가 유발되는 그 움직임이 천국이라고 보는 거에요. 그 움직임이.


그러면 이 논리가 이래요. 새들이 안심 놓고 안식처를 마련했지요. 그렇죠? 그러면 이 겨자씨가 없던 이 밭을 뭐가 없다는 말입니까? 안식처가 되지를 못한다는 뜻이죠. 이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단어가 이런 단어를 동원하면 이해됩니다. 상실, 결여, 결핍. 깃들이지 못하고 족하지 못하고 있는 이 세상의 일상성. 특히 겨자씨 같은 것은 무시할만한 극히 작은 거에요.


겨자씨가 작고 이것은 크다면 여기 앉기가 왜이리 편하노? 여기 깃들이고 싶어. 큰 씨가 안에 응축된 내용물이 큰 씨가 많을까요? 작은 씨에게 많을까요? 어느 게 많을까요? 양이. 잠재성이. 큰 씨가 잠재성이 많을까요? 작은 씨가 잠재성이 많을까요? 큰 씨가 많겠지요. 왜냐하면 큰 씨가 나중에 큰 나무가 될 가능성이 많아요. 그게 확장이 되면 큰 나무가 되잖아요.


겨자씨는 상대적으로 빈약하지요. 빈약. 빈약은 겨자씨는 큰 씨를 원하고 있는데 그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해석이 가능 하느냐 하면은 이미 결론이 나와 있어요. 겨자씨에서 큰 나무 되었던 변화성 있잖아요. 이 변화를 주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천국이죠.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옥이 무엇이냐 이 천국을 표준점, 기준점으로 삼아서 이처럼 되지 못한 모든 것은 뭐냐? 저주 받은, 그러니까 천국이 아닌 거에요.


천국이 아님의 반대말이 뭐냐? 저주 받는 지옥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천국이라는 것을 딱 등장할 때는 지옥도 같이 설명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천국이 아닌 것, 모조리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의 특징이 뭐냐? 깃들이는 거에요. 안심 놓고 편안하게 깃들이고 새들이 대만족하는 거에요. 나 여기서 놀래 하고 여기서 마음껏 자유를 부과합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뭐냐? 만족함이 없어요. 마음껏 자유를 부과하지도 않습니다.


어디 깃들기는 너무나 모든 것이 불안하고 위험스러워요. 내 한 몸 이 옥체를 보존해서 뉘일 공간 없어요. 뭘 느끼기 때문에? 상실과 결여와 결핍을 계속 인간들은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밭은 무엇인가? 밭은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합류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 다스리는 유대 사회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누룩 이야기도 유대사회 그들의 죄를 언급하지요. 그리고 예수님 씨 뿌린 비유할 때도 밭에다 뿌린다 하지요. 예수님 자신이 겨자씨고 예수님이 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어디에 뿌려져 있습니까? 밭에 뿌려져 있지요. 예수님의 존재가 도달한 그 환경은 자연적인 생물학적인 밭이겠어요? 아니면 그 당시의 유대사회겠어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유대사회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자연시간 아닙니다. 초등학교 자연 공부 시간 아니에요. 밭에서 지금 농사를 어떻게 짓는가 지금 그 시간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비유라는 뺄 때는 그게 돼요. 아동 여러분 밭에다 씨앗 뿌리면 크지요?! 네! 참 잘하셨어요. 제 말 알아들었군요. 지금 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못 알아듣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유대인의 사회는 그 밭에서 뭘 기다리느냐? 천국이 도래할 것을 고대하고 있었어요. 천국이 올 것을. 메시아가 와서 천국이 올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왔다는 거에요. 왔는데 이게 동사적으로 온 거에요. 명사적으로 온 게 아니고 동사적으로 왔다는 겁니다. 그 어떤 움직임을 보였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 움직임은 밭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천국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천국을 기다리는 이 쪽을 점점 더 뭐로 만들고? 지옥의 본 모습을 드러내면서 천국이 등장하는 거에요. 지옥의 본 모습을.


너희는 왜 겨자씨만한 응축력이 잠재력이 없는가. 너희는 왜 나무가 되지 못하는가. 너희는 왜 사람들이 깃들지 못하는 그런 안심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는가를 지금 지적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이거는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의 욕망은 인간의 존재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가 없다. 이거는 상식이죠. ‘나’라는 존재가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다 이뤄주던가요? 딱 취업하니까 딱 되던가요? 아니지요. 내가 내 존재를 원하는 그것을 이 사회가 다 충족시켜 주던가요? 아니지요.


아닌 그걸 뭐라고 합니까? 결핍. 결핍인 동시에 내 쪽에서는 상실, 나의 상실이죠. 내 꿈의 상실입니다. 인간의 원함을 다 들어줄 수 없으니까 인간은 그냥 하지 않고 그 상실,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요. 이 노력을 뭐라고 하느냐 이 노력을 문명이라고 해요. ‘문명’. 문명 알지요. 황하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알지요? 컴퓨터 문명. 근대산업사회 다 문명이에요. 문명. 인간이 건설한 이 세계의 모든 인간의 업적을 문명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왜 자꾸 문명을 키웁니까? 자기의 상실을 보충하려고 키우는 거에요. 계속해서 과학적으로 기술 발달하는 게 뭐냐? 계속 학문을 정진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 결핍과 상실을 보충하기 위해서 채우는 거에요. 그거 마저 채우기 위해서. 마저 채우면 어떻게 되는가? 채워집니까? 아니에요. 더 큰 상실이 기다리고 있어요. 인간은. 율법이 바로 그 기능이에요. 율법을 지키게 되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게 되면 우리 유대인들이 원하는 식대로 세상이 세상 정치적 구조가 돌아갈 줄 알았지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매진하라고 외쳤습니다. 외쳤는데 어떻게 유대사회가 독립했습니까? 아니면 로마의 노예가 되었습니까? 로마의 노예가 되었지요. 압제받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그걸 보충하기 위해서 뭘 기다립니까? 메시아를 기다리는 거에요. 그럴수록 메시아를 기다리는 겁니다. 그냥 기다리지 않았지요. 메시아가 원하는 바를 채우기 위해서 율법에 더욱 더 매진하는 쪽으로 메시아를 기다렸죠.


그런데 율법에 매진하면 매질할수록 점점 더 예수님의 비유를 못 알아듣는 거에요. 왜냐하면 인간의 방법은 뭐냐? 내가 이걸 모자란다. 이 모자란 것을 하나님 쪽에서 채워주시면 온전해진다 이거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뭐가 안 되느냐 하면은 그거는 깃들이는 게 아니에요. 힘 쫙 빼고 그냥 자기 몸을 던져 놓는 그 방법이 아니에요. 지금 나무에 새들이 와서 깃들이잖아요. 입장료 받습니까? 나무가? 그렇지 않지요. 그냥 와서 안식하는 그냥 와서 쉬는 거에요. 그냥 와서.


그러나 인간 사회는 그걸 이러한 방식에 인간 방법으로서는 이 시도를 실패로 끝나는 거에요. 이 시도가 자꾸 실패가 되는 거에요. 원인도 몰라요. 왜 나는 날마다 아무리 가지고 아무리 철저하고 완벽하게 말씀을 지키고 뭔가 복음도 지키고 해도 왜 나는 항상 마음에 결여가 생기는가. 모자람이 생기고. 생기면 우리가 그냥 가만히 있습니까? 다른 걸 채웁니까? 이걸 내 욕망의 모자람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방법을 하는 거에요. 대체하는 방법을. 끊임없는 대체하는 거에요.


다른 직업으로 대체하고 다른 돈벌이로 대체하고 아니면 산속에 자연인으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대체하고. 내가 욕심이 많다 마음을 낮춰야지. 마음을 낮추는 걸로 대체하고 완전히 몸부림 맘부림을 쳐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주님이 이렇게 일방적인 움직임에 참여하지 못하고 항상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결산을 고려하면서 항상 그걸 따지면서 어느 결정을 해야 나한테 보다 더 많은 내 만족이 보충이 마저 채워질 수 있느냐 그것만 계산하고 있는 거에요.


이게 어릴 때도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인간은 늘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애 보고 묻습니다. 너 커서 뭐 될래? 이렇게 무심코 묻잖아요. 너 커서 뭐 될래? 나는 나무가 되겠어요. 이렇게 하면 이건 완전히 비유로 이야기하는 거고. 나는 겨자씨 될래요. 이런 아이는 없어요. 선입견, 기성 인식. 애는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선입견과 기성 인식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어요.


그들이 돌잔치부터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못 뽑습니다. 마이크 할래? 줄 할래? 돈 할래? 이것도 이미 엄마가 미리 세팅되어 있는 그것 중에서 객관식이 아니고 주관식으로 나는 시인이 될래 글자 쓰고 그럴 수 없단 말이죠. 기성 인식 같은 게 있고 그중에서 골라잡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광야에서 예수님 만난 것처럼 유혹을 벗어난 어린 아이는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어떤 직업을 선택할 때는 유혹에 빠져서 직업을 선택하는 거에요. 유혹에 빠져서. 그것이 내 결핍을 마저 채워줄 줄 알고 선택하는 거에요. 나 대통령 될래. 나 야구선수 될래 이런 거. 유혹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선택은 없습니다.


그 왜 그 선택을 할까요. 내가 유혹받는 그것이 나의 존재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고 어린 아이 수준에서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한 거에요. 엄마 나는 커서 유명한 우주비행사가 될래. 초등학교 2,3학년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엄마는 말합니다. 그래 그거 월급 얼마인데? 결국 월급으로 끝나요. 인간의 삶은 한 마디로 해서 그냥 고육지책.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갑니다. 깃들이는 것 그런 거 없습니다. 자기 존재를 자기가 포기 못해요.


자, 그러면 주님의 방법은 뭐냐? 주님의 천국에 밀어붙이는 방법은 뭐냐? 예수님의 출산이에요. 예수님의 출산. 예수님이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버려요. 아기가 태어나서 예수님의 자기 노선을 가버립니다. 자기 노선을 가버리면 그 주변에 예수님 주변에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지요. 인간 존재의 그 자아성, 존재성을 예수님의 출산과 자기 노선은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게 해답이에요. 이게 해답입니다.


자, 비유란 뭐냐? 비유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이에요. 왜 죽음이냐? 어느 인간도 죽게 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자기의 욕망이 멈춰 가 돼요. 자기의 결핍이 멈춰버려요. 왜? 더는 가능성이 없으니까요. 죽어버렸으니까요. 살아있을 때 갈망하죠. 죽게 되게 되면 그 갈망이고 뭐고 다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내용에서 예수님의 그 자기 변화 있잖아요. 자기 변화. 아이가 돼서 성인이 돼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자기 변화에 자기 변화 움직임에 같이 그 움직임에 동참하기 위해서 뽑아 세울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천국백성이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주님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지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그 자체가 뭐냐? 예수님의 움직임에 동반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움직임에 끌어당겨버려요. 집어들어가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움직이는 것은 결국은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존재는 내가 아니고 따로 계세요. 예수님이라는 그 존재자가 나로 하여금 이런 저런 움직임을 유발시키게 되죠. 그게 바로 이미 깃들인 상태에요. 이게 깃들인 상태에요.


지금 제자들도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 못합니다. 비유를 이해할 때는 제자들에게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오셔야 돼요. 성령이 오시게 되면 자기 기억이 어디에 함몰되느냐? 주님의 기억에 함몰되어 버려요.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 강도가 사람을 죽였잖아요. 사람을 죽여가지고 십자가에 사형 당했지요. 이거는 예수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이것은 강도는 자기 기억이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한 짓이에요. 내가 한 짓.


그런데 옆에 어느 쪽인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이 강도를 받아들이고 강도가 강도 짓한 것은 본인이 한 게 아니고 주님께서 시켜서 한 일, 주님의 기억 속에 너는 강도가 돼야 한다는 기억 때문에 그거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거에요. 태어나서 강도 짓해야 되고 우연은 없습니다. 반드시 그 집에 찾아가서 그 집을 죽여야 되고 그 집이 고만고만 했으면 안 죽였을텐데 반항했어야 했고 반항한다고 죽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강도가 된 거지요.


그래서 강도가 뭐라고 합니까? “주님 저를 생각해주세요.” 이거하고 ‘당신이 만약에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거하고 완전히 달라요. 완전히 다릅니다. 내가 검증 시스템을 가동하겠다가 아니라 이미 강도는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에요. 그러면 죽은 존재는 뭐냐? 깃들이면 돼요. 그런데 자기 옆에 보니까 누가 있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주님도 같이 죽어있어요.


그러니까 강도 생각에는 쉬운 거에요. 주님 죽음과 나의 죽음이 동시에 일어난 같은 사건으로 묶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지난날 내가 강도짓 한 것도 내 기억이 아니고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 일어난 하나의 사태로 보는 거에요. 이게 깃들여진 거에요. 이게 천국의 상황입니다. 이게 벌써 와버렸어요.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아니고 벌써 천국이 와버렸습니다. 와버려서 모든 매사에 주님이 관여하고 개입하신 주님의 자신의 일이 되어버린 겁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일상 속에 천국이 숨어있었던 거에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첫째 시간의 결론은 뭐냐 하면은 성도는 이 시대의 비유다. 성도 자체가 비유에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성도를 다른 사람이 이해를 못합니다. 예수님을 봐도 이해 못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에요. 성도를 봐도 이해 못해요. 저건 배알도 없고 저건 자기 점검 시스템도 가동 안시키나? 이래요. 따져보고 믿어야지 그냥 깃들이면 안 되잖아.


그러면 성도는 “나도 내 마음대로 안돼.” “너는 배알도 없고 자존심도 없나?” “나 동사야. 나 비동사야. 나는 조동사야. 나는 그냥 동사야.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냥 동사야.” 내가 스스로 이건 잘했다 못했다 이거는 손실이다 이익이다 평가할 수 있는 있다? 없다. 없지요. 비유니까요. 이거는 주님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감히 나서서 이건 잘했습니다 못했습니다 표현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는 거에요.


‘성도는 비유다’ 다른 말로 성도는 곧 말씀이다 같은 말이에요. ‘성도는 말씀이다’. 성도는 뭐다? ‘기도’다. 다 같은 말이에요. 안에 주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너는 죽고 네 안에 주님이 일하기 때문에 모두 같은 말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믿어서 구원받지 못한 거에요. 그 믿음이 뭐가 돼요? 내가 믿었다는 믿음이 동사 돼야 돼요. 믿는 모습으로 움직여지는 거죠. 내가 믿음 하나 가졌다가 아니라 그거 치매 걸리면 다 헛방이에요.


움직임 자체가 믿음의 증상으로 나타나요. 믿음의 증상으로. 관계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주님 주신 선물이니까. 믿음은 선물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이 땅에 태어난 자체가 선물이에요. 창세전부터 예정한 자가 이 땅에 여러분들 주민등록 앞에 있지요. 천구백몇년도. 1975년? 1992년? 앞에 있지요?


그때 왜 태어났습니까? 정답은? 우리가 왜 태어났어요? 주님 때문에. 왜 합니까? 이게 강도의 고백이에요. 내가 아니라 주님이 먼저 날 생각했음을 강도가 자기 죽는 순간에 주님이 함께 죽는 순간에 비로소 알게 된 거에요. 이게 주님께 속한 내 사형 당함이 이게 내 이야기고 주의 일이라는 사실을.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3장 19절 (성도가 비유다) 221108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 아까하고 똑같아요.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빼버리고 어떤 여자가 이스트를 집어넣었더니만 부풀더라. 그래서? 부풀지 그러면. 그게 뭔데? 일상에 있었던 일이잖아요. 주님은 일상의 일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는 그 요리하시는 여자 분들이 밀가루에 누룩 넣어가지고 부푼다는 이걸 보고 ‘야 저게 천국이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일단 천국을 몰라요. 천국을 모르기 때문에 천국을 어디에다가 비유할 수 있는 그 내용물이 빠졌으니까 거기에 맞는 형식을 갖다 동원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두 번째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는다 이 말은 첫 번째와 같은 경우에 제가 힌트를 드렸죠. 첫 번째 천국 비유에 겨자씨는 출산이라고 했습니다. 출산. 두 번째도 마찬가지로 출산이에요. 누룩. 누룩도 출산입니다. 이거는 겨자씨는 작다. 누룩은 보이지 않는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 작은 존재. 이것은 기존의 인간세계에서 둘 다 배제당합니다. 무시당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작은 것.


작은 것이 왜 배제당하는가? 그 안에는 잠재된 능력이 인간 세계의 필요한 욕구를 채워줄만한 충분한 잠재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한다는 거에요. 큰 게 좋지 작은 건 싫잖아요. 안에 함유된 에너지 양이 적기 때문에. 그런데 작은 것이 깃들여지는 천국이 됐다면 누룩은 아예 없어요.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데 이게 뭐냐 하면은 부푼다는 거죠. 부푼다는 것은 자체적 팽창이 되어버리면 이것이 기존 공간, 기존 세상을 대신합니다. 바꿔치기 해버리는 거에요.


누룩이 들어있는 공간과 누룩이 없는 공간 사이에서 누룩이 없는 공간은 지옥이 되고 누룩이 있는 공간은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증거가 뭐냐? 천국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천국은 이와 같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이 천국 규정은 확정되어버렸어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느냐 생각하지 마세요. 말씀이 말씀대로 되어지는 거에요. 우리를 비껴가는 거에요. 나의 욕구와 나의 결핍을 보충하겠다는 그런 나의 의도를 다 비켜가버려요.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으로 주께서는 말씀대로 하거든요. 자신이 외친 천국은 이와 같다 하면 반드시 천국은 그와 같애요. 그와 같아야 돼요.


그와 같으면 그럼 우리는 알아채면 되느냐? 보이지 않는데?! 주께서 이 뜻이에요. 보이지 않는 것을 너희들이 어떻게 알아채. 보이지 않는데. 누룩은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데 작아 보이는 이 밀가루 반죽이 점점 자체적으로 팽창을 해버립니다. 팽창을 해버리면 그 자체가 새로운 공간으로서 의미가 생겨버리면 졸지에 그 공간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 그 공간에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천국에 못 들어오는 사람으로 결정나버리죠.


그런데 이것도 동사죠. 움직임이죠. 움직임. 이 움직임은 이렇게 움직여버리면 아까 자체적으로 팽창이라고 했지요. 자체적으로 팽창. 이 반대말은 뭐냐 하면은 존재에서 오는 압력을 이겨낸다. 존재의 압력. 참 여러분 사신다고 힘들지요. 제가 주일날 할 때 자칫 설교 제목을 ‘켁켁’이라고 할 뻔했다고 했지요. 오늘 이 시간 바꾸겠습니다. 인생은 켁켁 이전에 어떻게 사느냐? ‘헉헉’. 하루하루가 헉헉거리며 살아요.


하루 살았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다음 내일 되면 헉헉거려야 돼요. 헉헉 하루치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일주일 내내 헉헉거려요. 직장가면 그때는 좀 후~ 한숨 쉬다가 월요일 되면 또 헉헉 거립니다. 이게 뭐냐? 존재의 압력이에요. 존재가 주는 존재가 나에게 주는 press, 중압감입니다. 갖다버릴 수도 없고. 갖다버릴 수도 없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 존재를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뭐냐. 출산을 경험합니다. ‘출산’. 새로운 출산이죠. 누룩이 들어간 새로운 출산의 경험을 만들어버립니다.


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새로운 출산은 제가 출산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은 새로움의 시작이에요. 시작인데 새로움의 시작이에요. 새로움의 시작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의 압력을 유일하게 그걸 버티고 존재의 압력이 있는 곳에 중력이 있는 곳에 그 중력, 압력, press를 무릅쓰고도 자체적인 팽창이기 때문에 부풀어오를 수 있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이에요. 주님의 약속뿐입니다.


자, 그 예를 여호수아 2장 18절을 보겠습니다. 거기 보면 기생 라합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데 18절에 거기 정탐꾼 둘이 들어왔잖아요. 정탐꾼 둘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들고 왔다는 뜻이고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여리고 성에 살고 있는 기생 라합 집에 그냥 접촉이 된 겁니다. 만납니다. 18절에 보면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그러니까 이게 뭐냐? 붉은 줄만 남기고 떠나간 사람, 이게 바로 정탐꾼입니다. 붉은 줄만 남기고 가버렸어요. 이 붉은 줄만, 그게 약속이거든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그 정탐꾼 두 명과 그리고 기생 라합이 있을 때에 그 기생 라합이 그 붉은 줄만 쥐고 있는 거에요. 약속만 쥐고 있는 거에요. 이게 우둔한 짓입니까? 그렇게 맹한 맹추 같은 짓이에요? 어리석은 짓입니까?


이 붉은 줄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정탐꾼, 이스라엘에서 온 거에요.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렇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잖아요. 약속의 일부를 기생 라합이 일부를 갖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공격을 할 때 존재를 다 말살할 때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뭐냐 하면은 약속된 것만 쥐고 있으면 되는 거에요. 약속된 것만 쥐고 있으면 돼요.


이게 뭐냐?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님 기업이 아닙니다. 자기 계획이 따로 있어요. 그런데 약속으로 말미암아 기생 라합은 새로운 출산을 하게 된 거에요. 약속 속에서 새로 태어난 겁니다. 약속 속에서. 그 반죽이죠. 밀가루 반죽. 반죽이 나중에 공간으로 확장이 되면서 이 갑자기 그때 처음의 반죽은 기존의 이 세상의 일부였습니다. 일부였던 곳에 새로운 약속이 들어옴으로서 이거는 기존의 모든 압력을 극복하고 자체적으로 외부의 힘없이 자체적으로 여기서 부풀어올라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은 천국입니다. 천국은 으랏차차 에요. ‘으랏차차’. 자체적으로 들어 올려버려요. 자체적으로. 이거는 외부의 능력이 끊어진 거죠. 내부적인 거에요. 자기 내부적. 나중에 쳐들어왔을 때 기생 라합이 붉은 줄만 딱 내렸어요. 붉은 줄만. 구원받았지요. 이미 같은 동질의 새로운 출산의 같은 가족이 되어버린 겁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린 거에요. 기생 라합은 약속부터 새로운 시작을 한 거에요.


그럼 그 약속의 특징 보기 전에 그럼 약속이 오기 전에 인간은 어떻게 살았는가? 이거는 뭐 중요하지는 않지만 들으세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3절에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왜 죽었습니까? 1번 늙어 죽었다. 2번 죄 지어서 죽었다. 몇 번이겠습니까? 왜 죽었지요? 죽기 전에 셋을 낳았잖아요. 4절에 아담이 셋을 낳았지요. 셋은 아버지 죽을 때 안 죽었지요. 그렇죠? 아버지보다 오래 살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뒤에 보면 “그 셋이 아버지 죽고 난 뒤에 6절에 보면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라고 되어있지요.


자, 아담이 살아있는 거에요? 죽음이 살아있는 거에요? 죽음은 계속 생생히 살아있는 거에요. 왜 죽음이 살아있는가? 그 이유가 창세기 6장에 나옵니다. 6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육체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있지를 못하고 그 수명이 끝나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유가 뭐냐?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운명이죠. 독자적으로. 후패한 거죠. 부풀어오른 게 아니고 영생이 있어서 부풀어오른 게 아니고 죽음이 있어서 쇠퇴하고 소멸되는 거에요. 아까 강의한 거 보세요. 천국은 이미 예수님이 규정했지요. 천국은 안에 자체적으로 부풀어오르는 것이다. 팽창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죽음은 뭡니까? 저주는 뭐에요? 자체적으로 부풀지 못하는 게 그게 저주고 지옥이죠. 천국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지옥을 전제로 깔고 하는 거에요. 이것처럼 하지 않으면 모조리 다 뭐다? 지옥이다를 설명하고 싶은 거에요. 천국 설명하면서 지옥도 동시에 설명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인간이 창세기 5장 6장에서 봤듯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이것은 쇠퇴하고 흙이 되고 죽음이 항상 이겨버려요. 생명스럽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지를 못해요. 육이기 때문에. 육이기 때문에 육의 운명대로 저주받아서 쇠퇴해서 저주받아야 돼요. 그 운명입니다. 인간 자체에서 해결책이 있다? 없다? 인간 자체에서 해결책이 없습니다. 부풀지를 못하지요.


그러니까 이거는 어떤 여인이 반죽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유입니다. 비유. 무엇에 초점? 스스로 부풀더라는 것. 이게 뭉개지는 것이 아니고 피어 올라와서 새로운 공간을 따로이 만들더라. 낯선 공간을 새롭게 창출하더라 천국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게 두 번째 비유의 특징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 이거는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온 천하가 소용없지요. 신명기 7장 17절에 보면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숫자를 적게 했어요. 이스라엘 숫자를 적게 했습니다.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작은 자 되게 하셔서 약속만 의지하도록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극히 작은 자로 만들었어요. 숫자가 작은 자로. 그리고 그 숫자가 작으니까 우리는 의롭다고 우길 거죠. 신명기 9장 5절에 보면 그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쫓아내는 것은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약속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자, 그렇다면 그 정도까지 여러분들이 이제 아셨지요. 이제부터 다시 누가복음으로 돌아오세요. 누가복음 13장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해봅시다.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천국은 누룩과 같다.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는 않지만 현상을 나타납니다.


아무리 누르고 눌러도 이게 외부의 말을 일체 듣지 않고 자체적으로 어떤 특수한 공간을 마련한다는 말은 곧 이 세상은 뭐하는 중이다? 이 세상은 지금 침몰하는 중이다. 반드시 천국을 이야기할 때는 지옥은 천국의 요소가 이 세상에는 없다는 거에요. 따로이 부풀게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자체적인 압력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에.


그럼 이 세상은 어떻게 하느냐? 이걸 침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문명은 뭐라고 했어요? 자체적인 결핍을 스스로 보완해가지고 완전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문명이라고 했지요. 그 방법이 뭐냐? 예수님이 이야기했지만 “칼로 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 다른 대안이 없어요. 칼로 해서 나쁜 놈 죽이고 좋은 사람만 남기는 방법. 그 방법 외에는 없는데 주께서는 그 방법 써도 소용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어느 유명한 노래 가사를 제가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안 그러면 이게 어려워서 그 다음에 2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걸 이해 못해요. 그래서 이걸 이야기하겠습니다. 제목은 조금 있다 이야기하고요 우선 가사 먼저 보게 되면.



Every night in my dreams I see you, I feel you
매일 밤 꿈속에서 나는 당신을 보고 당신을 느껴요.
That is how I know you go on.
당신이 그대로임을 그렇게 알 수 있어요.
Far across the distance And spaces between us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저 멀고 먼 시공을 초월해서
You have come to show you go on
당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려 다가왔어요.
Near Far Wherever you are I believe that the heart does go on
가까이 멀리 그 어디에 있던 당신의 그 마음이 그대로임을 믿어요.



My Heart Will Go On. 타이타닉 OST. 셀리느 디온이 부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케이트 윈슬렛. 그거에요.
Once more You open the door And you're here in my heart
다시 한번 문을 열고 내 마음속에 들어와요.
And my heart will go on and on
내 사랑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Love can touch us one time And last for a lifetime
사랑은 우리를 한번 스쳐갔지만 평생을 두고 지속되죠.
And never let go till we're gone
죽는 날 까지 포기하지 않겠어요.
Love was when I loved you One true time I hold to
당신을 사랑했을 때가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진실한 때였어요
In my life we'll always go on
내 인생에서 우리는 언제나 그대로일 거에요.
Near Far Wherever you are I believe that The heart does go on
가까이 멀리 그 어디에 있던 당신의 그 마음이 그대로임을 믿어요.



하여튼 이런 식으로 쭉 가는데요. 끝에 보면 You're here 이거 이야기할라고.
You're here There's nothing I fear
당신은 여기 있으니 나는 두려워할게 없죠.
And I know that My heart will go on
내 사랑은 멈추지 않을 것을 알아요.
We'll stay Forever this way
우리 이대로 영원히 머물 거에요.
You are safe in my heart And my heart will go on and on
당신은 내 마음 안에서 안전하고 내 마음은 그대로일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타이타닉호에 인간 잭이라는 디카프리오가 로즈라는 일등석 귀족 여자 케이트 윈슬렛이 같은 배에 탔는데 윈슬렛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남자와 약혼하라고 하니까 돈 많은 남자와 약혼하라고 하니까 배에서 뛰어내려서 죽을려고 할 때에 디카프리오가 손목을 잡고 건져내면서 사랑을 하는 겁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은 그 배가 침몰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지금 이 문제가 침몰하는 이 배에서 과연 이 둘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느냐? 사랑이냐 하는 그게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나중에 남자는 죽고 여자는 살아남은 실화거든요. 여자가 살아있으면서 늙은 할머니가 되어서 자기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그 남자를 생각하면서 Every night in my dreams I see you, I feel you 매일 밤 꿈속에서 나는 당신을 보고 당신을 느껴요.


그 다음이 뭐냐 하면은 That is how I know you go on.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왜 이 노래가 부풀어오르는 이 천국 이야기가 왜 필요하느냐 하면은 그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너희 믿음 했지요.


타이타닉에 나오는 이 노래에 사랑이 이 노래에서는 인간들의 사랑이기 때문에 누구 사랑이냐 하면은 서로의 사랑이잖아요. 그런데 천국에서는 뭐냐 하면은 믿음이 누구의 믿음이고 누구의 사랑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믿음이고 예수님의 사랑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사랑이 부풀어올랐다는 말은 반죽이 부풀면 이쪽은 침몰해요. 이 세상은 없어진다고요. 없어져요.


쉽게 말해서 부풀어오른 것을 핵폭탄 실험할 때 나오는 구름기둥으로 봐요. 구름기둥. 마구마구 부풀어올라버리면 그걸 보고 아름답지요. 아름다우니까 우리 근처 가서 좀 즐길까요? 이 구름에서 나오는 방사선 때문에 그 수십 키로 다 초토화 멸망해버립니다. 주님께서 한쪽의 공간을 부풀어오른다는 말은 나머지 공간을 없애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산을 옮기는 믿음은 뭐에요? 마태복음 28장 20절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은 뭡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새 시대의 공간화. 옛 시대, 새 시대는 뭐냐 하면은 시간 이야기잖아요. 시간 이야기를 뭘로 바꾸느냐 하면은 공간 이야기로 공간으로 바꿔버려요. 어차피 이 세대는 예수님의 출산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아담의 출산은 이제는 은퇴합니다. 물러가게 되어있어요.


의미 있는 것은 예수님의 성령으로 새롭게 출산된 사람만 약속에 의해서 생겨난 그 사람만 이 새 시대에 들어오게 돼요. 영생의 부풀어오름의 혜택을 입게 되어있어요. 이 새 시대만. 천국의 혜택을 입는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전부 다 이거는 침몰하는 거에요. 왜? 타이타닉이 배는 크지만 결국 침몰했잖아요.


침몰했을 때 잭과 로즈라는 이 남녀가 결국은 둘이 만나지를 못해요. 여자만 살고 구명보트 타고 살고 남자는 물에 빠져죽거든요. 죽으니까 여자는 뭡니까? 그 옛날 사랑을 생각해서 자꾸 기억하면서 밤마다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우리의 사랑은 계속된다 얘기하겠지요. 그게 아까 첫째 시간에 뭐냐 하면은 나의 기억이에요. 나의 기억. 이 세대의 기억이에요.


그러나 그 공간 안에 서 말 반죽 안에 피어나는 그 공간은 우리의 기억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의 기억, 약속된 주님의 기억만 그 안에 꽉 차 들어있을 뿐이에요. 우리와 상관이 없어요. 침몰하는 배에 사랑 이야기를 왜 집어넣었는가? 이 가사 내용이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경계선을 이야기하거든요. ‘경계선’.


이 세대와 저 세대의 경계선 상에 이 늙은 할머니가 있는 거에요. 세월이 지나서 이 세대는 자기 혼자 살아남았어요. 혼자 살아남으면서 옛날 젊었을 때 디카프리오 남자를 그리워하겠지요. 물론 미남이죠. 미남. 못생기면 생각나겠습니까. 남자고 여자고 잘생기고 봐야지요. 이 경계선 상에서 뭘 의미하느냐? 이 경계선 상에서 죽지 않는 게 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사랑이다. ‘사랑’.


그런데 이 여인의 사랑, 여인이 남자를 사랑한 기억입니까 아니면 남자가 여자를 사랑했던 그 기억도 포함되어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게 포함되어 있겠지요. 그것 때문에 긴긴 이 가사를 이야기한 거에요. 혼자 살아남은 혼자지만 여자는 지금 혼자 있는 게 아니에요. 꿈속에서 매일 디카프리오를 만나고 있어요. 둘의 기억이에요. 당신은 나를 사랑했습니다.


Far across the distance And spaces between us.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저 멀고 먼 시공을 초월해서 당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려 다가왔어요. ‘다가왔어요’. 이게 성령이 오신 게 아니고 뭡니까 이게. 이게 성령 오심이잖아요. 어제 대구강의처럼 베드로가 주님 가시는데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갈라섰지요.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뭡니까? “내가 다시 올게.” 다시 올게. 그게 사랑이에요. 사랑의 보혜사가 다시 온다는 거에요. 다시 오는 게 그게 사랑이에요. 우리가 사랑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 삐져서 날 놔두고 이거 완전히 사기당한거야 뭐야. 뭐 지시 다 해놓고 혼자 빠지고. 야 우리 주님한테 사기 당했다. 우리는 그 생각해요. 그런데 다시 찾아오심으로서 주님의 약속은 이게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누가 증명했습니까? 성령 받은 자가 주의 증인이 됨으로서 증거하는 거에요. 성도가 비유입니다. 성도가 누룩이에요. 너희들은 모르지. 오는 세대가 이미 같이 이 세대에 쳐들어왔다는 것을 모르지. 우리가 바로 그 결과물이다.


우리가 이 비유설교가 왜 그러느냐 하면은 다시 한번 누가복음 봅시다. 이게 그렇게 어려워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은 보통 비유설교 같으면 마귀 나오고 지옥 나오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 이건 나쁜 거구나 이건 죽여야 돼 이건 착한 쪽이구나 이건 살려야 돼’ 되는데 그거는 누굴 죽이고 누굴 살린다는 것은 존재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는 존재의 이야기가 아니고 동사, 움직임만 보여줘요. 움직임만 보여주니까 여기서 명사, 존재 다 빠집니다. ‘나 이 세계 들어갈래’ 라고 할 수가 없어요. 겨자씨는 작고 누룩은 보이지도 않아요.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 세계에서는 아예 없는 겁니다. 지금 이 늙은 디카프리오를 사랑했던 케이티 윈슬렛이 혼자 살아남아서 과거의 타이타닉 그 참혹한 경험했던 그 할머니에 있어서 그 사랑은 지금 현재에요. 살아있는 사랑이에요. Every night 인데 뭐 날마다 그 남자가 떠오르는데.


그 사랑은 오히려 자기가 수동적이죠. 그 꿈이 능동적이고. 그 꿈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요. 사랑이 지배하고 있는 거에요. 오는 세계가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약속이 나를 지배하고 있고 나를 찾아온 주님이 지배하고 있는 것. 생명의 누룩이 새로운 공간이 우리 공간은 이미 기존의 공간이 아니고 새로운 공간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그 체험들이 날마다 Every night, Every day 맨날 같이 될 때 그게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천국은 뭐냐? 로마서 한번 봅시다.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라고 되어있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누룩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새가 깃드는 겨자씨 나무다. 했지요. 그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어떤 계시를 받았느냐 하나님의 나라는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여기 공간이죠. 무슨 요소가 빠졌습니까? 시간 요소가 없지요. My Heart Will Go On 이라니까. 내 마음은 한결같이 나는 계속 지속되고 있는 거에요. 그대를 향한.


그러니까 내가 사랑한다는 게 아니라 당신이 여기 와서 살아있다는 겁니다.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저 멀고 먼 시공을 초월해서 당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려고 밤마다 당신이 나를 찾아왔다 이 말입니다. 밤이 뭐야. 밤낮 주님이 작용하고 있지요. 밤낮으로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는 것, 이게 바로 성령 안에서 성령이 주의 영이잖아요. 하나님의 나라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걱정되지요. 물가 높지요. 먹는 것 입는 것 이것에 구애받지 않는 거에요. 그거는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요. 지금 침몰하는 중에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게. 우정과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타이타닉에 빠지면서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가 무슨 노래냐 하면은 그거에요. ‘내 주를 가까이’. 그 노래가 나와요. 단원들이 연주하는. 내 주를 가까이. 그것도 빠지면서도 믿음은 있어가지고.


그러나 그거는 미래입니다. 지금 죽으면 미래에 오실 것이다 그러는데 하늘나라는 그게 아니고 세상에 어떤 존재의 중압감, 압력 그 압력에 불구하고 이게 아무 상관이 없는 거에요. 특수한 공간이 있으니까. 이게 에어 포켓. 공기 포켓이에요. 어떤 사람은 공기 포켓에 몇 일 살았다는 사람 있지요. 공기 포켓. 지하에 불났을 때 대전에서 쇼핑몰 마트에서 에어 포켓에 살아남은 그 사람 있잖아요. 에어 포켓은 그냥 있기만 하죠. 이건 부풀어오른다니까요. 역으로, 대항해서.


그러니 이런 천국 이야기를 제자들이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대답해보세요.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성령오기 전이에요.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모르지요. 모르니까 그 다음 말씀 봅시다. 23절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질문 잘못됐습니다. 여기 제자들이 구원을 얻을 자가 적으니까.


제자들이 지금 이 안에 누룩 안에 있지도 않고 깃들이지도 않고 제자들은 지금 누굴 눈치 보느냐 하면은 침몰하는 세상, 저주 받은 밭, 자기의 결핍을 보충하고 있는 노력하고 있는 이 가상함을 좀 봐주세요 라고 하소연하고 있는 그 나무에 깃들지 않고 완전하게 도달하지 못하고 노력하고 있는 구원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쪽 세계에서의 눈치를 보는 거에요. 왜 우리 편은 몇 명 안 됩니까 하고 똑같은 소리죠.


구원 받은 사람이 적습니까 라고 이야기할 때 그때 주께서 24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좁은. 어느 출판사 이름이 좁은 문이에요. 어느 출판사죠? 십자가 마을 출판사.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한번 적어볼께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라고 되어있지요. 들어가기를 힘쓰라.


그렇다면 이 좁은 문하고 앞에 있는 나무, 새들이 깃든 나무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반죽 안에 있는 누룩. 이게 어떻게 됩니까? 같은 게 되겠지요. 그렇지요. 이거는 힘쓰라는 말은 들어갈 자도 있다? 없다? 없지요. 새로운 출산이 되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약속을 받지 아니하면 못 들어갑니다.


이거 한번 생각해보세요. 정탐꾼이 여리고성에 오기 전에 기생 라합이 바르게 살았다. 구원받습니까? 못 받지요. 왜냐하면 붉은 줄이 생성되지 않아요. 붉은 줄이 생성될려면 누군가 이스라엘 쪽에서 누군가 미리 와있어야 돼요. 하늘나라에서 누군가 미리 왔어야 됩니다. 그래야 피라는 붉은 피가 약속이 만들어 져요. 피가 모든 언약의 완성입니다.


피만 만들어 졌으면 그 다음부터는 뭡니까? 그 피가 있는 그 쪽에 그쪽 문이 무슨 문이냐? 이게 영생이거든요. 그게. 영생 아닙니까 영생. 이게 천국이죠. 여기 좁은 문에 두 명 들어가면 좁은 문입니까? 이천 명 들어가면 좁은 문입니까? 좁은 문은 숫자와 무관한 문이에요. 숫자와 무관한 문. 왜? 좁은 문은 작은 문이고 없는 문이기 때문에.


작은 문, 겨자. 작은 문이고 눈에 띄지도 않아요. 밭을 보지 무슨 겨자씨를 봅니까. 거의 있어도 없을 정도로 작은 문이요 그 다음에 누룩은 보이지도 않지요. 보이지도 않는 문이 무슨 문? 좁은 문이에요. 좁은 문이 거기 들어간 사람에게는 의외로 넓어요. 이렇게 넓은 문을 왜 찾지를 않지? 널널한데. 넓은 문이 얼마나 넓은지 아무나 와서 좋네 이런 문이에요. 이게 좁아서 좁은 문이 아니라 없는 문이거든요. 없는 문. 사람 눈에 띄지 않는 문.


들어갔다는 사람만 있을 뿐이지 그 문은 문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 문.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데 어떤 사람이 동사로 했는데 명사로서는 없는 문. 동사로만 나타나는 문. 먹고 마시고 성령 안에서 기쁨과 희락. 기쁨과 희락이 뭡니까? 이미 깃들였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을 가지고 희락과 평강이잖아요. 평화. 성령 안에서 안심 놔도 된다. 그걸 안심보험이라고 해요. 안심보험.


이제는 윤리 도덕이고 헌금 얼마고 선교 신경 쓰지 마세요. 안심 푹 놔도 돼요. 내 품에 안중근 의사 손바닥 있다 이런 것처럼. 내 품에 붉은 줄 있다. 내 품에 붉은 줄 있으니까 약속 있으니까 피가 있으니까 깃들기만 하면 되는 거에요. 이게 성령이에요. 들어가기 힘쓰라는 말은 아무도 못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에요. 힘쓰라는 말은 그냥 있으면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고 힘쓰라 해봐라 네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도록 알게 해줄게. 내 힘으로는 안 되는 거에요. 성령이 와야 가능해요.


25절 봅시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여기에 대해서 개그에 유명한 멘트가 있습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약속 갖고 왔어요? 누구세요?! 몰라요.


마태복음 같으면 이러죠. 우리가 주의 제자고 귀신 쫒아냈습니다. 26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절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자,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새로운 출산을 하지 못한 자들. 주님의 기억이 없고 자기 기억이 있는 사람들. 내 기억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너희는 내 나라에 들어올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비유에요. 비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십자가의 의미를 성령으로 주지 않는 한 비유는 그냥 깜깜한 모형으로 비밀로서 침투 불가로 남아있습니다.


만약에 이 비밀이 성령을 통해서 풀렸다면 우리는 더는 자기의 결핍과 결여를 스스로 보충할 생각을 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강도가 되든 세리가 되든 창기가 되든 그 자체가 나의 일이 아니고 이게 주님의 비유고 주의 말씀이고 주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다시 한번 봅시다. 24절 봅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그 다음에 뭡니까?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이것 또한 비유만큼 어려워요. 왜냐 하면은 힘쓰라 해서 힘썼는데 힘써서 애썼는데 못하는 자가 많다면 그러면 힘쓰라는 말은 하나마나가 돼요.


“힘쓰면 다 넣어줄게” 이렇게 돼야 되는데 “힘써도 소용없을걸”. 그럼 힘쓰라는 말을 왜 하셨느냔 말이죠. 이거는 힘써서 들어갈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어온 사람만이 알아요. 이건 내 힘으로 못 들어온다는 사실을. 인간은 자기 기억 때문에 못 들어가요. 인간의 기억은요 피보나치 수열이라는 게 있는데요. 1,2,3,5,8,,13,21,44. 이게 뭐냐 하면은 앞에 있는 합과 더해서 그 다음의 수열 만드는 것. 피보나치 수열.


이게 뭐냐 하면은요 인간이 하나의 욕망이 이루어졌을 때 그 욕망은 그 앞에 있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더 큰 욕망의 결핍을 비례해서 느끼는 거에요.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타자, 타인의 세계에서 온 욕망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만들어낸 욕망이 아니고 이미 기존에 있던 욕망을 체득하는 겁니다.


어린 아이한테 너 뭘 좋아해? 나는 바비인형 좋아해. 아이한테 바비인형 사줄 수 있어요. 그런데 나이가 50이 되가지고 50대 어머니한테 어머니 뭐 사줄까요? 어머니 생신 때 바비인형 사주면 얘야 내가 나이가 50인데 피보나치 수열에서 이건 2,3,5,8이 아니야. 내 욕망은 그게 아니고 지금 곗돈 타는 거야 곗돈. 지금 펀드, 주식 오르는 게 내 욕망이야. 얘들이 나를 몰라도 너무 몰라.


어머니 여행 보내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이번 70 생신 때 여행 보내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속리산 안 가봤지요? 속리산 두 시간이면 가는데. 나는 또 뭐 괌이나 보내준다고. 동유럽이나. 엄마를 뭘로 보고. 속리산 보내드리겠습니다. 지는 제주도가고. 인간의 욕망은 세상의 타인의 욕망에 유혹에 악마가 쳐놓은 유혹에 이끌리면서 살아가요 인간은. 계속 유혹만 찾아서 유혹에 이끌려서 계속 더 큰 유혹거리를 찾아 헤매는 거에요. 그걸 갖고 내 욕망을 대체하는 거에요. 오늘은 어디 가서 더 큰 유혹을 찾아서 내 욕망을 보충 메꿔볼까. 이게 인간이에요. 결핍이죠.


깃들기는 뭘 깃들어. 아파트에나 깃들지. 깃들지를 못해요. 깃들지를 못해. 깃들 곳이 만만한 곳이 없어요. 이 땅에는.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오기가 있고 해도 나중에 돈 문제 가지고 위에서 홱 하면요 예 잘못했습니다 고개 숙이고 존재의 무게, 중압감 압력은 아무리 바르게 살고 싶어도 바르게 못 살아요. 드러워서 내가 사표 내 사표. 이거 나중에 또 비슷한 경우 오면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요. 더 배고프면.


사람이 돈 맛을 알면 철 난다고. 돈 맛 모르면 철 안 난 거에요. 돈 귀한 줄 모르면 철 안 나는 거에요. 이게 침몰하는 디카프리오의 배입니다. 그냥 인간과 인간의 타인의 시선,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거기에 마음 졸이면서 살아가요. 평강도 없고 위로도 시원찮고요. 백날 해봐야 실제적이 아니에요. 위로해봐야 돈이 위로지 돈 없이 빈말하는 건 이건 짜증나요. 돈 가져봐도 마찬가지에요. 뭔가 계속 여분의 것이 욕망이 살아남습니다.


숫자가 점점 어지간히 채워져도 제 욕망을 채우지를 못합니다. 바로 이 사실을 성령 받은 자가 마음껏 외쳐야 되지요. 세상은 침몰하는 중이라고. 이 세상에 기쁨과 슬픔 다 다 헛된 거라고. 왜? 주께서는 세상을 따로 이미 만들어 놔버렸어요. 성령을 받은 자만 그 세계에 초대받고 갈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미 주님이 와버렸어요.


자, 끝으로 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6절 악마는 지금도 성도를 시험하기 위해 이렇게 합니다. 예수님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냐?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네가 더 소중하지 않을까? 예수님보다 네가 더 소중하지 않을까? 솔직하게 이야기해봐. 솔직하게 아니고 솔찍하게 이야기해봐라. 예수님보다 네가 더 우선이지. 네가 더 소중하지. 그럴 때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잘 알아맞췄네. 내가 그래. 그래서 나는 이미 죽은 거야. 죽었기 때문에 내 죄를 마음껏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미 죽었기에 내가 침몰했기에 나는 삼등 인생이라는 것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를 여러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미 나는 죽었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약속이 있기 때문에 나를 믿지 말고 그 약속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욕망에 허덕이는 이 육신을 갖고 있음을 아주 거침없이 이야기하셔서 그 경계선에서 예수님의 하늘나라만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말씀 천국, 우리에게는 그냥 희망사항이었었는데 지금은 이게 우리 안에 주님 오심으로서 나의 세계 이야기가 되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이야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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