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3장 33절 (유령) 221206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3장 26절부터 보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인간이 대화를 시도합니다. 대화 시도.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서로의 의견이 일치되는지를 점검하는 거죠. 일치되는지를 점검하고 공통점 확인하는 것이고 공통점 확인을 거쳐서 이거는 뭐냐 하면은 분쟁을 키우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오셔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시지요. 대화를 하시잖아요. 말씀을.
말씀을 하게 되면 말씀은 새로운 공간 확장으로 이어져요. 주님께서는 인간하고 대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말씀의 공간을 확장시켜나갑니다. 그럼 그 말씀에 대해서 인간이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알아듣지를 못하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잖아요. 알아들었으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이유 없지요. 못 알아듣지요.
못 알아들었으니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분쟁을 키우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화평을 주려함이 아니고 분쟁하려 함이라” 사람들의 분쟁은 술 한잔 하고 나중에 좋은게 좋고 뒷주머니에 돈 좀 주면 쉬쉬하고 넘어갈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말씀을 던진다는 것은 분쟁을 더욱 더 키우는 거에요. 분쟁을.
분쟁을 키운다는 말은 공통점이 있다? 없다? 공통점 자체가 하나님과의 그 나라의 본질과 인간 세계의 본질 사이에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계속 분명해져요. 명확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사용하는 대화의 개념과 하나님이 생각해놓은 그 내용이 같은 점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돼요. 그럼 인간들은 남과 타인과 대화할 때 그 인간들은 무엇을 의도하면서 대화를 하느냐? 인간이 대화하는 이유부터 살펴야 되겠지요.
인간은 어릴 때부터 몸짓을 하게 되는데 그 몸짓은 딱 두 가지입니다. 인간은 자기 의견을 몸짓 이런 것을 표현하는데 나중에 그것이 말이 되고 어린애는 울음이 되고 고함이 되고 그렇겠죠. 앙앙 거리면서 자기 의사 표현을 하는 거에요. 아주 어린아이가 느껴지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나타남과 사라짐. 인간 어린아이의 의미는 이 둘밖에 없어요.
어린아이가 있는데 엄마가 장에 갔다. 엄마가 있는데 있죠. 엄마가 있을 때는 안 울어요. 엄마가 잠시 화장실에 간다든지 자기 눈앞에 사라지게 되면 애가 엄마를 찾으면서 그냥 찾지 않아요. 자기 의사 표시를 하면서 찾지요. 울지요. 울면서 찾습니다. 왜 울지요? 엄마 없는데 왜 울지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내뱉는 모든 말 속에 그 의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제가 말씀드리는 거에요.
엄마가 한 2분 뒤에 나타났다. 울음이 어떻게 됩니까? 환희로 바뀌지요. 기쁘지요. 인간은 있다 나하고 동질의 존재가 있다 없다. 나 같은 사람이 있다 없다가 의미의 시작입니다. 시계로 보면 똑.딱.똑.딱 이렇게 돼요. 나란 어린아이는 엄마와 일치화시키면서 자기 존재를 이해하거든요. 어릴 때는. 독립적이지 못할 때. 자아가 없을 때는. 엄마 없으면 본인이 없는 거에요. 엄마 있으면 본인이 안심이 되는 겁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신적으로 분리가 덜 된 거에요. 이것부터해서 언어가 시작되는 겁니다. 나와 똑같은 존재가 있으면 기쁘고 똑같은 존재가 없으면 애는 불안을 느끼는 겁니다.
그러면 나한테 의미 있다는 것은 나중에 커서는 엄마가 타인이죠. 나와 동질의 타인이 생겨버리면 인간은 즐겁고, 즐겁다는 말은 내가 누구냐를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즐겁고 나하고 동질의 것이 없어버리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무의미라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인간의 언어는 뭐냐 하면은 부재죠. 부재. 나타남은 존재죠. 존재냐 부재냐 따라서 인간의 의미가 결정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 유일한 의미거든요. 무엇이 옳으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옳아요. 정의가 옳은 게 아니고 착한 게 옳은 게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이것이 무조건 의미 있는 거에요.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있던 말던 내가 있어줘야 돼요. 그게 인간에게 의미에요. 그 어린애가 달라지지 않았어요. 나중에 어른이 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은 어떤 숙제 같은 것, 압력을 가해요. 너희들은 그냥 내 곁에 있지 말고 내가 여기 의미 있게 가치 있게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이야기를 해줄 책임을 가지고 너희들은 내 옆에 있다는 거에요. 그게 인간의 단어 선정에 거기 다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런 노래 있어요.
사랑한다는 말은 뭡니까? 내 곁에 있어 달라는 곁에 있으면서 뭡니까? 서비스. “물 드릴까요?” 서비스. 호텔 서비스맨으로 있는 겁니까? 아니지요. “이뻐요 대단해요 착해요 굿! 우수해요 왜 이렇게 멋있어요” 라는 그러한 시선을 보내면서 내 곁에 있어줄 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나의 존재는 충만해지는 겁니다. 내 존재가 충만할 때 그 인간은 비로소 나는 의미를 느낀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의미를 느낀다.
어제부터 서울 날씨 추웠지요? 추웠다. 자, 날씨가 춥다. 자, 날씨가 추울 때 우리나라 8강 못 들어갔다. 지금 날씨가 추운 게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날씨가 추운데 브라질이 이겼다. 지금 그거 맞는데 지금 나한테 의미가 아니에요. 나한테 의미가. 날씨가 춥다. 당장 의미 있는 것은 뭐냐? 두꺼운 외투 갖다 줘 이게 의미 있는 거에요. 왜?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내가 여기 있으니까 추운 날씨에 안전하게 보존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춰야 그게 내가 의미 있는 거에요. 추워서 외투가 필요한데 옆집에서 와가지고 오늘 김장 100포기 했다. 김장 100포기 한 것 나한테 의미가 없어요. 김치 좀 맛 좀 볼래요? 지금 김치가 문제가 아니고 추울 때는 외투가 필요하다고요. 외투가. 좀 눈치 있어서 내가 떨고 있는걸 알아채야지. 왜 내 옆에 있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시골에서 시어머니가 전화를 합니다. 잘 있냐? 네 잘 있습니다. 끝. 끊자. 끊었습니다. 시어머니가 갑자기 전화 왜 했겠어요? 시골집에 보일러 놔달라는 거에요. 날씨가 추워서. 괜히 대화를 시도하는 게 아니에요. 대화를 시도할 때는 본전을 뽑고 되돌아와야 돼요. 대화라는 것은.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본인이 생각해서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날라다니는 기성권력의 단어들이 있어요. 기성세대의 권력들이 지배하는 단어가 있어요. 그 단어들을 이렇게 마트에서 물건 뽑듯이 그걸 하나 당겨서 내 것으로 꽃다발 만들듯이 만드는 식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쓰는 단어는 이미 기존에 나왔던 단어에요. 본인이 생각해서 만드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그동안 내가 커오면서 ‘나’라는 것을 어떻게 구축했는가 그것은 나한테 저런 거 있었으면 좋겠다. 공기청정기 있었으면 좋겠다. TV, 냉장고 그런 거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 집에 이건 있고 그건 없고 이건 있고 그건 없고 태블릿PC 사줘요. 이번 성적 90점 이상 되면 태블릿PC 사달라고 인간극장에서 이야기해요. 아버지가 92점. 그 딸은 90점. 그럼 91점 OK. 협상을 봐가지고 평균 91.5 되면 테블릿PC 사주기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 애가 했던 그동안의 모든 몸짓들은 기존의 욕망에서 괜찮은 태블릿PC라든지 공기 청정기 또는 나중에 어른 되면 차. 괜찮은 것을 내 것으로 장착시킴으로서 비로소 나는 새로운 업그레이드된 의미를 구축하는 거에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괜찮은 나로 계속해서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는 것들의 것으로 채워지면서 나는 계속해서 그 자체로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 겁니다.
여러분 택배에 여름철에 상하기 쉬운 것에 뭘 집어넣습니까? 냉기를 집어넣지요. 쉬지 않도록. 인간이 이렇게 있으면 수시로 집어넣는 거에요. ‘나’라는 프레임. 상자. ‘나’라는 상자에다가 수시로 내게 적당한 것들을 이렇게 채워넣는데 그것은 기존에 이미 있던 거에요. 그럼 그걸 채택해서 내 것 만들 때 그것을 만드는 모션과 태도는 무엇에 의해서 선택하고 결정했는가. 남들 보기에 남한테 인정받는 조건을 받는 갖춘 내 존재라는 것을 구축하기 위해서 그런 욕망이나 그런 단어에 집중하는 겁니다. 태블릿PC라든지 이런 것. 다른 거 필요 없어요. 배추 50포기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나한테 태블릿PC가 중요한 거에요. 그렇게 골라 담는 거에요 인간은. 골라 담는 것.
결국 제 이야기의 끝은 뭐에요? 마지막 남는 의미는 뭡니까? 내가 여기 존재한다 에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그 외에는 다른 의미는 전부 다 2차적이고 3차적이고 이거는 꼬리 같은 거에요. 꼬리곰탕. 이건 겉절이들이에요. 겉절이. 악세사리들. 그게 인간들이 다들 그렇게 살거든요. 인간들의 대화는 뭡니까? 각자 도생하면서 각자 자기 존재의 챙길 것 챙기는 대화 주고받는 그런 미세하게 주고받는 세계가 무슨 세계다? 인간 세계죠. 인간 세계.
그런데 거기에다가 오늘 누가복음 13장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향하여 무엇을 시도합니까? 대화를 시도하는 거에요. 대화. 대화를 시도하니까 그 대화와 예수님의 대화와 인간의 대화와 소통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안 된 증거가 뭐냐 하면은 26절에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자기 딴에 변명조를 늘어놓는 거에요. 제가 주님 앞에서 주님 말씀을 가르쳤고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뭔가 함께 있었잖아요 라고 제시하는 것.
제시할 때 27절에 보면 “나는 너희들을” 그 다음에 뭡니까?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 이게 바로 주님 쪽에서 대화를 시도한 이유입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나는 너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이게 남의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우리 보고 하는 이야기 아니에요? 평소 우리 자신의 존재, 내가 여기 있음을 중심으로서 내가 생각하고 또는 이렇게 대화를 하고 하는 그것이 이런 모든 행위들이 주님과의 소통을 차단하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가 감안했습니까?
나 위주로 살아가는 이 짓이 하나님께 통할 거라고 여러분 생각했어요? 안 통합니다. 통할 수가 없어요. 내 위주로 사는 인간을 천국에 넣어주지를 않지요. 천국은 인간 개인을 옹호하는 데가 아니고 예수님만을 위한 곳이기 때문에 이것은 대화의 내용 자체가 다릅니다. 요한복음 8장 3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이런 예수님의 훅 들어오는 이 대화에 대해서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왜냐 하면은 인간 세계에서 남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 결별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헤어지면 되지 상대방을 죽일 이유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 말을 듣고 너하고 나하고 생각이 다르다 그럼 되지. 그 생각 다른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제 본격적으로 너희들이 나를 죽일 것이다 하니까 어느 쪽에서 의아해 하느냐 하면은 유대인들이 의아해하는 거에요.
당신이 뭔데 우리가 당신을 왜 죽여 하는 거에요. 주님께서 두고 봐 너희들이 나를 죽이게 돼있어. 이유는 단 한가지 너희 마음에 내 말이 있을 곳이 없다는 그 결과로 너희는 나를 죽이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이 알기 쉬운지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만은 다시 한번 제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대화를 할 때는 그냥 대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대화를 통해서 소위 있다는 것으로 충만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을 부재의 존재로 만드는 새로운 공간을 넓히는 확장하는 작업을 주님께서는 계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세계에 예수님이 나타났잖아요. 그러면 인간들은 예수님을 옛날 없는 식으로 그냥 돌아가세요 하잖아요.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너희들이 내 앞에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너희들이 있다는 그 곳에 내가 있다로 바꾸겠다는 겁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대화하는 거에요. 그 바꿀 때 뭐가 있느냐 하면은 너희들이 나를 죽였다는 것, 그 사실로서 이 세상에 있게 하겠다는 주님의 본래 뜻이 담겨있어요.
우리 말 안 통하니까 우리 서로 대화하지 말고 각자 헤어집시다가 안되고요 잠깐, Just Moment 기다려 그게 네 맘대로 안돼. 나는 너를, 네가 나를 죽였다는 인간으로 기어이 만들고 말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화 하나하나에 다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게 확장이에요. 나는 예수님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겠어 가자 가자. 가자 가자가 아니라 그들은 갈 데가 없어요.
28절에 보겠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절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여기에 누가 부재합니까? 예수님을 처음 대했던 유대인들이 여기에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 천국에. 존재하지 않지요. 부재해버리죠.
이 세상의 운명은 예수님의 말씀의 효과입니다. 말씀이 그냥 말씀으로 공기로 흩어지는 게 아니라 반드시 이 세상에 있는 자는 없게 하고 없는 자로 소위 천국에 우리만 있다고 여기고 너희는 없다고 여기는 자들을 동서남북에서 있게 만드는 작업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의도적으로 뒤집기가 가능한 말씀을 주께서 해오신 거에요.
그렇다면 제가 아까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언어에 담긴 의미, 말에 담긴 의미 또는 문자에 담긴 의미는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을 사용한다고 했지요. 내가 여기 있다. 처음에는 있다 그 다음에 내가 여기 있는 것에 대해서 주목 좀 해주고 그걸 인정해달라 계속 추가하지요. 그 다음에 더 나아가면 노골적으로 친구들아 내가 참 인생 잘 살았다는 것을 너희들 통해서 좀 증명해줘. 계속 나가는 거에요. 그게 인간이 말 사용할 때 원하는 바에요. 그런 의도가 그런 요구가 담겨있는 말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 내용을 그대로 교회에서 새벽제단에 차가운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기도를 한다. 기도를 한 5분 동안 한다. 5분 내용이 뭐겠어요? 하나님 나 여기 있습니다. 인생 참 잘 살았다고 하나님 쪽에서 인정해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죠.
인간은 처음부터 자아가 먼저 있는 게 아니고 타인이 먼저 있어요. 왜냐하면 자아가 형성되는 것은 타인 아빠 엄마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에. 그 아빠 엄마 타인 부모가 그냥 가만히 짝대기처럼 서있지 않지요. 뭐하느냐 하면은 지시와 명령을 합니다. 지시와 명령을 하지요. 그럼 아빠의 지시와 명령이 아이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겁니다.
조건부로 아빠의 지시와 명령을 들어줄 때 나에게 맛있는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이 주어지더라는 그 원칙들이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내가 있기 전에는 먼저 뭐가 있다? 나에게 타인이 있을 경우에만 내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어린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아빠 엄마에요. 주위에 가족들. 그 가족들을 악착같이 아이는 붙들려고 합니다.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어서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생기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이걸 가족연대성. 거기서 아이는 가족을 위해서 내가 희생할 수도 있고 양보할 수도 있고 내가 하기 싫지만 노력해야 된다. 그래야 뭘 유지할 수가 있다? 가족이라는 나보다 약간 더 큰 범주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다고 그걸 배우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가정교육 잘 받았다고 하는 거에요. 윤리와 도덕의 시작이죠. 가정교육 잘 받은 거에요. 가정교육 잘 받은 것을 한자로 뭐라고 하느냐? ‘의’. 이걸 세자로 이야기하면 뭐냐 하면은 자기 의. ‘자기 의’가 되요.
그러면 이 과정에서 인간의 마음은 둘로 갈라집니다. 의식과 하나는 또 무의식이 있는데 방이 두 개 있어요. 인간의 마음에 방이 두 개 있는데 두 개 있고 그 가운데 지킴이가 있어요. 지킴이. 지킴이가 있어가지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이 의식적으로 내 존재를 인정해줄 거 같으면 의식의 방에. 그런데 뭔가 내 맘에 안 들면 어디로 집어넣는가. 무의식 방에 들어가서 꿈에 나타나요. 꿈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지킴이가 뭐를 하느냐? 억압을 해요. 억압을. 억압을 제대로 하게 되면 윤리적 사람이죠. 정상적인 사람인데 이 억압하는 기계가 고장나버리면 이건 미친 사람 되죠. 이 억압이 깨질 때가 주로 뭐냐 하면은 술 먹을 때. 술 먹고 난 뒤에 취중진담해가지고 술 핑계대고 자기 본심 이야기할 때. 평소에는 점잖게 프로포즈하다가 술 한잔 먹고는 여자 집 창문아래에서 딜라일라 노래 부르면서. 딜라일라 노래 알아요? 불 꺼진 창문 앞에서 하는 조영남이 불렀던. 너 나와! 술 먹고 너 나와!
여자 아빠가 너 뭐야! 너! 나 저 여자 좋아합니다. 스토커 신고. 요새 스토커 강화됐습니다. 여기 행패부립니다 신고해가지 사윗감이고 뭐고 쫑 났지요. 용기가 없어서 술 먹고 지킴이를 약간 술 취하게 만들어가지고 무의식이 튀어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교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 임직식할 때 참아요. 점잖게 하고 안 입던 한복 끄집어내고 이렇게 하는데 막상 장로 집사 되서 교회 제직회 한바탕 할 때는 이건 뭐 국회 민주당 국민의 당. 자기의 의, 자기의 가치 지키는데 목숨을 다해 지킵니다.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은 인간 세계는 뭐만 흐른다? 자기의 소리, 자기의 목소리만 계속 이렇게 난류 한류 이렇게 대류처럼 흐르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에스겔 37장에 보면 그걸 죽은 자의 세계로 봐요. 죽은 자의 세계. 에스겔 37장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뼈 골짜기에 집어넣습니다. 뼈 골짜기에 집어넣고 이렇게 하나님의 시선으로 대화합니다.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뼈들은 이미 죽었다는 거죠. 죽었을 때 이 뼈들이 죽었는데 이 뼈들이 어떻게 살겠느냐 라고 하나님이 묻지요. 인자한테.
그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해답을 줍니다. 이 뼈들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를 들으면 그들은 삽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소리가 죽은 자도 삽니다. 살 때 조건이 있어요. 그 말씀이 그들 맘속에 들어갈 자리가 있어야 돼요. 아까 요한복음 8장 37절에 뭡니까?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 이유는 너희들 속에 내 말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를 죽이려 한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자리가 없으면 자기의 주님이 이미 계시한 말씀의 자기 자체적인 공간 때문에 그들은 주님이 새로 만든 공간 안에 새로운 백성들이 주님의 소리에 의해서 죽은 데서 부활된 자들이 그 속에 들어가거든요.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천국에 들어가다 보면 기존의 인간들은 어떻게 됩니까? 주변으로 추방될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건 아까 처음에 얘기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뭐를 일으킨다 했습니까? 분쟁을 일으킨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오늘날 성도의 말씀은 이 모든 말씀은 이 세상 안에서 분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돼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것처럼 “내 말과 내 의로 인하여 핍박받거든 오히려 기뻐하라. 선지자들이 이와 같이 고난을 받았느니라” “선지자들이 이와 같이 고난을 받았느니라”
인간의 비극은 지옥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인간의 비극은 지옥에서 못 벗어난다. 왜 못 벗어나느냐 하면은 누가 불러줘야 되지요. 불러줄 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데 아무 소용없어요. 불러줄 때 그 소리가 박혀야 돼요. 마치 고래 잡을 때 작살이 날라와서 꽂혀버리면 고래한테 작살 꽂혀버리면 작살은 고래의 외부의 요소니까 나한테 없던 외부 요소가 꽂혔지요. 외부요소가 그 고래를 잡아당기니까 고래는 본래 살던 바다에서 살지 못하고 육지로 끌려 나올 수밖에 없지요.
말씀이 꽂혀버리면 우리는 지옥에서 살지 못하고 어디로 가느냐? 천국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많이 섭섭합니까? 그게 많이 섭섭해요? 정든 친구들 사랑했던 오빠 언니하고 헤어지니까 그게 많이 섭섭합니까? 많이 아파요? 자, 꽂힌 작살을 내 힘으로 뽑아낼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뽑아냅니다. 우리는 앙탈부리죠. 왜? 그리우니까.
그동안 내가 정답게 지냈던 사람들 있잖아요. 그들은 나에게 뭐를 주느냐 하면은 너 잘났어. 훌륭했어. 너는 착해. 너는 대단한 존재야. 네 인생 그동안 참 실수 없이, 하자 없이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게 바르게 살아왔나 계속 사랑과 칭찬과 보호와 격려와 나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던 그들이에요. 그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곧 뭐냐?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자기의 죽음을 의미하는 거에요. 우리는 그들의 소리에 의해서 우리는 정당하게 제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들을 해온 거에요. 내가 못 나가도 내 친구들은 잘 나간다. 지금 우리는 그 덕에 우리는 뭔가 희망을 갖고 사는 거에요.
보통 중매할 때 보면 남자 중매할 때 중매자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남자보고 아가씨 어때? 아가씨가 인물이 좀 내 예상보다 영 못하다. 그 분 오빠가 판사래. 그 오빠가 판사인 거하고 마음에 드는 거하고 무슨 상관있겠어요. 그 오빠가 판사고 아버지가 빌딩 두 채 있대. 그건 좀 맘에 들지요. 그 여자를 둘러싼 그 주변의 환경, 삶의 환경에서 우리가 무슨 수로 탈출합니까. 탈출은 커녕 탈출 안 할려고 애를 쓰잖아요. 어떻게 일구어낸 그 환경인데 그걸 마다해요. 안되지요.
그래서 절대로 인간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력으로. 자기 힘으로. 왜냐 하면은 그 안에는 나의 의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나의 의. 내가 합당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의입니다. 나는 존재할 만해서 존재한다. 존재할 만한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 자기 의에요. 당장 죽어 하면 화냅니다. 왜? 살 권리가 있는데 나보고 죽으라고 하고 하면 그거는 나한테 합당하지 않다고 화내지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어릴 때 내 속에 누가 있다? 타인의 시선이 있다. 타인의 시선. 타인의 시선이 내 안에 들어와요. 나라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기대에 부응해서 이렇게 합쳐있는 겁니다. 자아가 있더라도 타인이 나와 함께 있어요. 이게 내부 타인이고 바깥에 우리가 눈에 띄는 사람을 외부 타인이라고 합니다. 인간 속에 내부 타인이 들어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 내부 타인을 끄집어내버리고 주님이라는 타인을 집어넣는 거에요. 어릴 때부터 나를 키워온 외부 타인을 제거해버리고 그 빈 공백이 생기지요. 그 빈 공백에다가 예수님의 시선을 그 안에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그 일은 주님만이 할 수 있지 우리 인간은 해내지를 못해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까 인간 속에 방 두 개 있지요. 하나의 의식의 방과 지하실에 뭡니까? 무의식의 방이 있지요. 그 중간에 뭐 있다? 지킴이 있다. 경계선. 가만 있어 입 다물고 너 낮에 튀어 나오면 안돼. 밤에는 인정해줄테니까 낮에는 함부로 난동부리면 안돼. 딱 지키는 것. 흔히 말하는 양심 또는 윤리 도덕. 그것을 주의 말씀이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려요. 그것 때문에 자기 의가 형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의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남들이 의라고 인정해주는 것들의 집합체가 나의 의가 돼요. 남들이 그건 잘한다 훌륭하다 인정해줄 때 우리는 그 공동체에서 왕따 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올 때 타인의 시선, 외부 타인이죠. 외부타인의 층을 피해서 오겠습니까? 그걸 통과하고 오겠습니까? 통과하고 오겠지요. 통과하고 오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기성세대의 지배권력.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는 지배권력.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31절 32절 한번 봅시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여기 헤롯에 대해서 뭐하고 평했습니까? ‘여우’.
이 헤롯은 안티파스라는 헤롯입니다. 헤롯이 있고요 헤롯대왕인데 헤롯대왕은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나오는 사람이 헤롯대왕이에요. 그 아들들이 안티파스 헤롯, 헤롯 빌립1세 빌립2세. 빌립1세는 안티파스의 동생인데 죽었어요. 안티파스 빌립2세 이 사람은 좀 착한데 들고 안티파스가 빌립1세의 아내를 뺏어가지고 자기 아내 삼은 것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기성세대의 지배권력에 대해서 충고하니까 그 딸의 이름이 살로메인데 살로메한테 안티파스 부인이 주동질해가지고 아버지가 소원이 뭐냐? 하니까 태블릿PC 이런 거 말고 세례 요한의 모가지 달라고 해라. 그래서 배후 조종해서 세례 요한이 죽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을 때 사람들이 전부 안타까워하겠지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렇게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무엇이기 때문에? 소리이기 때문에. 소리. 어떤 소리? 기쁜 소리. 소리였어요 소리. 소리인데 요한복음에서는 뭐냐? 어두움에서 비취는 빛이 있었으니 그게 소리. 빛을 말하는 소리에요. 그게 세례 요한이에요.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뭐냐 하면은 소리잖아요. 소리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다른 말로 하면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존재에요.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존재. 이게 세례 요한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을 뭐로만 사용하느냐? 소리로만 사용합니다. 소리로만 사용하는데 소리가 계속 소리, 소리, 소리로만 나가야 되는데 갑자기 소리가 “나는 소리다” 하면 그거 죽여버립니다. 소리가 돼야 될 텐데 갑자기 “나는 나”가 되어버리면 유령에서 벗어나서 실제 기존에 있는 인간들과 똑같이 되니까요 “나 소리 맞지? 나 소리라고 인정해줘. 나 소리니까 날 위해 사랑해줘” 이렇게 되어버리면 안돼요. 소리는 그냥 기능으로만 이야기해요. 그 기능. 스피커로만 기능하고 그걸로 된 거에요.
실체는 예수님 한 분으로 끝났어요. 다른 사람 실체 되면 안돼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은 죽은 자여야 되는 겁니다. 자, 방금 제가 세례 요한을 유령 같은 존재라고 했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후손들은 아까 요한복음 8장 37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을 자리가 없으므로”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한다? “죽이려한다” 라고 되어있지요.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인간들은 뭐냐 하면은 이미 죽은 자들이에요. 이미 죽은 자들. 세례 요한도 죽은 자인데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찾아와서 뭘로 기능했다? 소리로 기능했다는 주님과의 연관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세례 요한은 구원받는 거죠. 갑자기 인간은 누구 밖에 없는가? 인간다운 인간은 예수님 밖에 없고 인간은 다 날라가버리는 겁니다. 갑자기 시원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없어요. 주위에 귀신밖에 없어요.
2001년도에 디 아더스(The Others)라는 영화가 있어요. 디 아더스. 남들. 거기에 여자주인공이 니콜 키드먼이라는 사람인데요. 그 사람의 그 영화가 뭐냐 하면은 애 셋 데리고 큰 저택에 사는데 그 여자와 네 명이 사는데 일할 사람이 필요해가지고 하인 세 명을 구하려 광고를 냈는데 광고를 신문에 못 냈는데도 불구하고 세 명이 남자 하나 여자 둘 일꾼들이 왔어요. 그때부터 그 저택에서 음산한 일들이 퍼졌는데 결론적으로 그 영화가 뭐냐?
그 주인공 니콜 키드먼과 세 아이는 이미 다 옛날에 엄마가 애들 세 명을 권총으로 쏴죽였던 유령들이 살고 있는 집이에요. 그 영화가 뭐냐? 전부 다 그 집 6명 모조리 유령들이에요. 하인들까지 유령들이에요. 유령들만 있었던 거에요. 그걸 본 당사자들은 그걸 모르는 거에요. 자기가 죽은 자 자체를 모르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산 자는 없어요. 전부 다 죽은 자에요. 전부 다 디 아더스에요 전부 다.
그런데 유일하게 사신 분이 오셔가지고 죽은 것을 기정 사실로 해서 예수님의 자신의 말씀으로만 던지니까 그 죽은 바짝 마른 뼈들이 그 말씀이 인간 속에 계속 유지하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에스겔 37장에 보면 죽은 자가 비로소 산다는 말을 최초로 할 수 있는 거에요. 말씀과 엮어서만 이게 산다가 돼요. 안 그러면 산다가 아니에요.
그냥 세월 96세 살다가 죽으면 그냥 흙 되는 거죠. 96세도 운 좋아서 96세지 80, 90. 요새는 90까지 많이 살잖아요. 살아봤자 뭡니까? 살아봤자 죽는데요. 지금 인간들은 모르는데 성경에 의하면 인간들의 형편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에요. 경사로가 있어요. 경사로. 있어가지고 인간이 여기서 아무리 많이 태어나도 아담의 후손이 많이 태어나도 이거는 뒹굴고 구르고 난리도 아니에요. 매일같이. 2022년 12월 3일 4일 5일 뒹굴어서 어디로 가느냐? 지옥으로 지금 뒹굴고 가고 있는 거에요.
여기서 엄마 나 100점 받았어 라는 소리도 가끔 들리고 엄마 나 취직했어. 지난 토요일날도 결혼한다고 결혼식에 참석했거든요. 주례도 없이 자기들끼리 깐족대면서 축하 파티를 열고 그래서 그들은 어디로 가느냐? 그 순간 그들은 어디로 굴러가는가? 지옥으로 가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경사가 이렇게 되어있는 게 아니고 경사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거꾸로 중력을 거슬러 올라올 수가 없어요. 말릴 수가 없어요. 말릴 수가. 지옥 가는 것을 말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 쪽에서 이 가운데 얼마에게 주의 말씀이 꽂히게 해가지고 이 쪽도 경사로인데 이쪽은 어디로 구르냐 하면은 천국으로 구르는데 말릴 수가 없어요 이거는. 뭘 해도 매일 매일이 천국에 가까운 쪽으로 계속 굴러가는 거에요. 계속 굴러가면서 이상하게 저쪽을 부러워하네. 아 부럽다 참. 그래서 성도가 뭐냐? 주님께서 손 댄 사람만 성도에요. 그게 성령이 임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직접 손대서 그 사람을 강제 조치하는 사람만이 성도고 그 외에는 성도 아닙니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에요. 천국 사람이 아닙니다.
한 40년 50년 복음 연구하고 성경 연구 따라다니고 그거 소용없어요. 직접 그 가정을 아주 작살을 내줘야 돼요. 작살낸다고 하는 것은 어렵게 살고 가난하게 살고 처절하게 사는 거 말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이 갖고 있던 모든 의를 다 강탈하는 거에요. 집에 열 채 있고 하더라도 이건 뭐 내거 아닌데. 이렇게 살게 되면 주의 사람이죠. 하여튼 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집 한 열 채 있고. 이왕 주의 사람 되는 거 그렇게 한번 살고 싶어.
집이 있고 땅이 몇 만 평 있어도 이건 뭐 내 가치를 인정해주는 토대가 못됨을 알잖아요. 대저택에 사는 유령 같은 존재지요. 천국 가는데 이런 넓은 집을 왜 줬는지 모르겠어. 나도 이상해. 뭐 이런 거. 인간은 말을 합니다. 대화합니다. 그 대화는 인간의 말의 의미는 자기 속에 담긴 의도를 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타인의 말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무의식이에요. 인간의 속셈, 인간의 본심. 타인들이 웅성웅성하고 말하는 그것이 내속에 들어있어요. 이 타인들.
이 타인은 뭐냐? 헤롯이죠. 집의 기성세대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거기 형성되어 있는 기성세대에요. 내가 만든 정치세력 아닙니다. 내가 어쩔 수가 없어요. 어쩔 수가 없어요. 내가 태어날 때 거기에 이미 다 이렇게 압력을 저기압처럼 누르고 있던 그 모든 경량들이에요 경량들. 그런 이데올로기, 의식들 사고방식이고 선입견들이에요. 고정관념.
거기서 어린애들이 무슨 수로 탈출합니까? 자기가 아는 게 있어야 탈출하지. 그냥 받아들여야죠. 그래서 인생을 그런 맘이 들어오면서 그 타인의 요구와 거기서 어린 아이의 의식 속에 내부에 지하실에 차면서 인간은 성장하는 거에요. 인간은 살아가는 겁니다. 무슨 수로 여기서 도피를 해요. 자기가 뭘 안다고 도피를 해요. 아버지 가는 길 자기가 따라가고 뭐 하나 잘되면 엄마한테 자랑하고 아버지한테 자랑하고. 아빠 엄마가 기뻐하는 것이 곧 나의 기쁨이다. 이런 가족 연대감 속에서 헤어날 수가 없어요.
가족 연대감에서 순종을 배우고 충성을 배우고 가족이 모이면 공동체가 모이면 내가 무엇에 대해서 양보해야 되고 무엇에 대해 행동에 조심해야 되는 것을 자기 집구석에서 다 배우는 거에요. 집구석이 엉망 같으면 엉망 다 배우는 거에요. 가정 교육이 엉망이구만 이런 평가를 받지요. 왜? 옆집에 있는 다른 공동체와 비교해서.
그러나 주님 나라에서는 비교라는 것을 주께서는 없애버렸어요. 네가 너 되는 것에 어떤 것도 비교할 필요 없다. 어떤 것도. 내가 꽂혀서 내가 동서남북으로 뽑아서 천국 집어넣는데 뭘 그렇게 두리번 두리번 할 이유 없다. 그냥 말씀이 들리면 들리는 대로 해야 되는데 우리도 만만치 않잖아요. 이쪽에 있으면 이쪽 부러워하잖아요.
여기서 강제 조치로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관여하지요. 인생을 관여해서 인생을 내 뜻대로 쉽게 말해서 내가 의로운 쪽으로 주께서는 이끌지 않고 반대로 내가 아무것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이끌어주시는 거에요. 자기 부인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주님 가신 그길, 말씀의 길입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3장 33절 (유령) 221206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누가복음 13장에서요 32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 다음 33절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이렇게 되어있지요.
시간 카운트가 인간 세계의 카운트가 달라요. 인간 카운트는 태어날 때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태어날 때부터 한 살 두 살 세 살. 그런데 예수님의 카운트 이 땅에 오셨으니까 시간이 있을 거 아닙니까. 예수님의 카운트는 방향이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위해서 원 투 쓰리로 마감이 되어버립니다. 하나, 둘, 셋.
인간은 태어난 것부터 카운트해서 모든 시간 내가 태어나서 여기 존재한다 여기 있다를 강조하는 식의 자기 기억 속에 있는 시간, 나이. 그런 나이를 토대로 해서 살아가는 반면에 주님은 빨리 돌아가는 시간이 아직 남아있는 것을 오히려 안타깝게 여기는 거에요. 왜냐하면 죽어야 완전함이 되니까.
예수님이 죽어야 완전하게 된다는 말은 모든 인간 세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이미 죽었다는 그 사실이 예수님이 죽을 때 일거에 전부 다 확연하게 폭로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활용해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다루어지는 겁니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방향을 태어날 때부터 태어났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간보다 저런 인간은 왜 안 죽어 빨리 죽지 라고 하는 그런 인간들도 있겠지요. 그게 마태복음 21장 31절에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아멘.
하늘나라가 뒤쪽에 있지요. 뒤쪽에. 첫째아들이 아닙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돼요. 왜 주님께서 그 말씀을 왜 언급을 하시느냐 하면은 바로 인간들이 가치 설정이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가치 설정의 기준이 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죽어야 될 자가 죽는 것부터 가치 설정이 카운트돼야 된다는 거에요. 저는 마땅히 죽어야 됩니다 라고 해당되는 자가 누구냐? 세리와 창기와 도둑들이에요. 강도들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화시켜서 모든 인간이 죽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킨 그 내용을 가지고 말씀하실 때 그게 다 담겨있는 거에요. 만약에 오늘날 어떤 과학자가 성령 받았다. 과학자인데 성령 받을 이유가 별로 없겠지만 하여튼 과학자가 성령 받았다 하게 되면 이건 뭐냐 하면 과학자의 행위 자체가 내가 이것이 죽어 마땅함을 이야기하면서 왜 죽어 마땅한가를 알기 위해서 과학 작업을 하는 자이어야 한다 이 말이죠. 그래야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자기가 죽어 마땅함을 자기 일을 통해서 그걸 파악해내는 사람. 그것이 직업이 얼마나 다양하든 상관없어요. 어부가 되든 농부가 되든. 뭘 하든 뭘 하든 간에 이 일이 결코 나를 구원하지 못하고 생명주지 못하고 나를 의롭게 하는 게 아니고 반대로 내가 왜 꼭 죽어야 될 지금 죽어도 마땅한 인간인 것을 드러내는 그 업무로 주께서 주신 거에요. 물론 땅 투기도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이 기존의 자기 존재가 마땅히 존재해야 된다는 것을 근거로 한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런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는 주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지요. 같은 인간 말을 사용하는데. 그 인간의 모든 말 속에는 인간은 존재해야 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키는데 그걸 반대로 죽어 마땅함으로 내용을 채워서 대화를 하니까 똑같은 단어인데 단어가 먹히지를 않는 거에요. 대화가 안되는 거에요.
말씀이 그 사람 속에 없으니까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들이 예수님 추방시킬려고 하지요. 결국 죽일 수밖에 없게 한다 이 말이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세리와 창기들은 뭐냐 하면은 주위에서 아이고 너 빨리 제발 안 죽냐? 라고 아주 악을 쓰는 사람들 그런 사람의 예를 들은 거에요.
사람들은 뭐 종교가 뭡니까 라고 묻잖아요. 그럼 사람들은 나는 종교가 없습니다. 옛날에 교회 다녔는데. 시시해서 안 다닙니다 이러잖아요. 사람들은 자기 종교를 버린 적이 없어요. 그 종교가 뭐냐 하면은 자신의 과거를 믿습니다. 이 종교에서 벗어난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자기 과거를 믿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자기 추억을 믿어요. 믿는 게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악착같이 힘들어도 인생을 사는 거에요. 왜?
자기가 살아온 과거가 너무 아까워서. 그게 너무 아까워서. 이제껏 산다고 얼마나 용을 썼습니까. 낑낑 거리면서. 15층 벽을 기어올랐는데 지금 떨어져버리면 15층이 완전히 무효가 되잖아요. 그럼 자기가 자기 불쌍해서 못 살아요. 그게 우울증이라고 하는 거에요. 자기가 자기 불쌍해서 못 살아요.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이 아까워서라도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악착같이 12층 올라가고 13층 더 올라가는데 중요한 것은 어렵지요.
자기를 믿는 유명한 노래가 있는데 그 가사를 한번 보겠습니다. ‘지난날에 내 모든 문제들이 저 멀리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 그랬듯이 여기 머물려하는 것 같이 오 나는 지난날을 믿었는데.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지난날에 내 모든 문제들이 저 멀리 있는 것 같았는데. Oh I believe in yesterday. 나는 지난날을 믿었는데. Suddenly 갑자기. I'm not half the man I used to be 나는 예전에 반도 안 되는 그런 졸장부같은 느낌이 들었다. There's a shadow hanging over me. 내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고. Oh yesterday came suddenly 지난날이 갑자기 떠올랐어. Why she had to go 왜 그녀는 갑자기 떠나려 했던가. I don't know she wouldn't say 모르겠어 그녀가 왜 말도 해주지 않았어. I said something wrong now I long for yesterday 이제 지난날이 그리워져’
내 지난날이 계속 그리워지는 거에요. 자기가 믿는 종교가 있어요. 지난날. Yesterday. 인간의 지난날. 그거만 믿어요. 교회 다녔어요? 아니죠. 지난 날 다닌 교회죠. 충성했던 젊을 때 성가대 봉사하고 주일학교 봉사했던 그 지난날이죠. 청년부하면서 서로서로 죽자 살자 새벽부터 봉사했던 그 지난날. 그 괜찮았던 교회에 열심이었던 그 나를 신봉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난날을 인간에게 그 지난날이 결코 올수 없는 주님만의 시간 원 투 쓰리가 있습니다. 그게 어디냐?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창조한다. 그 공간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지금부터 예루살렘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13장 본문 한번 봅시다. 13장 33절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오늘, 어제 1,2,3에서 완성이 됩니다. 1,2,3 인데 3의 시간을 완성하는 장소가 나와있어요. 예루살렘. 그 장소에서 일어난 일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일이 뭡니까? 죽는 것. 예수님의 죽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이름은 죽은 이름이다. 죽은 이름이란 유령이다 이 말이죠. 죽은 이름은 죽은 얼굴이기 때문에. 왜냐하면 갈수록 늙어가니까. 죽은 얼굴이에요. 하얗게 창백해지는 얼굴들을 돌 지난 애도 갖고 있어요. 그 안에 잠복되어있어요.
지금까지 여러분 강의 들으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종교라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종교라는 것 안 됩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인간이 가능한 거거든요. 인간이 가능한 것 하나님 나라에 안 받습니다. 인간이 가능하니까 하고 가능하니까 예배드리고 순서 정하고 하잖아요. 인간이 가능한 것은 안 받습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한 것은 인간의 자기 존재 의미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안돼요. 어떻게 하면 살아볼까 해서 교회 다니는 겁니다. 우리 가정 박살내볼까 해서 교회 다니는 것 없어요. 어떻게 해서든 교회 가서 우리 가정 하나는 내가 가장의 이름으로 살려보자. 기도해서라도 빡쎄게 기도해서라도 우리 애는 간암에서 낫게 해보자 뭐 이런 거요. 살려고 교회 가잖아요. 살려고. 그게 종교라는 거에요. 그게 유대교고요. 그 열심이 사두개인과 서기관과 바리새인이고요.
그들의 마음 속에는 뭐가 없다? 주의 말씀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종교 해놓고 하는 말이 제가 주를 위해서 뭘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나 너 모르겠다. 나 너 모르겠다. 주님은 자기가 아는 사람만 알아요. 그 외에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내 말이 꽂힌 사람만 자기 사람이에요. 말씀이 없는데 주의 사람이라고 우겨봤자 주님에게는 통하지를 않습니다. 너는 너 사람이겠지 너 사람. 내 사람이 아니고 너 사람이겠지.
자,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1,2,3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이 죽은 얼굴 이 세 가지를 결합시켜보겠습니다. 이 결합시킨 게 어디냐 하면은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1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예수님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이에요. 그런데 동방박사가 어디에 도착했습니까? 베들레헴에 바로 직통하도록 별들이 이동하지 않았어요. 무빙스타가 베들레헴에 오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사라졌어요? 예루살렘에서 사라졌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곱게 태어나서 곱게 사시다가 곱게 돌아가시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예루살렘에 있는 인사 그와 예수님께 말씀을 두고 분쟁이 일어나줘야 됩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 기억하십니까? 예수님 오실 때 층이 있는데 기성세대의 권력층 또는 지배층이죠. 층이 무슨 층이냐? 지배층이죠. 어떤 인간도 기성세대 권력층을 뚫고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도. 세례 요한이 잔소리 해가지고 목 잘려 죽었잖아요. 이런 거 한번 생각해보세요.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에게 한 소리를 했는데 그걸 보고 헤롯이 감동해가지고 세례 요한보고 “야 네가 정말 선지자구나 나와 같이 손잡고 이 유대나라를 네가 시킨 대로 할 테니까 멋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보세.” 이렇게 하게 되면 세례 요한은 소리가 아니에요.
하나의 뭐가 되느냐?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소리든 메시아든 간에 인간 세계 자체가 이미 주께서 버린 세계, 지옥이라는 사실을 알려줘야 돼요. 그런데 세례 요한도 물론 소리로서 알려줬잖아요. 튕겨나가니까 죽음으로서. 그 다음에 오실 분도 예수님도 이 세상 권력이 하나님을 죽이는 그런 세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거에요. 그 다음 차례는 오늘 우리 성도 차례죠, 성도들이 그 일을 하도록 주께서 부추겨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본문이 어려운 것은 왜 별이 멈췄느냐 하는 거에요. 바로 가면 되는데, 뭐 네비게이션 고장 났어요? 네비게이션이 그만 고장 나가지고 예루살렘에 왔는데 베들레헴에서 작동을 안 하네, 별 네비게이션이. 어쩔 수 없이 누굴 만날 수밖에 없는가? 그 당시의 권력층을, 권력층이 있잖아요. 요 밑에 태어났는데, 이걸 피해서 올 수가 없어요, 동방박사도. 동방박사도 그렇고 세례 요한도 그렇고 선지자도 구약 성도들도 이걸 피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게 두꺼운 층이거든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게 자력으로 떠날 수 없게 꽉 만들어놓은 그 단단한 층이기 때문에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빈 틈이 없어요.
그래서 이 층이 헤롯이에요 헤롯. 그 때 헤롯 대왕. 헤롯 대왕도 마찬가지고. 헤롯 대왕은 하는 일이 있었어요. 뭐냐 하면은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 아이들 다 죽였습니다. 애는 다 죽였어요. 뭐 뒤에서 떠밀려서 죽은 거 아니에요 이태원에서. 그냥 인위적으로 다 죽였어요. 세월호 물에 빠져서 죽은 게 아닙니다. 그냥 죽였어요 그냥.
그러니까 헤롯이 그냥 죽이면 죽을 수 있는 백성들이 있다는 말은 이 백성들은 살아있으나 산 목숨이 아니고 언제든지 명령만 하면 죽으면 죽을 목숨인 거에요. 푸틴에게 있는 러시아의 20세 이상의 남성들 그 산 목숨들입니까? 지금 살아있죠? 근데 전쟁 동원령 내려가지고 와버리면 뭐가 되느냐, 총알받이 되죠? 총알받이 안 가겠다고 요트 타고 빠져나와 우리나라 포항에 오면 살려줍니까? 안 받아줘요.
이 세상에 어떤 나라도 여권 없이 하면 안 받아줘요. 혼자 나 어느 나라 살래, 내 마음대로 정한다? 내 마음대로라는 게 이 세상엔 없어요. 형성되어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가 없어요. 정확하게 말해서 돈 있어야 약간은 선택권이 있어요. 돈이 없는 자는 선택권도 없어요. 이 세상에 무슨 자유의지, 자유의지라는 게 없어요. 자유의지 있으면 골치 아파요. 외로워요.
하필이면 동방박사를 좀 살리지 동방박사가 여기 내부로 들어옵니다. 딱 들어오니까 헤롯이랑 딱 마주치지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메시아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메시아가 태어났어? 어디서 태어났나 물어보니까 베들레헴이에요. 베들레헴. 그렇다면 거쳤지요. 거치고 난 뒤에 다시 별이 떠올랐어요.
뭔가 중간에 별의 이동경로에서 끊어진 지점이 있어요. 끊어진 지점.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경배했습니다. 동방박사 몇 명인지 안 나와있지만 보통 세 명이라고 하면 왔습니다. 왔을 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뭐냐 하면은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봤던 동방박사를 이제는 더 이상 헤롯의 권력층에 하지 않고 딴 길로 빼돌립니다. 딴 길로. 딴 길로 빼돌리죠.
자, 왜 빼돌립니까? 동방박사는 몰랐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뭡니까? 동방박사를 누가 죽인다? 헤롯이 동방박사를 죽일려고 했지요. 그러면 동방박사는 부활한 사람이에요.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 권력 자체가 함께 동반해서 이미 죽은 공동묘지에요. 이거는 하나의 무덤 속에 같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지금. 무덤 속에서. 예수님의 무덤은 무슨 무덤입니까?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에요. 지금 우리는 살아도 무덤이고 죽어도 무덤이고 함께 있어요. 빠져 나갈 생각도 없고 빠져 나갈 마음도 없어요.
왜? 고3이기 때문에. 일단은 국제학교 가보고 고3 대학은 보내고 죽어야지. 아직 딸이 결혼을 안했어 35살인데. 이러면서 우리는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우리는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천국이 더 좋다는 것. 죽기 싫어요. 천국이 좋아도 아직은 죽기 싫어요. 아직 크루즈여행을 안 해봤어. 그거 하고 죽을래 이런다고요. 돈 이거 쓰고 죽어야지. 손주 보고 죽어야지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 의식 자체가 어떤 의식과 다르냐 하면 동방박사 의식하고 달라요. 우리는 적응하자는 거에요. 우리가 탈출할 수 없으면 굴복해서 최선을 다하여 약간은 양보를 하더라도 숨만 쉬면 그나마도 행복은 그 안에서 소박한 행복은 챙길 수 있다고 우리는 자꾸 변명하고 있는 거에요. 왜? 존재가 우리를 안 놔주기 때문에. 그리고 그 존재가 내가 의롭기 때문에. 나의 의가 나를 안 놔줘요. 우리는 죄인 되기 싫어요. 죽는다는 것은 망해도 싸다는 뜻이거든요. 그런 대우를 평가를 받기 싫어요. 왜 내가 뭘 잘못해서 지금 내가 망해야 돼. 우리는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는 하나님의 의해서 죽었는데 살았어요. 뭐를 알았기 때문에? 아기 예수를 봤기 때문에. 누가복음 2장에 시므온이라는 선지자가 아기 예수보고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그런 것 좀 액자 좀 해놓으면 좋아요. “이제 종을 편안히 놔주시는군요” 이제 종을. 예수님을 봤다는 것은 이 죽음에서 벗어난 생명과 연계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아기 예수님을 봤다는 건. 그 근거를 위해서 이제는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어디로 가느냐?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는 겁니다.
카운트가 1,2,3 가 돼요. 오늘, 내일, 그 다음날. 지금 3일 후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3 밖에 몰라요. 오늘 해도 예수님은 하나, 둘, 셋. 내일 되도 하나, 둘, 셋. 죽는 그 날 되도 하나, 둘, 셋. 1,2,3. 3이 되면 1,2 가 다 무효가 되면서 3일에 완성하거든요.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삼일 만에 완성하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의 시간은 뭐냐? 주님의 자신의 죽음과 자신의 부활 사이의 이 시간, 시간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시간을 새롭게 이 존재의 세계에 집어넣은 거에요.
이 시간을 어디다 집어넣는가? 구원 받아야 될 자기 택한 백성의 시간으로 교체해서 집어넣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시간은 타인의 시간이에요. 남자가 30 되기 전까지는 네가 취직은 해야 된다. 이거 타인의 시간.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지인들의 아는 일가친척들의 욕망이 거기 담겨있어요. 그러나 1,2,3. 제발 죽여줘 그리고 제발 3일 만에 살아다오. 왜? 내가 확정된 내가 이 땅에 꼭 필요한 시간의 간격을 주님이 친히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시간을 적용시키면 뭐가 나오느냐? 지옥 갈 인간들 시간도 자기들 시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지옥 갈 때 1,2,3 지옥 갑니다. 갇혀있는 시간이에요. 1-3까지 갇혀 있는 그때 잠시 잠깐 그들은 세상 낙을 누리지만 주님 십자가 죽게 되면 그걸로 그들은 몽땅 그들의 이름은 이미 죽은 시체에 붙인 이름으로 완전히 까발려져버립니다. 그렇게 돼요.
그러니까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들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으로만 작용합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말씀들만 해요.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은 모릅니다. 그냥 열심을 다할 뿐이지. 그들은 아는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 중에서 딱 하나 아는 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나옵니다. 베드로겠습니까? 누구겠습니까?
13장 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여기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사탄이 들어 있죠. 그러면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이 지시를 내리지요. 지시를 내린다는 말은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게 아니고 안에 들어있는 누구 보고? 사탄 보고 지시를 내리는 거에요. 악마도 예수님의 부리는 영이에요. 악마도.
구약에 사탄이 여러 번 나오지요. 욥기 1장에도 나오잖아요. 스가랴 4장인가 거기도 나오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꼴 보기 싫어! 사탄아 저리 가! 이랬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악마한테 의도적으로 말을 걸었습니까? 어땠습니까? 의도적으로 말을 걸었지요. “악마야 네가 세상에 나가보니까 욥 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더냐?”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요즘 월드컵 식으로 이야기하면 “악마야 너 가가지고 메시 만한 선수 있더냐?” 하고 똑같은 거에요. 그러니까 인정하지요. “없었습니다. 인간들 가운데 없었습니다.”
악마가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의 가진 것을 뺏으면 그가 하나님에게 원망하고 믿음이 없어질 겁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 때문에 생긴 믿음입니다 라고 악마가 이야기하지요. 악마의 거짓말입니다. 그건 악마가 의도적으로 거짓말한 거에요. 악마가 왜 그런 거짓말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을 속이기 위해서 거짓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안 속는 거 알아요. 하나님 외 모든 인간들 속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에요.
그 속임수 때문에 인간은 뭔가 가질 때 다시 뭐로 돌아오느냐. 뭔가 소유가 있을 때는 ‘나’가 붙어요. ‘내 것’이라고 여겨요. 뭔가 소유가 있을 때는. 집이 한 4채 있고 자동차 5대 있고 토지 있고 수입 많을 때 성령 받아버리면 뭡니까? ‘이거 다 주의 것이야 내 것 아니야. 나는 그냥 사용하는 사람이고 하나의 일꾼이야.’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런데 거기서 악마가 벤츠 두 대를 보태주네. 저 벤츠 두 대는 내 것이지.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단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우리 죄를 다룰 때 성도를 다룰 때 매일같이 더 주고 후딱 죄인의 자리에 오라고 더 줘버려요. 자꾸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후딱후딱 다시 옛날 이거 내꺼야 나 신앙 좋으니까 주신거야 나 기도 응답받아서 주신거야 라고 다시 그 소유와 나를 결탁시키는 죄를 죄인으로 다시 자리를 옮기게 만들어요 주께서.
마귀가 그 일을 잘해요. 시험 들게 만들죠. 해놓고 주께서 다시 작용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도 본인을 본인의 정신 상태와 신앙을 본인이 지킬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어제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일은 하나님이 했는데 네가 왜 책임져? 일은 하나님이 벌려놨는데 네가 왜 책임질려고 하느냐. 왜 네가. 내가 들어가잖아요 내가. 아 이번 일은 내가 실수했어. 아니 네가 실수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을 일으킨 거에요.
그런데 인간의 육신의 본심은 본인이 그 일을 수습해가지고 신앙인답게 살려고 하는 거에요. 그게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에요. 마귀가. 그래서 욥도 그러잖아요 욥도. 나중에 친구들 얼마나 꾸중하는지요. 1,2,3 라는 말은 이 시간은 인간이 아는 그런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은 방향성을 갖고 있어요. 어떤 방향성? 우리는 죽어 마땅하고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쪽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가고 있다는 거에요. 왜 그래야 돼요? 주님마저 이 땅에 와서 살아가신 경로가 바로 그 경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사람이 화가 날 때 언제 화가 나던가요? 내 것임을 확인시킬 때 화가 나요. 무슨 일 하다가 모르고 열심히 일한다 합시다. 그런데 보니까 어떤 사람이 이거 주인 없다고 그냥 가져갈 때 그때 내거야 라고 하지 않고 내꺼야!!! 라고 하지요. 화를 내지요. 내꺼야 내꺼야 화를 내지요. 평소에 내 것인지 네 것인지 모르고 다른 일에 몰두하다가 뭔가 건드리면 제일 먼저 하는데 저것이 내거냐 네거냐 먼저 따지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이게 인간의 의거든요. 내가 잘났느냐 못났느냐 따지는 이유가 내가 잘났으면 더 살 가치가 있다고 자부하고 못났으면 반성해서라도 살라고 이야기할 거고 우리의 잠복되어있는 우리의 육신의 본심들이 그런 거에요. 그러니까 이것이 신앙생활해서 제대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제자들하고 똑같아요.
그러나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가룟 유다로 하여금 사탄이 들어있는 가룟 유다에게 너 할 일을 해라 했어요. 네 할 일을 하라고 했잖아요. 할 때 이것이 뭐냐 하면은 여기에 12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가 한 제자지요. 한 제자의 중심에 12제자가 다 휘말리게 되어있습니다. 11제자가 너 가룟 유다 너 그렇게 주님 팔아먹으면 안되지 라는 말 안했어요. 왜? 기존정치세력과 가룟 유다가 결탁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룟 유다의 하는 일에 대해서 다른 제자들이 반대 못한다는 것은 인간들은 기성세계의 지배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기성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이들이 주동해서 예수님을 죽였다면 나머지야 말할 것도 못되죠.
자, 헤롯 이야기 계속 해보겠습니다. 헤롯이 동방박사 죽일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헤롯대왕이 죽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분봉왕으로 있습니다. 갈릴리 분봉왕으로. 예루살렘은 그때는 다른 사람들 없었어요. 그냥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있었고 가이사랴 빌립보 저쪽에는 빌립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헤롯에 대해서 또 한 사람 더 있지요. 어쨌든 간에 갈릴리 분봉왕으로 있는 헤롯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뭐냐. 여우라고 하는 그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이게 결합되는데 어떻게 결합되느냐 하면은 예루살렘에서 선지자와 결합돼야 하는데, 예루살렘을 누가 쥐고 있는가? 헤롯이 쥐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예루살렘을 그 당시 헤롯이 쥐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악한 여우같은 것이 권세를 갖고 있으면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거에요. 그 인간의 권력을 갖고 있는 그것들이 모든 인간들을 장악하고 있어서 그 다음에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과 만남에서 그들이 죄를 극한으로 다 보여줘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 내력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 누구도 나를 벌할 수 없다 이게 뭐냐 하면은 나의 의입니다. 나의 의. 그 누구도 나를 벌할 수 없다. 여러분 벌 받을 때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럽니까? 아니지요. 네가 뭔데 벌해? 하지만 네가 힘이 세니까 내가 어쩔 수 없이 받는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멀쩡하게 집에 있는 청년들 군에서 오라. 어디 놀러 갑니까? 김밥 싸들고. 머리 깎고 오라. 놀러가는데 무슨 머리를 깍아요.
하지만 거기에 거역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뭐가 없기 때문에? 힘이 없기 때문이죠. 느그 아브지 뭐하시노? 우리 아브지 육군대장인데요. 그럼 좋은데 빼줄게 이러면 몰라도 아무 빽도 뭐도 없는 인간들은 어떻게 됩니까? 굴복하지요. 굴복할 때 뭘 느끼느냐 하면은 그 가정단위의 자괴감을 느끼는 겁니다.
특히 집에서 오냐오냐 키워가지고 하나하나 다 해줬던 그 애가 군에 갔다 할 때 본인이 너무 실망스러워서 갑자기 군에 가기 전에 친구 모아놓고 마지막 파티 연다고 술을 엄청 먹고 온갖 탈선을 다하지요. 마지막 그 잔을 들어라 건배! 나훈아 노래 그런 게 있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이등병 열차타고 저 언덕 넘어 우리 집 보일까 처량하게 이등병 편지 하지요. 이등병 편지가 아주 신나는 노래입니까? 즐거운 노래입니까? 내 이 한 몸 국가에 충성해서 아주 기쁩니다 이런 노래입니까? 이래서 내 청춘은 여기서 끝나는구나. 아이고 딸로 태어나지 이게 무슨 짓이고. 딸로 태어나는 건데. 이게 뭐에요? 자기 인생을 스스로 슬픔을 보고 자기 인생의 약점을 본다고요 자기가.
이게 뭐냐? 군에는 끌려가는 것이고요 어쩔 수 없는 거에요. 모병제 하지 말고 차라리 자기는 취직하는 군대 회사 만들어가지고 500만원 주고 가라고 하면 전부 다 갈 사람들 갈 거에요. 미국처럼. 나라에서 주는 혜택 많고. 그러나 강제는 어쩔 수 없는 거에요. 어쩔 수 없는 것. 이것은 뭐냐 하면은 내 의가 이 세상에 먹히지 않는다. 절대 조커 같은, 에서 같은 그러한 기능을 못한다. 내 의가.
그러면 군에 갔다 오면 철 들죠. 뭘 하느냐? 타인에게 양보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권력의 맛에 알아서 힘 쎈 자에게 고개 숙일 줄 아는 사람. 철이 많이 들어서. 철 든 사람. 회사 가면 고분고분 할 줄 알고 그러면 뭘 포기입니까? 자기 의 포기입니까? 자기 의를 가지되 협상하고 타협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면 best doing,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을 의라고 쳐주세요 이런 겁니다. 그러나 율법에 그런 게 됩니까? 안됩니까?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알면 어디 간다 했어요? 지옥 갑니다. 오른손이 한 걸 왼손이 알면 지옥가요. 일점 일획이라도 다 지키지 아니하면 다 색출해가지고 지옥 보냅니다. 구원? 남의 이야기에요. 뭐가 있는 한? 남의 이야기입니까? 자기 의가 있는 한, 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이 뭐에요? 너희들에게는 일체 너의 의가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게 1,2,3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
그 십자가에서 옆에 달린 세 명 중에서, 유일하게 구원받은 사람 누굽니까? 강도. 강도잖아요. 강도가 지금 뭐하는 중입니까? 십자가 죽을 때 뭐했죠? 안에서부터 예수님 보고 무슨 공부하고 있었습니까? 어떻게 했어요? 실습도 그런 쌩 절실한 실습이, 성한 실습이에요. 성경 보고 이렇게 적는 게 아니에요. “자 한 팔 이리 대고, 한 팔 여기 붙여야지” ‘나는 강도다. 나는 이정재다’ 이거 있잖아요, 종로3가에서 옛날에, 나는 깡패다 죽어 마땅하다 그런 거 있었어요. 5.16 때. 참 옛날 이야기입니다. 진짜 종로 바닥에 이름 써가지고 다녔어요. 해놓고 사형시켰어요. 국민 뉴우스 보세요.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은 거기에 예수님 십자가 보지 말고, 강도의 십자가 보세요. 그 강도가 우리에요. 우리가 죽어 마땅한데 그 강도가 구원받은 것은 바로 예수님과 통하는 게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거에요. 예수님 사건의 일환으로 참여된 조건하에 구원받은 겁니다. 예수님은 의인이고 철천지 원수는 누굽니까? 그 강도고. 죄인과 의인의 하나의 커플, 짝을 이루어서 거기서 다 이루었다가 성립된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제물이고 우리는 그 대신해서 죽어야 될 죄 많은 제물. 항상 그 자리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후딱 오게 만들어요. 후딱 오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일에 종사하던지 우리의 기능은 뭐여야 됩니까? 내 죄를, 내가 죄를 아는 기회로 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이 땅에 다양한 직장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계속 봅시다. 누가복음 13장 한번 봅시다. 34절 봅시다. 오늘 마지막 부분 다 하겠습니다. 13장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그 다음에 뭡니까? “죽이고”
예루살렘은 인간에게는 어떤 것도 날 때리지 마세요 라고 우길 자격자는 한 명도 없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루살렘 사건은. 어떤 인간도 ‘난 안 맞아야돼요 날 때리면 안되죠’ 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태원에 깔려죽든지 어떻게 죽든지 간에 그거는 하나님께 원망하면 안 되겠죠. 유령은 이미 죽은 거니까, 우리는 이미 죽은 자잖아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잖아요. 유령이 자기를 내세우면 안 되죠.
그러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이제부터는 우리의 의를 내세우지 않겠습니다.’ ‘누가요?’ ‘내가요.’ 또 내가 또 들어간다고요. 나는 내 의를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들어가면 다시 한번, 주께서 대기 상태라는 거에요. 이거 또 맞아야 돼. 자꾸 내가 들어가는 거에요. 내가. 주와 함께 주님과 함께 있는 겁니다.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그 점은 유투브 강의에 했으니까요. 유투브 강의의 제목이 뭡니까? 두 번째는 ‘그릇’이고 첫 번째는 ‘존재의 뒤편’이죠. 그걸 한번 보시면 거기 나옵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자, 여기서 마지막으로 어려운 단어 하나 나왔습니다. 시간에 대한 분사 ‘~~까지’ 이거는 아무리 설명해도 그게 더 어려운거 같애. ~~까지. 현재 분사가 나와요. 현재 분사하고 과거가 다르다고 했죠. 다시 말씀 드리면 과거라 하는 것은 옛날에 이런 게 있었었다. 이게 과거고요. 옛날에 이렇게 했던 것이 지금 여기 있네? 요거는 현재 분사형. 현재 분사.
주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을 주님의 현재 분사로, 주님의 지체로서 현재 분사로 사랑하는 거에요. 나는 이러한 죄를 지었고 내 의로 인하여 주님 대신 돌아가셨다 라고 이야기하는 네가 여기 있네? 라고 해주는 거에요. 끊임없이. ‘~~까지’라고 하는 것은 ‘떼내지 않으마’ 이런 뜻이에요. ‘너를 떼내지 않으마. 같이 데리고 갈께.’라는 것.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자, 여기서 ‘주의 이름’이 오세요. 주의 이름 앞에서 주의 이름 앞에서 주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죽은 이름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만약에 주의 이름이 살아 있다면 주의 이름을 죽였던 모든 이름은 무슨 이름이냐? 죽은 이름이 되요. 죽은 이름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기 이름으로 구원받는 경우는 없어요. 내 의로 구원받는 경우도 없고 내 열심히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경우는 없고, 내 이름으로 행했던 거 있잖아요. 내 이름으로. 너 말고 내 이름, 너 헌금 말고 내가 드린 헌금, 네 기도 말고 내가 한 기도, 그런 기도는 없습니다.
모든 기도는 뭐냐 하면은 무슨 기도? 주의 이름이죠. 그러면 전에 성령이 와서 기도했잖아요. 그러면 주의 이름이 성령으로 기도케 했다는 말은 성령으로 했던 기도, 성도를 언제까지 주의 오실 때까지 떼내버리지 않고 현재분사로 이끄신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35절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해” 라는 말을 이걸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불신자죠.
왜? 35절의 말씀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근데 성령이 와서 13장 35절을 우리에게 쏙 집어넣어버리면 그 사람은 주어진 성령 때문에 주의 말씀 때문에 누가복음 35절 그 말씀이 계속 우리 안에서 유효한 거에요. 내 속에 그동안 내가 의식하는 타인들이 있는 게 아니고 내 속에 주님의 이름이 나의 타인으로 타인 자리에 쑥 들어와버리면, 나는 그분에 의해서 인도받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합류할 수 있는 주의 이름의 사람이 되는 거에요. 주의 이름으로. 그러면 십자가 강도는 강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에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까? 문제 너무 쉽죠?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끝으로 성경 한 구절 하고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17-19절, 제가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자, 묻습니다. 주기 전까지는 알았어요? 몰랐어요? 모릅니다. 줬습니다. 줬어요. 우리 속에 없는 것을 주신 거에요.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자, 성령이 오지 않으면 우리의 눈은 어둡습니다. 밝질 못해요.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아까 말한 ‘~~까지’죠.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여기에 풍성이라는 단어 나오죠. 풍성합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해요. 예상 밖으로 풍성해요.
19절 “그의 힘의” 그 다음에 뭡니까? “강력함으로” 그 다음에 “역사하심, 일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함이라”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주의 의, 나의 의 말고 내가 꼬불쳐놓은 나의 의 말고 그딴 거 말고 주의 의가 와버리면 우리가 이 땅에서 소소한 모든 걱정거리와 고민과 염려, 마음의 갈등과 건강, 여러 가지 우울증 문제 이런 모든 문제가 그 강력한 크심에 의해서 다 묻히는 거에요.
여름철에 골목에 모기약 뿌리잖아요. 보건소에서. 모기약 뿌릴 때 댁의 손자들 어딨습니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웽~ 하고 뿌리면, 기생충이라는 영화에 나오잖아요. 뿌리면 그 뒤에 가가지고 우리 아이들 하나도 안 보이죠. 소소한 모든 문제가 강력한 하나님의 의 안에서 그딴 건 문제거리도 안 되는 것으로 전부 다 이게 안 개 속에, 안개 하니까 또 헤어질 결심 생각 나네. 안개 속에 다 자욱히 묻혀버리는 거에요.
왜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고 화가 납니까? 복음의 능력이 안 오니까 걱정하고 있는 거에요. 그건 문제거리도 아닌데, 아니 유령이 밥 맛 없다고 라면 안 먹고. 유령이 주는 대로 먹으세요. 컵라면이건, 진라면이건. 이 땅에 우리는 16강, 8강 안 되도 괜찮아요. 그 유령들 축구 하는데, 해봐야 우승해봐야 헛되고 헛된 겁니다. 우리 출세해봐야 허무만 찾아와요. 주의 강력함 복음의 강력함, 하나님의 의, 우리 보고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이거는 주님의 의의 타자가 우리의 그동안 내가 남들 눈에 비치는 의롭게 될라고 하는 그것을 대체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믿는 것이 우리의 과거였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소망을 믿게 하시고 다 이루심을 믿게 하시고 주님의 성령께서 주신 복음의 풍성함과 그 강력한 능력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