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4장 2절 (고창병) 221220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4장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 말씀에 그림의 위치를 한번 잡아 보겠습니다. 예수님 계시고 바리새인이 있고요 고창병, 몸이 퉁퉁 붓는 병 고창병, 몸이 붓는 고창병, 수종병이라고 하고요. 그 다음에 그때가 안식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하나 따져보게 되면 바리새인은 그들의 존재가 권력 효과죠. ‘권력 효과’. 똑같은 인간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바리새인이 존재하는 것과 강아지가 존재하는 것과 달라요. 돌멩이와 달라요. 바리새인이 있다는 것은 바리새인이 그 당시의 권력을 꽉 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꽉 쥐고 있으니까 지도층이죠. 바리새인 밑에 고창병. 고창병은 뭐냐 하면은 전적 무능력자. 전적으로 자기가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 어찌할 수 없이 확정된 자. 확정되어 버린 자. 이 고창병이 무능력자죠. 그때가 안식일이다. 그러면 이렇게 따져볼 수 있지요. 바리새인은 권력을 갖고 있으나 전적 무능력자에게는 어떤 변화를 줄 수 없는 자이죠.
권력은 있어요. 그 당시의 권력을 쥐고 있으니까. 권력 있는데 그들이 권력 속에서 고창병든 자가 있으니까 그 권력가지고 그 고창병 걸린 사람에게 뭘 해줄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못해주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은 전적 무능력자가 여기에 권력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권력도 동일하게 무능력한 권력이 되어버려요. 무능력한 권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능력한 권력을 행사하지도 못하면서 그들은 뭘 지키느냐 하면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우기죠. 안식일을 지킨다. 안식일을 지키면 뭐 합니까. 무능력한데. 능력 없는데.
자, 이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는 안식일을 중간에 두고 지키면 옳다. 안 지키면 그르다. 이렇게 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권력으로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 그 문제를 그들은 자신의 기준점으로 쓴 거에요. 안식일을 지켜야 돼. 왜?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그럼 안식일을 안 지키면 그건 옳지 않는 일이 되는 거에요. 잘못된 일이 되어버리죠.
옳다 그르다 기준은 바리새인들이 지니고 있잖아요. 지니면 뭐합니까? 고창병에 아무런 능력이 없는데. 아무런 힘을 못 쓰는데. 그리고 고창병자도 본인이 나을려고 애를 써도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이 전체가 안식일까지 포함해서 안식일 지킨다는 이 사람들 전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무능력자, 무능력한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 나의 어떤 시도가 나에게 전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이 소식이 기쁩니까? 슬픕니까? 이것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은 없어요. 이것보다 더. 내가 바리새인들처럼 안식일을 지켜서 옳다 옳은 게 무슨 소용 있어요? 안식일 지키는데 고창병 하나 못 고치는데 무슨 소용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나한테 착하게 사는 것. 착하게 사는 것도 없지만 착하게 산들 그게 내 인생을 변하게 해줍니까? 안 해주지요. 이게 왜 기쁜 소식되느냐 하면은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미리 땡겨서 알아버리면 이것보다 더 깔끔한 결론이 없잖아요. 이게 최후의 깔끔한 결론이잖아요. 내가 아무리 반듯하게 살고 바르게 산다 노력할지라도 내가 고창병이라면 내가 수종병이라면 뭐 그래서 뭐? 내가 반듯하게 산다고 내 병이 낫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사람들은 왜 이 기쁜 소식을 왜 놓쳐버립니까. 이걸 놓쳐버리니까 아무리 복음 알고 아무리 신앙생활 열심히 해도 그 인생 자체가 새드 무비, 슬픈 영화와 같아요. 늘 슬프고 찌질이고 우울하고 낙담하고. 낙담이라고 하는 것은 기대할 필요도 없는걸 괜히 기대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풀에 넘어진 거에요. 지가 지 풀에. 내가 용을 쓴다고 해서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안식일 율법 지켰잖아요. 그래서 뭐? 율법 지키면 용을 뺍니까? 뭐 됩니까? 율법 지킨다고 우리나라 8강에 들어갔던가요? 월드컵에. 안 들어가지요.
제가 화장실 다녀오다 보니까 학원 애들이 복도에 3층에 까불고 놀아요. 시끄럽게 장난치고 놀더란 말이죠. 쉬는 시간인지. 그런 생각했어요. 그들이 초등학교 학생이 까불고 놀고 재미나게 노래하고, 여러분들 그게 그 나라 의입니까? 그 나라 의에요? 아니지요. 그래서 제가 만약에 “얘! 너희 여기서 좀 까불지 말고 뛰지마.” 이렇게 하면 그러면 아저씨 내가 하는 것이 그릅니까? 내가 틀렸습니까? 옳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에요.
지금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대하면서 무슨 태도를 갖고 있느냐 하면은 내가 안식일을 지키니까 옳다. 안식일을 위반했으니까 그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애들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놉니다. 까불고 뛰고 쉬는 시간에 깔깔 거리고. 그게 그 나라 의입니까? 그 나라 의에요? 아니지요. 그러면 제가 만약 아이한테 “이게 그 나라 의 구하는 게 아니야” 하면 그 애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그러면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내가 안해야 될 행동을 한 겁니까” 라고 되묻겠지요. 되묻겠지요.
바리새인은 율법을 가지고 자기에게 영향력을 행사할려고 하는 거에요. 어떤 쪽으로? 내가 나쁜 나를 괜찮은 나로 그럴싸한 나로 전환시키는 기회로 삼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그게 그들이 뭘 갖고 있다고요? 그런 그들이 뭘 갖고 있다? 권력을 쥐고 있는 거에요.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누가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의견으로 거기 초점이 전부 다 모였다는 거에요. 인간은 그 나라 의를 몰라요.
다만 아는 것은 내가 어느 정도 옳을 수 있는가 생각해요. 그 나라 의가 아니고 내가 어느 정도 옳을 수 있고 어느 정도 내가 나쁜 길에서 빠지지 않고 좋은 길로 나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하면 뭐합니까? 고창병 하나 못 고치는데. 무능력한데요 그게. 고창병을 바리새인들이 못 고친다는 말은 고창병=누구다? 그들이다 이 말입니다. 그들. 오늘날 고창병이고 이 꼴 나지요. 나. 내가 까불고 뛰고 한다고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왜? 고창병자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나에게 어떤 일을 행사해도 그게 나에게 아무 영향력을 주지를 못합니다. 이게 무슨 소식이라고요?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거 모르고 복음 수십 년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이거 깔끔하게 정리해야 돼요. 깔끔하게 정리해야 됩니다. 서로가 다 나는 옳게 살고 싶어 하는 것들의 권력집단에서 고창병, 본인도 못 고치고 남도 못 고치는 고창병 환자가 하나 여기 출몰한 거죠.
출몰하는데 그들은 출몰한 것을 외면하고 기피하고 그들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안식일을 지키는데 달려가지요. 그래서 그들이 무슨 이득 봤습니까? 안식일 지켜서 무슨 이득 봤어요? 그리고 고창병 걸린 이 사람은 또 뭡니까? 이 사람은 남들은 멀쩡한데 자기는 손도 쓸 수 없는 고질병에 걸린 거에요. 그렇다면 고창병 안 걸린 다른 사람들은 자기 옳고 바르게 살고 율법 지키고 바빠가지고 그들에게 뭐가 남느냐 하면은 나는 이렇게 의롭다. 나는 이렇게 의미 있다 이렇게 되지요.
그럼 고창병자는? 고창병자가 자기한테 내세울만한 게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의미 있습니다 내세울만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뭐냐? 나는 이렇게 안식일도 지키고 바르게 살려고 애쓴다. 이게 구원의 기준이냐? 아니면 해볼래도 해볼게 없는 고창병자가 구원의 기준이냐를 주님께서 안식일과 연계해서 묻는 거에요. 안식일과 연계해서. 너희들은 안식일 지키라는 계명이 있다 할지라도 너희들은 고창병과 똑같이 안식일 계명과 연결되지 못하고 끊어진 상태. 단절된 상태. 그저 남들 다 동의하니까 진짜 그게 진짜 의미 있는 줄 아는 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 효과로서 어른 행세하는 바리새인들, 그런 것들만 양산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이점을 헤쳐 나가는데 있어서 이렇게 헤쳐 나가셔야 됩니다. 옳다 나는 그르다. 나는 옳았는가 나는 그른가. 하나님께서는 뭐냐? 죄와 의 또는 의와 죄를 대비시킵니다. 의와 죄. 인간은 의와 죄는 상관없어요. 내가 옳은가 내가 그른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내가 옳은가 그른가를 생각하는 자체가 한 번도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옳지 않게 살고 옳은 쪽으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본 적 없기 때문에 어디에다가 희망을 거느냐 하면은 내가 바르게 살면 바른 사람 되고 나쁘게 살면 나쁜 사람 된다는 생각을 계속 그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 자들이 모여서 인간 세계에 권력이라는 체제가 마련되는 겁니다. 특히 바리새인 유대인 같으면 그 권력에 바탕이 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죠. 말씀대로 살자가 이게 권력을 쥘 수 있는 토대가 되어버렸어요. 바리새인들이 말씀을 지킨다고 자부하고 그 밑에 서열화 되어서 나는 바리새인보다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돈 벌면서 열심을 한다가 쭉 뒤에 줄지어서 줄을 서는 거에요. 바리새인들은 자기는 최고라고 여기고 있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거기에 뭐를 딱 발생시켰습니까? 본인도 왜 이런 병이 걸렸는지를 모르는 사람. 그게 누구죠? 고창병 걸린 사람 딱 집어넣지요. 왜? 다른 사람은 나는 오늘도 착하게 살았어. 그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보람과 이유가 있어요. 왜? 계속 말씀대로 율법대로 살면 안식일 지키면 또 착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나는 여기서 어제도 착했는데 오늘도 착한 일하면 점점 더 착한 게 누적이 되어서 하늘나라가 저만치 가까이 보인다 뭐 이런 식으로 자부를 했던 사람인 반면에 고창병은 지금 자기 몸 하나도 간수 못해요.
그러니까 자기한테 뭘 묻습니까? 오히려 이렇게 질문하죠. 왜 나는 의미가 없습니까? 하나님이여 다 같은 인간인데. 왜 나는 내놓을 수 있는 아무런 의미가 없나요? 나도 저 사람처럼 날마다 성장했다 날마다 진보했다 날마다 더 나아졌다는 그런 바램 저도 해볼 수 있는 그런 기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소망 있을 거잖아요. 절망적이에요 이거는. 같은 인간인데. 절망적이라 이 말이죠.
착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 고창병 걸린 사람보고 얼마나 놀리겠어요. 전생에 얼마나 죄를 지독하게 지었으면 저렇게 병 걸려가지고 바리새인 밑에 고창병 있거든요. 고창병. 우리처럼 안식일 제대로 지키면 저렇게 병은 안 걸리지. 분명히 안식일 위반했을거야. 성경에 나오잖아요. 안식일 위반했을 때 돌로 쳐 죽이라고.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은 항상 옳은 것만 보시고 다 지켜보시니까 안식일을 위반했으니까 분명히 그거는 고창병 걸려도 싼 그런 무슨 범죄 이력이 있을 거야라고 이렇게 비난하면서 스스로 자기들의 잘남을 지금 변호하고 있는 그러한 대상자가 되는 거에요. 빌미가 되는 거에요. 빌미가.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 세계의 일관성입니다. 인간 세계에 통하는 의미의 일관성. 바리새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줬고 그 말씀을 지키고자 애쓰는 만큼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가깝고 반면에 이런 고창병 걸린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에 저주받아서 고창병 걸려서 이 땅에서도 저주받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그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우리가 옳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의 기준이다라고 자부하는 그걸 뭐라고 합니까? 이게 하나의 권력화 되었다. ‘권력화’.
권력은 욕망의 대상입니다. 권력은 이 땅에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삶을 힘 있게 시련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은 권력이에요. 내 욕망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계기. 이게 권력입니다. 너도 나도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람들 어려워도 힘들어도 참고 견디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 권력에서 누락된 사람은 누굽니까? 오늘 본문에서 누구에요? 고창병 걸린 사람.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요. 아이고 지지리 복도 없는 것. 지지리 복도 없지. 나 왜 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고창병 걸린 사람이 구원의 기준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 반전이 일어나죠. 고창병 걸린 사람이 구원받은 자의 표준이라면. 이 권력은 어떻게 됩니까? 이 권력은 한꺼번에 헛것으로 완전히 와르르 다 무너지겠지요. 권력을 추구했는데 누가 와서 권력을 지탱하고 있는 짝대기를 걷어찬다면 그 권력을 추구했던 자가 짝대기 걷어찬 분을 가만 두겠어요? 안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갖고 있는 권력 가지고 그 사람을 죽이겠어요? 어떻게 합니까? 죽일려고 하겠지요. 왜냐하면 자신들의 일관성이 날라가버리니까요.
자, 일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일관성을 찾는 이유가 일관성을 해야 정서적 안전성을 보장 받아요. 안정성.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거든요. 그게 행복이죠 뭐에요. 그게 행복이잖아요. 우리에게 행복을 줬던 그 일관성이 고창병을 빼고 한 일관성이죠. 고창병자를 안 넣어준 일관성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의 기준, 우리가 나는 잘났다 옳았다 이걸 걷어차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그 나라 의에요. 그 나라 의를 이룰려면 우리가 고창병자가 돼야 돼요.
자, 다시 한번 복습해봅시다. 고창병 특징은 뭐냐? 특이점은 뭐냐? 자기가 어떤 노력을 해도 자기의 몸에 변화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줄 수 없다. 자기가 아무리 몸부림 치고 믿음 소망 사랑 별 짓을 다해도 자신의 팔자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것. 왜냐하면 이건 고질병이기 때문에. 사람 손을 댈 수가 없어요. 어지간히 해서 낫는 병 같으면 고창병 걸리지도 않습니다. 고창병 걸린 사람이 등장하지도 않아요. 손을 쓸 수 없어요.
이 인간계 권력 구조가, 권력 구조를 한꺼번에 와해시키는 그런 무능력한 그 스팟, 지점. 무능력한 장소. 그 고창병 있는 그 자리. 아 저 인간만 없으면 내가 기분 좋을 건데. 성경에도 그런 거 있잖아요. 성경에도 있고 춘향전에도 그런 거 나오지요. 자기 생일날 기쁜데 성춘향 보고 기분 확 잡치는. 기분 좋다가도 확 잡쳤잖아요. 성경에도 그런 거 나오지요. 안 나와요? 에스더 5장 9절 “그 날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나”
빼고 싶은 그 요소가 탁 끼어가지고 온전한 쾌락, 온전한 만족을 용납 못하는 요소. 그게 딱 끼어있는 거에요. 전력을 다하여 그 끼어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뺄라고 갖고 있는 권력을 거기에다가 집중 시키겠지요. 그게 누구냐 하면은 그게 바리새인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방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바리새인이라고 했지요. 그게 우리 자신 아닙니까. 우리 자신.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이게 약점이다 뭐 그런 거 없어요? 내가 다른 건 다 좋은데 여기 덧니가 나가지고 그것만 빼면 나 완벽한데 뭐 이런 것 없습니까. 눈엣가시 같은 그런 존재.
인간 세계가요 주님 보시기에 단순히 미흡한 세계가 아니에요. 반대되는 세계입니다. 반대되는 세계. 극도의 고창병자는 인간 자신들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 박혀있는 그 고창병자. 인간 누구도 그 사람의 병을 못 고치게 되어 있는 병이 박혀 있는 그 상태. 인간이 감추고자 해도 노력해도 안 되는 취약점 자리에 고창병이 있지요.
그래서 그 나라 의와 이 나라, 세상과의 단지 틀리다는 게 아니고 반대에요. 반대라는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무심코 추구하는 것과 반대로 가야 뭐가 있다? 거기 천국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총동원 다해요. 그러면 고창병자는 알아요. 어떤 능력을 총동원해도 나는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고창병 입장에서는 이게 절망입니까? 이게 당연한 거에요? 이 질문 중요합니다. 둘 중에 하납니다. 답변해보세요. 이게 절망입니까? 당연한 겁니까? 이게 절망적인 겁니까? 당연한 겁니까? 당연하지요. 그래야 반대가 됩니다.
남들은 자기가 성공 못해서 환장했잖아요. 자기는 내가 나한테 손댈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나는 나한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 못한다 이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면 바로 그것이 뭐냐? 그 나라 의가 되는 거에요. 왜? 그 나라 의는 착한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이 나라와 반대되는 요소가 그 나라 의에요. 그 고창병자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셔서 제대로 안식일이 뭔가 진짜 안식일의 완성이 뭔가를 그들 권력을 쥐고 있는 그 눈앞에서 보여줘요. 눈앞에서.
그래서 이 세상과 틀리다가 아니라 이 세상은 미흡하다가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격분하게 만들었어요. 격분. 격분이 뭡니까? 비슷하게 간다는 뜻이에요? 반대라는 뜻입니까? 반대지요. 이 말은 오늘날 우리 자신이 천국 갈려는 우리 자신이 정작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격분들을 하고 살아왔는지를 우리가 봐야 된다는 거에요. 주께서는 우리를 천국 보내줄려고 하는데 누가 화를 내고 있어요? 내가 화를 내고 있다고요.
화, 분노 왜 생깁니까? 화, 분노는 간단해요. 왜 생기느냐. 나에게 의미를 쥐고 있으니까 생기는 거에요. 나에게 의미를 쥐고 있으니까. 나는 고창병자 아닙니다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거에요. 고창병자가 있는데 “어이~ 고창병자.” 고창병자보고 고창병자 하는데 뭐가 기분 나빠요? 잘 봤네 이러면 끝날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건강한 사람보고 이 고창병자라고 하면 뭐 합니까? 갑자기 벌컥 화를 내겠지요. 왜 화를 냅니까? 나는 무의미하다고 아니라고 평소에 자부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어딜 봐서 무의미해. 나는 얼마나 착하게 산다고 애를 썼는데.
제가 지금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은 반대라는 겁니다. 반대. 아 내가 바르게 살아야 하는데 역시 죄가 많아서 바르게 못 사는구나. 바르게 못 사는 만큼 남아있는 죄에 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해주겠지 이런 반대가 아니에요. 미흡한 거에요. 열심히 살고 모자란 부분은 십자가 피로 채운다. 학교생활 잘하다가 모자란 부분 학원가서 배운다 뭐 이런 거. 지금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그건 바리새인의 겸손입니다 그거는. 열심히 해봐야 우리는 유한한 인간인데 하나님이 자비는 쥐고 있잖아요. 이 정도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다 믿었던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들에게 교훈을 하는 게 아니에요. 격분케 하는 거에요. 격분케. 반대기 때문에 격분하는 거에요. 반대이기 때문에. 그들이 바라보는 장소에 메시아가 온 장소에 주님 오신 게 아니고 반대, 안 올 장소에 예수님께서 거꾸로 치고 들어오신 겁니다. 이 바리새인의 격분은 우리의 격분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누가복음 14장 보면서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고창병을 고쳤다고 하니까 ‘이 교만하기 짝이 없는 바리새인을 주님 잘했습니다!’ 우리가 마치 예수님 편인 줄 알고. 우리는 바리새인과 한 통속인줄도 모르고 ‘예수님 잘 하셨습니다. 나는 영원히 예수님 딸랑딸랑, 예수님 편에 설래.’
그건 뭐냐 하면은 예수 믿는 것이 하나의 내가 예수 믿는 이 행위가 나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할려고 우리가 지금 노리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시도하는 거에요. 그거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내가 손 못 대는 내가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부분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되요. 내가 아무리 교회 다니고 애쓰고 복음 들어도 어떻게 도저히 손댈 수 없는 것이 뭘까? 그것은 바로 내가 나를 인간을 무의미하게 볼 줄 모른다는 겁니다.
‘나는 저주받아 합당합니다’라는 고백을 우리가 못한다는 겁니다. 할 수가 없어요. ‘나는 저주 받아 합당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이 권력이 주는 일관성 속에서 그 속에서 우리는 성공할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세상의 일관성을 이것을 무너지게 했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사람이 되고자 하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자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바르게 살면 하나님 도와주시고 나쁘게 살면 벌 주겠지.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뭔가 자꾸 나한테 가능성 있다고 사고방식, 이게 그 나라 의와 반대되는 사고방식이에요.
지금 제가 한 네 번째 이야기하지만 너무 중요합니다. 내가 하는 시도가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주지를 않습니다. 마치 누구와 같이? 고창병자. 고창병자가 안식일 지킨다고 고창병자가 낫지를 않아요. 고창병자가 고창병 열심히 착한일 한다고 자기 병이 낫지를 않습니다. 그냥 그거는 고창병자의 어떤 시도가 얼마나 많은 시도를 해봤겠어요. 자기 병인데.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남의 일이 아니고 본인 일이거든요. 본인 일이기 때문에 남이 신경 안 쓰고 본인이 얼마나 신경 쓰겠습니까? 팔자 안 고쳐집니다.
팔자 안 고쳐지니까 차라리 어떻게 해요? 아 이대로 끝나는구나. 바로 그 점이에요. 이대로 끝나는구나 자포자기할 때 그 말이 뭐냐? 내가 어떤 시도도 내 인생에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이게 맞구나. 이게 틀린 말이 아니라 맞구나 에요. 나는 무능력하고 무의미한 것이 이게 그냥 겸손하게 하는 소리가 아니고 실제 이야기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주변 사람들 보세요. 난리도 아니지요. 난리도 아니죠. 천당 갈라고 천국 갈라고 난리도 아니지요. 뭘 해서 뭘 해서 했다 난리도 아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안식일 날 고창병자를 고쳐줍니다. 그러면 고창병자가 어떤 변화가 생기는데 어떤 변화가 생기느냐. 나(고창병자)를 주님이 갉아먹는다. 뭐 별 가치도 없는 나니까. 주께서 갉아먹는 거에요.
그럼 갉아먹으면 주님의 뭐냐 하면 주님의 양식. 주님의 음식. 주님의 찹쌀 탕수육. 찍먹할까요? 부먹할까요? 주님 입에 들어가는 주님의 양식이 되어서 주님의 하시는 일에 에너지로 활용되는 겁니다. 주님의 하시는 일에 재료, 소재가 되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 성도라고 합니다. 본인의 자의해서 갉아먹혔어요. 그러면 이런 거 생각해봅시다. 반은 갉아먹혔는데 반은 자의식이 남았다. 예를 들면 사과 먹다가 애벌레 반은 입에 들어왔는데 반은 사과에 박혀있다 이런 경우처럼.
자아가 반은 먹혔는데 반은 남았다 그러면 ‘아 내 자아 반은 어디 갔어? 아깝네’ 라고 생각들겠어요? 안 그러면 마저 먹으시지 이런 생각들겠어요? 어떻겠습니까? 남겨진 만큼 고통스러워요. 왜냐하면 그 자아 가지고 그 나라 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것을 본인이 먼저 알기 때문에. 내가 전도하고 헌금하고 뭘 해도 그 나라 의와 아무 상관없는 거에요. 왜? 내가 하는 시도가 나의 변화의 영향력에 변화를 못 주기 때문에.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예가 어디 나오느냐? 마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예수님이 12제자 뽑지요. 전도 보내지요. 이 대목이 예상 밖으로 무척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은 이미 하나님께 천국 가기로 창세전에 좌석제가 되가지고 이미 정해져있지요. 요한복음 6장 39절 “나는 아버지가 보낸 자만 찾는다” 그러니까 사람이 손들고 천당 가고 싶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데리고 오는 거에요. 자기 사람 찾아오는 거에요. 잃어버린 양을 찾는다 하거든요. 자기 사람을 구분해서 골라 족집게로 골라 데리고 가는 거에요.
골라 데려가는데 전도 왜 합니까? 희한하잖아요. 골라 데려가는데 전도는 왜 해요. 그냥 자기 백성 찾아오면 되지요. 물건 분실물 될 때 자기 잃어버린 가방만 찾아가면 되지 왜 온 분실물 다 뒤집고 왜 그러겠어요. 그렇게 할 이유가 없잖아요. 전도한다는 이것이 의외로 굉장히 어려운 대목이에요. 전도하는 게. 그러면 전도를 왜 하느냐? 참 진짜 이건 너무 중요한데 특별히 여러분을 위해서.
인간은 자기가 최종 도착지점을 보고 즐거워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천국인데 천국 간다면 제가 기뻐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인간들은 그래요. 그러나 주님은 천국 가는 게 아니고 그 중간을 중간 과정을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간 과정을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에서 뭐로 바뀌기 때문에? 중간 과정이. 매순간 나에서 주님의 일로 바뀌기 때문에. 나의 일이 주의 일로 바뀌는 그 채워지는 것이 주께서 가신 그 알고리즘, 그 과정을 그렇게 다시 한번 증거하는 일이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도착지점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로마서 9장3절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너를 위해서 희생하겠다. 중간과정에 이미 합격했기 때문에 어떤 중간 과정이든 나는 뛰어들 용의가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시고, 택하시고 뛰어들어라 이 말이죠. 택하시고 뛰어들은 거에요. 뛰어드는 것은 “내가 몇 명 건졌습니다. 몇 명 건졌습니다 그 귀신이 우리 힘에 떨어졌습니다” 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다.
그거 말고 너희들은 ‘내가 이런 성과를 얻었습니다. 전도 업적을 얻었습니다 자랑하지 말고 너희들은 이미 너희 이름은 이미 하늘나라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그런데 왜 주님께서 그 일을 시키는가. 이 중간과정은 예수님의 자신의 자신이 시킨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라는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요.
주께서 일하셔 구원됐다는 주님은 중간을 강조하고 있고 우리는 이러나 저러나 천당 가면 됐지 뭐. 챙길 거 챙기면 됐지 이게 우리 자아의 타고난 이기심이고 주님께서는 그 중간과정에 네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는 거에요. 내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뛰어들었는데 내 일이 아니고 그 현장에서 나보고 마귀가 물러간 게 아니고 주님 보고 물러가더라. 나는 히마리 없어요. 마귀는 나 같은 거 겁도 안내요.
주님보고 주께서 나에게 손을 빼고 나를 구원하더라 그걸 주께서 구원했다는 그걸 증거하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의 관심사가 최종점에 있는 우리를 그 자아를 주께서 갉아먹어가면서 내가 이렇게 살면 되지가 어디서 바뀌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분이구나. 우리는 무능력한데 일은 일어나요. 그럼 이 능력은 어디서 왔어요? 주의 일이죠.
바로 내 일을 벌려놓고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고 바뀌는 그것. 그게 바로 그 나라 의입니다. ‘그 나라 의’. 그 나라 의를 위해서 매일같이 염려할 것을 줘요. 매일같이. 내일 또 여러분 기다리고 있어요. 내일 염려가 또 기다리고 있어요. 또 생깁니다. 매일같이 염려할 것을 줍니다. 그 염려할 것에 대해서 우리가 마중 나가면 안돼요. 아 염려해야 돼 할 때 마중 나갈 때 주께서 네가 시도하는 것이 어떤 것이라도 이 염려를 제거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그 염려 속에서 다시 한번 주의 일을 발견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결국 결론은 뭐냐 하면은 우리는 누구다? 고창병자. 고창병자가 언제 병이 나앗습니까? 안식일 날 병이 나앗지요. 그럼 안식일을 주신 분이 뭐를 책임집니까? 안식일을 주신 분이 놓치지 않고 안식일을 기어이 완수하지요. 그럼 우리는 뭐냐? 들러리 중에 들러리죠 그냥. 무능력한 아무 의미도 없는데 안식일의 완성에 우리가 참여된 거에요. 최종, 생명책 이름에 기록된 거에요. 우리는 들러리 중에 들러리에요. 그걸 투 들러리.
아무리 봐도 한 게 없어요. 무능력하다는 그거 외에는 내세울게 무능력하고 어떤 착한일해도 복 안 받고요 나쁜 일해도 벌 안 받고요. 벌 안 받는 게 더 무시당하는 거. 걔가 착한일한다고 러시아가 전쟁 그만두지 않잖아요. 우리가 어느 정도로 고창병자냐면 진리는 이미 세상에 완전히 없다를 아는 자가 진리를 아는 자 입니다. 이 세상에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유일하게 진리를 아는 자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일관성에 대해서 안 믿죠. 이 세상의 일관성을 안 믿어요.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안 믿습니다. 이렇게 했더니만 이렇게 결과 나왔다 안 믿습니다. 열심히 했더니 공부 잘한다 안 믿습니다. 세상은 그걸 믿어요. ‘공부 열심히 하니까 성적 오르잖아’ 다음에 더 열심히 하면 성적 오른다 세상은 그 권력에 희망을 겁니다. ‘이게 되네?!’ 그들은 ‘이게 되네?!’ 이렇게 하거든요. 되니까 욕망이 거기 다 쏠리게 되어있어요. 욕망이. 나의 모든 혼신의 노력이 가능성 있는 곳에 다 쏠리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아까 복도에서 까불고 노는 아이들 이야기했지요. 까불고 놀고 뛰고 재미나요. 재미나게 노니까 재밌지요. 재미나가 노는 원인, 결과는 재미나다. 제가 그 아이들에게 뭐라고 묻는다고 했습니까? 그런데 그게 그 나라 의와 무슨 관계있어? 애가 재미나게 놀아서 재밌는 건 맞는데 되게 재밌어요. 월드컵이 되게 재미있거든요. 그런데 그 나라와 의와 무슨 관계있어요? 관계있습니까? 없습니까? 메시가 천당 갑니까? 천국 갑니까? 아니지요. 호날두 못가지요. 그 나라 의와 관계 없지요. 그러면 이건 일관성이 없는 거에요. 결국은.
지금 이거는 고창병자하고 다를 바가 없는 거에요. 이거는. 고창병은 자기 무능성을 알지만 이거는 지금 고창병자인지 모르고 오면서. 진리도 모르면서 그저 뛰고 까불고 잘되는 욕망 우리가 이렇게 하니까 이게 되더라 그 환상에 빠져버린 거에요. 환상에. 빠지니까 그들은 그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니까 예수님 안식일 날 병 고치니까 그들은 뭡니까? 격분한 거에요. 분노와 화가 치밀어 오른 겁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화내지 마세요. 왜냐하면 화 낼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성 낼 가치가 없습니다. 고창병자가 뭐 기대할 게 있어야 기대하지요. 백날 해봐야 그 나라와 의를 들어갈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뭐가 자기 실수에 화납니까. 아! 두 문제 틀렸다고. 두 문제 틀렸다 이번 수능에. 다 맞아봤자 어디 갑니까? 다 맞아 봤자 서울 어디 들어가거든요. 서울 어디 들어가봤자 뭐합니까? 질병대책 뭐. 그거 하면 뭐합니까. 잘됐다고 소고기 사먹고 끝나지 뭐하겠어요.
지, 지금까지 한 것 압축해서 말하면 기준점이 무언가. 도대체 이 세상의 기준점이 뭔가. 율법의 기준점은 뭔가? 정답은 고창병. 희망 없어요. 못 고칩니다. 우리 자신을 고치지 마세요. 우리 자신에게 책임감을 부여하지 마세요. 고창병 가운데서 제일 잘못된 경우가 뭐냐 하면은 자신의 무능력을 본인이 비난하는 것. 이게 최악입니다. 비난한다고 해서 자기가 나아지지 않거든요. 그런데 비난을 왜 해요? 비난은 화내는 거에요.
아까 화를 왜 낸다고 했습니까? 인간은 화를 왜 낸다? 아직 자기한테 의미가 있다고 지금 착각하는 거에요. 그 의미 있다면 또 묻고 싶어요. 그게 그 나라 의입니까? 그 나라 의는 성경에서 예수님 뿐이에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온 것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의로 우리에게 주는 게 복음이에요.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네가 열심히 하는 것과 무엇과 관계없다? 그 나라 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에요. 인간이 열심히 하는 게. 뭐 복음을 공부하고 백날 해봤자 그 나라 의 아니에요. 그 나라 의는 무능력한 자 말고 유일하게 유능한 그 분이 혼자 십자가에 다 준 거에요.
그럼 우리는 그 앞에서 염치 불구하고 우리가 거기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책임하시는 자유를 만끽해주시기 바랍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 자유를 만끽해주세요. 그게 그 나라 의에요. 그게. 안식일을 지켰나? 지켰다. 그거 왜 지켰냐? 주님 와서 그 나라 의를 주면 다 지키는 게 돼요.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로마서 13장 8절에 모든 율법이 있지만 “사랑이” 모든 율법을 이루지요.
그 사랑을 주일 낮 설교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은 찾기. 사랑은 찾아주는 거에요. 찾아주는 거. 여기 있네. 숨바꼭질. 사랑은 찾는 거에요. 숨바꼭질하는 거에요. 애들 숨바꼭질 하면요 엄마가 자기 찾아주잖아요. 그럼 1.아이가 기분 좋다? 2.기분 나쁘다? 몇 번입니까? 기분 되게 좋아해요. 숨기는 지가 숨어놓고 “꺄르르” 하면서 어떻게 찾았지 이러고 있다고요. 그런데 자아성이 강한 큰 애는 “아이씨. 어떻게 찾았지.” 기분 나쁘죠.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4장 2절 (고창병) 221220b-이근호 목사
자,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고창병자를 고쳐주니까 권력을 쥐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날 왜 하지 않아야 될 일을 왜 하느냐 그렇게 이야기했고 예수님께서는 이게 바로 안식일 날 너희들이 다시 말해서 고창병자를 너희들이 못 고쳤잖아. 너희들 안식일 지키는 것이 이게 아무 효과가 없었잖아. 개인적으로 안식일 지키는 것이 고창병을 고치지 못하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은 이렇게 지킨다는 하나의 표준으로 오신거죠. ‘표준’.
그런데 그 표준이 인간이 해낼 수 있는 표준입니까? 불가능한 겁니까? 불가능하죠. 주님이 하신 일이 내 쪽에서 불가능하면 불가능할수록 이게 기쁜 소식이 돼요. 왜? 자기를 점점 제대로 아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아 내가 돈 버는 것은 가능한 것 같은데 그 나라 의하고는 전혀 무관한 일을 하는구나. 내 의미를 채우는 데는 내가 좀 이렇게 보탬이 될 수 있는데 내가 고창병자였고 무의미한 존재라고 깨닫는 일에 지금 내 일이 하등 도움이 안되는 거에요. 점점 교만해지고 잘난 척하게 되고. 갈수록 오히려 분노만 유발시키는 일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 고창병자를 주고난 뒤 그 다음에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그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는 바로 혜택 받은 자를 통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해석하는 자로 등장해요. 혜택 받은 자를 딱 등장시켜 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기존의 인간 세계에서 해석하지 못한 새로운 해석, 새로운 율법 완성의 해석이 드디어 주어지는 겁니다. 그 해석의 핵심은 뭐냐? ‘없는 자가 구원되고 있는 자는 제거된다’ 이 원리. 없는 자가 구원되고 있는 자는 구원되지 못하고 제거가 되는 방법을 쓰는 거에요.
이 점에 대해서 대구 강의에서 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만나할 때 만나는 뭐냐 하면 바로 외부성이다. 대구강의 초반에 나와요. 만나가 어느 공장에서 만듭니까? 인간의 손에서 못 만들지요. 만나는 외부성이에요. 듣도 보도 못한 그걸 듣보잡이라고 하는데. 하여튼 듣도 보도 못한 게 등장하는 거에요. 듣도 보도 못한 것은 없는 거에요. 있다고 자부해서 여기에 의미를 두고 평생을 여기에다가 몰두하는 인간에게는 만나는 듣도 보도 못한 거에요. 외부성이에요.
그 외부성이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 이미 일관된 원칙으로 나와 있습니다. 주님의 일관성이 바리새인의 일관성을 공격하고 있는 거에요. 그걸 무너뜨리고 주님의 일관성이 뭐냐? 여성의 세계. 여성의 세계를 펼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의 세계. 남자의 세계가 날라가고 여자의 세계가 도래하는 거에요. ‘여성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거는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괴테가 파우스트 마지막 그 대목에서 나와요. 독일의 철학가죠.
여성성 또는 여성이 한다 이 말은 이 세상이 가부장적 제도, 남성화된 세계로 굳혔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어요. 뱀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배후에 뱀이 있다는 증거가 이 세상이 여성이 주도하지 않고 남성이 주도하는 세계로 완전히 일반화시켰습니다. 뱀이 배후에 있다는 것. 뱀의 자손을 하나님께서 뱀의 자손의 그 실제성, 실제로 이 세상은 뱀이 지배한다는 그 실제성을 보기 위해서 이 현실에 구체화된 것이 뭐냐? 남성 위주의 세상관이 흐르고 있어요.
그게 창세기 4장에 보면 라멕이라는 사람이 아내 보고 남성의 폭력성을 자랑하는 대목이 나와요. 아까 동영상할 때 그 대목을 했거든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는 둘 다를 알아아죠. 남성성의 세계가 어떤 세계며 그럼 여성성의 세계가 어떤 세계냐? 그 세계에 대해서 함축해서 보여준 도표가 있습니다. 그 도표를 제가 한번 그려볼게요. 자크 라캉이라는 사람이 고안해낸 도표인데
대표 기표의 X, 대표 존재하는 E. 존재한다는 뜻의 Exist 존재하는, 대표 기표의 존재하는, 존재하지 않은 그 누가 있다. 그리고 All, A 거꾸로 한 이게 All인데 All은 모든 X는 대표 기표에 다 종속된다. 이게 뭐냐 하면은 남성이다. 여성은 대표 기표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존재하지 않는 여성은 한명도 없다. 그리고 대표 기표에 모두 속한 것은 아니다. 이런 뜻이에요. S가 타자인데 대타자의 기표를 La, 여성이라는 표기가 이걸 지향하고 이걸 바라보고 있고 또 한쪽은 팰러스, 대표 기표를 바라본다. 이게 여성이 하는 쪽이고 남성의 S, 분열된 남성의 주체는 뭐를 지향하는가? 내 자신의 미흡한 욕망에 소타자의 욕망을 추구한다. 이게 남성의 기능, 여성의 기능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남성은 전체를 항상 주시하는 거에요. 남성은 모든 것을 다 포괄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세상을 누락 없이 전부 다를 전체를 가지는 게 남성의 세계에요. 창세기 3장에서.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거에요.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지배해버리면 여성은 있느냐? 여성은 없어요. 있음을 누가 대신 뺏어가느냐? 남성 있으면 됐다는 거에요. 여성이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여성은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은 없는 거에요. 남성의 보조자만 있죠. 남성의 보조자. 그리고 여자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남성의 이러한 권력 체제에 모조리 다 종속되는 거에요. 모조리 다. 그런데 그 남성 가운데서 딱 하나의 남성만 그 남성 세계에 포함되지 않고 초월해있다 이렇게 보는 거에요. 남성을 대변하는 남성을 다스리는 최고의 남성, 누구겠어요? 하나님 아버지요. 신이죠. 하나님이죠.
여성이 아니라 남성 신이 남성의 세계를 지배하면서 모든 남성들은 그 신에게 전적으로 복종하는 통합된 신의 세계를 체제를 추구하는 겁니다. 그걸 유일한 현실로 보고. 모든 것이 통합되었으니까 여기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뭐가 나오겠어요? 무슨 권력? 남성 권력. 남성 권력이 전부 다에요. 그럼 여성은 어디 있는가? 여성은 있다는 말 하지 말라. 그 집안에 남성 있으면 됐지 여성 있다는 말 할 이유가 없다는 거에요.
있다는 것은 남자한테만 대표해서 있다는 말 해주고 그 집에 강아지가 있든 소가 있든 여자가 있든 전부 다 똑같이 취급하는 거에요. 남자만 있으면 그 집은 제대로 있는 거고 남자가 있음을 다 가져가는 거에요. 있음의 기호 의미를 다 가져가는 거에요. 그래서 옛날에 순장 제도 있잖아요. 왕 죽으면 누구도 같이 죽습니까? 왕비들뿐만 아니라 여자 종들 무덤에다 다 같이 한 100일 쯤 집어넣어서 양식 떨어지면 같이 죽도록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너는 남성에게 예속되고 종속된 팔자이기 때문에 남자 없는 여자는 존재할 수 없어요. 남성의 세계에서. 남자 없으면 그건 살아도 산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구약 성경에 보면 특이하게 누가 등장합니까? 한때 남자가 있었던 여자가 등장해요. 그게 누굽니까? 과부 등장하죠. 이 과부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결혼하기 싫어서 이혼한 그 과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남성을 잘라버린 거에요. 자, 남성의 세계에서 남성이 없으니까 여자는 과부는 어떤 이미지를 보여줘요? 나는 있어도 무슨 존재? 없는 존재. 있어도 없는 존재. 이게 바로 여자의 후손의 계열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거에요.
남성은 힘이에요. 남성이 힘인데 어떤 여자가 과부 되서 남자를 잃어 버렸습니까? 뭘 잃어버린 거에요? 힘을 잃어버린 거에요. 힘을 잃어버리니까 이거는 있어도 없게 되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무시해도 되는 존재가 되겠지요. 그게 바로 남성 세계에서 등장하는 가끔 출몰하는 바로 무능력한 존재. 있어도 있음의 간주해주지 않는 있음을 인정해 주지 않는 대상. 그게 여성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 권력이죠.
권력을 표기할 때는 뭐냐 하면은 언어로 표기를 해요. 말로. 언어로 표기를 하는데 여성은 이 세상에 없는 존재죠. 여성이라는 단어는 누가 만들어냅니까? 남성이 자기 필요에 의해서 다른 말로 해서 자기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단어이기 때문에 여성이 여성을 쟁취하는 여성은 이 땅에 없다 이 말이죠. 남성 없는 세계가 형성돼야 거기서 나오는 언어를 붙여야 되는데 언어 자체가 인류 역사의 전통상 남성 위주의 세계에서 언어를 교환하면서 권력을 주고받거든요. 모든 게.
그래서 여성을 위한 언어는 없어요. 여성에게 지시하고 명령한다는 그것은 네가 남자한테 이렇게 봉사하라는 필요에 따라서만 지시 명령이 주어지는 거에요. 너를 위해서 하라는 게 없고요. 여자가 좀 머리 좀 다듬고 옷 좀 단정히 입어야 될게 아니냐. 남성이 여성답게 하라는 그 여성답다는 그 것은 누굴 위해서 종을 울리는 여성입니까? 남성이 원하고 있는 이미지에 부합하라고 여성에게 그 지시를 명령을 내리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점에 대해서 어떤 여성이 만약에 남자 자기들끼리 놀고 여성은 개무시하냐 이렇게 화를 낸다면 그것은 뭐냐? 여성의 세계가 아니고 이미 남성화된 권력의 맛을 본 가짜 여성, 여자 모습을 지녔지만 속에는 남성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남성화된 여성의 말이기 때문에 역시 권력과 동일한 거에요. 꼭 남성의 세계에요.
여성이 입을 뻥긋해봐야 그거는 남성한테 들은 거고 어릴 때 아버지한테 받은 말을 내뱉는 되돌려주는 식으로 하거든요. 그래서 소통되는 어떤 의미든 어떤 단어든 그건 남성이 유용하기 때문에 활용되는 개념들이에요. 여성을 위한 여성 개념은 애초부터 인류에 없어요. 여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자, 그렇다면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기분 나쁘게 들립니까? 기분 좋게 들립니까? 어떻습니까? 기분 나쁩니까? 기분 좋습니까?
이것은 기분 나쁘고 좋고가 아니라 이것은 신비에 속합니다. 여성은 신비에 속해요. 남성은 전체를 만들지만 여성은 비전체를 만듭니다. 비전체, 전체 아닌 것은 전체의 일부가 아니라는 거에요. 전체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 여성은. 여러분 지금 제 말이 문맥이 맞는지 지금 막 헷갈리지요. 여성이 없다면서? 이렇게 나오겠지요. 여성이라고 있는 것은 남성의 일부로서 있는 것만 여성이라고 남성이 단어를 정하고 너는 남성이 아니고 여성이야. 너는 아들이 아니고 딸이야 라고 남성 세계에서 명명해 주는 거에요. 지명해줄 때 그 주체가 되는 거에요. 지명해줄 때.
A라는 것은 남성 세계가 전체에서 다 꽉 잡고 있어요. 그런데 빠진 게 나와요. 그 빠진 게 A에요. 인간은 남성들은 빠진걸 욕망하는데 이 빠진 게 어느 부분이냐? 여성 쪽에 빠진 게 있어요. 여성 쪽에. 남자는 여성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신비를 원하고 있어요. 그 신비가 여성 요소에요. 이 말은 뭐냐? 남성들이 여성을 원할 때 키는 얼마고 웃을 때 보조개가 있고 뭐 이런걸 원할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점점 더 여성을 탐욕하게 되면 있어도 없는 존재를 남성은 그런 여성을 원해요. 미쳤지요.
제발 이 땅에 어떤 여성과 유사하지 않는 여성이 되어줘. 이걸 원하는 거에요. 왜? 남성의 욕망은 그 정도까지 가버려요. 이게 뭐냐? A입니다. A는 없는 거에요. 있기 때문에 빠져버린 거에요. 있기 때문에 빠진 거에요. 이것저것 다 있는데 키 큰 여자 키 작은 여자 다 있는데 여기 있기 때문에 그걸 원하지 않아요. 여기 있기 때문에 그것 말고 다른 어떤 것. 이 있는 것이 전체거든요. 전체 말고 다른 어떤 것. 비전체. 그걸 원하는 거에요.
이 말은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의 욕망은 채워질 수가 없다는 거에요. 미흡한 거에요. 결함을 느끼는 거에요. 결함을. 결함을 느끼는 만큼 인간은 욕망을 하는데 문제는 본인이 뭘 욕망하는지를 본인이 지금 모르고 욕망한다는 거에요. ‘이걸 한번 해볼까. 저걸 한번 해볼까.’ 그냥 ‘해볼까’지 뭘 욕망하는지를 몰라요. 이게 지금 바리새인들이에요.
가질 것 다 가졌어요. 권력 다 가졌어요. 권력 다 가졌는데 그들이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은 그 다음 차례 내가 뭘 가질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다 이루었다가 되지를 못해요. 다 이루었다를. 어느 누가 다 이루었다를 제시를 해줘야 돼요. 인간들은 현재 있는 것도 의미 있고 거기에다가 추가해서 다 이루었다 하고 싶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현재 있는 것들이 다 이루었다를 적대하고 방해하고 훼방하는 장애요소라는 사실을 주께서 이야기해버려요.
그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그거에요. 오늘 본문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거에요.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말은 뭡니까? 그게 자기 욕망에 부합되거든요. 높은 자리 앉았는데 다 이룬 제일 높은 자리에요. 옛날에 유대인들이 U자로 자리를 했기 때문에 제일 높은 자리 이렇게 이렇게 앉는 식이에요. 서열이.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재벌 총수들 이렇게 앉아버리니까 다른 게 없어요. 다른 게 없으니까 남성들은 미치는 거에요. 왜 다른 게 없어? 내 욕망은 아직도 배고픈데. 왜 다른 게 없어. 골프치고 벤츠타고 다니고 까불고 다 하는데 그 다음 차례에 뭘 욕망해야 될지를 몰라요. 그 다음 차례에.
그게 자꾸 오해하기를 자기가 미흡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왜냐? 지금까지는 괜찮게 살았는데 미흡한 게 아니고 처음부터 place 또는 영역, 공간이 지금 엉뚱한 공간에 가있는 거에요. 본인 자체가 자폐증, 폐쇄된 공간에 있었어요. 폐쇄된 공간. 백날 거기서 까불어봐도 빠져나올 수 없는 폐쇄된 공간. 특혜는 받았는데 혜택은 받았는데 해석이 안 되는 공간.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특혜는 받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해석 문제에 대해서 받은 본인이 해석을 못해요. 주님은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그 해석을 받은 자가 그 해석을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9절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이 점을 인간들은 이점으로 세상을 해석을 못해요. 왜냐 하면은 말석 갈 거 같으면 처음부터 상석에 안보내면 될 거 아니냐 인간의 해석은 그렇게 해석해요. 인간은. 처음부터 말석 갈 거 같으면 처음부터 상석 거칠 필요 없어요. “너는 말석 가” 이러면 되거든요. 야곱에게 복이 올 거 같으면 에서를 나중에 태어나게 하면 문제 아주 깔끔하게 처리됩니다. 먼저 낳은 자에게 복을 주고 차자에게 나중주고 뭐, 그러면 되잖아요.
왜 순서 왜 바꿉니까? 순서 왜 바꿨지요? 왜 나중에 복 받을 자를 두 번째 태어나게 한 이유가 뭐죠? 왜 그렇게 합니까? 아 왜 그렇게 했어요 주님이. 인간이 지금 갇혀있다는 거에요. 어디에? 악마의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말고 여자의 후손 남자의 후손입니까? 아니지요. 여자의 후손 다음에 누구의 후손입니까? 대결 구조가. 뱀의 후손이잖아요. 악마는 인간이 아니에요. 영적 존재잖아요. 영적 존재. 그런데 인간은 인간에서 인간으로서 마감이 돼요. 못 빠져나가요.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그 빠져나가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현재에 갇힌 네가 그 구조에서 해석불가를 주께서 선언해버리는 거에요.
야곱이 둘째가 되가지고 복을 따낼라고 거짓말을 했지요. 그때 야곱이 제대로 하나님의 복을 해석을 했습니까? 복을 해석을 못했습니까? 해석 했어요? 못했어요? 못했어요. 뺏어오면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해서라도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뺏었는데 그게 복이었습니까? 야곱은 뭘 몰랐습니까? 복을 가지는 내가 이게 복을 가져서는 안 되는 자인 것을 몰랐던 겁니다. 그때 이 땅에 없는 요소가 등장하지요. 얍복 강가에.
누가? 야곱은 에서와 상대하는데 있는 존재만 상대했는데 거기 누가 등장하지요? 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등장하지요. 천사가 등장해서 야곱으로 하여금 에서와 상대하지 않고 바깥의 전체가 속한 게 아니라 비전체, 에서도 남자고 야곱도 남자잖아요. 남성의 세계가 아니라 남성의 세계도 아니고 남성 세계에 없는 것. 남성 세계에 속한 여성이 아니고 남성 세계에 없는 여성, 그건 바로 비존재에요. 예수님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해석을 인간이 할 수 있는 해석의 한계를 넘어버립니다.
여러분 아까 한 것 다시 써 볼께요. 팰러스 함수 이거는 뭐냐 하면은 기표 또는 주인. 항상 인간 집단에서는 주인이 있잖아요. 아버지는 날 낳으시고 어머니는 날 기르시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아요. 그 부인들이 낳는 게 아니에요. 대표는 남자가 되는 거에요. 왜냐고 물으시면 창세기 3장 16절 17절. 뱀의 개입에서 일어난 인간 세계에 정리정돈, 그것은 바로 여성을 뒤로 돌리고 남성을 대표로해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됨으로서 여성은 없고 1/2 남자. 남성의 보조역할로 전락시키는 겁니다. 남성의 부분이죠. 남성의 일부로서.
그렇다면 여성은 자기들끼리 남성 치우고 우리끼리 여성의 세계하자 이렇게 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여성을 표기하는 기호도 없는 주제에 그어버리는 거에요. 기호. 여성을 표현하는 기호도 없는 주제에 뭘 추구하느냐? 바로 남성의 기표를 남성의 대타자를 추구하는 거에요. 그리고 뭘 추구하느냐? 남성의 대표 기표의 주인. 주인 기표가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여기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겠어요? 모든 권력이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를 갖고 싶은 이유가 세상에 유동하는 권력에 뛰어드는 방식이 그거에요. 아무리 여자가 돈이 많아도 그럴싸한 남자가 있어줘야 보디가드든 백수든 관계없어요. 있어줘야 이 사회에서 인정을 받게 돼요. 그래서 성경에서 과부라는 게 결함요소가 되어버리는 거에요. 힘이 없는 요소가 되는 거에요. 고아와 과부와 그 다음에 이 땅이 없는 나그네. 땅 이야기 조금만 더 해볼게요. 땅에서 인간이 쫓겨나서 땅을 차지할려고 했어요. 문제는 땅을 차지할 때 그냥 차지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닙니다. 땅의 주인이 따로 있고요 그 주인의 원칙이 맞지 않으면 땅을 점유한다는 그 이유로 땅으로부터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가인 같은 경우에.
그럼 땅의 주인은 누구죠? 약속의 땅에서 땅 주인은 누굽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땅 주인이죠. 땅 주인인데 거기서 우상 섬기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됩니까? 꺼져라! 나가라 해가지고 완전히 땅 없는 나그네 신세처럼 뿔뿔이 다 헤어지고 말았잖아요. 왜? 땅은 그냥 땅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이 살기위한 땅이었단 말이죠. 그 땅에 하나님의 이름을 추구하지 않는 자가 끼어들 때 이거는 뭐냐? 이거는 이질적인 요소지요. 이거는 내쳐야 될 대상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 인간은 땅도 잃고 하늘도 잃어버리고 그게 바로 지옥이잖아요. 지옥은 뭐가 지옥이냐 하면은 남을 원망하는 게 지옥이에요. 남을 원망하는 게.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운 경우가 남을 원망할 수밖에 없을 때 가장 고통스러워요. 너 때문에 나 망했다. 남 탓할 때 가장 고통스러워요. 그 사람은 지금 자기가 저주하는 사람은 지금 잠 잘 자고 있어요. 본인만 고통스러워요. 본인만. 네가 뭔데 내 의미를 박살내놨느냐. 지금 혼자 발작하고 있어요. 혼자.
정신분석에서 인간의 신경증 또는 정신병 원인을 어디다 두고 있느냐 하면은 바로 권력 문제로 해결해버려요. 내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냥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존재하게 되어있어요. 권력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그럼 권력은 어디서 옵니까? 이 세상의 일부를 내가 점유해야 내가 주체가 되고 사람이 사람 구실하고 사람답게 사는 게 돼요. 권력이.
그런데 이 권력에 내가 권력을 가졌잖아요. 더 쎈 권력 오게 되면 어떻게 돼요? 더 쎈 권력이 오게 되면 억압을 받고 빼앗기게 되겠지요. 눈치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나’라는 이 자존감이 파손되겠지요. 파손된 만큼 빨리 보상해서 나머지 파손된 부분을 빨리 다른 걸로 채워야 이걸 치료라고 해요. 치료. 이걸 치료라고 하는 거에요. 빨리 보상을 하는 것을 치료라고 해요. 치료. 빨리 보상해야.
보상이 안 되면 치료가 안 된 상태에서는 치료 안 된 증상을 보이겠죠. 동네방네 누구 욕하고 돌아다니고 난리에요. 내 뒷집에 사는 그 인간 말야. 나한테 이런 짓했어. 치료 안 된 만큼 계속해서 발작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걸 히스테리라고 해요. 히스테리. 계속 발작을 일으키는데 히스테리는 신체적인 변화까지 유발해요. 소화도 안 될뿐더러 이상하게 병명은 없는데 이상하게 주눅 들어있어.
도대체 이게 지금 어느 게임에 놀아나는 게임이에요. 남성의 세계에 놀아나는 게임이고 악마의 놀아나는 게임이에요. 악마에. 의미의 놀이판에서 자기가 패배자가 되는 거에요. 의미의 놀이판에서. 나도 사람대우 받고 싶은데 의미의 놀이판에서 자기가 패배자된 거에요. 원인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은 내가 힘이 모자라서 그렇다는 거에요. 힘이 모자라서. 힘이 모자랐으면 그럼 힘을 가진 자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 아버지 같은 분이죠.
사회에서 아버지 같은 분은 누굽니까? 순양그룹 회장. 재벌총수. 그럼 교회에서 아버지 같은 분은 누굽니까? 하나님 아버지. 간절히 기도하는 거에요. 아버지~~~. 주여~~~주여~~~~~~주시옵소서. 뭐!! 나에게 의미를 주시옵소서. 내가 남한테 사람으로 인정받게 하옵소서. 나도 사람대우 받게 하옵소서. 고창병 날라가버렸어요. 벌써 고창병 날라가버렸어요. 무의미한 존재 이거 날라가버렸어요. 내가 구원의 기준인 것은 다 날라가버렸어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구원의 기준인 것 다 날라가버렸어요.
어떻게 하면 저렇게 대우 받는 사람 되는가. 이 잘못, 이 폐쇄된 구조. 12제자가 그대로 그걸 밟아갑니다. 예수 3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나에게 돌아올 건 뭐냐? “예수님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높습니까?” 권력을 추구하죠. 남성의 세계에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에요. 예수님도 이 남성의 세계 키우기 위해서 오신 분인 줄 알고 있어요. 우리 교회 부흥하기 위해서 예수님 오신 줄 알고 있어요.
11절에 봅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거는 바로 예수님 본인이 예수님에 대해서 해석을 내린 거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나 낮아지면서 죽기까지 복종했잖아요. 그러면 오늘 성경해석의 해답은 이미 나왔어요. 간단합니다. 내 죽음에 동참하여 나랑 같이 여성이 되자. 또는 여자의 후손이 되자. 여성이 되자. 여자의 후손이 되자.
여자의 후손은 여자가 여자를 낳고 여자가 여자를 낳고 여자가 여자를 낳는 게 여자의 후손이죠. 뱀의 후손은 뱀이 뱀 낳고 뱀이 뱀 낳죠. 그런데 여자의 후손은 이 전체에 포함이 안 되어 있어요. 비전체이기 때문에. 전체는 항상 누가 가져갑니까? 뱀이 가져가고 남성이 가져가지요. 그 남성의 세계, 뱀의 세계 구멍을 뚫듯이 사건으로 출몰하는 것이 뭐다? 그게 바로 언약 사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만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노아의 방주. 인간들이 구상하지 못한 거에요. 생소해요. 새로워요.
“십자가 피로 내 살과 내 피로 너는 영생을 얻으리라” 이거는 너무나 생소한 거에요. 구약성경에 그런 거 없어요. 구약성경에 율법을 지켜야 영생이 있어요. 잠언서 나와요 말씀을 지키는 자가 생명나무다. 나오거든요. 잠언에는 그렇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은 그걸 뭐로 해석해버립니까? 말씀이라는 혜택을 입었는데 혜택을 입은 말씀을 해석할 자가 아무도 없어요. 왜? 모든 인간이 어디에 속하기 때문에? 전체에 속했기 때문에. 남성의 세계에 속했기 때문에. 뱀의 세계에 속했기 때문에. 그래서 못 빠져나오기 때문에. 해석력이 전혀 없어요. 해석할 수가 없어요. 전혀.
사울이라는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뭐였는가 하면은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해서 죽이는 거에요. 그리고 스데반 집사 죽을 때 참관자로 누가 주도자로 등장했는가? 사울이라는 사람이죠. 자, 그 순간에 사도행전에 그 이야기 나오잖아요. 그 스데반 집사 이야기 나올 때 그 때 어느 누구도 그 대목 읽으면서 어느 누구도 이 사울이 사도가 된다는 낌새라도 있었습니까? 없지요. 이게 바로 생소한 거에요. 네가 천당 가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너같이 악독하게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체포해서 죽이라고 넘기는 인간은 진짜 너는 지옥 간다. 그 당시 교인들이 수근 대지 않겠습니까? 사울이 악독하다는 것을 아니까.
그런데 주님은 누굴 찾아갔습니까? 바로 그 사울을 찾아가서 사울을 바울 되게 만들었습니다. 똑같은 변화가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야 한다는 거에요. 계속해서 결핍을 느끼면서 뭔가 채워야 되고 더 의미를 계속 쌓아야 된다고 하는 이 배고픔. 4강 올라가도 아직 배고프다는 거에요. 히딩크. 그런데 배불러서 뭐할 건데? 우리는 그 질문이 중요한 질문이에요. 내가 배부른다 하자. 그래서 뭐? 배부름이 그 나라 의입니까? 아니잖아요.
주께서는 이미 “내 살과 내 피 마셔라. 영생이다.” 이미 먹고 아주 단촐해요. 복잡한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내 살과 내 피를 무슨 수로 먹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걸 먹을 생각이 없지요. 왜? 탕수육 먹는다고 바빠가지고. 지금 내가 당장 배불러야 에너지 찾아가지고 또 노력해서 내가 의미 있는 인간 되기에 분주한데 그 딴 거 예수님의 살과 피 먹어서 뭐하는데.
주께서는 바로 해석을 해버리는 거에요. 해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은 네 살과 네 피를 먹는 그것이 바로 너로 하여금 너를 더욱 더 썩어문드러지게 만드는 거에요. 우리를. 집에 있는 돈이 나를 썩어문드러지게 만드는 거에요. 그럼 그 돈을 교회에 갖다 바치면 우리는 안 썩습니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교회에 갖다내도 그거는 잊을 수가 없어요. Oh I believe in yesterday. 제가 지난번에 얘기했지요. 나는 과거를 믿는다. 인간은 자기 한 일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이래도 안돼요. 저래도 안돼요. 인간은 어떻게 자기에게 시도를 해도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영향력은 없습니다 라는 해석을 본인에게 내리면 돼요. 그 해석을. 참 쉽죠잉. 본인 보고 그 해석만 내리면 돼요. 본인 보고 그 해석만. 그게 본인도 놀라는 생소함이에요. 내가 미쳤지. 내가 왜. 내가 미쳤지 그런 해석을 내가 왜 내리는데. 우리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 하면 우리는 이걸 지킬려고 해요. 이걸. 이걸 지킬려고 하는데 이걸 지킬려고 노력하는 자가 바리새인들이에요.
이거는 지키는 게 아닙니다. 왜 지키는 게 아니냐 하면은 이걸 지키면 생소하지 않아요. 지켰다 할 수 있는 자가 내가 기존에 의미 있는 내가 되는 거에요. 나를 무의미로 바꿀 수 있는 해석이 나한테 주어져야 돼요. 내가 고창병이라는 아픈 데는 없지만 고창병이고 나는 무능한자라는 해석이 주어질려면 내가 직살 나게 고생을 하는 게 아니고 고생 받았다고 구원받을 거 같으면요 이 세상에 고생한 사람들 많습니다. 참 세상사 들어보면 서글픈 사람들 많아요.
그게 아니고 생소하게 내 이야기, 내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 이야기가 쓱 들어온다니까 SSG. 그냥 쓱 들어온다니까요. 그냥. 이거는 내가 훅 들어오기 때문에 나한테 들어오기 전에 나한테 검사받아 이게 안돼요. 이게 되지를 안 된다니까요. 그리고 훅 들어왔다가 날라가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수시로 생소하게 내 욕망과 욕구를 쟁취하기 위해서 남한테 안질라고 애쓰는 가운데서도 이건 눈치코치도 없이 쓱 들어와버려요. 그래 이겨서 뭐하는데? 해서 무슨 낙이 있는데? 그 나라 의와 무슨 관계있나? 훅 들어온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남하고 경쟁하다가 피식 웃어버리죠. 아 이 경쟁의 헛됨. 비교하는데 이게 무의미함. 피식 웃어버리죠. 자유가 사악 찾아옵니다. 자유가 찾아와요. 자유가. 아 내 일 없고 주의 일로 바꾸는 교체되는 과정 속에 주님이 나를 거기에 집어넣었구나 네가 바로 고창병이고 나는 안식일을 지켜야 되고 너 같은 인간이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에 딱 적합한 존재가 되는 거에요. 네가 무능하고 무의미함으로서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이 유일하게 예수님이 살과 피가 하나님 앞에 받아지는 의미 있는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언약의 새 언약의 바탕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증거하게 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증거하게 되지요.
그 뒤에 해석은 전부 다 해석이니까 쉬워요. 12절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자, 이거는 무슨 세계냐 하면은 아까 남성의 세계 그대로 보면 돼요. 남성의 세계는 전체의 세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여기서 빠져나가지를 못합니다. 모든 존재는 이 의미에 권력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의미의 지배를 받고 의미 권력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시작을 그렇게 시작하는 거에요. 남자든 여자든. 똑같은걸 추구해요.
그걸 바리새인도 마찬가지거든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해요 왜? 해야 그 중에 너도 얻어먹었으면 너도 나 대접해야지 가 성립되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12절을 끄집어낸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이 행위에서 벗어날 자는 너희들 중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이에요. 사람에게 사람 대우 받을려고 인정하지 마시고 주의 해석의 일부에 들어가세요. 주께서 ‘이건 아니고’에 들어가세요. 들어가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 되지만.
우리는 그걸 ‘맞습니다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인정하세요. 해놓고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이건 돼요? 안돼요? 무능하지요. 이게 그래서 우리는 고창병이에요. 그 나라에서 우리는 고창병이에요. 전혀 우리는 어떤 걸 해도 우리는 그 나라 의에서 했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이렇게 주어진다는 것은 이미 이 말씀이 성취됐다는 뜻이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료됐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할 건 뭐냐? 내가 내안에 누가복음 14장 12절, 13절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게 되면 그게 바로 주님의 의미고 우리는 주님의 의미를 담아서 전달하는 전달자의 기능이죠. 그걸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행한 게 아니고 내가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지킨 자가 되고 너는 못 지켰는데 내가 지켰어 라고 증거하게 하시라 이 말입니다. 참 쉽지요. 이 말씀에 대해서. 그러니까 누가 구원받은지 제자들은 몰라요.
제자들은 모르는데 제자들은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가는 거에요. 몰라요. 모르지만 제자들이 가서 전도하고 보니까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요. 그러면 뭐냐?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다 믿어요. 그러니까 주의 일에 우리는 아무것도 개뿔도 모르고 참여했는데 그것이 이미 하나의 주님의 해석을 위한 과정 속에 자기 백성을 집어넣은 겁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할 건 없어요. 다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투쟁은 지금도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을 벌리고 있다는 거에요.
“오직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네가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그 나라 의를 구하라” 그러면 대번에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게 그럼 굶어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굶어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바로 남성의 세계죠. 그래서 아까 뭐라고 썼습니까? ‘내 죽음에 동참하라’ 더 어렵게 말씀드릴께요. ‘내 죽음에 이미 동참된 것을 확인하라’
한국에서나 미국 가나 어디 가나 이미 나는 죽은 자임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확인하다가 또 하루 지나고 확인하다가 또 하루 지나고 나중에 96세 돼서 죽으면 그게 죽은 모습이 바로 원래부터 나는 고창병자고 원래 죄 짓다가 죽게 될 인간인 것을 확인됐잖아요. 주께서 성공시켰잖아요. 너 봐. 내가 죽는다고 했잖아. 너 죽었잖아. 됐잖아. 이미 죽음에 참여한 사람은 바로 이미 주님과의 해석을 주고받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일방적으로 차고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자, 이제 14절에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의인들의 부활 시, 그러니까 이미 영생을 받았으면 주님의 공로로 받은 거에요. 받은 것은 주님의 공로로 받고 우리가 이 세상에 남은 생 사는 것은 왜 그게 내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공로인가를 고창병으로 확인해가는 삶,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아득한 먼 남의 일처럼 여기고 비현실적이고 실제 하지 않는 일방적인 공식인줄 알았습니다만 이게 실제 삶으로서 매일 삶으로서 또다시 구체화 되고 있는 현장에 대해서 우리가 놀랍고 감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