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강-눅18장 31절-34절(감추어진 십자가복음)12010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8장 31절에서 3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27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8:31-34
“예수께서 열 두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이 감추어 놓았는데 인간이 무슨 수로 말씀을 깨달아서 구원을 받겠습니까? 우리는 교회를 수십 년 다니면서도 내 쪽에서 구원을 얻어내겠다는 그 심보가 변함이 없어요. 왜 그렇게 성경을 수십 년 안 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식으로 구원되지 못하도록 하는 곳이 하늘나라고 천국이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감추어놓은 비밀을, 자기만 아시는 그 비밀을 따로 선택된 사람에게만 알려줘서 선택된 사람으로 하여금 ‘아, 이런 것도 있었네. 이런 식으로 구원받네.’ 깜짝 놀라는 식으로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돌릴 때 그 때 그 사람은 죽어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되면 오직 그것으로 오직 주님의 영광만 돌리는 나라,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다른 코스가 없어요. 다른 길이 없어요.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했지만 사실 정답은 뭐냐, 길은 없어요. 왜냐, 감추어 놓았기 때문에 그래요. 길이 감추어졌기에 인간은 모르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감추어놓은 길을 대체해서 인간 쪽에서 점점 더 알아가고 그 알게 된 논리에 계속 덧붙여서 아는 논리 더하기 아는 논리, 진리에 진리를 덧붙여서 인간 쪽에서 납득되는 식으로 천국 도달했다는 사기를 치는 그 현장이 바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묻습니다. 교회로 구원받나, 복음으로 구원받나, 성경 펴놓고 한 번 보자는 말입니다.
제가 얼마나 답답한지 모르겠어요. 교회가 재미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재미있게 살 입장이 못 됩니다. 죄짓고 나서는 이마에 땀이 흘러야 되고 여자들은 고통 속에 있어야 되고, 그게 뭐가 재미있는데요? 순간적으로야 재미를 만끽하지만 또 다시 그것이 시들해지고 시시하고 그래서 또 다른 재미를 찾아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떻게 돌변할지 본인도 장담을 못해요. 어디로 어떻게 빠질지.
아침에 인터넷뉴스를 보니 미국의 한 신부가 카지노에서 공금 7억을 날렸답니다. 성당 신부가 가지고 있는 공금이 누구 돈이겠습니까? 교인들이 헌금한 돈이겠지요. 성당이 무슨 생산 단체도 아니잖아요. 신부보고 “당신은 왜 카지노를 갔습니까?” 그 사람의 답변은 하나밖에 없어요. “재미있으니까”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신부만 그럴까요? 모든 인간은 새로운 재미를 창출하면서 살아갑니다. 제발 나로 하여금 재미있고 즐겁게 해 달라. 『호모루덴스』라는 책에 보면 “인간은 처음부터 즐거움과 게임을 위해서 산다.” 하지요.
사람이 게임할 때 괴롭지만 게임에서 승리할 때의 기쁨은 그 게임에 투자하는 괴로움을 거치지 아니하면 승리라는 희열을 만끽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힘들고 어렵더라도 경쟁과 승부의 세계, 투쟁의 세계에서 승리를 했다는 그 즐거움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그 모든 게임은 무효가 됩니다. 아, 이거 미칩니다. 무언가 얻기 위해서, 승리하기 위해서, 남에게 기죽지 않았다는 그것을 자기자신의 삶의 보람과 꿈으로 여기고 매진했는데 그 게임이 무효가 되어버리고 승리가 무효가 되고 승리의 면류관이 다 무효가 되고 그 영광의 트로피가 다 쓸데없는 트로피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그 소리에 기겁을 할 거예요. 언젠가 한국하고 어느 나라하고 축구를 했는데 박주영이 한골 넣고 또 다른 선수가 한 골 넣고 2대 0으로 이겼습니다. 그런데 세계축구협회에서 그 시합을 무효로 처리했습니다. 왜냐, 교체선수가 규정 이상으로 너무 많이 들어갔다고 해서 무효처리 해버리니까 박주영이 한 골 넣은 그것도 같이 무효 처리되고 말았어요. 게임의 룰에 위반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인생이 자체적으로 승리를 만끽하고 이기고자 하는 이 모든 게임, 누가 잘 났나 못났나 하는 이 모든 게임이 하나님 보기에 다 무효가 되는 거예요.
그냥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냥 자기 재미를 위해서 살아 온 거예요. 나 이정도 된다, 날마다 그것 확인 차 몸부림 쳐 본 겁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우리 가운데 잘 난 사람이 누가 있으며 우리 가운데 문벌 좋은 사람이 누가 있으며 우리 가운데 똑똑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 바보 같은 것, 문벌도 없는 것, 재주도 없는 것, 돈도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세상 가장 없는 자와 함께 있었다는 말이지요.
바로 그것이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책도 많이 보고 늘 끼고 살던데, 늘 차에 두고 살고, 그런데 대체 뭘 보고 있는지, 어떤 대목을 보고 있는지, 왜 교회 와서 기도하기를 ‘주님이여, 이번 게임에서 승리케 하시고 이번 전쟁판에서 내가 승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대체 어느 구절에 근거해서 그것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다른 사람 다 떨어져도 우리 애는 대학 합격하게 해주시고 다른 사람 다 탈락해도 나는 승진되게 해주시고.’ 그런 기도는 어느 대목에 근거해서 그렇게 했느냐는 말이지요.
시편 4편에 이런 말씀 나오지요. 이런 말씀 전하면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부끄러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7절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지금 말을 하면서도 염치가 없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함”이란 현대어로 번역하면 돈이 팍팍 들어오는 것을 말하거든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갑자기 집안에 돈이 팍팍 들어오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주께서 주신 기쁨이 오게 되면 돈이 얼마가 있느냐, 하는 것을 따질 겨를도 없이 기쁩니다.’ 라는 거예요.
이 말씀과 방금 제가 이야기했던 ‘있는 자를 통해서 없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무식한 자들 통해서 똑똑한 자들 부끄럽게 하셔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려 함이라.’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함을 자랑하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용서하고 영생주기 위해서 이미 모든 것을 확정지어서……, 그것은 이미 게임이 다 끝난 이야기입니다. 내가 뭘 어떻게 하지 않아도 이미 끝나서 확정되어 버린 이 구원의 기쁨은 내가 경쟁판에 뛰어들지 않더라도, 내가 탈락하더라도, 내 자식이 시험에 불합격하더라도 그런 것으로 인하여 얻는 기쁨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이미 주어진 거예요.
누가 나를 정죄합니까? 주께서 날 위해 돌아가셨는데. 심판주가 날 살리기 위해서 '널 책임지고 살려낼게.’ 했는데 어떤 마귀가 ‘어느 성경은 어겼고, 어느 성경은 안 지켰고, 어느 성경은 네가 위반했으니 못난 놈이라고 누가 우리를 힐문하고 누가 우리를 정죄합니까?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성경을 보면서 기쁨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기쁨이 아닐까요? 다른 기쁨이 뭐가 있습니까? 다른 기쁨이. 촌스러운 기쁨 말고, 이 땅에서부터 하늘나라 사람답게 놀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어떤 사람을 볼 때에도 누가 지나갈 때도 ‘저 사람이 천국 갈 사람인가?’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저를 마주하는 사람은 ‘내가 이 정도 하면 교회 봉사했다 할 만 하지요?’ 나는 저 사람이 천국 갈 사람인가, 하고 보고 있는데 그 사람은 ‘아, 목사님 되십니까? 나는 기존교회에서 이렇게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자기가 그 교회에서 이 정도로 쓸모 있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거예요. 얼마나 목사들이 사기를 쳤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교회충성 봉사하는 사람이 천국에 합격 될 사람이냐 하는 소리지요.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질문하기를 ‘그렇게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죄가 된다면 교회 봉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답변 안 달려고 하다가 참았어요.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천국에 봉사하는 것과 교회 봉사하는 것이 다릅니다. 천국은 이미 주께서 주신 기쁨이 넘쳐서 교회 그까짓 것은 없어도 괜찮아요. 지금 소고기가 비싼 이유가 뭡니까? 유통단계가 7단계니 10단계니 너무 많아서 그런 것 아닙니까? 요즘 송아지 한 마리 산지에서 만원인데 삼겹살 반근 값밖에 안 되잖아요. 삼겹살 한 근이 2만원이니까요.
유통단계가 문제거든요. 말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말씀을 감춰 두었어요. 감추어두었기에 아무도 몰라요. 주님의 숨바꼭질 게임에서 주님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어떤 신학과 과학과 철학, 어떤 노력, 헌신, 봉사로도 찾지 못합니다. 그렇게 감추어두었는데 색출이라 할까, 자기백성을 색출하는데 성령으로 택한 백성에게만 줘버리면 유통단계가 일원화되면서 모든 단계가 끝나버려요.
산지에서 송아지 한 마리가 만원 같으면 정육점에 가서 “국거리 두 근, 불고기감 다섯 근 합이 얼마입니까?” “250원입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유통단계가 싹없어져 버리면 그렇게 나와야 된다고요. 유통단계가 많다는 것은 중간에 커미션 먹는 인간들이 많다는 소리에요. 그 커미션 먹는 인간들이 목사들이라니까요. 천국에 보내 줄 테니 돈 내라는 인간들. ‘목사님, 저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어요.’라는 기쁨이 나와야 할 텐데 그따위 것이 유통되다 보니까 ‘내가 이 교회 안다니고 저 교회 다니면 교회 봉사한 그것을 알아주겠습니까?’ 교회 봉사 하고 안 하고를 가지고 성도를 측정하는 거예요.
분위기가 이미 지옥분위기로 끝나버렸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은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저만 좀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필요 없다.” 아무도 몰라요. 예수님만 아시고 하나님만 아니고 아무도 모르는 것, 심지어 열두 제자도 같이 다니면서도 아무도 몰라요. 드디어 주께서 어디를 가야 그것이 공개되느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그 감추고 감추인 그것이 공개됩니다. 그것은 교회 세우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든 중간 유통단계를 다 끊어 버리고 예수님과 그 사람, 그 사람과 예수님을 직접 연결시키는 거예요. 요한 일서 2장 27절에 보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직접 너희를 가르치는데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말이냐. 내 성령, 주님의 영이 직접 너희를 가르치리라.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모여야지 시발점으로 모이면 안 됩니다. 결과적으로 모여져야 돼요. 결과적으로 모일 때 그 교회 구성원들의 연결점은 오직 인간이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해야 돼요.
그것을 저는 천국에서만 통하는 통용어, 천국통용어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세상 문자로는 서로 사맛디 아니할새, 세상언어로는 통할 수 없는 것. 지난 수요일에 훈민정음 서문 좀 외웠다가 쿠사리 실컷 먹었어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서 서로 사맛디 아니할쌔’ 이것 외우다가 자랑하나, 하고 혼났어요. 앞으로 주의해야 돼요. 천국통용어의 핵심내용은 ‘인간이 인간의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가 기본 전제로 깔려 있어야 돼요. 왜 할 수 없었는가? 몰랐으니까, 아예 무지하니까.
“하나님, 저 어떻게 구원해요?” 주께서는 “너는 모르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요?” “몰라도 돼.” “그러면 저하고 이야기 안 해요?” “다른 분하고 이야기 할거야.” 예수 그리스도하고 하나님하고 모든 일이 다 끝나야, 완료되어야 그 완료된 이후에 우리한테 통보하는 식으로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시험 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이 구원될 거냐, 구원 안 될거냐 하는 것은 저쪽에서 심사해서 심사결과를 통보해주면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통보된 그 과정 속에만 우리가 지금 이끌림 받은 거예요.
통보를 받고 나니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중간의 유통단계를 다 제거해버리고 주님과 그 사람 사이에서는 “네가 뭐 한 것이 있나?” 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네가 뭘 좀 하데?” “주님이 하신 일 외에 다 죄입니다.” “그렇지?” 그 이야기만 주고받는 거예요. 그런데 이 유통단계에 검은 악마의 손길이 파고 들어갑니다. 목사이름으로 파고 들어와서 뭐라고 하느냐, 주께서 인정한 적도 없는 악마의 종이 치고 들어와서 하는 말이 “어이, 너 구원 받았어, 안 받았어?” 그러면 성도는 “저 구원 받았는데요?”
그러면 그쪽에서 이런 소리가 대번에 나옵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나와야지.” 자기가 왜 남의 삶까지 관리하려 하는데? 너나 잘하세요. 너나! 남의 삶을 목사 네가 왜 관여하느냐 그 말이지요. “성도의 삶이 나와야지.” 그렇게 하거든요. “성령에 합당한 삶이 나와야지.” 그런다고요. “누구세요? 어느 도매상에서 나왔습니까?” 유통단계를 다 끊어내서 이미 없는데. 사람이 사람을 관리하겠다고요? 무슨 자격으로 그따위 발상을 합니까? 자기가 뭔데 남의 신앙에 왜 개입해요? 그렇게 건방진 것이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먹힌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 사람이 성도가 아니고 성도가 아닌 사람한테는 다 먹혀요. “목사님, 성도의 삶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옵소서. 저는 신학을 전공 안하고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 성도의 삶이 뭔지만 가르쳐 주시면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하겠습니다.”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은혜 받은 대로 헌금해야 되고 은혜 받은 대로 …….” 이게 뭡니까? 무슨 게임이 그런 게임이 있어요. 누가 성과가 더 좋고 누구는 나쁘고, 이것은 성령 받지 않으면 그런 목사가 오기 전부터 본인부터 이미 그런 시선으로 자기를 본다는 것을 알아서 본인이 자료준비를 먼저 하고 있어요.
그런 게 필요 없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성깔을 가지고 교회 와서 나도 목사 장로 앞에서 이만큼 훌륭한 신자임을 티내는 즐거움과 재미를 붙들고 구원받으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이것은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성령 안 받은 이상 다 그래요. 세상의 포도주와 세상의 재물로 인하여 즐거워할 사람 같으면 그것을 즐거워했다가 나중에 죽었을 때 생각하면 찝찝하니까 이 즐거움에 죽어서 천당 가는 즐거움을 보태겠다고 생각을 먹는다면 꼭 그러한 악마의 종들이 주위에 자꾸 옵니다. 그래서 그 악마의 종으로부터 칭찬받고 싶어 하고 “훌륭하십니다. 이 시대의 빛이고 소금입니다.”라는 소리를 본인이 듣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들이 익히 아는 겁니다. 그 방법 말고, 우리 유통단계를 뺍시다. 구원을 공짜로 먹을 수 있는데 왜 돈을 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성경에 값없이 구원되었다고 하는데 왜 그것을 돈 주고 사야 된다는 말입니까? 평소에 더러운 마귀적인 버릇이 들어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미국의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이 근호 목사는 헌금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 좀 많이 널리널리 퍼졌으면 좋겠어요. 돈 좋아하는 사람들 우리 교회로 좀 오게.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은 우리가 몰라도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두 분간의 심사 가운데서 이미 확정되었어요.
“창세전에 예정된 자 맞아요?” “맞아 맞아. 그런데 쟤는 아니야.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아니야.” 이러한 주님과 주님사이의 의견은 감히 피조물 된 우리 입장에서는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손댈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수용해주셔야 됩니다.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괴로워집니다. 이것은 마귀의 놀림감이 돼요. 마귀가 채찍질 하면서 “좀 더 열심히 해야지.” 한다고요. 그런 것은 세상 수능시험 칠 때, 세상 시험 칠 때, 돈벌이 할 때나 그렇게 하세요.
교회에서도 그런 짓 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구원받을 때는 그런 방식을 안 합니다. 익히 그것은 인간들이 아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그 구원의 핵심은 뭐냐, 핵심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친히 올라가는 겁니다. 올라가면서 우수수 낙엽 떨어지듯이 다 떨어지지요. 주변에서 얼씬 거리면서 ‘주님, 도와드릴까요?’ 하던 인간들 다 떨어져버려요. 주님 홀로 예루살렘에 가심으로 홀로 남는데 거기서 능욕을 받아요. 32절에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 하고 죽일 것이니.”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몸만 겨냥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마귀가 다른 사람은 시시하게 여기지만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알아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뭐가 나오는지도 알아요. 모든 유통단계를 다 없앤다는 사실도 알아요. 그 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구원받는 것도 알아요. 그것이 악마의 세계가 궤멸되는 최후의 무기가 되는 것도 알아요. 악마는 자기의 전부를 다 바쳐서 진검승부에 들어갑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막고 없애버리는 쪽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죽지? 그 사람 죽는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렇게 여기는데 이것이 상관이 있다는 것을 마귀가 알아요. 일반인들은 몰라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죽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 살아 있는 사람 바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다가 죽으면 마을 뒷산의 공동묘지에 가잖아요. 죽은 자들끼리 모여주세요, 이런 식으로 그쪽으로 보내지 살아 있는 시장통이나 공회당에서 죽은 자 운구하면 재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살아 있는 그 가운데서 죽음을 바깥에 세우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그 한복판에 자신의 죽음을 끌어오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 그대로 하면 예루살렘은 성경말씀이 그대로 응해야만 예루살렘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되어 있어요. 어떤 진가냐,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이 죽고 태어나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말씀이 응하기 위해서, 구원을 완성하고 심판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그 분에 의해서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데 그 벌어진 일은 어떤 다른 사람도 아무도 모르게 되어 있는데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그 일이 벌어질 때 그 벌어진 일을 근거로 해서 사람은 천국과 지옥, 지옥과 천국으로 갈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루살렘의 죽음은 특수한 죽음인데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평소에 기대했던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살아야 돼.’라는 그 삶 말고 부활이라는, 죽음조차 이기지 못하고 영원한 영생이 보장되는 새로운 생명은 다른 사람은 죽어도 그것이 안 나타나는데 말씀이 응했던 분이 돌아가셔야 비로소 영원한 생명이 비로소 나타나는 거예요. 본문에 보면 “저희가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세계를, 자기를 채찍질 한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누가 나를 모독하고 누가 내 옆에 배치되어 있고 심지어 예루살렘 들어갈 때 탈 나귀가 어떤 종류의 나귀인지 다 아시고 그래서 주께서 친히 준비하신 나귀타고 가신 거예요. 가면서 무화과나무가 어떤 식으로 저주받는다는 것도 파노라마처럼 다 알고 계시는 겁니다. 알고 계신다는 말은 성도에게 어떤 위로가 되느냐,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인 것을 네가 믿으라, 그 말입니다.
이란이 핵개발 하는 것도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연평도 앞 바다에서 화물선 폭발하는 것도 십자가를 위해. 화물선 폭발해서 죽은 선원들의 유족들은 교회 가서 “아이고, 하나님, 내가 신앙생활 잘하는데 내 남편을 왜 죽게 합니까?”라고 탄식을 하더라도 그것도 복음을 위해서, 어떤 사람이 우리를 능욕하고 기분 나쁘게 하는 그것도 기분 나쁘지만 말씀이 응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위해서, 이미 말씀이 다 응했다는 그 사실을 통고받기 위해서.
세상 모든 일이 복음과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그 우산 아래서, 복음 안에서 이미 우리는 보호를 받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나오는 유명한 노래가 남진이 불렀던 둥지, 둥지를 틀어라. 주님께서는 둥지를 만들어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이미 심판주가 너를 의인이라고 판정을 내린 상황, 우리가 의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에 의인일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만약에 완벽한 죄인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의가 나온다면 그 의인은 주님의 의와 충돌을 일으켜서 천국에 못갑니다.
그래서 다 빼버려요. 우리 의, 내 행함, 내가 말씀 지킨 의는 다 빼버려요. 철저하게 순수하게 죄인 되게 만드는 그 능력이 우리를 죽음의 공로만 돌릴 수 있는 재료로서 계속해서 생산되는 거예요. “주님 최고입니다. 주님 최고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이것이 다 복음을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렇게 주님에게만 공로를 다 돌리는 여건들이 조성되는 그것이 둥지를 트는 거예요. 세상에서도 둥지를 틀어요. 세상에서는 자기만 살면 되는 둥지를 틀어요. 결국 둥지 싸움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둥지하고 성도의 둥지가 달라요. 세상의 둥지는 소유로 만들어요. ‘나는 이것을 가졌다. 나는 저것을 가졌다. 이것까지는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소유로 만들지만 예수님의 둥지는 소유가 사라지고 시간이 등장합니다. “때가 되매 주께서 구름타고 오실 것이다.” 성도를 감싸는 것은 성도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고 시간입니다. 모든 소유는 시간으로 해체되어 버리고 주님의 때를 따라 오시는 그 시간이 성도를 지켜주고 보호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의 혈육, 혈육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육, 육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인간의 신체, 인간의 몸, 인간의 몸은 인간 몸을 위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시간이 흐릅니다. 시간이 죽 흘러가는데 자기 몸에서 흘러가는 시간에 자기가 담고 싶은 것은 담고 버리고 싶은 것은 버리는 자신의 판단력이 동원되어서 자기에게 유리하고 자기를 빛낼 사건들만 모아서 담아버리면 그것이 역사가 되어버려요. 그것을 제가 어느 글에 장바구니라고 했어요. 물건 고르듯이 자기를 옹호하고 변호할 만한 것은 다 담아요.
역사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용어로 바꾸면 나의 신앙경력이 됩니다. ‘내가 과거에 교회를 몇 군데 세우고 어디서 어떻게 봉사를 하고 …….’ 이러한 신앙경력이 되어버립니다. 자기의 시간이라는 것은 내 영광을 위해서 시간들이 자기 몸에서 퍼져 나갑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몸의 중심이 되는 거지요. 그 신앙의 경력을 그 사람들은 두 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또는 은혜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또는 은혜로 나는 이런 신앙경력을 가지게 되었기에 이것을 하나님 앞에 내 밀면 천국에 합격시켜 준다, 이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라고 언급을 하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 말고 다른 생각 할 것이 있습니까? 다들 그렇게 살아가잖아요.’라고 하는데 지금부터 그 생각 말고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쨌든 인간은 신앙의 경력인데 은혜로 한다, 이것을 멋들어지게 포장을 하지요. 그런데 제가 쓴 글에 보면 그 장바구니를 발로 걷어차 보자는 겁니다. 발작을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할 때 그 살아왔다는 것은 신앙경력이 있고 그 신앙경력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꽉 차 있는, 그런 멋진 인간으로 살아간다고 하지요.
그런데 나이 한 50되어서 어느 바닷가에 놀러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고등학교 2학년 때 17대 1로 싸웠던……, 흔히 17:1이라고 하면 나 하나에 상대방 17을 연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상대방은 하나인데 잔챙이들 속에 하나로 자신이 포함되었던, 그래서 상대방이 자신을 찌질이라고 놀렸던 바로 그 친구가 “어이, 찌질이! 인물 훤하네. 요새도 찌질이로 노나?” 할 때 “쉿, 마누라 듣는다.” “에이, 그 찌질이 맞네. 나한테 만 날 얻어맞고 돈 빼앗기고 울던 그 찌질이.” “쉿! 쉿!” 왜 이러는가? 자기가 자기역사를 꾸밀 때 뭘 빼놓았느냐, 남에게 자기위신에 손해난다 싶은 것은 다 빼놓은 거예요.
50대 아주머니가 청소부 이력서 내라고 하면 ‘수물 두 살에 처음 이혼했고 42살에 두 번째 이혼했고 …….’ 그런 것을 씁니까? 그 찌질한 것을 왜 써요. 좋은 것만 쓰지요. ‘내 아들이 의사지만 제 일이 하고 싶어서…….’ 이런 것 쓰잖아요. 자기 둘째 아들 사기 쳐서 구치소에 있다는 식의 내용은 안 들어갑니다. 인간의 역사란 전부 다 선별적으로 자기가 심판하는 판단주로서 자기만의 역사와 시간을 씁니다. 그렇게 판을 짜놓고 거기에 누구보고, 예수보고 마중 나오라고요?
이것은 횡포입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시간이라는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을 때만 시간이 되는 거예요. 이번 수련회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 봉창이 중국의 한 공원에서 도시락폭탄을 던져서 중국의 장개석이 ‘야, 한국 민족이 살아 있네.’ 해서 자금을 대줘서 상해임시정부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이봉창이 얼마나 좋습니까? 안 그랬으면 임시정부 만들지도 못했을 거예요. 안중근이가 이토오히로부미 쏘아 죽이니까 그때부터 안중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 중국공산당에 가담을 하게 되었어요. 중국공산당에서 반겨줬으니까요. ‘야, 이제 보니 민족성 살아 있구나.’
그 중에 한 사람이 김일성이고 그래서 중국과 북한은 혈맹으로 맺은 나라입니다. 6.25전쟁 때 중국군대가 압록강 넘어서 내려왔어요. 그러니 중국과 북한을 혈맹이라 하는 거예요. 이런 것이 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의 모든 역사라는 것, 현재 자신은 우수한 역사와시간의 흐름의 뭉치고 뭉쳐서 오늘날 빛나는 내가 되었다, 전부 다 자기에게로 환원되고 자기에게로 쏠리는 역사, 그런 사고방식 말고 다른 것이 뭐가 있습니까? 있어도 없는 거예요. 자기 몸 위주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말이 통용되지도 않고 천국의 말이 이해도 안됩니다.
그저 교회의 말은 이해가 돼요. 교회라는 것은 누구 자존심을 위한, 나의 괜찮은 요소 속에 채택될 수 있는 역사로서 교회다님이 성립되거든요. 그 역사라는 날 위한 시간의 판대기, 그것을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시간 가지고 바꿔치기 해버립니다. 예수님이 몸에서 나온다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 받으심에서 나온 거예요. 그것도 예루살렘이라는 곳에서. 예루살렘에서 말씀대로 응해서 능욕 받으시고 수모를 당하시는 겁니다.
그 능욕과 수모를 당할 때 누가 능욕시키고 누가 예수님보고 수모를 퍼 넣었습니까? 자기만의 역사를 고집하고 자기만의 역사를 주장했던 반 복음적 해석을 갖고 있던 그 인물들이 주변에 포진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 잘남 위주의 역사로 한다면,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우리도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뺨을 치고 욕설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입니다. 왜, 나의 역사를 감히 예수라는 존재가 모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그런 겁니다. 십자가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라는 식의 이 순신 장군의 죽음 같은 죽음과는 격이 달라요. 이것은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사건이에요.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하지요. 이 자기목숨까지 미워하라는 이것이 뭐냐하면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해도 순서상 일단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해요.
내가 나부터 사랑하게 되면 나의 시간대, 나의 역사대가 출발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웃을 사랑할 때 어떤 이웃을 사랑하느냐, 이 훌륭하고 건전한 내가 나를 더 훌륭하고 빛낼 만한 인물로 누구를 만나서 역사 속에 ‘나는 누구를 안다’ 혹은 ‘누구를 만났다’는 소리를 기입할 수 있는가를 판별해서 만나요. 그렇다면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사랑이라는 연장선 속에서 그 사람은 내 사랑 속에 포함될 수 있다 싶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여자가 남자와 만나서 결혼할 때도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요. 왜, 언제 봤다고? 나이 서른이 다 될 동안 그 사람을 언제 봤다고? 다만 저 남자 같으면 내가 지금 한 창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랑에 폐해가 안 될 사람이고 내 사랑을 더욱 빛낼 만한 멋있는 남자라고 생각을 해서 집어넣습니다. 집어넣다가 남자가 자기 본색을 드러내면 ‘나가’ 해서 나가리 되어버리지요. ‘너는 앞으로 나보고 사귀었다 소리 하지 마라.’ 왜, 내 역사에 오점을 남겼잖아요. 인간이란 무엇이냐, 간단한 문제에요.
일단은 자기사랑이고 자기 사랑하는 그 능력이 누가 자기 힘으로 극복이 됩니까? 극복하려고 하면 어떤 우스운 꼴에 들어가게 되느냐, 주의 말씀에 ‘나를 사랑하려거든 자기를 미워하라’고 했으니까 ‘그래, 내 잘난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주지.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 그 정도로 나는 예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나를 미워해요. 나를 미워하면서 나를 미워했다는 그 업적이 그대로 나에게 훈장처럼 붙여서 내가 나를 미워한 그것으로 인하여 더욱 나는 나까지 미워할 수 있는 질 좋은 나로, 우수한 나로 다시 도로 돌아옵니다.
다시 돌아왔는데 그 우수한 나가 말씀을 더욱 실천에 옮기려면 그렇게 괜찮은 나를 또 다시 미워해야 돼요. 미워해서 거기서 나오는 곱빼기 성과를 다시 내 것으로 삼아야 나는 전보다 더 질 좋고 우수한 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수련회 마지막 시간에 ‘왕복운동’이라고 했어요. 미쳤어요.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인간은 거기에 갇혀 있어요. 꼭 다람쥐 체바퀴 돌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을 못 벗어납니다.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육신이 자기를 미워해 봤자 자기를 미워했다는 그 놀라운 성과를 도로 자기 것으로 가져오기에 인간은 자기를 미워하면서도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사랑이 우선이고 내 사랑을 키우기 위해서 남까지 사랑하고 하나님까지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미움 받으라는 거예요. 남한테 미움 받으면 너는 너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남이 누구냐,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저주받았잖아요, 이제는 너를 사랑하지 말고 그 저주가 너의 역사, 찬란한 역사를 박살내면 그 박살내는 군화발이 바로 십자가에요.
그러면 내 속에는 내가 나의 사랑이 아니라 나를 너무나 사랑하사 나에게 주님의 저주를 안겨주신 주님의 몸으로부터 새로운 시간이 등장하면서 나의 고유의 시간은 없고 주님의 고유의 시간에 합류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어렵습니다. 내 몸의 역사가 아니라 주님의 자기 몸의 지체를 만드는 그 몸의 시간에 의해서 우리는 일천구백 몇 년도에 어떤 사람은 천 팔백 몇 년도에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몸으로서.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그렇게 태어난 몸으로서 또 따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지요.
십자가에서 강도도 예수님의 자기 몸 안으로 흡수해서 당겼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내 손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주님의 몸에, 주님의 시간대에 흡수 통합되면 그것을 세례라 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성령이 올 때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은 나 좋으라고 시도했던 어설프기 짝이 없는 종교적인 위선이었고 몸짓이었어요. 그것을 주의 말씀은 ‘그런 짓 안 해도 되거든’ 이라는 기쁜 소식, ‘구태여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되거든. 이미 너는 구원받았거든. 이제는 구원받은 그 기쁨이 네가 갖고 있는 소유물, 포도주와 곡식의 풍부함보다 더 하다’ 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어설퍼도 됩니까?” “어설퍼도 되거든!” “남들이 욕하는데요.” “욕먹어도 괜찮거든.” 왜, 주님도 능욕한 세상인데, 선지자도 함몰시킨 세상인데 예수님께 구원받은 백성을 세상이 그냥 둘 수가 없지요. ‘저것은 행함도 이야기하지 않고 막산다고 하더라.’ 온갖 이야기를 다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그런 능욕을 받거든 성령이 여러분 위에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인간들, 오직 그것만 몰두해서 그것을 나의 새로운 역사로 전개시키는 인간들의 부지런함, 하지만 그런 게임에서 승자가 없음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숨어 있는 비밀, 이미 예수님만 승자이고 그리스도의 혜택을 입고 효과를 보는 자만이 영생에 이른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의 돈보다도 우리의 재산보다도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