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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기도(눅22;39-46)이근호120624

아빠와 함께 2013. 11. 13. 20:58

최후의 기도(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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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2-06-24 13:27 

최후의 기도

2012년 6월 24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2:39-46

(눅 22:39, 개역)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눅 22:40, 개역)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눅 22:41, 개역)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눅 22:42, 개역)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 22:43, 개역)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눅 22:44, 개역)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눅 22:45, 개역)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눅 22:46, 개역)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에 합류하지 못합니다. 잠자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나름대로 기도가 뭔지를 잘 안다고 여기고 있는 자들입니다. 자신이 입을 열어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 말로서 호소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새로울 것이 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참여할 수 없는 자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곧 제자들이나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보탬되는 존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가치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시험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임을 전제로 하신 기도입니다. 시험이란 악마의 개입을 의미합니다. 즉 악마의 유혹에서 버틸 위인은 이 세상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합류해야 하는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합류되지 못한다면 그냥 그대로 악마의 시험 속에서 헤매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일방적 기도에 제자들을 요청하는 식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에 합류한다는 것은 곧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악마의 막강한 유혹의 세계에 자신들이 속해져 있음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잠을 잤습니다. 이렇듯 제자들은 악마의 세력권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길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사람의 뜻과 아버지의 뜻을 구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것이 기도의 핵심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 “내 뜻이 곧 아버지의 뜻이요, 아버지 뜻이 내 뜻이다”고 간주합니다.

즉 내 뜻과 아버지 뜻 사이가 벌어져있음을 인식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의 일상의 기도들은 기도 내내 “내가 결국 제일 소중하다”는 점을 확신케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내가 나를 챙기지 아니하면 아무도 나를 챙길 자는 없다. 기어이 내가 챙겨서라도 나는 어쨌든 버티고 살아남아야 돼”

라는 정신을 강화하는 것이 됩니다.
자기 확장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의 기도자기 마감입니다.

“내 뜻대로 안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예수님의 기도에 합류한다는 것은

내 뜻과 아버지 뜻의 분리를 분명히 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내 뜻이 결코 아버지 뜻이 아님을 확실하게 인정하는 바가 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대속을 위한 기도입니다.

즉 예수님 본인으로 인한 행위의 죄는 없으나 구원받은 형제들의 죄를 대신 담당해야 하는 죄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이란

다름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필히 찾아오게 되는 그 저주를 예수님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저주 받아야 한다”입니다.

저주란 하나님의 무서움이요 분노하심입니다.

구약에서 번제단에 사나운 불길에 태워지는 흠없는 제물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육의 세계에서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영의 세계로 이전하는 경로를 보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다니엘 세 친구의 신앙이 분명히 밝혀진 것은

멀쩡한 현상 세계가 아니라 용광로 솥에 일곱 번이나 풀무짓을 한 맹렬한 불꽃 속에서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들어가면 도저히 살 수 없는 바로 불 속에서 그들은 살아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그 세계 속으로 집어넣으시려고 합니다.

단 예수님이 당하시는 그 저주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곧 진정한 죽음의 세계 속입니다.

그냥 목숨 빼앗기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가 주어지는 곳입니다.

그 속에서 제자들이나 성도는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형식이 곧 율법이요 언약이요 말씀입니다.

말씀에 입각한 기도란 그 저주를 합당하게 받을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잠언 28:9에 보면,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잠언 15:8에 보면,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란 먼저 제사가 하나님께서 상달되어 흠양했다는 근거를 갖고 있어야 응답이 되는 법입니다.

그 이유는 맨 처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그 원칙이 정해져 있습니다.

출애굽기 20:24에 보면,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드린 제사가 하나님에게 응답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가 먼저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기도 통로로 막힙니다.

이는 곧 사람들이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저주받기를 요청하지 않고 도리어 축복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피조물이면서 마치 창조자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라면 창조주 앞에서 어떤 존재 의미가 있는가를 물어야 될텐데 선악과 따먹은 이후로 이런 질문 자체를 아예 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이 신인양 여깁니다. 신이란 무조건 죽거나 없어지면 안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런 성질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감이 계속 시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저주 안에 있게 되면 악마는 차마 그곳까지는 따라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자신이 저주받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갖고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바다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저주를 부당하게 여기면서 평소에 살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은 망해도 본인은 절대로 망하거나 패배하거나 실패하거나 하는 저주를 받아서는 안되는 존재라고 간주하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늘 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 대해서 얼굴을 외면하게 됩니다.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이 감람산 기도가 발생됩니다.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임을 고백하는 경로가 요구됩니다.

야고보서 1:13-15에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에게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다 아십니다.(마 6:6-8)

단지 성도의 몸은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가 새겨지기 위하여 제공된 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뜻과 아버지 뜻 사이의 간격에 주목하면서 우리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06-26 09:44 

133강-눅22장 39-46(최후의 기도)1206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2장 39절에서 4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5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2:39-46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실 때에 제자들이 거기에 합류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는 아버지의 뜻에 아무 쓸모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에 쓸모 있는 인간들이라서 제자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어떤 덕을 보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에요.

성도가 하나님 일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 일에 보탬이 전혀 안됩니다. 제자들도 보탬이 안돼요.

그런데 성도가 왜 성도인가, 예수님 홀로 하신 그 공로에 염치없게도 덕을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성도는 좀 뻔뻔스럽지요. 성도는 늘 이야기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 전혀 지금도 쓸모가 없다.

그런데 구원은 되었다.’ 이것을 가지고 성도의 멱살을 잡고 따지면 안 되는 거예요.

‘너는 어떻게 성도가 되었는데? 네가 나보다 뭘 잘해서 성도가 된 거야? 임마, 임마, 마, 마, 마!’

이렇게 붙들고 막 밀어붙이면서 ‘네가 뭘 내세울 것이 있어서 성도가 되었는데?’라고 하면 우리가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괜찮은 기도 같으면 기도할 때 넣어줍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 안 넣어줍니다.

중보기도라는 그런 사기에 넘어가지 마세요.

우리는 백날 기도해도 소용도 없고 제자들도 예수님의 기도에서 그냥 나가떨어진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그 아버지의 뜻과 자기 뜻과의 그 차이를 아시는 분이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는데

내 소원과 예수님의 소원이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예수님 외에 누가 알겠습니까? 아무도 모르지요.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제자들로서는 참 억울합니다. 사람이 기도정도는 자기도 할 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잖아요.

그런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요구한 것은

‘너는 네 기도하고 나는 내 기도하자’가 아니라 ‘네 기도를 접고 내 기도에 합류하라.’는 거예요. 

기도기도도 아니니까 접고……, 아버지 뜻도 모르면서 무슨 기도를 해요, 그것은 자기 뜻이지,

기도는 접고 내 기도에 합류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를 접고 주님의 기도에 합류하려면

무엇을 통과해야 되느냐하면 시험이라는 것, 유혹인데 그 유혹이라는 갭을 넘어서 있어야 돼요.

유혹이라는 갭을 넘어서서 기도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기를 40절에 보면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라고 했거든요. 시험이라 하는 것은 시험하는 자가 있는데 그게 마귀입니다. 악마가 이미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몰라요.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만 알고 있습니다. 그 유혹의 내용에 대해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아니까. 

그래서 시험 들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이미 너희에게 시험이 덮치고 있다는 겁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자기들이 따로 기도하면 이것은 백발백중 시험 듭니다.

그래서 시험 들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자리, 어떤 영역에 들어와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기도의 영역 속에 들어와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도 알고 자기 뜻도 알고 악마가 시험하는 내용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이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설정해 놓은 기도구조에 제자들이 들어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들어오지 않고 어떻게 되었는가? 45절 끝에 보면 제자들이 슬픔으로 인하여 잠이 든 거예요. 슬프다, 슬프다, 하다가 나중에 지쳐서 잠이 들어버렸다는 거지요. 기도는 잠자고 쉬었다 또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기도시간을 정해서 하라든지,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하라든지, 내가 떠나고 난 뒤에 하루에 서너 번씩 기도하라든지 그것이 아니고

나와 같이 합류할 타이밍을 너희가 놓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꿇어앉아서 중얼중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기도가 아니라 타이밍 문제,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할 타이밍 안에서 기도할 경우에만 주님의 기도에 합류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기도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몰라요. 그냥 기도 하면 되는데 …….

그 당시 종교가 없었습니까? 종교가 많았습니다. 종교의 구성 요소는 뭡니까? 그저 비는 거잖아요.

그냥 빌기 미안하니까 성의와 정성을 다하여 비는 겁니다.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정갈하게 해서 정화수 떠놓고 비는 것,

그렇게 빌면서 스스로 반성하기를

주님한테 벌 받을 짓을 한 것이 있는가, 돌아보면서 이것이 잘못되었나, 저것이 잘못되었나, 반성하게 되면

‘네가 이 잘못을 알렸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회복시켜줄게.’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일반종교인데

모든 종교라는 것은 사람이 만든 거잖아요. 

  그렇게 기도를 하게 되면 기도하는 내내 중요한 것은 누가 중요한가 하면 기도하는 당사자 내가 중요한 겁니다. 기도하면서 다짐에 다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뭐냐 하면 기도하면 할수록, 새벽제단 쌓아가면서 기도하면 할수록 ‘역시 중요한 것은 나밖에 없어.’라는 것을 더욱더 확신하게 되는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기도하면서, 그것도 열 내서 기도하면서 점점 더 그것을 수긍하게 되는 겁니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지려면 내가 기도해야 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천하에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그 중요한 나를 방치하면 안 되지요.

기도를 해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이 귀한 나를 포기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젊은 사람들에게 교훈하기를

우선 너 자신부터 사랑하라,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그런 말을 수십 번 들었는데 아직도 이해가 안돼요.

너 자신을 사랑하라, 이것은 너 자신을 미워하라는 예수님 말씀과 분명히 정 반대인데

어떻게 너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는 그 말이 젊은 사람들에게 용기가 되는지,

그 소리를 듣고 용기를 얻는다는 사람들은 평소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대체 그것이 왜 용기가 되는지,

저 같으면 ‘너 자신을 미워해.’라고 하고 싶은데 ‘너 자신을 미워하라.’고 하니까 절망에 빠지고

반대로 ‘너 자신을 사랑해.’ 하니까 갑자기 불끈 힘이 솟아서 ‘그래, 주저앉을 수는 없어. 나는 할 수 있는 거야.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거야.’ 하고 일어서더라는 말이지요. 

그런 것을 보면서 평소에 사람들이 무슨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굉장히 궁금해요. 지금도 그것을 탐구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할 일도 없어서 그런 것이나 탐구하고 있습니다만. 근본적인 것은 이겁니다. 왜 사람은 자기를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가, 그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자기가 창조자가 아니잖아요. 피조물이잖아요. 피조물 같으면 만들어진 존재 아닙니까? 만들어진 존재가 자기를 만들어준 분보다 만들어진 내가 더 중요하다고 하면 나라도 화가 나겠다는 말입니다, 나라도! 집에 있는 개보고 ‘짖어라.’ 하니까 ‘나는 짖기 싫거든요.’ 할 때 나라도 화가 난다 그 말이지요. 저 개를 왜 키우지? 사료를 왜 먹이는데? 

  괴테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류는 발전해도 인간은 동일하다.’

사극에 나오는 개 모습 한 번 보세요. 현대의 개와 사극에 나오는 개의 모습이 별 차이가 안나요.

현대의 개는 사료 먹였다고 점잖고 침대에서 자고 옛 조선의 개는 마당에서 뒹군다고 해서 차이가 날 것 같습니까? 똑같지요.

개뿐이겠습니까?

인간도 과학이 발달하고 우주선이 도킹하고 뭐가 되는 것 같은데 다비드 조각상의 벗은 몸이나 오늘날의 몸이나 똑같지요.

인간은 이상하게 달라지지 않으면서 달라졌고 발전했다고 우기는 그 일방적인 사랑,

그것은 누구에게 유혹받아서 그렇게 되었느냐는 말이지요. 

  그 당시에 유대교도 있었지만 이방종교도 많았어요.

종교가 많았다는 것은 이미 기도의 노하우들이 쫙 깔려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내가 기도하러 간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따라간 거예요.

막상 예수님이 기도하고 있을 때 그들은 잠들어 있었다 그 말이지요.

왜, 무엇이, 왜 제자들이, 기도가 뭔지 뻔히 다 안다고 우기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기도에 합류가 안 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그 말입니다.

기도라면 누구나 다 안다고 여기는데. 교회라는 것이 새벽기도 가지고 버티잖아요. 

총신의 어떤 교수가 있어요. 박아론 교수라고 그 이름을 차마 밝히기는 좀 그렇지만 그 교수가 하는 말이

‘교회 부흥은 오직 새벽기도만 하면 교회는 부흥된다.’는 거예요.

그 말은 사기를 합리화한다는 거예요. 새벽에 성경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없을 것 아닙니까?

새벽에 오는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 새벽에 와서 뭘 기도하겠습니까? ‘목사, 네 입 다물라.’ 그런 뜻이거든요.

‘설교 대충 끝내라. 지금 내 기도가 급하다. 본격적으로 내가 기도할 것이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라.’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사업이 어떻고, 자식이 어떻고, 시험을 앞두고 있고, 성적이 떨어지고, 이유 없이 실실 아프고, 이사날짜 다가오고, 고부간의 갈등이 있고, 부동산은 안 팔리고 있고, 전부 다 그런 것이라는 말이지요.

목사 같으면 교회 부흥이 안 된다든지 심방을 빡세게 했는데 그 사람이 다른 교회 가버렸다는 식의 내용들이라는 말이지요. 

이미 기도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래서 그 교수는 말하기를 새벽기도만 하면 교회는 저절로 부흥된다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의 기도가 교회 부흥시키려고 기도하는 겁니까?

그들의 아쉬운 점을 대신 기도해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주님의 기도는 뭐냐,

네가 속해 있는 세계는 마귀의 유혹, 시험에 푹 절어 있는 세계이고 이 예수님의 세계는 영적 세계라는 겁니다.

육의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건너려면

악마의 유혹을 거쳐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자에게만 영의 세계에 진입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유혹에 푹 빠지지 않기 위해서, 유혹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한 거예요. 

이것은 너희들이 잘 할 수 있는 그 기도로서는 오히려 유혹을 부르지요.

제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기도하면 할수록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새록새록 더 느끼고

그것을 더욱더 각인시키고 그것을 분명히 더 확신하는 그 시간들이 기도하는 시간들이에요.

제가 목사님들하고 수십 년 성경을 공부했는데 어떤 사람은 몇 년 하다가 안 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나중에 들려오는 뒷담화를 들어보니

‘이 근호 목사는 복음은 가르치는데 왜 기도를 안 가르치는가?’ 그 말이거든요.

그 소리를 딱 들으니까 선교단체에서 이야기하는 두 바퀴가 생각나요. 

  균형 잡힌 두 바퀴, 기도와 말씀, 말씀과 기도, 이것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디모데전서에 나오는데 기도와 말씀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그런 말씀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해도 나오는 결과가 뭡니까?

역시 내가 제일 중요해, 결론이 뻔한 거잖아요. 남은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 돼, 그 이야기잖아요.

그것을 예수님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다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험, 악마가 쳐놓은 마지막 최후의 덫을 언급한 거예요.

그것은 바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이 간격이 벌어져 있음을 누가 아느냐 그 말입니다.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이 간격이 벌어져 있다는 것은 그 벌어짐을 안다는 자체가 이미 시험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 뜻을,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중요합니다.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내 뜻입니다.’

이 내 뜻을 곧 아버지의 뜻으로 알고 있는 사람,

그 차이와 간격이 벌어지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마귀의 시험에 빠져서 빡세게 기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 뜻 따로 있고 아버지의 뜻 따로 있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렇다면 내 뜻은 무엇입니까, 와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물을 수 있어야 돼요.

그것을 물어야 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묻지를 않아요. 

왜, 내 뜻이 아버지의뜻이고 아버지의 뜻이 내 뜻인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 아닙니까?

신이 나고 내가 신이고, 그렇다는 말이지요. 내가 곧 신이니 신이 하는 말이 곧 신의 뜻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믿는 신은 나를 위하는 신이지 나를 버리는 신, 나를 미워하는 신, 나를 저주하는 신은 나는 신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미 자기 뜻으로 굳혀져 있는 입장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스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무덤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 거예요.

사람이 산을 찾는 이유가 뭡니까?

자살할 자리 찾기 위해서 산을 찾지는 않잖아요. 어느 바위에서 떨어지는 것이 좋을까, 그런 사람 가끔은 있지만. 

산을 찾는 것은 원기를 회복해서 산을 내려갈 때 원기왕성하게 내려가고 싶어서 산을 찾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청하는 시간을 초월한 시간, 공간을 초월한 공간,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아버지의 뜻과 함께 있는 그 공간과 시간이라 하는 것은

스산한 분위기가 도는,

다시 말해서 내가 최고야, 라고 여겼던 것은 결국 마귀가 하늘나라 못가도록 하기 위해서 마지막 쳐놓은 그 지뢰밭 입구에서 거기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잠들어 있는 내 모습을 다시 한 번 발견하는 새로운 초월의 영역, 바로 그곳으로 우리를 초대한 겁니다.

지난 한 주간, 지난 몇 년간, 아니면 우리의 한평생, 너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시험의 영역 대를 이기지 못하면 결국 잠자는 것이고 죽은 자라는 거예요. 죽은 자! 

 아버지의 뜻에 비추어서 죽은 자예요.

왜, 기껏 아는 것이 내 뜻 밖에는 안 되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 뜻의 확장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내 뜻의 확장 곧 자기의 확장이죠.

자기가 연장되는 것.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세월이 우리를 매일같이 뜯어먹는다고 했어요.

닥터피쉬가 와서 뜯어먹듯이 세월이 날마다 우리를 뜯어먹고 있는 거예요. 와글와글 몰려와서 다 뜯어가요.

시간자체가 와서 뜯어먹는데 다 뜯어먹고 나면 나중에 목사는 혀만 남을 거예요.

혀마저 뜯겨서 다 날라 가 버리고 나중에 장례 치르고 한 몇 년 지나고 나면 ‘그런 사람이 있었나?’ 

우리는 애초부터 없는 존재에요. 그래서 무에서 창조한 겁니다. 없는 존재를 다시 원상복귀 시키는 겁니다.

세월이라는 시간을 동원해서 뜯어먹게 해서. 내 뜻이라는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내 뜻은 매일같이 뜯겨야 돼요,

시간 앞에서. 내 뜻이라는 것이. 내 뜻이라는 것이 그 자체가 악마의 시험이 조작한 거예요.

악마가 선악과 따먹은 인간에게 ‘너는 신이야.’ 해서 그 악마가 만들어낸 그 신의 모습이 우리 모습이에요.

 계속 뒤에서 부추기고 태엽을 감아요.

태엽이 풀리면 다시 감아서 ‘너 자신을 사랑해.’ 하게 되면 ‘그래,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자기 사랑하는 일을 하게 되고. 

거기다 교회 가서 종교적인 것을 배운 것이 있어서 성만찬에다 세례에다 무슨 새벽제단을 쌓아서 효과 본 사람이 있다니 효과 좀 보려고 그것도 어울려서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효과 좀 보려고 온갖 궁리를 다 하고, 그런 순간에도 모든 육체는 세월에 다 뜯겨가고 있고 ‘역시 나는 훌륭해.’라고 외치는 그 순간에도 닥터 피쉬가 와서 다 뜯어가니 해체되어 가고 있고, 분해되어 가고 있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 뜻이 무엇이며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그 간격을 알아야 돼요. 그 간격을 알려면 파티장이나 결혼식장이나 그런 화려한 곳에 가면 안 되고 장례식장에 가야 돼요. 

요새는 장례식장에 가도 안돼요. 왜냐, 관에 누워있는 것이 내가 아니거든요. ‘아이고 안됐다. 이렇게 더운 날 죽어서 시체에 땀나고 진짜 안 되었다. 난 아직 살아 있는데.’ 이렇게 하지요. 그러니 장례식장에 가도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아예 나마저 죽은 자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는 어떤 영역, 마당, 그 쪽에 가 있어야 돼요.

그 쪽에 가게 되면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아는 겁니다.

그러면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을, 그리고 다른 말로 하면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의 진입에 성공한 그분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는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기에 천사가 다 와서 돕는가 그 말입니다. 

 오늘 본문 43절에 보면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하늘로부터 온 사자니까 천사지요, 그 천사가 힘을 돕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우리 같으면 ‘이렇게 힘을 도울 것 같으면 에어컨이나 좀 가져오지 에어컨이나. 시원하게!’ 힘을 도왔는데 어떻게 되었는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이것이 도와준 겁니까? 하여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할 때의 내 원이라고 하는 것은 기도를 해도 편안하게 자동으로 기도가 되는 것, 땀방울이 피 방울 같이 되는 그런 기도 말고 가만있어도 저절로 기도가 되는 것. 

사람들이 그런 기도를 하기 위해서 동원한 기구가 있어요. 그것이 천주교 신자들, 불교신자들이 갖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묵주라는 것이 있어요. 알맹이를 하나씩 돌려버리면 자동적으로 자기 최면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절로 방언되고 절로 기도 다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사람은 행동을 반복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할 때 그만큼 수월하게 되는 겁니다. 징크스가 되고 하나의 버릇처럼 되는데 야구선수가 타석에 설 때 그냥 서게 되면 못 쳐요. 그런데 방망이로 홈 플레이트도 한번 탁 치고 모자도 한 번 벗었다가 다시 쓰고 그 다음에 무릎도 한 번 치고 폼 한 번 잡고, 삼성의 박한이 선수가 그렇게 하거든요. 

이렇게 하고 있으면 투수하고 캐처는 그 의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고 그리고 나서 홈런도 치고 그런다고요. 그처럼 기도를 돕기 위해서 천사가 돕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습관으로 도우면 된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을 도와주는 것은 뭐냐 하면 ‘죽어라’ 그 말입니다.

죽어라! 이것은 너의 확장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너 자신을 마감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마감하는가, 내 뜻이 마감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돼요.

그야말로 피 방울이 땀방울이 될 때까지 기도하는데

 ‘내 뜻이 마감되게 하옵소서.’ 왜, 내 뜻은 백날 몸부림 쳐봐야 마귀의 시험, 그 굴레에서 못 빠져 나오니까.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을 두 개 다 알아야 돼요.

만약에 아버지의 뜻을 모르는 상태에서 내 뜻만 고집해 버리면 무엇이 아버지의 뜻이 되느냐 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는 그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안다니까요.

어렵지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과 자기 뜻을 다 알았어요.

제가 방금 아버지의 뜻이 죽음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죽음이라고 하니까 여기에 객기를 부리는 사람이 나타날 수가 있어요.

뭐냐, 악바리, 죽기 살기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주님도 죽었으니까. 그것이 금식이라는 거예요. 

 솔직하게 다이어트 한다, 그러면 될 것인데 그것이 아니고 다이어트 하는 것을 속이면서 금식기도를 한다는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금식기도를 하게 되면 금식기도를 한 그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서 금식기도하지 않는 나는 가고 금식기도 한 나가 고스란히 새로운 나의 자아상으로서 새로운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르고 그냥 내 뜻만 버리면 되는 줄로 알고 하는 거예요. 내 뜻을 종이에 적고 그것을 지우고 또 지워보세요. 나중에 종이 구멍 납니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어요. 

내 뜻을 없애면 주의 뜻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내 뜻을 없애봐야 나중에 구멍만 난다니까요. 왜 내 뜻을 없앤다고 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가, 우리가 뜻을 생각하는 그 자체가 처음부터 원천무효에요. 네가 하나 안하나 주께서 신경도 안 써요. 처음부터 ‘주여 내 뜻입니다.’ 해 놓고 ‘주여, 내 뜻 지웁니다.’ 뭘 어쩌라는 겁니까? ‘네가 네 뜻 만들어놓고 그것을 또 지우고, 그것을 나보고 어쩌라고?’ 처음부터 그것은 있을 필요도 없는 것이에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나’라고 하는 그것을 아무리 연구해도 몰라요. 

‘나’라고 하는 것은 피조물 차원에서, 옆 사람 차원에서, 같은 이웃 차원에서, 같은 인간 차원에서 아무리 주고받고 탐구해 봐도 내가 누군지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창조주의 피조물 된 입장에서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지 도토리 키재기처럼 같은 인간끼리 ‘당신은 나의 인생의 모델입니다.’ 백날 해도 그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다윗을 본받자, 예레미야를 본받자, 아브라함을 본받자, 백날 본받으라고 해 봐야 돈 내라는 소리밖에 더 됩니까? 같은 인간들끼리 서로 본받자고 해도 그것은 소용없는 거예요. 

 그것은 나를 더욱더 고귀하게 가꾸려는 자기 사랑의 또 다른 방책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의 뜻과 나의 뜻을 둘 다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죽음이라 하는 것은 기도하다가 단순히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이 아니고 그것은 바로 저주입니다. 예수님이 왜 저주를 받는가, 우리는 저주받은 예수님을 믿어야 돼요. 왜 저주받는 예수님인가, 예수님은 본인은 죄 지은 적이 없는데 택한 백성의 죄를 가져갔기 때문에 예수님한테는 죄가 있는 겁니다. 

자신이 지은 죄는 아니지만 져야 될 죄,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져야 될 언약에 의한 그 숙제, 사명이 있는 거예요. 그 사명은 흠 없는 양이 죽어서 흠 있는 양들이 구원받는 양 되게 하는 그 사명을 위해서 죄 있는 양들이 받아야 될 저주를 예수님이 전부 다 감당을 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을 짧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은 저주를 받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은 뭐냐, 저주받는 거예요. 그냥 단순히 목숨 끊어지는 죽음이 아니고 저주 아래 들어가는 거예요. 

저주 아래 들어가면 마귀가 못 따라옵니다. 왜, 마귀는 저주 안 받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에. 마귀가 알아서 저주받지는 않거든요.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하는 것처럼 못 들어와요. 다니엘 세 친구가 멀쩡한 상식적인 세계, 육의 이 세상에서는 자기들이 구원받은 티가 안 났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가 어디 갔느냐 하면 포항제철에 갔어요. 거기 용광로가 있습니다. 가보니까 용광로가 보통 큰 것이 아니에요. 제가 그 공단에서 근무를 했어요. 그 용광로의 온도가 수천 도에요. 태양 표면처럼 온도가 강해요. 모든 별의 최후의 금속이 쇠거든요. 쇠를 녹인다는 것은 모든 우주의 근본적인 에너지의 총화가 거기 다 들어간다는 말인데 그것이 얼마나 뜨거운 거예요? 

그런데 다니엘의 세친구가 거기에 들어갔다 그 말이지요. 그것도 칠 배나 온도를 뜨겁게 했습니다. 거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살아났어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보고, 조용히 앉아 있는 우리보고, 우리는 ‘오늘 하루 얌전히 예배드리는 것으로 오늘의 우리의 신앙은 때웁시다.’ 하고 있는데 그런 우리보고 그 속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왜, 그 속에 들어와서도 과연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를 보자는 겁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에요. 목숨을 불에 태운다는 말이 아니고 저주 아래 있느냐를 보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저주받으라는 소리를 좀 많이 들어야 돼요. 주께서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누가 좀 나보고 저주하는 사람 없나.’ 저주 받으세요, 저주를 받으세요, 이래가지고 저주를 받아야 돼요, 저주를! 저주 속에서 살아 있는 그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걱정할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닥터 피쉬가 뜯어먹는 입장에서 이래도 저주받고 저래도 저주받고 가만있어도 저주받고 있는 중인데 이왕 받는 저주 옴팡 받읍시다. 늙는다는 것도 저주니까. 

예수님 보고 이렇게 합니다. ‘나 저주 받는데 너 여기 참여해야 된다.’는 거예요. 참여해야 영적세계에서의 생명과 마귀의 유혹 안에서의 생명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차이난다는 거예요. 영적세계의 죽음이라는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의 죽음이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그 갭을 건너와야 돼요. 로마서 12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유명한 말씀인데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영적 예배니라.”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저주에 합류한 몸인 것을 제발 주위 사람들한테 저주를 좀 많이 받아서, 그렇게 많이 받아도 허허, 웃을 수 있는, ‘주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중국말로 쎄쌔, 영어로는 탱규, 하는 것처럼 저주를 많이 받는, 저주 못 받아서 환장한 사람처럼, 저주를 받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이 바로 이런 경로, 이런 길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 길로 가셨구나, 하는 그 좁은 길을 혹독하게 느끼면서 사는 자, 이게 성도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뭐냐, 구원받고 나서의 내 뜻은 없고 무조건 아버지의 뜻이지요, 내 뜻은 무조건 저주받을 것이니까요, 구원받기 전에 내가 나라고 있을 때의 그 내 뜻과 그리고 그런 저주받은 나를 구원하신 아버지의 뜻 그 둘 사이의 간격이 그 안에서 계속 유지가 되는 거예요. 그 차이가 계속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주기도문 바로 앞에 이런 것이 있지요. 7절 중간에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 말은 내가 구원받기 전에, 내가 예수님 성령받기 전에는 나는 나한테 꼭 필요한 것, 기도를 하지 않으면 정말 생기지 않을 것 같은, 기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벌을 받으면, 기도 안한데 대한 벌을 혹독하게 받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일들, 그런 것만 골라서 기도했던 나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되돌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내가 기도안하면 안생기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그래서 내 맘속에서 내가 최고라는 것을 훼손시킬 요소를 내가 제거해 버리는 식으로 기도해 온 거예요. 

  ‘아, 저것만 없다면……, 내 자식만 잘되면 나는 괜찮은 아비인데……, 우리 집에 돈만 좀 생기면 나는 살만한데……, 내가 기도해서 저 재앙을 없애버려야겠다……’ 그런 식으로 내가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나로 계속 유지해야 된다는 것, 너는 죽어도 나는 영원히 죽으면 안 될 만큼 나를 사랑하는 그 모습에서 터져 나온 모든 기도들,

기도들을 악마가 그런 식으로 부추겼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도, 그것이 저주를 함께 받는 주님 안에 있는 기도입니다.

그것이 산 제물로 오직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명예를 위해서 몸 바쳐서 나오는 기도이며

기도 안에는 둘 다의 내용이 포함됩니다. 

‘주여,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는 것도 나오고 ‘그런 내가 나 된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둘 다가 포함되어 있는 기도, 이기도가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겁니다. 잠언서에 보면 인간들이 자기 뜻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런 것을 경고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어요. 잠언서 28장 9절에 보면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가운데 기도하는 것은 기도도 욱, 하고 구역질나는 기도에 불과하다 그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잠언서 15장 8절에 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의 핵심이 나옵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옛날의 기도는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제단의 제사가 흠향이 된 이후에 기도를 할 수가 있어요. 이것은 가인의 제사가 백날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하신 거예요. 가인이 백날 제사하고 기도해도 그것은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러나 아벨의 제사와 그 기도는 응답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법이 주어지게 되면

기도는 함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뭔가 통한다는 것이 확보된 상태 안에서만 기도를 해야 그 기도가 효용이 돼요.

그게 뭐냐,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아야 되는 겁니다.

흠없는 제물을 하나님께서 흠향했을 경우에만 비로소 기도가 되는 거예요.

솔로몬 성전에서 영광이 있을 때 멀리서 기도해도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해서 한 기도가 아니고 흠없이 죽었던 그 분의 공로만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몸을 주님 앞에 산 제물로 드리겠다는 기도기 때문에 그 드려진 몸에 대해서 주님의 공로, 정보가 거기에 박히게 되는 겁니다. 

비로소 그 내용을 거기에 담을 수가 있어요. 그렇게 담게 되면 그 내용을 뜯어보면 그 안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 뜻은 이것이 내 뜻이었고 아버지의 뜻은 이것이었고 그 둘 사이에 간격이 벌어졌고 그 벌어진 간격은 예수님 홀로 하신 죽음만이, 그 피만이 이 간격을 좁혀서 저는 용서받았습니다, 하는 내용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끝으로 히브리서 7장 25절의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해서 간구하심이니라.” 

  지금도 주님의 기도는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목숨 바쳐 기도하고 금식으로 기도하고 빡세게 기도한다고 해서 그 기도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아니지요.

오직 예수님의 기도로서만 구원되는데 예수님의 기도가 임하고 말씀이 임할 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바로 내 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아는 것,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기에 악마의 시험을 넘어설 수가 없고 악마의 노리개가 되면서 그동안 불안과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면서 기도하는 그런 식으로 죽은 자로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이 올 때,

이런 나를 이렇게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그것이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 기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기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살았던 이 세상에 그대로 살게 하십니다. 그대로 살게 하면서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의 욕망과 육적인 탐욕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하지요. 야고보서 1장 14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지만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라 하는 것은 자꾸 당기는 것이 오면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그런 욕심에 끌려가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우리는 자기 욕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서, 그리고 그 동안 이 욕심을 달성하기 위해서 했던 그 기도가 사실은 나의 본색이고 본심인 것을 그대로 드러내도록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저주 받을 자가 바로 나입니다, 하는 것을 그대로 고백하는 겁니다.

이 저주는 저주이어야만 하는데 이 저주를 누가 홀라당 가져가신 분이 있기에 나는 그 분만 믿습니다, 라고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다시 돌이키게 만드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너는 이렇게 하라, 가 아니라 너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씀,

그 말씀이 예수님의 기도에 실려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숨어 있는 것, 사실은 숨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바깥으로 기어나가지 않으려고 갇혀 있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끌고 겟세마네 동산이라는 위험한 곳으로 가셨으니 우리가 얼마나 죽은 자며 잠자고 있는 자에 불과하고 악마의 시험에 푹 빠져 있다는 것을 낱낱이 드러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기도의 소리를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기를 원한다는 그 아버지의 뜻이 우리를 덮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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