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무서운 심판날(눅10;12-16)이근호110109

아빠와 함께 2013. 8. 29. 11:17

 

본문 : 누가복음 10:12-16
제목 : 무서운 심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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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1-01-09 13:15 
무서운 심판날

2011년 1월 9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10:10-16

(눅 10:10, 개역)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눅 10:11, 개역)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 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눅 10:12,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 10:13, 개역)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눅 10:14, 개역)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 10:15,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눅 10:16, 개역)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외친 심판은 인간으로부터 어떤 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시도에도 벗어날 수 없는 심판이 하나님쪽에서 일방적으로 덮쳐진다는 것을 통보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가만있어도 심판이요 가만 있지 않아도 심판입니다.

억울한 사기를 당해도 심판이요 사기를 쳐도 심판입니다. 사람들의 일상이란 그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에게도 돌아오는 생각의 순환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에 몰입하다가 가끔은 창 밖에 연이어 지나가는 긴 자동차 행렬을 바라보다가 문득 젊었을 때,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다방에서 하루 종일 쭉치고 앉았던 때를 생각하다가 다시 정신차려서 컴퓨터로 되돌아옵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의 순환에는 전적 심판이라는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 소식을 듣게 되면 내가 어디서 문제이고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살피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다 그런 자기 개선이나 반성 같은 것도 부질없는 짓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 알고 있는 잘못으로 인하여 심판이 덮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심판이 들이닥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보고 거기서 나오라고 독촉하는 취지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왜 네가 거기서 나오지 못하는지를 제대로 알려주시기 위한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협의 하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조치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구원이라는 것도 같이 이런 식으로 병행해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산이 높은 곳에는 반드시 골짜기 깊게 패여있게 마련입니다. 산 따로, 골짜기 따로가 아닙니다. 높은 산이 있음에 깊은 골이 있는 겁니다.

구원과 심판의 관계라는 것이 이런 겁니다. 심판 소식이 전달되었다는 것 자체가 곧 구원작업이 이미 개시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는 어디서 오는 겁니까? 그것은 창세기 3:15에서 제시된 그 판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여자의 후손의 관심사는 뱀의 후손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악마를 치게 되면 악마의 아이디어로서 조성해 놓은 인간들 각자의 영역과 또한 공동체의 영역을 모조리 불사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뜻에 맞지 않는 환경이라는 단정 지음은 우리 인간들이 알 수 있는 기준이나 표준이 동원되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반성하고 개선을 시도해봤자, 우리 인간의 행위가 개입해서 심판을 모면할 수 있는 그런 심판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동안 우리는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를 반대로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홍해 이야기를 잠깐해 보지요. 홍해를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 사람과 애굽 군대가 마주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은 엄연히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살아 있다’는 말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죽음은 아직 자신들에게 들이닥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홍해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하므로서 이스라엘에게는 죽음이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환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곧 홍해바다란 마중 나오시는 ‘하나님이 제시하는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애굽 군대들에게는 그 ‘죽음의 세계’를 인정하고 싶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나름대로 생각하는 죽음의 세계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애굽 군대는, 자신들 손으로 저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겁니다. 평소에 자신들이 생각해 놓은 죽음의 힘으로 저 이스라엘에게 덮치게 하겠다는 겁니다. 자신들이 자신들을 살리는 방식과 반대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런 죽음의 방식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죽음의 세계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죽음의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데리려 마중 나오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도 생소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흔히 인간들이 알고 있는 생명과 죽음의 방식 틀에 입각해서 구원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은 평소에 자신을 무능하게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약은 모의고사라면 신약의 실제 수능시험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불 심판 때는 옆 동네로 피신하면 살 수 있지만 이 본격적인 심판 때인 오늘날에는 피할 곳이 전무합니다. 그것은 심판마저 우리 인간과 의논할 사항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심판받아야 될 세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이요 죽은 것도 죽은 것입니다.

오직 ‘생명’이라고 말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4:6) 이 말씀은 곧, 인간의 그 어떤 것도 길이 아니요 진리도 아니요 생명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애굽군대나 이스라엘이나 모두 실은 다 마땅히 죽어야 될 자들입니다. 

따라서 홍해 바다란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고 계신 진정한 삶과 죽음을 한꺼번에 보여주시는 자연 환경이 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바다 가운데서 살아난 것은 이스라엘 본인들이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 되고, 애굽 군대들이 홍해바다 가운데서 몰살할 것은 지극히 당연히 현상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오로지 자기 백성에게만 드러내시면서 동행하시고자 하는 겁니다. 악마가 가르쳐준 삶과 죽음의 기준, 그 자체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삶과 기준을 아는 것이 참된 구원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7:3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것은 실은 표절이요 ‘성대모사’ 같은 것들입니다. 이 교회 안에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위반자가 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같이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애굽 군대가 보기에 ‘위반자’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이런 심판의 증인이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자진해서 심판의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진해서 자신의 심판에 동의할 위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 6:14에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나도 친숙해진 세상과 끝장을 내는 힘은 이처럼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미 세상에서 죽은 자가 됨을 아는 우리가, 아직도 자신을 살아있을 가치가 있다고 우기는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런 태도는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조성됩니다. 이런 자만이 세상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때문에 살았지 자기 자신으로 살고 있다고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1-01-12 15:00 
누가복음10장12-16/무서운 심판날_20110109_111158

이근호 목사

 

말씀은 누가복음10장12-1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09페이지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개역개정: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3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4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께서「화 있을진저」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다른 우리말로 하면 ‘저주가 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주가 있을 것이다, 고 외친 그 대상 속에 누가 포함돼 있느냐 하며는, 우리가 좋다고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전부가 다 여기에 포함돼 있습니다. 이거는 너나 할 것도 없이 한꺼번에 우리가 기거하고 있는 이 거처에 저주가 있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이러한 예수님의 의견, 개인적인 사견에 대해서 우리는 귀담아 듣고, 도대체 내가 어디서 문제가 되었기에 ‘하나님께 심판을 당하는’ 것인지를 조사 해보게 되죠. 조사를 해보게 되면 별 문제는 없어요. 교회 잘 다니지, 신앙생활 잘하지, 애 잘 키우지, 열심히 돈 잘 벌지, 과음한다든지 음주운전도 하지 않고, 경찰서 들락거리지도 않고 별 문제가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무슨 기준에 의해서, 무슨 관점에 의해서 우리에게 ‘화가 있을진저…’ 울분을 토해내시는가.

 

우리는 당황스럽고 상당히 의아해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잘못된 것이 있어서 심판이다 하면 우리가 수정하면 되거든요. 반성하고. ‘아이고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고치면 될 문젠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 내용은 우리에게 특별히 어떤 잘못을 했다가 아니라, 우리에게 무슨 잘못했다는 게 아니에요. 이거 고치면 된다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이 애초부터 ‘심판 받도록 돼있는 땅’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이렇습니다. 네가 심판 당하는데서 빨리 빠져나와, 거기서 네가 개과천선해가지고 새 인간 돼서 벗어나야 된다 말이야. 라는 취지에서 심판을 얘기했다거나, 거기서 나오라고 하기 위해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그 심판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교회를 다녀 심지어 개척교회를 만들어도,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해도 그것으로 인하여 네가 당할 저주와 심판과 징벌에서 네 힘으로 빠져나올 재가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뭘 고치라는 문제가 아니에요. 만약에 2012년도 10월20일 주께서 재림한다, 는 이런 이야기가 들리면 그 소리 듣고 미리 호들갑을 떨어요. 그러나 그 호들갑을 떨 필요 없습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하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도 심판받고 사기 쳐도 심판받고 사기 당해도 심판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은 그냥 통보지 우리에게 뭘 촉구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을, 이런 예를 들면 적절할 것 같은데요, 집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다가, 오래 하다보면 지루하잖아요. 창가에 서서 긴 차량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거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문득, 옛날 젊었을 적 좋아하던 사람과 다방에 하루 종일 죽치고 있었던 생각이 날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고개 흔들면서 정신 차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마저 하고, 우리 일상이라 하는 것이 이렇게 늘 생각과 생각이 순환 고리를 이루는 거예요.

 

예수님 재림 생각했다가, 옛날 애인 생각했다가, 오늘 저녁에 뭐해먹지? 이런 생각하다가 다시 컴퓨터 앞에 있다가, 그러다 티브이 보다가, 자다가… 그렇게 늘 순환하는 겁니다. 하루 스물 네 시간 재림만 생각하는 사람 없어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대로 사세요’ 하면 그만입니다. 그대로 사시고, 내가 얘기하는 심판은 심판대로 오시고, …그것뿐입니다. 그냥 저주가 오면 온다는 걸 알면 되요. ‘아, 저주가 오는구나!’ ‘이 세상 끝장나는구나,’ 그러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얘기하면 누구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구원받는 사람이 있잖아요.’ 하는 거예요. 그런데 혹시 우리가운데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호들갑을 떨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심판을 행사하시는 그 하나님의 일방적인 작업과 병행해서, 또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자기 입맛대로(?) 구원하시는 작업이 또 있어요. 자신이 구원하시는 일에 맞닥뜨린 사람만 ‘건짐’을 받을 뿐인 겁니다.

 

고상하게 떤다고 해서 구원이 오는 게 아니에요. 심판이 일방적으로 쳐들어오듯이 구원이라는 것도 일방적으로 쳐들어오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구원 오는 것과 심판 거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조금이라도 거기에 대해서 관여할 수가 없어요. 손을 떼야 되죠. 심판을 받는데도 손을 떼야 되고, 구원을 당하는데도 우리는 손을 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의 구원에 대해서 ‘제발 손을 좀 떼 주세요! 오늘의 복음입니다.’ 이거는 어쩔 수가 없어요. 어쩔 수가…

 

지금 주님께서 우리와 협상하는 게 아닙니다. ‘심판할 테니까 정신 차려라, 이런 협상 같은 게 아니고, 우리가 심판을 천번 만번 강조해도 그 심판에서 면죄되고 심판에서 모면할 수 있는 방도가 우리 손에서는 나올 수가 없어요. 첨부터 생겨먹은 것이 그거기 때문에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생력이 우리에게는 생겨나지 않게 돼있습니다. 그냥 당하면 그냥 당하는 거예요. 그게 우리 입장이고 우리 처지인 거예요.

 

아, 심판! 있구나! 아, 지옥이 있구나!.

 

지금까지 얘기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무엇이 잘못 되었나’ 하는 것을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반성하고 회개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옳게 보이는 게 아니에요. 왜냐면 ‘우리가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하는 기준을 얘기할 때 우리는 기껏 만들어내는 게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나를 고치려들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게 문제가 되요.

 

 

‘나도 이정도하면 되겠지,’ 하는 방법들을 내가 만들어내고, 내가 만들어낸 방법가지고 자신에게 적용시키니 그냥 소꿉놀이고 혼자 종교놀이 하는 거지 그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 세상이 심판받는다는 기준은 우리 인간들끼리 머리 맞대고 연구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아니라니까, 이거는 문제 있어, 환경오염을 줄여야 돼, 탄소배출량을 줄여야 돼, 이렇게 염려해서 심판을 모면하는 게 아니에요!

 

심판 기준은 누가 하냐면,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예수님만이 아셔요!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뭐가 잘못됐다 하는 것은 주님만 알고 있는 기준인 겁니다. 그 기준을 주님께서는 그냥 백지에 글씨를 쓰시고 그림을 그리시는 거예요. 그림 중에 하나가 ‘심판받는’ 그림 그리시고 또 그림 중에 하나가 심판 받아 마땅한 인간들 가운데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건져내는 구원의 그림이 따로 있는 거예요. 심판과 구원이 같이 섞여 있는 겁니다.

 

골짜기 따로 있고 산 따로 있습니까? 산이 높은 데는 그만큼 골짜기가 깊게 형성돼있죠. 산과 골짜기는 함께 있는 겁니다. 심판이 있다는 말은 곧 구원이 있다는 말이고 구원이 있다는 말은 곧 심판이 있다는 말인데, 문제는 그 심판과 그 구원에 대해서 손톱만큼도 우리가 관여할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교회 나와도 구원받는 게 아니다 말이죠. 사람들은 자꾸 교회를 세우려고 해요. 자꾸 교회가 어쩌고저쩌고 얘기합니다.

 

묻고 싶어요. ‘구원 받았습니까?’ 이렇게 묻고 싶어요. 지금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려는 게 아닙니다. 구원을 하시는 것을 병행해서 심판하시고 심판이 있다는 이 말 자체가 구원받을 자에게는 구원의 능력으로서 심판 소식도 다가온 거예요. 심판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끝나가는구나. 그러니까 주님께서, ‘네가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야.’ 구원이라하는 것은 우리 밥상 앞에서 ‘고등어 먹을래, 갈치 먹을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는 심판이라는, 지옥불이라는 밥상이 달려들어서 아랫배를 확 쳐버리면 그 부딪히는 충격, 그 충격이 구원받는 충격이에요.(그 충격 받은 인간 좋겠다.-녹취자) 자고 있는데 뭔가가, 예를 들어, 게으름뱅이 아들이 아침 열시 넘어도 일어나지 않을 때 속이 상한 엄마가 상에 밥을 차려가지고 머리맡에 확, 밀어 부딪히잖아요. 그러면 ‘아얏~!’ 일어나 밥 먹어야지. ‘이 자식아 밥먹엇!’ 심판은 ‘너는 인간도 아니야! 하지만 내가 밥 준다.’ 라는 식이에요. 구원이라는 게.

 

구원하시기 때문에 심판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심판얘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대상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그래서 이 모든 말은 한 문장으로 얘기하면 ‘우리는 무능하다’입니다. 인간은 무능하다! 첨부터 무능했다. 무능한 세계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자신에게 무능하다는 그 예수님에 대해서 공격하는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구원이라는 밥상에는 심판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심판의 내용은 십자가 자체가 심판이니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심판하는 내용 아닙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것을 우리 밥상에 차려 우리 머리맡을 쳐버린다 이 말이죠. 치면 진짜 구원 받게 될 사람은 머리가 띵~! 하면서 십자가가 확, 쏟아지면서 ‘아, 저주받아 마땅하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것을 깨닫게 되는 그 순간에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그걸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크나큰 반발이 주어지죠. ‘뭐야, 이거!’ 이런 반발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그 심판의 말씀을 통해서 기이하게, 상반된 서로 다른 반응을 우리가 살펴봅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머리를 확 칠 때, ‘아, 맞습니다. 우리는 무능합니다.’ ‘내가 알아서 교회 다녀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 구원조차 주님의 일방적인 조치였던 결과입니다.’ 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뭐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십자가가 왜 이러는 거야!’ 라는 강한 반발이 등장하죠.

 

비슷하게 쉽게 알기 쉽게 얘기하면, 내가 이렇게 교회를 사랑하는데! 교회 다녀서 구원이 안 된다, 이 말이야? 그럼 뭐야! 그러면 나의 교회생활 능력을 무시해? 교회생활에 쏟았던 공로가 예수님을 모독한다는 말이냐? 라고 대드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 세우는 것마저도 왜 우리를 구원시키는 효과와 능력이 될 수 없는가 하는 것이 문제예요. ‘나운아’ 라는 가수가 있어요. 나운아도 있고 너훈아도 있고, 조용팔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어요. 이걸 이미지케이션 가수라고 하죠? 모창. 모방 이런 겁니다.

 

그런데 표절 이런데서는 구원의 능력이 안 나와요. 구원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야 되는데 예수님은 어떤 자를 구원하느냐 하면, 십자가를 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질 수도 없고, 질 마음도 없고, 그저 너훈아처럼 나운아처럼 조용팔이처럼. 성경말씀을 토대로 해서 그 규격들을 한데 모아서 뭘 세우냐 하면 교회를 만드는 거예요. 사도신경하고 세례주고 기타 등등.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어떤 종교단체와 집단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구원이 된다고 우기는 것은 구원의 능력이 안 나옵니다. 나올 수가 없어요. 그건 가짭니다. 표절이에요. 그게 예수님 오시기 전에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많은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을 표절해 왔었어요. 표절해왔을 때 진짜 구원자 되신 주님께서 지적을 한 겁니다. 지적할 때 그들이 뭐라 했냐면, 예수님을 위반자로 몰았어요. 하나님의 모세 법을 위반한 위반자. 그러면 오늘날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그를 위반자로 모는 그분을 우리도 동조하는 셈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위반자라 하는 그분과 위반자가 되고 싶어서 믿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때 오늘 본문처럼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한, 혹독한 저주가 있을 것이라 할 때, 그 심판에 대해서 같이 동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심판이야기 않으시고 그냥 순하게 나오셨다면 위반자라는 소리를 안 들었을 것이고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이 말은 예수님 속에는 우리 인간들 보기에 죽어 마땅한 것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 보기에.

 

하나님 믿는 착한 사람 보기에, 하나님 믿는 사람 보기에 저거는 인간도 아니야, 저거는 죽어 마땅해! 라는 요소가 이미 예수님이 품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걸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전체 무능한 자입니다. 라는 입장에 있을 때만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심판에 동조 못하는 거예요. 동조할 수가 없어요.

 

예수, 당신을 믿을 테니까 내 것 건들지 마세요. 이런 해괴한, 이건 말도 안 되는 협박이죠. 내가 예수 믿어줄 테니까 우리 교회 부흥해달라! 이게 무슨 장난입니까, 표절이죠. 우리 교회 옆에 수정교회 불타버리게 하고 우리교회만 놔두세요. 그런 협상이 여러분, 통한다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왜 그래야하는데?’ ‘이 교회는 우리가 만들었거든요’ ‘네가 어떻게 만들었는데?’ ‘날마다 기도하고 애쓰고 동영상 안 되고, 생중계도 안 되고, 맨날 전화오고 복음 전하려고 애썼거든요.’

 

그건 결국 뭐냐 하면, 표절이에요! 구원도 아니면서 구원받는 척 하는 표절. 나운아고 너훈아고 조용팔이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비주류입니다. 누구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재간이 우리 인간에겐 없습니다! 전무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달라요. 소돔과 고모라는 피하면 되는데, 그거는 예고편이니까 피하면 되지만, 구약은 그거는 아직까지 영화로 보면 되요. 이미지라거나. 또는 장식, 배경이라고 본다 이 말이죠. 본격적인 수능 이전의 모의고사가 구약이에요. 구약의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피하면 되는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심판주로 올 때는 피할 구멍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기도원에 있어도 소용없어요.

 

예고편이나 하나의 수능에서는 인간의 잘못을 실손하지만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신약시대에는 모든 걸 싹 쓸어버리고 첨부터 새롭게 하는 겁니다. 창조시대의 인간을 만드는 그 창조의 능력으로 새롭게 인간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 능력의 개입에는 구원받을 우리가 손을 댈 수가 없고,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고 일방적으로 하나님 아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로서 새롭게 다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그 만드는 원리, 기준을 우리 인간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은 미리 나와 있습니다. 그 약속이 뭐냐 하면 창세기 3장15절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개역개정』

 

오늘 일상생활에는 컴퓨터 하다가, 길거리 자동차행렬 바라보다가, 신문 보다가, 옛날 애인 생각하다가, 다시 밥 먹는 생각하는, 일상의 순환구조 안에서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에 말씀이 끼어들 여지가 있어요? 장사하다가 손님 오면 ‘예, 어서 오세요.’ 이러지 장사하다가 창세기 15절 아십니까? 우리의 일상순화구조에 끼어들 틈이 없지요. 그리고 끼어들어봤자 표절입니다. 창세기3장15절의 여자의 후손과 싸움으로써 모든 것이 결판난다는 그 이야기는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이 숙제는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이 신약시대에 주께서 이루어나가시는 거예요.(아멘)

 

그러면 구원은 뭐냐 하며는, 창세기 3장15절의 말씀이 완료될 시점에 끼어들 효과. 그 효과를 가지고 구원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은 주께서 친히 말씀을 다 이루셔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라고 되는 거예요. 우리는 완전히 전적으로 밀리게 되는 거지요?

 

다시 얘기할게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부담스럽지만.- 자기의 주어진 일상 속에 사는데 갑자기 치고 들어온 게 있어요. 뭐가 툭 치고 들어온다고요. 치고 들어온 것에 탁 부딪힐 때, ‘뭐얏!’ ‘너 심판 받아! 이 세상은 심판의 세계야!’ 치고 들어온다 말이죠. 치고 들어온 밥상엔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이 담겨서 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만남이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부딪힘을 당해 심판의 소식을 듣고 구원받게 된 사람은 그 밥상에 차려진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요.

 

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구원하면 그냥 낚싯대로 건지면 구원되는 문제지 그분이 십자가에 왜 죽었냐는 말이죠. 우리가 죽으라고 했습니까? 죽어달라고 했습니까? 당신이 죽어야 내가 산다, 그걸 요청한 적이 없는데 그냥 ‘너는 구원 받았어’ 라고 해서 보니까 거기 십자가에 피를 흘리고 있다 이 말이죠. 그때부터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도대체 나아게 다가온 심판받는다는 이 소식과 예수님 십자가에 피 흘림의 소식과 뭔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감 잡게 되요. ‘여기에 무슨 연관이 있을 것이다’ 라는.

 

나의 구원이 내가 반성하고 회개해서 구원되는 문제가 아니라면 그런 능력도 구원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전적으로 밥상위에 있는 십자가와 주께서 ‘일방적으로 통보한 심판’과의 관련성을 갖고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것을 감을 잡게 되는 거예요.(목사님의 줄기찬 신앙고백-녹취자) 그때부터 뭐냐면 “왜 당신은 십자가에 죽으십니까?” 라고 되는 겁니다. 교회를 어떻게 키울까요? 이번 대 심방은 어떻게 됩니까? 일 년 예산은 어떻게 됩니까? 관심이 거기 있는 게 아니고, ‘왜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받습니까?’ 십자가가 있어야 구원되는 이유가 뭡니까, 에 관심 두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살았다고 여기는 그 인식이 사실은 죽어 마땅한 인식이고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 세계가, 제대로 사는 영생의 세계라는 것! 죽음의 세계와 사는 세계를 뒤바꾸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좀 어렵지요? 그러면 구약을 예로 들어봅시다. 구약에 홍해바다라는 게 있어요.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애굽 군대가 바로 따라오고 그 앞서 구원받을 히브리인들이 홍해바다 속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뒤따르는 애굽 군대의 입장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날마다 ‘나 구원받았다’ 까불면서 히브리사람은 우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 안 되고 , 구원은 반드시 저쪽 애굽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되요. 공격하는 입장. 하나님의 원수된 입장.

 

하나님의 원수 된 입장에서 구원되었기 때문에 원래 하나님 원수의 자리가 우리 자리지, 구원된 자리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우리 자리를 찬찬히 살펴봐야 됩니다. 애굽 군대가 홍해 바닷가에 서 있는 히브리인들을 왜 공격합니까? ‘너는 이제 죽었어!’ 이거거든요. 너는 우리의 창과 칼과 마차에 의해서 너는 이제 죽었어! 우리가 얼마나 힘이 센지 보여주겠어, 너는 이제 죽었어!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 명도 살리지 말고 다 죽여 버리기 위해 온 거예요. 그렇다면 바로 왕이 생각하는 애굽 군대에서 ‘죽었다’와 ‘살았다’는 어떻게 다르냐 하면, 자기들 애굽 군대는 당연히 살아 있고 그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라 하는 것은, 현재 내가 살려고 애쓰고 힘을 모으는 이것은 살아있다는 기준에 비해서 힘이 없는 저 인간들에게 죽음이라는 게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은 뭐냐 하면, 저기 홍해 바닷가에 있는 히브리인들은 우리가 죽이면 죽고 살려주면 사는, 그런 허약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살았다’ 에 대해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거예요.(자부심 나빠요. ㅋ) 누가 뭐래도 산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뒤따라 와가지고 홍해바다 다다랐지요? 그런데 갑자기 홍해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져버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애굽 군대가 다 죽어버렸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다 죽어버렸다 말이지요.

 

죽이려고 했던 히브리인들은 홍해 바다 건너편에 살아 있어요. 그러면 무엇이 죽음이고 무엇이 산겁니까? 이때 히브리인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홍해 바닷가에 오니까 히브리인들 속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죽을 곳이 없어 여기까지 우리를 끌고 왔느냐! 그런데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너희들이 기본적으로 죽음과 삶, 삶과 죽음에 대한 사고방식 자체가 뒤바뀌어 있다, 잘못 되었다는 겁니다. 「너희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살려버리면 그들의 기존에 알고 있던 ‘나는 살았어, 역시 하나님도 나는 산다는 개념으로 인정해줬어! 그러니까 하나님 생각과 내 생각은 똑같은 거야,’ 이렇게 촐랑대고 까불게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죽음을 가지고 히브리인들을 홍해 바닷가로 끌어당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만 비로소 살 수 있다는 아주 기발한, 특이한, 아주 낯선 기발한 방법의 생명을 가지고 그들에게 먼저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마중은 주께서 생각하는 죽음이죠.

 

주께서 생각하는 죽음 속으로 자기를 끌어당기니까 뒤따라오는 애굽 군대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저들을 죽이자 빨리 체포하라!’ 하면서 따라온 거예요. 하지만 그들이 홍해바다 건너올 때 애굽 군대는 몰살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이라 하는 것은 ‘줄자에게만’ 주지 죽을 자에게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준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살고 죽는 것은 내가 살아있으니까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결정하는 기준에 의해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있으니까 더 살아야 돼, 라는 기준에 적용시켜 살아가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이 말이죠. 내가 살려주는 것만 생명이고 내가 살려주지 않으면 네가 살았다 해도 죽은 거고 죽었다 해도 죽은 거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기를 당해도 심판받고 사기를 쳐도 심판받는 이유가, 자기 입장에서 옳고 그름과 진리 비진리가 소용없는 짓거리다 이겁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알려주는 기준이 아니면 우리가 평소에 몸담아왔던, 익혀왔던, 습관처럼 가져왔던 모든 것은 표절이고! 엉터리에요! 조영팔이에요! 나운아, 너훈아 모창가수처럼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면서 엉터리 성령, 엉터리 예수, 엉터리 복음이라는 거예요. ‘살려주는 나 왔으니까 또 살려주이소!’ 내가 살았다는 나 말고, ‘하나님이 얘기하는 생명은 무엇입니까?’ 난 그게 궁금합니다. 라고 해야 되요. 교회는 그렇게 와야 되요.

예수님 죽으심 자체가 생명이라 하는 것은 정말 특이합니다. 나와 같이 죽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살 수 없는 거예요. 왜? 우리는 원래부터 죽어 마땅한 존재기 때문에. 원래부터 우리는 살 가치도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저는 덤으로 주는 선물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를 우리가 챙길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런 배부른, 여유 있는 입장이 못 되요. 어차피 우리는 심판받아야 되니까.

 

결국 홍해라는 것은 인간들에게,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모세에게 우리가 죽을 곳 없어서 여기를 공동묘지로 만들겠냐, 대항할 때 모세가 길을 내면서 갔잖아요. 그 뒤를 애굽 군대가 따라온다고 제가 얘기했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누가 정상입니까? 애굽 군대가 생각하는 게 정상이에요. 그리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 그 인간들이 비정상입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를 익히 아시고, 인간들은 그것도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것도 익히 아셔서 주께서는 그걸 죽은 생각으로 바꾸기 위해서 예수님을 그들 눈에 가장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메시야, 구세주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 보기엔 모든 것이 ‘위반’이에요. 예수가 교회 와서 십일조도 않고 목사 말도 안 듣는 교회의 위반자 되지요. 그 위반자가 ‘우리교회’에 앉아 있다 하면, 여러분은 저를 믿으면 안 돼요. 위반자 믿어야 됩니다. ‘나는 예수 집사님과 위반자 될래’ 이래야 되요. 오늘 본문 끝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는데 16절에 보면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돼있다 이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은 예수님의 심판성과 심판과 동일한 심판의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어야 예수님 제자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제목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것은 아무도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위반자가 돼야 되요. 법을 어기는 위반자가 돼야 됩니다. 어디서 위반자? 교회 안에서의 위반자. 왜냐면 교회는 인간의 가능성들이 모인 곳이거든요.

 

인간의 가능성들. 성경말씀을 여기다 퍼부어서 실천에 옮김으로 말미암아 실천력 가지고 구원을 따내겠다는 그런 구질구질한 곳이 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안에서 위반자가 된다 이 말이죠. 쓸데없는 소리나 하는 위반자. 그렇다면 이 대목「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라」할 때 이 대목을 보고 목사지망생들 선입견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주님이 가신 길을 생각하지 않고 뭘 생각 하냐면 교회를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를.

 

교회를 생각하게 되면 인간은 오기가 있잖아요. ‘네가 교회하면 20명이고 내가 교회하면 2천명이 된다’ 교회를 생각하고 목사를 지망한다 말이죠. 그러면 교회에 어떤 청년이 있는데 취직하려니 이력서는 안 받아주고, 엄마가 어릴 때부터 너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다면서 바람 넣으면서 한나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헌신된 사람이라 착각해가지고 신학교를 왔다 이 말이죠. ‘교회가 문제가 많아! 내가 목사하면 이것 다 뜯어고치겠어!’ 하나님이 받음직한 교회 만들겠다고 시도한 거예요. 시도한 자체가 뭐냐면 교회라는 전제를 깔고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그걸 두 자로 뭐냐면 ‘개혁’이라고 합니다.

개혁교회. 교회를 개혁하려고 목사생활을 하다보니까 뭐를 생각하나면 내가 어느 정도 발휘해야 월 300짜리 목사가 되느냐, 그리고 교인들에게 헌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1년에 절기를 몇 개씩 배치해놓으면 얼마 나올까? 부활절엔 헌금이 얼마나 나올까, 고난주일, 신년예배에 말씀 뽑기 해가지고 얼마나 나올까, 추수감사절 헌금, 크리스마스 헌금 봉투를 돌리면 얼마나 나오겠나, 그거 나오면 선교비 몇 퍼센트 내고 어떻게 하고…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에게는 월급을 줘? 말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집사들은 몇 년 만에 진급시킬까? 여자집사는 몇 년 만에 권사 될까. 유아세례는 돈 받고 줄까? 이런 거… 이런데 자기의 생존이 나름대로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놓고 누가복음 10장16절 받아보면서, ‘아 이거 좋네,’ 내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내 말을 듣는 자는 예수님 말 듣는 거고 내 말을 저버리는 것은 곧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이 대목을 가지고 목사 자신에게 적용을 시켜버리면 목사 말 듣지 않는 사람은 저주 받는다는 어떤 명제가, 어떤 공리 같은 게 성립됩니다. 목사 말 듣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 그런데 이 본문의 진짜 의미는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 의해서 위반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 빼놓고 모조리 다 생명이 아니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14잘6절의 말씀을 잘 보세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교회가 진리가 아니고! 교회가 생명이 아니고! 교회가 길이 아니다! 말입니다. 교회 운영하는 목사 집사 이런 것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니다 그런 뜻이에요. 성경말씀 굉장히 쉽죠잉? 요한복음17장에 예수님의 기도내용 가운데 생명이라 하는 것은 아버지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했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위반자니까!

 

그러면 어떻게 아는가! -이 말씀만하고 마치겠습니다.- 홍해 바다 속에 들어가면 이거는 비정상입니다. 정상이라고 여기고 평생을 살아온 우리를 심판으로 목매달아 쳐버리면 그때부터 우리는 비정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위반자가 됩니다. ‘나는 정상인이 아니야,’ 비정상이라고 생각할 때 나로 하여금 늘 정상적이고 나의 가치가 고상하고 대견하고 남의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그것이 평소의 나였는데 세상에서 아무리 나를 욕하고 비난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라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자체가 비정상 이상의 존재예요. 말도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14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오죠?

 

『개역개정:갈6:14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 안에 들어온 거예요. 홍해의 죽음의 바다 속에 주님과 함께 그리된 겁니다. 바깥의 애굽 군대는 그 사정을 몰라요. ‘잡히면 너 죽는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쪽, 홍해 안에서 보니까 ‘애굽 군대야! 너희들이 죽은 놈이다 이미, 우리는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까 우리는 새 영생을 얻었다.’ 얻어버린 거예요. 갈라디아서6장14절에 보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하는 거예요. 이걸 오늘날 뭐로 바꾸느냐 하면, ‘우리는 우리 교회 외에는 오직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런 식으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최면을 준 거예요. 우리 교회 최고입니다. 어디서 꼴을 먹고 돈을 어디다 냅니까! 돈 좀 딴데 쓰지 말고 제발 교회에 돈 좀 내라는 겁니다. 돈 내야 지 밥 먹고 사니까.

 

개혁교회 할 테니까. 이상적인 교회 만들어줄 테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 오면 구원받게 해줄 테니까 제발 교회에 돈 좀 내주세요. 라는 이야기예요. 표절입니다. 표절. 가짜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에요. 십자가마을도 아니에요!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슴다!! 신학박사도 아니고! 목회하는 것도 아니고! 설교하는 것도 아니에요! ■오직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나니■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 안에서 나는 비로소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인 것을 감사하고.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내가 있었던 세상이 죽음의 자리, 세상은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보이는 겁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밥상머리에서 십자가 부딪히는 소리 들으면서 이것이 마땅히 심판받아야할 것이라는 게 들어올 때. 그래서 이미 구원받는 사람이 될 때. 그때부터 그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들, 컴퓨터 게임이라든가, 창가에서 바라보는 긴 자동차 행렬, 옛날 애인과의 추억,

 

이 모든 것이 나의 과거의 순환인 줄 알았더니만 그게 죽음의 순환, 심판의 순환이었음을. 그 어디에도 십자가 띄워본 일이 없고. 나로부터 출발해 결국 나에에 귀환하는, 나만이 절대화되는, 그런 헛됨이, 그렇고 그런 식으로 ‘나는 정상이야,’ ‘나는 살았어’ 반복하는 그 순환.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웬 은혜인지’ 십자가 안에 갇혀서 보니까. 수족관 안에서 바깥을 볼 때 남북대화가 어떠니, 통일이 어떠니 해도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이야기에요.

 

오월 달에는 심방가고 8월에는 전도대회 하고 부활절은 몇 째주고 크리스마스 백날해도 그거는 표절이고, 진짜 구원자는 그곳에서 ‘위반자’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세상으로부터 위반자 되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심판 받아야 될 것이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심판의 소식을 알려준 자체가 구원의 능력으로 다가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마땅한 걸로 여기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십자가의 피가 유일한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을 이제는 깨닫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