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새 언약 예고(렘31;31-34)

아빠와 함께 2013. 11. 2. 14:56

 

새언약 예고(렘 31: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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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1-05-18 21:05 
언약 예고

2011년 5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1:31-34

(렘 31:31,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언약을 세우리라』

(렘 31:32,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렘 31:33,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4, 개역)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성사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는 시대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예수님 안에 우리가 들어있는 시대가 들이닥친다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아무리 친밀하게 지내도 ‘서로 안’에는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확고한 뜻입니다.

사람들끼리 대충 ‘신자’라고 서로를 간주해서 서로 위로해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인정해주는 자는 오로지 예수 안에 있고 그 사람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는 사람 뿐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가 없다는 점이 언약을 실시하신 취지입니다.

즉 사람이 안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되게하심으로서 구원에 관해 모든 공로와 영광이 오로지 예수님에게 있음을 분명히 해두시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단순히 사람 구원에 하나님의 일에 초점을 둔다면 옛언약 시절을 생략하고 바로 언약적 방식으로 구원을 하는 것이 훨씬 간편했을 것입니다.

언약을 거쳐서 언약을 주시는 이유는 결코 인간들에게는 자신들이 구원받을 권리나 자격이 없음을 명백하게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인간 구원이 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구원을 요청할 어떤 근거가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 인간에게는 구원받을 권리가 없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에게는 인간만 상주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곧 악마까지 구원하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의 마음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언약 주십니다. 그 방식은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 밖에 두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으로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미워하는 식으로 율법을 사용하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마음 밖에 있는 계명을 자기 결심으로 마음 안에 담아두고자 시도하는 가운데 비로소 인간 마음의 숨어있는 정체가 폭로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체를 싫어하는 양상으로 불거져나오게 됩니다. 한 예를 들면, 옛언약인 모세 율법에 의하면, 할례받지 않는 민족은 할례받은 민족에게 전쟁에서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그들은 강한 무기를 사용해서 탈출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나온 겁니다.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과 전행할 때도 여호수아 장군의 전략과 창솜씨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주목하므로서 승리한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서 여리고성 함락을 할 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장세웠습니다. 여호수아 장군의 지휘 아래 전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도 하늘에게 해가 멈추는 기적까지 동원하신 하나님의 개입으로 승리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나타내 보여줄 언약의 살아있음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 동안에는 항상 처음 이 땅에 들어왔을 때의 취지를 놓치면 아니됩니다. 언약의 취지를 놓친다는 것은 곧 언약이 빠진 민족으로 간주되어 이방민족과 추호도 다른 점이 없는 민족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방민족들은 언약이 없는 민족이기에 아무리 그들의 신장이 크고 장대같은 무기와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린다 할지라도 거룩하신 분의 거룩이 내뿜는 위력 앞에서 더러운 민족은 괴멸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은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부터 이 원리 하에 놓여있는 겁니다.

만약에 스스로 이스라엘이 이 원리를 포기한다면 그들은 언약 원리가 아니라 이방나라의 원리에 입각해서 전쟁에 나서게 되고 돌아오는 결과는 오직 패배 뿐입니다. 골리앗이 등장했을 때, 소년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할례받지 못한 민족은 할례받은 거룩한 민족에게 패배당하는 것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전쟁의 원리라는 겁니다.

하지만 소년 다윗이 승리를 거두고 난 뒤 사울왕은 지독하게 다윗을 싫어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마음 속에 악신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언약적 사건이나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악마적이다는 사실을 그대로 노출하게 됩니다. 율법이 결코 선하지 않아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 아니라 선한 율법 앞에서 인간의 마음을 너무나도 악마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다주는 선지자나 종들이 이스라엘 내부에 엄청나게 미움받고 싫은바되고 죽음까지 당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마음의, 실상과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그 선지자들이 사용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와서 성령이 인간에게 찾아드는데 그것은 그 전에 악령이 지배했던 그 자리입니다.

따라서 그 악신에 의해서 피해입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성령은 성도에게 들이닥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피가 흥건히 늘 고여있는 셈이 됩니다. 성도는 쉽없이 예수님을 향하여 죄를 퍼붓게 되고 그 죄를 받아서 씻어내기 위해 예수님의 피를 계속 흘러내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피로만 증거하는 성령님의 작용이 성도가 받게 될 복의 전부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1-05-21 16:40 
111강-렘31장31-34( 언약 예고)11051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3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02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31:31-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신약성경에 보면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오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을 우리 인간보고 실시하라고 한다면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회 나온다는 것, 교회 다닌다는 것, 등록했다는 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함께 있다, 라고 할 수가 없거든요. 우리가 같은 부부라도 그 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부부라 할지라도 같은 꿈을 같이 꾸지는 않거든요.

부부라 할지라도 식성을 비롯해서 그 모든 것이 똑같지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아무리 친밀하게 지내도 그 사람의 속을 모르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가당치도 않고 사람으로서는 해 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해낼 수 없다는 그 핑계가 하나님나라에서는 통하지 않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나라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한 천만쯤 된다 합시다. 천만 중에서 단 한명이라도 그 사람 속에 예수 없고 예수님 속에 그 사람이 들어오지 아니하는 경우라면 천만기독신자를 그 이름은 있어도 천국에는 단 한명도 못 들어갑니다. 천국 지옥을 교회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에 목사들이 모여서 결정할 것 같으면 목사들이 모여서 결정하면 그만이지요.


장로협의체에 잘 보이고 인정받아서 구원받는다 할 것 같으면 장로한테 잘 보이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누구한테 잘 보이고 잘 안보이고,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개척교회 하는 목사가 교인들 없다고 닦달내고 통곡하고 낙담을 하고 절망하는데 교인 없는 것보다 본인이 예수 안에 있고 예수가 본인 안에 있으면 교인 단 한명 없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자기에게 주어졌으면 그것은 땡 잡은 겁니다. 세상에 로또도 그런 것이 없습니다. 로또는 한 백만 장 산다면 그 중에 등수 안에 드는 것 나올 확률이 생기잖아요. 이것은 교회 백만 번을 나와도 안 되는 일이고 성경 백만 독을 해도 안 되는 일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 엄격한 기준은 그만두고라도 교회 다니면 구원받는 것으로, 세례 받으면 구원받는 것으로 결정하자, 하는데 결정이야 자기 맘대로 하세요. 인간들이 결정하든 말든 소용없어요.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 줍니다. 인간들이 서로 위로하기 위해서 결정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구원받은 기쁨이 없으면 다른 것 가지고 탄식하고 절망해요. 낙담합니다.


본인이 예수 안에 있고 예수 안에 본인이 있다면 이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혜택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베드로야, 너 복 받았구나. 이것은 네 실력도 아니고 재주도 아니다. 너한테 그것을 알게 하신 것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허락해서 그런 복이 왔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해도 주님께서 안 놔줘요. 예수님 안에 베드로가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아무리 까불어 대도 예수님 안에서 까불기 때문에 베드로는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감히 건방지게 예수님 안에 있는 베드로를 지옥 데려가겠다고 빼내 달라고 요구할 때 주님께서 자기 안에 있는 자기형제, 자기자식은 절대로 악마한테 안넘겨 주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오늘 본문제목처럼 ‘ 언약’이라고 합니다.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했는데 이것이 언약입니다.언약은 뭐냐, ‘네가 열심히 해봐라. 되는지 안 되는지 한 번 열심히 해 봐라. 완벽하게 행하면 내가 구원해 줄게.’ 이것이 옛 언약이라면 언약은 그 모든 인간들의 시도와 노력이 다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내면서 실시되는 것이 언약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두 가지의 경험을 다 가지고 있어요. 옛 언약식으로 살아온 경험을 혹독하게 다 알고 그것을 배경으로 했을 때 언약이 주어지는 축복이라는 것은, 옛날에 내가 옛 언약식으로 구원받고자 한 이 모든 시도가 다 헛수고요, 헛방이요, 사기꾼 목사들이 완강하게 속여 온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지요.


목사 자기들도 안 되는 것을, 자기도 구원 안 되는 것을 가지고 남까지 지옥 보내려고 그 안 되는 것을 사람들에게 닦달내고 강요한 겁니다. ‘벽기도 40일 나오시면 은혜받습니 다……, 성경을 베껴 쓰시면 복 받습니다……, 주일성수하면 복을 받습니다.’ 온갖 것 가지고 다 사기를 쳤는데 혹시나 그 사기가 안 맞겠나 싶어서 어지간히도 따라 했지요.


어지간히 따라 했는데 이 목사, 김 목사, 박 목사, 어느 목사가 와도 안 되는 겁니다. 안 되는 것을 안 된다고 이야기해야지요. 그게 정직한 것 아닙니까? 되지도 않는 것을 자꾸 된다고 이야기하면 ……, ‘기도하면 될 겁니다.’ 하는데 거짓말 하지 마세요. 기도해서 될 문제가 같으면 주께서 십자가 지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는 그 말은, 언약이 실시되었다는 그 말은 ‘너희들은 옛 언약 속에 갇혀서 백날을 해 봐라. 네 힘으로 되는가, 안되게 되어 있다.’ 하는 겁니다. 전도라는 것이 뭘까요? 사람의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이 전도입니다. 전도하는 그것으로도 구원이 안 된다고 하는 그것이 전도예요. 선교사로 아프간 가도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래서는 구원이 안 됩니다. 복도 못 받아요.


오늘 우리가 이 본문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가, ‘그러면 처음부터 언약을 주지 왜 옛 언약을 줘 놓고 언약을 주느냐.’ 그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옛 언약을 줘서 약을 올려놓고 결국 멸망당하게 해 놓고 그들이 멸망하는 그 모습을 보고서 뒤늦게 언약을 주겠다고 한다면 처음에 언약을 준 취지가 뭐냐, 그 문제입니다.


그게 수상하지 않습니까?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왜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지고 논 겁니까? 그런 겁니까? 본문 31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언약을 세우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 여호와 하나님께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을 알아야 돼요.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언약은 반드시 본인이 성취한다는 겁니다. 본인이 언약을 줘놓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성취를 묻지 않아요. 언약이든 옛 언약이든 그 언약을 주시고 그 성취에 대해서는 일체 다른 피조물이 손을 못 대고 본인이 그것을 거두어서 완성하시는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던 사람은 하나님이 손수 언약 완성함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그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쓰이는 사람들,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언약의 완성을 어떻게 하느냐, 어떤 피조물, 어떤 택함 받은 인간도 언약대로 지킬 수 없음을 그들을 통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옛 언약을 그들에게 줬어야 한 거예요. ‘그거 봐. 지키면 복이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데 그것 보라니까, 저주받잖아. 그러니까 내 옛 언약이 거룩한 게 맞고 선한 것이 맞잖아.’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겠지?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주인지 알겠지!’ 하나님의 거룩과 무서운 심판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빈말이 아니고 실제 그대로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유다와 이스라엘 집이 필요 했고 그것을 그들은 거친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옛 언약을 지키지 못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인간들은 몰라요.


인간들은 모르고 여호와 하나님 쪽에서 그 이유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32절에 “나 여호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남편이고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파하였다.


그렇다면 그 신랑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부가 되었던 그 이스라엘은 결국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남편의 신부로서 등장됨으로서 결국 그들이 기껏 보여준 게 뭐냐, 신부가 되었으나 남편의 뜻을 이루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결혼을 하지 말지 왜 이스라엘을 ‘내 신부’라고 해놓고 일방적으로 신부로서 남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식으로 뒤에 가서 그런 잔소리를 하려고 했는가? 처음부터 신부가 안 되면 될 텐데 왜 그렇게 했는가?


이겁니다. 내 뜻을 이루지 못한 신부가 결국은 신부가 되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한번 신부가 된 사람은 비록 신부로서 남편 뜻을 위반해도 영원한 신부가 된다는 겁니다. 한 번 신부는 영원한 신부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신부는 남편은 그냥 잔소리만 해 대는 남편인줄 알았는데 아내가 남편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마저 건사해서 그것조차 해결책을 제시해서 신부가 어겼던 그것마저 남편이 몽땅 다 책임지셔서 기어이 아름다운 자기의 신부로 등장시키고야 마는 그 공로까지 남편이 떠맡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신부된 사람이 ‘나는 하나님의 신부답게 바르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안 나오는 겁니다. ‘내가 참 못난 여자요, 못난 신부인데 남편께서 이렇게 허접한 나까지 거두어서 완벽한 신부로, 정결한 신부로 홀로 다 이루셨습니다.’ 하고 영원히 주를 찬양하고 주를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이 신부된 유다와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언약을 받으면서도 어느 쪽을 더 소원했느냐, 이방나라의 잡신들 곧 우상들을 더 좋아했어요.


그 잡신들 중 한 신을 가지고 자기의 남편,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신이 바알이라는 신이예요. 바알을 자기의 남편이라고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이 간통한 여자야, 자기 본 남편 버리고 왜 자꾸 다른 남편한데 가느냐? 다른 남편이 그렇게도 인물이 좋고 잘생겼더냐? 그게 그렇게도 부러워?’ 그렇게 아주 심하게 이야기하지요.


간음이라는 말을 한 것을 봐서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자기 신부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여기서 아직 이야기 했어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이스라엘은 숱하게 많은 기적을 받았으면 사람이 인간적으로 개과천선 할만도 한데 그렇게 해도 다시 이방나라의 풍습으로 돌아가고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았을 것을, 이런 곳에 올 것이었으면 아예 나오지를 말 것을 우리가 왜 애굽에서 나왔던고, 모세 당신이 책임져라!’라고 모세 원망하고 여호와를 원망하는 현상들이 자꾸 일어났는가, 하는 겁니다.


33절에 언약을 내리면서 그 이유가 여기에 비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기에 보면 ‘마음에 기록하여’라고 되어 있어요. 언약 언약의 차이점이 뭐냐, 옛 언약은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마음 까지는 들어가지를 않았다는 것이 차이점이에요.


하나님의 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마음속에까지 안 들어가고 그들 마음 밖에 세워놓고 ‘지켜라.’라고 했던 겁니다. 언약은 십계명이나 모든 율법이 그들 마음속까지 들어와서 이제는 자기들이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언약의 사람은 그 사람이 뛰면 뛸수록 그 사람 안에서 언약의 완성이 출렁출렁, 이미 말씀이 완성된 채로 그 안에 내장되어 있어요.


이러한 약속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목사님, 그거 진짜입니까? 그게 진짜로 그래요? 괜히 위로 삼아서 좋은 소리하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까? 사람을 꼬이려고 조작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까?’ 라는 의심을 할 수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제 답변은 이렇습니다.


언약대로 했더니만 이스라엘이 망했잖아요. ‘옛 언약대로 다 지키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은 멸망한다.’는 약속대로 이스라엘은 망했어요. 우상숭배하면 망한다고 한 그 말씀대로 망했잖아요. 그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옛 언약대로 실시해서 이스라엘이 망했으면 언약의 내용도 현실화 되고 실제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옛 언약대로 살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망한 것을 보니까.


이스라엘이 지금 망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온전하게 살지를 못했어요. 그것은 약속의 땅도 아니고 혼혈집단으로 국가정책상 그렇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냥 인간적인 정치집단이고 약속하고 아무 상관도 의미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에 도착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에 처음부터 법을 집어넣어서 이스라엘이 안 망하도록 해서 자기 신부를 만들면 될 텐데 왜 처음에 그들의 언약은 마음 밖에 세워둬서 그들로 하여금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만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의 마음 밖에 세워둘 때 현재 갖고 있는 인간의 마음으로서는 하나님의 법을 이룰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미워하고 싫어한다는 인간의 속마음 알갱이가 다 튀어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비로소 그 율법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고 하나님자체를 싫어하는지를 율법을 통해서 완전히 다 알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부부사이라도 서로가 잔소리를 안 하면 참 좋은 관계에요. 연애할 때는 잔소리 안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살면서는 마음 놓고 잔소리를 해대고 왜 자꾸 싸우느냐 하면, 연애 할 때 멀찍이 있을 때는 몰랐지만 결혼하고 한 집에 살면서 미쳐 폭발하지 않은 성격들과 예리하게 부딪히다 보니까 ‘아, 나도 한 성질 하지만 너도 한 성질 한다. 연애할 때는 그게 왜 안보였지?’ 그렇게 되지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법을 밖에 세워두니까 그들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추하고 더럽다는 그것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고 우기면서도 지킨다고 하는 그 순간부터 나중에 우상을 섬기게 되는 그 본심, 애굽에서나 가나안 땅에서 평소에 우상을 그리워하고 죄짓는 것을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더 즐겨했던 속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 등장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누가 구박을 받고 누가 서러움을 당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 주의 종들이 심한 구박과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게 우리의 마음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가보니까 그 마음이 우리 마음이 아니고 악마의 마음이었어요. 악마가 우리 마음을 장악했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다 알고 우리 마음에 내 세우니까 우리는 악마가 내 마음을 지배한다는 것은 생각 안하고 그냥 내가 알아서 내 마음은 이성적으로 정돈하고 정신 차리면 뭔가 하나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오해해서 말씀을 지켜본다고요.


지켜보면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뭐냐, 진짜 그 말씀의 뜻에 대해서 무진장 핍박을 가하는 경우들을 많이 쏟아냈습니다. 그런 예가 많지만 한 가지 예를 들면 블레셋 골리앗과 이스라엘이 전쟁하는데 있어서 블레셋은 할례 받지 않은 거룩하지 않은 민족이고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겁니다.


비록 적 앞에 선 이스라엘 입장에서 우리는 키가 작고 부족하지만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러면 전쟁을 누가 주선했느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선한 거예요. 광야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전쟁이 있었잖아요. 그 전쟁이 한 번으로 끝나는 전쟁이 아니에요. 그 땅에 사는 동안 전쟁은 매일 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매일 같이 처음에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있었던 장대한 민족은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대처하는 방법은 처음 사랑, 그들의 처음 약속의 땅에 들어올 때의 그 처음믿음,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의 약속이 있기에 저들은 더러운 민족으로 이 약속의 땅에서 살지 못합니다.’라는 그 약속에 준한 신앙심이 유지되면 적들은 그냥 힐끔힐끔 들여다보기나 하고 쳐들어오지 않지만 만약에 그게 안 되면 적들은 또 다시 약속의 땅에 쳐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저쪽이나 이쪽이나 똑같이 이방나라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상 섬기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약속을, 옛 언약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옛 언약을 지식으로 안다고, 이것을 믿는다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옛 언약이 무엇인지 아브라함이 무엇인지를 아니까 그 아는 지식으로 적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큰 오산이지요. 그래서 골리앗 싸움 할 때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어른 다윗이 아니고 소년 다윗을 개입시킵니다. 어른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을 때 소년을 집어넣었어요. 다윗이 하는 말이 ‘이번 전쟁은 사람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이다. 하나님의 전쟁 같으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승자와 패자가 결정될 텐데, 하나님께서 할례 없는 저 민족을 붙여준 것은 할례가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 나라는 필히 저 나라를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거예요.


그것을 소년 다윗이 믿었던 거예요. 왜 의도적으로 골리앗은 키가 커야 되는가, 키가 크기 때문에 이길 것이라는 그런 것, 언약과 상관없는 비언약적인, 애굽적인, 이방나라에서나 통하는 원칙, 키 크면 이기고 힘세면 이기고 숫자 많으면 이기고 말과 창이 많으면 이긴다는 것들은 언약이 없는, 옛 언약,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 본적이 없는 이방에서나 통하는 원리 입니다.


처음 애굽에서 나올 때도 히브리인들은 애굽적인 힘이나 원리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유유월절 피 때문에 나왔거든요. 광야 아말렉과 싸울 때에도 여호수아가 칼싸움을 잘해서가 아니고 지팡이가 올라가니까 이겼고 그 다음에 그들이 요단강 건너갈 때도 언약궤를 앞장세웠고 여리고성 무너뜨리고 모든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그 모든 전쟁에서 태양이 멈추고 우박이 떨어지는 이 모든 것은 모세언약에 준해서 이루어진 겁니다.


언약이 살아 있어야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가 살아 있어야 된다고 성급하게 하다 보니까, ‘나부터 살아야 된다.’고 하니까 곧바로 언약을 놓치게 되고 언약에서 얼굴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면 벌벌 떨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승리하게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사울을 버리시고 언약의 중심에 섰던 다윗을 택하여 다윗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 인간 마음속까지 들어오는 이것은 인간의 마음으로서는 성사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왜 다윗은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성신이 임했거든요. 왜 기드온은 승리했습니까? 2만 2천명 다 보내고 3백 명만 남아서 승리했습니까? 성신이 임했습니다. 그러면 사울은요? 악신이 임했거든요.


그러면 구약 때부터 언약에 관해서는 인간보고 지키라, 말라가 아니라 인간은 악신에 눌려서 악신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구약 때부터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처음 설교할 때 이야기했지요. 아무리 교인수가 많다든지 혹은 아무리 없든지 간에 내 안에 예수님 있고 예수님 안에 내가 있으면 이미 모든 복은 다 종결된 겁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왔으면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귀한 겁니다. 생명을 얻었어요. 이것은 끝났어요. 더 뭘 달라 할 필요도 없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상태를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더라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언약을 주는데 언약은 뭐냐 하면, 옛 언약적로는 율법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지를 못하고 우리 마음 밖에 멈추어서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이 하려고 해도, 이마에 붙이고 온갖 것을 해도 그 간격을 줄일 수가 없어요. 들어갈 수가 없다고요.


들어가기는커녕 우리 마음이 이것을 밀어냅니다. 왜, 악마가 있으니까. 그 악마가 자꾸 이 말씀을 밀어내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울 같은 경우에는 다윗을 존경합니까? 얼마나 미워해요. 그 다윗을 미워할 때 악신이 임했잖아요. 우리는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미워하지요? 아닌가, 내가 말을 잘못했나요?


우리가 원하는 세상보다 예수님이 더 싫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고 섬길 수 없으니 하나를 미워하면 하나를 사랑하고 하나를 사랑하면 하나는 미워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들어올 때는 그냥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고 ‘네 마음은 이처럼 독하고 악하고 악마적임을 일깨워주면서 들어오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영입니다.


그냥 성령이 아니고 십자가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영이 들어오면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내 낯짝을 들이대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하러 오신 분을 얼마나 미워했으면, 주님이 얼마나 미웠으면 ‘당신은 죽어 없어져 버려. 내 앞에서 꺼져버려! 사라져버려!’ 하는 식으로 주님을 난도질 하겠습니까? 그 십자가의 사건의 반복으로 성령은 매일같이 밀려옵니다. 성령이 찾아오면 또 다시 발작을 일으킵니다. ‘주여, 제가 십자가를 믿는데 왜 돈은 안주십니까? 다 꼴 보기 싫다.’ 십자가고 뭐고 막 다 밀어내는 거예요.


밀어내고는 나중에 ‘잘못했습니다.’ 하고 꼬꾸라지고. ‘내가 예수를 죽인 자가 맞습니다. 내가 예수님에게서 눈 돌리고 다른 것, 백화점의 고급화장품 같은 그런 것들 더 좋아했습니다.’ 남에게 기 안 죽으려고, 육에서 육으로 이겨보려고. 그런데 그것이 복이 아닌 것을, 그것이 영생이 아닌 것을. 그렇게 성경에서 많이 보고 들었지만 막상 우리의 느낌과 우리의 이성은 왠지 영생이니 천국이니 복이니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나도 너 못지않고 너에게 기 안 죽고 산다.’는 자긍심, 그 자긍심은 세상에 대한 복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복수로 이어져요.


‘누구야? 나를 힘들게 하는 게. 내가 가만 안두겠어. 복수하겠어.’ 이러한 복수심의 여파가 결국 매일 같이 죽은 예수님이 다가오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유도하고 조치하는 겁니다. 성령님이 우리 맘속에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이제는 주님과 헤어질수 없는 사이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동거하기 때문에, 남편 되는 주님의 신부로 살기에.


‘왜 너는 이 남편을 그토록 미워하는, 세상만 좋아하는 간음한 여인으로 살 수 밖에 없는가.’를 남편이 보내준 성령을 통해서 매일 깨우치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깨우치게 하는 것이 ‘아직 살아 있는 네 남편이다. 네 남편 안 죽었다. 너 혼자 사는 것이 아니야. 네 남편이 있어. 네 남편이!’ 십자가 사건의 원인을 자꾸 나에게 일러주는 거지요.


그럴 때 피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는, 옛 언약 언약이 다 같이 완성되는 그 피의 중요성, 그 피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겁니다. 신문지상에서 누군가 돈 벌었다 하고 누구는 배당금이 천억이라고 하면 부럽지요. 어떤 여자는 영국 황실로 시집가고 어떤 여자는 사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고 하면 ‘내 자식은 뭐하는지 몰라.’ 그런 마음이 들지요.


그 정도로 우리는 복수심이 우글대요. ‘교회를 이렇게도 많이 다녔는데 나한테 해 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하는 그 원망은 결국은 하나님한테 풀 수밖에 없고 그 원망을 우리 주님이 다 받는 거예요. ‘그래, 네 원망은 내가 다 받을게. 다 가져와라.’ 그 원망이 쏟아질 때 마다 여기서 피가 튀어 나온다니까요.


‘네가 무슨 죄가 있다는 것을 네가 모르는 사이에 주님이 그 죄를 다 알고 십자가를 졌’거든요.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는 말은 우리가 미처 아직도 모르는 나의 죄가 결국 터져 보니까 다 피가 연관되어 있어요. 피 흘림과 다 연결되어 있어요.


‘너는 죄를 지어라. 나는 씻어줄게.’ 그거잖아요. ‘너는 네 마음속의 악마가 다 터져 나오고 내가 이 찢음과 피 흘림의 방식으로다 받아 내겠다. 너의 방패로서.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구원자요, 너의 피난처요, 너의 산성이요, 기업이요, 내가 너의 하늘나라 유산이다. 나는 너의 생명이요, 너의 구원자.’라는 겁니다.


이러한 혜택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창세전에 예정된 자에게만 제공된 겁니다.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져 있어요. 예정된 자에게만 이런 혜택이 주어지면서 이것을 로운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로운 사람 맞습니까? 나만 살고 있으면 로운 사람 아니요, 십자가 앞장세워서 나의 죄를 용서했다고 우리 죄를 지적하면서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 때 로운 피조물 맞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주의 약속이오니 이 약속 자체를 우리가 믿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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