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강-눅11장29-32(요나의 표적)-luk11032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11장 29절에서 32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12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1:29-32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예수님의 말씀 속에 심판이라는 말이 포함이 되어 있지요. 이 말은 예수님이 심판 주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주가 된다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 심판의 기준이 뭐냐 하는 거지요. 그 심판의 기준중의 하나가 지난시간에 본 누가복음 11장 23절에 보면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심판의 기준이 뭐냐, ‘너희들이 생각하기에 나는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아니고 예수님에 대해서 내가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느냐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저주이야기가 어디에 포함되어 있느냐하면 주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거기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나와 함께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여기서 나, 곧 누구를 반대하는 것 인가하면, 심판을 행사하시는 심판 주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쉽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예수님 자기기준으로 심판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반대합니다, 이런 뜻을 갖고 있는 사람은 심판받는다는 말이지요.
같은 이야기를 달리말해서,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 예수님을 우리가 심판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역시 저주받고 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성경전체는 간단한 이야기가 됩니다. 내가 중요하냐, 예수님이 중요하냐, 그 이야기로 정리가 되고 말지요.
내가 중요하냐, 예수님이 더 중요하냐. 우리는 교회에서 윤리 도덕적인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심판하고 상관도 없는 거예요. 내가 뭘 하겠다, 내 쪽에서 뭘 벌이겠다, 이 모든 것은 전혀 성경이야기하고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의 기준을 내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내가 나에게 내리는 심판의 기준보다 더 우선하고 예수님의 심판 앞에서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내 심판의 기준을 포기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을 반대하지 않는 자고 주님을 헤치지 않는 자고 주님과 함께 거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자기포기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복음을 외치는 교회에서 교인들이 이 점을 유념해야 돼요. ‘목사님, 우리에게 평소에 나를 판단했던, 내가 잘났는지 못났는지, 내가 훌륭한지 그렇지 않은지, 그 심판 기준을 목사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다 깨부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들으셔야 돼요. 그걸 듣고 싶어 해야 돼요.
‘나는 이렇게 잘났다, 혹은 이렇게 못났다고 스스로 판정을 내리는 그 기준이 있을 텐데 매일같이 그 기준을 부술 수 있는 다른 기준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듣고 싶어 해야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정죄하지를 못해요. 왜, 자기가 가장 사랑스럽게 제일 귀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자신을 격려는 하지요.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으켜 세우라고 용기를 주고 힘을 주고 격려를 해주지요.
하지만 ‘나는 안 돼. 나는 인간 안 되는 거야.’라고 스스로 자기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끝까지 나를 건사하고 나를 위로하고 나에게 희망과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은 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나서 미움 받아서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지옥에 가는 나와 동행할 수 있고 그 지옥에 가는 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요.
마지막까지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이 말이지요. 그만큼 자기 정당성을 포기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성립이 안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평소에 우리가 일상생활 하는 것처럼 자기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자기에 대해서는 대단히 후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늘 옳다고 판정하는 그런 인간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심판소식을 듣고 갑자기 회개를 해버린 사람들을 동원시켜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나도 옛날에는 너희들처럼 자기 자신만 죽자고 사랑했는데 바로 그것이 심판받을 이유였습니다.’라고 그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을 정죄하고 외치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31절에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고 또 32절에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남방 사람과 니느웨 사람이라 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와 다름없이 옛날에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그들이었어요.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어떤 소리를 듣고 난 뒤에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서 ‘너희들은 옛날 내가 살았던 식으로 왜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고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정죄당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당하기 때문에 황당하게 느껴질 거예요. 그래서 본문을 설명하기 전에 이렇게 일방적으로 정죄 당하기만 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해 보자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해 보자는 말이지요. 그들의 생각이 뭐냐 하는 겁니다. 제가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교육론의 발달’이라는 글을 썼어요.
그 글 쓴 이유가 뭐냐, 불신자들,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소위 진리라는 것 그리고 도덕이라는 것을 요즘 시대에 어떻게 구성하고 있느냐를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윤리 도덕관이 가득해요.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악은 버리고 선은 추구한다 이 말이지요.
비록 예수는 사랑하지 않더라도 지독하게 자기 자신을 너무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남들은 나쁜 길을 가더라도 자기는 항상 좋은 길 옳은 길을 간다는 지향성을 가지고 반듯하고 열심히 살려고 애를 쓰지요. 그런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 남방여인을 통해서 정죄를 해버리니까 그 정죄함을 당하는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당하고 나서, 자기 자신은 굉장히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일방적으로 신의 계시를 운운하면서 예수님이 심판 주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갑자기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는 자기를 정죄하니까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그들의 그 황당한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들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말입니다. 자기를 정죄하는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서 그들은 뭐라고 대꾸를 하겠습니까? 어떻게 반박하겠습니까? 그들의 반박을 제가 잠깐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뭐냐, ‘사람이라 하는 것은 각자 자기 진리대로 사는 법이다. 왜 자꾸 너만 옳다고 하느냐?’
그게 도덕론의 마지막에 보면 있어요. 하버마스라는 철학자를 통해서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는 윤리 도덕의 엑기스 같은 것을 적어 놓은 거예요. ‘현대사회에서는 누가 누구를 모델로 삼지 말고 자기 자신을 모델로 삼아서 자기 양심에 옳다고 한다면 주변에서도 그 사람의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존중을 해 줘야 된다.’ 하는 것이 오늘날의 공론이고 그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평소 살아가면서 하는 생각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곤란합니다. 자칭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진리 관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불신자가 갖고 있는 진리관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하나입니다. ‘네가 잘났다는 것을 인정해줄 테니까 나도 잘났다고 여기는 나 스스로에 대해서 너희들이 인정해 달라.’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잘났고 어떤 사람은 못났고, 그것이 어떻게 성립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데. 어떻습니까? 들어보니 평소에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지요.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수월하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까? 각자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을 허용해 달라는 겁니다.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누가 누구를 정죄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정답은 어디서 찾습니까?’ 정답은 바로 사도바울, 또는 사도들에게서 찾아야지요. 사도들은 예수님의 진리 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러면 사도는 뭐라고 하느냐, 갈라디아서 1장 8절, 9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했습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사칭하는 악마의 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교회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윤리관이에요. ‘네가 뭔데 나를 함부로 평가하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묻지요. 당신이 말하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은 어떤 것이냐?
자기들은 입을 다물겠다는 거예요.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아는 바도 없고 모르겠고 말하기도 싫고 내가 외치고 싶은 것은 내가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주변에서 평가하지 말고 그 사실을 존중해 달라.’ 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것을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백 명이 모이든 천 명이 모이든 교회는 하나를 바라보는 거지요. 그 하나가 뭔가요? 그 하나를 놓쳐버리면 천 명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 각자 자기 것으로 다 돌아갑니다. 내가 너를 무시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민주주의 방식으로 다 돌아가 버려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니느웨 사람들이 현 세대를 정죄합니다.
착하게 가만히 잘 사는데 갑자기 일방적으로 니느웨 사람과 남방 여왕이 와서 자기를 정죄하면 가만있을 사람이 없어요. 다 반발하지요. ‘너 뭐야?’ 그렇게 되지요. 이것은 자동적으로 반발이 톡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네가 뭔데 함부로 네 기준으로 나를 함부로 폄하하고 낮춰보느냐? 네가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돼?’라고 하지요.
그러면 정죄하는 니느웨 사람이 이렇게 하지요. ‘당신은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내어보세요.’라고 하면 하는 말이 ‘저는 기준 같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는 그것뿐입니다.’ 그것이 ‘함께’라는 말, ‘주와 함께’라는 말이 과연 성사될 수 있느냐, 에 대해서 이 본문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금 니느웨 사람과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지만 남방 여왕이 존경했던 솔로몬보다 그리고 요나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바로 나다.’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어두운 세계에 대해서 ‘그래, 내가 존중해 줄게.’라고 온 것이 아니고 정죄하러 오신 분이에요. 이 세상은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심판주가 장차 심판의 기준을 거기에 적용시키는 겁니다. ‘마지막 심판 날이 오는데 그 심판 날은 이런 식으로, 이런 기준에 의해서 심판이 감행됩니다.’라고 미리 이야기하면서 이 세대에 대해서 정죄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원칙을 그대로 이야기해 봅시다. 그렇게 정죄를 할 때 여호와를 잘 믿고 있는 황당해진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주님께 ‘너 뭐야?’ 했어요. 그 때 예수님이 ‘내가 바로 인자요 심판주고 내가 하나님이다.’ 하니까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너의 심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 쪽에서 심판해버리겠다.’ 해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일이 끝난 줄 알았어요. 그 뒤에 성령이 와서 하시는 말씀이 ‘이 세상 사람에 대해서 너희들이 예수님께 행했던 그 심판기준과 의의 기준과 죄의 기준에 대해서 너희를 책망하리라.’라고 나옵니다.
서로 서로 정죄하는 거예요. 우린 그 가운데 끼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결국은 십자가로 끝나버릴 때에 제자들도 물론 예수님을 이해 못하고 다 도망쳐 버렸지요. 하지만 성령 받고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이 오직 한 가지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기준이 뭐냐, 예수님이 평소에 하신 모든 말씀이 자신의 죽으심을 기초로 해서 언급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죽으심이 바로 십자가 피 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중의 하나가 요한복음 10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여기 보면 ‘나는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림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고 그 당시 사람들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계명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주신 계명은 모든 계명을 일소에 부치고 새로운 계명이 등장하는데 그 계명이 뭐냐, 예수님의 죽으심이 곧 계명이 되는 시대가 온다는 거예요. 그것이 유일한 심판의 기준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너희들 죄 때문에 죽었음을……, 그 앞에서 너희들이 설 때에 아하,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구나, 라고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만 구원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죽으심,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수용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성령 받은 사람과 못 받은 사람과는 의사소통이 안돼요.
왜 소통이 안 되느냐하면, 항상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는데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나는 그래도 괜찮은 존재입니다.’ 하고 자기의 괜찮은 존재의 가치를 근거로 해서 거기서 이야기를 뽑아내니까 그 뽑아내는 이야기가 전혀 공통점이 있을 수가 없어요. 한쪽은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하는데 한쪽은 ‘그 죽은 것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데? 죽든 말든 나는 살았는데, 나는 이렇게 잘나서 잘 살아 있단 말이다.’
살아 있다는 이것을, 살아 있다는 이 가치를 존중해 달라, 이것부터 모든 이야기를 풀어 나가요. 모든 이야기가 그래요. 교회 내에서도 그렇고, 모든 이야기가 내가 나를 잘났다고 인정하는 만큼 나의 잘남에 대해 동의를 좀 해 달라, 그것부터 출발하고 다른 한쪽은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잘난 사람 없습니다.’ 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이야기가 서로 만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예를 들기 위해서 요나의 표적을 이야기하죠. 요나이야기를 여러분이 아시겠지만 다시 한 번 봅시다. 요나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면서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전도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 장소가 니느웨라는 곳입니다. 니느웨는 죄가 관영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어요. 악독하기로 소문난 지방입니다.
그 지방에 갔지요.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습니다. 40일 지나면 망하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 요나는 안 가려고 했습니다. 왜냐, 자기가 가든 안가든 관계없이 40일 지나면 망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안가도 망하는 니느웨에 의도적으로 자기를 집어넣는 이유를 몰랐어요. 나중에 알게 되지만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억지로 하게 하시니 하자.’ 해서 본래 사흘 길에 전도해야 할 것을 하루 만에 하고 저 높은 산에 올라가서 망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 망했습니다. 오히려 니느웨 사람들이 상상 못할 회개와 금식을 했습니다. 여기에 어린이와 가축까지 다 참여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것은 자기가 딛고 선 자리가 심판이 올라오는 자리라는 것을 말씀을 듣고 알게 된 거예요.
40일 지나면 여기서 불 심판 떨어진다고 하니까 평소에 자기행위만 의지하고 자기 잘난 변명만 늘어놓다가 말씀을 듣고서는 자기 바닥을 봤어요. 내가 술 먹고 춤추고 놀고 사고 파는 이 자리가 심판을 유발시키는, 심판을 끌어당기고 불러오게 만드는 무서운 죄의 힘, 심판의 힘이 있는 자리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말은 뭐냐, 내 자리라고 여겼던 것은 실은 없고 심판에 의해서 그들은 살아온 거예요. 그걸 불판, 해물철판구이라고 있는데, 그 뜨거운 불판위에서 춤추고 놀고 한 거예요.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은 살길이 뭐밖에 없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준 대로 이 자리가 죄의 자리라면 그 위에 있는 우리는 죄의 모습으로 돌변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죄의 자리에 합당한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신기하지요. 하나님이 만든 자리에 합당한 사람으로서만 살아가면 심판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우리는 죄 있는 자리에서 살아온 죄인이다.’ 회개하니까 주님께서 뜻을 돌이켜서 그들을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왜, 주께서 찾고자 하는 것은 누굴 죽이고 살리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인 것을보여주기만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받아야 될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깔아놓은 이 현실 바닥이라는 것을 현실답게 수용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증거 하는 데 필요한 존재가 돼요. 그런 사람을 구원하는 거지요.
그런데 산위에 올라가서 팔짱끼고 40일 지나면 사람들이 망하기를 기다리는 요나, 40일이 지나도 안 망하네요. 그렇게 되니 선지자의 위신과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요나는 그 심판의 자리에서 자기를 제외시켜 버렸어요. 제외시키니까 자기는 자기자리가 따로 있는 겁니다. 선지자의 자리가 따로 있었던 거예요. 선지자의 자리를 따로 가지고 제 삼자, 관찰자의 자리를 따로 챙기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자기 말이 완전히 허투루 되어버리고 거짓말이 되어버리고 자기예언이 엉터리가 되니까 그 때부터 자기 자리에 있는 자기 의로움과 자기진리성이 깨지니까 자기 자리가 실망스러워서 요나는 자살을 감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죽여주소서. 더 이상 하나님과 동업 못하겠습니다.’ 하고 죽고자 하지요.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요나마저 니느웨 사람들과 같은 바닥을 만들어주십니다. 요나가 죽고자 할 때 먼저 죽이는 것이 아니고 요나로 하여금 뜨거운 햇빛 속에서도 그 뜨거운 햇빛을 가릴 수 있는 박 넝쿨을 키워줍니다. 죽고자 하던 요나가 갑자기 그늘 때문에 아주 속까지 시원해졌어요. ‘이제 죽는 것은 취소합니다. 살고 싶습니다.’ 했는데 갑자기 그 키웠던 박 넝쿨을 바짝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요나가 ‘주여, 뜨거워서 죽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지요. 그 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요나야, 그 하찮은 박 넝쿨도 이렇게 있다가 없으니 아쉽지? 너의 자리가 그동안 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너 자신과 관련된 자리를 계속 구축’하고 다지고 또 다지고 다져온 거예요. 교회 10년 나오고 20년 나오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도 하나님이 개입되지 못하고 예수님이 없는, 내 자리라는 이유 때문에 계속 그것을 굳건하게 사랑하고 지킨 겁니다.
내 자리, 내 가정, 내 교회, 내 역사. 요나는 그것을 하나의 현실로 본 겁니다. 착각이고 오해였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현실감이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본문에서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표적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기적, 기적을 구하는데 ‘내가 주는 기적은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 해서 요나를 끄집어내서 심판의 기준을 세우고 계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적이 뭐냐, 자기가 현실로 납득이 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 위에 특이한 것을 기적이라고 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일본에 바닷물이 넘쳤는데 평소에 해변 가의 바닷물은 발목정도까지 왔어요. 그래서 그들은 늘 발목까지 오는 그것을 현실로 본 겁니다. 그런데 해일의 높이가 23미터까지 올라갔지요.
23미터까지 올라가니까 ‘야, 이것은 기적이다.’ 했지요. 그 해일로 갑자기 수천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일어나고부터는 그 기적은 곧 현실이 되지 기적이 되는 게 아니에요. 제가 말을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평소에 내가 알고 있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이 일어났을 경우에 그 순간 기적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일단 일어나버리면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현실이라니까요.
새로운 현실로 수정을 해야 돼요. 평소에 물이 내 발목까지만 와야 된다는 것은 자기의 일방적인 거예요. 자기혼자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물을 23미터로 해버리니까 그 순간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지요. 폐허가 된 그 자체가 이제부터는 현실이 되는 거예요. 다시 물이 빠져도 이미 폐허된 그 현실은 남아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일으킨 표적이고 이 세상을 긁어내는 것이고 자국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내셔서 자기 자리를 자기자리라고 따로 고수하고 그 자리에서 남을 제 삼의 관찰자, 관람객처럼 보는 현실감에 대해서 주께서는 요나를 보내서 확 긁어버립니다. 확 긁어버리면 ‘아하, 우리의 자리라는 것은 없고 심판이 피어나고 올라오는 자리, 위에서 물이 떨어지다 이제는 불이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니느웨 사람들에게 알게 한 겁니다.
그럼 니느웨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그렇게 안 니느웨 사람들이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에게, 새로운 현실관을 가지고 잘못된 현실관을 갖고 있는 우리들에게 정죄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진정한 기적을 알기는 알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생각하는 기적은 일상적인 자기 것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저 채워주는 기적과 표적을 원했지만 이 어둡고 더러운 세대에는 그 자리 자체가 요나를 집어넣고 요나가 경험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경험했던 그 심판 성을 집어넣는 이것이 수정되어야 될 현실관이다.’라는 겁니다.
다른 현실관은 없다는 겁니다. 나의 자리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베드로후서 3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그냥 있다 하니.’ 불신자들이 하는 말이 뭐냐,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없다는 거예요.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한다는 거예요. 엄 홍길이라는 분이 누군지 아시지요? 그 분이 등산가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지요.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저 높은 에베레스트 산에 누가 올라갈 수 있을까? 그 높은 산에 올라가면 기적이다.’ 하거든요. 그러나 그 기적도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오는 순간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현실이 됩니다.
마음만 먹으면 또 올라가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현실관은 뭐냐, 갔다가 되돌아올 있어요. 만물이 그대로 출렁출렁, 늘 밀물썰물, 밀물썰물, 그것이 현실의 전부라는 겁니다. 누가요? 이 세상 사람들이.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에서 하는 말이 “옛날에는 물로서 심판했는데 지금은 너희들이 ‘주의 강림? 그런 게 어디 있어. 다 그것은 거짓말이야. 세상이라 하는 것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세월이 지나도 세상은 그대로 있잖아. 지진 일어나도 몇 년 후면 다시 원상 복귀되고 화산이 폭발해도 다시 원상복귀 되고 세상은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해도 우리는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용기와 결심과 인간애와 인류애를 뭉치면 원상복귀 할 수 있습니다. 원자력발전소가 그렇게 망가져도 냉각수 부으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면서 갔다 되돌아오고 틀리면 또 되돌아오고,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 너희들의 현실관이다.”라는 겁니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이 없고 결국 기적이라는 것도 없다는 말은 현재 내 자리를 그냥 고수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내 자리를 포기를 못하겠다, 내가 내 자리를 포기를 못하는 이상, 내가 내 자리를 포기 못하고 사랑하는 그 사랑을 주변 사람들아 좀 알아다오.’ 그것이 그들이 증거 하는 전체 복음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늘 계속해서 요나가 필요하고 계속해서 솔로몬이 필요하고 매일 같이 우리는 우리를 정죄하시는 주님이 필요한 것을 몰라요.
그래서 이 요나이야기를 친절하게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겠습니다. 첫째는 요나를 볼 때 성령 받지 못한 불신자들이 요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걸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자 하는데 우리가 태만해서 구원을 소홀히 할 때 다시 한 번 요나를 통해서 은혜를 깨달아서 주님의 은혜를 다시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요나를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요나를 생각해서 반성하면 우리의 구원은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이게 바로 자기 자리를 고수하면서 요나를 생각하는 해석입니다. 불신자의 해석이에요. 되게 믿음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데 나는 정신 못 차리고 항상 세상을 좇아요. 그 때 요나를 보내서 다시 정신 차리게 해서 다시 구원을 잊지 않고 구원의 길을 달려갈 수 있도록 주께서 도와주신다.’ 이게 불신자들의 성경해석이라니까요. 이게 성령 받지 못한 자의 구원해석이라니까요.
그것이 성령 받지 못한 자의 해석이고 불신자의 해석이라면 진짜 성령 받은 자의 해석이 뭐냐, 구원이라는 것이 내 구원이 있는데 주께서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고 이 구원이 주님이 하시는 구원에 우리가 재료로 이 소용돌이, 스크류 속에 녹아 들어가는 겁니다.
내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조치를 할 것이냐, 그것은 불신자의 구원관이고, 진짜 성경의 구원은 그것이 아니고, 나 밖에 모르는, 다시 말해서 늘 정죄당할 수밖에 없는 나만 사랑하는, 예수님은 뒷전이고 예수님은 사랑하지 않고 내 자리만 사랑하고 내 체면과 위신만 살리려고 하는 이것을 죄라고 규정을 시켜서 그것을 그대로 예수님의 피와 섞어서 이걸 녹여버려요.
홈쇼핑에 나오듯이 집어넣고 갈고, 집어넣고 갈고! 감자 샐러드. 죄와 피가 섞이는 아이스크림? 주님의 구원에 우리를 재료로 사용한다니까요. 무엇을? 죄 성을! 우리의 죄인 됨을. 내 구원을 따로 챙겨버리면 그 구원을 따로 챙기는 내 자리가 따로 숨겨져 있어요. 그래서 누구든지 그 자리를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뱀이 하는 짓이 있습니다. 메시아를 물어버리는 거예요. 메시아를 물어버린다는 것은 뭐냐, 내 구원에 필요한 메시아 같으면 인정하되 내 구원을 인정하지 않는 메시아는 물어버리겠다는 그 속성이 뱀의 속성이에요. 우리는 나의 구원이 우선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는 날 때부터 나만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서도 좋은데 가는 것은 남이야 가든 말든 어찌되었든 내가 가야 돼.
내가 가는데 ‘내가 뭘 하면 구원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런 물음 자체가 성령이 없는 불신자의 물음이라니까요.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아예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를 않았습니다. 쫓겨났더라도 길은 열릴 겁니다. 열리는 것이 아니에요. 아예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시켰습니다. 그 말은 너의 구원은 끝나버렸다는 거예요.
주님의 구원만 남아 있어요. 주님의 구원은 죄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피가 필요합니다. 죄와 피가 한데 섞이는 것을 구약에서 언약이라 하고 예수님께서 자기 살과 피로서 새 언약을 다 이루는 거지요. 성령받기 전에 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흔히 말하지요. ‘복음 설교하고 성령 받은 사람이 설교하면 사람들이 감동 받을 것이다.’
천만의 소리입니다. 예수님이 설교해도 다 가버렸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이 설교했는데, 심판주가 설교했는데 한 명도 남김없이 다 가버리고 두 번 다시 주와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기에 그들이 다 갔습니까? 우리교회 교인들도 남아 있는 것이 이상해요. 왜 안 가시는지 모르겠어요.
대체 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설교했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배고픔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떡을 제공 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들에게 무슨 자리가 있느냐 하면, ‘나는 배고파서는 안 돼.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는 굶어도 나는 굶으면 안 돼.’ 내 자리가 따로 확보되어 있고 그 자리를 채워주는 식으로 메시아가 와야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살과 피를 운운하면서 ‘너 나하고 죽을래?’ 그랬어요. ‘네가 나하고 죽을 수 있느냐.’ 그랬어요. 살려고 예수 믿는데 왜 죽어요? 그러니까 다 가버린 거예요. 니느웨 사람이 회개할 줄 요나가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40일 후에 심판받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약속을 위반했느냐, 하나님 쪽에서 약속을 위반한 거예요.
그러니까 요나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지요. ‘요나야.’ ‘예’ ‘네가 왜 화를 내느냐? 네가 성내는 것이 옳지 않다.’ 우리 같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성 낼만 하니까 성냈다는 거예요. 성 낼만 하다는 것이 뭐냐 하면, 요나의 자기자리가 안 깨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주께서는 요나를 죽이시는데 요나를 죽이시는 것이 아니고 요나의 자리를 꾸겨버리지요.
요나의 자리를 꾸겨서 요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주시되 요나를 살리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주셔서 복음을 위해서 사는 은혜를 주지요. 나를 살리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주시되 살고자 하는, 내 자리를 다시 되찾고자 하는, 나를 회복시키는 성령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이제 살아났으며 복음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예수님의 자리를 회복해 주지요.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서 살게 함이라.(고후 5:15) 복음을 안다 그 말입니까? 그러면 남과 비교할 내 자리는 없어졌습니다, 그 말을 할 수 있어야 돼요. 남과 비교할 내 자리는 없습니다. ‘나는 좀 알아 줘. 너만 성도인가, 나도 성도다.’라는 말이 좀 없어져야 돼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의 기초가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나를 거기에 섞어 넣는다는 겁니다. 섞어 넣어야 되지요. 하지만 자기의 자리를 섞어 넣으면 안 되고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죄인입니다. 이걸 죄라고 규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자기가 뭘 해도 죄라는 그것을 섞어 넣을 때 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피가 드러나지요.
이런 죄인도 구원받게 하시는 주님의 조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고 예수님의 구원이고 새 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우리 힘으로 그 심판에서 탈출 할 수 없어요. 우리는 평생 우리 자리를 포기할 위인들이 아니기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듭니다. 그게 니느웨고 그게 남방 여왕이에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멀리서 남방여왕이 왔어요. 그 남방이 에티오피아인지 예멘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하러 왔겠습니까? 만약에 내 자리가 따로 있어버리면 교회가 뭐가 되느냐, 교회는 노래자랑이고 되고 교회는 요리자랑이 되어버려요. 경쟁이 되는 거예요. 믿음 자랑, 기도자랑, 이런 경쟁이 되어버려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교회 오실 때는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을 가져오시면 안 됩니다. 요리 경쟁에는 요리솜씨를 가져와야 되고, 노래자랑 할 때는 노래 연습한 것을 가져와야 되고, 그런 것을 가져와야 남과 경쟁이 되겠지요. 그러나 교회 오실 때는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것을 내놓고 아무것도 가져갈 것도 없는 것을 기다려야 돼요.
다시 내 것으로 가져오겠다고 하는 그 순간, 제명이 돼요. 그것은 바로 신자 아님이 들통나버립니다. 교회라는 것이 자기위신을 찾겠다, 체면을 도로 찾겠다하면 그것은 일찍 나가셔야 돼요. 교회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터를 쳐다봐야 됩니다. ‘주여, 원래 우리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 아무것도 없는 분과 함께 하는 것,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 심판 주와 함께 할 때, 그것이 주님한테 꼭 필요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자리가 막강합니다. 그 자리에는 우리의 자랑거리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남에게 밑지지 않고 기죽지 않기 위한, 남에게 밀리지 않는 권력과 힘들로 가득 차 있는 내 자리,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해치게 만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였습니다. 이 죄를 그대로 가져옵니다. 예수의 피로 섞어서 오직 피의 능력만 증거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