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추수(눅10;1-2)이근호110102

아빠와 함께 2013. 8. 29. 10:24

 

본문 : 누가복음 10:1-2
제목 : 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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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1-01-02 16:00 
추수

2011년 1월 2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10:1-2

(눅 10:1, 개역)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눅 10:2, 개역)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앞장 세워서 이 땅에 뜻을 전하시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완전히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추수’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추수’ 하겠다고 나섭니다. 추수란 끝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추수란 또한 알곡과 가라지 간의 구분됨을 뜻합니다.

바로 추수를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도의 내용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생각해 놓은 하나님상에서는 추수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년초가 되면 사람들은 스스로 거룩한 것들이라고 여긴 것들 앞에서 정성을 모아서 빕니다. 달이 뜨면 달보고 빌고, 해가 뜨면 해보고 빕니다.

그 비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저 가족이 올 한해도 몸 건강하고 하는 일들마다 다 잘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것은 추수를 실시하겠다는 하나님의 뜻과 충돌됩니다. 이 추수 감각이 없는 것이 곧 이단입니다. 추수를 실시하시겠다는 것이 참 하나님의 뜻이요 그 추수의 기준마저 온전히 하나님이 제시하시겠다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초창기의 심판은 추수의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을 깜깜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노아 홍수 심판이 그런 겁니다. 전 세상에서 색깔을 다 지워버립니다. 저마다의 개성과 색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게 되면 추수라는 개념으로 심판 개념이 발전했습니다.

즉 건져낼 알곡도 함께 이 세상에서 한참 자라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문제는 기준입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어떤 식으로 구분되는지를 결정지을 기준이 중요하게 됩니다. 이 기준이 곧 진실입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된 것이냐’를 물으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무엇이 나를 편하게 하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사람의 기준이란 이처럼 ‘자기 편하게 사는 것’을 진실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추수’라는 말도 나오십니다.

추수란 거두어들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 자리에 그냥 두면 안된다는 겁니다. 분류시켜서 정리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추수의 특징은 자기 반항을 보여주는 동물을 상대로 하는 것이 그 자리에 생긴 대로 당해야 하는 식물을 상대로 한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에게 대들어도 그저 아뭇소리 못하고 생긴대로 존재하는 식물과 같이 취급됩니다.

인간들을 향하여 ‘추수할 대상’으로 보는 것 자체가 모독입니다. 그것은 인격모독이며 인간들이 한참 벌이고 있는 그 모든 노력을 무산시키는 말입니다. 발전소를 건설한다든지 바다 깊숙한 곳에서 석유를 캐 올려서 모든 산업 생산의 에너지 공급해 해대는 전 과정과 기술을 보면 놀랍기만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매진하는 인간들의 지혜와 아이디어 감탄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전도도 아니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추수 기준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3:32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마저 죽음으로 내모셨습니다. 저주받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해 유일무이한 방식이 그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또한 진실입니다. 자가 아들을 죽음 속으로 던져 넣으시는 바로 이것만이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는 기준이 됩니다.

바로 이것은 70인 전도자들은 전도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교회 전도’와 다릅니다. 교회 전도란 자신의 덩치를 키우는데 주력합니다. 자신의 덩치가 커지고 존재하는 것을 그들은 진리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속성은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평소에 자신의 가정에서 하던 행세를 그대로 한데 모아진 성질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즉 달 뜨면 달보고 빌고, 해 뜨면 해보고 빌면서, 그저 자기 가족 건강하고 하던 일들이 잘 되는 것을 염원하는 그 염원들이 모여서 교회의 염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단들의 집합체에 불과합니다. 가라지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추수 작업’을 앞장 세우시고 벌리는 하나님의 진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라도 무안에서는 겨울철 되면 아낙들이 차가운 칼 바람 부는 갯벌에 나가서 ‘감태’라는 바닷풀을 뜯는 작업을 합니다. 그것을 뜯어야 애들 대학에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겨울에 두 번은 울어야 작업이 끝난다 할 정도로 혹독한 환경 속에서 해야 될 일입니다. 과연 이들이 진실을 알고 살아가는 걸까요?

“하나님, 추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물으시면서 작업을 하시는가요? 아니면 “내 가족 건강하고 내가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는 마음으로 그 힘든 인생을 이겨내는 겁니까? 즉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입니까?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갈찌어다!”는 예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사람이란 명령자가 없으면 스스로 자기가 자신을 명령하는 자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추수’라는 하나님의 작업과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 추수의 기준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보내심을 받지를 못한다면 그는 매사가 자신의 가치를 위하여 열심히 인생을 살 뿐입니다. 3절에 보면,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70명 구원하려고 보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벌리시는 그 추수작업을 증거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양은 양답게, 이리는 이리답게 까발리기 위해서 “갈찌어다”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70인 전도자가 양으로 살아야 될 이유는 그래야 그 주변이 이리들로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도자에게는 그 어떤 개성이나 사적인 인생관을 허용될 수가 없습니다. 단지 보내심을 입은 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드러낼 뿐입니다.

로마서 1:14-16에 보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즉 구원의 능력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남은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자기 인생을 따로 챙기지를 알았습니다. 비록 챙기고 싶어도, 자기 백성을 기어이 구원시키겠다는 그 능력이 성도를 가만두지 않게 됩니다. 이 능력으로 사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자신의 것을 묵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복음의 능력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1-01-03 14:17 
058강-눅10장1-2(추수)-luk11010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10장 1절에서 2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09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0:1-2

“이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 우리 예수님께서 오셔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뜻하고 예수님이 없다고 치고, 이 성경을 덮었다고 치고, 이 성경이 없다고 했을 때 우리가 만들어내고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그 하나님의 뜻하고 맞는가를 비교해 보세요.

아마 맞는 대목이 없을 겁니다. 없을 뿐만 아니라 충돌이 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 하나님, 하는 그것이 사실은 예수님의 적, 하나님의 원수가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추수 이야기에서 추수가 있고 추수 꾼을 보낸다는 말은 예수님도 나름대로의 전도를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름대로 전도하시는 것과 오늘날 교회에서 전도하는 모습을 비교해 보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전도할 때 그것은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는 그것과 같겠습니까?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예수님도 없고 이 성경책도 없을 때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라는 것이 결국 누구 중심인가하면 자기중심이거든요.


자기중심이면 하나님의 전도를 한다는 것이 결국은 자기중심을 계속해서 전도한다는 것밖에는 안되지요. 그것을 가지고 저는 교회전도라고 합니다. 교회서 하는 모든 전도가 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전도하고 같은 것이 아니고 교회자체를 전도해요. 교회자체를 키우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전도입니다.


교회전도는 자기교회를 자랑하는 거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전도는 예수님 자신이 하신 일을 증거 하는 겁니다. 같을 수가 없어요. 본문에 예수님께서 70인의 전도 인을 세웠는데 이 전도인은 예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자기를 보내신 예수님을 증거 해야 되지요. 그런데 만약에 이 70명이 각자 자기 교회를 전도한다면 이것은 보내신 예수님의 취지와 안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전도가 뭐냐, 교회전도는 왜 벌어지고 있느냐? 이것은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전도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철저하게 방해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전도의 내용은 뭐냐, ‘추수’라는 말입니다. ‘추수’라는 것은 끝장 보자는 겁니다. 처음부터 너희는 추수의 대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추수라 하는 것은 결국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거든요. 알곡과 가라지,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추수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 본문을 보고 궁금한 것은 하나 밖에 없어요. 무엇이 알곡이며 무엇이 가라지냐, 그것만 우리가 알면 우리는 70인의 전도 꾼이 되는 겁니다. 알곡이냐 가라지냐, 이 결정은 우리가 내 중심으로 결정 내는 것이 아니고 그 결정 기준은 예수님한테 부여받아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년초가 되어서 예배를 드린다든지 기도할 때 그 내용이 뭐냐, 하나님이 생각하는 알곡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생각하는 가라지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알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거예요. ‘오, 주여! 알곡은 무엇이며 가라지는 무엇입니까?’라는 내용으로 빌기 위해서 동해안까지 밤 열차 타고 가겠습니까?


떠오르는 해를 보고 ‘알곡이 무엇이며 무엇이 가라지입니까’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정화수를 떠놓고 빌겠느냐 그 말입니다. 그런 장면들 TV에서 나오는 것들 보면 ‘올 한해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그저 가족 건강하고 그저 하는 일 잘되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추수의 기준이냐 그 말입니다.


그저 돈 잘 버는 것 소원하는데 그게 천국 가는 기준이고 그게 알곡입니까? 그러면 돈 못 벌면 가라지입니까? 몸 건강하면 알곡이고 몸 아프면 가라지가 되는 겁니까? 우리가 그런 식으로 교회에서 배운 거예요? 추수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추수 꾼이 되는 거예요. 마지막 심판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뭐냐, 추수할 때 추수의 기준이 뭐냐가 궁금한 거예요.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과연 우리가 진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과연 우리는 진실한가, 진실에 대해서 뭘 알고 있는가가 중요한 겁니다.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가가 중요하지요. 지금 이 시대는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내가 힘을 가졌는가, 돈을 가졌는가가 전부에요. 진실은 ○진실만 진실이고 그 외에는 진실이 없는 것 같아요.


무엇이 올바른가에 대해서 관심을 끊어버렸습니다. 무엇이 올바른가가 중요해야 되는데 얼마나 내 몸이 편한가, 그 것만 주장한다는 말이지요. 지리산자락에 황토 집 지어놓고 ‘아, 살만하다.’고 할 때 그 황토 집을 지은 늙은 내외가 그 집 지으면서 진실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했느냐 그 말입니다.


겨울철에 전남 무안에서 감태작업을 해요. 19살에 시집와서 30년 동안 감태 작업 했다는 49살 된 아주머니, 시골에서는 젊은 분인데 이런 이야기를 해요. ‘겨울철이 되면 감태작업을 하는데 갯벌에 푹푹 빠지면서 손이 시리고 발이 시려서 고생을 하는데 두 번 울어야 이 겨울철 감태 작업이 끝난다.’고 해요. 그 추운 겨울철에 이 감태를 거두어야 자식을 대학에 보낸다고 해요.


매섭고 차가운 겨울의 바닷바람을 맞아가면서 감태 거두는 일로 두 번 울 때 ‘이것 거두어야 등록금 마련한다.’는 그것 때문에 두 번 울지 ‘주여, 진실이 뭡니까?’ 그것 때문에 두 번 세 번 울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추수의 기준이 뭡니까, 그것 때문에 두 번씩 우는 것이 아니에요.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원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기에, 자동적으로 교회 안 나와도 하나님의 뜻을 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오해를 하기 마련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 보내서 추수 꾼 보내서 추수하는 것이 주의 뜻이고 그것이 진실인데 사람들의 감각에는 추수라는 개념이 없어요.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뭐냐, ‘그저 올 한해도 사업 잘되고 온 가족이 몸 건강하게 사는 것’이에요. 그저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비는 것은 자기 신상 편하게 올 해도 살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그것뿐이라는 말이지요.


교회 전도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요. 교회라는 것이 그렇게 위험해요. 교회 다니면서 교회를 부정해야 되기 때문에 얼마나 위험합니까? ‘추수를 하겠다는 것과 네가 평소에 알고 있는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추수하는 그 계획도 먼저 하나님이 잡아놓았고 그 기준, 무엇이 알곡이고 무엇이 가라지인지도 하나님이 제시한다는 그 말은 우리보고 ‘너는 이단이야.’라는 뜻이에요.


인간은 날 때부터 이단이라는 거예요. 이단이 교회생활 해봤자 그게 이단이지 뭐겠어요. 그저 빈다는 것이 ‘올 한해도 식구들 건강하고 하는 사업 잘되게 해 달라.’는 그것이 이단이고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니까요. 예수님의 전도는 뭐냐,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께서 자기아들을 내어줬다는 거예요. 자기 아들을 버렸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독자 아들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유일하신 아들이지만 자기 아들을 죽음에 그냥 던져버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이게 추수의 기준이고 이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전도입니다. 내 아들 버렸다는 겁니다. 왜 버렸는가? 내 아들에게 죄가 있기에 버렸다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죄는 아니지만, 자기 백성 건지기 위해서 대신 짊어진 죄지만 어쨌든 죄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주가운데 버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전도에요. 날 때부터 죄인이고 날 때부터 이단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 추수지요. 하나님께서 추수를 하겠다는 그 말은 일체 인간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폭파시키겠다, 인간이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추수할 때가 되었다, 추수할 것이 많다.’에서 이 ‘추수’라는 말이 원래 농사꾼이 식물성 작물에 대해서 하는 말입니다. 보리나 조나 콩, 벼 같은 식물이죠. 추수는 동물한테 쓰는 표현이 아니고 동물에 대해서 쓰는 표현은 ‘사냥’이라고 하지요.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하여 추수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동물이에요. 그냥 동물이 아니고 반항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반항하는 동물을 무엇으로 취급하느냐, ‘네가 백날 달려들면서 나에게 욕을 해도 그냥 낫질 한 번에 단번에 날아가는 식물성으로, 곡식종류로 보신다.’는 그 어감이 추수라는 말 자체에 들어있는 거예요.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께 반항하는 겁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이것이 동물이에요.


우리에 가두면 뛰쳐나오고, 또 가두면 뛰쳐나오고, 교회 오라고 하면 뛰쳐나가버리고. 뛰쳐나가는 그것이 뭐냐, ‘나는 내 것이 있다.’는 거지요. 반항한다는 것이 뭡니까? ‘나는 내 힘으로 벌어놓은 내 것이 있다.’는 거예요. 내 것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추수에 대해서 나는 반대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의 추수작업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발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전남 무안의 갯벌에서 감태 거두는데 그 매서운 겨울바람에 떨면서 ‘내가 이 짓을 왜 하지? 이렇게 추운데 몸이 얼어붙는데 이렇게 꼭 하면서 살아야 되는가.’ 하는 그 설움에 두 번 울어야 감태작업이 끝난다는데, 그 아줌마들이 시집와서 하는 것이 그것밖에 없는데 그러면 그 아줌마들은 두 번 우는데 울산 공단의 아줌마들은 안 웁니까?


울산 공단의 아줌마들도 서너 번씩 울고 데모도 해야 되고 서울의 청소부 아줌마는 안 웁니까? 또 할 일없이 치매 걸려서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그 노인들은 안 울겠어요? ‘인생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거야?’ 생각하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그것이 결국 뭐냐, 평생 한그루의 식물, 화초로서 살아온 것이 아니고 곰 새끼처럼 그저 들이박고, 하나님의 은혜의 펜스를 부수고 ‘이런 것도 은혜인가’ 하면서 짖어대고 ‘이런 것도 복이냐? 내가 이런 복 달라고 철야 했나’ 하면서 대들고 걷잡을 수 없는 동물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나대면서 살아왔지요.


교회 보면 참 기가 막힙니다. 교회 전도하기 위해서, 교회 키우기 위해서 온갖 저질스럽게 유치한 것은 다 동원해요. 신년 초에 헌금 끌어내려고 성경구절 뽑으라는 거예요. 뽑기 못해서 환장했습니까? 동네가게 가면 인형 뽑기 있잖아요. 성경구절 뽑아서 그것 뽑은 값으로 봉투에 헌금 내라는 겁니다. 뽑는 사람도 가관이에요. 다 좋은 말씀인데 왜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느냐고 해요.


성경구절 저보고 뽑으라고 하면 그 소리 못나오게 만들지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그런 구절을 왜 안 씁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구절 왜 안 씁니까?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 얻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으리라.’라는 것은 왜 안 써요? 스데반 집사 돌 맞아 죽은 것은 왜 안 넣고 십자가 이야기는 왜 안 넣어요.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창대하다.’ 이런 마귀말만 다 집어넣어놓고는 다 은혜롭다는 거예요. 이것이 요행이거든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특별한 계시가 있을 것이다, 흔들어서 뽑자, 이것이 올해 신수다.’ 토정비결이나 보던 그 개 같은 버릇을 교회에서 그대로 실시해서 그저 헌금이나 뽑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극렬하게 반대를 했지요. ‘성경말씀이 활자로 다 되어 있는데 뽑기는 뭘 뽑아. 성경에 다 있는데.’ 추수하리라, 얼마나 좋아요. 하나님의 추수라는 개념은 초반의 심판개념에서 발전된 겁니다. 초반의 심판개념은 대표적인 경우가 노아홍수지요. 노아홍수인데 암세포 시커멓게 번지듯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뭐냐, 검은 잉크를 확 퍼지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화려했던 전 세계의 색깔들이 다 시커먼 색깔로 바뀝니다. 전 지구상의 모든 것이 색채가 없어져버려요. 색깔 자체가 다 날아가서 시커멓게 돼버립니다. 밤이라도 화려한 조명 앞에서는 각기 개성이 드러납니다. 어제 미장원에서 머리한 것도 드러나고 옷 입은 것도 드러나고 넥타이 맨 것도 다 드러나고 눈 수술한 것도 다 드러나지요.


그런데 정전만 되면 옷을 뭘 입었는지도 모르고 키가 몇 센티인지도 모르고 그저 시커멓게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내가 나에게 주는 그 모든 강렬한 개성을 일소에 부치고 무시해버리는 것이 심판이에요. 인간이 개인의 특징을 살리는 어떤 시도도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네가 알고 있는 인생이라는 기준은 내 앞에서는 찢어버린다. 다 소용없다.’ ‘나는 청소작업 하면서 고생했습니다, 나는 감태작업 하면서 고생했습니다, 나는 미역 딴다고 고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런 입을 놀리면 안돼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입을 막고 재를 뒤집어쓰고. 우리 예수님 내 대신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것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버린 그것이 추수인데 우리는 달뜨면 달보고 빌고 해 뜨면 해를 보고 빌어요. ‘올 한해도 하는 일 잘 되고 식구들 건강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인생 잘못 산 거예요. 처음부터 자기주제 파악도 못하고 그냥 산겁니다. 그래서 70명 전도자가 해야 될 일이 뭐냐, ‘당신들은 평생 동안 미신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상대방 쪽에서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러면 네가 전하는 하나님의 뜻은 뭐냐?’라고 할 때, 그 70명의 전도 인들이 해야 될 것은 ‘우리는 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그 십자가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은 개시되고 그것이 추수의 유일한 기준, 알곡과 가라지의 기준이 됩니다.’라고 전하는 겁니다.


그것을 추수 꾼들이 해야 되는 거예요. 전의 추수 꾼이나 나중 추수 꾼이나 그것을 해야 되는 겁니다. 추수라는 개념은 식물에만 해당되지만 실제로 추수를 해보면 극렬한 짐승들 속에서 그들은 수모를 당해야 됩니다. 그 구절이 3절에 나옵니다. “갈찌어다.” 70명의 전도 인들이 우리와 똑같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갈찌어다.’라는 말은 평소에 안 듣고 살았고 ‘갈찌어다’가 아니라 ‘나는 이것을 하겠다, 내가 결정하겠다.’가 주가 되는 사고방식으로 평생 동안 살아왔어요.


그런데 갈찌어다, 라는 말을 예수님에 들었다는 것, 가서 어떤 수모의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일단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예수님한테 이런 명령을 받는다는 사실이요.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 앞에 주님이 누구신가를 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는 거예요. 주님의 부속품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는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런 자가 알곡에 해당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추수를 하시려고 하고 그 추수라는 것은 예수님이 결정한 것이고 모든 기준도 예수님이 제시한 겁니다. 거기에 종속되어 있는 70명은 자기 추수라든지 자기인생관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갈찌어다.’라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느냐, 3절에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70명이 갈 때는 아마 이것은 자기 인생에 관한 문제라고 여기고 가지만 자기는 점차 무엇으로 바뀌어야 되느냐, 어린양으로 바뀌어야 돼요. 어린양으로 바뀐다는 것은 나를 보내신 예수님이 어린양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셨기 때문에 추수가 성사된다는 것을 70명도 어린양의 모습으로 그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신의 사적인 ‘내가 얼마나 편한가,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가?’ 이렇게 되면 뭐가 탈락하느냐, ‘누가 나를 보냈지? 보내실 때 어떤 모습으로 보낸다고 했지? 어린양으로 한다고 했잖아. 어린양, 이걸 내가 할까, 말까?’ 이것은 자기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어린양이 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어린양이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고 70인명이 어린양이 될 때에 어떤 효과가 나느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리가 되는 겁니다. 늑대가 되면서 그들은 갈라질 수밖에 없는 타당성이 거기서 뽑혀져 나오지요. 그래서 상대방을 이리 만들기 위해서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너는 양처럼 살아야 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제발 네가 좀 양이 되어 줘. 그래야 저쪽이 이리다.’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성질이 있어서 어떤 양이냐, 사나운 양이 되었습니다. 사나운 양은 이리입니다.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양, 순한 양이 아니고 우리도 한 성질 하는 양, 그래서 교회가 사나운 양들끼리 다툰다고 피를 흘리지요. 예수님 흘린 피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흘린 피를 가지고 자랑하면서 싸움하지요.


양들인데 왜 그렇게 사나운지 모르겠어요. 이리인지 양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니까요. 독자적인 자기의 자존심 같은 것을 챙기기 위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나올 때를 보게 되면, 이것은 오래 교회 나온다고 해서 그 본성이 바뀌는 것이 아닌데, 교회 나오는 이유가 뭐냐, 교회 나와 주고 복을 받아서 따로 집에 챙겨놓은 내 인생, 내가 다듬어 놓은 나의 것이 내 뜻대로 잘 되는 것, 그것을 노리기 위해서 교회라는 학원, 교회라는 어떤 곳에 나와 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지금 나오는 것이 잘했나, 못했나, 그 기준을 무엇으로 결정하느냐,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내 뜻이 잘되었으면 교회 나오는 것이 정상이고 내 뜻대로 못되었으면 교회 안 나오는 것이 정상이고, 이런 식으로 자기 스스로 기준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의 특징은 뭐냐, ‘갈찌어다.’라는 명령, 사명이 없어요.


누가 보낸 적이 없어요. 예수님이 안 보냈는데 교회에 와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것이 그 대목입니다. 분리작업을 어떻게 하느냐의 이야기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분류작업 되거든요. 추수는 알곡과 가라지니까 결국 분류작업입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분류작업을 하는데 그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이 다른 것이 아니에요. ‘알아서 오셨습니까? 누가 가라고 해서 오셨습니까?’ 그게 기준입니다. 내가 알아서 오겠다는 말은 명령자가 나고 명령자에 따름도 나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교회 다녀주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는 자진해서 남에게 진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이 안돼요. 자진해서 교회 나올 때는 남에게 이기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졌다는 이것은 아무도 날 보낸 적도 없는데 그냥 교회 나오는 겁니다. 누구의 글에 이런 댓글을 달았지요. 사람들은 교회라는 친목단체가 자기를 사랑해주면 그 때 교회를 사랑해주고 교회라는 것이 자기를 미워하면 그때 교회를 미워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뭐냐, 어떤 인간이든 자진해서 주님의 교회를 사랑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분류작업이라는 것은 의외로 굉장히 쉽게 이루어집니다. 대전강의 할 때 그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거기 장 희열 집사님 부부가 계시고 이 종분 집사님이 계셨는데 이런 실감나는 예를 들었습니다. 이 종분 집사님이 갑자기 장 희열 집사님한테 ‘당신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오지 마세요. 당신이 우리 집에 드나드는 것이 진짜 역겹고 싫어요.’라고 했다 칩시다.


평소에 사람들은 대개 ‘복음 때문에, 복음 듣기 위해서 옵니다.’라고 다 하거든요. 그러면 분류작업은 굉장히 쉬운 거예요. 미워해 보는 겁니다. 실컷 미워하는 거예요. 그러면 받는 쪽 답변이 이렇게 나와야 돼요. ‘내가 이렇게 오고 싶어서 오는 것이 아니고 갈 찌어다! 하는 복음으로 만나야 되고 복음으로 모여야 되기 때문에 갈 찌어다, 하기에 왔습니다.’ 하고 나온다면 그것이 미워도, 미워도 복음이 되는데, 내가 이렇게 미워하는데 그럼 나도 안가지, 라고 한다면 평소에 안 미워하는 조건하에서 참석했다는 이유가 돼버려요.


그러면 그 기준이 알곡과 가라지의 기준입니까? ‘당신이 날 안 미워하면 오겠다.’ 한 그것이 알곡과 가라지의 기준이냐 그 말이지요. 복음, 복음 왜 그리 말들을 많이 하는지, 나중에 그래서 그것이 볶음이 돼요. 이게 무슨 김치볶음인지 모르지만.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왜가나, 결국 그 말 아닙니까?


하나님의 전도는 자기 아들을 저주하고 미워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변하지 않는 진리에요. 그 진리에 여러분은 가깝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버렸습니다. 그걸 증거 해야 되고 그걸 증거 하라고 70명을 보냈고 그 70명의 의식이 그들의 인생을 조종하고 그들의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가 그들이 가는 곳입니다. 이제부터 70명이 할 일은 뭐냐, 무엇이 양이며 무엇이 늑대인지 구분하는 그일 뿐이에요. 그 일을 본인이 하고 싶어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 사람이 자기 것이 있어버리면 이미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늑대가 되고 이리가 되도록 되어 있어요. ‘어느 놈 하나 미워하는 놈 걸리기만 해봐라.’ 이것은 자기 것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미움 받아도 싼데, 저주받아도 마땅한데 우리는 자기 자신이 어쨌든 간에 저주받아서는 안 되고 남에게 미움 받아서는 안 되고 그것이 인생사는 확고한 기준이 되니까 이것은 누가 옆에서 분류 안 해줘도 알아서 지옥으로 가 주시는 겁니다. 분류작업이라는 것이 힘든 작업이 아닙니다. 세상, 지옥에서 부르는 냄새가 나요.


온 세상이 캄캄해도 배고플 때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냄새입니다. 맛있는 냄새나면 더듬어 찾아서 먹게 되어 있어요. 이 어두운 세상에서 지옥에서 피워내는 냄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는 잘났어. 너는 대단해. 너는 남한테 질 사람이 아니야. 꼭 이길 사람이야.’ 라는 그런 냄새를 찾아서 시라소니처럼, 야수처럼, 짐승처럼 우리는 울부짖으면서 들판을 헤매고 있습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갑자기 조용필의 노래생각이…….


세상은 야생동물 천지에요. 찢고 잡아먹고 그것도 모자라서 또 다른데 가서 굶주림에 못 이겨서 또 찢고.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이 말씀이 언제 실감나느냐, 대체 나라는 것이 전부다 나에게 실망만 안겨줄 때, 그 동안 애쓰고 힘써서 내 것이라고 뭉쳐놓은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실망으로 떨어질 때, 대체 내가 왜 사는가 싶을 때,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살아온 것을 한 번 되돌아 봐야 됩니다.


정답이 뭔지를 몰라요. 정답을 알려줄게요.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가 상대하는 관계에 따라서 그때그때마다 새로 정립, 새로 구성하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와 맞닥뜨리냐에 따라서 그때그때 자기 모습이 또 달라져요. 쉽게 말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이 세상의 불변하는 진리가 뭐냐, 변한다는 거예요.


말이 좀 어렵지요. 세상이 변한다는 그것만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하고 다 변해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70명처럼 ‘갈 찌어다.’ 이런 명령을 받는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고정된, 이미 확고한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비록 우리가 가는 곳이 이리 가운데 늑대 가운데로 가는 것 일지라도 우리에게 명령권자가 있다는 것, 우리에게 명령을 했다는 것, 그 명령이 우리에게 확정된 평생이 되어버렸다는 것,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명령 하나로 끝장났어요.


다 완료되어 버렸습니다. ‘갈 찌어다.’ ‘어디로요?’ ‘늑대로’ ‘제가 누군데요?’ ‘너는 양이거든.’ ‘그러는 당신은 누굽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양이거든.’ ‘그러면 예수님과 나는 한편?’ 주님께서 이런 말씀 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는 남자가 되어서 여자들의 심리를 잘 모르겠는데요, 가끔은 그것을 느껴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마지막 임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가는데 꼭 여자 친구가 안 떨어지겠다고 붙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남자관객들은 “또 나온다. 또 나와. 분명히 저 여자 때문에 임무에 차질이 있을 거야. 저 여자들은 영화도 안보나. 저렇게 위험할 때 혼자 놔두지 꼭 포로가 되어서 ‘이 여자 살리려거든 칼을 버려라.’ 하는 상황을 만들어서 주인공을 위험에 빠뜨리냐.”고 하겠는데 지금은 제가 이해를 할 것도 같아요.


뭐냐 하면, 사랑은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분명히 두려울 지경에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인해서 절대 두렵지 않다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여기 눈이 왔을 때 눈 풍경 찍는다고 산에 올랐어요. 올라갈 때는 신나게 올라갔지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으니까 신나게 올라갔는데 내려 올때를 생각지 못했어요.


내려올 때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었어요. 그래서 소나무를 잡으면서 내려왔어요. 그러니까 걱정이 안돼요. 왜 그런가요? 물리적으로 사람이 혼자 있으면 무게중심이 자기에게 있지만 소나무를 붙들면 그 순간 무게중심이 쏙 빠져서 소나무에게 다 가 있어요. 소나무가 넘어지지 않는 한 나도 안 넘어지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여자가 남자를 사랑할 때 그 마음이고 이게 사랑입니다. 자기가 자기 무게중심을 챙길 이유가 없다니까요. 내가 알아서 감태작업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 힘든 일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는 얼마든지 해 낼 수 있는 겁니다. 왜,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고 소나무가 책임지니까 소나무 붙들고 또 다음 소나무를 붙드니까 넘어질 일이 없어요.


그래서 내려왔어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라는 말씀을 주께서 하신 것은 혼자 살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네 힘으로는 결국 남는 것이 없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저 우~, 하는 늑대처럼 야생동물처럼 남들 시체나 뜯어먹으면서 평생을 살다가 나중에는 한줌의 흙으로 소멸되고 만다.’는 겁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추수기준을 주께서 내세울 때 인간보고 개과천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이 바뀌지 않아요. 단단한 쇠도 물을 만나면 산화철이 되지요. 철이 처음 광산에서 나올 때 산화철이라는 상태로 나왔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철로 만들어도 공기 중에 나오고 물을 만나면 다시 산화철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성질이 있어요.


이게 쇠만 그렇고 철만 그런 줄 알아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10년 나오고 20년 나오고 장로 목사 되고 백날 해도 인간은 그 늑대본성으로 되돌아가요. ‘예수 믿어도 소용없고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고 나는 나다.’라는 그 본성으로 되돌아가요. 우리 교회는 그런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만 그런 본성으로 되돌아가요.


그래서 알곡 되는 사람은 일부러 교회 안 나오고 일부러 예수님 욕해도 자기 본성보다, 자기가 자기 인생 꾸리는 것보다 명령받은 것, 사명이 더 세면 그 사명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양의 길을 가도록 그렇게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결국은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만들어요. 원치 않는 길로 가면서 나라는 인생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존재해야 그것이 예수님은 신랑이고 나는 신부가 된다는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 그것이 주의 말씀이 갖고 있는 위력입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그 능력보다도 말씀이 말씀되게 하시는, 나를 다루고 사용해서 기어이 우리를 알곡 되게 하시는 그 힘이 더 세다는 말입니다. 그 센 사람을 소개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7절에 보면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13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다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그리고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계속해서 가고자 해도 길이 막혔지만, 하지만 너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기어이 나를 사용해서 복음을 전하게 했다. 이 복음은 죽음보다 더 세고 이런 장벽보다 더 세고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겠다는 이 나의 똥고집보다 더 센 것이 복음의 위력이고 능력이다.’라는 겁니다.


나보다 주님이 더 세고 나보다 하나님이 더 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낸 자의 입에서만 그런 고백이 나와요. 그러니 우리는 그냥 성질대로 삽시다. 성질대로 살다보면 ‘야, 나보다 더 세신 분이 계셨네. 그 분이 나보고 갈 지어다, 라는 명령을 하셨네.’ 그 ‘갈 지어다.’ 라는 명령, ‘너는 양으로서 주변에 이리와 늑대밖에 없음을 까발리는 그 일을 해야 된다.’ 그 능력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그 위험한 일을 주님에 대한 사랑가운데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었던 이 사도바울에 대한 이야기가, 로마서 1장 전체의 내용이 사도바울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해서 반드시 믿는 자에게 복음이 전달되게 하시는 그 능력이 내가 안가고 싶어도 가게 하는 능력으로, 나보다 더 센 능력으로, 나에게 아주 지배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을 자는 반드시 구원받게 되어 있고 그리고 아무리 구원받고 싶어도, 아무리 교회 와서 앉아 있어도 세상 쪽으로 가는 그 냄새, 세상 쪽에서 알아주는, 자기가치와 존재를 알아주는 그쪽으로 빠지는 힘이 더 세면 아무리 천국 가고 싶어도 못 가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결국은 세상 쪽으로 갔다는 그것을 너무 안타깝게 여기지 마시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나도 똑같은데 나는 어째서 자꾸 복음 쪽으로 끌려가느냐, 이것을 오히려 기이하고 놀랍고 신기하게 느껴야 돼요. 그래서 저쪽, 세상 쪽으로 가는 것을 충분히 이해를 해줘야 돼요.


가끔 발전소나 공장의 기계설비, 대단위아파트단지건축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의 능력이 참 대단해요. 온 천지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는 발전소의 시설을 보면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새까맣게 색깔이 지워지는 그 날, 남는 것은 ‘너는 동물이 아니었고 내가 보기에 그냥 식물이었어. 알곡이나 가라지, 가라지나 알곡, 둘 중의 하나였어. 너희가 아무리 몸부림치고 발버둥 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그것이 대단할지라도 색깔만 빼버리면 전부 다 무채색이 되어버리고 한줌의 흙인 것을…….’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곧 진실이다. 내가 곧 진리요 길이고 내가 생명이다.’ 예수님이 움직이는 모습 자체에서 우리는 세상 마지막 추수 때의 모습을 다 보는 겁니다. 이 예수님 버리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하시는, 버리시고 다시 살려주시는, 그 버리고 살리는 그 조치로 인하여 알곡 되고 그 외에는 다 가라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것 가지고 새해 되었다고 하나님 앞에 복 빌어 보지만 그것이 누가 우리를 보낸 사명감이 없는 자의 특징인줄 압니다. 보낸 자가 없이 교회오고 주님 죽으심 믿지 않고 자기 것 챙길 때 결국은 주님을 떠나고 주님 앞에 반발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 힘보다 우리 위에서 더 강하게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강권적인 구원의 능력을 더 크게 느끼고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