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57강-부딪힐 돌(롬9;29-33)이근호131027

아빠와 함께 2013. 10. 27. 14:58


부딪힐 돌(로마서 9: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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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0-27 13:34 
부딪힐 돌 

2013년 10월 27일                            본문 말씀: 로마서 9:29-33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9: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남은자’가 등장하지 않으면 소돔과 고모라 성에 유황불이 떨어진 것은 그들만의 특수한 범죄의 결과라고 간주할 것입니다. 즉 그들은 다른 마을 사람들이 짓지도 않은 엄청난 범죄, 예를 들면 동성애 같은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하늘로부터 유황불이 떨어져 몰살 당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죄를 짓지만 않는다면 우리 자신들은 결코 소돔과 고모라같은 참목한 저주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기 단속은 실패로 끝납니다. 왜냐하면 ‘남은자’의 출현 때문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등장되는 ‘남은자’ 집단으로 인해 남은자 외의 모든 나머지 사람들은 다 소돔과 고모라에 해당되는 자들입니다. 

저주받을 도성과 그렇지 않는 남은자 사이의 차이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있지 자기 자신들의 자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자질 때문에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놓고서 ‘믿음이냐 행함이냐’로 성경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구원받을 남은 자들은 결코 자기 행함을 의지하지 않게 된 자들이다 는 말입니다. 

왜 인간에게 행함이 문제가 되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출현과 그 시행은 인간의 행함을 비켜가기 때문입니다. 욥기 23:3에 보면,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고 되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 뵙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어느 지점에 계시는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어떤 현상을 갖고 나타나시는지 모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파악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본인들부터가 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꾸만 자신을 선한 존재로 간주하는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등장하실 때는 악을 대동하고 등장하십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을 방치하고, 언약을 두르지 않고 등장하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언약에 의하면 세상이 전부 ‘뱀의 후손’ 수중에 들어갔음을 기정사실화하시면서 등장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5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씀이나 10-11절에서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세상의 성질이 이미 어두움으로 조성되어 있음이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두움은 빛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라는 겁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선악과 나무 과실을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다루시면서 선악과 따먹은 그 결과로서 다루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악을 저지르지 못합니다. 당연히 선도 저지르지 못합니다. 오로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취지에 종속됩니다. 즉 악은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악은 홀로 성립하지 못하고 선이 무엇인가를 지목하기 위해 동원됩니다. 선악체계가 가동되는 영역에서 악은 생산됩니다. 

선악체제의 살아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인간들은 스스로 오해의 늪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 오해란 곧 자신이 잘못을 자신이 알 수 있다는 오해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를 알고자 한다면 실제는 그는 ‘살인은 나쁜거야’라고 아는 상태로 실제로 사람을 죽여야 비로소 용서가 뭔지를 알게 됩니다. 

죄를 모르면 용서도 없습니다. 용서라는 해답을 먼저 쥐고 있다고 해서 문제취지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용서라는 체계 안에 들어오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의식은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죄를 짓도록 정보화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용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현실이 곧  선악과 원리가 적용되는 세상이요 현실을 알려주는데 있어 인간들이 활용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뱀의 지배를 받는 세상이라고 보십니다. 그리고 그 특징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출발점을 자기네들이 여기 있다는 그점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예를 들면, 악마는 예수님에게 제안하기를 “돌이 떡되게 해보라”고 했습니다. 즉 인간은 당연히 떡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것이 그 풍요하게 되는 신기한 신적인 능력을 행사하라고 유혹한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출발의 진원지 자체를 바꿉니다.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고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란 독자적으로 생존할 권리는 없고 말씀이 말씀대로 성사되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자료들이다”는 겁니다. 말씀에 의하면 인간과 세상은 악입니다. 하지만 그 악이 열려지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선과 의가 출현합니다. 

이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출현하는 지점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이 온전히 죄인인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 터지는 현장입니다. 그 현장을 포괄적으로 표현한 지점이 바로 33절에 나오는 시온입니다. 그 시온에서 사건이 터지는데 그 사건은 ‘자기 지명적 사건’입니다. 곧 하나님 자신을 지목하고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인간은 이미 뱀에 속했으며 따라서 그 지배 하에서 쏟아내는 모든 것은 오직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자신이 유리한대로 행함을 쏟아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함의 끝은 곧 십자가 사건에 와서 부딪치는 결과들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이 돌을 비켜가거나 우회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행함은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는 ‘자기 지명적’ 성질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아무리 ‘믿노라, 회개하노라’ 하여도 그런 행위를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전히 대견한 안목을 유지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은혜로 남은자가 아닙니다. 

시온에 참여되는 은혜를 받아 십자가 앞에서 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비로운 파괴자이십니다. 자신이 모든 것이 자기존재를 출발지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신을 늘 사라져야 될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바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존재 의미로 십자가로부터 새롭게 제공받습니다. 

그 내용은 고린도후서 6:9-10에 나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에게 이익될 일은 하나님에게 아예 없음을 믿게 하옵소서. 모두 하나님의 작업을 위한 일일뿐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함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9장 29절에서 33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52페이지입니다.



로마서 9:29-33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29절에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하는 이 대목이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씨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겨준 남은 자거든요. 남은 자 입장에서 보면 남은 자가 생기지 아니했다면 그 자체 그대로 소돔과 고모라와 동일하다고 보고 사도바울은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창세기 19장에서 잘 알다시피 하늘로부터 유황불이 내려와서 그 지역이 다 불바다가 된 사건이 소돔과 고모라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유황불을 내려서 그들을 다 몰살시키고 심판했다는 창세기 19장의 내용을 사람들이 보면서 누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들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게 벌을 받았는가?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질 정도라면 그들이 어떤 죄를 지었기에 그들이 비참한 징벌을 받아야 되는가, 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유황불의 벌을 받고 싶지 않다면 유황불 받은 사람들의 죄를 안 지으면 되잖아요. 그들이 지었던 죄 때문에 그들에게 유황불이 떨어졌다면 그들이 지은 죄를 우리는 안 지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유황불 떨어지는 심판을 안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딱 서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보면서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을까? 나는 지금 그런 죄를 지었을까? 나는 아직 그런 죄까지 짓지는 않았구나. 다행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사건을 가지고 거기에 동성애 같은 성적 문제가 있었다는 식으로 따지지만 로마서 9장 29절에 의하면 모든 세상은 다 소돔과 고모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특정 죄를 짓든 안 짓든 관계없이 처음부터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 명절만 되면 전부 다 돌아가는 이 고향땅은 다 소돔과 고모라가 된다는 겁니다. 이미 되어져 있다는 이야기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몰랐어요. 이스라엘사람들은 그 땅에 살면서 그 땅은 축복된 땅, 약속의 땅이라고 본 겁니다. 한 30년 전인가, KBS드라마에 이런 것이 있었어요. 두레마을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밀려나서 망했던 그 노동자들이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 세상 뒤집어야 된다.’ 해서 특별하게, 갑도 을도 없고 억누르는 자도 없고 갈취하는 자도 없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땅, 옛날 조상들의 두레처럼 서로 협동하면서 살아보자는 취지로 공동체를 만들었지요. 빈민가에서 목회하던 어떤 목회자, 누구라고 말은 안하겠습니다만 그 목회자를 중심으로 노동자나 빈민들이 모여서 새벽을 깨워가면서 이것이 약속의 땅이라고 했던 거예요.

정말 억울하게 당했던 사람들끼리 모여서 누구도 지배하거나 억압하거나 갈취하지 않고 정직하게 벌어서 정직하게 살아갑시다, 해서 그 이름이 약속의 땅이 된 거예요. 그것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그게 바로 소돔과 고모라, 유황불 받아야 될 동네에요. 상상도 못하겠지요. 로마서 9장 29절을 알아야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로마서 9장 29절을 봐도 잘 모르잖아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땅이라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고 그리워하고 있었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제 동생도 옛날 한때는 세상 살기 힘들다고 공동체생활 같은 것을 그리워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찾아보니까 호주에 그런 동네가 있답니다. 이런 이야기 하면 또 호주로 이민 갈 생각하는 사람 있을지 모르겠어요.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마음껏 쓸 수 있는 세계. 이것은 바로 공산주의혁명을 일으켰던 레닌이 주장했던 사상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이에요. 사도행전 2장에 필요에 따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초대교회의 모습은 진짜 공산주의였구나. 그래, 하나님 믿고 형제들이 서로 나누면서 공동생활로 살아보자.’ 라는 것이 박태선 신앙촌입니다.

누구나 꿈꾸는 거예요. 하지만 그 공동체를 처음으로 했던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왕이라 해서 땅을 빼앗을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공평하게 나누어준 그 땅은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상속분이라고 해서 누구도 손대면 안 되는 이상적인 나라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약속의 나라, 약속의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9장 29절에서는 그게 바로 소돔과 고모라다, 라고 합니다. 대체 뭘 몰랐기에, 사상에 뭐가 잘못되었기에 소돔과 고모라 땅에 살면서 여전히 꿈을 꾸듯이 약속된 이상세계를 꿈꿀 수밖에 없는가? 무엇이, 어떤 점이 빠졌기에 그런가요?

개척교회 하는 목사님가운데 이런 꿈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근처 팔공산 자락만 봐도 전원교회들이 많아요. 도시에 살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놀 겸해서 경치 좋은데 교회를 짓자는 거예요. 이미 절이 한 두 군데가 아닌데 절 비슷한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한대로 세상은 이루어지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남은 자 외에는 다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다면, 다시 말해서 남은 자를 하나님께서 등장시키지 아니했더라면 자신들이 소돔과 고모라인줄 꿈에도 생각 못할 뻔 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어떤 세상이냐를 결정짓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들이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없었던 데서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유황불속에 사라져야 되는 거예요. 남은 자를 등장시키고 실현시키고 구체화시키는 그 지점과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이 징벌 받고 저주받아서 사라져야 될 그 지점이 동일한 지점입니다. 우리는 남은 자라는 것은 싫어요.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을 쉽게 하면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있는 내가 더 잘되기를 바랄 뿐이에요. 따로 남은 자 있기를 우리가 원치 않아요.

현재 있는 거나 잘 키우고 잘 유지되었으면 좋지 따로 나 말고 남은 자가 툭 튀어나오는 것을 우리는 거북스러워합니다. 남은 자 등장하면 나는 뭡니까? 나는 그냥 헛수고나 했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를 약속의 땅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따로 남은 자를 끄집어내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살면 되지 왜 따로 일을 벌이십니까?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남은 자, 그 일을 벌이는 이유가 여기 30절, 31절에 나옵니다.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신명기 28장에 의해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기어이 구원받겠다는 사람들은 법을 따라 갔는데 이 법의 속도가 빨라서 이 법의 속도가 시속 350킬로미터라면 자기는 완전히 경운기 수준이어서 시속 15킬로미터 속도로 따라가니 따라붙을 수 있습니까? 법을 지킨다고 했는데 법에 이르지를 못하는 거예요. 법에 합치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32절에 보니까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는 거예요.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율법을 지키고 또 지켰는데 그 끝은 뭐냐? “꽈당”입니다. 부딪혀 버렸고 깨져버렸어요. 오늘 설교 제목이 “부딪힐 돌”입니다. 깨져버린 거예요. 자기 딴에 말씀을 완수해보고자 열심히 따라갔는데 그 따라 붙이는 방식이 행함입니다. 자기 행함으로 따라 붙이는 거예요. 그런데 법도 모르고 십계명도 모르고 십일조 모르고 주일성수도 모르고 안식일도 모르는 사람들, 이런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이미 구원받아버렸는데요? 백부장 같은 사람들이나 세리와 창기는 이미 천국 가버렸는데요? 죄인들은 이미 천국 가 있다는 말이지요.

천국 가겠다는 사람들은 헉헉거리고 있고 죄인들은 거기 이미 도착해 있어요. 토끼하고 거북이하고 시합하면서 처음에 출발할 때 토끼는 자신만만했습니다. 우사인 볼트하고 나하고 백미터 달리기 하면 어떻게 됩니까? 제 100미터 기록이 13초 9라는 것은 안 가르쳐 줍니다. 13초 9에 달리는 사람하고 9초 7에 달리는 사람하고 시합하면 됩니까? 지금 달리면 13초대도 안 나와요. 하나 마나에요. 제가 우사인 볼트하고 붙는다고 하면 주님께서 하는 이야기가 이겁니다. “왜 뛰느냐?” “백 미터 달리기 시합하려고요.” “하지 마. 그거 하지 마.”

이방인들은 뛰지도 않고 구원받아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약속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 마구 땀을 뻘뻘 흘리면서 뜁니다. 완전히 토끼에요. 거북이가 애써서 걸어가는 것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냥 뽑기 하는 식 있잖아요. 그냥 쑥 뽑아서 헬리콥터로 산 정상에다 올려놓아 버린 거예요. 문제는 유대인들에게 그 헬리콥터가 없다는 겁니다. 왜, 남은 자가 아니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기중기가 없었어요. 그러면 은혜를 받으면 될 것이 아닌가? 은혜는 우리 받으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오해하고 이스라엘사람들이 곡해하고 있는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교회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상황을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것은 자기 행함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행함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모든 말씀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있다는 생각을 그들이 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나 위주로 내 이익을 위해서 내가 여기 있다고 한다면 비록 그것이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에 속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남은 자는 자기가 남게 된 것을 철저하게 자기 속에서 뽑아내지를 않아요. 내가 남은 자 되기를 애썼더니 남은 자 되었다는 그런 발상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나온 출처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왔던 그 능력이 자기를 남은 자 되게 한 거예요. 전에는 자기가 소돔과 고모라의 시민이었는데 이제는 거기서 은혜로 구원받다 보니 옛날 자기가 살던 그 곳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야 될 동네인 것을 확실하게 이 말씀에 의해서 알게 된 겁니다. ‘무슨 죄를 지었으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벌을 받았지? 그러면 그 죄를 안 지으면 벌 안 받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새로운 방안을 강구하는 셈이거든요.



그런데 남은 자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방식은 자기에게서 일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구원되었기에 또 거기에 새삼스레 내가 구원받으려면 뭘 하면 되나 하는 것을 생각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직 믿음만 의지하는 사람이에요. 이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같은 현실을 살면서 현실도 모르고 현실을 살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세상의 모든 현실은 날 살리는 것은 나에게서 나와서 도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행함이라 하는 것은 자기지명적이라고 해요.



기껏 해봐야 자기를 겨냥해서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남은 자 아닙니다. 은혜도 몰라요. 그저 내가 은혜받기 위해서 애썼다, 성령받기 위해 애썼다는 자기에게 귀속되는 식밖에는 안돼요. 그게 무슨 약속의 백성입니까? 그것은 약속의 백성도 몰라요. 원래 모든 인간이 자기밖에 모른다는 이것은 저나 여러분이나 다 동감하는 이야기고요, 성경에 나오는 욥도 마찬가지로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고난이 임할 때 그동안 자기가 알았던 하나님마저 수정해야 할 판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과는 전혀 엉뚱한 식으로 하나님이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감 잡았어요. 감 잡고 욥이 하나님한테 이런 기도를 합니다. 아주 중요한 기도를 했는데 욥기 23장 3절입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이 출현하는 그 장소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하는 거지요. 발견하면 어떻게 하려고? “발견하면 내가 그 보좌 앞에 나아와서 내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욥이 고난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발설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 나님이 그냥 은혜만 주시지 마시고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 주시기 바랍니다. 왜 이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고 왜 저 사람에게는 은혜를 안 주고, 어떤 사람은 천국 보내기로 작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지옥 보내기로 작정했는데 그 순수한 의도가 무엇인지 따지고 싶어서 어디가면 주님을 만나서 따질 수 있습니까?”를, 그 장소를 욥이 찾고자 한 거예요.



그것이 어디일까요? 오늘 설교에서 그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서 나타나시는지를 알려드리겠어요. 욥이 그렇게도 궁금해 했는데. 

①하나님께서는 인간 쪽에서 접근해서는 파악이 안 됩니다. 

파악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동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악을 동반해요. 하나님은 악을 동반해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는 어쨌거나 선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선한 존재가 찾아지는 하나님은 절대로 만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악을 동반해서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등장할 때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뱀의 후손과 동반해서 나타나시는 여자의 후손으로 나타나요.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약속이라 하시고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②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반드시 뱀의 후손과 나타나서 거기서 여자의 후손으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뱀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양상으로만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이 악에 속했다는 사실을 본인이 모릅니다. 


모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악은 악을 저지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용서를 받으려면 사람이 죄를 지어야 돼요.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뭐부터 해야 되느냐 하면, 살인을 해야 됩니다. 교회만 나오지 마시고 사람들 다 잡아 죽이고, 한 사람이라도 잡아 죽이고 교회 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용서가 용서답게 돼요. 그것도 죄인 줄 모르고 하지 말고 살인이 죄인줄 알고 알기에 살인을 저질러 놓고 그 뒤에 찾아올 때 용서가 용서답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죄를 안 지은 상태에서 용서부터 먼저 보게 되면……, 애들이 수학문제 풀 때 답부터 먼저 보면 문제의 원리의 본 취지를 몰라요. 그냥 자기 죄지은 것도 모르고 용서를 받아버리게 되면 그 용서부터 먼저 가진 그게 죄가 돼버려요. 

그 이유가 뭐냐, 


원래 악은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은 죄지을 줄을 몰라요. 

왜냐하면, 

악이 등장하게 된 것이 선악과의 등장으로 악이 등장하기 때문에 

악을 저지를 때 어디서 악이 나오느냐 하면, 

선악과의 선악적 활동의 영역 내에서 악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는 것은 그 맞은편의 선을 도출하기 위해서 악으로 하여금 악을 저지르게 하는 거예요. 

어렵지요? 

이미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게 해놓고 선악과의 그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고 본격화 되는 거예요. 

본격적으로 선악으로 조지겠다는 거예요. 

선한 율법이 온 것은 모든 것을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겁니다. 

저주 아래 있게 해서 저주 속에서 비로소 너희들이 예상도 못했던 참된 선이 도출되도록 

하나님께서 선악을 앞장세우고 그 뒤에 생명나무가 나타나는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은 등장하시는 겁니다.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시면서.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어요. 

인간은 세상의 온갖 죄를 지어도 절대로 죄를 지을 수가 없는 이유가 죄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죄를 몰라요. 

왜냐 하면, 죄를 짓게 되면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항상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선악과가 자기를 등장시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해서 

우리에게 맞아죽은 분을 하나님의 유일한 의로 등장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고 사용하신 거예요. 


이 세상은 선악의 구조와 선악의 작용의 영역 안에 존재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의 도구, 재료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면 하나님이 같잖아서 “네가 뭘 안다고 죄를 지어?”

 제가 가락교회에서 그런 예를 들었거든요. 

“하나님, 제가 간음을 했습니다. 제가 그럴 인간이 아닌데 실수로 간음을 했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제가 정말 하나님께 범죄를 했습니다.” 하면 

하나님께서 “어쩌라고?” 

“제가 간음을 했습니다.” 

“네가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니까 좋더냐? 네가 착해 보여?” 

네가 간음하는 것과 십자가가 나타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내가 간음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는 이 자체가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너는 죄였어. 뭘 새삼스럽게 간음이니 살인이니, 왜 이제 와서 그것을 언급하는데? 왜 그것을 폭로하는데? 그것을 폭로하니까 네가 지금 착하고 잘했다는 그 말이야 지금?” 

죄짓고 반성하고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 이것은 어느 종교,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구원은 남은 자 되어야 구원받아요. 

회개하고 반성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남은 자 되어야, 은혜를 입어야 구원받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신의 계명대로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는 살인죄를 저질러야 살인한 그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게 되어 있어요. 

우리 쪽에서 “하나님, 제가 사람 죽였습니다. 살인자입니다.”하고 온다고 해서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고. 

은행에 가면 할머니들 있잖아요. 대기표 받고 있는데 새치기해서 바쁘다고 먼저 해달라고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코스대로 밟고 들어와야 돼요. 

그 코스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 안에 들어와서 

율법대로 해서 우리 자신은 처음부터 죄인일 수밖에 없다, 

해서 거기서 그리스도와 만나줘야 돼요. 


그런데 사실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그걸 했거든요. 

율법대로 해서 메시야를 만난다, 했는데 

그 율법대로 하는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행함으로 착하든지 

아니면 행함에 의해서 나는 악한자고 죄인이다, 

자기가 죄인이냐 아니냐를 자기 스스로 판단 짓고 결정지은 거예요. 

사람이 ‘나는 이런 것이 나쁘다.’고 해 버리면 그 나머지는 안 나쁘다고 하는 것 밖에 안돼요. 

“하나님, 이런 행동은 나쁩니다.” “그러면 다른 행동은 착하냐?”고 물으면 우리가 할 말이 없습니다.



시편 51편에서 하나님이 다윗을 만난 것은,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간음케 하고 사람을 죽이게 한 이유는 

“처음부터 너는 네가 반성하든지 제사 드린다든지 회개해서, 

쉽게 말해서 내가 나한테 내 관리를 해서 관리된 나를 내 힘으로 구원하는 방식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없는 계획”

임을 가르치시기 위함 입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교회 나오고, 

그것도 모르고 우린 기독교 신자라고 자처하고,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성경보고 있었던 거예요. 

도 닦으려고. 더욱더 낮아지려고, 자기부인해보겠다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믿는 것도 행함에 속합니다. 내가 믿는 것은 행함에 속하는 거예요. 지금 나 자신을 어디다 넣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악하도록 하기 위해서 다루어지는 것에 넣어야 되는데 선악과를 따먹은 버릇이 여전하기 때문에 내가 판단해서 내가 스스로 내가 죄인이라고 간주해서 그래서 내가 죄인이라고 손들고 나와서 구원받겠다는 시도는 구원 못 받은,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이 행함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믿습니다! 믿습니다!” 쌍 시옷을 집어넣어 가면서 “믿쎱니까?” “믿쎱니다.” 백날 해 봤자 전부 다 모아서 자기가 자기관리, 자기가 자기 구원하는 헛된 바리새인 짓의 되풀이밖에 없습니다. 결국 부딪히는 것이 사는 수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악을 통해서 열린 공간에서만 선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세상 모든 이로 하여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저주받은 세상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주받은 세상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러한 사도바울의 말씀을 알아듣는 인간은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오실 때도 아무도 모르게 오시고 누가 알면 안돼요. 아무도 모르게 오시는 겁니다. 모르게 오시는 것은 어떤 특정개인이 문제가 있고 자질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속한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이 선악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고 되어 있어요. 우리는 세상에 속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몰라요.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아까 문제를 던졌잖아요. 욥이 궁금했던 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느 지점에 나타나시는지 만나서 따져보고 싶습니다. 제가 그 지점을 알려드린다고 했지요. 그 지점을 알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문제인지 모르고 세상도 모르고 이 현실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모르는 이유가 하나님이 우리보고 알려주는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뱀의 후손을 대동하고 등장하기에 우리는 배제되고 도외시 되는 겁니다. 누구만 아는가, 마귀만 알아요. “예수여, 날 멸망하러 왔지요?” “입 다물어!” 제자들도 모르는데 마귀는 알아먹어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다.” “이 귀신아! 그냥 입 다물고 나가!” 이게 성경에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 내막이 이래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악을 활짝 열어주시면서 악마로부터 예수님께서는……, 뱀(악마)의 특징이 물이 뜯는 특징이 있거든요. 예수님은 때려 치는 특징이 있고.



그래서 뱀의 후손이 예수님의 발꿈치를 뭅니다. 그 무는 작업을 악마로부터 해 주도록 해야 돼요. 깝죽깝죽 악마로부터 그 작업을 하도록 만듭니다. 성령과 예수님께서 일에 나서기 전에 제일 먼저 광야에 가서 마귀한테 시험을 받거든요. 시험 받을 때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이 이렇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이 떡이 되게 해라.” 그 말을 했다는 말이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에서는 너도 인간이니까 인간에게는 떡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시작을 반드시 필요한 것부터 시작해요. 우리가 살기 위해서, 우리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는 떡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다는 이것부터 마귀가 시작점으로 삼는 거예요.



“너도 알도 나도 알고 인간이라면 다 동감하잖아. 사람이 먹어야 살지.”라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뭐냐, “그 떡이 모자라니까 배고프고 굶고 있으니까 그 필요한 것을 추가하고 증가시키도록 네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솜씨를 부려봐라.”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출발점을 바꾸어놓습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라고 바꾸어놓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마귀야! 너는 지금 출발점 자체가 잘못되었다.”하는 거예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은 그 출발점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은 예수님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겁니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람이 하나님에게 뭔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 이것이 나에게 필요합니다.” 이렇게 출발점을 자기가 다듬어요. 그것을 아주 고상하게 속아 넘어가듯이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는 바대로 악마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전도할 전도사가 필요하고 해외에도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선교사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도 동의하시지요? 동의하신다면 선교비가 더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부자교인을 많이 보내주시고 선교비가 팍팍 나오도록 제가 기도합니다.” 하는 이것이 마귀의 생각이라니까요.



이게 마귀의 생각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생각은 뭡니까? 그것이 마귀의 생각이라고 알아먹는 그것이 하나님 생각이에요. 우리는 애초부터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맛도 보지 못한 처지에 있는 겁니다. 왜,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주도권이 선악과를 쥐고 있는 하나님께 있지 선악과 내부에서 내가 선과 악에서 선으로 갈 수 있는 어떤 권한도 박탈당한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부딪히면 돼요. 부딪히는 장소, 거기가 하나님이 타나는 장소입니다.



그 장소가 오늘 본문에 3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온에 두노니.” 시온에 둔다는 거예요. 시온, 하면 교회 다니는 집사님들 아들 이름이 시온이 많잖아요. 그 시온 아닙니다. 시온은 예루살렘, 다윗이 살던 그 동네 뒷산이 시온 산인데 그 동네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곳을 시온이라고 하는 겁니다. “시온에 두노니” 예수님 말씀대로 선지자는 예루살렘 외에는 죽는 법이 없다, ‘예루살렘에 두노니’ 예루살렘이라는 동네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자기증명적사건이에요.



자기를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행함에 속한 사건입니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믿습니다! 믿습니다! 오직 은혜만 믿습니다.” 해도 그것을 발설하고 있는 자기를 도로 증명할 수밖에 없는 사건을 내뱉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주님만 믿습니다. 십자가 피만 믿습니다.” 해도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출처는 내가 출처지 은혜로 남은 자가 나오는 출처가 아닙니다. 근원적인 악이 나오는 출처도 아니고요. 욥이 그렇게 그리워하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할 때 그 장소는 나는 볼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자기증명적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를 봐야지요. 그 장소가 시온입니다. 그 시온에서 우리가 그토록 붙잡으려고 했던 메시아가 죽음과 더불어 안개 속으로 사라집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붙잡으면서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했던 그 주님, “놓아라. 나는 네가 갈 수 없는 곳에 간다.” 하나님이 나타나는 곳은 어디 입니까? 방금 정답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으로, 하수구,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닭 좇던 개꼴이 되고 말지요. 실컷 따라왔는데 우릴 남겨두고 홀로 가버리시고, 님는 떠나시고 우리는 멍하게 되어버렸지요.



하나님의 약속은 남은 자를 생산하는데 있습니다. 남은 자, 그 하나님이 뒷모습만 남기고 떠나버린 그 자리에서 은혜가 쏟아지는데 그 은혜가 뭐냐, 남은 자만 은혜로 구원된다는 그 소식이 그 떠난 출처에서 다시 도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럴 때 뭐냐, 오늘 읽었던 이 본문 말씀이 믿어지게 되는 거예요. 수동적입니다. 내가 믿는다는 능동적이 아니고 믿어지는 거예요. 수동적, 믿어지는 경우, 뭐가? 믿음에 의지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행함에 의지하는 사람은 저주받았다는 그 사실이 아주 즐겁게 믿어지는 사람, 그리고 십자가는 내가 스스로 다룰 수 없는, 감당 못하는 나, 그저 자랑 질이나 하려고 내 닫는 나를 매일같이 부딪히게 하시는 그 사건의 현장이 주님이 계시는 현장이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성전 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에 의해서 내가 행한 모든 짓거리는 결코 자랑 질하기 위한 것, 이리 저리 꾸며대면서 “저는 믿습니다.” 이런 말장난을 해가면서 결국 자기자랑으로 되돌아오는 그 현장을 폭로하는 그 자리가 주께서 등장하는 자리입니다. “네가 뱀의 후손이었는데 지금 여자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을 일러주는 현장입니다. 어떤 분이 전화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패배자요 실패자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제가 언급했지요. “지금 성도님은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6장 10절을 전혀 잊고 있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예, 제가 평생 가난합니다.” “방금 가난이라는 단어를 썼습니까?” “예, 가난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단어사용, 출처에서 새로 시작합시다. 지금 당신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남하고 비교해서 남은 돈 있는데 나는 있을 곳도 없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데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 보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왜 계명사용을 본인부터 출발시킵니까? 그게 바로 마귀의 짓거리에요. 우리를 가난하게 하시는 것은 가난한줄 알았더니 부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가난하게 하신 거예요. 여러분, 다 가난해요. 외제차 타고 가난하고 아파트 두 채 밖에 없어서 가난해요. 다 가난해요. 세상에 부자로 사는 사람 없어요. 500억 가지고 700억 가지고 살아도 가난하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지고 사라진 것은 가난했으나 십자가지신 주님만이 부한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겁니다. 선악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갇혀 살다가 이제는 이미 거기서 빠져나와서 생명나무 입장에서 보니까 천하에 부요한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일방적으로 나는 가난하다고 좌절했던 그 가난은 십자가에서 와장창 다 깨져버려야 돼요. 내가 알았던 개념들, 내가 알았던 모든 생각들, 사고방식들은 십자가가 옴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동안 선악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오해했습니다.’라고 그것이 깨져버려야 됩니다. 깨져봐야 돌아서면 다시 채워지는데 할 수 없어요. 채워지면 또 깨시겠지요. 왜, 성령께서 계시니까. 성령이 계시니까 항상 그 시온이라는 영역에 머무르려면 거기는 돌 깨는 소리밖에 안 들려요. 그냥 살면서 깨질 거리만 잔뜩 가져옵시다. 이게 타협을 볼 일도 아니지만 우리가 이런 식으로 타협 봅시다.



깨어질 거리만 실컷 가져와서 십자가 앞에서, 말씀 앞에서 깨어지는 즐거움도 같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은혜로 구원하시는데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오해했습니다. 마치 은혜를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나 위주로 출발시켰습니다. 이제는 출발점을 내가 깨어지는 그 자리에서 주님으로부터 출발점이 되어서 그래서 우리가 부요한 사람인 것을 믿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