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강-롬 10장 1-4(율법의 마침)1311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0장 1절에서 4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52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0:1-4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유대인을 향하여 하는 이야기인데요, 우리가 유대인보고 하는 이야기를 알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 모든 인간의 내부의 심성, 인간의 내부에 들어 있는 바를 바깥으로 끄집어내는데 동원되는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껏해야 흐릿한 양심가지고 평생을 버티는데
이스라엘은 그 양심을 문자화시켜서
하나님의 법, 진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그 법에 대해서 인간 쪽에서 어떤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인데
그 조항, 특히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구태여 받지 않더라도 인간의 양심상 익히 동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에요.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동양철학의 모토가 아닙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것, 복수의 순간에 고리를 끊는 거예요.
살인했다고 또 살인하면 그 살인에 대해서 또 살인하고, 이것은 온 천지가 살인 판이 되니 그 순환의 고리를 끊는 겁니다.
복수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간음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전부 다 개인의 소유를 도적질하게 되면
그것이 또 인간에게 복수를 낳고 과도한 형벌이 주어지게 되면 엉망진창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스라엘나라라 하는 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아니고
창세기 4장에 보면 처음 나온 인간은 가인이 주인공이 돼요.
가인이 신에게 제사를 바치는 겁니다.
알타미라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 안에 최초로 신에 대한 제사의 흔적이 나타납니다.
보통 과학자들은 BC 3만 5천년 경이라 하는데 그 동굴은 스페인에 있지요.
거기에 신에게 제사 드린 흔적이 나올 때 고대사회에서 신을 왜 섬겼을까?
그것은 자기의 생존의 힘에 행운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대상이라 여겨서 신을 믿은 겁니다.
당시에는 사냥과 채집을 했거든요.
사냥의 기회가 자주올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단시간에 좋은 사냥감을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그들은 사냥감의 모양을 그린 겁니다. 지금도 아프리카등지에서는 그런 것을 해요.
신이라 하는 것은 지금 내 생존에 당신이 얼마나 보탬이 될까, 해서 신을 섬기는 겁니다.
생존의 힘을 내가 얻고 싶다는 거지요.
그것이 기원전 3만 5천 년 전의 옛날이야기 같지요.
오늘날 성당이나 교회나 절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주차하는데 좁았지요. 앞으로 5일 후에 수능 치는 날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신을 위해서 신을 섬기는 것은 결코 아니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 신을 도입하는 겁니다.
도입이에요. 신의 개념을 도입한 겁니다.
가인이 주인공이 되어서 신에게 먼저 감사의 제사를 드렸는데 신은 그 제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모든 이야기가 그것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창조를 무효 시킬 것인가?
하나님께서 천국에 함께 사는 인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만 천국에 보내시는가 하면,
먼저 가인으로 하여금, 가인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부모가 가인을 낳을 때 아들 낳았다고 좋다고 ‘아들을 얻었다.’ 해서 그 이름이 가인입니다.
가인을 낳고 난 뒤에 또 아들을 얻은 뒤에 ‘이건 뭔데?’ 해서 그 이름이 허무(아벨)입니다.
인간으로서 가인을 낳는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할 일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 가운데서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가는 사람을 따로 축출하는 작업에 나선 겁니다.
어떻게 나섰는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행세,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만들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고
신이라 하는 것이 거기에 도움을 줘야 우리한테 사랑받는 신입니다, 라는 식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거부했으면 ‘다음에 드리지 뭐’ 이렇게 되었으면 아무 문제없었을 것인데
동생 아벨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받아버렸네요.
여기서부터 사단이 난거예요. 제사를 받으려면 다 받든지 아니면 양쪽 것을 다 안 받았으면 될 것인데
한쪽은 받고 한쪽은 안 받았다는 이야기가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사람을 다 지옥에 보낸다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모든 사람을 천국 보내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욕 얻어먹는 문제가 뭐냐, 누구는 천국 보내고 누구는 지옥보내기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식으로 하는데 손가락이야 그렇지요.
그런데 자식은 별로 안 좋은 자식도 있어요. 사위라고 다 좋은 사위가 아닙니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 그리고 나 미스코리아까지 나갔던 여자야.”
<왕가네 식구들> 식구들 보면 사위라고 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차등을 두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쪽에서 차등을 두시는 것은 바로 천국과 지옥을 구분 짓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다 같이 생각한 것이 아니고 거기서 골라낸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골라잡는 재미가 있어요. 골라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관심을 둬야 되는 것은 그 골라내는 기준이 뭔지가 관심이 되어야 돼요.
그 기준자체가 상당히 슬픕니다.
어떻게 슬픈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한테 얻어맞고 죽어서 피를 흘리는데 그 피가 기준입니다.
울산 새순교회의 황전도사님이 저에게 질문했어요.
서울에 있는 아들이 바빠서 교회를 잘 못나가고 있는데 그 아들이 복음을 듣고 가끔 설교를 들으면서 질문이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우리를 구원한다, 라고 하면 되는데 왜 피를 강조합니까?”라고 한 거예요.
죽을 때 피 흘리니까, 최종적인 것이 죽음이니까 그냥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 라고 하면 되는데
“왜 성경에는 피를 강조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퍼뜩 답변을 못하고 후에 알아서 답변해 준다고 해놓았어요.
그래서 제가 답변해 드렸습니다.
그냥 죽어버리면 연탄가스중독이나 교통사고도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고 죽어버리면 이것은 가해자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누가 하나님을 죽이느냐, 가 중요해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생사람 잡아서 천당 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죽여 버리는 자 중에서
골라 잡어서 어떤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남겨두는 그 작업이 하나님의 구원의 작업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싫어버린바 되고 하나님께서 버려놓았기에 이제는 거기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아요.
그래서 ‘피’를 강조해서 “너희들은 구원받지 않더라도 ‘구원해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이미 없다.” 하는 겁니다.
참 인간의 자존심상 듣기 거북스런 거예요.
가인이 주인공이 된 인류의 세상에서 이름도 허무한 그 허무하기 짝이 없는 그 아벨, 이름의 운명대로 허무하게 사라졌는데
그 허무한 아벨의 노선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오시는 구원노선이 성립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율법의 마침’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게 이런 의미거든요.
쉽게 예를 들면, 아줌마들이 애를 가지면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하게 되지요.
아랫배에 수용성젤을 발라놓고 초음파를 비추면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체의 움직임, 하품하고 발로 차고 노는 모습이 보이지요.
초음파로 그걸 봐야 보인다는 말이지요. 숨어 있고 은폐되어 있는 것이지요. 외부로는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
역사에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초음파가 잘 전달되도록 배에 바르는 그 수용성 젤, 그 젤의 역할이 바로 율법인데 그 율법역할이 끝났다는 거예요.
누구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아기가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더 이상 초음파 검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들여다봐야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숨겨진 자가 인간이고 그 숨겨진 자를 핍박하는 자는
그것은 인간이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인간이 아니고. 그것은 흙이고 있으나 마나한 안개 같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오직 누구한테만 쓸 수 있는 말이냐 하면 예수님한테만 해야 되고
나머지 모든 인간은 존재라는 말을 쓰면 안 되고 그냥 흐름이라고 보면 돼요.
이스라엘 자체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에 비정규적이고 임시적입니다.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거예요.
율법도 마찬가지에요.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참된 존재자가 등장할 때까지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두 번째 아담, 진짜 아담이라는 뜻이지요. 마지막 아담, 제대로 된 아담이 나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제대로 된 아들은 유일하게 예수님밖에 없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거기 율법이 임시적으로 등장한 것이 나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 자손은 여러 명이 아니고 한 명이라고 언급합니다.
이것부터가 유대인들로서는 혼동이 되지요.
분명히 아브라함자손이 하늘의 별과같이 많다고 했는데 갈라디아서 3장에는 아브라함자손이 달랑 한명밖에 없어요.
하나에서 다수가 나오기에 먼저 하나부터 제시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여럿이 아니고 하나다, 라고 해놓고 17절에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한 가지 언약을 고집했는데 그것은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율법을 임시적이라고 한 겁니다.
들어갔다가 나와 버리는 거예요. 잠시 들어왔다가 연착륙하는 것처럼 하다가 다시 붕 떠서 사라지는 겁니다.
율법이 오게 된 것은 약속을 약속으로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잠시 들어왔다가 나오는 거예요.
아까 황전도사님 자제분이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았다,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왜 ‘피’를 강조하는가?”라는 그 질문의 해답의 요지는 그겁니다.
이것은 교회 오래 다니고 신학을 해도 모르는 것인데 그것을 이야기할게요.
아브라함이 이삭, 자기 아들을 죽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창세기 22장을 보고 알아요.
‘아,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아는데 생각을 해 봐야 돼요.
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구원이 안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말로 하면 안 될까요? 교회 청소하라, 십일조 하라, 왜 이것으로는 구원이 안 되느냐 하는 겁니다.
새벽기도 하세요, 선교회비 내세요, 교육관 지읍시다, 성경공부 합시다, 매일 Q.T합시다……,
왜 이걸로는 구원이 안되는 겁니까?
왜 사람을, 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야 되는 거예요?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우리에게 무슨 낯선 이야기를 하시려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그것을 핵심으로 제시하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을 놓쳐버리면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단정해도 괜찮아요.
아버지가 아들을 죽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왜 잡는 거예요?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따라 나선 사람이 있는데 마침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때 제자가 “예수님, 따라가기는 하겠는데 방금 아버지가 돌아가셨답니다.” 할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왜 그런 혹독한 말씀을 구태여 해야 합니까?
“맘이 많이 괴롭지? 섭섭해서 어쩌나? 한 주 동안 기한을 줄 테니 돌아가신 어른 양지바른 곳에 잘 모시고 오너라.”
왜 이렇게 하시지 않고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야지.” 그렇게 급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왜 아버지가 아들을 잡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아야 됩니까?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안다는 말을 하면 안돼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교회 사기꾼한테 돈 갖다 바쳐놓고 자기는 지옥가고. 보이스피싱이 따로 없어요.
그게 바로 보이스피싱입니다. 돈 받아 처먹고 지옥가고 돈 내고 그것도 지옥가고.
“고객님, 고객님! 당황하셨어요?” 그렇게 해놓고 나중에 자기가 지옥가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아버지가 아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는 것은 둘 다 약속에 속한 사람이에요.
아브라함도 언약에 속했고 이삭도 언약에 속했는데 그 약속내부의 특징이 뭐냐면 구원의 대상을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너부터 없앨 거야.” 어디서 네가 구원이라는 말을 나한테 함부로 내 뱉느냐는 말이지요.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죽어야 되지 왜 죽어야 될 인간의 입에서 구원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느냐는 말이지요.
분명히 그 배후에서 마귀가 조종하고 있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었어도 너는 구원받을 수 있어. 갓 바위 기어 올라가서 빡세게 기도해봐. 응답 받을 거야.”
반드시 거기에 뭐가 있어요. 인간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뿐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게 하시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위반사례, 그 위반사례가 있어줘야 생명나무의 가치,
생명나무를 훼손한 선악과를 밑바탕으로 해서 생명나무의 고귀한 주되심이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말려든 거예요. 하나님의 작전에 우리가 말려든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거예요. “너는 너 되는 방해물로 인하여 너 자신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훼방하는 그것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진짜 내 자신이 되어가는 거예요.
뭔가 삼킬 수도 없는 닭갈비가 목에 걸린 것처럼 삼킬 수 없이 목에 걸리도록 주께서 일부러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어놓고 우리로 하여금 빼도 박도 못하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그저 ‘구원받아야 돼. 세상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너무나 힘드니까 교회 나와서 기도해서 죽어서라도 좋은데 가야해.’라는 그 기도를 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악마적인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걸려든 거예요. 우리의 종교성, 그 종교성이 우리를 망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망칠 때 우리가 충분히 망쳐줘야 돼요.
충분히 망해줘야 망하는 그 자리에서 주께서 구원을 개시하는 그 현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여 버립니다. “아버지, 절 살려주세요.” 할 때 그냥 죽여 버리지요.
죽여 버리면 “아버지, 절 살려주세요.” 했던 그 목소리도 사라져버리지요. 이제 조용한 거예요.
살려주세요, 가 사라진 그 마당은 아주 고요한 마당입니다.
“시끄러워 죽겠더니만 이제 좀 조용하네.” 해놓고 그 다음에
수풀에 있던 수양을 가지고 대신함으로써 이삭을 살려줄 때 이삭에게는 두 가지의 하나님의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죽이시는 그 분의 연속된 작업이 나를 살리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나를 살리는 작업에 선행하는 작업으로 나를 죽이는 작업이 개입되어야 했고
그렇게 죽였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죽게 만들고
이제는 죽었던 그 이삭을 후대로 전달시킴으로 말미암아 이 죽음을 잉크가 번지듯이, 아벨의 죽음이 번지듯이
이삭의 죽음을 이 지상역사에 번지게 만드는 그 작업이 태아에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순간입니다.
그 죽음이 번지는 작업을 추적하고 따라 붙이면서 측정하는 그 측정기계가 뭐냐,
율법이라는 거예요.
율법을 줌으로써 앞으로 계속 밀어냅니다.
밀어내게 되면 그 속에 있는 진짜 하나님의 구원의 알맹이, 죽음의 알맹이는 뭐냐 하면,
구약 때는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상번제, 늘 상 드린다고 해서 상번제인데 그 제사의 어린양이 죽는 그것이
드디어 이스라엘이라는 임산부의 배를 통해서 튀어나오면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외친 것이 있어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요 1:29) 이렇게 나와요.
숨겨진, 은폐된, 감추어진 하나님의 진짜 인간존재가 드디어 바깥으로 튀어나와버리면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것이 튀어나오도록 밀어주고 밀어준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면 오늘 본문의 율법의 기능은 마침이 이제 된 겁니다.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자기의 어려움이나 상처, 고난, 핍박이 있을 경우에는 이 육신이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인간자아가 육신의 효과거든요.
그래서 몸이 힘드니까 웃음을 지어도 몸이 힘들고 또 외부적으로 뭔가 자기뜻대로 안 될 때는 힘이 드는 거예요.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에 딜타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역사는 우리가 만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들으면 그것은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뭐가 대단한가 할 겁니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보았는가?
역사라 하는 것, 이 세상은 신의 어떤 목적, 뜻이 있다는 거예요.
신의 뜻이 있기에 인간이라 하는 것은 제대로 살려면
그 신의 뜻을 파악해서 그 신의 뜻에 내 뜻을 굴복시키고 맞춰나가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라는 식으로 사람들이 살아온 거예요. 왜냐하면 기독교 세계관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기독교세계관인 서양뿐만 아니고 동양종교나 철학이나 사상도 마찬가지에요. 이 대자연은 본래 뜻이 있고 그 뜻에 위반하지 않을 때 인간은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이 부질없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사람은 이 땅에서 살수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산은 산이 되어야 하고 물은 물이 되어야 하는 것은 대자연이 스스로 움직이는 본래의 뜻이 있어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서양에서 말하는 ‘신의 뜻에 순종할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는 그것과 같은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딜타이는 말하기를 이것저것 다 치우고 “역사는 내가 만든다.”
해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그것이 곧 해답이고 내가 오늘 행하는 이것이 바로 본래 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적극적 사고방식이고 긍정적 사고방식입니까?
숨어 있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은 신경 쓰지 말자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일하고 노동해서 얻은 그것, 그것이 곧 나만의 역사를 이루어나간다고 본 겁니다.
얼른 보면 이스라엘하고 근대 철학자들의 이기적인 주장하고 다른 것 같지만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이 본문가지고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한 자들이 누구였냐 하면 바로 유대인이고 이스라엘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망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오늘날 유대인이나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들어보면 화낼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맞춰가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사도바울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고 시도하는 그 자체가
결국 하나님을 좋아하기에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맞추면 내가 살 수 있다는 자기 희망 때문에 그런 짓 한다고 본 거예요.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면 우리는 복을 받게 되고 복을 받게 되면 내가 더 사는데 보탬이 되어서 오랫동안 살게 될 것이고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내가 의를 붙들면 복이 오게 되어 있고 죄를 지으면 저주가 오기 때문에
복을 주는 그 의를 절대로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라는 사고방식을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고
모든 인간들이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자연에 맞춰 살자, 이것이 자연을 위합니까? 아니면 자기를 위함입니까? 자기를 위함이지요.
욥기 27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욥이 이런 말을 해요.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고난 받는데서 있으면서 욥에게 마지막 남은 것은 뭐냐 하면,
몸이 아무리 망가지고 재산이 다 날라 가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그 한 가지는 뭐냐,
“나는 의에 의해서 존재한다. 나에게 그 의가 있기에 나는 그 의를 놓치지 않겠다.” 그 심보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놔버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안들이 나오는데 그게 뭐냐?
침착하게 살아야 되고 차분하게 살고 덜렁대지 말아야 됩니다.
특히 덜렁대지 말라는 이야기는 제가 평생토록 듣는 이야기입니다.
제발 덜렁대지 말고, 신발 함부로 벗어놓지 말고 후다닥거리지 말고 차분해야 되고,
그러면 언젠가는 네 꿈을 이룰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우리 주변에서 늘 듣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한 방에 다 보내는 이야기가 노아언약 이야기입니다.
노아언약은 한마디로 말해서 쓸어버리는 거예요.
차분한 게 어디 있어요? 침착하게 쌓아놓은 것들 한방에 다 날라 갑니다. 쓸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산사태 일어나면 모든 것이 진흙구덩이가 되지요.
그동안 안 먹고 안 쓰고 아끼면서 귀하게 모아놓았던 것, 우면산사태 일어나보세요.
옆집에 있는 아파트 주민의 모든 보석은 싹 다 진흙탕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요.
귀한 내 역사, 내 역사는 누가 이룬다고요? 내가 이룬다고요?
그 역사 쓸어버리면 우리는 한 번에 다 파묻혀서 다 사라지고 뒤섞여 버리면 혼돈입니다.
혼돈부터 시작하겠다는 것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었던 것을 왜 인간들은 모를까요?
쓸어버리는 그 작업에 동원된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모든 것을 저주아래, 저주의 진흙구덩이 아래 놓이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를 어기면 전부를 어긴 것이라고 협박하면서……,
사실은 협박이 아니고 진짜지만.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에요.
선한 법이고 무서운 법입니다.
그 무서운 법에 의해서 세상은 먹구름처럼 뒤덮여 있습니다.
그 율법은 아까 말한 대로 임시적입니다. 비정규직 같은 겁니다. 잠시 들어갔다가 자기역할을 다하게 되면 나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썩어버릴 때……,
그런 것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전쟁입니다. 전쟁에는 모든 부모, 모든 가족이 해체됩니다.
프랑스에 있던 유대인들이 전쟁 통에 핍박을 받아서 독일군에게 끌려가는 소설, 영화들이 많이 나왔고
최근에도 그런 소설이 나온 것 같은데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족이 생이별하고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다 죽어버려요.
그렇다면 아침마다 일어나서 “아저씨, 건강하시지요? 잘 계셨습니까?” 이런 착하게 쌓아온 그 우정의 다발들은
전쟁 앞에서 무슨 힘이 되고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전부 전쟁 속에서 다 날라 가니까.
싹쓸이된다는 것, 다 쓸려간다는 것, 150층, 200층을 지어도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언약에 의하면 모든 것이 불바다가 되고 다 싹쓸이가 됩니다.
다 싹 쓸어버리겠다는 그것을 우리가 만끽할 때 비로소 율법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 내부에 남아 있던 모든 것이 싹쓸이 당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요. 이것이 바로 죽음의 번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인 그 죽음을 예수님 때까지 전달, 전달 시키기 위해서 중간 중간에 언약을 주고 율법을 줘버립니다.
율법을 주게 되면 율법 안에 제사법이 있거든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어린양을 잡는 제사법을 통해서 죽음을 실어 나르는 열차의 기능을 하게 한 겁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약국에서 약사가 약을 조제하면서 약 알갱이를 그냥 던져주는 것이 아니고 종이팩에 담아서 주지요.
그 한 칸, 한 칸의 종이팩을 열면 동일한 알약이 나옵니다.
그 종이팩이 뱀같이 체인처럼 연결되어 있는 사슬, 그 사슬들의 노선이 뭐냐,
선지자들의 노선이고 그 선지자는 바로 아벨의 노선을 따라서
나중에 그리스도와 만나고 나중에 세례요한과 그리스도와 만나게 되어 있고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와 연결되어 있어요.
안에 내용 까보면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전달하는 흐름에 불과하고 하나의 파편조각에 불과하지 진짜 존재자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거예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의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 소유화시킬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의는 소유화시킨 우리를 부숴버리고 깨버립니다.
이 그릇은 그리스도에 담긴 의에 우리가 참여할 뿐이지
나의 의를 따로 해버리면 옆 사람의 의와 비교에 들어가기에 문제가 돼요.
“너 착하냐?” “그래, 예수 믿고 나 착하다.”
“나도 예수 믿고 착한데 누가 더 착한지 시합해 볼까?” “까라!” “그래, 까자.”
해보니까 둘 다 같은 약국에서 지어준 약인데, 같은 약인데.
“그럼 이건 나의 의가 아니네?” “그럼 이것도 나의 의가 아니네.” “그럼 이건 누구의 의지?” “이건 그리스도의 의네.
그렇게 깊은 뜻이? 그럴 수가?”
지금 이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하는 거예요.
이 모든 원천은 아버지가 아들 죽였다는 겁니다.
우리는 나의 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의 역사를 따로,
오늘도 소망이라는 이름으로,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기대와 목표라는 이름으로
자꾸 나만의 노선, 나를 출발지점으로 해서 체인을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의 마침, 율법은 끝났는데 십자가에서 이미 율법은 끝났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율법이 항상 재생되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음을 이 땅에 보여주고 실어 나르는 증인으로서 새로운 이스라엘, 마지막 이스라엘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우주를 여행한 비행사가 우주유영을 하고 왔습니다.
그것을 밑에 있는 지상 관제탑에서 봤어요.
“야, 우주에서 저렇게 헤엄치다니 좋겠다.”
그러나 그 사람이 우주에서 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거기서 늙어 죽어가면서 환갑잔치 할 일도 없고.
그 우주인이 귀환캡슐에 실려서 지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우주유영임무는 마쳤습니다. 마쳤지요?
“우리고등학교 출신인 우주비행사가 왔습니다.
우리 후배들에게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우주여행에 관한 강연을 하니 학생들은 잘 들으세요.”
하고 이제 강연을 시작하라고 사인을 보내니까
강연자가 “뭐 말입니까?” “아니, 우주 여행한 것이요.” “우주여행은 끝났는데요?”
“아니, 왜 이러십니까? 끝났지만 당신이 기억이 있어서 그것을 알잖아요.” “뭐요?” 이러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미 졸업한 고등학교에 다시 고등학생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다녔던 그 모든 추억과 배운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가 알고 있잖아요.
율법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저촉은 안 받지만
율법이라는 그것이 날마다 우리에게 살아나게 함으로써
우리는 매일같이 나의 의는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그 작업,
그 작업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속에 현실화되고 구체화되는 작업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 의는 “알았나?” “알았습니다.”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속에 그리스도의 의가 피어나기 위해서
이 성경말씀 전체가, 사도바울의 권면과 모든 말씀전체가 율법적인 기능으로서 우리에게 작용을 해요. 율법적인 기능으로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다.’ 이것은 환장할 일입니다.
그것보다 더 환장할 일은 ‘네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버려라. 네 오른팔이 범죄 하거든 잘라버려라.’
저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구원된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눈과 팔부터 조사해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해놓고 왜 팔이 멀쩡한데요? 왜 외팔이가 안 되었는데? 애꾸눈이 왜 안 되었는데요?
주의 말씀을 왜 자기 맘대로 골라잡아요? 그것은 말이 안돼요.
디모데후서에 보면 ‘마지막 때에 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나와 있다고요.
그것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그 자체가 무리한 요구입니다.
내가 날 사랑하지 그럼 누굴 사랑할건데요? 날 사랑하지 그럼 미쳤습니까, 남 사랑하게.
디모데후서 3장 1절, 2절에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그 다음에 더 무서운 이야기가 나와요.
“돈을 사랑하고.” 이런 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보고 어쩌라고? 돈 사랑 안하고 어쩌라고! 돈 없이 결혼이나 할 수 있겠어요? 돈 없이 살아갈 수나 있습니까?
다른데 가고 싶어도 돈 확 빼앗아 버리면 다른 데로 가지도 못해요.
모든 것이 돈인데요. 목욕탕 가는 것도 돈 없으면 못가고, 경로 우대해야 4천5백 원이고.
모든 것이 돈인데 돈을 사랑하지 말라니 이것이 지금 될 말입니까?
사도바울보고 해보라 하지요. “너는? 너는 돈 없이 사나?”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죄인 중에 나는 괴수거든.”
내가 나를 살린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아 죽일 때 이미 그러한 장치, 그러한 의견은 끝났어요.
구원의 대상체로서 이미 소멸되었습니다.
구원의 대상체가 소멸된 입장에서 선악과 따먹은 주제에 새삼스럽게 구원해 달라는 말이 어디서 튀어나옵니까?
튀어나오면 안돼요.
그리스도가 찾아오게 될 때 우리의 과거까지 다 몽땅 가지고 우리에게 옵니다.
이스라엘의 타락한 범죄로 우리의 옷을 입힙니다.
그렇게 옷을 입혀서 성경말씀 속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 말씀 스스로가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내고
우리가 그 의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의가 활동하게끔 우리를 날마다 벌건 불이 나오는 연탄재로서,
주님의 의가 펄펄 피어나는 연탄으로 사용하시는 것,
그러면 우리는 죄인이며 죄인의 괴수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럼에도 구원받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입니다.
그런 사람은 드디어 율법의 저주를 받지 않아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어요.
왜? 착해서? 아니에요.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율법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시체 뭐 만지기처럼 이미 죽어버린 거예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돈을 사랑해?” “미안하이.” 끝나는 문제에요.
“마음속으로도 간음하지 말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끝나는 문제라니까요.
그것은 이제 구원문제하고 관계없어요. 왜? 우리는 애초부터 구원을 언급할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망가지도록 되어 있는데 망가지는 그 자체가 우리 내부에 망가지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는 본래 우리 모습으로 탈바꿈되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 ‘나는 구원받지 않아도 돼.’라는 것이 날마다 새롭게 드러나게 하시는 그 모든 능력은
오직 우리를 속에 집어넣은 그 십자가의 피……, 우리가 가해자니까 피 입니다,
우리가 가해한 그 피해자의 능력이 날마다 가해자인 우리를 살려내는 그 와중에서
비로소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 우리가 만든 사랑 말고 주님이 주신 그 사랑을 만끽하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버려둬도 되는데, 내가 이 땅에 내 역사나 만들도록 그냥 방치해도 되는데
주께서 우리 속에 그리스도 심어놓으시고 우리는 무너지고 내 속에 그리스도가 피어나서
예수님 사랑만 드러나서 이미 구원받은 자로 살게 해주시니
이 모든 영광과 감사를 일방적으로 혼자서 하신 주님께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