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55강-토기장이 비유(롬9;19-23)이근호131013

아빠와 함께 2013. 10. 13. 20:23

 

토기장이의 비유 (로마서 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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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0-13 13:19 

로마서 9:19-23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어떤 사람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그 반박하게 된 이유가 있어요.

지난 시간에 본 14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의롭지 못하고 잘못되게 일하고 있다, 라는 것을 하나님 스스로 증명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은, 하나님은 의롭고 공정하신 하나님인데

막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니 불의하고 공정치 못한 일만 하나님이 벌이고 있으니까

그 하나님은 뭔가 우리가 생각한 진짜 하나님은 아니라는 생각을 누구나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사도가 18절에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지옥 가는 그것도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지옥 가도록, 억지로 마음이 강퍅해지도록 조장해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듣기에는 얼마나 하나님이 일을 공평하게 못하고 불의하게 하시는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가고 싶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너 오지 마! 너 는 와서는 안 돼.” 라고 일부러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도록 그 배후에서 하나님이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그게 진짜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평생 죄만 짓다가

‘난 지옥이 궁금하고 지옥에 가고 싶어. 나는 지옥에 간 친구하고 지옥에서 살고 싶어.’라고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면

그 사람이 지옥문 앞에 가도 유턴을 해서 천국에 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일을 우리 하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불합리합니까?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런 이야기를 사도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전하니까 사람들의 기본 반응이 뭐냐 하면,

 ‘그렇다면 하나님이 불의한 하나님이 맞잖아.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 아니고 불의한 하나님이야.’

이렇게 마음속으로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사도가 눈치 채고 하는 말이

 “너희의 상식으로 하나님이 불의한데 과연 우리가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할 수 있느냐?” 14절에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18절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강퍅케 하시고 원하는 사람은 긍휼을 주시는데

사람은 딱 두 종류 밖에 없다는 거예요.

한 사람은 강퍅케 한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은 긍휼을 주신 사람, 딱 두 종류밖에 없다고 단정을 지은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에 대해서 반발하고 싶은데

그들이 하나님을 안 믿고 싶은 것이 아니고 ‘사도가 전하는 하나님은 엉터리다. 있지도 않은 하나님을 전하니 그것은 사기다.’라고 반박하고 싶은 사람이 어떻게 반박하는가, 그 반박하는 내용이 19절에 나옵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 그러니까 내(사도)가 지금 전하는 이 진리에 대해서 ‘이것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라는 식으로 핀잔주고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마.’라는 과격한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어떤 논리를 전개하는가, 이런 논리를 전개해요.

19절에 보면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사도 바울 네가 나에게 말하기를’ “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일방적으로 천국 보내고 어떤 사람은 일방적으로 “너는 천당 가지 말고 지옥 가.”라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면 그 결정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걸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벌써 어려워지지요?

지금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래, 잘났다.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답다.

아무리 천국가고 싶어도 ‘너는 지옥가라.’ 하면 지옥가야 하고

아무리 지옥가고 싶어도 ‘너는 천국 와야 해.’하고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래, 하나님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런 식으로 대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 말이 19절에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입니다.

“하나님한테는 허물이 있을 리가 없지?” 비비 꼬는 투입니다.

“하나님 네 똥 굵다.” 그런 식이에요.

 “하나님이니까 깡패 질 마음대로 해.” 하고 그렇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뒤에 붙이는 논리가 뭐냐 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이 본문에 접근하는 핵심통로입니다.

이것 모르면 본문 자체가 접근이 안돼요.

항상 우리가 반대하는 쪽을 들어야 돼요. 우리끼리 잘한다 하면 안 되고 반대하는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를 들어봐야 해요.

반대하는 쪽이 뭐라고 하느냐,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이 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운명을 일방적으로 결정해놓았다면

하나님이 결정 다 지어놓고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와서

 ‘너 왜 간음했어? 너는 왜 탐을 냈어? 너는 왜 거짓말 했어? 이것은 법에 어긋나잖아.

너는 왜 부모 공경했어? 너는 왜 교회 안 나와?’ 새삼스럽게 책망할 근거가 없다.” 는 말입니다.

그 말 맞잖아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리 아닙니까? 우리 논리에 딱 맞네.

사람한테 어떤 선택권을 줘놓고

“너 바르게 살아라. 바르게 안살아? 지옥 보낸다. 착해? 그러면 천국 가.”

이렇게 될 것 같으면

지옥 가더라도 ‘그래, 나 지옥가도 할 수 없지. 주께서 바르게 살라고 했는데 바르게 못 살았기에 지옥가도 할 수 없지.’

이렇게 우리가 얼마든지 납득이 되는데

천국 지옥을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결정지어놓고

 “야, 똑바로 살아.”하게 되면 그렇게 똑바로 살라고 명령할 근거가 없다니까요?

“똑바로 해.” 하면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똑바로 하나 마나 다 결정되어 있는데 뭘 똑바로 해?”

이러한 말대꾸가 너무나 당연하잖아요.

이건 뭐냐, 하나님이 하는 일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 이야기에요.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선택에 맡겨 주든지, 그래서 ‘아, 내가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하다.’ 하게 하든지

‘조금 열심을 냈으면,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십일조도 했다면 구원 받을 것을 참 그것도 안하고 나는 탈락되어도 마땅하지.’라고 납득이 되도록 하든지

안 그러면 일방적으로 천국에 넣고자 한다면 우리보고 잘잘못을 따지지 말든지

실컷 따져놓고 마지막 최종결정은 다른 근거를 가지고 해버리면 우리는 로봇도 아니고 대체 뭐란 말입니까?

우리가 애들 갖고 노는 장난감입니까?

그래서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말하기를 “그러니까 네가 하나님 말을 못 알아듣지.”라는 말을 하고 있어요.

사도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알아들으라고 준다는 그 생각자체가 처음부터 오해였습니다.

말씀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보고 알아먹으라고 주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무슨 덩어리가 들어 있는지 그 덩어리를 솔직하게 노출시키라, 끄집어내 보라는 말이에요.

인간 속에 어떤 구시렁거리는 어떤 불만요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다면 이 세상에 사기꾼들이 득실거릴 리가 없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없든지 하나님이 무능하거나 바보든지 둘 중 하나야.’

평소에도 늘 그런 생각을 갖고 성경책 끼고……,

물론 요새는 성경책마저 교회에 놔두고 오고 가고 하니 성경책 들고 다닐 일도 없지만

그런 맘으로 교회 왔는지 아닌 척 하지 말고 그것을 제발 노골적으로 내 놓으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들춤을 당할 때 우리의 속내가 노출될 때

드디어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겁니다.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논리가 어렵기에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들끼리의 세계에요.

사람끼리 모여서 사는 그 세상세대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들끼리의 세상이 우리 인간세상이거든요.

그런데 우리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모이는 세대를 세상으로 보지 않고 ‘의냐 불의냐.’ 에 둘러싸인 세상 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내가 뭐라고 하느냐가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둘러싼 것은 무엇이 의롭고 불의하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우리 정 춘자 권사님이 오셨는데

보통 주일날 오시면 앞에 권사님 두 분이 미리 앉아 계시면 그 뒷자리가 정 춘자 권사님 본인의 자리가 정해진 겁니다.

이렇게 정해진 것인데 정춘자 권사님이 오셨는데 앞에 두 분이 오시지를 않은 거예요.

그래서 앞에 두 분이 안 계시니까 정춘자 권사님이 내 자리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내 자리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남들이 싫어하는 것이면 나도 안해야 되고 남들이 좋아하고 부러워하면 그것이 바로 내 자리일 것이라고

주변 사람의 배치에 따라서 내 자리가 결정되는 것이 이 세상인 겁니다.

평소에 두 분이 일찍 오시다가 오늘따라 늦게 오시니까 정 권사님은 자기 자리가 헷갈리는 거예요.

그러면 기다려야지요. 치과가 어디 있느냐, 미장원 옆에 있고 미장원은 어디 있는가, 치과 옆에 있는 거예요.

모든 언어라 하는 것은 차이, 변별성에 의해서 결정되지 언어고유의 본래의미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 옆에 누가 있기에 너는 천국 간다, 가 아니라

너는 불의와 함께 있는가, 아니면 의로움과 함께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거예요.

일단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은 일단 물리고 의로움과 불의함이 우리 주변을 어떻게 둘러치고 있는가, 로 보자는 말이지요.

그러면 내 옆의 어떤 사람을 물리친다면

그 사람과 내가 같이 생각했던 ‘무엇이 정의롭고 무엇이 불의한지를 우리 속에 철거해야 되는 겁니다.

 

가까운 곳의 교회에 원로목사가 하나 있는데 그 분이 그 교회 세우는데 평생을 다 바쳤어요.

일찍 상처하시고 이젠 은퇴도 해서 연세가 80이 넘었어요. 뒤늦게 동거인과 함께 지냈는데

그 동거인이 목사님을 요양병원에 넣은 지 이틀 만에 아파트고 뭐고 다 팔아서 도망가고 말았어요.

제 아내가 그 소리 듣고 너무 나쁘다고 하면서 흥분을 했습니다.

그 동거인이 그 교회 수십 년 다닌 권사님이고 그 동네가 다 아는 유명한 분입니다. 너무 나쁘다는 거예요.

그 불의와 의로움은 일단 철거해야 됩니다.

뒤늦게 결혼해서 많은 재산을 받아놓고는 막상 그 원로목사님이 아프니까……, 그 분이 우리 주례하신 분이세요,

막상 나이든 자기 남편이 아프니까 그 분을 치워버리고 도망한 그것이 나쁘다?

과연 그것이 나쁠까요?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나도 동의하고 너도 동의하기에 철거되어야 합니다.

다 같이 납득이 되기에 철거해야 돼요.

우리 자신이 익히 뭐가 의로운지 뭐가 불의한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이기에 주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한테 먹히지를 않아요.

이미 우리가 뭐가 의로운지 뭐가 불의한지 이미 확실하게 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알고 있으면 그 다음에 하나님의 복음이 전혀 먹히지를 않아요.

“하나님, 일 잘 못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일하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우리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일 처리를 잘못한 거예요.

하나님 자체적으로 모순됩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 자체가 불의하고

지금 판단하고 있는 우리는 전혀 불의하지 않다는 식으로 대립각을 세우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 주변에서 우리 보기에 불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막 흥분해요. 경찰에 신고할 수 있는가를 따지고 있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끼리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요나서 4장 3절에 보면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유명한 말씀인데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과 더불어 있다면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낫습니다.

왜? 내가 판단한 모든 판단은 나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판단과 어떻게 그렇게 반대가 되고 대립이 되는지,

내가 이런 정신자세로 세상을 살 이유가 없습니다, 라고 진짜 하나님을 만난 요나는 표현했어요.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살아봤자 소용이 없는데 왜 살리십니까?”라는 고백을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멋도 모르고 죽는 것 보다 사는 것이 낫다고 깝죽대는 사람들은 하는 족족

“하나님이 일 잘못 처리했습니다.

하나님 일 엉터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믿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토를 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가 그 다음에 예를 드는데 인간의 이름을 달고 나타난 어떤 인간도 이해 못할 비유를 듭니다.

그 비유가 궁금하지요? 그 비유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20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라는 비유, 토기장의 비유를 들었는데

 

이 비유는 하나마나한 비유입니다.
왜, 이 세상에 이 비유를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이 비유를 말한 겁니다.

 

이 뜻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거예요.

이 뜻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는 이유가 뭐냐 하면, 토기장이와 토기의 사이거든요.

토기는 무감정적입니다. 딱딱하고 차가운 물체에요.

세상에,

하나님이 따뜻한 심장을 가진 우리 인간을 상대하면서

우리의 뜨거운 심장과는 정 반대되는

차갑고 딱딱한, 말도 못하고 때려도 팅, 하고 소리만 나는 딱딱한 물체, 딱딱한 그릇인 토기를 비유로 집어넣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하고는 상관없는 비유를 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차라리 인간에게 설득이 되고 납득이 되려면 비유를 토기장이와 토기의 비유를 들면 안 돼요.

토기장이는 똑똑하지만 토기는 바보 아닙니까?

때려도 말도 못하는 그냥 그릇이잖아요.

자기한테 오물이 담기든 아니면 맛있는 음식이 담기든 토기는 아무 감정이 없어요.

이것은 따뜻한 심장을 가진 인간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유입니다.

인간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으니 인간은 이 비유를 듣고 더욱더 화가 나지요.

“뭐 이런 하나님이 다 있어? 사람을 보기를 딱딱한 토기덩어리로 밖에 안보나?”

이런 식으로 분노를 유발합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현대인의 모든 행동 속에는 말할 수 없는, 이유 없는 분노로 가득 차 있다고.

여러분들이 PC방에 가 보세요.

애들이 게임할 때 보면 게임을 그냥 하지 않습니다.

욕설과 더불어 게임을 해요.

학교에서 못한 욕을 PC방에 가서 하는 거예요.

 PC방에 게임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껏 욕을 하기 위해서, 마음껏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 돈 주고 가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행동이란 그 밑바닥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각색이 되어서 행동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교인들이 교회 와서 헌금하는 것 있잖아요. 분노의 표시입니다.

‘에라, 먹어라.’ 그런 식이에요.

교회 나와 주는 것, ‘바쁜데, 에라 가준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인간은 분노에요.

모든 행동이 분노라니까요?

그래서 울산의 어느 목사님 사모님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교회 안가니 이렇게 편한 걸 가지고.”

한 번 두 번 안가면 안 편해요. 그러나 한 6개월 안가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울산의 등대교회 사모님이 이야기 한 거예요.

 “교회 안가니 이렇게 편한 걸!”


왜 사도바울의 비유가

인간들 보기에 말도 안 되는 비유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비슷한 비유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지난 10월 1일 날,

저도 열 번 이상 가 본 동네가 있는데 봉화의 어느 마을에서 최 원균 할아버지가 오후 네 시 십 분에 돌아가셨어요.

네 시 십 분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영화 <워낭소리>에 주인공으로 나왔던 그 할아버지에요.

우리 교인들은 <워낭소리> 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요.

이 워낭소리가 뭐냐, 자기가 키우는 소를 사랑해도 그렇게 사랑할 수가 없어요.

산이나 들에 농약 안 뿌립니다. 자기가 키우던 소가 혹시 농약 먹을까 싶어서.

그 정도로 할아버지의 모든 감정은 소에게 다 녹아들었어요.

그 때 소 나이가 40인데 40된 소 봤습니까? 소의 평균 수명은 15년인데 40까지 사니 정이 돈독해서 그렇게 오래 산 모양이죠.

하루는 소에 병이 들었는데 수의사가 약을 지어주면서 “올해 못 넘깁니다. 소 파세요.” 했어요.

그래서 할머니가 소 팔자고 하니까

팔려고 하는데 워낭소리가 딸랑딸랑 들리니까 도저히 못 팔겠다고 도로 데려왔거든요.

결국 그 소가 먼저 죽고 난 뒤에 그 소에 막걸리 부어가면서 가슴 아파 했는데

그 할아버지가 85세를 일기로 그만 지난 10월 1일에 돌아가셨답니다.

할아버지의 마음이 소의 마음으로 눈물 흘리게 했고 소가 눈물 흘리면 할아버지도 같이 따라 울고.

어때요? 이것이 토기와 토기장이보다 훨씬 인간적이 아닙니까?

서로감정이입이 되잖아요.

주님이 사랑 내가 알고 내가 주님 사랑하고. 딸랑딸랑, 워낭소리.

이런 식이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사람은 사도바울의 비유를 전혀 못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세상 누구도 이 말씀을 못 알아들어요.

왜냐, 이 말씀 들어버리면 토기장이와 토기 사이보다도

차라리 최 원균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가, 물론 종속관계지만 그게 훨씬 우리 감정에 와 닿는데

그냥 딱딱한 토기가 되니 이것은 앞에 이야기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는 그 말을 되풀이하는 것 밖에 안 되거든요.

이것은 알아먹지 못하는 말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나마나 한 비유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비유를 왜 우리에게 이야기하느냐?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그 구원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세대를 구원해요.

제 말이 참 어렵지요.

어떤 특정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라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포함하고 있는 이 분위기가 있잖아요, 이 환경을 국자로 폭 뜨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전에는 사람들 시선과 안목을 의식하면서 벌벌 떨면서 살았던, ‘나 착해? 나 착해? 내가 나쁜 놈 같으면 회개할게.’

이렇게 남들 앞에서 나의 선과 나의 악을 따지면서 의로운가, 불의한가, 따졌던 그 세대는 날라 가 버리고

새로운 분위기, 새로운 원리원칙에 의해서 주어진 세대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그 세대에서는

의와 불의에 대해서는 우리가 손을 떼세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십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는 이야기고,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이야기고,

탐내지 말라는 것은 탐내라는 이야기에요.

그것은 이미 새삼스럽게 탐내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탐내고 있으니까 네 운명에 대해서 네가 손을 떼라는 겁니다.

“나 이제부터 탐 안내서 구원받을래.” 그런 소리 하지 말고

 “간음 안 해서 구원받을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입니다.

남은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죄거든요.

주께서는 우리보고 손을 떼게 하는 거예요.

손을 떼게 되면 우리는 지금 내가 속한 세대에 손을 못 댑니다.

따라서 이 세대와 더불어서 다른 세대가 우리 속에 삽입돼야 돼요.

삽입되는 그 방식이 우연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것, “내가 이래서 벌 받고 지옥 가는 거야.” 혹은 “내가 이렇게 했기에 천국 가는 거야.”

이렇게 항상 원인과 결과를 잇는 이 기존의 세대에서 우리가 손을 떼면

“내가 왜 구원받지?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내가 구원받을 필요가 없는데 왜 구원받지? 아, 우연이구나.”

우연이 라는 가수가 부른 “우연히”라는 노래가 있어요.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남자를 만난 모양이에요.

그 가사에 보면 철없던 시절이 그리워서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말을 걸었어요.

행복하냐고 물었어요.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뚝, 뚝, 뚝!

가사 내용이 그래요. “눈물만 뚝, 뚝, 뚝 흘리는 그 사람”

그걸 보고여자가 측은해서 하는 그 뒤의 말이 압권이고 복음입니다.

저는 이 가사에 전율을 느꼈어요.

“난 벌써 용서했다고.”

<우연히>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만났네.
첫사랑 그 남자를
추억에 흠뻑 젖어 함께 춤을 추었네.
철없던 세월이 그리워

행복하냐 물었지 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만 뚝, 뚝, 뚝, 흘리는 그 사람
난 벌써 용서했다고
난 벌써 잊어버렸다고

말을 해놓고 안아주었지
정말, 정말 행복해야 된다고


오늘밤 우연히, 우연히 만났네.
첫사랑 그 남자를
나이트클럽에서 함께 춤을 추었네.
철없던 세월이 그리워

행복하냐 물었지 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만 뚝, 뚝, 뚝 흘리는 그 사람
난 벌써 용서했다고
난 벌써 잊어버렸다고


말을 해놓고 안아주었지
정말, 정말 행복해야 된다고

정말, 정말 행복해야 된다고


“나 벌써 너를 용서했다고.”

그것은 너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속해있던 세대 자체를 내가 묻거나 따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네가 그렇게 죄를 지은 것은 네가 나쁜 것이 아니고 너를 그렇게 묶었던 그 세대, 세상자체가 더러운 세상이라서 그런 거예요.

그 세상이 얼마나 더러웠으면 착해야 구원받는다는 소리가 교회에서 막 나오잖아요.

그러니 그 교회가 얼마나 더러운 교회입니까?

착해야 구원받고 착해야 영광 돌린다고 가르치는 그 교회,

그 세대가 바로 지옥갈 수밖에 없는 지옥의 집합체가 되는 겁니다.

왜,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기에,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기 때문에,

내가 착해서 내가 그 착함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납득이 되거든요.

그래서 그건 지옥가야 되는 거예요.

“난 벌써 용서했다고 난 벌써 잊어버렸다고.” 해놓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뭐냐,

 “말을 해놓고 안아주었지.”

그 다음에 “정말, 정말 행복해야 된다고.”

궁금한 분들은 인터넷 뒤져서 “우연히”라는 노래를 들어보세요.

특히 이 가사의 압권은 “뚝, 뚝, 뚝!”에 있습니다.

눈물만 뚝, 뚝, 뚝! 무슨 말이냐 하면, 말이 필요 없어요.

18절을 보면 말이 필요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18절을 보고 19절에 어떤 사람이 반대하는 것을 보면 말이 많아요.

‘그래,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천국 보내주고 어떤 사람은 지옥 보내주고

잘났다. 네 똥 굵다. 우리가 무슨 행동해도 다 소용없게 하는 하나님 참 잘났다.

하나님 네 맘대로 하세요.

그런데 네 맘대로 하는 것은 좋은데 자기 맘대로 결정 다 해놓고 왜 우리한테 왜 따지는데?’

하고 이런 식으로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대들고 있는 사람, 말이 너무 많아요.

차라리 우리는

내가 차가운 토기, 입이 백 개라도 말을 못하는 딱딱하고 차가운 토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앞에서 그냥 눈물만 뚝, 뚝, 뚝 떨어뜨릴 뿐이고

주님은 그걸 보고 “난 벌써 용서했다고 난 벌써 잊어버렸다고.”하고 꼭 안아주지요.

천국에서 영원토록 행복하라고.

그런 점에서 다시 이 21절을 봅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이 말 듣고 우리는 눈물만 뚝, 뚝, 뚝, 그동안 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해왔는지,

“하나님, 내 인생을 이렇게 꼴아 박을 수가 있습니까?”

이런 엉뚱하고 되도 않는 소리를 해왔던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나쁜 것이 아니고 이 세대에서 그렇게 배웠어요.

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살아오면서 가정이나 학교에서 늘 배워왔던 것이 뭐냐 하면,

 ‘네 인생은 너 하기 나름이다.’ 그런 식으로 배워왔었어요.

그래서 이 새로운 세대, 이것은 그냥 담아주는 대로 담길 뿐입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서울서 강의할 때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밀가루인데 ‘나는 밀가루다.’ 해서 여기에 ‘나’가 붙어요.

하지만 나도 밀가루, 너도 밀가루, 물에 밀가루를 섞고 뭉쳐서 밀가루반죽을 만들어버리면 그 반죽 안에는 너와 나가 사라져요.

개별 의미가 사라져요.

그 밀가루반죽을 밀대 가지고 죽 펴서 동그랗게 잘라내면 만두피가 되지요.

만두피는 만두가 아닙니다.

만두피에, 김치 신 것과 두부 넣고 당면사리 넣고 돼지고기 넣고 버무려서 속을 넣어서 십 분 동안 찌면 그게 만두가 되지요.

만두를 째보면 전부 다 똑같은 속이 들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냥 만두피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체결된 그 계약,

약속이 그냥 우리 속에 만두 속으로 자리 잡고 우리는 그것을 둘러싸는 만두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그렇게 봐요.

우리 속에 주께서 주신 구원의 약속, 영생의 약속을 품은 것을 생각안하고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내 속은 내가 알아서 채운다,

이렇게 되니 우리는 주님 십자가 앞에서 눈물만 뚝, 뚝, 뚝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다가 우연히 만나서

“그동안 행복했냐? 자기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할 때 아무소리도 못하고 눈물만 뚝, 뚝, 뚝!

우리는 기존에 듣고 배운 것 밖에 없어요.

기존에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듣고 배운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이 힘이 있어야 산다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습니다.

엄마의 모든 잔소리, 아버지의 모든 잔소리, 학교의 모든 잔소리와 친구나 동료나 권사나 목사의 모든 잔소리는 뭐냐,

 “사람이 힘이 있어야 사람이지 힘없으면 사람도 아니다. 정신 차려라!” 그 소리만 들어왔거든요.

그 소리만 들어오니

 “그러면 목사님 힘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헌금해야 되고 기도 많이 해야 되고 교회 충성 봉사해야 되고 말씀대로 살면 복 주십니다.”

“복이 뭔데요?”

 “네가 원하는 힘이 복이지. 힘이 있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고 힘 빠진 노숙자는 저주받은 사람이고.”

바로 그런 세대에서 요나는 말합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이것은 복음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워낭소리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는 그런 것을 기대하는데 그런 것 기대하지 마세요.

그것은 그냥 딱딱한 물체, “그냥 토기라도 좋습니다.” 그래야 돼요.

“난 너를 벌써 용서했노라”

그 노래 제목이 뭐냐 하면, “우연히”입니다.

그 사람이 복음을 아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노래 제목이 “우연히”에요.

세상은 필연입니다.

“네가 이렇게 해야 그런 성과를 얻는다.”는 필연,

성과와 실적을 요구하는 세상의 따가운 시선,

“네가 이 자리 유지하려면 이 성과를 계속 유지해야 되고 그렇게 안 할 거면 나가.” 하는 그 차가운 회사, 직장,

우리는 거기에서 스트레스 받고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누굴 만났는데 벌써 나를 용서한 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입니다.

우리의 뱀의 후손으로서 살면서 그것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우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 너를 벌써 용서했다.

너는 네가 나쁜 것이 아니고 바로 너를 너 되게 한 이 세상 자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

고 주께서 알아주시면서

“이제는 행복해야 된다고.”

 

여러분, 우리가 이 행복을 누락시키면 안 됩니다.

만두피가 얇으면 그 속 내용이 밖으로 비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만두피가 너무 두꺼우면 안의 내용이 뭔지 분간이 안돼요.

날마다 우리 자신을 따르세요.

연세가 많으면 자연적으로 됩니다만

따라보면 내 속에 있는 낯선 세계, 우연의 세계, 우연만이 해결할 수 있는 세계가

필연으로 뭉쳐진 나의 인생을 통해서 삐어져 나와요.

이걸 말릴 수가 없어요.

삐져나온다는 표현이 적합해요.

물기가 마르면 점점 더 바깥으로 삐져나오듯이 말릴 수가 없도록 자꾸 삐져나와요.

삐져나오면서 ‘우리의 겉은 날로 후퇴하지만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는 것을 전하기만 하지 마시고요,

우리 자신이 그것을 매일 체험하면서, 온몸으로 만끽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 하는 이야기가 다 거짓이었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잊었습니다.

성경말씀도 시시하게 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일은 약속대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으로 이루어지는 그 열매를 통해서 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 속에 이미 다 이루어진 영생이 있다는 사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

우연히 일방적으로 긍휼을 주셨다는 그 사실을

세상에 가장 귀한 보석, 보물로 간직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토기장이 비유

2013년 10월 20일                          본문 말씀: 로마서 9:19-23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9: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미 1절에서 “하나님이 과연 불의한 분이시냐”라고 반문투의 말을 사도가 했습니다. 이는 사도의 복음을 듣는 자들이 필히 사도가 전하는 복음에 반발할 수 밖에 없음을 기정 사실로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도가 전하는 하나님 말고 다른 하나님으로 버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는 참된 하나님으로 맞서십니다. 참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필히 ‘불의한 하나님’이라는 나쁜 인상을 야기하게 만듭니다. 특히 18절에 보면,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에서는 그 절정의 내용을 폭로합니다.

즉 아무리 사람이 천국가고 싶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아무리 지옥하고 싶어도 역시 소용없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런 소리를 접하는 자들은 누구나 다음과 같은 반발심을 나타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결정 한 것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이의를 달 수 없으니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 다 하라고 그래”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게 19절의 말씀 내용입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인간의 장래 문제는 하나님 일방적으로 다 결정지어놓고서서 새삼스럽게 “너는 왜 말씀대로 살지 않니?”라고 나온다면 참으로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가증스럽고 내부 모순되는 발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미 각자의 운명을 애초부터 정해놓고 진행시킨다면, 마치 우리 하기 나름대로 자신의 미래가 차후에 결정된다는 식으로 인간들을 현혹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즉 새삼스럽게 책망할 필요도 없고 소용없는 자들을 향하여 허물하실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대해서 사도는 새로운 비유 하나를 추가하는데 그 비유가 바로 ‘토기장이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모든 인간들은 이 비유를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새오눈 격분과 분노를 나타내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차갑고 딱딱한 물체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부에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로봇이나 기계 종류가 아닙니다. 생각과 따스한 품성을 품고 삽니다. 그래서 제발 인간을 물건취급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 인간들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을 향하여 ‘토기’에 불과하다는 투로 비유에 담아버리는 인간의 분노는 극에 다랄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토기장이’를 ‘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 개인의 판단력이나 이해력에 따라 그 개인을 구원하시겠다는 취지가 아니라 각자 인간들이 처해있는 그 세대 자체가 썩었다는 겁니다. 희망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듣고 보고 배우고 익히는 모든 것은 주변 환경에서 주인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 자체를 문제삼아야 합니다. 요나 4:3에 보면,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고 되어 있습니다. 직접 하나님을 만났던 요나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솔직한 고백입니다. 기존의 세대, 혹은 세상에서 듣고 배운 것으로는, 직접 하나님을 대할 때 모든 것을 거짓된 관점이었던 것입니다.

즉 내가 기존에 갖고 있는 불의와 의로움의 기준을 새로운 구원받은 세대에서는 거부되어야 될 관점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태어나고 교육받고 늙어죽을 때까지 관계를 맺고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개인에게 주어진 새로운 세대에서는 새로운 불의와 의로움의 원칙으로 둘러싸여 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토기장이 비유’를 현 인간 세대에 맞도록 변경한다는 것을 결국 기존의 인간 가치를 인정해주는 조건 하에서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사도는 거부하는 겁니다. 따뜻한 인간미가 나오는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보자는데 대해서 사도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너희들은 그냥 토기에 불과하고 그 토기들은 토기장이의 의중에 담을 뿐이야”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참으로 인간들이 듣고 싶은 비유라고 영화 ‘워낭소리’에 나오는 내용과 흡사하게 될 것입니다.

평생 자기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원균 할아버지에게 30년을 부려온 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 그런데 이 소의 나이는 무려 마흔 살.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늙은 소는 최노인의 삶의 벗입니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최노인이지만 희미한 소의 워낭 소리도 귀신같이 듣고 한 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오릅니다.

심지어 소에게 해가 갈까 논에 농약을 치지 않는 고집쟁입니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 하면서 최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 않고 나릅니다. 무뚝뚝한 노인과 무덤덤한 소. 둘이에 공유되는 감정이 형성됩니다.

그러던 어느 봄, 최노인은 수의사에게 소가 올 해를 넘길 수 없을 거라는 선고를 듣습니다. 그리고 장에 내다 팔려고 합니다. 그런데 소가 그것을 눈치를 채고 눈물을 흘리며 워낭소리를 울려대니 주인장이 양심이 아파서 차마 못팔고, “그래 굶어도 같이 굶고 죽어도 같이 죽자”하면서 소의 마지막 가는 생을 끝까지 지켜줍니다.

흔히들 인간들은, 하나님과 자신이 이런 사이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제시한 관계는 토기장이와 토기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사람들이 몸에 깊숙이 배겨있는 감정과 정신들은 모두 망해야 될 이 어두운 세대에서 스며든 것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 의해서 마련된 새로운 사고방식은 우연히 개입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필연적 의식으로는 포착되지 않아야 합니다. 기존의 세대에서는 우리는 자신의 역량에 따라 삶이 부지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우연히 하나님의 긍휼의 소식을 접하고 부터는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게 됩니다. “눈물만 뚝뚝뚝!” 이미 용서했고 이미 잊었다는 그 긍휼의 소식에 접하면서 우리는 “제가 토기라도 좋습니다. 사랑을 담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도 영광입니다”라는 고백을 내놓게 됩니다.

새로운 의와 새로운 불의는 하나님의 약속, 즉 ‘여자의 후손’(창세기 3:15)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만이 새로운 의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이 세대에서 들어온 것으로 불의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얇은 만두피가 되어 우리 속에 담긴 십자가 긍휼하심의 그 능력만 계속 바깥으로 발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