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56강-남은 자(롬9;24-29)이근호131020

아빠와 함께 2013. 10. 22. 07:52

남은 자(로마서 9: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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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0-20 13:35 

남은 자

2013년 10월 20일                            본문 말씀: 로마서 9:24-29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9: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를 두 분류로 나누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가는데 이는 큰 문제거리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는 본인들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누는 기준이 작용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평소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한데 영켜 살아가기를 원하게 됩니다.

대중 속에 깊숙이 숨어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동질화시키고 같은 색깔로 칠해서 표나지 않게 살고 싶어합니다. 즉 새로운 인간상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부담처럼 느낍니다. 익히 아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 세상 삶에 있어 위험한 모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상 취급은 분명히 인간 세계를 둘로 나누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이 그것입니다. 바로 이 나뉨을 가지고 세상을 다시 조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 것을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즉 기준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기준에 준해서 자아가 정해지게 됩니다. 그 기준으로 등장하는데 있어 예수님의 말씀으로 정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31-32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성취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위해서 애써 노력한 결실이 누적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가 행한 것들을 지키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안에 자신의 애씀과 결실함과 착함과 노고와 고스난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본인으로서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전형적으로 지옥으로 분류된 자들이 보여주는 바입니다
.

반면에 천국가게 된 자들은 ‘그 나라와 의’를 구합니다. 이는 그 사람의 노고나 공적이나 애씀과 무관합니다. 자기 말고 또 다른 분의 애씀과 노고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사람만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공로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과

예수님의 공로만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 말입니다.

천국가게 된 사람은 자신의 소유에 목숨 건 자가 아니라 자신으로 하여금 따로 분류시킨 그 기준에 목숨 건 사람입니다.

늘 그 기준을 둘둘 말고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기준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왜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사랑하는 자만을 끝까지 사랑해서 구원하시지’ 않는 겁니까?

왜 처음부터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는 자만을 끝까지 자기 백성으로 끌고 가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말씀이해나 하나님 이해가 순전히 자기 위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여기있고 또 다른 사람이 제 곁에 있다고 칩시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얼시구나하고 반기면서 “저는 그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버리지 않고 사랑하겠습니다”고 나올 것이 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 옆에 있는 사람보고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쪽에서 뭐라고 나오겠습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나를 구원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신 같은 것은 애초에 믿지 않습니다.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내가 고릅니다. ”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신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했으니 우리는 그 신을 믿고 싶어한 것이지,

만약에 “나는 너를 미워한다”고 한다면 결코 그 신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신은

실은 신이 아니라 가짜입니다.

허망된 관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란 인간들이 실제 믿고 싶어하는 하나님과 참된 하나님이 어떤 점에 다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 삼는다’는 표제를 걸어서 그 내막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밀어내게 됩니다.

이는 누구든지 자신을 하나님 백성되고 싶은 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를 위한 남은 자, 혹은 자신이 골라잡거나 선택할 수 있는 그런 남은 자란 실은 남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 다른 안목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명백한 증거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개취급하듯이 죽였습니다.

자기네들에게 전혀 쓸모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내쫓듯이 죽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즉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으신 분을 하나님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로서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지도 못한 자와 이미 무덤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신 예수님의 안목의 다름에 우리는 직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일생에다 십자가 사건을 재현시키십니다.

이 역사적 현장에서 반복시키십니다.

그것은 바로 욥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반복입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들을 유발시켜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적이란 이런 십자가 사건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 위를 걷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진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 자랑질이고 자기 애착이요 자기 과시오 자기 사랑입니다.

이것은 진정 ‘남은 자’ 되게 하는 기준으로 등장되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전에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막대한 양의 고기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로지 오른쪽에서 그물을 던진 것입니까?

그런 기적의 반복을 노린 겁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으킨 기적은 십자가의 반복입니다.

즉 남들 보기에 억울하고 억울한 일의 반복입니다.

반듯하게 살아왔고 열심히 살아온 대가가 곧 자기네들의 소유라면

그 소유를 하나님께서는 욥에게는 한꺼번에 잃게 합니다.

자식들을 다 죽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 재현되는 현장입니다.

욥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원통함을 하나님에게 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욥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몸의 구원입니다.

성도의 일상은 성도의 과업이 아니라 예수님의 업무였습니다.

이 업무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덩치는 붙은 지체들과 더불어 구원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입장의 기적을 버리고

원망하는 자, 죄인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긍휼만 들어앉는 일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6강-롬 9장 24-29(남은 자)1310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9장 24절에서 29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52페이지입니다.

로마서 9:24-29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①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②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③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 내용은 남은자만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고

그 남은 자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지금은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람이 남은 자가 되고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그 백성이 아니라고 한 그 사람을 ‘이제는 내 백성이다.’라고 함으로써 남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남은 자, 그 남은 자 외에는 구원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23절에 보면 긍휼의 그릇을 이야기하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긍휼의 그릇이 누구냐, 하는 그 문제가 궁금하겠지요?

진노의 그릇, 진노가 담긴 그릇이 있고

긍휼의 그릇이 있는데

그 긍휼의 그릇이 누구냐 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되는 겁니다.

왜냐,

긍휼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못가기에 누가 긍휼의 그릇이 되느냐가 관심사가 되는데

그 관심사에 대해서 사도가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서 우리에게 알려준 겁니다.

남은자만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 된다고 했습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지난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라고 해서 그릇의 종류가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뭔가, 같은 식구나 가족이라도 나뉘어져야 되는 겁니다.

나누어지고

나누어질 때 접힘이 되고

그 접힘이 마디가 되고

그 접히는 마디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 역사하는 힘이 된다는 점을

우리는 평소에 생각안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직행 1번을 타게 되면

운전사입장에서는 누가 차비 내는가, 안내는가, 그것이 관심사가 되겠지요.

그러나 성도가 같으면 이 직행 1번 버스 안에서 누가 남은자고 누가 남은 자가 아니고,

누가 긍휼의 그릇이고 누가 진노의 그릇인가를 구분하는 마디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 안목이

평소에 내가 어떤 존재냐를 늘 확인하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아까 교독문에 보면 이런 말이 있거든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염려하지 않아야 될 이유가 나오는데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32)

그러니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이것은 택한 백성이 아니고 지옥 가는 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세상을 볼 때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자와 천국갈 수밖에 없는 자를 나누는 식으로 둘둘 감기면서

본인이 늘 확인하는 식으로 살아가야 그게 본인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 기준을 자꾸 놓쳐버리는가 말이지요.

드라마 보세요.

드라마 보면 긍휼의 그릇이나 진노의 그릇이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재미있게 본다고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이걸 염려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이방인들이에요.

저것은 이방인들의 짓이고 사고방식이고 행동이고 의식이라는 것을 볼 줄 아는 그 사람이 주님의 남은 자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두 종류의 인간으로 나누잖아요.

그 나누는 기준을 우리가 빼먹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걸 우리가 놓쳐버리면 우리는 세상과 똑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셈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두 토막 냈으면 우리도 세상을 볼 때 두 토막 내야 된다는 당위성,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는 식으로 세상을 보면서 세상은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됩니다.

 ‘아, 이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들로 쪼개는구나.

저 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 봐.

(KBS 9시 뉴스를 보면서도) 저 모습들 좀 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그게 전부잖아.

그러니 우리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맞지.’ 라는 이런 인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드라마를 볼 때

그렇다면 나는 뭐냐는 말이지요.

나는 이방인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그게 바로 남은 자가 공통적으로 가져야 될 인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긍휼을 입은 그릇이 티가 난다는 거예요.

긍휼을 입었는지 진노의 그릇인지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이 세상에서 그것이 파악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이 죽어서 비로소 아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부터 말씀대로 모든 것이 갈라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둘로 쪼개는 기준을 담아 놓았는데요,

그 담는 기준의 방법이 상당히 난해요.

얼마나 난해한지 본문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25절에 보면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아까 하나 잊었는데요.

직행버스 안에서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을 나눈다고 했는데 교회 안에서도 나눠야 돼요.

교회 안에도

하나님에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과

그 나라 의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과 구분돼야 됩니다.

교회도 이스라엘 역사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거든요.

그 살아 있는 것을 모른 체 한다는 말은 수상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업하고 있는데 우리의 일상 삶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업무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업무에요.

이것이 내 일이라고 하니 거기에 목숨을 다 거는데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매일같이 살려내기에

내 목숨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목숨이고 주님께 소속되고 소유된 목숨입니다.

결혼을 위해서 준비한다,

이것은 주님의 업무니 내 업무거나 집안의 업무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 업무가 주님의 업무라고 그냥 끝나면 안 되고

주님의 업무인데 그 업무가 뭐냐? 진노의 그릇과 긍휼이 그릇으로 구분한다.

구분하는 방법이 뭐냐,

오늘 본문 내용이 남은 자만 건진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내용이 그렇게 연속되는 거예요.

그릇이 무엇이냐?

남은 자가 그릇이다.

남은 자는 어떻게 되는가?

남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남는다는 거예요.

은혜로만 남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대충 짐작은 하겠는데

구체적으로 들어가게 되면 우리의 짐작과는 터무니없는 결론이 나와요.

그 터무니없는 결론을 제가 설교시간을 통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남은자만 구원받는다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남은 자라고 자처하는 분위기로 갈 수밖에 없어요.

남은 자를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게 된 자가 고백할 뿐이지

‘나 남은 자 할래.’ 내가 선택해서 남은 자가 되는 법은 없어요.

 ‘나는 남은 자 쪽에 설래.’ 이렇게 설 수 있는 입장 같으면 그것은 은혜로 남게 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는 이 모든 기준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시늉을 낼 수 없는 거예요.

주께서 조치를 취한 것이기에 우리가 남은 자로 당할 수밖에 없어요.

“너는 남은 자야.”라고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남은자도 아닌데 주께서 “너는 이제부터 나에 의해서 남은 자”가 되려면

이전에 내가 구원받고자 시도했던 그 기준과 전혀 다른 기준을 주께서 우리에게 실시합니다.

주께서는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25절에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문장이 세 토막으로 나누면 그 세토막 중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가 뒤에 있는데 앞에부터 먼저 할게요.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했다는 말이지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하고 이야기할 때 “너는 내 백성이라.” 했으면

한결같은 하나님께서 “아 내 백성이구나.”하고 죽 가면

우리도 이해하기 쉽고 주님도 우리한테 확실한 분이고, 양쪽 다 수월하잖아요.

“너는 내 백성이라.” “고맙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지요.” “그래, 백성이다.” 죽 가면 되잖아요.

골치 아픈 것도 없고 어려운 것도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묻지요.

“저들은 누구입니까?”

 “저들은 내 백성이 아니지.”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뭐가 어렵습니까? 깔끔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 백성이 아니라고 규정을 해 놓고 이제 와서 내 백성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동안 우리가 듣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신실함,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것은 다 구겨서 버려야 돼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관성 있게 일을 안 하느냐는 말이지요.

내 백성은 내 백성이고 내 백성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끝날 문제를 가지고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내 백성이라고 해 버리면,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아,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하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진짜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 진짜 하나님의 모습인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어느 대목을 믿어야 구원받는 대목인지가 명쾌하지가 않잖아요.

왜 사람을 이렇게 헷갈리게 만듭니까?

뿐만 아닙니다.

그 다음에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치 아니한다는 말은 미워한다는 말이잖아요.

미워하는 사람을 이제 와서 사랑한다고 한다면 왜 하나님께서 마음을 확 뒤집어 버립니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에요.

“너희는 내 백성이다.” 하니까 그 소리를 듣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감사합니다.”라고 한 우리의 마음이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나는 너를 사랑한다.”하니까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천국가게 되었군요.”라고 우리가 생각을 할 때

그렇게 생각하고 다짐하고 믿었던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야기해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나는 너를 사랑한다.” “고맙습니다.”

그 다음에 똑같은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에게 이야기해요.

“나는 너를 미워한다.” 옆에 사람보고, “나는 너를 미워하고 이 목사는 사랑한다.” 라는 이야기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는 너를 사랑 안하거든요.” 할 때 그 사람이 뭐라고 반응을 나타내겠습니까?

이렇게 반응할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작자여! 신은 내가 선택하지 네가 선택하지 않아.

내 구원에 필요한 종교는 내가 알아서 선택해서 나한테 딱 맞는 맞춤종교로 구원받고 말거야.

당신이 나보고 미워한다는 그 말은 수용하지 않아.

그런 신은 나에게 없는 신이야.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신만 믿을 거야.”라고 미움 받는 사람이 이야기를 하겠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보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빼놓고 좋아들 했느냐 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해.”라고 주님이 옆 사람보고 할 이야기를 우리보고 했다면

우리도 똑같이 “나는 나를 지옥 보내는 신을 믿을 의사가 없습니다.

나를 천국 보내는 신만 저는 믿을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아까 미움 받는 사람과 똑같은 반응을 나타내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너를 사랑한다.”는 그 말을 우리가 믿는다고 이야기하고 알아들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다 헛방입니다.

그것은 다 일방적인 자기생각일 뿐이에요.

마치 아버지가 죽어가면서 아들 둘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는데

“큰 아들아! 2층 상가 네가 가져라.”

“감사합니다.”

아들 생각에는 아버지에게 집과 2층 상가 한 채만 있는 줄 알았지요.

“큰 아들아! 이 집도 너에게 물려주마.”

“감사합니다.”

그 유언을 들으면서 얼마나 둘째 아들을 약을 올렸겠습니까?

“아버지가 몽땅 나에게 다 줬어. 너는 없어.”

“둘째 아들아!”

“예!”

“내가 너에게 미리 이야기를 안했다만 15층짜리 빌딩이 있는데 그것은 네가 가져라.”

하는 순간 그렇게 좋아했던 큰 아들은 안색이 바뀌게 되겠지요.

다들 지옥 보내면 아무 문제없고 다들 수긍합니다.

“지옥가도 할 수 없지 뭐. 죄지어서 지옥 가는데.”

그런데 다들 죄를 지었으니 다들 지옥가라고 해야 하는데 다들 지옥가라고 해 놓고

“너는 죄 지었지만 천국 가.” 이러면 이런 편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그런 하나님이더라도

내가 믿고 싶은 것은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싶은 것이 아니고

나를 기어이 천국 보내주는 그 하나님만 믿고자 하는 그 속성이 이미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가짜입니다.

순진한 교만이에요.

사도바울이 옛날 사도되기 전에 그랬던 사람이에요.

자기는 여호와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이 달라지고 그가 천국에 가게 된 것은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친히 만나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알았습니다.

무덤 속에 들어가지도 않은 자와 무덤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

도대체 무덤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해서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못한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것이 내 속에서 반복될 줄은 생각 못했지요.

“너희들이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다는 소식은 들었지

왜 네가 못 따먹을 수밖에 없는 행세와 사고방식과 생각을 가지고 매일의 일상을 살려고 버티고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그 깊이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도 못한 겁니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왜 죽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 있을 때까지 한 번 살아보겠다고 그냥 의미도 목적도 없이 막무가내로 살아간 거예요.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현실화 시키는 작업의 일환인 것을 미처 몰랐던 거예요.

우리는 자기밖에 모르는 입장에서

하나님을 생각했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 예수마저 자기를 위한 예수라고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무덤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무덤에 들어갔다가 나온 분의 이야기를 우리는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기에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간 이유가 뭡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개 취급해서 죽여 버렸어요.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똑똑한 사람들이에요.

예수를 죽인 이유가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기에 죽인 거예요.

당신 같은 것은 개죽음 당해도 싸다, 해서 죽여 버린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사야 53장 말씀에 보면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한테 내 보이니까 사람들이 그 분을 귀히 여기지 않았어요.

개 취급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개 취급 받은 그 분을

하나님은 귀하게 여겼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안목과 우리 안목이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그 차이나는 것도 모르고

건방지게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이해한다?

뭘 이해하는데?

자기만 살려고 하면서, 자기만 구원되기를 바라면서 뭐가 그게 이해가 된 거예요?

십자가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합니다.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하는 그 구절 자체가 뭐냐,

십자가는 날마다 재현되고 반복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재현된다는 말은

“너희들은 절대로 나, 이 예수를 귀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 말입니다.

그걸 우리 속에 반복시키는 거예요.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할 때에 구원이라는 것은 어디서 성사되느냐 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를 미워해.”할 때

맞습니다. 저는 미움 받아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그런 사람을 만들어서

새삼스럽게 사랑함으로

그 사람을 긍휼의 그릇, 영생을 얻게 하고 천국에 가는 하는 남은 자 되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재현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신다는 그 말이거든요.

이것은 내가 나를 미워한다는 것이 전제조건이 되는 겁니다.

그 미워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아까 제가 마태복음 6장도 읽어드렸지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 6:31,32)라고 아예 규정을 지어버렸거든요.

 “이방인들의 특징, 지옥 가는 사람들이 궁금하냐?

지옥 가는 사람들은 평소에 무엇을 마실까, 먹을까, 입을까, 그것만 염려하고

또는 그 반대로 마실 것 있고 먹을 것 있고 입을 것이 있다고 좋다고 하는 그 인간들,

그런 것들이 바로 지옥 갈 이방인들인데

지옥을 다른데서 찾지 말라.

지옥은 주변에 널릴 정도로 가득 차 있다.” 그 말이지요.

사람들의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확고한가, 그 문제거든요.

제가 설교 처음에 했지요.

성도가 둘둘 감아야 할 것은

내가 얼마나 소유가 많은가, 확고한가, 아파트가 몇 평인가, 차가 어떤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두 토막 내고 인류를 두 조각내는지

그것으로 기준을 삼아야지

그 기준으로 구원받은 나는 얼마나 소유했느냐,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순진해 보이나

아주 교만하고 가증스러운 거짓모습이

 또다시 노출되는 거예요 .

그 기준이 중요한데

우리는 기준이고 뭐고 간에 일단 그 기준으로 구원이나 받으면 그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제가 아침마다 노인들 운동하는 그곳까지 산책하면서 돌아옵니다.

운동기구 중에 이런 게 있어요.

기구 둘을 마주 세워놓았는데 팔을 고정시키고 하체는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운동기구가 있어요.

어느 날 보니까 한 70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하고

한 50대로 보이는 아줌마가 서로 마주보면서 왔다 갔다 흔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 가지 가능성의 논리를 끄집어냈지요.

‘돈 많은 영감인가 보다.

그래서 50대 아줌마가 작업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할아버지가 먼저 흔들고 있는데 그 앞에서 그 기구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그것이 좀 민망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부부는 아닌 것 같고 아줌마가 대시를 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다 나중에 다시 생각하면서 왜 반대의 경우를 생각 못했을까, 했어요.

 아줌마와 할아버지가 10센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흔들고 있을 때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어요.

아줌마가 먼저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주책을 부려서 얼굴 맞대고 흔들 수 있거든요.

그걸 보고 제가 깨달은 것은

인간이 다른 안목도 같이 생각해야 될 텐데 일방적으로 누가 그렇게 했다고 하기는 참 난처하거든요.

지금 예수님께서 이렇게 처음부터 내 백성이라고 하면서 줄곧 가면 되는데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해놓고 내 백성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하나님도 모르면서 여호와 믿는다고 자처한 사람들이 나름대로 기준이 있거든요.

 ‘저놈들은 내 백성 아니고 우리들이 내 백성이다.’라고 했는데

 백성 아닌 자를 백성으로 만드는 순간

그동안 백성이라고 장담했던 그 모든 것이 홀라당 환상으로,

하나의 허망한 꿈, 망상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버린 거예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또

‘저들은 지옥가야 돼.’라고 단정 지은 사랑받지 못한 자들, 오히려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사랑했다고 여기는 자는 사랑한 것이 아니고 사랑했다고 착각들을 유발시킨 요인이 되어서 사랑에서 밀려나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아니한 자가 사랑한 자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그 이유가 뭐냐?

그걸 지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은 적이 있는데

그 다음부터 물만 보면 그냥 걸어갔습니까?

지금 한국교회가 뭐냐,

“여러분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여러분도 성경의 기적들을 다시 재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없기에 재현 못합니다.”라고 하거든요.

어제 토요일에 대전강의하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권사님과 집사님이 전에 다니던 교회가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병 낫고 싶거든 병원에 가지 말고 약 쓰지 말고 기도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믿음이 없어서 병이 안 낫지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면 병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보시면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병을 고쳤기에 여러분도 기도하게 되면 병이 낫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순진한 믿음으로 기도해 보세요.

그러면 병이 낫습니다.”

그렇게 해서 커진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실제로 사람이 죽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죽어도 목사는 책임 안지는 이유가 그 사람은 죽은 이유가 믿음이 없어서 죽은 거예요.

간절히 기도하라고 했는데 목사가 원하는 간절함의 수준에 도달 못해서 죽은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을 지푸라기 집는 마음으로 믿고 싶은 거예요.

교회 안 나오다 교회 나오면 뭔가 기적이 나오고 행운이 나온다고 그렇게 본인들이 생각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다면 성경에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베드로는 ‘야, 나한테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이 있구나.’

그래서 베드로가 물 만 보면 물 위를 뛰어다녔느냐, 그 말입니다.

두 번 다시 안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만날 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해서 고기가 많이 잡혔지요.

그 다음부터 베드로가 고기 잡을 때 왼편은 놔두고 오른편만 집중 공격해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까?

그게 믿음 있는 행동이고 그게 하나님의 기적인가요?

하나님께서 되풀이하겠다는 것, 되풀이하는 그 기준은 뭐냐,

십자가를 되풀이하는 거예요.

십자가에 대한 반복이에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뭐냐,

내가 나를 사랑해서 이 사랑하는 나를 어떻게 천국에 집어넣을까, 하는 사고방식은

사실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이용해먹겠다는 사고방식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

자기를 귀히 여기고 자기를 사랑해줄 때만 하나님 믿고 예수 믿겠다는 자기 귀함이 우선이 되는,

결국 숨어 있는 하나님은 개 취급하는 작당에 지나지 않는 것, 그 사건의 재현입니다.

그 사건을 재현하면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이런 경우거든요.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혼담이 오고 가고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어떤 차가 운전미숙으로 내 차를 박았네요.

이런 미친놈이 있나, 하고 보니까 막 혼담이 오고간 사돈 될 사람이라.

“내가 잘못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해 줘야 이 혼담이 안 깨지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억울합니까?

욥기에 보면 욥은 너무나 억울한 사람이에요.

차라리 태어나자마자 곧장 죽음을 보았으면, 하는 것이 욥기에 여러 번 나옵니다.

내가 잘못했으면 차라리 잘못했다 하면 그만인데, 회개하면 되고 반성하면 되는데.

“하나님이여, 내가 십계명을 어겼습니다. 내가 나쁜 짓을 했습니다.”

이러면 용서받고 구원받으면 되는데

회개하고 용서받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나를 사랑할 때 나오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방정식이거든요.

“하나님, 제 잘못이 뭡니까?

‘말씀에 보니 내게 이런 잘못이 있구나.’

내 죄를 알았습니다. 반성하고 회개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안하겠습니다.

혹시 실수를 또 하더라도 용서하세요.”

이렇게 구원받으면 되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익히 아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분통을 터뜨리게 만드는 방법으로 하는 거예요.

“억울해도 너무 억울합니다.”

억울한데 호소할 데도 없고 너무 억울해서 방방 뛰는 거예요.

“저쪽이 운전을 잘못했더라도 사돈 같으면 네가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여야지.”

딸하고 아들하고 막 뭐라고 하는데 억울해서 미치겠어요.

그렇게 억울할 때

바로 그 억울한 것이 죽지 않아야 될 분이 십자가에 죽었던 그 분이 도로 튀어나와서 우리에게 찾아온 현장입니다.

“억울하냐?” “억울합니다.”

 “분하나?” “분합니다.”

 “왜, 더 살고 싶나?” “이렇게 억울할 것이라면 더 살고 싶지 않습니다.”

“바로 그거야.” “너는 죄 지어놓고도 더 살고 싶어서 억울하지? 나는 죄 없으면서도 사람한테 개 취급당했어.”

이 억울함, 이 분통터짐, 억울하지만 나에게 억울함을 가했던 너를 내가 사랑할 때만

비로소 너는 더 이상 너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고

너는 오직 너를 구원한 자만 사랑하는 나라에 가게 되거든요.

그것을 오늘 26절 마지막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십자가지신분이 우리를 불러주는 거예요. 부르는 거예요.

 “내 인생 이렇게 왜 망치십니까? 왜 내 인생이 이렇게 혼란스럽습니까?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려고 했는데.

회개하라면 회개하고 반성하라면 반성하고 말씀 들으라고 하면 말씀 듣고 다 했는데

내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내 뜻대로 안되고

내 것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밉습니다.

싫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고 싶어도 하나님을 내가 사랑 못하도록 조치를 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미워한다는 소리가 나올 때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비로소 제대로 무덤 속에서 다시 나왔던 분을 이 역사 속에서 만났습니다.

그럴 때 다시 보세요.

“사랑하지 않은 자,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

중요한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한 적이 없는 너를 내가 사랑하기 위해서 불러줬다는 것 때문에 너는 남은 자 속에 포함이 되었다.” 하는 거지요.

그래서 남은 자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 분이

 ‘너도 이 땅에서 나처럼 억울하지만 같이 남은 자 속에 합류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를 부르시는데

그 부르시는 과정 속에서 분통과 원통과 절통함을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게’ 되는 겁니다.

“내 청춘 돌려주고 내 건강 돌려주고 내 재산 다 돌려주세요.

도저히 억울해서 못살겠습니다.

제가 저 사람보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그게 욥기에요.

 “내가 저 친구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 자식 열 명 다 죽이고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립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다.

그게 그렇게도 궁금했던, 그렇게 알고 싶었던 십자가는

네가 접근해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 차단막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늘 신비가 되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가끔 개구리 잡으러 미 8군 쪽으로 갔는데 거기 가면 철조망 쳐놓았습니다.

미국사람이라는 것은 항상 철조망 안의 미국사람이에요.

 미국사람이라 하는 것은 굉장히 신비로워요.

냄새부터 그래요.

초콜릿냄새니 껌 냄새니 모든 것이 신비로워요.

내가 항상 다가설 수 없는 철조망, 내가 다가설 수 없을 경우에만 그 사람은 미국사람이라.

그런데 내가 헬로우, 하면서 그 사람을 가까이 하면

그 사람은 신비감이 떨어져서 내가 이전에 만났던 그 신비로운 미국사람이 영 아니에요.

보통사람이 되어서 싫어요.

항상 철조망 속에서 한국 사람을 거지 대하듯이 해 줘야 우리는 존경하고 싶어요.

우리는 낮아야 되고 저분들은 항상 높아야 되고

우리는 항상 하얀 옷만 입어야 되고 그 사람들은 체크무늬 옷 입어야 되고.

냄새도 특이해야 되고, 물론 흑인은 제외하고 백인 미국사람만 해당되지만.

어릴 때의 그 신비로움처럼 이 십자가의 신비로움은 우리한테는 계속 미국사람이어야 됩니다.

우리 쪽에서 다가서면 주께서는 거기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살면서 너무 분하고 원통하고 허전해서 못살겠고,

그야 말고 바닥을 치면서 “도저히 억울해서 못살겠다. 뭐가 잘못되었는데?

어떻게 일이 이렇게 꼬이고 모든 일이 다 깨지나.

이래서는 나는 더 이상 못산다.

나는 안 살래. 더 이상 살기 싫어.”

라는 소리가 나올 때

그게 바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는 그 주의 말씀이 실감나는 겁니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이방인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이며

그것에서 얻은 결실을 가지고 자랑스러워서,

 내 인생이 너무 자랑스럽고 지금까지 반듯하게 살아온 내 인생이 남한테 너무 자랑 질이 하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그게 바로 이방인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안에는 고스란히 내 사랑, 지독한 내 사랑밖에 없는 거예요.

“주님 사랑? 웃기지 마. 나는 내 사랑할 때만 예수 믿을 거야.” 하는

이게 고집이고 이게 내가 사는 용기고 희망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원천 희망은 내가 희망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근원이에요.

내가 뭐냐, 내가 희망한 바로 그것이 나의 원천이에요.

내가 멀리 바라보는 그 자리가 내가 있는 곳이에요.

신이 있는 곳에 가 보면 거기에 내가 있어요.

내가 방금 도착한 그 자리, 신이 있는 그 자리에 내 발자국을 찍어버리면 거기에는 신이 없고 내가 곧 신이에요.

어느 인간이 구원받습니까?

어느 인간이 천국을 가요?

미쳤어요? 아무도 못가요.

아무도 못가는 것을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쥐어짜서 뒤틀리게 만들어서

“너의 인생은 너의 일과가 아니고 예수님의 일과다.”

너의 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의 구원만 있고 우리 구원은 없어요.

우리는 예수의 덩어리,

예수의 몸체의 구원 속에

같이 지체로서, 하나의 사지, 손가락으로서, 발가락으로서

붙어서 주님의 웅대한 구원에 합류되어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남은 자는 예수님이고

거기에 붙어 있는 분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남은 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집대로 버티고 버티듯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

내가 예수 믿나봐라. 내가 하나님 믿나 봐라.’

항상 하나님 이용하고 예수 이용했는데

남은 것은 내 사랑밖에 없으니

주여,

저는 지옥가도 마땅한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십자가 안목에서 다시 보게 하셔서

그렇게 만든 그것이 십자가 구원의 능력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