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54강-불의한 하나님(롬9;13-18)이근호131006

아빠와 함께 2013. 10. 6. 17:12

 

불의한 하나님(로마서 9:13-18)

음성            동영상

 이근호 13-10-06 13:30 
하나님의 불의

2013년 10월 6일                           본문 말씀: 로마서 9:13-18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보통 ‘믿는다’고 했을 때 무엇을 믿는지 그 내용이 나와야 합니다. 13절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만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를 미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믿는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게 미움받아도 좋다는 자세까지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빼놓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미움받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세상을 몰아가서는 아니됩니다. 이 세상의 형편이란 그냥 가만히 있는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전염병이 덮치게 되면 여인의 아름다운 미모도 그 전염병 안에서 무의미한 평가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이 온 지상에서 지금도 작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양을 보고 “태양이 저기 있네요”라고 말했다고 해서 태양이 이 세상 깊숙한 곳에 작용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햇빛은 그냥 덮쳐집니다. 이처럼 태풍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하나님 사랑, 하나님 미움’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눈에 보이는 않는 힘이 보이는 이 모든 세상을 만들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뜻을 포기를 해야만 합니다. 자기 뜻을 포기한다는 말은 인간에게 있어 인생의 목적 같은 것을 다 소용없는 겁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하나님의 목적이 따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출애굽기 29:46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하나님의 목적에 의하면, 인간쪽에서 하나님에게 합류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쪽에서 더러운 인간쪽에 붙어 인간 속으로 들어오신다는 겁니다.

시험을 치시는 분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이 내신 문제를 풀어서 구원에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만이 시험을 쳐서 우리를 합격시키십니다. 바로 이 내용이 실시하는데 있어 현실화되고 구체화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 속에 들어오심’입니다.

이 현실을 구체화하면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우리보고 지켜라고 주신 계명이 아니라 어기라고 주신 계명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이 세상 전부를 ‘악한 날’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잠언 16:4에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즉 악인들은 그 자체를 위한 악인이 아니라 악한 날을 형성하기 위해 쓰여지는 재료들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는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는’ 그런 날들입니다. 그런 세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선하신데 왜 이 세상에 악인이 아직도 설쳐대느냐”고 여깁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 세상에 선한 것을 따로 정리하고 끄집어낼 수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선이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추잡스럽고 치사하게 자기만 챙기면서 사는 이 더러운 곳에다 자신의 거주지를 장만하시려는 겁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모두 ‘애굽’으로 만들려고 하십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강퍅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 17-18절에 보면,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하게 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왕이 비상식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제정신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제 정신으로 사는 바로를 강퍅하게 만들어버리십니다. 어떻게요? 원하지도 않고 다름박질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되는 자를 그 바로왕 앞에 세워놓아버리는 겁니다.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 방식이 낯섭니다.

출애굽기 6:12에 보면, “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나 더욱이 모세 본인에게도 납득이 아니되는 사실을 애굽 사람이나 바로왕에 전하게 하십니다.

이는 이 세상의 기본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강퍅을 외면화시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바로왕이 평소에 공정한 판단력과 양심과 상식에 충실한 자라고 할지라도 모세을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듣게 되면 강퍅하지 않으래야 강퍅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야 애굽이 애굽답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구원이 구원의 기본방식이라면 이 애굽적 상황이란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의 투입이 필수적입니다. 즉 원하는 자라야 구원되고 열심히 다름박질을 해야 그 행한 양에 따라 더욱 더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하나님을 기뻐시게 한다는 그 사고 방식이 곧 강퍅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강퍅한 전형적인 애굽 집단, 바로 집단이 된 것이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면서 옳은 길을 모색했기 때문입니다. 즉 당연히 자신은 구원된 자라고 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미워하심마저 믿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고 절대로 미움받지 않는다는 것을 기정사실인양 행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해한 십자가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견해를 피해가는 식으로 주어짐을 압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원하고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지만 사도 바울이 전한 것은 예수님의 피흘리심입니다.

죄에 대한 세척은 이 피흘리심 외에 다른 방식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구원이란 오직 불쌍히 여겨주심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일생이란 평생 긍휼이 무엇이며 강퍅이 무엇인지를 알고 증거하는 삶이 됩니다. 온통 애굽 같은 세상은 실은 죽은 자들이 벌리는 축제의 장입니다. 산 다는 것은 곧 ‘죽음 현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단지 살아있기에 사는 이 애굽의 세상에서 진정한 죽음을 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로마서 9:13-18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신앙생활 한다고 할 때 “믿습니까?” 하면 “믿습니다.” 하는데 뭘 믿는 겁니까? 그 믿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내가 지금 뭘 믿고 있지?’ 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그 믿고 있는 내용이 교회를 믿어요. 교회를 믿는데 그 교회가 눈에 보이기에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에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는 것을 믿기에는 굉장히 난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는 것을 제가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사랑만 믿을 뿐만 아니고 미움도 믿어야 돼요.

하나님이 미워한 사람, 하나님께서 미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따로 만들어 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도 좋은 것만 믿으려고 하는데 좋은 것만 믿지 마시고, 좋다 나쁘다 하는 것도 우리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어 놓고 계속해서 줄곧 미워하는 그것이 좋은 것, 참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했다는 것을 우리가 믿게 되면 그것은 이 땅에서 내가 사랑하고 내가 미워하는 그 기준과 다를 수 있다는 것도 믿어야 돼요. 이것이 달라요.

내가 좋아하는데 하나님이 미워하고 내가 미워하는데 하나님이 사랑해 버리고, 그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믿습니까, 라고 할 때는 교회를 믿고 가정을 믿는다 하지 말고 이렇게 하시면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라고 하시면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말은 곧 뜻이 하나 추가가 되어야 되는데요. 말씀이 얼음장처럼 굳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모든 되어가는 것이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 말씀대로 진척되고 있고 진행되고 있다는 그 속에 우리도 일부 물방울처럼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돼요.

태풍이 두 개가 올라온다. 23호와 24호 태풍, 우리는 믿습니다. 그 태풍을 내가 안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태풍을 내가 안 만들었다는 것만 믿지 마시고 내가 안 만든 그 이질적인 것이 우리를 덮친다는 사실도 같이 믿어야 되고 덮치게 되면 내가 그동안 가꾸어온 모든 것도 소용없이 날아가 버린다는 사실도 믿어야 돼요. 원래 전염병 앞에서는 여자의 미모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병원에 가보세요. 전부 다 환자복 입잖아요. 병원에서 화장하는 것은 퇴원할 그 때 뿐이에요. 누워 있을 때는 화장해도 화장발 안 받습니다.

병 앞에서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공평하지요.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덮쳐지기에 그 속에서 내 뜻을 따로 챙긴다는 것은 반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칙하면서 살 필요 없거든요. 11절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하나님의 뜻, 말씀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위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본래 말씀 그대로 덮쳐서 현재 이 세상을 만들어 낸 겁니다.

십계명이 있지요. 5계명, 부모를 공경하라. 6계명, 살인하지 말라. 7계명, 간음하지 말라. 8계명, 거짓말 하지 말라. 이렇게 죽 나오는데 그 계명을 사도바울 안목에서 보게 되면……. 사도바울 안목이라는 것이 뭐냐, 믿는 사람 입장에서, 뭘, 인간의 육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영이 임해서, 성령이 임해서 믿는 사람 입장에서 십계명을 다시 보게 되면 그 말은 진의가 이렇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살인 하라는 말이에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공경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간음하라는 뜻이고 탐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 지키지 말라는 것이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교회는 이걸 반대로 가르칩니다. 왜, 성령을 안 받았기에. 옛날 유대인들이 자기의 본성 가지고 십계명 해석한 그것을 그대로 줄기차게 계속 이어가고 있어요. 안식일 지켜야 된다고 해서 주일 지키고 십일조 한다고 하면 의와 인과 신은 다 갖다 버리고. 자기 자랑하는 십일조가 무슨 십일조입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십일조 할 때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몰라야 돼요. 이런 소리 듣고 그 다음부터 왼손으로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왼손으로 하게 되면 오른손이 몰라야 돼요. 이 사람들이 성경을 앞에 두고 믿어야 구원받는다, 혹은 믿어야 천당 간다는 소리는 들어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자꾸 믿으려고 하는데 자기가 믿고 싶은 것, 믿을 만 한 것만 골라서 챙기다 보니까 그것이 주님한테 걸려든 겁니다. 처음부터 너는 믿음이 아니었음을 폭로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앞에 깔아놓은 거예요. 깔아놓고 하는 족족 말씀과 정 반대방향으로 그 말씀을 해석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으려고 하지 말고 우리는 어떤 것도 믿을 수가 없고 말씀은 우리보고 믿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믿지 못한다는 것을 까발리고 분명히 하기 위해서 준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간 사람은 있거든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의 애씀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믿음으로 구원받은 거예요. 이렇게 쉽게 이야기했는데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 보면 참 희한해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너무 쉽잖아요. 울산에서 강의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성경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시험 쳐서 합격한 사람을 구원하는데 그 시험은 누가 치는 시험이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치는 시험이에요.

그런데 우린 성경을 펼치고 자기가 공부하고 자기가 시험 쳐서 천국에 합격하려고 노력한다니까요? 그러면 예수님은 뭐가 돼버립니까? 예수님은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이런 식으로. “뭐가 제일 쉬웠어요?” 하니까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제일 쉬웠어요.” 이거하고 똑같아요. 신앙생활은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애초에 안 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16절, 이런 말씀은 예배당 기둥에 아예 새겨야 돼요. 우리교회가 예배당 세울 일은 없겠지만 하여튼 예배당 신축해서 기둥에 이 구절이 새겨져 있다고 보고 이 대목을 봅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두 개만 하면 돼요. 길면 하나만 하면 됩니다.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아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을 기둥에다 새겨버려요. 아예 조각으로 파버려야 돼요. 달음박질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쪽 기둥에는 뭘 붙이느냐 하면,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셨다.”를 붙여놓으면 돼요. 이쪽 기둥에는 그렇고 다른 쪽 기둥에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가 가져다 준 효력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세척합니다. 강력한 세제에요. 하이타이는 이유도 아닙니다. 얼마나 우리 죄를 세척할 어떤 능력도 우리에게 없었으면 따로 이렇게 이 역사 속에 예상도 못한 세척제를 투입시켰겠습니까? 사람들이 예상을 했으면 자력으로 달음박질로 그것을 믿을 수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의 생각, 어떤 인간의 천재적인 아이디어도 피하는 방식으로만 죄를 씻어주십니다. 죄를 씻는 방법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천국은 죄 있는 자는 못 가는데 죄를 씻는 방법은 없습니다. 죄를 씻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울러 언급하시면서 죄를 씻어주십니다.

한쪽은 죄를 양산시키면서 양산시킨 그 모든 죄를 한쪽에서는 세척하시면서, 씻어주시면서 모든 것을 삼켜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죄가 양산된다는 것은 지금 세척되고 있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돼요. 우리 한 평생에. ‘아, 이것도 죄인가?’라고 할 때 옴팍 그것을 삼켜버려요. “그것도 죄야.” 하고 삼켜버리는 식으로 우리를 가지고 노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치는 시험지입니다. 그 시험지위에 주님의 필체가 난무하면서 휘갈겨지고 있습니다. 그 점을 생각해서 1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야곱이 무슨 죄가 있으며 에서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야곱입장이나 에서입장에서 죄는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뭔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이미 운명이 결정되었기에 자기가 지은 죄가 자기운명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죄가 없는 겁니다. 이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어린애들임 무슨 죄가 있어요? 태어난 것이 죄지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난 것이 죄로 보는 거예요. 다 죄로 태어나고 죄가 없어서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고 사랑받으면 천국가고 사랑 못 받으면 지옥 갑니다. 너무 쉽게 이야기하니까 꼭 거짓말 하는 것 같지요?

이거 진짜입니다. 이거 중국산, 호주산 아닙니다. 진짜 한우에요. 진짜입니다. 너무나 엄청나서 우리는 믿지를 못하지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교회가 교회를 버려놓습니다. 왜, 교회가 교회를 모방하기 때문에. 선배목사를 후배목사가 모방하기 때문에 그 교회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후배교회도 같이 망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보시는 이 세상은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짧고 되먹지 않는 그 지식으로 판단하는 것과 다릅니다. 지금 제가 대전 시민대학에서 중세신학을 강의하고 있는데 지금 중세천주교신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신학자들이 제일 고민에 빠진 것은 ‘하나님은 선하신데 이 땅에 악이 왜 있는가?’ 그 대목이 풀리지 않는 거예요. 풀릴 리가 없지요. 사고방식,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데 그것이 풀립니까? 안 풀리지요. 제가 그것을 풀어드리겠습니다. 궁금하지도 않을 테지만 하여튼, ‘왜 하나님은 선하신데 이 세상에 악이 있느냐? 하나님은 선하신데 왜 어떤 인간이 내 돈 떼먹고 사기 치는 것을 방치하는가?’ 그런 문제입니다. 잠언 16장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대목에서 핵심 되는, 인간이 그렇게 고민하고도 풀지 못한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악인도 선한 자에게 적당하다는 말이 아니고 악한 날에 적당하다는 겁니다, 악한 날에. ‘날’ 이것을 빼먹었어요.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착하신데 왜 이 세상은 악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 선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일부러 이 세상을 악한 날로 만들어요. 온 세상을 몽땅 악한 세상으로 만든다는 말이지요.

너는 선하고 너는 악하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하고 자시고가 없고 모두 다 악한 자로서 악한 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 거예요. “하나님은 선하신데 왜 우리는 악한 자가 있습니까?” “너도 악해! 이 바보야. 너도 악한거야. 너는 왜 쏙 빼는데?” 전체가 악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전체가 악하다고 만들어놓고 그 전체를 악하게 만들어놓은 그 당사자가 우리로 하여금 의롭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자기 공로나 자기 행위를 주장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아서 지옥 가는 자들도 “쟤는 왜 구원합니까?”라는 말을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사람들이 선악과 따먹고 범죄 했다고 하니까 이것을 아주 우습게 생각합니다. ‘옛날 우리 조상님이 실수하셨네.’ 지나가 버린 한낱 이야기 거리로 처리하면서 자기는 멀쩡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도 범죄하고 자식도 범죄하고, 그것이 아니고 ……, 그 위대한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이 그것을 몰랐던 거예요. ‘이상하다. 아버지가 죄인인데 내가 왜 죄인이지?’ 이것을 풀 수가 없는 거예요.

‘아버지가 죄를 졌는데 내가 범죄 했다?’ 아버지가 죄를 지어서 벌 받는데 내가 같이 벌 받는다, 이것은 이해가 되는데요. 아버지가 도박에 빠져서 빚졌는데 내가 보증서서 그 도박 빚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게 아니고 아버지가 죄인 되었는데 나도 같이 죄를 지었다 하니 납득이 안 되네요. 무슨 수로 납득이 됩니까? 그래서 기껏 나온 것이 유전설, 아버지의 죄는 후대로 유전한다는 것, 그래서 지금 총신, 장신, 감신, 모든 신학교에서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죄가 유전했다는 거예요.

유전하면 분명히 DNA속에 있을 것이 아닙니까? 조사해보니 거기 죄가 없는데요?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해보니 거기에 죄가 없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죄가 나한테 어떻게 전달되었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큰 아들아! 너는 선산 땅 네 것 해라.” “아버지,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오래 사셔야죠.” “둘째야! 지묘동 4층 건물 네가 가져라.” “아버지,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 것이니 다 쓰시고 가셔야지요.”(말로라도) “세 째야! 너는 내 죄를 받아라.” “???”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아버지 죄가 아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자체가 죄 안에 있는 세상이 된 거예요. 그 간단한 것을 왜 깜빡 했는지 몰라요. 사람들이 예수 믿고 하나님 믿으면 자기는 착한 사람 되는 것으로 자꾸 발을 빼려고 해요. 하나님의 작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온통 악한 날, 악한 세상으로 전환시키려고 왔습니다. 지난 시간에 했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예정론, 인간들이 자기만 잘났다는 그런 예정론, 칼빈의 예정론이 문제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닙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적도 아니고 복음적도 아닙니다. 칼빈은 뭐가 뭔지를 몰라요.

그래놓고 신학교마다 다 칼빈주의, 칼빈주의 하는데 저는 자꾸 칼이 생각나요. 칼빈주의, 장신은 유식한 체 하느라고 칼뱅주의라고 하는데 칼빈이나 칼뱅이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예정했습니다. 우리는 그 붙어 있는 하나의 기생충, 연가시, 그 정도로 가는 거예요. 우리가 기생충이라고 한다고 해서 너무 기분나빠하지 마세요. 출애굽기 29장 45, 46절에 보면……, 아까 장로님 기도할 때 생각이 났는데, “우리의 사는 목적도 모르고…….” 이렇게 기도하셨는데 원래 목적 없어요.

원래 우리는 목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목적보고 사십니까? 사는데 무슨 목적이 있어요?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거지요. 목적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정하기에 우리 인생에서 우리는 목적을 쏙 빼세요. 그 목적이 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하나님의 목적은 뭐냐, 자기밖에 모르고 목적도 없고 자기 몸에 끌리는 대로 자기 욕망대로 자기 욕구대로 자기 감성대로 살아가는 그 쓰레기 속에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그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계속 더러워져야 되고 하나님께서 더러워지게 하시고 우리를 더럽게 만드시고 만드시면 만드실수록 주님이 거기 함께 거하는 자리가 돼요. 참 여기서나 이런 말 합니다. 다른데서 이런 말 하겠습니까마는, 물론 하기는 하지만 인상들이 영 안 좋겠지요. 좀 추잡스럽게 사세요. 그래야 주님 홀로 안 추잡스러워요. 이미 추잡스럽게 살고 계시니 제가 그걸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요.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거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어서 저쪽에 가는 것이 아니고 더러움 속에 하나님이 친히 임하기 위해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작전은 간단해요. 그들을 애굽 땅에 집어넣어서 애굽 사람으로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정식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돼요. 구원의 방정식은 뭐냐, 창세전에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하고, 그 계획이 있잖아요. 그 계획을 세상에 구체화시키는 겁니다. 그 구체화시키는 방식이 뭐냐, 이 땅에서 의인이 하나도 없게 만드는 방식이에요. 추접하고 더럽고 조잡하고 뻔뻔스럽게 살도록 만들어요. 목적이니 목표니 그런 것은 다 핑계이고 거짓말이에요. 세계인류를 위한다느니 그런 것은 되도 않는 소리고요 인간은 자기 몸만 편하면 최고에요.

자기가 행복하면 그것으로 자기가 신이 되기에 최고입니다.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 우리이기에 더 이상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마세요. 덕담 같은 것 소용없습니다. 덕담해도 부담만 되고 그런 것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악한 날을 만들었을 때는 거기서 인간의 선이라는 것은 다 소용없는 겁니다. 제가 울산에서 강의 마치면 황전도사님께서 울산역까지 데려다 주거든요. 세 살 먹은 손자가 같이 탔어요. 그 애와 황전도사님의 대화 내용에 제가 너무너무 감명을 받았어요. 애가 저렇게 죄인이구나, 라는 것에서 감명을 받았는데 손자가 할머니에게 질문했어요.

“할머니, 해가 어디로 갔어요?” 황전도사님이 “해는 밤 되면 다른 나라 갔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이 나라로 온다.” 이렇게 애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을 했어요. 그러니까 애가 같잖다는 듯이, 자기를 아래로 보고 놀렸다는 듯이, “왜 그래~!!” 그러니까 요새 유행하는 말로 하면 “그런 말 해(하)지 마.” 그런 뜻이에요. 애를 애답게 보고 황전도사님은 답변을 했는데 애는 해가 어디로 갔느냐는 질문을 던져놓고 해가 다른 나라로 갔다고 하니까 그런 얕은 답은 내가 안 믿는다는 뜻이에요. 영특한 것인지…….

이런 영특한 아이들이 나중에 영특한 어른이 되는데 그런 인간들이 어디를 가요? 천국을 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요. “십자가로 죄를 세척해서 용서받습니다.” 하면 “왜 그래! 그런 소리 해(하)지마.” 그렇게 나옵니다.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안하면 무슨 수로 구원받는데?” 복음을 남이 미워하고 남이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미워하고 내가 싫어한다니까요? 내가 주님을 구박해요. 십자가를 구원받는 내가 구박한다니까요? 그냥 돈이나 내려주고 복이나 내려주지, 이런 식으로 우리 자신이 주님을 싫어해요. 자기 영특하다 그 말이지요.

세상은 지혜와 기적을 원하는데 주님께서는 지혜와 기적을 이리저리 피해서 너희들이 손댈 수 없는 그 틈새, 십자가로서 들이댐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게 어리석은 것이라고 판정받을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에게 어리석은 그것이 바로 우리를 정말 지혜롭게 한다는, 그 어리석은 것이 구원의 지혜요 능력이 된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그렇다면 사도바울 입장에서 이 세상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어가고 있는 현상으로 보는 겁니다.

어젯밤에 서울에서 불꽃 축제 했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 세상은 죽음의 축제에요. 불꽃놀이 따로 할 것도 없어요. 매일 죽음의 축제, 죽음의 불꽃놀이인데요. 매일같이 할로윈데이, 매일 귀신들의 축제에요. 목적이 어디 있어요, 목적이? 우리는 목적을 당하는 사람이지 우리가 목적을 세울 권리나 권한이 없습니다. 목적 만들지 마세요. 할 일은 있어요. 주부는 설거지 하고 또 직장 나가서 돈벌이하고, 이렇게 할 일은 있지만 목적이나 목표는 시답지 않는 소리고 소용없는 거예요. 목적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애굽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애굽에 있는 그들 속에 내가 투입한다.’ 달랑 그겁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전혀 어렵지 않아요.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것이라 그렇지만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서로 사랑하자고 하지만 급할 때는 내 몸 챙기고 내 몸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치사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혀 치사하지 않는 분이 투입됨으로서 천국으로 만드는 그 시험 치기, 그 수능시험을 우리가 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친히 그 일을 다 해내십니다.

그 일을 다 해냈다고 인정받은 것을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습니다, 속에 ‘이제 내가 율법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 하는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바로 이 모든 구약성경을 다 통달하고 난 뒤에 이미 알기에 그런 말을 한 거예요. ‘주의 목적은 주님이 알아서 성취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열심 내는 것, 달음박질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차단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 계획 속에 주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실천에 옮긴 것이 뭐냐 하면, 전 세계를 애굽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애굽에 아예 가서 그 정부에 시위하는 식으로 하면 애굽사람 되는 겁니까? 비행기 타고 거기 가야되겠어요? 갈 필요 없어요. 애굽에 가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여기 나옵니다. 오늘 본문 17, 18절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이 세상, 이 지묘동이 애굽이 되는 것……, 내년부터 이곳 주소가 바뀝니다. 팔공길로 바뀝니다. 팁으로 알려드립니다. 하여튼 이 세상, 이 지묘동이 애굽으로 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강퍅하면 돼요. 강퍅한 그것이 애굽입니다. 강퍅한 것을 파악하게 되면 이미 그 사람은 애굽을 파악한 사람이 되어서 구원받고 있는 과정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기에 구원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강퍅하게 되는가? 그것도 쉬워요. 오늘 쉽다는 이야기 여러 번 했는데 진짜 쉽습니다.

16절에, ‘천국을 원하는 자는 구원받습니다.’ 이게 강퍅이에요. 그러니 모든 교회가 다 강퍅하다고 보면 되고 애굽이라고 보면 돼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 악한 날, 교회를 강퍅하게 만들어서 그것을 애굽화시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나서야 구원받지 가만있는데 구원받을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스스로 생각들 했고 또 목사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죽이 맞게 만들어서 그들은 점점 더 날이 갈수록 강퍅한 사람이 되도록 하시는 거예요. 이 신약에 전 세계를 애굽으로 만들기 위해서 구약에서는 일부지역을, 진짜 한 나라를 애굽으로 만들었거든요.

그 애굽이 있다고 해서 애굽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누구를 쏙 집어넣는가하면, 달음박질하지 않아도 되고 원하지 않더라도 주님이 원해서 구원되는 그 야곱,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그 야곱의 후손을 애굽에 쏙 집어넣는 거예요. 다이너마이트처럼 쏙 집어넣었다가 빠져나오도록 하면서 폭파시킨 겁니다. 출애굽기 6장에 보면 모세도 그 이야기를 미처 몰랐어요. 하나님이 구원방정식을 모세에게 이야기를 해 주니까 모세가 이해를 못해서 하는 말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6장 10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어 보내게 하라.” 하니까 모세가 여호와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2절에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하나님이여, 구원받을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말을 따라 나올 위인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시잖아요. 그것이 인간인 것을. 여호와 이름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을 위인은 없습니다. 그것을 나도 알고 하나님도 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간들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노아방주를 만들어본들 이웃집 아저씨도 방주에 안 들어갔거든요. 그러니 내가 가보들 믿지도 않을 것인데 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모세가 지금 여기서 무지한 것이 있어요. 인간에게 설득당할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이 설득당할 요소는 없습니다.

인간은 끝까지 자기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구원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대신한 분을 보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바로 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나를 대체하신 분을 믿는 거예요. 따라서 믿음의 내용을 압축시켜 보면 나는 어떤 성경도 지키거나 믿을 수가 없었는데 주의 십자가가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하나님의 그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생지게 될 죄를 다 용서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것을 사랑이라 여기시고 예수님이 합격했기 때문에 우리도 덩달아 주님이 용서한 우리도 같이 합격되는 것, 그래서 우리는 그냥 용서받은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불쌍히 여김, 긍휼히 여김 받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신 그것을 근거해서 그 다음에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불쌍히 여겨주는 거예요.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너는 당당해. 너는 훌륭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다 지워버리겠다는 거예요. 그것을 빼겠다는 거예요. ‘너는 훌륭하지도 않고 너는 당당할 어떤 것도 없다.’는 거예요. 다만 있다면 불쌍히 여김 그 외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다른 것을 쏙 빼버리고 그냥 불쌍히 여김으로만 우리를 건져내겠다는 것. 왜 그렇게 하는가? 이 세상 자체가 악한 날이기에 그렇습니다.

악한 자 선한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역시 사태 달라지면 돌변하게 되는 것이 타고난 우리의 본성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복음을 전하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편지로서 못을 박아놓았어요. 구원을 원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자기 앞에 온 사람에게 한 겁니다. “당신들은 뭘 원해요? 구원을 원해요? 영생, 천국을 원해요? 들은풍월은 있네요.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강단에서 사도바울이 했을 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었을까요?

오직 성령 받은 사람만, 다시 말해서 긍휼함이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사람만 아, 참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느끼게 된 거지요. “주여, 또 다시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저는 그냥 애굽인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 5장에 보면 바로가 모세한테 하는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우리끼리 유명한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

신약으로 하면 “예수가 뭔데 내가 예수를 믿어줄 의무가 있단 말이냐? 난 예수 안 믿는다.” 우리 같으면 이래야 돼요. “못 믿겠지? 거짓말 하지 마. 너는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아니고 못 믿어.” 인간의 결심이나 의지 같은 것이 주님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하면 하고 안 하면 안한다는 것은 엉터리고 거짓말이고요, 주께서 하게 하실 때 하게 되고 못하게 하실 때 못하게 되는 겁니다. 구원도 마찬가지고 천국 가는 것도 마찬가지, 주께서 허락하신 자에게만 영생이 주어지고 사랑하는 자에 한해서 천국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옥 갑니다. 이걸 믿읍시다.

왜, 우리 자신이 그런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결심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불쌍히 여겨줘서 구원된다는 사실이 이상스럽게 믿어졌으니까. 교회를 몇 년 다니고 헌금을 얼마를 하고 교육관 짓는다고 집 팔고 전세로 바꿔가면서 목돈 바쳤는데 그런 것 다 달음박질이었고 그것은 나를 강퍅에 강퍅을 곱빼기로 더 했던 나의 과거의 추억이었고 기억들이었고 나에게 남아 있는 어떤 질병입니다. 치료될 수 없는 관절통, 류머티스같아요. 내가 얼마나 헌금을 했고……, 오늘 헌금 통계 보니 아슬아슬한 면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또 그런 것도 허락하셨는데, 하여튼 뭘 해도 그런 것은 다 질퍽질퍽한 애굽적인 성깔만 드러낸 거예요.

절망된다고 울고 좋으면 좋다고 기뻐하는 짓거리 같은 것은 “나는 애굽사람입니다.” 하고 외치는 소리밖에 안되었어요. 결국 이러한 질퍽한, 치사한, 나밖에 모르는 존재를 아예 하나님의 아파트로, 빌라로, 자기의 거주자로 삼는 목적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완성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치사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습, 남들과 똑같이 애굽과 한 통속인 것을. 바로를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차라리 바로심정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그런 강퍅한 우리에게 긍휼을 주셔서 그 전에는 강퍅만 있었는데 이제는 긍휼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기뻐하며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사랑만을 증거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