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로서 예루살렘
2013년 9월 22일 본문 말씀: 스가랴 2:10-13
(2: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2: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2: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2:13)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천사가 왕림해서 하는 언급과 인간들이 미리 예상한 것과는 큰 차이가 나옵니다. 천사의 내왕없이 미래를 구상하게 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야망과 욕심의 연장선에 위치해 있을 뿐입니다. 즉 현재 내가 여기 있으니 내가 되고 싶은 식으로 현실이 그렇게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천사는 인간들의 이런 야심을 도중에 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사람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실 일을 위하여 부림을 당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일치된다면 아마 천사의 일에 대해서 인간도 수긍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때문입니다. 곧 어린양 되시는 메시아의 죽음사건은 그 어떤 식으로도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부합될 수가 없음을 분명히 해둔 사건입니다. 따라서 천사의 개입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자신의 뜻을 지적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라는 것은 ①이런 지적하심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②그 결과로서 주어진 현상이 생겨나는 것 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노아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함께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식으로 함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노아의 아이디어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생각을 하게 될 경우가 발생될 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면 사람들의 눈이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즉 “내가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하게 되면 남들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넘어서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 중에서 자기가 해내거나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을 분류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로서는 착안할 수 없는 것들을 반대편에서 모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반대편의 것이 곧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증거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반대편의 것들이 이쪽편의 것들, 곧 자신이 기대하고 희망하는 모든 것들을 부정해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천사의 왕림이란 곧 말씀의 왕림이요 하나님의 노선의 개입입니다.
노아 시대에 있어 '방주 만들기‘란 노아를 비롯해서 모든 인간들의 머리에는 아예 없는 일입니다. 만약에 미리 알고 있었다면 노아 식구들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곧 말씀 개입이 하나님과 함께 하심의 현상입니다. 노아에게 이 말씀을 묵묵히 순종한다는 것은 곧 자연적으로 모든 이웃과의 괴리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겁니다. 결국 자기 식구 외에는 아무도 방주에 승선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노아 입장을 생각하지 말고 그 당시 이웃 사람들, 곧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자’들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에게 있어 방주란 없음입니다. 그리고 있음이란 오로지 자기 자신들 존재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란 새로운 개념의 ‘있음’과 ‘없음’을 유발시킵니다.
소위 있다고(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없게 만드는 효과를 보입니다. 신은 없습니다. 어디에 없느냐? 이미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신은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은 신의 이미지들을 각자들이 만든 성소에서 섬기는 겁니다. 마치 송광호라는 영화배우는 자기 집에 느긋이 휴식을 취하고 있어도 전국 영화관 속에서는 송광호라는 사람이 부지런히 스크린에 등장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신이란, 자신들의 있음에서 비롯해서 그들의 있음에 같이 있게 되는 신을 신봉하는 겁니다. 하지만 노아 언약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없다는 식으로 배척받는 양상을 초래하게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에게 제대로 있는 ‘있음’은 세상에서는 ‘없음’으로 버림받게 됩니다.
그 당시 사람보고 “왜 당신은 방주에 승선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면 아니됩니다. 그들에게는 홍수도 없고 따라서 방주도 있으나마나 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란 지상의 사람들을 보고 “제발 믿어주세요”라고 사정하는 식이 아니라 그들이 왜 천국에 들어올 자격자가 못되는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소는 중앙이 비워있습니다. 그 빈자리는 장차 오실 예수님에 의해서 채워집니다. 누가복음 13:13에 보면, “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말씀의 성취자는 소위 ‘예루살렘 성소’라고 자부하는 자들로부터 살해당하므로서 그 허구성을 폭로시키는 방식으로 말씀을 달성하게 됩니다.
진짜 예루살렘은 ‘없다’고 여겨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작업을 위해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며 천국은 우리 동네다’고 자부하는 자들에 대한 추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있음’이란 자신의 있음을 변호하기 위한 시간과 공간의 틀을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즉 “신이시여 내가 여기 있으니 내가 이해되는 방식으로 나를 다루어보세요”라고 말입니다. 이런 요구의 밑바탕에는 자신에 대해서 ‘있음’을 자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하나님 ‘있음 개념’이 인간 ‘있음 개념’과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소위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죽어 없음’이라는 개념으로 찾아듭니다.
‘없으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를 않습니다. 신이란 분명히 존재하고, 또한 그것을 섬기는 자기 자신도 분명히 있을 때에 그 둘 사이에는 신앙이라는 것도 분명히 나타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 세계에서는 가짜 예수와 가짜 신만 난무할 뿐입니다. 즉 벌써 인간들은 신을 만들어 섬기기에 분주하기에 여기에 ‘없는 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장차 예루살렘에 모여들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인간들로 인하여 없어져버린’ 그 바로 ‘신’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이로서 이 백성들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로 규명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인정하게 됩니다. 참 성전은 벽돌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이들로 채워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있음을 채워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죽여주시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강-슥2장10-13(성소로서 예루살렘)1309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2장 10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5페이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지난 시간에 천사 이야기했습니다. 천사 왔을 때와 천사 안 왔을 때가 내용이 다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다 추려보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거, 내가 계획하는 거, 내가 하기를 원했던 것을 다 이쪽으로 몰아세우시고, 그 다음에 내가 생각지도 않은 것을 따로 뽑아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한테 주어진 그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손을 댄 증거가 되는 겁니다. 교회 봉사를 하게 되면 그것은 내가 한 게 되기 때문에 내 쪽에 포함이 돼 버리죠. 그러면 그 봉사란 것도 다 소용없는 자기 취미생활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뭔가 생겼다 하는 그것은 나의 현재 모든 것을 반성하라고, 그게 문제 있다고 지적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런 일들입니다. 그것을 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빈자리’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왜 빈자리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오늘 설교 제목이 ‘성소로서 예루살렘’인데요. 이 예루살렘은 사람에 의해서 채워지면 안 됩니다. 성소는 반드시 중간에 빈자리가 있어요.
오늘 주일학교 설교하면서 제가 질문을 애들한테 어려운 질문을 던졌는데 똑같은 질문을 여러분한테 하겠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데 그 하나님이 함께 했다는 것을 도대체 뭘 두고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사람 같으면 ‘함께 했다.’가 돼요. 손잡고 같이 길을 걸었다. 함께 한 게 되고, 같이 노래 불렀다. 함께 하는 게 되는데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딱 붙어 있다 해서 이게 함께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님과 거의 붙어 있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함께 한 게 아니죠.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쳐다보면서도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이게 함께 한 게 아니죠.
같이 시간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이렇게 늘 붙어있다고 함께 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하셨느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이 말이죠. 함께 했다는 것은 노아로 하여금 노아의 머리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노아의 아이큐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가 강제적으로 노아에게 덮쳐서 그 다음에 뭐냐, 그때부터 노아에게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요게 함께 있는 거예요.
주위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시가집에서 날 어떻게 보고, 친정에서 날 어떻게 보는가? 전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문제 되지, 같은 동일한 인간이 나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비난하고 비평하는 거, 전혀 그거 신경 안 쓰일 때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겁니다.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그걸 성경에서는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들이 평소에 남의 시선에 얼~마나 시달렸느냐를 우리가 알 수 있어요. 어릴 때는 ‘엄마 이거 해도 돼? 안 해도 돼?’ 맨날 묻잖아요. 커서도 마음속으로 물어요. ‘내가 이걸 하게 되면 주위에서 뭐라고 할까? 안 할까?’를 자꾸 묻는데 이것은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한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겁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까 이건 남들이 모르는 짓을 하게 돼요. 방주 만들기! 이건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방주를 만들 하등의 씨잘데 없는 짓을 한 거예요. 세상의 모든 발명품은 다 쓸모 있는데 방주 만들기는 그 현재 시점에서 전혀 쓸모없습니다. 그런데 미래는 아직 오지도 않았고 그런데 미래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확보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확보하니까 지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계획이 시행될 때 뭐가 필요한가를 하나님 지시에 따라서 그는 뚝딱, 뚝딱 만들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그 아이디어는 자기 식구들 밖에 몰랐고 역시 그 결과대로 그 방주 안에 사람이라는 그림자는 오직 자기 집안 식구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기 집안만 구원받으려고 방주 만든 거예요.
사실 한 가정 건진 것도 많이 건진 겁니다. 하나님께서 8명 구원받았다고 노아를 하늘나라에 가서 ‘꿇어 앉아. 손들어. 그게 전도야?’ 이렇게 벌주고 안 그랬습니다. 만약에 1명 더 승선시켰다면 노아는 혼날 뻔 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들어오지 말라고 만든 거거든요. 예수님이 십자가 피 흘려 죽은 것은 살고 싶은 사람 오지 말라는 뜻 이예요. 살고 싶어서 예수 믿는 사람 ‘제발 좀 가줘.’ 해서 십자가 들이댄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십자가를 빼버리고 ‘원하는 사람 다 살려줄게‘ 하고 보험회사처럼 천당보험 하듯이 다 오라 했으니까 십자가 벗겨버리니까 지나 개냐 다 오죠. 돈 봉투 5만원 받고 다 교회로 오죠. 복 준다고. 아니거든요. ’살고 싶은 사람들은 제발 좀 꺼져주세요.‘ 이게 교회에요. 왜 그러냐 하면 살고 싶다는 것은 너도 소망, 나도 소망인데 하나님과 함께 하심은 ’내가 이걸 소망 한다.‘에 포함되지 않는 게 있어야 돼요. 이건 나의 소망이 되지 말고 주님의 소망 때문에 내가 불림을 당하는 호출 당하는 호명 당하는 식으로 그럴 때 그것이 바로 성소, 빈자리입니다. 그래서 성소에 빈자리가 있는 것은 이건 우리 소망도 아니고 우리 뜻도 아니에요. ’언젠가는 그 빈자리가 채워질 것이다.‘라는 기대를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겁니다.
누가 오죠? 천사들은 자꾸 온다는 거예요. 그럼 누가 오죠? 나보다 더 세신 분, 이래야 돼요. 천사보다 더 세신 분, ‘천사 보고 경배하지 마. 우리도 경배할 분 오실 거야.’라고 그분이 어디를 차지하느냐, 성소의 중앙지점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여기 스가랴니까 천사들이 스가랴를 통해서 스가랴 예언대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뭔가는 제가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추석 날 굴뚝에 혼자 올라가서 페인트칠하는 페인트 공이 있습니다. 추석 날 다른 사람들은 다 놀러 가는데 자기는 추석 날 돈 많이 준다고 혼자 굴뚝에 올라가서 페인트칠을 예쁘게 하는 일을 맡은 거예요. 그 페인트 공이 굴뚝에 올라가면서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다른 사람들 가는데 추석에 간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자기는 페인트칠만 하면 되죠. 이게 오늘 본문 내용대로 하면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께 속한다.”고 했는데 여러분, 여호와가 외로운 분입니다. 요거 아셔야 돼요. 여호와로 오신 예수님을 여호와라고 합니다. 그런 거 하나라도 설명하려면 설교 시간이 지루해져요.
구약의 여호와가 예수님이십니다. 그럼 여호와 말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원래 하나님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있다, 없다. 는 우리 인간들이 어디서 생각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해놓은, 아침에 설교할 때는 세트장이라 했는데 인간들은 어떤 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을 때 고 안에서 있다, 없다,를 결정하는데 인간이 설정하는 시간과 공간에는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하나님은 거기 들어오지도 않고 거기는 인간들이 임의로 상상해서 만든 현실이기 때문에 거기에 애초부터 없죠. 인간들이 자기를 투사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송강호란 영화배우가 있어요. 송강호가 지금 롯데 시네마에서 관상이란 영화를 하는데 송강호가 주연이거든요. 그 영화가 상영하고 있는데 지금 송강호가 어디 있습니까? 송강호가 거기 있으면 바빠요. 대구 가야 되지, 서울 상영하면 서울 가야 되지, 바쁘잖아요. 송강호가 어디 있느냐 하면 송 강호 자기 집에서 놀고 있어요. TV 보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각 극장마다 송강호가 다 튀어나오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가지고 인간들은 그것을 조작하고 조립해서 각 교회마다 성전마다 신마다 민족마다 하나님을 섬기니까 전부 다 그게 가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없는 분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없다’라는 것을 느끼도록 만들면서 일을 합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자식이다. 이스마엘은 아니고 이삭이 자식이란 말은 없다가도 생겼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을 때 아브라함은 ‘네가 믿음 있다.’ 가 되는 거예요. 아이 참, 처음부터 있었잖아요. 이러면 믿음이 아니에요. ‘어! 분명히 내 생각에도 없고 내 현실 속에도 없는데 이삭이 생겼구나. 아! 하나님은 항상 없는데서 있게 하는구나.’라고 이렇게 믿어야 그게 진짜 믿음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어렵더라도 들으세요.)내가 어떤 시간과 공간이 있을 때 그 안에 누가 있느냐? 내가 있는 거예요. 나는 이 안에 내가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 하시느냐 하면 ‘없다’고 이야기하거든요. 항상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 반대로 이야기해요. ‘하나님, 저 여기 있습니다.’ 하면 하나님은 ‘없네.’ 해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는 없는 게 되고 우리가 있다고 여기면 하나님이 없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려면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있다.’가 성립되는 틀을 만들어서, 그 시스템을 만들어서 시스템과 더불어서 함께 와버리면 우리는 그것을 성전 속에 중간에 비어있는 걸로 ‘아! 없으신 분이 틀만 이렇게 성전이란 모양새로, 성소란 모양새로, 예루살렘 모양으로 우리에게 주셨구나.’라고 받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에게만 그래요.
노아 다시 해봅시다.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천천히 하라. 톤 높이지 마라. 내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천천히 하겠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는 없습니다. 방주는 없고 구원받는 노아도 없어요. 노아가 구원받을 것 같으면 노아부터 먼저 딴 데 옮겨놓고 나머지를 물로 심판해야 되는데, 노아로 하여금 같이 홍수를 맞게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구원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뭐만 있느냐? 하나님의 방주만 있어요. 방주 안에 사람 들어가면 그 사람만 있어요. 방주 밖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영생을 얻는 사람에게만 ‘있다’라는 말을 붙이게 돼요. 천국에서 영생 얻을 사람만 영원히 있는 것이고, 그 외에는 없습니다.
아담은 흙 이예요. 한 때 아담이었죠. 흙 됩니다. 죽어 버리면 흙이 돼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없어요. 없는데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있다고 고백한 것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의 다른 민족과의 차이성입니다. 다른 민족은 신이 있습니다. 왜 있느냐 하면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존재하는 것을 만들은 분이 있을 거라고 연장해서 자꾸 연속적으로 놀이를 끄집어서 나 있으니까 주님 계시니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서 사랑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라면 천국 다 보내야 됩니다.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지옥 보내면 이건 반칙입니다. 앞뒤가 안 맞아요. 그렇게 미워할 것 같으면 애초부터 만들지를 말았어야 됩니다. 만들어 놨으면 천국 다 보내주고 사랑해야 됩니다. 중간에 마음 바뀌기 없기, 이래야 일관성 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방인들이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없고 모세를 통해서 시내 산에 나타났을 때 그때 있는 겁니다. 무엇이 있느냐, 그 틀이 있어요. 그게 시스템으로 주어집니다. 그게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에 보면 부모를 존경, 경외하라고 했죠. ‘부모를 경외하라’는 이 말씀이 뭔 뜻이냐 하면 부모가 없다는 이야깁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이웃이 없다는 말이고, 다 그런 뜻 이예요. 있는 부모 사랑하게 되면 만약에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아! 부모를 경외하니까 높이자.’ 그래서 부모를 높였는데 자기는 천국가고 부모는 지옥 가게 되면 그 천국 간 자식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천국 가도 마음이 지옥 같겠죠. 이게 바로 불교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 해석을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돼요. 부모가 없어요. 부모가 없고 말씀 전할 때 ‘얘야, 우리 옛날에 홍해에서 건너왔어.’ ‘아빠, 그게 무슨 이야기야?’ ‘그거 하나님의 계명 이야기야. 옛날 출애굽 할 때 어린양 잡아서 건너왔어.’ ‘아빠, 그 이야기 왜 하는데?’ ‘나는 죽어도 말씀은 살아있어야 돼, 그 말씀 믿으면 구원 받아.’ 이렇게 말씀 전하고 복음 전한 아버지만 있기, 그것만 있고 나머지는 없기. 철저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사람 위주가 아니고 하나님이 너희들은 없다고 여기지만 이렇게 말씀이 나타나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 겁니다.
노아는 없는 거예요. 노아는 없지만 방주는 있는 겁니다. 방주 안에 노아가 탔으니까 방주가 있기 때문에, 언약이 먼저 있고 노아가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이 있는 겁니다. 이래야 오늘 본문 풀려요.
그런데 보통 사람은 정 반대입니다. 내가 먼저 있고 세상이 먼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일이 잘 안 되면 화풀이를 세상에다 화풀이합니다. ‘박 근혜 정치 똑바로 하란 말이야.’ 자기 일 안 되면 박 근혜 대통령 탓하고 박 근혜 탓하다가 안 되면 나중에는 하나님 탓하고, 내가 먼저 있고 날 위해서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세상은 다 그렇게 해요. 내가 못 된 것은 부모를 잘못 만나서 그렇고 부모가 재벌 2세가 아니라서 그렇고 맨날 자기 탓합니다. 공부 못한 것은 다 부모 탓이고 전부 다 다른 가정처럼 과외를 안 시켜서 그렇고 전부 다 자기 탓 이예요. 그거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소 예루살렘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 12절 말씀에 “많은 백성들이 내 백성 된다.”는 이 말은 그냥 인간이라고 꾸역꾸역 온다고 해서 받아주질 않습니다. 성소가 먼저 있고 정확하게 말해서 성소 안에 빈 칸이 있는데 그 빈칸이 구약시대에는 그 빈칸에다 신약 시대는 그 빈칸에 마저 채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죠. “선지자는 예루살렘 외에서는 죽지 않는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루살렘이 모든 구약을 완전하게 완성시킬 자리가 예루살렘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마저 채우는 틀이기 때문에, 체제가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예루살렘부터 유다, 유다에서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죠. 그 모든 복음의 원천이 예루살렘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예루살렘을 또 찾아가야 되겠네. 하는데 그 예루살렘이 뿌리가 없어요. 이게 뿌리가 뽑혀서 붕 떠서 예루살렘이 구름에 담겨서 예수님 승천하실 때 지금 예루살렘이 어디 있느냐 하면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서 있다가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그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예쁘게 단장해서 지상으로 내려와서 지상에 있는 성도를 모으고 천국을 이룹니다.
목사님, 그 말 진짜입니까? 물으면 제 말이 진짜냐, 거짓이냐, 하는 증거는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증거 밖에 없어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그것이야말로 승천한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우리 인간의 두뇌에서 끄집어 낸 그런 현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천사가 알려준 것이고, 이건 성령이 알려준, 이건 배후에 숨어있는 진짜배기 현실입니다. 이걸 믿는다는 것은 바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걷어치우고 내가 미처 생각도 못한 사실이 나에게 새로운 현실 속에 우리를 거기다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이라는 것은 기존의 이스라엘을 전부 다 퇴장시킵니다. ‘저리 가. 너희가 천국의 본 자손이라고? 아이쿠, 저리 가.’ 백부장 있잖아요. 백부장에게 ‘니가 천국을 차지할 것이다.’ 이렇게 했습니다.
제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에서 저는 평소에 군대라는 게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내가 만약에 대통령 찍어주신다면 첫 번째로 군대를 없애겠습니다. 이건 합법적인 조직 폭력배기 때문에 이건 도저히 인간성 파괴되기 때문에 용납 못한다. 라고 한 때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 백부장 이야기 들어보니까 아니 군대도 하나님이 쓰신다는 겁니다. 그 백부장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도 중대장입니다. 제 부하가 있는데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야! 군대가 저런 점에서 좋구나. 요새 말 안 듣는 자식들 군에 다 보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처럼 예수님은 나의 대장이십니다. 저는 그 앞에서 남 의식할 것 없고 주께서 까라 하면 까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만들 때 기존에 있는 모든 아브라함 본 자손 다 쫓아내 버리고 그 빈자리를 만들어요. 그 빈자리를 만들어서 진짜 하나님의 백성을 모집하는데 여기 모집할 때 손들고 온다고 다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아무도 거기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들어가느냐, 여기 12절에 봅시다.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하나님의 예루살렘이 승천할 때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니까 위로 올라갔습니다. 위로 올라가서 그 다음에 13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그 성소에서 일어나시면서 성령을, 예수님 자신의 영을 보내주십니다. 보내주시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그동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아왔던 이 모든 것이 뭔가 교체하는 작업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교체하는 작업!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12제자가 있잖아요. 12제자가 병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지만 주님께서는 12제자를 가지고 뭘 보여줬느냐 하면 네 인생 말고 인생 자체를 교체해 주는 겁니다. 교체해 주면서 오늘 이 본문 말씀 자기 소유로 삼으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여기 있는 예루살렘이라든지 이 모든 성소라 하는 것은 이제는 건물로서 사라지고, 내 시간과 내 공간은 사라지고 우리 자체가 하나의 벽돌이라. 하나님의 건축재료 돌이다. 벽돌이 되면서 주님이 장만해 준 새로운 시간과 공간 속에 우리가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냐 시간은 없는 겁니다. 공간도 없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자리에 예수님도 함께 있었어요. 엘리아와 모세가 죽어도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다만 차이점은 살았을 때는 예수님이 안 보이고 죽었을 때는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거든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이라고 현실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는 그러한 결과를 낳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다 주께서 보내신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나를 해코지 하더라도 주께서 보내신 사람이고, 어떻게 돕는다 할지라도 주께서 주신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들에게 해주는 것을 예수님한테 하듯이 할 수밖에 없죠. 그것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은 주님의 소유로 있기 때문에 주님의 인생이 우리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내가 생각도 못한 내 아이디어로 생각도 못한 그게 마구 쏟아지는데 그 쏟아진 결과가 뭐냐, ‘우리의 만남은 참 우연이 아닙니다. 라는 노래처럼 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범사에 감사하고 모든 것을 다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인생, ’왜 이 자식 태어났나?‘ 자꾸 옆에 있는 자식 쥐어박지 마시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우리는 천국과 상관없었습니다. 그러나 주와 함께 있으니 우리자체가 언약이고 우리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에서 만들어 낸 새로운 틀인 것을 우리는 왜 진작 몰랐습니까?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주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