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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4강-천사와 예루살렘(슥2;1-90이근호130915

아빠와 함께 2013. 9. 16. 20:50

 

천사와 예루살렘(스가랴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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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9-15 15:42 
천사와 예루살렘

2013년 9월 15일                        본문 말씀: 스가랴 2:1-9

(2: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2:2)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

(2:3)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2:4)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2: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2:6) 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내가 너희를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7)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2: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2:9)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들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일반인들은 사람만을 만납니다. 하지만 선지자에게는 천사가 들락거립니다. 세상 보는 안목에서 확연히 차이나게 됩니다. 같은 인간들 끼리 만나봤자 미래는 불확실함입니다. 아무리 서로 힘을 합쳐봐야 미래에 일어날 일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주장을 하게 됩니다.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나가기 나름이다” 즉 미래는 항상 우리들 앞에 비워있는데 지금 우리가 그 미래를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곧 우리의 미래의 전부입니다”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세계관에서 탈출되지 아니하면 구원이고 뭐고 없다는 겁니다.

천사들이 알고 있는 것을 인간들이 알아챈다면 구태여 천사가 선지자를 방문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사가 선지자에게 일려준 그 내용에 대해서 우리 인간으로서 주의사항이 생겨버렸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익히 알고 있음을 긍정하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달리 이야기하지만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미래를 가득 채웁니다. 이 ‘미래 채움’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벌써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실 때에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출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브라함 개인적 인생 여정을 생각한다면 암담한 미래를 쳐다보고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미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채워주시고 그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너에게 나올 후손이 너를 살린다”는 내용입니다. 즉 네가 너를 살리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또한 너의 과거 경험과 경륜이 너를 살린다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과거 경력은 그저 우상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천사의 내왕없이 같은 인간 동료들만의 의견과 자기 견해가 섞여서 미래를 꾸려나가는 식의 일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더 나은 본향에 이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의 긴 여장은 마침내 도착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아기 메시아로서 태어난 고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후손적 관계로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점의 시작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아들 생기기’이고 또한 ‘그 아들 죽이기’입니다. 생겨났다→죽었다→되살아났다’라는 일련의 조치들은 하나님의 백성 만드는 공식입니다.

이 변하지 않는 공식이 아브라함의 앞길을 채우게 됩니다. 이 공식에 준해서 정해진 특수한 도시가 하나 있으니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생명수가 분출된다는 도시입니다. 그 도시의 모든 이들은 젊음을 영원토록 보존된다는 그 도시입니다. 그러한 도시 만들기가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벌어질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입니다. 출- 애굽 사건이 없다면 예루살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이라는 도성에 특별한 의미를 주시는 것에 대해서 다른 도시들이 시기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을 고집해서하는 이유는 예루살렘은 출- 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매일같이 드리는 상번제 제사는 출애굽 사건에 대한 주기적 반복행사입니다. 출애굽 정신이 지속이 있어야지만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만이 있는 세계로의 탈출이 가능합니다. 이 출애굽에 있어 원리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들 이삭을 잡게 하시는 그 원리로 채워집니다. 누군가가 죽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원리입니다. 살아야 될 자들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이 죽어 같이 사는’ 식이어야 합니다.

자진해서 죽고자 하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함께 품어준다고 약속을 해도 말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정신은 와해되고 이스라엘은 망하게 됩니다. 물론 예루살렘도 최종적으로 몽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뒤에 또 하나의 예루살렘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제사로 마무리 되면 지리적 예루살렘을 그림자로 돌려세우면서 실체적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승천과 함께 하늘로 자리를 이동시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은 마지막 심판 때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물론 영광스러운 자태를 발산하면서 말입니다.

이 두 개의 예루살렘을 무사히 구분짓고 또한 온전하게 완성하기 위해서 마땅히 ‘역 출애굽’이 일어나야 합니다. 원리는 하나 같이 ‘어린양의 죽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첫 번 출애굽이나 두 번쩨 출애굽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엄연히 사람입니다. 동시에 죄인이기도 합니다. 죄인의 아들로 자처해서 나타나심으로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의 멸망 계획에 자진해서 참여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준에 준해서 과거 이스라엘의 운명을 다시 보게 되면 오늘 본문의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소년 스가랴에게 계시하셨는데 그 계시 내용은 지금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새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장벽에는, 백성 아닌 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맹렬한 불길로 막고 있다고 통보해 주십니다. 이것은 곧 기존의 예루살렘은 어디까지 참 예루살렘의 예고편 정도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기존의 예루살렘 제사에는 그냥 짐승 양이 동원되었지만 참 예루살렘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 이로서 더 이상 미완성된 예루살렘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의해서 모집된 자들이 곧 새 예루살렘인데 그 안에 눈동자처럼 귀하신 예수님이 앉아 계십니다.

따라서 세상사람들이 성도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곧 눈동자를 찌르는 것과 같아서 예수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시겠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무시하거나 모독하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나그네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슥2장1-9(천사와예루살렘)13091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2장 1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4페이지입니다. 스가랴 2:1-9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내가 너희를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들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천사가 들락거리는 이 사람은 누굽니까? 천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립니다. 우리는 누굴 만나느냐 사람을 만나거든요. ‘놀러가도 되나?’ 전화해서 사람만 만나는 사람과 천사가 들락거리는 사람과 보는 세상이 달라요. 어떻게 다르냐 하면 천사는 앞의 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존재가 천사거든요. 그런데 사람만 만나면 너도 앞 일 모르고 나도 앞 일 모르고, 사람이 4시간 후만 뭔가 안다면 떼 돈 법니다. 주식 투자해서. 그러니 사람들은 앞일을 전혀 몰라요. 안다고 해서 덤벼들다가 몽땅 주식 다 날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거든요. 똑똑한 수학자들이 주식 투자해서 날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들 똑똑하다 보니까 다들 폭삭 망하는 경우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천사가 왔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유리 하느냐 하면 천사는 시류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조세 정책이라든지 국제 정세에 따라서 천사가 자기 계획을 철회한다든지 이런 거 없습니다. 무궁화하고 KTX 박는다고 천사가 아, 일 포기한다. 이런 거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천사는 한 번 정한 그 일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천사가 스가랴에게 이야기하기를 ‘앞으로 이러한 일이 예루살렘에 일어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이런 뜻입니다. 세상에 딴 건 다 달라져도 예루살렘의 그 본 취지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약간의 시기가 납니다. 서울은 왜 관여 안 하고 예루살렘만 그렇게 우대하느냐? 예루살렘 지가 뭔데? 서울에도 교회 많거든요. 대구에도 교회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대구를 위하여 예언하고 서울을 위해서 예언할 만한데 왜 예루살렘에만 신경을 쓰느냐?’라고 우리는 은근히 부아가 나고 시기가 나죠.

제가 오전에 설교한 것처럼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인데 왜 나 있는 곳을 피해서 예루살렘을 가지고 거론하느냐,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생명이 분출되거든요.

독일 동화에 이런 게 있어요. 어느 마을에 가면 분수가 있는데 한 바가지 물마시면 젊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마을의 특징은 전부 다 피부가 탱탱해요. 다 물을 먹고 젊어져서. 동화 이야깁니다. 실제로 있으면 그 물을 병에 담아서 팔면 큰 돈 벌죠. 이 동화 이야기는 바로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물 길러 온 것과 각색을 한 거예요. 그리고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고, 생명수를 마시면 다시 젊어진다는 이러한 기쁨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젊어지면 좋은 건 좋은데 더 어려지면 어떡할까요? 그건 좀 곤란하겠죠. 하여튼 젊어진대요.

그처럼 이 세상의 사람들이 찾고 있는 그 중심은 뭐냐 하면 나로 더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생생한 젊음을 보존할 수 있도록 생명이 나오는 곳을 우리가 얻고 싶은데 그거는 사람들이 의논한다고 정해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이 지정해 주면 됩니다. 그 지정한 장소가 대구가 아니고 서울이 아니고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예루살렘 가면 되지 않느냐? 거기 가봐야 관광지입니다. 관광지라서 그건 볼 것도 없고, 성경에 나오는 예루살렘은 지금의 예루살렘하고 다릅니다. 왜 다른가 하면 천사가 말한 예루살렘이거든요. 우리가 아는 예루살렘하고 천사가 말한 예루살렘은 그 예루살렘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요게 두 개를 딱 떼 내요. 둘이 겹쳐서 있거든요. 천상의 예루살렘과 지상의 예루살렘이 구약에는 딱 붙여져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드라이버로 두 개를 떼 냅니다. 떼 내면 가짜 예루살렘은 지상에 남아서 로마 군대, 티토란 장군에 의해서 AD 70년도 불타 버리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같이 올라가서 지금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마지막 때 주님 재림하실 때 하늘에서 예루살렘이 신부처럼 다시 내려오게 돼 있습니다. 내려와서 천국을 깔끔한 사태로 모두 정리정돈하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 문제는 예루살렘이 생명이 있다는데 예루살렘이 지가 뭔데 거기서 생명이 나오느냐? 우물이 좋으냐. 물이 좋으냐. 왜 거기서 왜 생명수가 나오느냐? 이유는 그겁니다. 예루살렘은 출애굽을 했다는 그 기억이 담겨있는 곳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을 다시 세운다면 역 출애굽이 일어났던 기억이 있을 때는 다시 생겨납니다. 제가 방금 예루살렘이 두 개라 했죠? 딱 붙어 있습니다. 밑에 있는 예루살렘은 옛날 출애굽 했던 그 기억이, 그 역사가 있던 예루살렘이고 하늘로 예수님과 함께 승천한 예루살렘은 역 출애굽이 되어서 만들어진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승천과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거기에 안착하게 됩니다. 영원한 본향이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자, 그 다음에 출애굽이 이루어졌다는 이 말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는 겁니다. 출애굽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데, 다시 말해서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한테 당부합니다만 ‘그저 인생 살 때에 목사님, 어떻게 살면 됩니까?’ 자포자기 하세요. 다 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좋다고 소고기 사먹어 봐야 그냥 돌아서면 마찬가지에요. 이 땅은 자포자기하듯이 살아가는 겁니다.

왜냐 하면 애쓰면 왜 안 됩니까? 애써서 될 것 같으면 제가 진작 말씀드렸습니다. 교회 열심히 나가시고 기도하시면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될 것 같으면 제가 나서서 안 하겠습니까? 차라리 전도할 때 어떻게 복음을 전하세요. 이런 것보다도 권총 하나 들고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이렇게 하든지, 아니면 반대로 돈 봉투 넣어서 ‘교회 나오면 5만원 줄게.’ 이런 식으로 전도해서 우리가 복 받고 구원받을 거 같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합니다. 교회 세우고 장로, 목사, 집사 돼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들이닥쳐야 돼요.

그러면 언약이 들이닥치면 어떻게 되느냐? 출애굽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이 되면 신나지 않느냐? 전혀 신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언약을 받았습니다. 신났겠어요? ‘니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 했습니다. 가출입니다. ‘하나님이여 어디로 갑니까?’ 물어보니까 하나님께서 ‘쉿, 입 다물고 무조건 따라와. 무조건.’ 이건 아브라함뿐만 아니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입 다물어.’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 참, 동방박사도 아니고 왜 이러지?’ 그래서 터덜터덜 조카하고 같이 집을 나왔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왔다니까요.

우리는 드라마를 끝에서 보면 재미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막상 가출하게 되면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을 때 가족들이 얼마나 찾고 얼마나 애타겠습니까? 마마라는 사람이 글자하나 두고 나갔을 때 마마 누나들이 그렇게 식음을 전폐하고 찾았다는 거 아니에요? 그런 이야기 있습니다. 오로라 공주 보면 그런 이야기 나오거든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의 식구들이나 아내들은 기가 찰 거예요. 이 남자 믿다가 노상에서 독수리 먹잇감 되잖아요.

갈 바를 알지 못하는데 ‘다 왔다.’ 하고 차에서 내려 보니까 그곳에 장차 메시아가 잉태할 자리, 메시아가 출생할 자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접선지점, 간첩들 접선하듯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본토 아비 집을 떠나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지점으로 이렇게 접선을 시켜주려고 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 들으면 ‘목사님, 그 장소 어딥니까?’ 하는데, 그 장소가 아니고 그 아브라함 몸이 그렇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어느새 자신의 몸이 변화가 생겼어요. 지식을 못 낳는 부모가 자식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소멸한다 하죠. 모든 게 그래요. 부모, 남편과 아내가 자식 낳고 난 뒤에는 남편과 아내는 소멸돼서 죽어버려야 돼요. 왜, 자식을 낳았으니까. 사랑의 열매를 낳고 부모는 늙어 죽어야 됩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식 이예요.

제가 가락에서 그런 강의 했습니다마는 아담이 자식 낳고 죽었다 하면 처음에는 조명이 아담을 비추다가 아담이 죽고 난 뒤에 아담은 꺼지고 그 다음에 비춥니다. 또 자식 낳고 죽으면 꺼지고 그 다음에 비춥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항상 조상이 남긴 자식에다 초점을 맞춤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새로운 언약을 집어넣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불렀는데 아브라함을 꺼져줘야 돼요. 사라져줘야 됩니다. 뭘 낳고? 자식을 낳고 사라져야 돼요.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아! 메시아 보고 싶다.’ 포대 들고 이불 펴고 눕는다고 메시아 오는 것이 아니고 메시아는 내 몸에서 생겨나는 거예요. 내 몸에서 생겨난 자식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 건데 그 변화가 장차 메시아가 올 때 ‘아! 진짜 메시아구나. 아! 저건 가짜 메시아야.’ 구분되는 변화가 아브라함 자식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출애굽 하기 전에 요거부터 이야기합시다.

출애굽이 뭔지 설명하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뭐가 일어났느냐 하면 이삭이라는 자식을 낳거든요. 낳고 난 뒤에 이삭을 잡아야 돼요. 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냥 오너라.‘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그 사랑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지 자식을 죽입니까? 그것도 이쁜 자식을! 죽이려고 자식 낳은 거 아니거든요. 차라리 나는 죽고 니는 살라고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을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아, 내 칼에 좀 죽어줘.‘ 이런 아버지는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거예요. ‘설마, 진짜 하나님이, 자식 죽이는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어?’ 그런 하나님이 하나님이거든요. 아버지가 자식 죽여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지 그 외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나 좋아라 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그런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아무도 못 믿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안 믿을 줄 알고 시험한 거예요. ‘아브라함아, 네 자식을 잡아라.’ 잡았습니다. “이제 네가 너 자신을 믿지 않고 내 뜻을 믿는 줄 이제 알았다.‘ 하고 수풀에 있는 수양을 끄집어내다가 대신 죽여서 자식 살리고 다시 조명 시설은 아버지는 끝나고 그 다음에 조명시설은 이삭에게 초점이 모입니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예요. 아브라함에게 변화를 야기 시킨 하나님, 그 다음에 이삭을 낳게 되면 이삭에게 조명을 비춰서 이삭으로 하여금 도저히 인간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사태를 일으키시는 하나님, 그 다음에 야곱을 낳게 되면 야곱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은 자식으로 만들어 놓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뭉쳐져서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서 건져냅니다. 건져낼 때 그 세 가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게 한 조, 한 세트거든요. 그 세트에 담긴 내용을 한꺼번에 어떤 존재에다 다 담아버립니다. 그것이 뭐냐,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은 죽고 어린양처럼 살아야 될 사람들로 새로 생겨난 그 집단이 이스라엘 집단 이예요. 본인들은 자신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모세가 그들을 홍해 가운데로 데려갈 때는 그들은 옛날 애굽을 생각해서 ‘이제 죽었다. 이제 죽었다. 우리는 기어이 애굽에서 탈출 못하는구나. 우린 죽었어. 애굽은 우리보다 더 세.’ 하고 낙담을 하고 있을 때 홍해 강물이 열리죠. 이런 것은 예상도 못한 겁니다.

우리 성령 받은 성도가 자신에 대해서 너무 무시해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너무 무시해요. ‘무시하지 말라.’ 해서 세상적인 욕망을 원하는 걸 무시하라는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는 모든 걸 잃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쓰임 받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의 어린양이 담겨있어서 어린양이 이끄는 대로 가기 때문에 세상 문은 열리지 않더라도 섭섭한 이야기지만 출세 문은 열리지 않고 결혼 문은 열리지 않더라도 천국 문은 자동문입니다. 쫙쫙 열려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자기 사랑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중요하느냐 하면 어린양, 아들을 바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 바친 그 사랑의 능력이 얼마나 센지 말도 안 되는 우리를, 사랑 때문에 그 아들 사랑을 근거해서 우리를 건지는 겁니다. 우리가 귀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제 401번을 타고 오는데 여자는 50만 넘어도 왜 그렇게 자기 전화 하면서 고함을 지르는지, 식당에서 고함지르고 하면 싫거든요. 안 듣고 싶어도 다 들려요. ‘그래? 야, 똥집, 맛있더라, 똥집.’ 하고 있거든요. ‘아이고, 그거 애 사줘야 되는데, 그 똥집 먹으면 좋을 텐데. 돈을 얼마 안 가져갔잖아. 다음에 니 그 똥집 먹으러 가라.’ 똥집 맛있다고 전화하는 거예요. 무슨 똥집인가 했더니 닭똥집 이예요. 엄마는 어디 가도 맛있는 거 보면 자식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화 붙들고 401번 버스 안에서 전화하는 거예요. 똥집 못 사서 미안하다고.

지금 출애굽이 우리 숙제가 아니고 구원이 우리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내가 해결해야 되고, 내가 어떻게 구원받아야 된다는 그것은 백날 해봐야 되지 않고 주님께서 쫙쫙 문이 열려요. 열리는데 우리 예상을 빗나가서 문이 열립니다. 어떻게? 여기 오늘 본문에 보면 4절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 소년이 누구냐 하면 스가랴입니다. 스가랴가 어릴 때 BC537년 어릴 때 1차 귀환 때 다시 돌아왔거든요. 역 출애굽 됐거든요. 역 출애굽은 출애굽 한 상황을 그대로 담아서 내려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역 출애굽 하면서 아주 처참하게 망가진 모습으로 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우리가 귀하고 하나님의 숙제가 우리라면 우리는 예쁘장하게 예쁘게, 예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질 거야. 그렇지?‘ 하는데 그거 반대입니다.

BC 605년에 그들은 자기 땅에,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바벨론에 1차포로 잡혀가고, 2차가 BC 597년에 가고 3차가 BC 686년에 가고 4차가 BC 581년에 잡혀 감으로서 완전히 이스라엘 망합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에 갔는데 더 센 애굽, 더 마지막 애굽, 그리고 더 센 나라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바벨론, 그 나라에 다시 잡혀 가는 겁니다. 처음에 갈 때는 ‘예루살렘 하나 건지자.’ 하다가 두 번째 역 출애굽이 되면 하늘나라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처참해도 손해가 아니에요. 바벨론 강가에서 그렇게 울어도 “나중에 웃음으로 돌아오리라” 돼 있으니까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처참하게 망가져도 우리는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역 출애굽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웃어야 된다 이 말이죠.

처음에 갈 때는 어린양을 잡았거든요. 두 번째 다시 돌아올 때는 사람 잡습니다. 누구? 이스라엘 잡죠. 이스라엘 잡아도 안 되면 누가 오느냐? 이스라엘 사람을 잡습니다. 다요? 아니요. 그 중에 한 사람, 누구 말입니까? 이스라엘 속에 섞여 들어온 사람, 유대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인 것을 여러분 잠시 잊어버렸죠. 예수님은 혈통이 다윗의 혈통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서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마리아 이야기 잠간 할게요. AD 431년에 에베소 회의라는 공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회의를 결정했어요. 교회가 어떻게 했느냐 하면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이단이다.‘라고 결정했습니다. 이게 참 말이 됩니까? 마리아가 무슨 하나님의 어머니입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다가가기 좀 난처하고 미안스러우니까 인간적인, 쉽게 말하면 박 근혜라고 보면 돼요. 인간적인 여자가 있어서 예수님은 너무 거룩하니까 우리 인간 편에서 내 사정을 들어줄 어떤 여인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해서 마리아 세워놓고 전부 다 마리아한테 부탁을 해요. 부탁을 하게 되면 마리아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어머니거든요. 자기 아들을 무릎에 눕힌 사람,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에 나와요. 어머니가 죽은 아들 예수를 보고 슬퍼하는 그림 이예요. 예수님이 아들이니까 빽을 쓸 수 있는 거예요. ’아들아. 저기 알지? 쟤가 이번에 성적이 안 올라서 해줘라. 응?‘ ’알았어요. 알았어요. 아이쿠, 내가 그 인간보고는 안 하지만 엄마 말 듣고 내가 들어줄게요.‘ 이러한 장치를 만든 것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그래서 절에 가는 사람은 부처 상 보면 이렇게 절 하듯이 성당 가는 사람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리아 상보고 성호 긋고 난리 나요. 그걸 마리아의 신심으로 우리가 언덕을 밟는다는 교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맞는데요. 그 마리아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죄인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유대인 이예요. 그 유대인으로 몰래 섞여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을 다 잡지 않고 새롭게 만들어 질 출애굽 해야 되니까 새롭게 만들어 질 이스라엘을 앞당겨서 대표적 이스라엘로 예수님이 나서서 어린양으로 죽게 되게 되면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이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구축이 됩니다.

숫자가 상당히 많습니다. 상당히 많기 때문에 4절에 보면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사람이 너무 많아서 주위에 울타리를 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 특징이 있는데 5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불로 성곽에 휘발유로 불 붙여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감히 그 진노의 불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천국은 좋은데 가는 길은 불붙어 있어요. 에덴동산은 좋은데 생명나무 가는 길은 불이 붙어 있습니다. 불붙은 천사가 경비를 서요. 3교대가 아니에요. 24시간 계속해서 생명나무 못 따도록 에덴동산을 보호하듯이.

주님께서는 이 너무도 귀하고 귀한 동네가 천국이기에 예수님 모르고 들어오는 법이 없도록 철저하게 관리하십니다. 예수님 아는 우리끼리의 나라. 동산,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어요. 내 아들이 죽는다는 말은 내 아들, 아들 자손에게 분명히 메시아가 오는데 참 보고 싶어 했습니다. 내 아들 후손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요한복음 8장에 보고 기뻐했다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는 이 소리나 오늘 본문에 스가랴가 천사를 만났다는 소리나 아브라함이 이삭 낳기 전에 천사 세 명 왔다는 그런 내용들이나 이건 일반적으로 밥 먹고 살고 취직하고 국정원 뭐가 어떻고 조선일보 이야기 그러한 유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숙제와 작업에 그런 이야기가 섞이도록 하지 맙시다. 우리 세상은 따로고요. 그쪽 성경 이야기는 그쪽을 비행기 이륙하듯이 따로 떠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예루살렘은 돈 주고 여행사 가서 가라 하면 가는데 그 예루살렘이 성지가 아니고 바로 주의 말씀이 이런 초월적인 말씀이 믿어지는 현장이 제 2의 출애굽 현장 바로 우리의 현장입니다. 어린양 때문에 살았다는 거, 초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여전합니다.

마지막에 8절을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눈동자! 눈도 아니에요. 눈 찢으면 사람이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눈 정도가 아니고 눈동자, 그러니까 너 안에, 성도 안에 그리스도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어린양 때문에 애굽을 이겼는데 이 세상을 이긴 분이 우리 안에 있다 이 말이죠. 너희 안에 계신 분이 세상을 이겼느니라. 요한복음 16장 33절 끝에 나오죠.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안에 계신 분이 세상을 이겼느니라. 이거 천사의 소리로 들어주시면서 평소에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적으로 많은 사람이 넓은 길로 그게 멸망의 길인 줄 모르고 무턱대고 남 뒤꽁무니 따라가면서 남 모방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중에 우리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통수를 향하여 날라 온 천사의 소리, 앞의 일은 이렇게 될 것이고 미래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그 소식, 바로 우리 당사자보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 돌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4강-슥2장1-9(천사와 예루살렘)130915-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