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하나님의 인도하심(겔20;40-44)이근호130925

아빠와 함께 2013. 9. 25. 21:31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스겔 20: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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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9-25 21:25 
                           하나님의 인도하심

2013년 9월 25일                     본문 말씀: 에스겔 20: 40-44

(20:4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20:41)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흩어진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여러 나라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20:42) 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20:43) 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

(20:44)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약은 뭔가 이동하고 있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나와서 바벨론 나라로 포로잡혀 가고 거기서 다시 나와 약속의 땅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하나님께서는 책임지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신약은 이런 이동이 없습니다. 특정 지점이나 특정 시간을 준수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냥 매일같이 되풀이되고 제자리 뛰기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난다고 하십니다. 어디 이동하지도 않습니다. 특정 날짜를 준수하지도 않습니다. 일상의 반복적인 삶이 곧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으로 전달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구약의 말씀이 어떻게 반복적인 일상의 삶 속에 녹아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문제를 더욱 간추려 정리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어떻게 오늘날 성도들의 반복적 삶 속에서 완성된 형태로 정리할 수가 있을까요? 구약에 나오는 이동하는 이스라엘 모습은 곧 ‘하나님의 이름’의 이동성으로 야기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되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범죄한 그 땅에서, 다른 땅으로 이동시키고, 그 땅 마저 정죄하므로서, 정죄받을 땅에서도 죄가 없어진 백성만을 자기백성으로 간주하고 죄가 없는 땅으로 주의 이름이 이동되는 겁니다. 이러한 이동성이 과연 신약 시대에 실제로 완성했느냐를 살펴봐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5:2-3에 보면,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신약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동성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이동성은 현실적으로 설정이 불가능합니다. 구원이 마무리된 상황을 구약적 이동성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해내신 그 모든 것이 이 현실세상을 낯선 구조로 변형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한 쉬운 예를 들면, 바다 속에다 아쿠아리움을 만들어놓은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아쿠아리움은 해저 테마수족관을 말합니다. 투명한 터널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투명한 벽 너머로 사방팔방, 물고기들이 헤엄치면서 바닷속 세계를 마음껏 펼칩니다. 관람객들은 여유롭게 그 투명한 터널을 지나가면서 바닷속 전부를 파악할 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표현은 이동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요한계시록 관점으로 전환시켜 보면, 성도는 어디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투명한 터널 안에서 영원한 반복적으로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터널 안에서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은 없습니다. 이사야 41:4을 보면,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처음과 나중이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곧 주의 이름 안에는 시간에 따른 자체적인 달라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동일한 원칙과 원리로서 구원의 방정식을 적용시키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 적용에 따라 바깥에 다양한 변화를 야기시킵니다. 

예수님이 바로 오실 ‘주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미리 에스겔 시대에 작용해서 ‘주의 이름’으로 행하신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이든 에스겔 당시에 포로잡힌데서 귀환한 백성이든 간에 동일한 의식을 지니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남입니다.

바다 속 아쿠아리움 속에 거니는 관람객들처럼, 주변을 짓누리고 있는 그 깊은 바닷물은 무게는 곧 하나님의 진노의 무게로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투명한 유리벽을 통해서 온갖 바다고기들이 뛰놀고 헤엄치는 것을 분명하고 늘 생생하게 느끼면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성도의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진노임을 알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난무하는 세상 한복판을 성도는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홀로 있는게 아닙니다. 그 진노로부터 막아주시는 ‘주의 이름’과 함께 있습니다. 투명한 터널 속 성도 곁에는 바다 속의 해초나 물고기는 전혀 없습니다.

단지 안전한 ‘그리스도 십자가 안’일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구약 말씀을 대단히 오해했습니다. ‘주의 이름’이 뭔지를 몰랐기에 ‘말씀의 완성형’도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본국으로 귀향해서 소산물의 첫열매를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면서 받는다는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첫열매’란 예수님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받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받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본국 귀향은, 예수님(주의 이름)의 일대기를 통해서 볼 때, 곧 죄의 세계에서 의의 세계로 귀향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에서 생명으로 귀향입니다.

요한복음 5:24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소산의 첫열매를 드린다든지 특정 지점으로 이동해서 주거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신 일이 아닙니다.

즉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이 세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특별한 영적 영역을 따로 마련하시는 것에 성공하시고 바로 그 영역 속에서 오늘 에스겔 본문 말씀을 다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 외에 아무 것도 없는 자에 한해서 마태복음 7:22-23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온통 저주받을 짓들로 충만함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