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강-에스겔20장 37-39(언약의 줄)13091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0장 37절에서 3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0:37-39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너희 가운데서 패역한 자와 내게 범죄한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찌라 그들을 그 우거하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고 이 후에도 그리하려무나 마는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찌니라.”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할 때 우리 귀에 들려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들려오는 사람의 음성으로,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지자가 되었든 제사장이 되었든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사람의 음성으로 분명히 들었을 겁니다. 글씨를 봐도 사람의 글씨거든요. 그럴 때 우리 육신은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그렇게 우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다는 것이 우리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마당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외치는 선지자, 오늘 에스겔 같은 선지자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는 억지를 부리게 되지요.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있기는 뭐가 있어? 없는 거야.’라고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니까 그 말씀을 가지고 ‘한 번 지켜봐?’ 하고 딱 할당을 하고 놓아야 하는데 적당히 놓을 자리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서는 안 믿겠다는 것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가 머릿속에 기억을 하고 외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외부를 향하여 ‘나 신자 맞습니다.’ 하고 꾸미기 위한 상식정도밖에 안되지요. 학생들이 시험 치지 않으면 공부를 안 합니다. 공부를 했다는 것은 시험 치기 위함이지요. 시험치고 난 뒤에 공부한 것 다 잊어버리지요.
하나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다 보니 평소에는 ‘하나님이 있기는 어디 있어? 하나님이 없는 것이 맞지.’라는 것이 기본으로 깔려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한 번 들어봐? 그냥 지식으로 취미생활 하듯이 끌어 모아 볼까?’라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도 그렇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없다고 자부하고 장담하는데 어디서 하나님이 과연 계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가?
이 이야기는 성경내용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내용인가, 라고 묻기 이전에 그 말씀이 들어오기 이 전에, 근본적으로 우리 마음의 터전에 대해서 뭔가 다시 한 번 정리해야 될, 말씀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다시 마련해야 될 문제에 속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이 어떤 조치를 해도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여전히 우리 밑에서는 ‘하나님은 없는 거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있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없었어.’라는 것이 강렬하게 우리 마음에 꿈적도 않고 지금도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 점을 하나님도 모를 리가 없거든요. 우리 인간들 세계에서 인간들 말고 그 외에는 누군가가 없습니다. 인간들만 있고 그 외에는 없다고 봅시다. 그 인간 외에 아무도 없다면 결국 약속의 땅이라는 것도 없지요. 그러면 천국이라는 것도 없는 거예요. 가봐야 안다고 하는데 가보고 말 것도 없어요. 이 땅에서 인간들 밖에 없다면 죽으면 죽은 것으로 흙이 되고 그것으로 끝나는데 성경 에스겔을 보거나 구약성경을 보게 되면 그 없다고 여기던 하나님이 등장을 해요.
그러면 아무도 우리 외에는, 인간 외에는 없다고 여겼는데 누군가 등장하면 그 등장함과 동시에 약속의 땅도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누군가 없다고 여긴 분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도 없고 천국도 없는 거예요.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이라 하는 것은 그냥 인간들이 허전하니 만들어본 가상의 세계지 실제로 성경에서 말하는 그 천국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이 꾸며도 그것은 소용없어요. 천국이 뭐냐가 먼저가 아니라 누군가가 먼저 나타나는 것이 먼저고 그 나타난 분이 천국을 몰고오는 식으로 천국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세례요한이 등장했습니다. 자 우리가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입니다.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그런 현상, 하도 그 당시에 이단들이 많기에 “이게 어디서 또 사기를 치고 있어.” 해서 조사관을 보낸 거지요. 보내보니 과연 어떤 요상하게 생긴 사나이죠. 노숙자도 아니면서 집도 없고 이상스런 털옷을 입은 사람이 등장했는데 겉모습은 엘리야 같아요. 물론 엘리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어쨌든 그런 행색으로 광야에서 외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고 했습니다.
그 세례요한 빼놓고 아무리 봐도 거기에 천사나 하나님이 안 나타납니다. 그냥 어떤 아저씨 하나 나타나서 고함지르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바리새인을 보고 하는 말이 “너희가 바리새인이구나. 어떻게 너희가 나에게 와서 세례 받고 이 마지막 심판을 이기려고 왔는가? 이 독사의 새끼들아.” 하고 욕을 해대는 거예요. 그러니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기가 찬 거지요. 기독교에서는 그 세례요한이 선지자라고 아무리 우겨도 그 당시 사람들이 답사를 해서 조사를 해 보니까 선지자라고 증명을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뭐도 없는가, 하면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그것도 사기가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다고 요단강물에 들어가는 것 보게 되면 참 안타깝지요. “사람들이 저렇게도 무지한가? 저 미친 인간 하나 등장해서 외친다고 다 물속에 빠져서 세례 받겠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례요한에 대해서 선지자중의 선지자라고 이야기했지만 막상 정상적인 머리를 가진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같은 배운 사람들 입장에서는 혹시, 하다가 역시, 사기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분위기상 기독교다, 하지만 더 깊이 있게 들어가 봐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뭐냐 하면,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말씀이 진실로 맞다면 하나님이 진짜 등장해야 돼요. 하나님이 등장해서 막대기를 들고 와야 됩니다. 막대기를 이렇게 들고 한 사람씩 지나가게 하는 거예요. 건강상태, 영혼상태, 체크 하면서 합격, 불합격, 불량품, 상품가치가 되는 것, 당도 좋은 것, 당도가 떨어지는 것, 이렇게 품질 검사하듯이 해야 되고 그 다음에 본문대로 하려면 그냥 막대기만 들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되고 밧줄도 하나 들고 와야 돼요.
그 밧줄에다 언약이라고 써서 그 밧줄로 하나님이 손수 사람들을 묶든지 하게 되면 우리는 ‘아,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말씀도 진실이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하는 말이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했을 때 이 말이 진짜라는 것을 우리가 납득이 되도록, 우리가 설복 당하도록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 봐라 하는 식으로 에스겔에게 나온다면 에스겔이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오늘 본문에서 제가 자꾸 문제를 던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것이 어떤 의미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설복되고 납득이 되도록 요청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일체 하나님께서는 호응해주지 않는 식으로 하나님이 다가오신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나님은 언약중심이지 우리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에요. 그 이야기가 어디 나오는가 하면, 39절에 나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고 이 후에도 그리하려무나.”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선지자를 통해서 말을 할 때 “에스겔 선지자야, 참 좋은 말을 했는데 내가 아무리 네 말을 들어봐도 하나님 말로 안 들린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믿도록 해 달라.”
이렇게 에스겔에게 요청하면 에스겔이 하는 말이 믿기 싫거든 안 믿으면 된다는 쪽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의 줄, 언약의 줄이에요. 어떤 약속이 왔을 때 그 약속은 나의 구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이것은 언약을 모독하는 거예요. 언약은 우리의 구원에 도움 되라고 주어지는 언약이 아닙니다. 언약은 언약만 그대로 작업이 진척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서해안 갯벌이 있는데 그 갯벌에서 조개를 줍고 있다 합시다. 그런데 진짜 큰 조개를 발견했어요.
그 조개를 파서 주워올리려 하는데 마침 밀물이 밀려옵니다. 그럴 때 “밀물아!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이것만 줍고 얼른 빠져나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 하면 밀물이 “얘들아! 잠시만요, 이분 조개 줍고 가실게요.” 하고 밀물이 멈춥니까? 밀물은 그냥 덮치지요. 그냥 덮쳐서 조개 줍고 있다가는 물에 빠져 죽어버립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덮는 이불 같아서 우리가 꼼지락 꼼지락 무슨 핑계를 대고 무슨 이유를 대도 밀물처럼 우리를 덮쳐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저기 파도가 오네. 파도 밀려온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노아가 나오거든요. 노아가 방주를 만듭니다. 누구 좋으라고? 사람 좋으라고 방주를 만든 것이 아니에요. 노아가 방주를 뚝딱뚝딱 만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이고 노아식구 외에는 아무도 방주에 들어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언약이라 하는 것은 사람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람 마음을 설득하기 위해서 언약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노아방주가 제대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 언약이 노아언약이라면 본문에 나오는 언약의 줄도 마찬가지로 노아 언약과 같은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겁니다.
37절을 다시 보면 “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이 말은 언약을 가지고 누가 구원받을 사람인지 누가 구원받지 못할 사람인지를 내가 골라내겠다는 겁니다. 체로 거르는 것 알지요? 체로 걸러서 건더기만 건지고 나머지는 빠지는 것, 국수 건지는 체 있잖아요. 체로 국수 건지면 국수는 건지고 물은 빠지듯이 언약은 일종의 국수를 건지는 체라고 보시면 아주 쉬워요. “제발 섞이지 말아야 할 인간은 좀 빠져줘.” 그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합격이고 누가 빠집니까?”라고 언약보고 질문해 대면 안돼요.
그것은 언약에 대해서 아직 모르기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언약의 국수체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기에 어떤 사람은 빼버리고 어떤 사람은 건집니까? 대체 언약은 뭐로 만들어졌습니까?” 이런 질문을 해야지 언약에 합격한 사람은 누구이며 불합격하는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되지요. 하나의 예를 들면 예정론이라는 것이 있어요. 예정론이 뭐냐 하면, 누가 구원 될지, 누가 구원되지 않을지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사람 태어나기 이전부터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은 따로 만들고 절대로 구원되어서는 안 될 사람도 따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되지 않을 사람이 아무리 구원받고자 애써도 그 사람은 결코 지옥가야 되고 천국 갈 사람은 아무리 거부해도 기어이 천국 간다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만 건진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그 예정론을 그렇게 설명할 때 좀 문제가 있어요. 여기 막대기가 있습니다. 이 예정론은 시작에서부터 하면 맞는데 막대기 끝에 와서 예정론을 따져버리면 이것은 예정론이 아니고 운명론이 되어버려요.
이것은 자기입장만 생각하는 거예요. 처음에 예정론을 출발할 때는 모든 구원의 권한은 예수님한테만 있다고 출발하기 때문에 예정론 자체가 별 문제가 없는데 예정론이 어디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예정론 끝부분에서 “왜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사람을 지옥 보냅니까?”라고 이 끄트머리에 와서 항의를 받게 돼요. “불합리합니다. 구원받으려고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구원 안 해준다는 것은 처음부터 사기에 불과합니다. 처음부터 구원이 되고 안 되고, 이게 정해졌다면 처음부터 구원할 사람만 건지면 되지 구원 되지도 않을 사람에게 예수 믿으면 구원 된다고 언급을 하는 그 자체가 인간을 기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야기한 겁니다. 따라서 예정론을 파기시키든지 아니면 십자가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을 파기하든지 어느 한 개를 파기해야지 둘 다 있으면 불합리합니다.”라고 끄트머리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끄트머리에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구원 받느냐, 자기한테 관심이 있기에 그런 오류가 발생되는 겁니다. 성경을 볼 때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고 생각하는 그 자체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요구할 권리가 처음부터 없어요. 왜냐, 생명나무에서 쫓겨났기에 쫓겨난 이유만 알면 되지 쫓겨났는데 다시 들어갈 욕심을 낼 자격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아, 우리가 이렇게 쫓겨났구나.’ 그 다음에 건지고 안 건지고는 하나님의 소관인데 쫓겨난 입장에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은 쫓겨난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그러면 구원자체가 씩씩거리면서 구원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안돼요. ‘하나님께서 날 쫓아냈지만 내가 착해서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겠다.’ 이렇게 나온다면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반발하는 것이 되기에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면 37절에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할 때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지를 않았어요. 다만 선지자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은 ‘인간의 말이잖아.’라고 끝나버리면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지요.
중요한 것은 여기서부터 입니다. 이 언약이 실효성이 있다는 거예요. 21세기에 실제로 이 언약이 작용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국수체로 걸러진 국수가 누구고 빠져나간 물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지 말고 “국수 체 자체가 뭘 로 만들어졌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중요해요. 신약에서는 국수체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살과 피,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했어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국수체가 새 언약이기에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분명히 해댔는데 신약만 이야기하니까 오해의 소지가 굉장히 큽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해놓고는 전혀 언약적인 체험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구약부터 언급해서 구약의 언약 체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통해서 그것이 신약의 십자가만이 사람을 건져내는 언약이 되는가, 이렇게 설명해야 옳은 겁니다. 그러면 구약의 언약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역대하 12장에 보면 거기 르호보암이라는 왕이 있습니다. 르호보암이라는 왕은 이스라엘이 나라가 둘로 나뉠 때 남쪽의 왕인데 남쪽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있어요. 예루살렘성전이 남쪽에 있다 보니까 나라가 둘로 나뉘고 난 뒤에 북쪽에 있던 제사장들, 레위 인들이 전부 다 남쪽으로 이사를 왔어요. 북쪽에서는 제사장 아닌 사람, 레위인 아닌 사람을 함부로 성직자로 만들었기에 그들이 있을 곳이 없어서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남쪽에 있는 르호보암 왕은 북쪽에서 내려온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잘 대우해서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 종교를 유지하게 했지요.
그런데 3년 동안 여호와 섬긴다고 하다 보니까 나라가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12장에 들어가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라고 되어 있어요. 제가 문제를 뭘 던졌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는데 언약으로 건진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국수를 건지는 국수 체라고 했어요. 국수 체는 무엇으로 만듭니까, 라는 질문을 했고 구약 적으로, 신약은 십자가지만 구약 적으로 어떻게 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역대하 12장 1절에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게 국수 체입니다. 르호보암 이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니까 3년동안 강성하게 해줬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맞다. 따라서 내가 이제 이정도 힘을 가졌으니 더 이상 하나님을 빡세게 믿을 필요가 뭐가 있는가? 이 정도만 해도 나는 강하니까.’ 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습니다. 르호보암이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았어요. 남쪽이고 북쪽이고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게 된 겁니다.
하나님을 버리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그 시대나 이 시대의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언약적인 체험입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희들이 신앙생활 하게 된 것은 기적인 줄 알아라.”라고 다시 한 번 우리를 언약 적으로 건져내는 국수체입니다. 우리는 자꾸 사회를 원해요. ‘나 혼자 믿으니까 나도 교회 안 갈래. 교인 얼마 되지도 않는데 나 혼자 믿으니까 심심해서 못 믿겠다. 다 안 믿는데 나도 안 믿지.’라고 나오는 그 버릇이 여로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니 율법을 버렸다, 에 해당되는 그 사항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르호보암에게 애굽에서 시삭이라는 왕의 군대를 보내서 예루살렘 빼놓고 남쪽의 유다를 다 점령케 했습니다. 그때 스마야 선지자가 왕에게 말합니다. “왕이여, 나라꼴이 이게 뭡니까?” 하니 왕이 “나라꼴이 왜 이렇게 되었지?” 왕이 하나님을 버렸으니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 소리를 듣고 르호보암왕이 스스로 겸손하니 시삭 왕이 가져갈 것을 가져갔지만 나라가 완전히 폭삭 망하지는 않도록 조치를 하신 거예요. 자, 그럴 때 르호보암왕 앞에 스마야 선지자가 서 있습니다.
누가 봐도 스마야 선지자는 인간이고 르호보암도 인간이에요. 하나님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르호보암은 그 스마야 선지자인 인간이 하는 말을 인간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이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난 것으로 그렇게 믿었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은 스마야 선지자가 말을 잘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설득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르호보암에게 먼저 다가와서 그 마음과 영혼에 작용을 한 거예요. 이것은 본인만 압니다. 남들은 다 예수를 안 믿어도 본인은 예수를 믿는 이유가 주의 영이 그 사람을 다루었기에, 작용했기에 성경말씀 전체가 예수님의 말로 믿어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언약체험입니다. 이 체험이 없으면 그 사람은 언약 막대기로 인하여 추방당합니다. 언약의 줄로 묶이지를 않아요. 언약바깥에 쫓겨나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까 설교했듯이 천국이란 우리가 천국가고 싶다고 해서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나타나야 돼요. 없다고 여기는 분이 나타나서 나를 완전히 붙잡아매야 됩니다. 나에게 어떤 작용을 해야 돼요. 작용을 하게 되면 어린애가 이야기하든지, 집사가 이야기하든지, 장로가 이야기하든지, 길 가는데 뭔가 바람에 날리는데 뭔가 보니까 찢어진 성경 요한복음 한 장이 얼굴에 와서 붙는데 그걸 떼어서 보니 그 말씀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 말씀이 단지 인쇄된 종잇조각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라고, 언약적인 체험이라고 받아들이면 그 사람이 바로 그 시대의 언약의 체, 국수 체가 되는 거예요.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신앙생활 못하겠다고 하지 마세요. 믿는 사람 적어서 나도 그만 안 믿겠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환난, 곤고, 핍박, 그런 것이 심해서 못 믿겠다, 그런 소리 할 수가 없어요. 그런 핑계를 댄다는 자체가 “나를 설득해 봐라. 나를 납득시켜 봐라.” 그런 소리 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그냥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 상식이나 지식을 건져서 교인행세 하려는 하나의 사기에 해당되는 겁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었어요. 그때 1500년 전의 시대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어요. 마치 김유신 장군이 있는 것 같고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숲속 뒤에서 장군들이 활을 쏘는 것 같고 박물관을 보니 지금도 진짜 임금님이 살아 있는 것 같이 느꼈어요. 그 옛날 신라의 느낌이 팍 들어서 옛날 조상들이 이렇게 살았구나, 싶어서 매우 감명 깊었어요. 그런데 46년이 지나서 경주를 가 봤더니 황남빵만 생각나요.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초등학교 때의 그 느낌은 환상이었어요? 그리고 황남빵 사먹는 그것이 아주 실제적인 겁니까?
둘 중에 어느 것이 진짜냐 하는 거예요. 둘 다 아니겠지요. 왜냐, 그 나이 때에 자기의 세계관에서 자기가 꾸며낸 상상의 세계였습니다. 인간은 이렇습니다. 항상 자기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제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어떤 시부모가 서울의 어떤 자녀분이 있는데 그 자제들이 맛난 것 대접한다고 시골의 부모님을 초대했어요. 그래서 잘 대접받을 마음으로 캐리어 끌고 서울의 자녀들 사는 아파트로 갔습니다. 갔는데 첫날부터 가자마자 변변치 않은 것을 몇 가지 내 놓고는 “내일 잘 드실 것이니 오늘은 그냥 김치하고 드세요.” 했습니다.
배가 고프지만 내일 잘 해 준다는 소리 듣고는 그냥 먹었는데 과연 드디어 그 날이 왔어요. 그래서 음식을 거판하게 차렸을 줄 알고 가보니까 달랑 월남 쌈, 쌀로 얇게 만든 종잇장 같은 쌈이지요, 달랑 그거 석장으로 끝이었습니다. 보세요. 그 시부모가 아들내외가 잘 해준다고 할 때는 뭔가 상상을 한 거예요. 실컷 상상해서 해외여행이나 갈 때 끄는 캐리어까지 끌고 갔는데 며칠은 고사하고 하룻밤 자고 당장에 다시 내려왔어요. 차비가 아깝지요. 월남쌈 석장, 달랑 그거 먹었습니다.
사람의 체험이라는 것은 항상 자기체험이에요. 자기체험. 천국은 이렇고 지옥은 이렇고 나는 신앙생활 잘하고, 어쩌고저쩌고. 그러나 진짜 언약이 와버리면 지금까지 내가 상상한 하나님, 내가 생각했던 그 말씀, 전부 다 그것은 가짜요 사기고 거짓이라는 것이 다 노출됩니다. 딱 느끼는 것은 뭐냐,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언약을 위해서 자기 언약을 가지고 나에게 왔다.’는 거예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바로 천국은 그 언약 안에 있는 겁니다.
내가 가고 싶은 나라가 천국이 아니고 하나님은 언약체험을 하게 만드는 그 안에 진짜 우리가 몰랐던 천국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중요하고 하나님이 중요하지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이 땅에서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계획에 의해서 진척되는 것이지 나 살기 위해서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이용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라는 겁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나 성공하기 위해서, 나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 거론하는 것은 내가 어릴 때 상상했던 경주, 아들이 잘해준다 하니 실컷 상상하다가 기껏 월남 쌈 석장 줄줄 몰랐던 그 것, 자기가 스스로 상상하고 오판한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구원 될 자는 강제로 건져주신다는 그 사실 하나에 감격하고 더 이상 내 인생이라는 것은 없고 주께서 이끄시고 만들어 가시는, 언약대로 이끄시는 인생이라서 내 안에는 주님의 언약만 있는 거예요. 그래서 회개하는 르호보암처럼 ‘하나님은 누가 뭐래도 살아 계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있는 것은 문젯거리도 안 되고 주님이 살아 있어서 말씀 주신다.’는 것, 그 말씀에 의해서 용서받으면서 오늘도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의 말을 듣든 누구의 말을 듣든 원체 우리 마음이 강퍅해서 하나님은 애초에 없다고 장담하고 있는 우리, 이 시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하여주옵소서. 우리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살아계신 채로 우리에게 덮치니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인생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