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강-에스겔20장 30-32(열조의 풍습)13091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0장 30절에서 3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79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0:30-3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열조의 풍속을 따라 스스로 더럽히며 그 모든 가증한 것을 좇아 행음하느냐 너희가 또 너희 아들로 화제를 삼아 예물로 드려 오늘날까지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열국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숭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성경에 나와 있는 이 모든 말씀은 말씀 자체가 폐쇄적인 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내용이 있든지 간에 그 내용에 대해서 귀담아 듣는 사람은 따로 있고 성경에서 어떤 내용을 이야기하든지 간에 그것을 허투루 들어버리고 무시해도 되는 말씀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렇게 선지자가 이야기할 때는 ‘아, 이 말씀은 정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본뜻이 맞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말씀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라고 믿는 사람을 겨냥해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렇다면 그 자체는 하나의 폐쇄적인 집단입니다.
마음이 닫혀서 폐쇄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유도했고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그 폐쇄적인 집단 안에서 효용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이 어떤 내용이든지간에 이 말씀을 가지고 어떤 사람에게 다가갔을 때 ‘그거 뭐 기독교에서 하는 이야기네.’라고 되어버리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이 안 된 사람이고 ‘이것은 나에게 주신 말씀이네요.’라고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곧 구원받도록 작정이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여기고 교회니 성도니 주장하면서 이런 성경말씀에 대해서 왜 무심하고 관심도 없는가?
그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아직도 자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여기기에 그렇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내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말씀 같은 거 필요 없고 이거 안 봐도 현재 내가 가진 힘으로 버틸 수 있다.’라고 생각하기에 이 말씀을 줘도 비아냥거리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걸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가 죽어가고 있을 때, 병원에서 곧 죽는다고 했을 때 에스겔 이 본문의 말씀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 때는 아주 심각하지요. 사느냐 죽느냐의 마지막 테스트를 해야 되니 심각한데 아직 팔팔하고 병원에 누워있지도 않고 바이오 만나서 계약 체결할 것도 많고 전셋집 수리도 해줘야 하고, 지금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 말씀 들이대게 되면 “바빠! 귀찮아, 귀찮아.”하고 차버릴 것이라는 말이지요.
구약성경, 에스겔이나 예레미야, 이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말은 안해도요, 참으로 난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은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섬겼다는 그 점에 대해서 잘 납득이 되지를 않아요.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우상을 섬겼을까? 이 점에 대해서 좀 진지하게 생각들 해야 되는데 ‘아이고, 그들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그들에게 물어보세요. 믿음이 없는지. 여호와를 잘 섬기지요. 그런데 구약, 특히 선지서의 80퍼센트 이상이 우상섬기지 말라는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말씀, 창세기, 레위기, 출애굽기, 민수기, 이 이야기도 사실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이렇게 될 줄 아시고 신신당부한 것이 굉장히 많이 있어요. 많은 분량이 이스라엘이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우상섬길 수밖에 없는데 그것 섬기면 안 된다고 당부하는 말씀들을 가르쳤습니다. 사는 게 기본 아닙니까? 사람이 태어났으면 밥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잖아요. 우상 섬기는 문제는 뒷전이고 그런 말은 배부를 때 하는 소리 아닙니까? 밥 먹고 살고 돈 벌고 사는 것이 우선이지 우상을 섬기느냐 안 섬기느냐, 그것은 나중문제 같은 감, 그런 느낌으로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밥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도배하듯 하니까 우리는 짜증나지요. “언제 우리가 우상을 섬기고 싶어 했고 우리가 언제 우상을 섬겼습니까?”라고 언급하과 싶은 겁니다. 대들고 싶은 거지요. 성경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상섬긴 사례를 가지고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냥 나 하나님이다.” 그렇게 하면 되는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짜잔, 하고 나타나시는 거예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집안에 있을 때 “오늘 공부 많이 했어? 밥은 먹었어? 일찍 자라.”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하게 되면 관계가 껄끄러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퇴근하자마자 하는 말이 “너는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아버지라고 하면 안 된다.” 이렇게 나오니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매일 같이 “딩동!” “누구십니까?” “아버지다.” “아버지 오셨습니까?” “너는 나 외에 다른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하면 안 돼!” 이렇게 나오면 아들이 “제가 언제요? 저는 아버지 말고 다른 아저씨를 아버지라 할 맘이 없습니다. 그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세요.”라고 짜증을 낼 것이 분명하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식으로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본문 26절에 보면 “그들이 장자를 다 화제로 드리는 그 예물로 내가 그들을 더럽혔음은 그들로 멸망케 하여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는 방식 중에 하나가 이방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멸망시킴으로서 하나님이 그 멸망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고 알려준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이방제사 드릴 때인데 그게 어떻게 드리는 제사인가 하면, 자기 맏아들을 불속에 집어넣는 제사, 그 제사를 드리는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방치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멸망시킴으로서 “자, 이제 여호와의 말이 농담이 아닌 것을 알았지? 내가 심판주인 것을 알았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잖아. 그런데 네가 우상 섬겼으니 너는 멸망해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본문 29절에 보면 “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 하였노라 (그것을 오늘날까지 바마라 일컫느니라)” 바마는 뭐냐 하면, ‘바’는 다닌다는 뜻이고 ‘마’는 ‘무엇이냐.’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보나마나 너는 우상섬기기 위해서 산당으로 가고 있지?” 이런 비꼬는 말로 바마라고 하는 겁니다. 산당에 가서 우상 섬기려고 분주하게 치장하고 가는 그 몰골들, 그 모양새들, 그 모습들을 주님께서는, 선지자는 바마라고 지칭한다는 말이지요.
아줌마들 죽 갓 바위 올라가는 것과 똑같지요. 401번 타고 죽 올라가는 것, 그게 바마에요. 왜 가는데요? 뭐 하러 가는 건데요? 그걸 왜 만들어 놓은 겁니까? 지금 우리가 성경 보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기 위해서 보잖아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할 때 “우상을 싫어하는 분입니다.” 이렇게 정답인양 으스대면서 발언하거든요. 하지만 그 답은 정답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답이라고 생각하나?” “성경에 그렇게 나오니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거든!”
왜 아닌가? 우상 섬기는 것을 싫어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 섬기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우상을 섬기는 사람의 심정에서 그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돼요. 우상 섬기는 사람의 심정에서. 401번 타고 갓 바위나 동화사 가는 사람들 보고 물어봅니다. “아줌마, 어디 갑니까?” “갓 바위 갑니다. 우리 애 수능이 며칠 안 남아서 빌러 갑니다.” “그 돌부처 앞에 왜 빕니까?” 하고 물으면 “왜 빌면 안 되는데요?” 갑자기 아줌마가 정색하면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제가 실제로 이렇게 모질게 했다고 여기는데 지금 예를 드는 겁니다.
“아줌마! 갓 바위에서 비는 그것이 우상숭배가 아닙니까?” 하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일단 속으로 ‘흥, 기독교 신자구만.’ 해놓고 “내가 빌겠다는데 네가 뭔데?” 내가 자식위에서 갓 바위에서 수능 잘 치라고 부처 앞에 손바닥 올려가면서 비는데 네가 왜 내 일에 간섭하느냐, 라는 그 심정을 우리는 헤아릴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 헤아리지 않고 “하나님은 누구시지?” “우상숭배 싫어하는 분. 나는 이걸 인정하니 하나님을 안다.” 그것은 전부 다 지식이고 소용없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데 하나님 네가 뭔데 내가 하는 일에 간섭을 하느냐.”라는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는 말입니다.
우리는 갓 바위 안 간다고 좋아하지만, 부처한테 안 빈다고 좋아하지만 평소에 우리의 행동을 보세요. 평소에 우리는 돈을 사랑했고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염려 했잖아요. 그런데 목사가 “여러분,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마세요.” 하면 “내가 염려하겠다는데. 목사 네가 나한테 돈 보태준 것 있나? 월급준적이 있나? 내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겠다는데 네가 왜? 내가 염려하면 왜 안 되는데?”라고 할 때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네 맘대로 하세요.” 그럴 거잖아요. 바로 그게 정답이에요.
우리는 여호와, 예수, 성령, 삼위일체, 백날 해도 우리는 내 맘대로 살아요. 교회 오는 것도 내 맘 대로고 예수 믿는 것도 내 맘 대로고 저 사람들이 절에 가서 비는 것도 내 맘 대로예요. 그 내 맘대로 산 사람의 예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지장보살이었습니다. 지장보살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지옥이 텅텅 빌 때가지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내가 성불해서 극락에 가도 지금 지옥에 간 중생들 볼 때 가슴 아파서 극락의 최상의 생활, 호텔보다 더 좋은 낙을 마음아파서 못 누리겠다는 거예요.
차라리 천국, 극락을 버리고 저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성불시키고 난 뒤에 제일 막차로 내가 성불하겠다는 것이 지장보살의 주장입니다. 막사는 겁니다. 자기 맘대로 사는 거예요. 데미안이라는 신부가 문둥병자가 고생하는 것 보고 문둥병자 모여 있는 섬에 가서 그들 돌봐주다가 자기도 문둥병 걸려서 순교했어요. 그것 자기 마음대로 산거예요. 우상숭배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다? 우상숭배 하지 말랬다. 나는 절에 가서 안 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다.’ 이런 출발점은 터무니없는 겁니다.
우상숭배하지 말라, 자식을 불속에 버리지 말라는 이것은 이미 특정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시는 말씀이에요. 지난 시간에 안식일에 대해서 했지만 안식일에 나무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안식일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중에 대부분의 사람이 안식일 어긴다면 같이 어길 사람이고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하면 고소해서라도 때려죽일 것이지만 사랑하는 약혼자가 안식일 어기게 되면 숨겨줄 수 있는 용의가 되어 있는 것이 우리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중심이 아니고 내 맘대로 사는 내 중심이에요. “너 그러지 마.” “내 맘이다. 내가 내 맘대로 사는 게 왜 안 되는데? 네가 뭔데 간섭해?” 이게 인간들의 기본 마음입니다. 이걸 누가 부정합니까? 노숙자 보고 불쌍해서 천만 원 팍 쓰는 것, 그거 자기 맘이에요. “내 돈 내가 내 맘대로 쓰는데 네가 왜?” 착한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기분대로 사는 거예요. 레위기라는 것은 초창기에 시내 산, 모세가 처음 하나님께 계시 받을 때 나온 그 계시중의 하나입니다.
레위기 18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몰렉이라는 신을 분명히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않을 때입니다. 몰렉이라는 신 자체도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레위기 주실 때부터 이미 이스라엘 백성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실험실의 쥐처럼 약속의 땅에 집어넣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그들을 통해서 알리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나 성도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연장입니다. 드라이버나 펜찌같은 연장, 망치 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면 하나님은 기능을 다 하신 거예요. 몰렉이라는 신은 자식을 불로 태우면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 몰렉신이 제일 좋아하는 식으로 자식을 불로 통과케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라고 하나님께서 당부를 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그렇게 했다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너희가 이런 짓을 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지녔다는 말이거든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너는 왜 너의 자녀들을 몰렉 신에게 바쳤느냐?” 할 때에 “나는 안 그랬습니다.”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누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고 차후로 “레위기 18장 21절대로 내가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말씀에 일관되도록 봐주는 것이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경을 본다는 것은 인간이 제멋대로 산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준 거예요. 인간은 내 멋대로 살고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멋대로 산 그 전부를 심판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인간의 대처는 간단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으면 그만이지.’ 이것이 대처에요.
장로가 잔소리를 하게 되면 잔소리 안 들리는 곳으로 피하면 돼요. 못 피할 것 같으면 이러면 돼요. (소음을 내면서) “어~어!”하면 돼요. 우습지 않습니까? 아내가 잔소리 하면 남편이 (비아냥대는 소음으로) “어~어!!” 다른 파장을 유발시켜서 들려오는 음파의 혼선을 야기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하루 일과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다른 생각을 해버리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우상섬기는 것을 싫어하는 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누구신가?” “글쎄, 난 하나님이 누군지를 모르겠어.” “왜?” 라고 물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왜 못하게 하는데?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기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게 한다는 말인가?”라고 한다면 그분은 하나님을 아시는 분이에요. 하여튼 내가 하는 것은 전부 다 사사건건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죄라고 규정하시는 분, 대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 말입니다. 본문 30, 31절에서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열조의 풍속을 따라 스스로 더럽히며 그 모든 가증한 것을 좇아 행음하느냐 너희가 또 너희 아들로 화제를 삼아 예물로 드려 오늘날까지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느냐.”라고 합니다.
이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자기 아들을 바쳐서 몰렉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이것이 과연 나쁜 짓입니까? 네 아들도 아니고 내 아들, 내 아들 내가 알아서 죽이겠다는데 남들이 뭐라고 할 필요 없고 하나님도 뭐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왜, 내가 그렇게 드리고 싶으니까. 우리는 생각하죠. ‘이상하다. 우상을 섬겨도 좀 점잖게 섬기지 어떻게 자기 아들을 불에 태우는 잔인한 짓을 하는가?’ 하면 그 아들을 불에 태우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 보기에는 그렇게 잔인해 보이겠지.”라고 하면서 뒤에 붙이는 말이 있어요.
“왜 당신은 당신입장만 생각하는가?”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당신보기에 나쁘지 당신이 내 입장 돼 봐. 당신은 일방적으로 당신 입장만 생각하지 만약 당신이 내 입장 되면 당신도 오죽 답답하면 살아 있는 자기자식을 불로 태워서 우상을 섬기겠는가? 당신도 나하고 같아. 내 입장 안 돼봐서 그런데 말 그렇게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야. 사람이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가볍게 이야기 해.”라는 이야기를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두 번 듣는 것이 아니지요. 많이 듣습니다. 옆집에 부부싸움 해서 시끄러워서 “부부사이에 좋게 지내세요.” 하면 “당신은 빠져. 당신은 내 남편(마누라)아니니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
싸울 만 해서 싸운다는 그 말이거든요. 하나님께서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합니다. 30절의 말씀대로 ‘이것은 너의 문제만이 아니고 너의 조상들도 똑같이 했다.’는 겁니다. DNA, 유전자가 똑같은 거예요. “너는 너의 아들들을 불에 태워서 바치는 것이 너의 현재의 기분이고 자기만의 개성이라고 여기지만 너의 열조들도 똑같이 그랬거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지금 하는 행동은 너 자신만을 대표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고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을 네가 지금 대표해서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싸잡아서, 모든 열조와 싸잡아서 “너도 조상과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구나.”라고 언급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우상 섬김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하나님, 저는 우상 섬기지 않았습니다.”라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하나님 앞에 내놓지 마세요. 매일같이 우상섬기고 매일같이 자기 기분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 그것이 자기 아들을 몰렉에게 바치면서 불에 태우는 것과 동일한 일입니다. 그러면 열조가 그랬다고 하는데 과연 열조들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역대하 28장 3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 자녀를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라고 되어 있어요.
아하스왕 그 당시도 그랬지만 나중에 역대하 33장에 보면 므낫세왕도 그렇게 했거든요. 자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왜 그러한, 아주 충격적인 제사, 제사도 점잖게 드리지 않고 왜 아주 살벌하게 드리는가? 그 이유가 역대하 26장 16절에 보면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웃시야 왕 때인데 열조니까 다 동일하다고 보면 돼요. 웃시야 다음에 요담, 그 다음의 왕 아하스도 다 마찬가지에요.
이 웃시아 왕에 대해서 하는 말이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되.”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상을 섬긴다는 것이 ‘자, 이제부터 하나님 약을 올리자. 하나님, 약 오르지요? 내가 우상을 섬기니.’ 이렇게 작심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일단 강성해지게 되면 독자적인 세계관이 형성이 돼요. 자기중심성이 성립이 돼요. 자기중심성이 성립되면서 더 이상 누구의 소리도 다 잔소리가 돼요. 한 30년 전인가 어떤 영화에 이런 게 있었어요.
영화 첫 장면이 경비행기가 아프리카에 떴습니다. 경비행기 조종사가 코카콜라를 마시고 빈병을 정글에 던졌어요. 그 코카콜라 병이 아프리카 남부의 부시맨 마을에 떨어졌어요. 그 부시맨은 굉장히 순박해요. 코카콜라 병이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이걸 처리를 해야 되는데 ……,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의 힘이 강성하게 되면 울타리를 쳐요. 울타리를 치면 그 울타리 안에 있는 내용은 다 내가 아는 내용입니다. 어떤 가정주부가 자기 주방 살림 다 알아요. 냄비가 어디 있고 도마가 어디 있는지를 다 압니다.
그런데 처음에 다른 사람이 오게 되면 “형님, 도마 어디 있어요? 숟가락은요?” 이런 식으로 자꾸 묻잖아요. 사람이 자기 힘이 강성해지면 울타리가 형성되고 그리되면 그 울타리 안은 전부 다 자기의 손때가 묻은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 소유고 내 것입니다. 인간이 신을 어디서 발견하느냐 하면, 내 것이라고 여겼는데 거기에 덧붙여서 새로운 것이 나올 때, 그리고 그 다음에 분명히 내 것인데 그래서 그것을 놓치기 싫은데 바람이 분다든지 해서 그것을 빼앗겼을 때, 나의 것이라는 그 경계선을 쳐놓고 추가되든지 빼앗겼을 때는 신의 솜씨나 신의 작용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일단 내 것이 성립되고 난 뒤에 내 것이라고 여겼는데 새로운 것이 추가될 때는 신의 축복이 되고 내 것인데 빼앗겼을 때는 신의 저주나 징벌로 간주하는 거예요. 왜,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기에. 애가 시름시름 아프다? 이것은 내가 신앙생활 제대로 못해서 하나님이 벌주는 거예요. 그런데 애가 자기 반에서 중간쯤 하는데 어느 날 시험 쳐서 1등을 했다? 이것은 내가 교회 잘나가서 신이 주시는 축복인 거예요, 내가 기대하지 않은 것을 더해주거나 뺄 때 그것이 신의 작용이 되는 거예요. 왜, 내 노동, 내 행함의 영역에서 설명이 안 되니까.
그 부시맨은 그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하나님께 돌려주기로 작심을 했습니다. 그 다음이 재미있지요. 하나님께 어떻게 돌려주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카메라 기자가 따라갔습니다. 신에게 돌려주는 방법, 이것 멋지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코카콜라병을 다시 하늘로 돌려주는 방법이 뭐냐? 부시맨은 어느 날 행장을 차려입고 길을 떠납니다. 왜냐, 땅 끝이 바로 신이 사시는 동네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가도 또 가도 땅 끝은 안 나오잖아요. 현재 있는 자기가옥에서 지평선 끝이 바로 땅 끝이에요.
그 지점을 생각해놓고 그 지점에 가서 뭘 하는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제사를 드립니다. 가인의 제사, 이게 가인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이여, 이번 가을에 난데없이 이렇게 큰 수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사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부시맨도 우상 숭배자에요. 그 순박한 부시맨도. 그것이 발달하면 천주교고 기독교입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우상 숭배자에요. 사도바울은 이것을 알았어요.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더 짓게 만드는 것이다. 안식일, 십계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더 죄인 되게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성령을 받아서 그것을 알아챘던 겁니다. 이제 설교 마지막으로 우상숭배 아닌 제사가 뭐냐? 이거 빠트리면 큰일 나지요. 제사란 양을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잡지요. 제사장이 양을 잡을 때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양 잡아서 주께 드립니다.” 이러면 안돼요. “주여, 장차 오실 메시아가 나를 연장으로, 망치나 도끼로 사용해서 하나님이 이 양을 잡습니다.”라고 이해하게 되면 그 제사는 우상숭배 아닙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제사란 양을 죽임으로써, 그리고 양을 우리가 잡아도 하나님이 직접 잡는다고 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 잡혀야 될, 멸망해야 될 마땅한 죄인인 것을 알 때 그게 바로 영적 제사, 산 제물 되는 겁니다.
“주여, 내가 살아있다는 이것은 터무니없는 반칙입니다. 내가 살아있을 이유가 없고 살아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은혜입니까? 메시아가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가 하루하루를 지탱하고 연명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우리 몸을 산제로 드리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을 더 주면 축복이고 빼앗으면 저주라는 이것은 우상숭배에요. 므낫세나 아하스 왕이 자식을 제물로 바칠 때 그 심정이 어떤 심정인지 알아요? “신이시여,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나의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과감하게 보여드리겠습니다. 큰 아들 내 와라! 이삭도 잡았는데 나도 아들 잡는다.”
큰 아들 잡아서 신에게 제사 드리는 그것이 나로 하여금 극도로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극단의 것이 바로 아들 잡는 거예요. “네가 우리 입장 되어봐라. 너도 답답하면 네 아들 잡는다.” 쩨쩨하게 돈 천원 헌금하지? 만약에 진짜사업이 위태할 때는 목돈으로 헌금 할 수도 있어요. 남들 보기에 무모하게 보이지만 본인은 무모한 것이 아니에요.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바치고 싶어요. 왜? 살기 위해서 바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게 아니에요. 너는 네 몸 바칠 자격도 안 되고 값어치도 없어요.
하나님이 받는 것은 예수님 몸밖에 안 받습니다. 왜, 우리는 애초부터 더러우니까. 더러운데 은혜로 살아가는 거예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주의 말씀대로 막달라 마리아처럼 울면서 “주여, 이 몸은 그냥 예수님의 영광만 보여주는, 공로만 보여주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울면서 향수뿌리면서 머리털로 발을 씻겼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 볼 때 살아 있다는 이 자체가 정당한 권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에요. 살 이유도 없고 살 권리도 없고 살 자격도 없고 살 의미도 없습니다.
그런데 살려주시는 것은 주의 이름, 날마다 용서 받으면서 그 용서받은 덕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오직 주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바로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상숭배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 것 챙길 때 이미 우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뭘 더 주실지 안 빼앗아 갈지 노심초사 그것만 생각하면서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자의 모습인 것을 잊지 말고 살려주는 대로 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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