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안식일 표징(겔20;12-14)이근호130904

아빠와 함께 2013. 9. 6. 08:26


안식일 표징(에스겔 2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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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9-04 21:23 
                        안식일 표징 

2013년 9월 4일                          본문 말씀: 에스겔 20:12-14 

(겔 20:12, 개역)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겔 20:13, 개역)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패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의 위에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겔 20:14, 개역)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목도한 열국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표징이란 하나님께서 과연 살아계시고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낼 때에 직접 얼굴이나 신체를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라’는 지시와 명령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바로 이 방식에 대해서 이스라엘도 나름대로 태도를 보였습니다만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맙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뭐든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나름대로 안식일을 준수한다고 하나 이런 행위가 ‘자기 이름’을 위한 안식일준수에 머물렀고 결코 ‘주의 이름’을 위한 안식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나의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을 위한 ‘안식일 준수’를 실시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적용해봐야 합니다. 과연 일주일 중 하루 쉰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이것입니다. 안식일을 통해서 사람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자들이 못됩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자신의 가치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 뿐입니다. 따라서 ‘주의 이름’을 위한 ‘안식일 지킴’이 뭔가를 알기 위해서는 안식일을 위반했던 자들에 대해서 어떠한 처벌이 마련되어 있는지를 실펴보면서 알아봅시다. 

민수기 15:32-36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날 나무를 하는 자들을 계도하고 타일러서 앞으로는 안식일에는 나무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사람을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그 태형집행을 몰래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하면서 온 회중의 손에 돌을 들게 해서 죽여버리게 하십니다. 과연 안식일에 나무하는 것이 살인한 죄보다 더 큰 죄가 된다는 말입니까? 

죄가 성립되려면 타인에게 그만한 피해를 입혀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무하는 사람이 누구를 죽인 적이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그 죽음을 유발했기에 본인이 거기에 상응하는 사형을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나무입니다. 나무를 죽이는 것이 죄라면 평일에 나무하는 것도 말려야 합니다. 

이 사람이 안식일날 나무해서 피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온 회중들로 하여금 마치 막중한 피해라도 입은 자처럼 돌로 직접 쳐주여라고 지시내립니다. 그렇다면 회중들 입장에서 이번 사형집행에 가담하면서 자신들이 평소에 안식일을 과연 이토록 심각하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안식일 어겼다고 돌을 들고 인정사정없이 냅다 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여길 겁니다. 예를 들면,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랑하는 약혼녀가 만약에 안식일을 어겼다면 과연 약혼자가 돌을 들고 그 자기 약혼자를 직접 죽여버리겠습니까? 또 한 가지는 만약에 안식일 어긴 자들이 1000명이고 안식일 어기지 않는 자가 자기 혼자 뿐이라면 과연 자기 혼자서 돌을 들고 1000명 한 장소에 움집해 놓고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도로 안맞아죽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 속에는, 죄 지은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서는 심판받는다는 소식이 담겨 있는 겁니다. 이는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살지 않는 자는 심판받는다는 말씀의 다른 표현입니다. 안식일에 나무한 그 사람에게 두 번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한다는 것은 더 살아도 소용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에 같은 이웃인 다른 이들이 동의한단 말입니까? 

남의 안식일에 돌을 던지면서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돌이 날아와도 그 돌을 하나님이 던진 것으로 동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럴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름이 최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죽이는데 가담할 수 있어도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서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죽이시는 것은, 그 노동이 결코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매일 먹었습니다. 만약에 만나가 먹기 싫다고 안 먹어버리면 그 누구라도 굶어죽고 맙니다. 만나 없이는 못 사는 나라, 그런데 그 만나가 주어지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그 날을 바로 안식일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은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즉 만나란 살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있는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라고 주시는 음식입니다. 매일 같이 광야에 가서 만나를 주워먹으면서도 정작 안식일에는 만나조차 내리지 않고 아무 것도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안식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2:16-1에 보면, “이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시간이 그림자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기에 그림자란 땅에 있는 얼룩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시간 자체가 그림자라고 하시면서 그 실체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에서 모든 시간적 안식일 개념은 소멸됩니다. 그 대신 모든 인간들은 안식일에 죽음을 맛보아야 한다는 의미로 전환됩니다. 왜냐하면 인식일의 주인이 결코 우리 자신의 몸이 되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우리 자신의 잘남을 보여주는 그림자가 되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어린양이 죽는 제사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마땅히 죽을 자로서 참여하므로서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살지 않고 주님을 사는 자로 바뀌어놓기 위해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같이 죄인이고 매일같이 용서받고 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9-05 22:29 
55강-에스겔20장 12-14(안식일표징)130904 – 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0장 12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78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0:12-14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패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의 위에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목도한 열국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표식으로 안식일을 지시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얼굴로 직접 내 미신 것이 아니고 “나의 안식일을 지켜라.”라는 지시와 명령을 통해서 “나 하나님은 엄연히 살아 있다. 그리고 일하신다. 나도 계획이 있다.”라는 것을 알려줬지요. 그런데 그 안식일을 사람들이 지켜야 되는데 그 안식일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지를 못하고 멸망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지시를 안식일로 받았으면 우리 같으면 ‘야, 진짜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넙죽 안식일에 대해서 열심을 냈을 것인데 안식일을 지키라고 분명히 당부했던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해서 그들은 안식일을 전혀 모르는 세상민족한테 사로잡히고 멸망 받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는 안식일을 지켰다고 했는데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다고 하는 거예요.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안식일을 더럽혔다고 하는 겁니다. 어디서 차이가 났느냐 하면, 안식일에 대해서 그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으면 우리가 알아서 지키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한 사람들이 실패했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안식일 말고 진짜 하나님이 생각하는 안식일 지키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우리가 감 잡을 수 있어요. 


14절에 보게 되면 그들이 그냥 안식일만 안 지킨 것이 아니고 “내 이름”을 더럽혔다는 겁니다.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안식일을 안 지키면 안식일 안 지킨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이 돼요. 그렇다면 여기서 난해한 것이 안식일을 안 지킨 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이다, 그 둘 사이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알아야 돼요. 만약에 연결지점을 우리가 찾지를 못한다면 우리도 안식일 지킨다고 하는 그것이 오히려 주의 이름을 더럽힐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따져보면 이렇습니다. 하루 쉰다고 구원받습니까? 일주일에 하루만 쉬면 구원 받아요? 안식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과 결부되었다는 생각을 못하고 안식일을 지키려 하니까 하루 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루 쉬지요 뭐. 하루 쉬면 구원 받는다는데 하루 쉬면되죠, 뭐. 하루 쉰 그들이 멸망당했다는 말은 ‘아하, 하루 쉬는 그것이 안식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루를 쉬게 되면 누가 쉬는가 하면 본인이 쉬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아니고 자기 이름, 자기 자신이 하루 쉰 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쉬는 것은 참 좋아요. 그런데 쉬는 것은 되는데 안식일은 못 지키는 겁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그 명령을 듣고 안식일을 지키겠다고 나설 때에 ‘내가 쉬지.’라고 자기 자신이 쉬는 것으로 안식일 지키는 것이 완료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그 한계를 인간은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정리해 봅시다. ‘안식일 지키라.’는 그 말은 이렇게 됩니다. “하루 쉬면 구원 받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네가 네 이름으로 살아왔던 그것을 안식일을 통해서 이제 너는 주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하루 쉰다고 인간이 바뀝니까? 이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에요. 직장에 안가고 하루 웬 종일 소파에 드러누워서 리모콘 잡고 TV 본다고 월요일에 짠, 하고 주의 일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겠어요? 그 인간이 맨 그 인간이지요. 쉬기 전의 그 인간이나 쉬고 나서의 그 인간이나 똑같은 인간인데요. 계곡에 휴가 다녀왔다고 새 인간 되는 것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안식일에 대해서 신약에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너희들이 갖고 있던 인간 자체를 바꿔야 되고 버려야 된다.’는 쪽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하고 17절에,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그림자라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듣고 ‘그래, 안식일은 그림자다. 그러면 실체는?’ 실체는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오늘 설교가 난해할 수가 있는데 시간을 지키는 것이 그림자라면 그 그림자의 실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겁니다. 태양아래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뭐냐 하면, 내 몸이 여기 있으면 그 그림자가 있어요. 햇빛이 비칠 때 바깥에 나가면 그림자가 있잖아요. 


그 그림자는 땅위에 시커먼 흔적을 가지고 날 따라 다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는 십계명에 나오는 율법이 내 몸의 그림자가 된다는 생각은 도저히 우리 몸으로서는 할 수가 없어요. 내 몸의 그림자는 내가 움직일 때마다 땅에 시커멓게 있는 그 흔적이 그림자지 안식일 지키는 것이 내 몸의 그림자가 된다는 생각은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겁니다. 무슨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그래서 안식일과 십계명, 모든 계명과 모든 율법의 말씀 뒤에는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게 만들고 듣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담겨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히브리서 4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 말씀인지 ……, 저는 이 말씀이 참 어렵다고 생각하거든요. 왜 그런가 하면, 내 위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만들어놓으시고 거기에 사람들을 넣어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들어오지 말라고 안식일을 만들었다는 발상은 도저히 보통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발상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 못해서 환장한 분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은 아버지고 우리는 자식이니까 어느 아버지가 자식을 지옥 보내는 아버지가 있겠어요? 우리네 상식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자식을 낳았으니 아버지는 항상 좋은 아버지고 우리가 모자라도 일으켜 세우시는 어진 아버지이기에 하나님께서 안식을 마련했다면 우리보고 들어가라고 안식을 마련했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 생각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4장 3절에 보면 그게 아니고 안식은 이미 만들어놓았는데, 안식은 이미 완성했는데 너희들은 거기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 ‘들어오지 마라.’ 그 말이에요.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이미 안식은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완성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따로 살림 차려놓은 거예요. 차려놓고 거기에 믿지 못하는 자들은 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단언하십니다. 그러면 사람은 왜 만들어놓았습니까?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람 만들어놓은 것밖에 안되거든요. 사람 만들어놓고 “안식에 들어오지 마.” 이렇게 되면 이게 뭐예요? 여기서 나올 수 있는 결론 하나 챙깁시다. 그것은 사람 위해서 안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겁니다.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안식’을 위하여 사람이 있습니다. 


안식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어떻게? 이런 자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그러면 ‘이런 인간’이란 어떤 인간입니까? 안식일의 주인을 못 알아보면 안식에 들어갈 수 없을뿐더러 들어가도 그 안식을 감당 못해요. 인간이 바뀌지 않으면 천국에 가도 그 천국이 지옥 같습니다. 못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딜 가요? 천국에 가요? 거기서 가서 영원토록 예수님 미워할 일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천국에 가게 되면 그것은 지옥보다 더 괴로운 동네에요. 


대체 한국교회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사기를 쳤는지 사람 바뀌지 않더라도 천국 간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쉬는 것을 위하여, 자기 편한 것을 위하여 천국에 가게 되면 그것은 천국이 불편해서 못살아요. 살수가 없어요. 교회에서 안식일 지키라고 하니까 ‘하루 쉬지 뭐.’ 그렇게 하루 쉬는 것이 안식일 지키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말씀의 안식일이 뭔지를 알려면 안식일을 위반하는 사례를 봐야 됩니다. 말씀은 위반하는 사례를 통해서 그 말씀의 진가를 파악할 수가 있어요. 


민수기 15장 3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안식일에 나무를 한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나무하고 있는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무하는 사람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은 월요일도 나무하고 화요일도 나무하고 수요일도 나무하고, 일주일 내내 나무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는 안식일이 토요일이니까 금요일에 나무했습니다. 그 다음에 토요일도 나무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무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시비 걸지 않았어요. 가만 놔둡니다. 


그런데 토요일에 나무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야, 야! 토요일에 나무하지 말라고 했잖아. 안식일에 나무하지 좀 말고 그 다음날에 하라.”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안식일에 나무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거예요. 안식일에 나무하는 것이 과연 죽을 만큼 나쁜 짓이냐 하는 이야기에요. 안식일에 나무하는 것, 진짜 사람 때려죽인 죄라면 이해가 되는데 안식일에 나무하는 것이 사람 때려죽인 죄만큼 그렇게 악한 죄냐, 하는 그 문제부터 우리는 해결하고 지나가야 됩니다. 


사람이 보통 나쁘다, 할 때는 맘씨를 곱게 먹지 않을 경우에 나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기를 친다든지 도둑질을 한다든지 이런 것은 뭐냐 하면, ‘나 살기 위해서 네가 어떻게 되든지 모른다. 네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나는 살아야 되겠다.’ 할 때 그 공동체, 그 집단은 그 사람을 남에게 피해를 준 사람으로 간주해서 어떤 벌을 줘서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사람이 만약 살인을 했을 경우에는 옛날부터 그 사람을 죽여 버렸어요. 그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그 사람이 먼저 남을 죽였기에 그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나무할 때 죽어나간 것은 나무밖에 없어요. 누가 죽었어요? 도끼날이 날아가서 옆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냥 나무를 죽였어요. 나무 죽인 것이 살인죄입니까? 그게 살인죄 같으면 다른 날은 놔두고 왜 안식일에만 그게 살인죄가 성립되는 겁니까? 화요일에는? 그리고 수요일은 왜 가만둡니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제가 설교하면서 제일먼저 뭘 적용했느냐 하면, 쉬는 것은 안식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했습니다. 쉬는 것은 안식이 아니에요. 쉬어봐야 자기 이름이 쉬는 것이고 쉰 다음에는 ‘아, 하나님 덕분에 하루 잘 쉬었다.’ 하고 그 인간이 맨 그 인간이기 때문에 달라질 것이 없어요. 


그래서 안식일은 있으나 마나에요. 하루 쉬는 날이지 안식일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가 안식했지요. 그런데 안식이라는 것은 사람자체가 바뀌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금요일까지 나무를 하다가 안식일인 토요일까지 나무를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였을 때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야, 안식일에는 내가 나무하면 안 되겠구나. 안식일에는 노동하면 안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죽은 사람이나 보고 있는 사람이나 똑같이 그것은 전혀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에요. 안식일에 나무하다 죽은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한다는 것은 곧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사례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제가 만약 하나님 같으면 “토요일에 나무좀 더 한다고 해서 돈 더 버는 것이 아닌데 토요일에는 쉬고 다음 날 나무해서 밥 먹고 살아라.” 이렇게 나오면 이것은 뭐냐,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노동으로 살게 해 준다는 것이 기본으로 깔려있는 배려, 은혜라는 말이지요. “그래, 그래. 너희가 고생이 많지? 고생하더라도 하루는 쉬었다가 해라. 쉬엄쉬엄 하면 건강에도 좋지 않니?” 이런 조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어쨌든 간에 살려주겠다는 취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노동을 통해서 살려주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금요일까지 나무하다가 토요일에 나무했다고 죽여 버리면 죽은 그 사람에게는 그 다음 오는 일요일이나 월요일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 없어요. 죽어버렸으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지금까지 네가 월, 화, 수, 목, 금, 일한 것은 전혀 네가 사는데 아무 상관도 없는 짓을 그동안 해 왔다는 겁니다. “너는 너의 노동으로 네가 사는 인간으로 바뀌지 않는다.” 하는 그 이야기에요. “네가 열심히 애쓰고 돈 번다고 그것을 너는 살았다고 보는데 그것은 네가 산 것이 아니라 아무 의미도 없는 거야.”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는 그 말, 안식일에 나무한 자를 죽인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죽였다는 거예요. 


안식일은 사람을 죽여서 그 다음날 새롭게 새로운 인간으로 살게 하는 의미가 바로 안식일입니다. “나무하는 사람만 죽었고 다른 사람은 안 죽었잖아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주장하겠는데 나무하는 사람을 죽일 때 그냥 죽이지 않고 다른 사람이 돌을 들고 죽이게 했습니다. 그 의미가 뭘까요? 왜 돌 들고 죽이게 할 까요? 주변에 있는 동료들, 자식들이나 처나 그동안 알고 지내던 이웃들, 왜 그 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들고 죽이게 하십니까? “너는 하나님의 안식을 없는 식으로 평소에 살아온 그것, 그런 너의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안식, 하늘나라는 아예 없다고 여기게 만드는 충동을 유발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한달 전쯤에 그런 설교를 했지요. 어떤 사람이 안식일날 나무를 했습니다. 보니까 평소에 나한테 트집이나 잡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사장이 “하나님의 명령이니 돌로 쳐 죽여라.” 할 때는 제일 큰 돌 들어서 제일 먼저 달려들어서 쳐 죽일 겁니다. 그러데 약혼자가, 나의 사랑하는 약혼자, 곧 11월에 결혼하는 약혼자가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걸렸습니다. 그럴 때 약혼자인 내가 “하나님의 법이 중요하지 네가 중요해?” 하고 돌로 치겠습니까, 안치겠습니까? 안치면 그 인간은 살아 있는 그라도 안식일 지킨 것이 아니에요. 취지를 몰라요. 


또 안식일에 여러 사람이 다 안식일을 지키고 나무를 안했는데 하필 그 사람이 혼자서 나무를 해서 안식일을 어겨서 백 명이고 천명이고 돌로 쳐 죽였다, 이것은 되는데 천명이 안식일을 안 지키고 나무를 다 해버렸는데 안식일 지킨 사람이 혼자밖에 없을 때 혼자인 나보고 하나님께서 하는 말이 “너는 천 명을 돌려 쳐 죽여라.” 하게 되면 돌을 들고 “아저씨들! 아주머니들! 천명 다 모이세요.” “왜 모이라 하는 건데?” 하면서 모였습니다. 달랑 자기혼자 돌 들고 와서 “이 정의의 돌을 받아라.” 하면 “저게 미쳤나? 너나 죽어라.” 하고 역으로 죽게 될 거예요. 


천명이 어겼는데 혼자서 돌을 들고 서 있으면 “야,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너희들은 하나님의 안식을 모독했어.” “야, 다 모독했어. 다! 너 지금 왜 이래? 어디서 이게 비현실적으로 놀고 있어. 사람들 봐. 성경 이건 다 구라야. 이것은 의미 없어. 성경대로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아. 어디서 성경구절을 들먹이고 있어!” 그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만 바보 된다는 느낌이 들지요. 제일 어려운 대목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대목입니다. 아까 제가 그림자와 몸체와의 관계에서 안식일은 그림자거든요. 


그림자가 지면에 나타나는 시커먼 그림자면 이해하기 쉬운데 안식일이라는 시간자체가 그림자라는 거예요. 시간 자체가 그림자라면 몸체는 뭐가 되느냐 하면, 시간과 시간의 관계로서는 그림자와 몸체의 연결이 성립이 안돼요. 시간이 그림자같이 규정이 되려면 이 몸에서 시간이 나와야 되는 겁니다. 제 말 맞지요? 우리 몸에서 그림자가 나오듯이 안식일자체가 그림자라면, 사도바울 말(골 2:17)대로 그림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몸이 몸체라고 하는데 그 몸체에서 시간이 나와야 된다는 말이지요. 시간의 창조자가 되어야 돼요. 


그런데 시간을 창조한다는 것은 무궁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일곱 등분으로 토막을 낸 거예요. 토막을 내서 안식일과 다른 6일을 구분시키는 그 시간계획이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 없지만 만약에 안식일을 지키게 되면 안식일을 지켜서 거기서 누굴 만나게 되느냐 하면, “나는 안식일 지켰다.”가 아니라 주의 몸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안식일로 들어갔는데 주의 몸을 만났어요. 그리고 안식일에 들어갈 때 우리 몸은 시간에 저촉을 받기 때문에 시간 속으로 못 들어가요. 그럼 어떻게 들어가는가? 안식일 날 우리가 죽으면 되는 거예요. 


굉장히 논리가 어렵지만 성경대로 하는 거예요. 안식일 날 우리가 죽으면 돼요. 우리 몸이 죽는 것을 가지고 성경에서 뭐라고 하는가? 노동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사실을 성경에서 좀 쉽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광야에서 만나가 내렸잖아요. 새벽에 만나가 내렸는데 어떤 사람이 고집이 세서 ‘난 만나 안 먹어. 난 만나 싫어.’ 하고 안 먹게 되면 그 사람은 진짜 죽어요. 만나를 안 먹으면 죽어요. 만나가 없으면 죽는다는 말이지요. 그 만나 없는 날이 뭐냐, 안식일입니다. 안식일 지킨다는 것은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이 저를 매일같이 살려내니까 제가 사는 것 맞잖아요.” 이게 안식일 지키는 겁니다. “하나님, 매일같이 살려줘서 사는 것이 맞지요? 절대로 내가 일한대로, 월급 받고 사는 이것이 사는 것이 아니지요? 주님이 살려줄 때만 제가 사는 것이 맞지요?”라고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살려 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민수기 15장 14절,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4절에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안식일 지켜라, 노동하지 말라, 해 놓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려낸다는 것은 지금 심장 뛰고 오늘도 양식 주셔서 먹여 살린다, 이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죄에서 건져내는 거예요.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다 압축해 보면 날마다 죄에서 해방시켜 주게 되면 그것이 사는 것이고 죄용서 해주는 그 분과 함께 있는 그것이 안식이 되고 안식일 지킨 것이 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죄가 뭔지 알아야 되거든요. 창세기 2장에 보면 처음 안식일 제정이 나와요.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일이 마치니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 안식일이 아담이 범죄 함으로서 깨져버렸어요. 그러니까 죄라는 것이 뭐냐, 또 다시 종합해서 말씀드리면 죄라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안에 무슨 정보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안식일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니까 창조 받은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내용,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내용이 포함된 그 사람만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를 내 뿜을 줄 모르는 사람은 애초부터 사람이 아니에요. 그것은 흙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취급을 안 해요.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우리가 섭섭해 하지 마세요. 그것은 애초부터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사람을 돌로 쳐도, 돌로 칠 그 때까지도 아직 사람인지 아닌지는 유보되어야 합니다. 왜, 안식일은 그림자고 실체가 올 때, 예수님이 올 때 결정 나기 때문에.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보고 돌로 때리라고 하면서 점점 더 그들은 기차에 실려서 예수 그리스도 그 그림자노선에 실려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거예요. 안식일을 어겼다고 돌로 칠 때 내가 돌로 친 것이 아니고 누가 치라고 시켰는데 그 시킨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안식일 어긴 사람을 돌로 치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거든요. 안식일의 주인은 어떻게 하는가? 십자가를 졌다 이 말이지요. 좀 우스운 예지만 이해를 위해서는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이렇게 생겼잖아요. 십자가의 그 모서리를 가지고 콩콩 치는 거예요. “에라, 안식일을 어긴 놈.” 이렇게 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냥 죽습니다. 안식일은 죄인인 우리를 죽여서 어린양의 피로 다시 만드는 작업을, 이미 죽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이 해 주심으로써 하늘나라 안식에 참여케 하는 그것을 믿는 자만이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이 히브리서 4장의 이야기입니다. 


안식의 나라를 완성할 뿐만 아니라 안식에 들어가는 방법도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한 거예요. 그 완성에는 친히 십자가와 말씀으로 우리를 죽이는 자에 한해서만 그 안식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교회뿐만이 아니고 기독교역사 2천년동안 안식일 이야기하면서 안식일은 지켜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2장 16절 같은 본문이 나오니까 살짝 포장만 뜯어내는 거예요. 알맹이는 안보이니 포장만 싹 바꿔서 그걸 주일로 바꾸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노동하는 인간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하루정도 쉬게 했다는 겁니다. 


하루쯤 쉬면 인간 바뀝니까? 인간이 바뀌지 않는데 천국을 가요? 사람이 쉬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쉬는 거예요. “하나님, 하루 쉬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이것은 말로는 주님한테 고맙다고 하지만 결국 챙기는 것은 이 몸뚱이를 챙기는 것인데 그것은 여전합니다. 자기 몸 챙기겠다는 것은 똑같아요. 죄 지었든 어떻든 간에 “죄지었어도 그냥 봐주소. 죄 지으면 지은 것이지 하나님이 왜 시비 겁니까?” 이런 식이에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지었다는 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모서리를 가지고 콩콩, 찍어줘야 그 때 정신 차릴지 모르지만 성령을 통해서 “너는 죽어야 될 죄인이야.” 이렇게 찍어줄 그 때나 아는 것이지 그저 안식일 지키라고 하면, 이제는 주일로 바뀌었으니 주일 지키라고 하면, ‘노동하기 힘든데 하나님이 우리보고 하루 쉬고 월요일에 출근하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들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교회사가 다 그래요. 한국교회도 그렇고 전 세계 교회가 다 그래요.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이미 그런 식으로 해서 실패했던 거예요. 


안식일은 제사하는 날입니다. 그 제사할 때 어린양이 죽어요.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래, 내가 나무하면서 나는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무해서 밥 벌어먹고 사는 그것이 사는 것이 아니구나.’ 그저 살려주니까 나무한 거지요. 그 사람이 안식일 지나도 나무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 지나서 나무하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바로 나무를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살려줬기에 나무 하면서 “내 노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 때문에 살았습니다.”하는 고백을 하면서 날마다 죄용서 받은 그것이 우리를 영생에 얻게 하고 안식에 들어가게 한다는 취지가 바로 안식일이었고 그 그림자의 실체는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지신 그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십자가로 다 이루었으니 이제 안식일 가지고 너희들이 비난 받지 않도록 해라.’라고 하신 겁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4-17)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야 될 텐데 도리어 나의 이름을 위해서, 나의 명예를 위해서, 나의 생존을 위해서 주의 이름을 모독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그렇게 하다가 멸망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똑같이 멸망하고 있습니다. 주여, 안식일의 주인 되신 주님의 성령으로 인하여 사람자체가 바뀌어서 이제는 죽을 죄인이 주님 덕분에 살았다는 주의 이름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