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부정적 예언(겔20;45-49)이근호131002

아빠와 함께 2013. 10. 4. 20:59

 

부정적 예언(에스겔 20: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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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0-02 21:18 
부정적 예언


2013년 10월 2일                       본문 말씀: 에스겔 20:45-49

(20:4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0:46) 인자야 너는 얼굴을 남으로 향하라 남으로 향하여 소리내어 남쪽의 숲을 쳐서 예언하라

(20:47) 남쪽의 숲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의 가운데에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없애리니 맹렬한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이 그슬릴지라

(20:48) 혈기 있는 모든 자는 나 여호와가 그 불을 일으킨 줄을 알리니 그것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20:49) 내가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나오고 선지자도 나오고 그리고 백성들의 반응도 나옵니다. 선지자 입장에서 그저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만 하기에 편하게 살면 그만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선지자에 대한 백성들의 미움이 만만치 않을 때, 선지자는 괴롭습니다. 백성들은 말합니다.

“왜 당신은 하나님 말씀을 직접적으로 전하지 않고 비유로 이야기하는 겁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지자의 마음은 참으로 아픕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장래 되어질 일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대목입니다. 마치 공사장 작업 반장이 일꾼들을 모아놓고 오늘 하루 과제를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이 작업 지시를 알아듣는 자들에 동의하는 자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하나님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대로라면 바벨론에서 남쪽 나라에 해당되는 이 유다나라는 불바다가 되는데 그 불을 질러버린 분이 다름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불을 질러 버리느냐는 겁니다.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끼어있는 선지자로서는 참으로 입장 난감입니다. 아무리 혼신을 다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려주어도 듣는 자들이 이해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선지자가 일부러 어렵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자체가 육신이라는 영적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그저 홀로 태어난다고 여기겠지만 실은 '그 세대‘ 안에서 태어난 겁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처럼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와 그 세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그가 살면서 듣고 보고 하는 모든 것이 그 시대상입니다.

반면에 선지자는 하나님의 신을 충만히 입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속해 있는 세대의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같은 인간들끼리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은 어둠이 해결하지 못합니다. 빛이 와야 합니다. 하지만 빛이 세상에 왔어도 어두움은 빛을 빛으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고통은 고스란히 선지자의 고난으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 시대의 성도는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정리해봅시다. ‘핍박받음’으로 정의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갈라디아서 4:22-23에 보면,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비유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완전하게 격리되는 두 계열이 발생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구분됩니까? 갈라디아서 4:29에 보면,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난 자들을 핍박하므로서 스스로 육체로 난 계열임을 공개하게 되는 상황으로 번진다는 겁니다.

이러한 대규모 분류 이전에 먼저 선지자들도 혹독한 서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20:8-9에 보면,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20:14에서는 자기 생일마저 저주합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리하겠습니까? 미가 2:6에서는,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약에 오면 모든 성령받은 자의 처지가 이러합니다.

빌립보서 1:29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17-18에도 보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복음을 위한 핍박도 같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핍박이나 고난은 잘라버리고 그리스도만 받아들이는 경우는 전무합니다. 따라서 고난이나 핍박없는 그리스도는 참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육신적으로 움직이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이득이나 영광을 빼먹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했기에 받는 고난의 한 경우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6:6-7에 보면,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 사도는 그리스도의 계시로 조언합니다.

세상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고 하니 과연 어느 누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파 하겠습니까? 인간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전에 먼저 사랑하는 대상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선 순위에 있어 그리스도가 먼저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다치는 경우라면 그 어떤 경우라도 회피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사도들은 숱한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해준 고린도교회로부터 사도 바울을 도로 엉터리 가짜 사도라고 배척받습니다. 그 대신 악마의 일꾼을 담임 목사로 섬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마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믿습니다. 모든 되어진 일은 예수님 안에서 ‘예’가 된다는 겁니다. 즉 자신이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고 고난을 받는 것도 다 복음이 복음대로 드러내기 위한 합당한 조치라는 사실을 알고서 사도는 항상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도 같은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단이 설치는 세계 속에서도 십자가 복음만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10-03 19:22 
59강-에스겔20장 45-49(부정적 예언)13100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0장 45절에서 4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0:45-49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얼굴을 남으로 향하라 남으로 향하여 소리내어 남방들의 삼림을 쳐서 예언하라 남방 삼림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의 가운데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멸하리니 맹렬한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이 그슬릴찌라 무릇 혈기 있는 자는 나 여호와가 그 불을 일으킨 줄을 알리니 그것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


본문에 하나님이 나오고 에스겔 선지자가 나오고 선지자의 말을 듣는 백성들이 나옵니다. 세 종류로 이렇게 나뉠 수 있는데 에스겔은 장래를 몰라요. 우리가 장래를 모르듯이, 내일 일을 모르듯이. 내일 일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관되게 하시는 그 작업, 계획에 대해서 에스겔에게 알려줬습니다. 건축현장에 가게 되면 아침에 사람들 모아놓고 그날 할 일에 대해서 작업반장이 미리 이야기를 해줍니다. 공장도 마찬가지죠.


직원들은 작업반장이 지시하는 대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 지으면 되는 겁니다. 선지자가 작업반이고 작업반장은 하나님이라고 본다면 선지자는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작업반장이 그 일을 하는 그 취지대로 그냥 전할 뿐이지요. 오늘날 성도가 산다는 것이 참 편해요. 에스겔 선지자처럼 살아가면 되기에 참 편합니다만 성도가 성도로서 사는 것이 참 힘들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가 가슴에 와 닿지 않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성도가 선지자처럼 편하게 살지 못하고 힘이 드는가?


그 점을 에스겔도 마찬가지로 보여줍니다. 49절에 “내가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 선지자는 하나님만 의식해서 편하게 살면 되는데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기에 누구를 의식하느냐 하면,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곤욕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 아닌 것을 전하지는 않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도무지 못 알아듣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선지자가 이처럼 사람들에게 인기 없고 냉랭한 반응을 받는 이 모습, 특히 에스겔 같은 경우는 인자거든요, 장차 인자라고 호칭하면서 하나님이 이 땅을 방문했을 때 선지자가 당하는 이 수모와 서러움과 외톨이 됨을 자기가 만든 피조물로부터 당하게 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그 결과에 대해서 자기가 미리 짐작하거나 예측하면 안돼요. 자기가 하나님하고 동업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지, 성도는 주께서 인도하는 대로 살 뿐이지 ‘내일 더 살아야 되겠습니다.’ 혹은 ‘모레도 살아야 되겠습니다.’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선지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움직임이 어디까지 가는지 미래에 대해서 선지자도 몰라요. 선지자가 이렇게 이야기는 하지만 그 예측한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선지자는 모릅니다.


그냥 말을 할 뿐 그 말이 어떤 식으로 실제화 되는지에 대해서는 선지자도 잘 몰라요. 이렇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그 시대가 되어봐야 알아요. 그래서 미리 약간 난해하지만 결론삼이 말씀드립니다. 사람은 때를 따라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세대에 따라서 태어나게 되어 있어요. 때를 따라 태어난다는 것은 자기 태어난 그 생년월일시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인간도 그 세대에 따라 태어났기에 태어나자마자 그 세대의 분위기와 죄악에 푹 젖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세대가 그 아기를 낳은 거예요. 나는 이 땅에 태어났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그런 것 없습니다. 유아독존 아닙니다. 그 세대, 그 시대의 자식이에요. 태어나서 듣고 보고 한 모든 것은 그 시대가 가르쳐 준겁니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무슨 세대를 보느냐 하면, 메시아세대를 보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남보다 아이큐가 높은 것이 아니고 똑똑한 것이 아니고 남보다 공부를 많이 한 것이 아니고 세대가 다르고 차원이 달라서 그래요. 선지자는 메시아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은 그 시대의 똑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입니다.


어두움은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어두운 세대에서 태어난 모든 것은 다 어두워요. 어두움이 어두움을 고치고 개화시키고 계몽시키는 이것은 안 됩니다. 다 실패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고 어두움이 어두움을 깨닫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빛으로 오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미리 당겨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장차 될 미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대가 다르고 차원이 다르고 한쪽은 빛이고 한쪽은 어두움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에스겔이 아무리 알아듣는 그 당시 토속말로 이야기해도 그들은 말하기를 “너는 입만 열었다 하면 우리가 전부 다 못 알알아 듣는 이야기만 하는가?”라는 반응을 나타낼 때 선지자가 참 괴롭지요.


이 느낌을 여러분이 아십니까? 참 많이 들었어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점점 더 많이 듣습니다. 점점 더 많이. 저보고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않느냐?” 할 때 그 하나님은 우상이라고 하면 무슨 소리인줄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옛날에 그리스 철학자 고르기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태어나기 전 약 400년 전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진리는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첫째는, 진리는 없다. 둘째, 있다 해도 우리가 모른다. 셋째, 안다 해도 남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다.


첫 번째는 진리는 없다. 두 번째는 있다 해도 우리가 알 수가 없다. 세 번째는 안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다. 이게 세 가지 인데 3번부터 이야기해보면 내가 안다 해도 옆 사람에게 전할 방법이 없다면 그 사람은 진리를 모르게 사람이 되고 모르게 되면 진리는 애초부터 없는 겁니다. 진리라는 것이 하나님도 마찬가지고 사람에게 진리가 없어요. 진리가 없는 그것이 인간은 어떤 때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어떤 세대 안에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세대 안에 갇혀 있기에 자기를 만드신 분도 모르고 만드신 분에게서 오는 그 선지자의 말씀조차도 그들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는 이겁니다. 이야기해 볼 테니 여러분이 알아듣는가를 봅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에다 불을 지르겠다. 그리고 그 불을 지른 당사자가 바로 하나님이고 혹시 거기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불 지른 그 대가를 혹독하게 받으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 불을 일으켰구나.’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선지자가 한 이야기에요. 그러면 선지자가 한 이야기, 남방 삼림을 울창하든 아니든 다 불로 싸지르겠다고 할 때, 방금 한 이런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전달할 때 상대방이 못 알아듣겠다는 이 말은 그 흐름을 모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것, 그래서 못 알아듣겠다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한테 그런 모진 일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착하지요, 하나님은 자비롭지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잖아요. 밤중에 술이나 마시고 남의 오토바이나 차에 불 지르는 것은 세상에 불만 가득한 정신병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의 한 복판에 불을 지릅니까? 신나 뿌리고 불 지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선지자가 이야기하고 예수님이 이야기하고 성령 받은 사도들이 이야기할 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그 말은, 문장이나 말의 흐름을 못 알아듣겠다는 말이 아니고 그럴 리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이야기한 것은 딱 하나에요. 그 하나님을 바꾸면 안 되겠느냐, 그 이야기를 한 겁니다. 하나님을 바꾸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바꾸게 되면 불 지르시는 하나님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바꿀 필요가 없는데 왜 바꾸느냐고 나오는 거예요. 아까 고르기아스가 이야기한 것, 진리는 없다, 있어도 모른다, 안다 해도 남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소통이 불가하니 결국 우리에게는 진리가 없는 셈이 된다고 이야기했는데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이 어두운 세대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때 우리가 ‘아이고, 그럼 바꿔야지. 선지자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불 지르는 하나님, 그것도 지옥불로 확 질러버린다, 그럼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말인데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말을 못했네.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생각을 한 번 해 봐야 되겠네.’라는 생각으로 안 바꾸는 이유가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그렇게 선지자나 성령 받은 사도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안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자기 집의 개 좋아해요. 우리는 나를 좋아해요. 나를 좋아하기에 나를 좋아하는 조건하에 그게 하나님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우리가 좋아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 인생이 제일 중요하고 좋아하는데 거기에 지옥 불을 이야기하고 불 싸지르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니까 이것이 설사 진리라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싫어요. 왜냐, 우리는 육신이기 때문에. 정답 나왔지요?


선지자가 되었든 사도가 되었든 성령 받은 사람이 누구 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육신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육신 보고 이야기할 때 육신은 그 말이 듣기 싫을 때 비로소 그동안 감추었던, ‘나는 육신이었다.’는 것을 폭로당하고 노출당하는 순간입니다. ‘아, 내가 육신이구나. 나는 나만 좋아했구나. 나는 나 좋아하는 식이 아니면 다 고개 돌렸구나. 그래서 무엇이 진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나에게 이익인가? 무엇이 나에게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는가?’ 그것부터 생각하는 육신, 우리가 육신이었어요.


예수님이 오늘, 9월 12일에 우리에게 온다 해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좋아합니다. 왜, 예수님 말을 못 알아들어요. 무슨 내용인지는 알지만 그것을 수용하기가 싫어요. 만약에 예수님 말을 수용해 버리면 우리는 나를 미워해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세상에, 나를 미워하게 된다면 그동안 살아보려고 애쓴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어요. 다 소용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다른 것은 다 미워해도 나 자신만은 미워하지 않기에 예수님 말은 한 번 듣고는 두 번 다시 듣기가 싫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하면서 얼마나 답답해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출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과 사라 계통, 성령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육신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율법아래, 저주 아래 육신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하갈 종류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서로 맞지 않는 자식 둘이 있는 이유는 이 세상을 그와 같이 둘로 나누기 위함입니다.’ 그걸 가지고 두 언약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육신으로 난 사람에게 핍박을 받아야 된다.’고 합니다. 핍박받는 것은 싫어요. 우리는 남에게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육신이기에 모든 말씀이 내 앞에 다 싫어요. 성경 어느 대목도 다 싫어요.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합니다. “네가 하는 이야기는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우리가 못 알아듣도록 꼭 비유로 이야기하는가?”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그 당시 교인들도 듣기 싫어했고 오늘날 우리도 듣기 싫어하는 비유 하나, 사실은 비유가 아닌데 이 에스겔 20장에서 보면 비유가 되는, 듣기 싫은 소리가 되는 그 비유가 나와요. 6장 7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차라리 당해버려라, 당했다고 고소하지 말고 차라리 속는 것이 더 낫다는 겁니다. 보세요. 사도바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사람들의 심장을 뒤집어놓습니까? 아예 화병 나게 만드는, 무리하고 무모한 언사를 쏘고 있는 거예요. “사도님, 제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하고 상담하니까 차라리 사기 당하세요,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게 무슨 상담이 됩니까? “사도님, 남편이 바람 피웠습니다. 그래놓고 그 여자하고 살겠다고 저보고 이혼하자고 요구를 합니다.” “차라리 이혼 당하세요.” 이게 무슨 기쁜 소식이 돼요?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봅시다. 로마서 8장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 성경 로마서 8장이나 빌립보서 1장 29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제가 예수 믿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 뒤에 흐릿하게 뭐가 붙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 제발 인생 살면서 힘들게 살지 말게 해주세요.’라는 것이 붙어 있어요. “제가 예수 믿고 교회 다니고 하나님 잘 믿고 싶고 잘 믿겠습니다.” 그 뒤에 우물거리면서 뱉지는 않아도 슬쩍 갖다 붙이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도 제가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라는 것은 절대로 안하고 반대로 해요. ‘제발 이 힘든 인생, 나를 그만 괴롭히소서. 왜 자꾸 예수님이 나를 괴롭게 하십니까? 잘 믿으려고 하고 잘 믿고 있는데 언제까지 나를 힘들게 할 건데요?’ 이것이 뒤에 붙어 있어요.


그러면 사도가 귀를 잡아당깁니다. “내가 준 편지 다시 보자.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던가? 대체 네가 잊을 것을 잊어야지. 빌립보서 펴 놓고 다시 보자.” 하면 뭐라는 줄 알아요? “안 볼 거야. 그 대목 안 볼 거야. 성경 다른 대목 보지 그 대목은 안 볼 거야.” 제가 요새 매일 당합니다, 매일 당해요. 내가 좋아하는 소리만 듣고 내가 싫어하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도도 마찬가지로 성령 받았기에 육이 있는 사람한테 그렇게 당했습니다. 심지어 고린도교회가 단체로 사도를 거짓 목사라고 공격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 배신당한 거예요. 가짜가 와서 사도바울, 진짜 사도를 마귀의 종이, 육신의 종이 와서 성령의 종을 가짜 사도라고 공격하고 있는 형편에 있습니다. 그럴 때 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그것은 사도의 편지에 보면 나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다 예수 안에서 ‘예’가 되고 ‘아니오.’가 안 되지요. 이렇게 당하는 것조차도 내가 당해야만 하기에 당해야 된다는 것을 내가 수용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은 나 편하자고, 내가 구원받으라고 이 세상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복음은 반드시 복음 믿는 사람이 고난 받게 되어 있다는 그 원칙이 원칙대로 잘 돌아가기 위해서 고난주는 자들이 고난을 나에게 줘야 된다는 것을 내가 믿음으로 수용하게 하시고 이 현실이 하나님이 만드신 현실인줄 알고 모든 일에 기뻐하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사도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고난당했고 어디서 불평을 합니까? 당해야만 복음이 복음대로 드러나는데요. 복음이 위주지 내가 위주가 아니거든요. 우리는 이 세상이 어두움의 세상이라는 것을 깜빡깜빡 잊어버려요. 돌아서면 잊어요. 세상에서 환영받고, 세상에서 칭찬받고, 세상에서 사랑받고……, 이것은 우리 육신의 본성이고요. 예레미야 20장 7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탄식을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태중에서부터 선택된 사람이에요.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선지자인데 그래도 힘들었던 모양이지요. “하나님이여, 사람들이 종일 나보고 욕을 합니다.”


그것보다 더 심한 것은 조롱한다는 겁니다. “얼레리꼴레리! 저 혼자 믿음이 좋단다.” 이런 식으로 조롱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가 너무 괴로워서 ‘나 이 짓 안 한다.’ 하고 때려치우려고 할 때 9절에 보니까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전해도 문제고 전하지 않으면 더욱더 괴롭고, 그래서 14절, 1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내 생일을 저주한다는 겁니다. ‘HAPPY BIRTHDAY TO YOU’ 가 아니고, ‘HAPPY’가 아니고 ‘UNHAPPY’, “나는 내 생일을 저주 합니다.” 18절에 보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하나님이여, 내 팔자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내가 괜히 태어났어. 괜히 태어나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어.” 이것이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생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은혜로 주신 것은 믿을 뿐만이 아니고 그 이름으로, 그 복음으로 고난도 함께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줬습니다.


고난을 면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 믿는다, 고난 받는다, 이것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떨어지게 되면 가짜 예수에요. 진짜 예수님은 십자가를 졌기에 그 십자가 진 것은 ‘너도 나처럼 십자가 지라.’고 한 고난이기에 그 고난은 내가 자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서 나에게 고난을 줘요. “제발 우리가 좀 알아듣는 소리를 해줘.” 알아듣는 소리라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면, 나에게 이익이 되는, 육신이 원하는, 성공하고 잘되고 사랑받고 예쁨 받는 그런 복음, 우리 보기에 진짜로 기쁜 소식의 이야기를 좀 해 달라는, 그러면 믿지 말라고 해도 내가 믿어준다는 그 소리를 늘 듣고 있습니다.


참 밭에 가서 호박순 따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계속 따고 있을 때 뭘 느끼느냐 하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도 못 알아듣는 그 느낌과 똑같이 느껴져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성경에 그것이 어디에 있으며 성경전체와 그것이 맞는지를 찾을 생각은 안하고 자기 육신에 안 맞는다는 거예요. 선지자 중에서 아주 도발적인 이야기,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 예레미야도 자기 태어난 생일을 저주한다고 했지만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미가 2장 6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미가 보고 “야, 예언하지 마.” 하는 거지요.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너는 왜 자꾸 우리보고 욕을 하는데?”라고 미가 선지자보고 조롱하고 있고 욕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까 자꾸 욕을 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 처가 집안이 애국지사 집안입니다. 할아버지가 감옥에 갔어요. 그럴 때 처가에 가면 그 애국지사 할아버지를 전부 다 존경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입맛만 다시고 콩고물만 바라볼 때에 진짜 먼저 깨쳐서 나라를 살리겠다고 일제에 항거하다가 투옥되어서 지금도 의성 가면 그게 기념관에 있거든요. 그 후손들이 그런 선조가 있다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해요.


제발 이 교회나 이 복음 아는 동네만이라도 그리스도 이름으로 고난 받고 고생하는 것을 좀 애국지사처럼 좀 자랑스러워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데 이상스럽게도 분위기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부끄럽게 여기는 거예요. 복음 안다 해놓고는 “교인 몇 명인데? 헌금 얼마 나오는데? 복음 안다 해놓고 애들은 지질이 공부도 못하고 생활고에는 왜 그렇게 시달리는지. 하나님이 진짜 살아있다면, 진짜 네 말대로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이 그대로 맞다면 하나님이 너를 팍팍 도와주시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수천수만이 모여야 제대로 전하는 것이지 복음을 네가 전해도 먹히는 사람이 없는데 이게 무슨 복음 전한거야? 가짜지.” 도리어 부끄러운 존재처럼 그렇게 인식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을 봅시다. 선지자들이 어떻게 살았고 스데반집사가 왜 죽었는지, 열 두 제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사도의 편지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신다는 사실이요.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줬다 했습니다. 예수 믿고 만사형통한다는 그런 대목은 없어요.


잘된다는 말은 좁은 길로 가는 그 길로 잘 이끌려 간다는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끼리 마음속으로 약속을 합시다. 예수 믿고 고난 받거든 ‘야, 이 동네도 애국지사가 하나 났다. 참 가문의 영광이다. 세상에, 아직도 성령 받은 사람이 있네. 나는 예수 믿어도 고난도 없고 믿는 건지 뭔지 모르겠다. 정말 부럽구나. 나는 예수 믿고 언제 고난 받느냐.’ 하고 오히려 부러워하고 격려하고 그리고 그 분 안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고자 이 에스겔 본문 말씀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불을 질렀다. “맞습니다. 이 육신은 불 지름을 당하고 그슬려야 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마땅히 그렇습니다.”라고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참, 주님이 안하면 내가 내 인생 불 지르고 싶어.’라고 할 정도로 선지자를 통해서 바르게 전하는 그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그 깊은 의미,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이제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변의 애국지사가 그렇게 부러운 것처럼 우리도 주를 위해 고난 받는 사도들을 부러워해야 되는데 우리는 도리어 단물만 빼먹으려고 교회 나와서 예수 믿으면서 자기 이익만 챙기고 자기 영광만 챙기려는 이 얄팍한 것이 주님 앞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희가 알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워도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영광으로 알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