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슥1장18-21(네 뿔)1309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장 18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4페이지입니다. 스가랴 1:18-21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 치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사람이 사람하고 상대하면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쪽은 사람하고 상대하고 또 어느 때는 천사하고 상대하고. 천사하고 상대하는 게 본업인지 사람하고 상대하는 게 본업인지, 우리 같으면 참 헷갈릴 거예요. 오전에 사람 만나고 오후 2시부터 천사하고 미팅하고, 그러면 어떻게 살란 말이에요? 천사하고 살라는 건지, 사람하고 살라는 건지,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전, 오후 내내 일상의 사업체에 나가서 일하다가 오후에 성경 공부하러 왔을 때 성도하고 같이 만날 때 천사하고 만나는 그런 기분이 들겠죠. 오전에 사업한다고 되도 않은 한 푼 더 깎으려고 하다가 이 교회 와서 ‘죄인입니다.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습니다.’ 라고 이걸 자랑하는 천사들과 만나면 스트레스 확 풀리지 싶어요. 스트레스 풀리는 건 좋은데 문제는 어느 점에 내 자신의 마음을 어느 쪽에 놓아야 될지, 참 헷갈리는 거예요. 그래서 기껏 하는 절충안이 가랑이를 째는 겁니다. 한쪽 다리는 이쪽에 걸치고 한쪽 다리는 저쪽에 걸쳐서 가는데 나중에 가랑이 별로 편하지 못해요. 한쪽으로 모아야 되는 겁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이렇게 천사 만났다고 좋아할 입장은 못 됩니다. 그만큼 특수한 사명 때문에 특수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영혼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동시에 본인도 말씀에 의해서 변화되는 그런 과정을 보입니다. 그 변화의 과정은 딴 게 아니에요.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라는 그 고백, 엘리아처럼 ‘예수님, 언제 내 죄를 해결하려고 돌아가실 수 있습니까?’ 하는 그런 물음, 실컷 계시 받아놓고 나중에 나오는 고백은 ‘그러니까 주님이여, 내 죄를 해결하려고 언제 돌아가시는데요?’ 결국은 엘리아, 모세도 나중에는 십자가밖에 없잖아요. 내가 알아서 내 문제 해결하는 게 아니고 내가 아닌 다른 분이 내 문제를 해결해 줘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알기 전에 앞에 있는 작용은 무슨 작용이냐? 잔디 깎아내는 작업, 벌초하는 작업이 시작되는 겁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자식 잘 키웠는데 50중반 돼서 암에 걸렸어요. 그래서 암 치료받는다고 머리를 홀라당 다 깎았어요. 벌초한 겁니다. 그래서 가발 쓰고 그러니까 가발 잘 나왔다고 그걸 기뻐하는데.
천사가 왔다는 말은 뭐냐, 벌초하겠다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시간 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처음이 무엇이며 끝이 무엇인지 모르거든요. 중간에 끼다 보니까 이끼, 녹조가 많이 꼈어요. 그것을 말끔하게 걷어 내게 되면 그걸 어려운 말로 시원적이다. 원초적이다. 오리지널이다. 오리지널 인간은 신 앞에 어떤 존재냐, 그걸 밝혀내는데 이 천사가 여기서 동원됩니다. 천사가 동원되면 천사가 뭣을 가져오느냐 하면 지도책을 가져와요. 이 지도책은 우리가 세상 내 살기 위해서 하는 지도책하고 전혀 다른 지도책입니다. 제가 책을 보다가 어떤 지도를 봤는데 그 책 내용이 무슨 내용이냐 하면 14세기 때 네덜란드가 세계 최초로 해상무역을 시작한 나라거든요. 이태리의 밀라노하고 네덜란드하고 경쟁적으로 중세 끝나고 근세 유럽 무역의 노선을 장악한 거예요. 그래서 모피를 만들었고 그 모피의 원료인 양들을 키우기 위해서 영국에서는 엔크로져 운동해서 양을 키워서 무역을 했던 그 내용을 보는데 지도를 보여줘요. 지도가 낯선 지도에요. 뭐냐 하면 지구본을 네덜란드 위주로 납작하게 눌러버렸습니다. 눌러버리니까 네덜란드가 한복판이고 저 일본하고 한국은 이상한 곳에 와 있고. 그동안 우리는 세계지도, 세계지도 하지만 관심사는 내가 속해 있는 나라 중심으로 세계를 재구성해서 보는 그러한 못된 버릇이 있었던 거예요.
대구에 살면 서울 땅 값보다 대구 땅 값에 더 신경 쓰고 전세 값도 대구 전세 값에 신경 쓰고, 항상 내가 여기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세상이 내가 사는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 억측, 말도 안 되는 이 고집, 이걸 무슨 수로 벌초합니까? 이때 천사가 오시는 거예요. 천사가 와서 새로 작성된 지도책을 가지고 옵니다. 그 지도책이 뭐냐 하면 19절에 보면 “네 뿔이 보이기로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여기 지명이 나오죠.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지명 중심으로 세상을 천사는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제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이 세상의 시원(始原), 오리지널, 진짜 이 세상의 진리가 궁금하십니까? 그러면 예루살렘에서 터져 나오는 사건들이 바로 그동안 시원에 감춰져 있던 본래적인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 원칙을 담고 있습니다. 이걸 천사가 지금 우리보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면 오랜만에 고향에 이렇게 전혀 개발되지 않은 그런 고향에 내려갔다 칩시다. 가게 되면 서울 살다가 영천 변두리에 고향이라고 가니까 고향 집을 찾을 수가 없어요. 왜냐, 아파트를 다 지어버렸어요. 그럴 때 오랜만에 고향 온 그 청년은 그때 초목이 무성했던 언덕바지 찾는다고 애를 먹어요. 날라 가 버려서 없죠. green grass of home. 푸른 초원이 있던 그 집을 찾아가는데 아파트가 들어서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 찾아갈 때는 자기의 새로운 옛날 지도를 가동시켜야 돼요. 뭐냐 하면 아파트를 밀어붙이는 거예요. 상상 속으로. 아파트를 다 밀어 붙이고 거기다 옛날 우리 조상 무덤 몇 개 놓고 초목을 색깔을 입히는 거예요. 입혀 놓고 ‘자, 이모 집이 어디쯤 되더라? 이모 집이 언덕배기인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아파트 뒤편에 아파트 그림자에 가려서 아직도 똑같은 슬레트 집이 있는 이모 집을 발견해서 ‘아이고, 이모 집에 계십니까?’ 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그 천사의 계시를 우리가 받았으면 서울 중심, 뉴욕 중심, 영국 런던 중심 하지 말고 그걸 전부 다 밀어붙이고 무슨 중심? 예루살렘 중심으로 다시 그 자리에 와야 오늘 본문 해석이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 중심으로, 비록 한국 사람이지만. 중국사람 같으면 베이징 중심으로 하는데 북한 사람 같으면 평양 중심으로 하는데 그러지 말고 예루살렘 중심으로 다시 끌어당기는 그러한 요청을 스가랴 선지자가 우리보고 부탁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볼래? 거기서 일어난 사건은 좀 특이하데이.’ 그럼 그 특이한 사항이 뭐냐, ‘니 머리 홀라당 벌초 해버린다.’ 이 모든 것을 깎아버리는 거예요. 깎아 세우게 되면 그럼 인간이란 것은 뭐냐, 인간은 딴 게 아니에요. 인간은 그냥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그게 인간 이예요. 인간이 걸치고 있는 모든 문화 같은 거예요. 종교, 문화 다 홀라당 벗겨 버리면 딱 남는 게 달랑 그거에요. 내가 사느냐, 내가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래서 지금 잠시 결론 내리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원초적인 것은 뭐냐 하면 ‘네가 살 인간이라고 생각하느냐? 실은 네가 죽은 인간이야. 확인하고 싶어? 예루살렘에 가봐.’ 요겁니다. ‘네가 지금 살았다고 우기느냐? 내가 보기에는 너는 죽었어. 살고 싶어? 예루살렘에 가봐. 거기는 영원한 샘물이 있을 거야. 예루살렘에 가봐. 거기는 널 살려주는 어떤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거기에 주어져 있어. 빨리 가. 천사 말대로 빨리 가봐.’ 이렇게 되는 겁니다. ‘너 시드니 포기하고 서울 포기하고 대구 포기하고 빨리 예루살렘으로 가봐.’ 지금 예루살렘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영적인 예루살렘으로 빨리 달려 가봐. 성경 말씀 속입니다. 가봐.‘ 그러면 거기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이 어딘지 여러분 좀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만 궁금한데 궁금 안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예루살렘이 어딘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인데 잘 아는 말씀이니까 찾을 필요는 없고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크리스마스 때 듣던 이야기죠. 주일학교 암송 구절이 되겠습니다. 그 지경에 목자가 있었는데 목자는 베들레헴에 그냥 취직한 아르바이트 학생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간에 밤 근무에 야간 업무를 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여기 천사가 나타났어요. 초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뭐 천사 오라고 기도한 적도 없어요. 천사가 오면서 새로운 지도가 자기한테 덮칩니다. 그 지도내용에 보니까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만 구원받는다는 내용이 그 지도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도록 작정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이 기뻐하는지 안 하는지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모르잖아요. 누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인지, 누가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고 딱 그걸 전제로 깔고 그 다음에 지시가 뭐냐 하면 ‘빨리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만나 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게 오리지널입니다. 아기 예수가. ‘빨리 가서 아기 예수가 누운 것을 보라.’ 그 인간은 나중에 로마서에 나오지만 그 인간은 두 번째 아담이고 새로 시작할 아담의 노선, 영생 얻을 사람들의 새로운 노선이 그 아담으로 태어난 분이 바로 아기 예수로 태어났으니까 ‘빨리 가서 만나 보라.‘고 했습니다. 밤 근무 잘 했죠? 아마 밤 근무 안 하고 PC 방에 밤샘 했으면 천사가 모를 거예요. 왜, PC 방에 담배를 많이 피우기 때문에 모를 수가 있어요. 어쨌든 목자가 볼 때 천사가 왔습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원초적인 것을 알려 줄 때는 우리 인간의 천재나 철학박사나 과학박사의 지식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천사가 와서 그냥 알려줘야 돼요. 천사가 와서 알려줬는데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백날 있어도 천사가 오지도 않는데 우리는 끝났네.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사보다 더 확실한 것 가지고 우리한테 오십니다. 그게 말씀 이예요. 성령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너 천사 만나기 위해서 대기하라.’ 이런 것 없습니다. ‘기도원에 어디 가서 기다려라.’ 이런 거 없습니다. 그냥 니 코 앞에 니 눈 앞에 말씀이 있으니까 그 말씀을 마음으로 믿으면 니가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 10절.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 천사도 못 만나고 저리 가.’ 이런 거 없어요. ‘구원 받고 싶어?’ 천사도 흠모하는 분이 오셔서 완성한, 이제는 천사보다 더 대단한 분! 성령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 믿어지도록 조치하기 때문에 구약에 나오고 또 십자가 이전에 나오는 천사들에 대해서 너무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달려갔습니다. 우리가 목자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자 중에 평화로다.” 라는 소리를 듣고 아기 예수가 연결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만 천사가 있는 곳에 합류할 수 있다. 이런 게 기뻐서 보니까 과연 아기 예수가 있었어요. 제가 여러분한테 여기서 묻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있다. 없다.’를 여러분이 역사 속에서 어떤 경우를 가지고 ‘그래, 나는 지금 곧장 죽어도 천당 가. 나는 죽어도 하늘나라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야.’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어떤 경우를 가지고? 내가 병에서 낫기 때문에 난 신자가 확신해. 그런 겁니까? 어떤 경우가 나로 하여금 내가 곧 죽어도 오늘 밤에 낙원 갈 정도로 확실하다 하는 그러한 증거가 뭐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여기 목자 입장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봐도 만남이 아니고 이미 예수님 만나기 전부터 예수님이 뭐하시는 분이라는 걸 알고 아기 예수를 만난 거예요. 목자는 아기 예수가 존재하는 걸 보고서 천사가 하는 일이 이게 농담이 아니고, 이건 진실이라는 사실로 아기 예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뭐 더 이상 흐리멍덩하게 노느냐” 이 말이죠. 기도했더니 돈 벌었다. 그런 거 말고 십자가가 코앞에 있고 눈앞에 있는데,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끝난 문제 아닙니까? 더 이상 어떤 증거를 찾습니까? 어떤 아저씨 죽었다가 살아난 거? 그건 어떤 아저씨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예수님이. 예수님이 죽었다고 살아났다는 말은 그분이 첫 열매고 우리는 그 다음 차례다 말이죠. 무슨 증거를 찾아요? 사업이 되고 안 되고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세요.
자, 그러면 이야기가 중간 쯤 왔습니다. 중간 쯤 왔다는 것은 그렇게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의 십자가 사건, 예루살렘이 메시아가 죽는 사건이 일어나거든요. 그것이 오리지널이거든요. 그걸 가지고 당겨서 다시 소급해서 스가랴 오늘 본문을 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라고 스가랴가 천사보고 물었어요. 이제 답변은 우리가 할 차례입니다. 스가랴가 우리보고 묻습니다. ‘이 목사’ ‘네’ ‘네 뿔이 내 눈에 보이던데 저게 뭐지?’ 스가랴는 그 당시에 천사보고 물었지만 정답은 사실은 우리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네 뿔이 무엇이냐? 하거든요. 그 뒤에 나오는 천사의 답변을 살짝 바꾸세요. 먼저 천사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라고 돼 있죠.
요걸 이미 신약에서 정답을 아는 입장에서 이걸 바꾸겠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성도를 헤치는 자들이 그 뿔입니다. 요렇게 정답을 내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뿔은 노리는 게 있어요. 뿔은 뭐를 노리느냐, 예루살렘을 노렸던 겁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누가 노립니까?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는 헤롯왕과 그 부하들이 아기 예수 잡아 죽이려고 베들레헴의 두 살 밑의 애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스가랴 이 예언이 장난이 아니고 농담이 아니고 요게 실현되는 거예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라는 그 당시에 있었던 어떤 공동체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부터 새로 시작합시다. 모든 개념과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율법, 약속 모든 것은 예수님부터 새로 시작하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그들이 이스라엘이요, 그들이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겁니다. 새 예루살렘 하니까 이거 거리에서 많이 듣던 교회 이름 같기도 하고 이 초석 교회, 이 초석 교회는 딴 게 아니에요. 약, 물드시면 영생 얻습니다. 이건 관세음보살보다 더 간단해요. 나미아비타불 외우면 극락 간다는 불교보다 더 간단해요. 요거 물 돈 주고 물 쓰시면 영생 얻습니다. 왜, 내가 안수했기 때문에.
우리 같으면 세상에 말도 안 되는 걸 믿나 하지만, 병 걸려 보세요. 믿지, 지푸라기라도 잡게 돼 있어요. 성도가, 목자가 그 교회 당회장 된 게 아니에요. 아기 예수 본 목자가 갑자기 로또 복권 당첨 된 거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뭐냐, 아기 예수를 봤고 천사 말과 아기 예수를 연계하면서 이해할 수 있다는 그 안목이 열렸다. 그 뿐 이예요. 그런다고 취직 시켜주고 그 다음부터 밤 근무 바꿔주고 그런 거 일체 없습니다. 보너스 없어요.
성도에게 주어진 것은 뭐냐 하면 그 아기 예수, 그 십자가와 나의 운명과 연결돼 있다 이 말이죠. 결부돼 있어요. 지금 몇 년 살았느냐 하는 그것은 하나의 아파트 단지입니다. 주택지입니다. 주택지를 확 밀어버렸어요. 벌초하세요. 확 밀어버리면 초목지만 나타나고 옛날에 있던 조상의 무덤만 나타나죠. 벌초해 버리면 원천지만 나타나죠. 원천지가 나타나는 게 뭐냐 하면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말이죠.
사람이 아무리 살아도 결국 죽으면 그만이잖아요. 이건 오리지널과 연계가 안 됐기 때문에 그냥 눈앞에 보이는 것 가지고 복 달라고 기도하는 거, 이거는 다 가짜 예루살렘 이예요. 진짜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알려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겁니다. 그 십자가와 관련될 때 이 세상에 있던 것은 뭐냐 너를 공격하고 예수님한테 손을 놓기 위해서 작용하는 그러한 것들에 네가 포위돼 있다는 겁니다. 네 뿔에게.
뿔이 하필 왜 네 개냐? 물론 그 당시에는 네 뿔 맞아요.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분명이 네 개가 맞는데 그것도 맞지만 지금은 네 뿔이라 하는 것은 실제로 그 당시에 이스라엘을 공격했기 때문에 1차적인 정답은 맞아요.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네 뿔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 자체가 성경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이라 하니까, 그런데 왜 한 뿔이 아니고 네 뿔이냐, 이게 넷이란 사방, 동서남북 어디 가도 그 뿔들은 성도를 알아먹어서 공격하게 돼 있습니다. 학교 취직하면 거기도 뿔이 있고 회사 취직하면 거기도 뿔이 있고, 농사지으면 옆집이 뿔이고, 기도하러 가면 옆에 기도하는 사람이 뿔이고 모든 것이 십자가를 공격하는 그런 건데 이거는 사람 눈에 띄지 않고 천사들만 아는 거예요. 왜, 오리지널이니까.
뭐 교회가 어떻게 됩니까? 교회를 밀어버리세요. 바리캉 가지고 교회를 백번 쳐서 교회를 밀어버리면 그렇다면 남는 것은 교회가 남는 게 아니고 ‘나 목사 해서 살 거냐. 죽을 거냐.’ 결국은 누구나 사느냐, 죽느냐, 이것만 남았어요. ‘아, 나 저 집이 부러워. 저 사람이 부러워.’ 제발 좀 거짓말 하지 마. 저 사람이 부러운 게 아니고 저 사람 가진 돈이 부럽겠지. 왜 자꾸 거짓말 하는지 몰라요. 나 저 교회가 부러워. 저 교회가 부러운 게 아니고 저 예배당과 많은 수의 교인과 헌금이 부럽겠죠. 하여튼 전부 다 도둑놈 심보라. ‘부러워’ 하는 말은 뺏고 싶다는 말 이예요.
개그 콘서트 코너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신입에게 ‘잘해. 밥 빌어먹고 살겠어? 이렇게 전화하게 되면 뺏는다.’ 여자 개그맨이 요렇게 뺏는 표정을 해요. 얼마나 그게 현실감 있는지, 아주 감탄을 했습니다. 보이스 피싱 이야긴데 ‘신참아. 니가 똑바로 해야 돈을 요렇게 빼앗는다.’는 거예요. 요 모습이 오늘날 우리 모습, 누구한테나 빼앗는 거. 교인 하나 교회 오면 돈을 목사가 빼앗는 거, 전부 다 요것(빼앗는)만 생각하는 거예요. ‘신참아,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래서 밥 먹고 살겠어? 너 오늘 몇 건수 했어? 이거 밥 먹고 살겠어?’ 연변 말 하면서 하는데, 오리지널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 뿐 이예요. 단지 그것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해결책 없죠. 전부 다 무슨 수로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20절에 보니까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이 공장이란 한글로 공장이니까 나일론 공장 같지만 공장이 아니고 대장장이입니다. 대장장이 넷을 보였습니다. 대장장이니까 대장장이가 있는 곳을 가지고 세 자로 대장간, 거기서 책을 내면 대장간 출판사가 되는 겁니다.ㅎ
이 대장간에 있는 대장장이들이 이 뿔이 있으니까 그걸 부수는 거예요. 뿔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부럽다 하는 그것입니다. 뿔, 그런데 왜 네 뿔이냐, 어디 가도 예수님보다 더 원하고 싶은 부러운 것들이 거기 다 있다는 거예요. 그들이 우리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고 되레 반대로 우리가 그것을 그리워하고 부러워하는 겁니다. 예수 믿어도 소용없다. 나 저거 가졌으면 좋겠어.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미혹 덩어리를 우리가 어디 가도, 우리가 미국 이민 가도 또 부러운 것이 있고 저 서독 가도 부러운 것이 있고, 영국 가도 있고 전부 다 이 세상에는 그저 인간의 눈앞에는 빼내는 것, 내가 부러워 할 것들만 눈에 띄게 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 휴가를 갔다 합시다. 휴가를 가게 되면 계곡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허름하게 왔는데 어떤 사람은 3백 만 원짜리 텐트 치고 있을 때 그게 부러울 때 그게 뿔 이예요. 그럴 때 여기 대장장이, 천사죠. 천사가 와서 고거는 천막 철거 전문 천사로 그걸 부숴버립니다. 그런 거 부러워하지 말고 아기 예수 만난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주는, 그래서 우리 속에서 부러운 줄 알면서도 그게 나의 궁극적으로 오리지널 죽느냐, 오리지널 사느냐, 문제는 그 내가 현재 부러워하는 것이 그걸로 결정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러한 천사를 우리 밑에 또 따라 붙이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뿔들 속에 우리가 그리워하고 갖기를 원하는 우리 속에 도둑놈 심보를 자극시키는 그 세상 속에 흠뻑 젖어 있습니다. 주여, 예수님이 무슨 의미인지를 우리는 잊어버리지만 다시 한 번 세상을 빈 터에서, 황무지에서 다시 볼 때에 예루살렘이 보이게 하시고 십자가가 보여서 결국은 살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