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슥1장7-12(네 천사)1309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장 7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3페이지입니다.
스가랴 1:7-12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여기 다리오 왕이라는 사람이 다리오스라고 하죠. 이 사람은 이년에, 기원전 520년입니다. 이 다리오 왕이 실제로 역사에 있습니다. 다리오 왕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와의 전쟁하는 모습은 대형 박물관에 안 가 봤습니다마는 대형 박물관에 거기에 조각 부조로 전쟁하는 게 있으니까 이 다리오 왕은 신제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여기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화석류는 석류나무라 하면 돼요. 석류나무 사이에 사람이 홍마를 타고 있다는 이 사실은 다리오 왕이 실제로 있는 것만큼이나 그렇게 유명하지를 않아요. 사실은 더 유명해야 되는데, 다리오 왕의 대형 박물관에 보면 거기 실제로 이렇게 조각품 나와 있지만 여기에 홍마 타고 자마 타고 백마 타고 어디 경마 합니까? 경마장의 기수도 아니고 이 사람들은 전혀 사진 찍힌 일도 없고 사람들이 성경 보고 그림을 그린 적은 있지만 실제 역사 속의 인물이라고 인정하지를 않고 있어요.
그만큼 이 세상은 이 스가랴에 나오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굉장히 아주 극렬하게 제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시키는 그런 힘이 인간 사회에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거기 같이 휘말렸죠. 같이 휘말려서 하나님의 계시, 천사, 그 보다는 그냥 똑같은 인간들끼리 까불고 뜯고 하는 그거, 그런 것만 좋아하죠. ‘잠시만요. 갈게요.’ 이런 것만 좋아하지, 천사들이 어떻게 활동하느냐, 여기에 대해서는 마치 없는 존재인 것처럼, 그리고 우리만 있는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몇 십 년 전에 유명한 CF 멘트에 이런 게 있어요. ‘니가 게 맛을 알아?’ 라는 게 있어요. 저는 여러분에게 그걸 약간 바꿔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답을 알아?’ 중요한 것은 정답입니다. 사람들이 까불고 뜯고 하는 이것은 제가 오전에 이야기했지만 다 변화되는 거예요. 변화되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정답은 동일해야 되거든요.
사람 하나 등장하면 정답 바뀌고 이러면 안 되고, ‘진짜 정답을 알아?’ 하는 요 이야기가 제가 여러 번 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여기 나타난 천사, 말 탄 이 사람들이 이 네 천사들이 우리보고 ‘너희들이 정답을 알아?’라고 이야기 했다고 생각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 세계는 마귀가 있어서 이 정답을 자꾸 밀어내죠. 우리 인간이 변화되는 그렇고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들끼리 뭉쳐서 한번 해보겠다. 요정도 국가 사회 경제 문화 요 문제 있지, 이런 천사가 전하는 이 소식에 대해서는 온 사력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진짜 목숨을 다하여 그걸 밀어 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않으려고.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에도 방문합니다. 그 소돔과 고모라 도시가 멸망했다는 소식은 알지만 천사가 거기에서 무슨 예언을 했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애써 그걸 알 들으려고 해요. 천사가 와서 심판을 해버리죠. 유황불로 변했습니다. 유황불이 떨어져서 말씀이 유황불로 변해서 그것이 소돔과 고모라를 전부 다 멸망을 해버리고 거기서 모압과 암몬이라는 족속이 처음으로 출생을 하는 겁니다. 롯과 두 딸이 관계를 맺어서 새로운 민족이 되는데, 천사가 이렇게 뭔가 방문을 할 때는 어떤 식으로 방문하느냐 하면 이렇게 인간들의 지속성을 토막을 낸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아주 생각이 간단합니다.
천사가 방문했다. 왜? 토막 내려고! 왜? 토막 내는 그 틈 사이에 정답을 심어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정답이 뭐냐? 스가랴 정답은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포기를 못하겠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사람들 즐기라고 있는 동네가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주기 위해서 만남의 장소를 하나님 쪽에서 만든 거예요.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한다 하죠. 만남의 장소가 거기 있다고 합니다. 서울역에 가도 만남의 장소가 있고 동대구역에도 만남의 장소가 있고 다 만남의 장소가 있어요. 특별히 아무데나 만나지를 못하고 특별히 하나님이 만남의 장소를 따로 지정한 곳에서만 하나님께서 만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그 모든 것을 다 거부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이것을 거부 하겠다 했는데 그러면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 뭐냐, 딱 두 가지에요. 첫째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걸 인정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우리 쪽에서 차근차근 다듬어 나가면 언젠가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는 만나는 방법의 오류가 없이 하겠다는 것과 하나님이 먼저 존재한다는 것과 그 두 가지를 우리가 먼저 수렴하겠습니다. 이게 인간들의 생각인 거예요.
첫 번째 봅시다. 신은 존재한다는 겁니다. 거짓말입니다. 신은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 말을 인간들이 합니다. 정답은 신은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고 다만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만 인간은 알게 돼 있습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만 사람이 알게 돼 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숨어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숨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는지를 인간은 몰라요. 그래서 인간들은 어떤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가,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냈습니다. 인간이 있다. 인간이 있다 중에서 ‘있다’를 따로 끊어내 버리면 ‘인간이 있다’에요. 인간은 키가 크다. 인간은 이빨이 있다. 인간은 눈이 있다. 인간은 뭐가 있다, 중에서 인간은 ‘있다’가 인간 속의 속성으로 인간이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 속에 이런 속성이 있는 걸 봐서 신이 있다면 인간의 속성을 전부 다 포함해서 있을 거니까 인간이 있으니까 있다는 존재한다는 속성도 신에게 그런 속성이 있을 게 분명하니까 신은 존재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뭐 들어봐야 뭐…ㅎ
길가에 강아지 있잖아요. 강아지가 있는 걸 보니까 반드시 주인이 있는 거예요. 강아지 속에 존재한다는 속성이 있는데 그 속성을 강아지 주인에게도 있으면 강아지 주인도 존재하니까 강아지 주인도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자기 딴아 지혜롭다고 끄집어냈는데 이게 유명한 신학자들이 그렇게들 언급들 했어요. 대전 가서 그걸 낱낱이 그 사태를 밝힐 겁니다.
‘하나님이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줬으니까 하나님도 섭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신은 계시다. 신은 계시다. 그러니 이 소리를 들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고 복 주고 싶어서 얼마나 환장하시겠는가, 그건 신이 있는 걸 눈치 챘으니까.
두 번째는 더 가관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신에게 나아가는 방법을 이 인간 쪽에서 차근차근 다듬어 나가면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신은 선하시기 때문에 악한 것을 제거하고 선한 것만 남기고 선한 걸 남겨서 선에다가 선을 보태고 선에다 선을 보태면 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것도 엉터립니다. 그 선함의 최고수가 누구냐?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선하다고 하는 짓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이었고, 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구냐 하면 사울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란 사람이 존재하신다는 신을 향하여 최고의 신에게 접근한 최고의 방법 중에 하나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사도바울이잖아요. 인간이 저질러 놓은 게 결국 뭐예요? 주로 이런 거예요. 천사는 ‘니가 게 맛을 알아?’ 인간은 정답을 알지를 못해요. 이 두 가지 다 성공하지를 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왔다 하는 것은 토막 낸다 하는데 이것도 뭔 뜻이냐? 쉽게 말씀드려야 되겠죠. 몸무게가 자기가 70킬로그램이라고 자기가 자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랜만에 저울에 올라가 보니까 75킬로그램이 됐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분명히 70에서 75되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70킬로는 71킬로를 거쳐야 되고 71은 72를 거쳐야 되고 72 안 거치고 70에서 73 바로 되는 법이 없어요.
제 말이 거짓말 하는 게 아니고 진짜입니다. 74킬로 본인은 저울 안 재봐서 그렇지만 분명히 74되기 위해서는 73을 이미 거쳤어요. 뻔해요. 73 거쳐서 74된 게 맞아요. 인간은 토막을 내고 싶어도 토막을 낼 수가 없어요. 뭐든지 연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라 하잖아요. 이게 인간이 안 돼요. 인간은 본인이 끊어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한번 이렇게 죄인인 인간이 그걸 개과천선한다. 반성한다. 그래서 의인됐다.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돼요. 죄인에서 의인으로 넘어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의인인 체 하는 죄를 더 지을 뿐이죠. 70킬로에서는 나는 잘났다 하다가 73킬로에서는 나는 죄인이라고 하면서 이미 또 72를 거쳐서 나는 죄인이라고 하면서 나는 전보다 더 착해졌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 반성, 그 회개, 반성과 회개를 모으고 모으면 그게 스펙이 돼서 나중에 하나님 앞에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아이디어, 그것이 인간의 아이디어입니다. 인간은 안 돼요.
그럼 누가 와야 되는가? 천사가 와야 되죠. 천사는 모든 걸 토막 내버립니다. 자, 토막을 어떻게 내는지 이거는 제 설교보다 이건 한도 끝도 없이 어려운 대목이 요한계시록 6장 1절에 나옵니다. 6장 1절 찾아보지 마시고 듣기나 하세요.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시는 그 때에” 첫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계속 천사들이 나타납니다. 둘째 인을 떼실 때에 생물이 나오고 붉은 말이 나오고 허락을 받아서 화평을 제하고 죽이게 하더라. 셋째 인을 떼실 때에 셋째 생물이 말하되 검은 말이 나오고“ 이렇게 돼 있어요.
자, 여기서 예수님께서 인을 뗄 때마다 제가 분명히 사람은 몸무게가 70에서 75까지 그냥 끊어지지 않고 연결된다 했죠. 인간의 역사는 끊어짐이 없어요. 이 순신은 분명히 이순신 아들이 있을 것이고, 끊어짐이 없는데 이 끊어짐이 없는 이 상어고기를 톰배기를 도마에 딱딱 끊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난도질을 해버리면 역사는 하나, 하나 토막 난 채 토막 나면서 동시에 역사의 정보가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던 것이 토막 나게 되면 어떤 관점으로 바뀌느냐 하면 토막 난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역사를 다시 보게 됩니다.
그 관점이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 그게 십자가 지신 분의 관점 이예요. 그래서 역사를 끊을 때는 70, 70이레 끊을 때는 거기에 반드시 뭐가 끊어지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그 끊어짐 속에 전부 다 하나, 하나씩 전부 다 오이소박이처럼 전부 다 십자가의 그 내용이 다 들어가신다고 보시면 돼요.
오늘 아침에 영천 화북에서 포도를 가져왔어요. 거봉인데 포도를 보세요. 포도는 우리 인간하고 달라서 알갱이, 알갱이 하나를 떼도 다른 옆의 포도가 아파하지를 않아요. 동그라미가 동글동글 달려 있어요.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만 빼도 아야, 하잖아요. 포도는 전부 다 떨어져 있어요. 그걸 보고 ‘저게 바로 은혜다.’ 우리 몸은 건드리면 화를 내는데 포도는 떼도 마치 ‘잡숴‘ 하는 식으로 그냥 다 떼서 주는 것 같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포도송이처럼 다 떨어져 있어요. ‘잡숴’ 하는 것처럼 주의 은혜를 그냥 줘도 되는 그러한 배치와 배열, 그런 구조로 돼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털끝을 건드려도 우리는 용서가 안 돼요.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 6장 이 대목과 오늘 스가랴 이 성전이라는 대목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표준말로 다슬기라고 하는데 경상도 말로 고디, 고디를 냇가에서 주워보면 재미가 나서 시간 가는 줄 몰라요. 그 아프던 허리도 3시간 있어도 아픈 줄 모르는데 다슬기를 하나 강바닥에서 주울 때마다 굉장히 기쁘죠.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그 되도 않은 자기 지속성, 그거 유지하지 말고 다 십자가로 토막을 끊어놓고 다슬기 줍듯이 새삼 하루, 하루를 이렇게 건지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우리에게 포도송이를 주는 것처럼. 네 인생도 네가 하나씩 다슬기 줍듯이 하나, 하나가 은혜의 줍는 고 맛으로 살아라. 이렇게 보시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의 몸체를 천사가 전부 다 다다닥 끊는 방법 밖에 없어요. 하나, 하나를 끊어줘야 돼요.
여러분, 주기도문에 이런 게 있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아침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광야에서 사람들이 죽은 이유가 물 없어 죽은 것도 아니고 먹을 게 없어서 죽은 게 아니고 주님 앞에 원망하다 죽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하늘나라는 물주고 빵 주는 데가 아니고 원망해서는 못 들어간다는 그걸 광야를 통해서 다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기도하는 내용들이 먹을 거 입을 게 아니에요. 우리 주제파악을 해야 됩니다. 우리 속에는 나의 지속이죠. 70, 71, 내가 끊어지지 않는 이 몸둥아리 이거 유지한다고 자꾸 주님한테 원망해대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는 나이고 싶고 나는 끊어지기 싫은데 왜 자꾸 하나님께선 내가 이 땅에 나를 유지하는데 힘들게 만드십니까? 정말 이렇게 나오기에요?’ 이런 식으로 기도한다 이 말이죠. 교회 와서 기껏 기도하는 게.
이게 참, 우리가 언제 포도송이가 될지. 딱딱 끊어져야 되는데. 차 위에다 기름 발라 놓고 비가 오면 비누 방울이 딱딱 끊어져서 앞이 훤히 잘 보여요. 그냥 하면 비 죽죽 내려가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여서 한 걸음, 한 걸음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루를 유지하고 지탱하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엘리아가 과부한테 그렇게 베푸는 것처럼, 그냥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아예 나의 것에 따로 지속성을 유지하는 어떤 덩치 같은 것을 따로 이렇게 두지를 않고 우리의 뜻이 매일같이 차단되고 그러면서 매일같이 새롭게 이어지고, 이어지는데 끊어짐과 끊어짐의 이어짐은 우리의 소망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해석이 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6장 이야기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성전을 불타게 만드는 그런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중에 일부가 너 자신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훼방하는 것이 바로 너 자신이다. 너는 너의 성전만 건립되기를 원했지, 진정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로서의 나를 제공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은 세상에서 너는 그만큼 배웠다는 거예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이제 스가랴 봅시다. 스가랴에서 다리오 왕 이년 BC 520년 십일월 이십 사일 날 하나님이 계시를 내줬습니다. 여기에 네 명의 사나이들이 말 타고 온 거예요. 이건 마치 미국 텍사스 주에 카우보이들이 모자 쓰고 네 명이 말 타고 앞에 쌍 권총 차고 그런 느낌을 보시면 되는 겁니다. 석류나무 사이에서 그들이 섰습니다. 백향목은 아닌 것 같고 석류나무라 하니까 보기에는 시시해 보이는데 하지만 뭔가 귀해 보이는 것 같은 가치가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그런 석류나무 사이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유다 백성을 대신해서 세상을 훑어보라고 하나님께 지시를 받았어요.
요거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네 명의 사나이, 카우보이가 말을 타고 세상을 돌아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일종의 요새 같으면 인공위성, 민첩성과 아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그러한 운송수단이죠. 운송수단을 타고 빠르게 세상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천사가 네 명이면 세상 구석구석까지 파악해서 했다는 거죠. 하면서 세상이 어떻더냐고 물어봅니다. 지금 그렇게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물어보는 이유가 지금 성전 지으라고 명령을 내린지 5개월, 축복한 지 2개월 된 시점에 너희들이 성전을 다시 지어야 될 이유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낸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전 지을 이유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왜냐 하면 자신의 지속성에 의하면 성전은 꼭 필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성전 없어도 밥 먹고 살잖아요. 교회 안 다녀도 한주일 동안 저주 받고 그런 거 없죠?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바로 내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하는 일은 전혀 내 일에 이익도 없고 보탬도 안 되고 내 인생에 대해서 뭔가 도움 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지속성, 오직 자기 편한 것, 이것만 생각하고 살아온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마디를 쪼개는 겁니다. 천사가 와서 ‘정신 차려라.’는 거죠. ‘너희들은 너희들 위해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속성을 위해서 너희들의 모든 역사는 하루하루 다 끊어지고 단절돼야 된다는 거죠.
쉽게 말해서 오늘 하루는 죽자. 내일 눈 뜨면 살려주면 살겠지. 이런 마음으로 살아라. 일용할 양식처럼 하루치만 그냥 살아버리면 고 하루, 하루치를 잇게 하는 것은 너의 욕망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명!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사명으로 연결되어야 이것이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도가 된다는 겁니다.
11절에 보니까 “온 땅이 평온하여 정온하더이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지으면서 그들은 뭘 생각했느냐 하면 자기의 편한 걸 생각해서 외부에 있는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우리를 압박하는가 보니까 조용하거든요. 그러니까 현재 이북이 개성공단 합시다.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 하자 하니까 군인들이 헬렐레 된 거예요. 전쟁도 없겠고 평화모드로 가니까 꼭 사격해야 되나, 훈련해야 되나. 이런 기분이다 말이죠. 꼭 기분이. 물론 진짜 사나이는 그렇지 않고 역시 빡세게 훈련하지만. 그건 진짜 사나이고.
전쟁이 없는 상태에서 군인이 훈련할 필요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성전? 성전 안 지어도 밥 먹고 사는데 꼭 지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왜 지으라 하지? 이런 식으로 세상이 더러우면 우리 성도도 같이 더러워지기 마련 이예요.
그렇게 해놓고 1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은 제켜놔 버리고 하나님하고 하나님의 천사 두 분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들이 정신 안 차린지 벌써 칠십년이 되었습니다. 벌써 이 사람들은 다 정신 나가서 자기 밖에 모릅니다. 언제까지 이래서 성전답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어서 칠십년 약속이 다 끝나가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지어서 옛날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백성으로 만들어 주옵소서.’라고 천사가 하나님에게 요청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을 스가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합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너희들의 운명은 너희들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천사 손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앞으로 중요한 것은 천사가 너희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천사로부터 사용 받고, 요새는 성령이죠. 성령으로부터 사용 받는 사람. 그 사람은 세상을 볼 때 세상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한 그런 악한 세상이라는 것이 늘 눈에 띄면서 하루하루를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이 하나님의 천사 소식과 예수님의 소식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세상인 것을, 그렇게 무서운 세상이고 위험한 세상인 것을, 왜 우리는 진작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저 자기 생활 어려운 것, 자기 형편 나빠 진 것, 자기 살기 어려운 것만 자꾸만 하나님께 원망해 대는데, 주의 성전 되게 하시고 사명을 회복해서 주께서 뜻이 있어서 그렇게 사용한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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