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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1깅-돌아오라(슥1;1-4)이근호120825

아빠와 함께 2013. 8. 25. 17:31

돌아오라 (스가랴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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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8-25 15:35 
                   돌아오라

2013년 8월 25일                          본문 말씀: 스가랴 1:1-4

(슥 1:1, 개역) 『다리오 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슥 1:2, 개역)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슥 1:3, 개역)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 1:4, 개역)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선지자들의 계시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숱한 선지자들이 주장들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무너지게 하거든 그냥 무너져라는 겁니다. 버티지 말고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꾸만 머리를 들고 버티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 대해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네 인생은 시작부터 무너지게 되어 있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아무리 자외선 차단제를 많이 발라도 결국은 우리의 정신부터 늘 조금씩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겁니다. 피부에 기미 끼는 것은 문제거리도 안 될 정도입니다.

처음부터 망가지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들도 만만치 않지요. 무슨 고집이 그토록 센 지 버틸대로 버텨보겠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이 고집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리오왕이 나옵니다. 이 다리오왕은 바사나라 왕입니다.

바사나라는 바벨론 나라와 마찬가지로 짐승입니다. 짐승의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보다 더 셉니다. 이스라엘은 그 나라에서 포로생활하게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짐승의 나라와 같은 형태로 하나님 나라를 구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 나라의 운영체계에 따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짐승의 나라의 마지막은 로마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나라들은 이 로마나라의 체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법치국가입니다. 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법에 준해서 백성들이 동의하는 자들에게만 시민의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이 곧 법치국가입니다. 만약에 이런 법을 무시하면 그 사람에게는 일시적으로 제한적으로나마 그 나라 시민이 아닌 것처럼 조치를 취합니다.

이는 곧 한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곧 그 나라의 헌법에 준수해야만 하는 조건에서만 성립됩니다.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생활하면 그 나라 국민으로서의 모든 혜택에서 배척받게 됩니다. 항가리에 있어 집시들이 이런 운명에 있고 동남 아시아에 있어 탈북자들이 이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어쨌든 법에 다한 동의가 관습적으로 유지되면서 국가는 운영됩니다. 그런데 이 법들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법은 이미 일어난 사건을 응고시켜서 재발을 방지하거나 장려하기 위해서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면, 둑을 쌓으면서 10m를 쌓았더니만 홍수에 무너졌다면 국가적으로는 15m 쌓으라고 조치가 내려오겠지요. 이게 법입니다.

이미 우연히 일어난 사건을 응고시켜서 규정해놓으면 그것이 법입니다. 이런 조치가 인간의 입장에서 얼마나 당연하게 정당한 조치라는 것은 새삼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법을 위반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국가 법을 위반했다고 사형시켰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부터 죄인으로 규정된 그분을 도리어 부활해내시므로서 유일한 의인으로 삼아버렸습니다.

여기서 인간나라의 한계와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들 끼리 아무리 정당해도 하나님에게는 전혀 정당하지가 않은 겁니다. 바로 이런 취지를 살리는 식으로 선지서가 설명되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 취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창조 배후에 심판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심판하시기 위해 창조하신 겁니다.

이것은 곧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보다 죽음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신 겁니다. 죽음 만들어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드시는 과정에서 죽음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사람이 처음 만들어진 환경은 온통 죽음과 통해서 전선으로 연결되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잘못 건드리면 터지게 되어 있는 전선말입니다. 과연 인간은 무심코 건들었고 세상은 무너져내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게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하여 배치된 환경들입니다. 이 무너짐 속에서 여전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언약대로 기어이 자기 백성을 생산해내고야 만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스가랴를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보통 돌아갈 때는 일정한 변동없는 한 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탕자가 아무리 집을 박차고 나가 먼 타향에서 방탕하게 지내도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집은 한결같이 그 집에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처럼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하시는 한결같은 요청은 실은 아버지께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하심을 전제로 해서 할 수 있는 요청입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더란 말입니까? “돌아오라”는 말씀은 네가 떠난 그 자리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떠난 자리가 바로 ‘말씀의 자리’입니다.

즉 우리는 말씀을 진지하게 느껴야 합니다. 말씀의 자리는 인간이 붙잡을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늘 자기 자랑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냉정하게 다루어주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주기도문에 있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개목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가 ‘늘 죄짓고 있는 죄인’이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부터 지으실 때부터, 죄가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엉뚱한 것을 축복이라고 간주하면서 달라고 기도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에 주안점을 둔 기도문을 가르치게 되신 것입니다. 이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마음두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돌아온 것, 말씀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성도에게 말씀 하나하나가 진지하게 다가온다는 것은 “지키라”가 아니라 이미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작업을 하고 있구나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은 삭제되고 그 대신 말씀의 인생이 되는 겁니다. 말씀대로 만들어져 가는 인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말씀과 용서받음만 내놓으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강-슥1장1-4(돌아오라)1308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1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3페이지입니다.

스가랴 1:1-4 
 

“다리오 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금 스가랴를 오늘부터 하는데 전에는 학개 했고 하박국 했고 나훔 했고 미가 했고 요나 했고 요엘 했고 호세아 했고 다니엘 했고 중간에 아모스도 하고 했는데 이렇게 죽 하면서 내용이 뭐였습니까? 죽 지나가니 그만 이예요. 뭐지? 뭐였지? 그러나 느낌은 가져야 됩니다. 이게 이스라엘이 망가진다는 겁니다. 무너진다는 겁니다. 또 인도의 허술하게 지은 여관처럼, 손님은 계속 받는데 무너질 때 한꺼번에 무너지게 되죠. 뭔가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아요.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가 이게 허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켜준다고 허물어지면서 자꾸만 말하기를 뭐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 라고 그렇게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야기를 했어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던 이야기를 선지자가 하고 있는 겁니다. 선지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제발 무너질 때 같이 무너질만해서 무너졌다고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선지자가 요구한 게 딴 게 아닙니다. 무너질 때 무너지면 된다는 거예요. 

저나 여러분들이 늙어 죽잖아요. 늙어 죽으면 되는 거예요. 인생 살기 참 쉽습니다. 자외선 뜨겁잖아요. 받으면 돼요. 그걸 양산 쓰고 자외선 크림 바르고 바른데 또 바르고 바른데 또 바르고 그렇게 해야 조금 차이 나요. 기미 죽은 깨, 차이가 나는데 나이 90 넘어서 기미 죽은 깨 그런 것은 문젯거리도 안 돼요. 머리가 문젠데 피부에 기미 죽은 깨 이런 것은 문젯거리도 안 되거든요. 

스가랴를 하면서 당부하고 싶습니다. 선지자들이 당부했던 건 뭐냐 하면 무너질 때 무너져 주라는 겁니다. 제발 하나님이 이기고 너희들은 하나님 앞에 패자, 지는 자로 되면 살려줄게, 내가 살려줄게. 네가 살려고 하지 말고 내가 살려줄 테니까 허물어라, 하면 ‘예’ 하고 곱게 허물어지세요. 강도도 구원받고 창녀도 지금 천국 가 살고 있습니다. 거기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의 취지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오늘 스가랴를 하면서 또 같은 이야기를 해야 되겠는데 여기에 “다리오 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1절부터가 골치 아프죠. 다리오가 어느 분이고 어떤 양반이고 이년 팔월 같으면 달력은 우리 달력이 아니고 남의 달력을 가지고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BC 522년 이예요. 이게 다리오 나라, 바사 나라거든요. 바사나라는 바벨론 그 다음 나라입니다. 바벨론도 짐승이고 바사나라도 짐승이고 그 다음에 나온 짐승은 헬라이고 그 다음에 나온 짐승은 로마고 그 뒤에 나온 모든 지금의 나라는 로마의 부스러기에요. 로마가 깨어졌기 때문에 흩어진 그 부스러기에요. 현재 세계 모든 문명국가는 그 정신이 로마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로마의 정신, 플라톤의 국가론은 로마가 이어받았고 그 로마가 국가론에서는 최 정점을 찍었어요. 더 이상 로마 같은 나라보다 더 뛰어난 나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더도 덜도 말고 로마 같이만 되어라. 그저 로마 같이만 되는 그런 행정구조가 오늘날 전 세계 220국 모든 나라가 다 취하고 있는 겁니다. 

그 로마의 정치구조는 뭐냐 하면 간단히 말해서 법입니다. 법으로 통치하는 거예요. 어느 나라치고 공무원들은 오직 법에 준해서만 통치한다. 이렇게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법으로 통치하지, 뭐로 통치하는데? 그럼 법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있다는 말인가? 있었더랬죠. 그 나라는 어떻게 통치하는데? 왕이 자기가 꼴리는 대로 통치하죠. 법이 왕 개인의 소유였어요. 로마에 와서 왕보다는 법이 우선되었습니다. 법으로 통치하고 법으로 동의하면 시민으로 쳐주는 그런 나라의 제도가 로마 제도에서 확립이 되고 그것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국가 제도는 법으로 유지되는 겁니다. 

심지어 아줌마들 동창회 모여도 뭐 법 하나 있잖아요. 정당 만들고 법 만들어서 회비는 매년 얼마 낸다고 이렇게 적잖아요. 모든 것이 법에 준해서 하는데 그걸 법치국가라 하죠. 그 법치국가란 로마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지당해 보이고 당연해 보이고 그래야만 하는 그 조직, 그걸 하나님은 짐승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짐승! 

왜 그걸 짐승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을 이렇게 응고 화, 굳어져 버리면 법이 돼요. 사건을 뭉친 것이 법으로 만든 겁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이 있잖아요. 이걸 사람들이 이해할 때, 그런 일을, 그런 경우를 딱 염두에 뒀다가 ‘다음에 할 때는 요렇게 대체해야지.‘라고 할 때 그게 법이 돼 버려요. 

둑을 10미터 쌓았는데 장마 비가 와서 10미터 둑을 넘었다. 아하, 둑을 만들 때 10미터 쌓으면 안 되는구나.‘ 하고 국토부에서 모든 행정기관에다 ’둑을 쌓을 때는 15미터 하시오.‘ 하면 법이 돼 버리는 겁니다. 그 법이 어디서 나오는가? 작년에 10미터 했다가 둑을 범람했기 때문에 그 사건을 응고 화 시켜 버리면 거기서 법이 나오는 거예요. 

제가 말한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죠. 딸이 있는데 10시에 들어오니까 남자들이 뛰 따라 오더라. ‘알았다. 너는 앞으로 9시까지 들어와.‘ 이게 법이예요. 10시까지 들어왔는데 한번 낭패를 본 경험이 있으면 고걸 근거로 해서 다시는 낭패를 보지 않도록 방어 대책할 때 고게 법이 되는 겁니다. 이건 개인도 마찬가지고 국가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법이예요. 

그래서 항상 법을 어기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거든요. 원래 죄라 하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게 죄가 아닌데, 법을 인간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 법을 어기면 죄라고 규정하게 된 겁니다. 법을 어겨서 죄인 된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그 유대인 법을 어겼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겁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처벌받았고 사형 당했습니다. 사형당한 그분을 하나님께서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법을 제정했던 모든 사람에 대해서 도리어 죄라고 규정하는 그 일을 성령께서 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인간이 미쳐버려요. 이건 법을 우습게 보는 건 아니지만 ‘사람은 법으로 영생 얻는 게 아닙니다.’ 하는 소리가 나왔으니까 그런 사람이 교회 두세 명만 있어도 교회는 난리치죠. 교회라는 것은 법이 있어야 되는데 ‘이딴 법 없어도 영생 얻습니다.’ 이렇게 돼 버리면 안 되죠. 만약에 제 입에서 ‘강도도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돼 버리면 이건 용납이 안 돼요. 왜 그러느냐, 강도가 구원받아버리면 교회 와서 강도 짓할 수가 있다 말이죠. 그럼 제가 하는 말이 ‘강도 짓 좀 하면 어떠냐.’ 말이죠. 강도 짓 하게 되면 기껏 재산 뺏기고 목숨 빼앗기죠. 그래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잖아요. 그렇잖습니까? 

사람들이 어떤 주께서 주신 변화에 대해서 법으로 굳혀놓았다는 것은 이것은 결국은 살고 싶다는 이야기에요. 나는 지금 사는 식으로 살고 싶다는 다른 표현이 뭐냐, ‘법 지킵시다.’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법을 위반하면 나는 법을 위반한 것도 나중에 곧 법이 돼요. 그래서 제가 수련회 때 이런 이야기 했잖아요. 제일 마지막 시간에 위의 벽돌 빼내서 밑에 박아봐야 그거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법을 위반한 인간들이 우리도 인간 살 권리가 있다고 데모해봐야 그 인간들이 권력 잡으면 똑같은 짓을 해요. 

기차가 있는데 뒤 칸에 있는 사람들은 맨날 바퀴벌레로 만든 양갱이나 먹고 단백질 블록이나 뜯어먹고 있고 앞 칸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호례호식 하면서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그 소식을 나중에 뒤 칸에 있는 사람들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 칸, 한 칸 도끼 들고 설쳐가면서 드디어 앞 칸의 것을 뺏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앞 칸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앞 칸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원래 이 지구가 마지막 끝나고 이 기차밖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때 기차 타라고, 타라고 이것이 방주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잖아. 왜 그럴 때 말을 안 들었느냐 말이죠. 이 기차 만들 때 돈 투자도 하지 않고 기차 만들 때 도움도 되지 않았다가 나중에 기차만 살아남고 다 얼어붙으니까 그제사 ’살려주세요.‘ 해서 ’살려줄까 말까, 살려줄까 말까.‘ 하다가 ’에이 불쌍해서 살려주자.‘ 그래서 뒤 칸에 탄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은혜를 알아야지, 이제 살려내니까 내 보따리 내놔라. 식으로 ’너희만 잘 먹고 잘 살고 우리는 이게 뭐냐?‘ 그거는 이 기차 만들 때 주식을 그들은 처음부터 안 샀거든요. 

만약에 우리교회만 구원의 방주가 돼서 우리교회 짓는데 ‘돈 내라. 돈 내라’ 했는데 돈 도 안 내고 있다가 그래서 우리교회만 해서 가니까 그때서 ‘등록하게 하옵소서. 어떻게 합니까?’ 할 때 그냥 부끄러운 구원으로 집어넣으면 천국 가서 계속 부끄러워야지, 천국 가서 뒤 칸에서 앞 칸으로 가려고 싸우고 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는 구원을 하지 않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설국열차’라는 영화 내용이었습니다. 각자 제 자리 지켜야 나라가 되지 겁도 없이 자기 분수도 모르고 과오도 모르고 자비도 모르고 앞 것을 탐내면 그들이 권력 잡아봐야 똑같이 그들도 똑같은 짓을, 학대 받은 만큼 학대를 하게 돼 있는 게 이게 인간입니다. 

하지만 짐승의 나라 바사 나라에 있어서 짐승인데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바사 나라 다리오 왕 이년 BC 522년 이 이야기가 왜 나왔느냐? 이게 짐승인데 이 짐승을 누가 다루느냐 하면 짐승을 배치하는 것도 이스라엘을 살려내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었습니다. 주변에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거는 우리 자신이 과연 매일같이 복음을 아는가를, 복음을 유지시켜주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조치로서 복음 모르는 사람과 한 이불 덮고 살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 겁니다. 세상이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지난주일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이렇게 했거든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은혜 받는 세상이지 우리가 은혜 받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교회들과 인간들은 하나님 은혜 받는 거 생각 안하고 지 은혜 받으면 그게 전부 인줄 알고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창조 하실 때요. 하나님이 우리 좋으라고 창조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그 바탕에 뭐가 돼 있느냐, 하나님의 심판 행위가 이미 포함이 돼 있습니다. 졸지 마시고 여러분 등허리 이렇게 만져보세요. 여러분 등허리 만져보면 여러분 심판이 여기 갑자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사람이 심판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만들어진 증거가 뭐냐 하면 이유도 없이 우리는 죽는 게 무서워요. 이것은 이상하게 숨기고 싶은 우리의 취약점입니다. 

달은 아무리 보고 싶어도 달의 뒷면을 못 봐요. 달의 뒷면을 보려면 로켓 타고 본 사람만 보지, 아무리 해도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거울 앞에서도 아무리 해도 자기의 뒷면을 볼 수가 없어요. 남은 봐도 자기 뒤통수는 안 보입니다. 사람은 자꾸 감추고 싶은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죽으면 안 돼, 죽는 것이 묻지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궁극적으로 무서워요. 궁극적으로. 이거는 내가 정신 차린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공부한다고 없어지는 문제가 아니고 사람은 이건 안에 본성 같은데 주께서 궁극적으로 심어놓은 게 뭐냐 하면 죽으면 무조건 무섭다고 해요. 이병철 회장이 죽는 게 무서워서 그렇게 신부 붙들고 그렇게 질문들 해댔다 안 합니까? 무서워서 간호사 몇 명 있어도 무서운 걸 지울 길이 없어요. 너무 무서운 거예요. 죽는 게 무서운 사람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으면 편해집니다.’ 라고 아무리 위로해도 위로한다고 해서 무서운 감각조차 사라지는 법은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했습니다. 창조했다는 것은 창조한 것을 내가 부수겠다는 뜻에서 창조하신 겁니다. 참 이런 발언은 생전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한 겁니다. 우리가 만들어졌잖아요. 부수겠다는 거예요. 만들다가 다 써먹으면 이제는 부수겠다고 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아담 만들 때부터 부수기 위해서, 벌써 이름조차도 흙으로 지은 거예요. 처음부터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아담을 그렇게 만든 겁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이미 자기는 그 심판 자체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거예요. 

지난 수요일 날 설교에서 터무니없는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몇 분 안 되지만 참석하신 분은 아시죠? 어떤 여자가 우연히 길에서 립스틱을 주워서 입술에 칠하자마자 세계 3차 대전이 벌어졌다는 거.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여인이 따먹고 싶어서 과실을 따먹는 순간 모든 인간은 죽게 되었다는 거. 이게 말이 되는 이야깁니까? 사적인 행동이고 사적인 이야기에요. 죽음이란 전선을 건드린 거예요. 형사가 전선 빨강 선을 자르면 폭탄이 터질 것이냐, 아니면 파랑 걸 끊어야 터질 것이냐, 그 문제는 영화에 나올 문제지만 잘못 건드리면 뉴욕 시가 다 폭발하니까. 

아담은 어떤 선을 건드려도 세상은 다 죽음의 세계가 되도록 돼 있습니다. 의도적이에요. 하나님이 노리고 들어간 거예요. 하나님께서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든 겁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인간의 죽음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죽음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죽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나야 비로소 주님이 돼요. 아들이 주님이 되면 그걸로 하나님의 계획은 모두 종결되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서 하나의 부속품으로 그냥 만들어진 거예요.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가랴에게 이 바사나라를 한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서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사나라를 통해서 배치를 한 겁니다. 그러면 바사나라가 할 일은 뭐냐, 바사 나라가 할 일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전은 성전이 깨졌다고 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그 접점은 하나님이 포기한 적이 없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바사나라를 통해서 다리오 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막대한 성전 짓는 모든 자금과 그리고 거기 섬기는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는 그런 역할을 바사나라 다리오 왕이 한 겁니다. 

538년에 그들이 처음 귀환했는데요. 그 뒤에 16년 동안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그냥 노는데 바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보내서 ‘야, 내가 너희들 놀라고 보낸 게 아니고 성전 지으라고 보냈어. 성전! 성전 좀 지어줘.’ 성전을 짓는 것이 너희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첫 번째 과제라는 겁니다. 여기에 3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돌아오라는 겁니다. 

지금 제가 스가랴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들 생각하기를 ‘목사님, 그래도 이래나 저래나 이거 옛날이야기 아닙니까?’ 이러거든요. 이 스가랴가 옛날이야기 같으면 제가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 옛날이야기 안 되려면 우리가 예배당 지어야 됩니까? 그걸 아니에요. 어떻게 돌아오느냐 이 말이죠. 글쎄 그 문제가 그 문제라니까요. 

하나님께 돌아오라니 이게 무슨 말 이예요? 하나님이 어디 지묘동에 사십니까? 지묘동에 사시면 죽 가서 지묘동 그 집에 서 있으면 돌아오는 거 맞잖아요. 돌아온다는 말은 뭔 뜻 이예요? 어떤 분이 돌아오라고 명령하는 분이 거기 고정적으로 계시고 다른 사람은 그 지점을 떠나야 되고 떠났던 자가 다시 돌아올 때 돌아온다는 말이 성립되는 거예요.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있잖아요. 아버지 집은 역시 아버지 집이예요. 탕자의 아버지 집은 개발도 안 한 모양이라. 촌에 그 집에 그대로 있어요. 

서울에 취재하러 온 자식들 보면 시골의 아버지 집 보면 여전하게 동일하게 있는 게 여러분 굉장히 다행스럽게 여기지 않습니까? 정 석훈 목사님이 한국에 오게 되면 꼭 박사에 가서 아버지 뵈러 가거든요. 박사교회 앞에 아버지 집이 있어요. 늘 그 집이 그 집이고 늘 거기 아버지 계세요. 

탕자가 아무리 돌아다녀도 돌아올 아버지 집이 있다는 것이 탕자가 구원받는 전제 조건이 되는 겁니다. 그 조건은 탕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본래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그 조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스가랴에서 “내게 돌아오라” 이 말은 쉬운 말로 하게 되면 “난 안 변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백성들아 너희들은 맨날 변하지?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한 적 없다. 나는 심판을 통해서 구원해 내겠다.”라는 이 취지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과일을 뭐 하나 잘못 먹었는지 맨날 독립하려고 해요. 나는 내 힘으로 살아봐야지.‘ 맨날 독립해요. 저는 그걸 독약 먹었다 하는데 우리는 맨날 독약 먹고 독버섯 먹고 그저 세상에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독약입니다. 그런데 진짜 양약은 ’이제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야지.‘ 요게 양약 이예요. ’이제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 이래야 되는데 이상하게 우리는 신앙생활 해봐도 아버지 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고 언제나 독립하느냐, 그것만 자꾸 생각하고 ’내가 돈이 몇 억이 있으면 교회 안 가도 돼.‘ 그런 것만 자꾸 생각하니까 스가랴가 그걸 놓치지 않고 “돌아오세요. 돌아오세요. 아버지 계신 곳으로 돌아오세요.” 우리는 ’아버지가 어디 계신데 돌아갑니까? 어데? 아버지가 어디 계셔야지 돌아가지.“ 

여러분, 아버지가 어디 계시는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요. 말씀 속에 계십니다. “내가 성전 지어라” 하면 지으라고 하신 그분이 바로 아버지에요. 아버지가 하는 말씀 “성전 지어“ 하면 성전 짓는 그 가운데서 비로소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우리는 아예 질겁하고 내빼죠. ‘내 입으로 못합니다. 마안합니다.’ 하고 도망치기 바쁜데 ‘그래 돈을 사랑함이 죄 맞아.’라고 하는 순간 그게 아버지와 함께 있는 순간 이예요. 말씀이 말씀대로 진지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어요. 저만 느끼면 안 되고 여러분도 다 느껴야 됩니다. 오전에 이야기했지만 좁은 길로 가야 영생이고, 사람들이 찾는 곳에 가면 멸망 길이다. 이거 진즉 애들도 아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지하게 과연 살아보니 그래, 진지하게 느끼는 순간은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입니다. 

바로 스가랴 3장에서 성전 지으면서 하는 말이 이건 사람의 힘으로 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으로 짓는다 할 때 하나님의 신으로 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신약에서는 말씀이 말씀대로 그대로 느껴질 때 이게 하나님과 함께 현장에 지금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느낌입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주기도문을 외우라면 몇 초면 다 외우는데 이런 말이 있어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 다음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그 다음 말이 뭐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 말이 뭐냐 하면 그토록 제가 이야기했던 ‘우리는 죄인입니다.’ 라는 거예요. 주기도문에 여러분이 하루에 아침에 한번 씩 외우시면 그게 반드시 포함돼 있어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또 용서해 주옵소서.’ 그런 뜻이거든요. 그 말은 내가 몇 억을 가지고 아무리 호화롭게 살아도 나는 그저 주님 앞에 서면 죄인일 따름입니다.‘라는 것을 만약에 주기도문 하는 순간 진지하게 느껴진다면 여러분들 이거는 내가 장담하겠습니다. 여러분의 하루치 행복은 이미 얻은 거예요. 왜, 죄인이기 때문에! 하루 종일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우리는 감사할 이 행복을, 죄 용서 받은 이 행복을 뺏어갈 수 있는 어떤 큰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전돼도 괜찮아요. 류 현진 13승 못해도 괜찮아요. 우리나라 대표 팀 일본한테 10대 0으로 져도 괜찮아요. 

우리의 죄가 아침에 주기도문 외우면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용서해 주옵소서, 하는 이 말씀이 진지하게 느껴진다면 이 말씀 속에 용서가 포함돼 있거든요. “용서해 주옵소서” 말이 이미 너는 용서 받았기 때문에 “용서해 주옵소서” 말이 나온다는 뜻 이예요. 우리하고 같은 아버지니까.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울 때는 후딱 지나가요. 시속 300킬로에요. KTX라. 휙 지나가고 방금 내가 무슨 소리했는지 못 알아들어요. 어쨌든 주기도문 했다 하고 세상일에 나서게 되면 우리는 그 진지함을 놓치게 되죠. 그때는 ‘돌아오라’ 합니다. ‘너 아침에 외웠잖아. 주기도문 속으로 돌아오너라.’ 그러니 주께서 하루 일과는 주기도문 속으로 돌아오라는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선지자가 돌아오라는 말은 결국 선지자가 하는 내뱉은 말 속으로 돌아오라는 이런 뜻이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포로 잡혀도 말씀이 있는 한 주님은 떠난 적이 없습니다. 말씀이 있는 한! 

신천지하고 질문 답변 이렇게 하면서 항상 제가 생각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천사가 사도요한에게 말씀 하시기를 누구든지 이 말을 듣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그런 말씀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말씀의 취지가 뭐냐, 이런 거예요. 말씀이 있으면 더 이상 욕심내지 말라는 뜻 이예요. 

지금 밧모 섬에서 사도요한은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사도요한이 갇혀 있는데 거기서 빼내지 않고 거기서 결국은 죽어요. 죽더라도 “내가 속히 될 일을 종들에게 보이리니 이 기록한 말씀을 지키고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말씀만 있으면 더 이상 행복은 없다 이 말 이예요.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마라. 인생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마라. 말씀 가운데서 스가랴도 선지자고 사도요한도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말씀이 우리한테 파고 들어와서 내 안에 말씀이 이렇게 살아 움직이거든요. 더 이상 여러분의 몸둥아리는 말씀의 몸둥아리지, 여러분 자신의 것은 더는 아닙니다. 돌아서면 내 꺼 되지만. 하여큰 그 순간만큼이라도 이제는 말씀이 말씀대로 증거 하기 위해서 여러분을 사용하실 거예요. 어디다 갖다 붙일 것이고, 휩쓸리게 할 것이고, 그야말로 말씀도 잊게 만들고 후회하게 만들고 짜증나게 만들고 대들게 만들고 성깔 나게 만들 거예요. 

하지만 다시 말씀대로 되었으면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나 다 같은 스가랴 선지자가 되어서 앞으로 이 대단한 복을 깊숙하게 한번 파고들어가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배치된 것들이 다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말씀에서 새롭게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렇게 조치하는 그 조치에 저희들이 휘말리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지 말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그런 식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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