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1장 2절 (주기도문) 220419a-이근호 목사
오늘은 11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렇게 되지요. 주님 가르친 기도, 주기도문으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그 취지를 알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무엇하시는 분인지 왜 오셨는지를 아시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에 보면 70명의 제자들을 각처에 보냈지요. 누가복음 9장 1절에 보게 되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이렇게 되어있지요. 예수님의 그 취지는 그 제자들을 통해서 보다 확대가 됩니다.
예수님이 보내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 이 말은 예수님의 자신의 하실 일이 그 일과 제자들의 활동과 관련성이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자들은 어떤 역할이 있는 거죠. 제자들의 역할. 이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하나의 공식 하나 이렇게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누가 살아있는가? 이 점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2022년 지금 누가 살아있는가? 둘 중에 예수님이 살아있는가 인간이냐? 둘 중에 누가 살아있는가. 사람들은 본인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숨 쉬고 거울 앞에 자기 모습이 보이니까.
내가 살아있다고 하니까 누가 안 살아있는 분이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지금 안 살아있는 분이 되어버려요. 살아있다에 대해서 나도 살아있고 예수님이 살아있고 둘 다 살아있어 버리면 뭐가 죽어 버리냐 뭐가 사라지느냐 하면은 사람에 의해서 인간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그 사실이 이게 도중에 날라가 버려요.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폭력을 가했다든지 이렇게 욕설을 했다든지 이렇게 되게 되면 폭력 뭐 한 대 맞는다고 죽지는 않잖아요. 때렸다든지 욕설을 해버리면 때린 자도 살아있고 맞은 자도 아프지만 살아있고 욕을 한 사람도 살아있고 욕을 얻어먹은 사람도 살아있고 둘 다 살아있다가 돼요.
그런데 인간 쪽이 예수님을 죽여 버리면 인간들이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이유는 우리는 살아있고 예수라는 자는 우리 앞에서 죽어 없어졌고. 그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살해한 거에요. 십자가의 뭐 전시하라고 십자가에 올라간 게 아니고 죽여! 죽여! 죽여! 제발 죽어다오 해서 죽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린 겁니다. 어디 연극한 거 아니에요. 한 5분 동안 매달렸다 내려줄게 이런 거 아니거든요. 죽이기 위해서 한 거에요.
예수님을 죽였을 때 죽은 자는 죽였으니까 죽은 자는 엄연히 누가 봐도 거울 봐도 죽은 자는 살아있고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으니까. 이로서 인간 세계는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죽는 것은 무슨 뜻인가를 인간들은 이거는 전부 다 동의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살아있고 얼마 전에 죽었던 예수님은 그거는 죽었다 라고 인간들은 확실하게 규정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살려냈어요. 그러면 어느 쪽이 살았느냐 어느 쪽이 죽었느냐 판정을 인간 쪽에서 내린 판정 자체가, 살고 죽고의 판정 자체가 이게 오류가 되는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야 산 것이 되고 죽은 적도 없이 있는 것은 이것은 죽어가고 있는 곧 죽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쪽은 죽은 자가 되고 예수님은 산 자가 되는 거에요.
숨 쉬어도 죽은 자고 100m 달리기 해도 죽은 자고 다음 차기 대통령 후보자 되도 죽은 자고요. 검사들도 죽은 자고. 이 세상에 있는 인간 중에 안 죽은 자는 단 한명도 없이 다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옵니다. ‘한 분이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죽었다.’ 죽었다. 그래서 이런 질문할 수 있어요.
집사님 교회는 몇 명 나옵니까? 이 질문과 같은 질문이 집사님 교회 지난 주 죽은 자가 몇 명 모였습니까? 같은 질문이에요. 한 500명 나오면 시체 500명 모인 거에요. 목사까지 합쳐서 501명 모인 거에요. 집에 아이가 몇 명입니까? 혹시 손자 손녀 합쳐서 몇 명입니까? 두 명입니다. 그럼 집에 죽은 자가 두 명 더 추가요. 중국집 가면 “아줌마 여기 단무지 하나 추가요” 하는 것처럼.
죽은 자가 있는데 그 죽은 자 속에 죽은 자가 계속 새끼를 까고 자식을 놓게 되면 결혼해서 자식을 낳게 되면 결혼한 당사자가 죽은 자고 그 죽은 자가 자식 낳으면 죽은 자가 두 명 세 명 늘어나는 거에요. 어떤 집은 죽은 자가 6명 낳았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육’이라고 합니다. 영의 입장에서 육은 죽은 거에요.
왜 죽었느냐? 창세기 6장에서 육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은 자 되는 거에요. 이 개념, 이 개념을 뚜렷하게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주기도문 해석 못합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주기도문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13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그 다음에 뭘 주신다고 했습니까? “성령”을 주시죠. 영을 주시죠.
여기에 영을 주시는 것을 하나님 입장에서는 뭐냐? 그걸 좋은 것이라고 해요. “좋은 것 줄게.” “뭐요?” “성령 줄게.”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성령 말고 주는 것은 전부 다 좋은 것입니까? 악한 겁니까? 악한 것이에요. 성령이 와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성령이 와야 내가 육체가 되가지고 이 육체는 하나님 앞에 안 받는다는 것을 아는데 성령 말고 다른 걸 줘 버리면 본인의 하자, 본인의 문제점 있음이 들추어지지 않아요.
기도는 열심히 했는데 그 기도가 뭐냐 하면은 세상 기도는 이겁니다. 불신자 성령 받지 않은 불신자의 기도는 목표가 이거에요. 나의 나 됨. 나의 나 다움. 목표는 이거 하나 밖에 없어요. 나의 나 다움이라고 할 때에 앞에 나, 뒤에 나 다움 여기서 인간들은 뭘 추구하느냐 하면은 일관성을 추구하는 거에요. ‘일관성’. 일관성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동질성’.
과거에 내가 알던 내가 쭈욱 지속적으로 그대로 밀어붙여서 ‘과거의 내가 이렇게 되면 참 좋겠네’ 하는 자기 이상형. 자기 이상형을 그냥 밀어 붙이는 거에요. 미래까지, 훗날까지. 밀어 붙일 때 나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내 이상대로 잘되는 것은 인간적 입장에서는 뭐냐? 그게 자기한테 좋은 것이라는 거에요.
세상에 나쁜 목적을 나쁜 이상을 세울 인간이 있습니까? “나 맞아 죽을래.” 이걸 목표로 삼아요? “너 커서 뭐할래?” “맞아 죽을래.” “너 장래 소원이 뭐야?” “돌에 맞아 죽을래.” 뭐 이런 거 있습니까? 없지요. “대통령 될래.”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걸 사람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은 나한테 좋은 것이라고 보는 거에요.
누가? 육이. 누가? 죽은 시체가 좋은 것은 바로 나의 나 다움이에요. 나의 나 다움, 나의 나 됨. 나의 나 다움. 여기 나에다가 나를 확장시켜 봅시다. 여기에다가 뭘 대입하느냐.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국가. 여기에 구체적으로 하나 더 박항서 축구팀 이런 거.
박항서 감독의 팬들은 박항서가 감독한 그 축구팀은 어떤 팀이라도 박항서 감독의 스타일대로 늘 승리하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승리하게 되면 박항서가 박항서 했다 뭐 이런 것을 끄집어 내는 거에요. 방탄소년단이 히트를 치면 방탄소년단이 방탄소년단 했다 이런 이야기해요. ‘답다’ 이런 말이거든요. 제대로 했다.
그럼 우리 가정은 우리 가정 다움이고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 이상다움이고 우리 사회, 우리 직장, 우리 기업, 우리 가문은 우리 가문답게 모든 것이 나의 나답게 이게 기반이 되고 토대가 되고 바탕이 되는 거에요. 여기에다가 뭘 하느냐 하면은 기도를 거기에다가 몰빵을 해버려요. 몰빵을. 기도를 몰빵을 해버립니다.
제가 언제 그런 이야기했지요. 교회는 말씀다워야 하고 기복신앙은 없어야 됩니다 라고 아주 유식하고 그 당시의 강해설교로 히트치고 야 이게 복음이구나 하나님의 열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인간의 열심보다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해서 저게 기독교야 저게 복음이라고 존경 받던 사람이. 복음도 아닙니다, 복음도 아닌데 일단 복음이라고 이해하는, 다른 목사들은 제목 설교하는데 그 사람은 강해설교해서 아주 존경받는다.
그렇게 하던 사람이 나이 많아 80 되서 그 교회를 은퇴를 했답니다. 그 후임자가 그대로 강해설교 할 실력이 됩니까? 안되잖아요. 안되니까 그 교회에서 뭐하느냐 하면은 기도회로 모이는 거에요. 그럼 이 기도회라는 게 뭡니까? 옛날처럼 말씀을 전했던 사람이 없으니까 교인들이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기도 몰빵하는 거에요. 기도 몰빵하면서 뭐라고 핑계 대느냐 하면은 성도의 자랑은 말씀과 기도 두 개의 바퀴가 균형 맞추어가야 한다. 기도란 말씀에 입각하지 않으면 그거는 살기 위한 기도에요. 말씀에 입각하지 않으면. 인간의 모든 영광은 불에 꽃같이 사그라들지만 영원히 남는 것은 영원히 지속되고 일관성 있는 것은 말씀입니다. 인간의 기도가 아니고 주님의 기도에요.
어떤 분이 기도가 궁금해가지고 멀리서까지 왔는데 내가 생각해도 참 야박하게 이야기했다 싶은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이 멀리 계시지 만날 수도 없고 오신 김에 해답은 줘야 되지 않느냐. 그래서 제가 성경구절 제가 직접 찾아드리면서 그 분 보고 읽어보라고 했어요. 성경에서 기도가 뭐라고 되어 있는가. 히브리서 7장 25절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도에 대해 궁금한 점 하나도 없지요? 뭐 기도를 해야 궁금하지. 그렇지만 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자! 여기서 ‘자기’가 누굽니까? 교인이에요? 아니면 성도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을 힘입어’,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그’가 누구지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항상 살아서’, 여기 “살아서” 나오지요.
인간은 왜 기도가 안 됩니까? 인간은 죽어있기 때문에 기도가 안돼요. 인간은 죽어있으니까. 몸부림치는 건 있는데 몸부림치는 거 아니에요. 기도에요. 제대로 살아서 저희를 위해 뭐한다고 했습니까? 노십니까? “간구하심이라”. 기도하심이라. 간절히 기도하심이라. 누가요? 예수님이. 누굴 위해서? 자기 기도 접어버리고 자기 기도 빼버리고 누구 기도만 의지하는 사람? 주님의 기도만 바라보는 사람을 위하여 구원하는 거에요. 그 외에 다른 구원받을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내가 기도해서 구원받았다는 엉뚱한 소리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빡시게 금요철야 기도 빡시게 나와서 새벽기도 나와서 구원받았다 이런 소리 한다 이 말이죠. 성경에 그런 것은 없어요. 모든 구원은 예수님의 기도만 구원돼요. 왜 그러느하면은 로마서 8장에 보면 인간들의 기도는 문제가 뭐냐 하면은 죽어 있는 인간들이 뭘 알겠어요.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해요. 무엇을 위해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 우리는 몰라요. 왜냐 하면은 우리가 고장 났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장 났거든요. 꽃봉우리는 처음부터 꽃봉우리가 활짝 피지 않아요. 시간이 가면서 한꺼풀 두꺼풀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꽃잎이 하나씩 펴지지요.
죄인으로 태어날 때 인간은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요.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꺼풀 두꺼풀 내가 모르는 죄가 중첩된 겹쳐진 죄가 현실화로 나타나요. 살아가면서.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은 죄를 많이 졌고 일찍 죽은 사람은 죄를 그만큼 죄 지을 시간이 없어서 죄인이 아닌 게 아니고 시간이 없어서 죄를 적게 지은 거에요.
특히 갓난 아이는 죄 지을 시간이 별로 되지 않아서 그냥 죄인 태어난 채로 그냥 죽어요. 그렇다고 아이가 죄가 없는 게 아닙니다. 왜? 뭉쳐져 있지요. 죄 덩어리로 태어났기 때문에. 뭐 펼쳐지나 뭉쳐지나 덩어리는 덩어리거든요. 제가 어느 날 그런 이야기했지요. 모든 금은 한 개라고. 왜? 자르나 덩어리나 금은 융합이 잘돼요. 덩어리가 잘돼요.
금이 두 개 세 개가 해도 붙여 버리면 붙여지거든요. 잘라버리면 조금이라도 금이에요. 금은 양으로 다루는 것이지 개수로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처럼 우리 인간의 존재도 아담 안에 있다는 전체 단일양으로 설명해야지 너 다르고 나 다르고 그런 거 없어요.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똑같습니다. 다 육입니다. 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말은 인간 치고 죄 없는 인간은 없다는 뜻이에요.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라”
아까 히브리서 7장 주님의 기도하고 이번에 로마서 8장 26절의 성령의 기도하고 또 뭐가 필요해요? 뭐가 그렇게 필요해요. 주님의 기도도 뭐 시원찮다 뭐 성령 기도도 못 믿겠다. 그럼 결국 믿을 것은 뭐냐? 내 기도만 내가 믿겠다 이거는 자기를 믿는 신자지요. “당신 누구 믿어요?” “주님 믿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성령님 믿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누구 믿어요?” “내가 믿는 것은 내 기도 내 철야기도 내 새벽기도 나만 믿습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당신은 평생 동안 당신의 동질성을 믿는 거에요. 자신의 한결같음을 믿는 거에요. 자신의 변덕 없음을 믿는 거에요. 그것도 죄 지은 것도 자랑이라고 쓰레기잖아요. 쓰레기. 주기도문은 네가 필요치 않다는 기도 내용이에요. 주기도문은. 너는 전혀 필요치 않아. 네 기도를 주님이 해주실 거야 그 내용이 주기도문입니다.
그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기 고난 받은 것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내가 굶기도 하고” 이렇게 했어요. “도적의 위협과”도 나오는데 “내가 여러 날 굶기도 했다” 했거든요. 주기도문에 의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했거든요. 그러면 사도 바울은 주기도문도 못 외우는 신앙인인가요? 왜 굶어요? 일용할 양식을 준다는데.
왜 굶어요? 주여 제가 굶을 대상이 안 되잖아요. 일용할 양식 주신다면서요. 주시옵소서. 베드로가 사도 바울이 주기도문 그런 거 모를 리가 있겠어요. 베드로가 다 가르쳐줬을 거 아닙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일용할 양식도 못 챙기는데 뭐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기본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기본도 안 되는 거에요.
그게 왜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필요치 않습니다. 추가적 존재에요. ‘추가적 존재’. 생수 하나 사먹을려고 신용카드 했는데 기계작동이 잘 안되는가 해서 한 번 더 했더니 생수 두 병이 나왔어요. 한 개 필요 없는 게 나온 거에요. 주님이 오시면서 인간은 필요치 않습니다. 인간은 필요에 의해서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 지금 누가 살아있는가? 다시 봅시다. 예수님이 살아있습니까? 인간이 살아있습니까? 아까 누가 살아있다고 했어요? 죽고 난 뒤에 살아있지 않으면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죽어가고 있는 거에요. 분명히 해야 됩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는 살았다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만 살아있는데 여기 12제자와 70인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있는가? 주님의 역할이 있어요. 주님의 역할. 맡은 일이, 사명이 있다고요. 그 사명은 자기가 만들어낸 사명이 아니고 주님이 집어넣어준 사명이에요. 예수님의 활동의 일관성을 위해서 거기에다가 집어 넣은 거에요. 집어넣었다 이 말이죠. 여러분 국화빵 구워봤어요? 저는 구워봤어요. 밀가루 한번 확 돌리고 그 다음에 앙꼬 돌리고. 그 앙꼬. 그게 역할이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살아있는 것은 그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역할을 살리기 위해서 그 인간과 인간을 사용하신 거에요. 그 주님의 역할, 주님의 역할이 살아있어야 돼. 왜? 주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의 역할이 살아있는 거에요. 그걸 아까 누가복음 11장13절에서는 뭡니까? 너희에게 뭘 주신다? 좋은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
성령이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주님의 영이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 살아있죠. 주의 영이 살아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영이 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어야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것을 성도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해야 돼요. 이상하다 왜 안 죽지? 죄인 같으면 벌 받아 죽어야 되는데 왜 아직 안 죽지? 아하! 역할이 있구나. 내가 살아있을 만한 가치가 아니라 나한테 어떤 가치도 없어요. 역할. 어떤 역할? 주님이 주신 역할.
그러니까 주님이 가치 있고 나는 가치 없고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분명히 해야 예수님을 증거 하기 때문에. 분명히 하기 위해서. 가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는 겁니다. 필요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필요한 거에요. 이 세상에서는 인간은 필요 없습니다. 주기도문 내용에도 바로 그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 주기도문 내용 중에 3절에 한번 봅시다. 뭐라고 되어있지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되어있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한번 적어볼게요. ‘오늘의 삶은 과거를 제거한 대가다.’ 오늘의 삶은 오늘의 선물로 받은 이 삶은 주님께서 나의 과거를 친절하게 또는 부드럽게 제거해주신 대가로 오늘날 살아있는 거에요.
그러면 그게 일용할 양식이에요. 왜 밥 안 주시느냐 양식 안 주시느냐 사도 바울이 왜 굶느냐 이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자체가 주님의 역할과 주님의 증인되기 위해서 필요에 의해서 주님은 오늘을 주시는데 인간들이 자꾸 과거하고 지금하고 연결을 시키는 거거든요.
그래서 연결시켜버리면 자기 자신이 마치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으니까 마치 자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니까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주님이 살아있어야 되거든요. 주님이 살려줘야 돼요. 어제 살았으니까 이제부터 내 힘대로 오늘까지 버틸께요. 내 힘으로 살아가면 안돼요. 그러면 과거에 있던 나와 오늘의 나와 연관성을 주께서 끊어줘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은 부드러운 폭력입니다. 부드러운 파괴. 파괴 없이는 창조 없습니다. 부드러운 파괴. 이렇게 보게 되면 주기도문 전체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세상을 공격할 무기가 장착된 기도. 그냥 세상을 공격할 무기 해도 괜찮아요. 세상을 공격할 무기가 장착된 기도입니다. 세상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거에요. 그러면 이러한 그러한 취지가 이 사실이 하나의 무기가 되는 거에요. 어떤 무기? 세상을 공격할 무기.
그러한 근거는 누가복음 9장 1절에 예수께서 12제자를 불러 모으시죠. 12제자. 12지파를 뜻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이에요.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일용할 양식 같은 경우에는 이거는 성경 좀 본 사람은 누구나 아는 거에요. 일용할 양식은 구약에 어디 나오지요? 어디 나옵니까? 광야 나오지요. 출애굽하고 난 뒤의 광야 생활이죠. 광야 생활.
만나 이틀 치를 허락합니까? 허락하지 않습니까? 허락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인간들이 백성이 살아있으면 안돼요.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살아있는 조건을 할당 받는 조건하에 이스라엘이 살아있어야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자립으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누가복음 11장 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이름이 뭐냐? 이름부터 알아야겠죠. 이름이란? 이 땅에 존재의 일부로 개입했다는 증거입니다. 이 땅에서는 이름을 가져요 이 땅에서는. 이 땅은 피조 세계입니다. 피조 세계는 각자 이름이 있어요.
우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고 그냥 이름 없습니까? 이름을 지어줬지요. 뭐라고 이름 지었습니까? 아담이라고 네 출처가 흙에 속했다고 아담, 이 흙아 라는 이름을 지어줬지요. 너는 살아있지만 너는 흙에서 나왔다 그 출처를 포함시켜서 흙에서 이름을 지었죠. 이름을 지었다는 말은 그 주도권이 누구한테? 이름 지어주신 분에게 있지요.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어요. 이 땅은 피조세계들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부터 해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름을 가지시고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지 않고 어디까지 내려오느냐 하면은 이름들로 충만한 이 세상에 본인도 하나의 이름으로 이 땅에 출현, 등장하는 거에요. 이름.
등장해버리면 이 땅의 인물로 실존, 실제로 계신 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간들 속에 계신 거에요. 그 시작을 이방인부터 한 게 아니고 바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 사실을 드러낸 겁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 주의 이름 빼놓고 자기들끼리 백날 단결하고 백날 왕을 뽑아서 번영하고자 해도 주의 이름이 허락하지 않고 용납하지 않고 그들을 제거해버리지요.
왜냐 하면은 그들의 모든 이름은 주의 이름에 복속돼야 되고 종속돼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각자의 이름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일종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라고 보고 주의 이름이 아침마다 사료를 준다고 보세요. 그러면 그 개는 주인이 주는 사료 없이는 못 살지요. 한번 적어볼게요. ‘사료 없이는 못산다’. 누가 못 살아요? 개가. 결국 개는 사료 빼면 개는 못산다.
이 말은 이 백성은 원래 살 필요 없는 존재다 가 만나를 주면서 더 확실하게 규정이 되는 거에요. 확실하게. 그래서 이 양식은 소유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유 당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그게 양식이에요. 그걸 광야에서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만나를 주고 그걸 양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말씀’.
그게 신명기 8장에 나오는데 한번 봅시다.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자, 떡인데 알지 못하는 떡. 해태제과에서 생산되지 않는 파리바게트에서 만들어진 빵이 아니에요. 생판 모르는 양식입니다.
이거는 인간의 방식으로 인간이 산다는 것은 누가 포용하지 않는다? 같이 동행하는 같은 이름을 가진 주의 이름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름이 있거든요. 엄연히 존재하는 그 분이 같은 존재자인 인간들 이스라엘 백성 존재자를 자기들 스스로 양식을 일체 허용하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주는 사료로서 먹임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오직 주의 이름의 증언, 주의 이름의 역할, 주의 이름의 증인이 되기 위한 그 목적을 달성할려고 하는 거에요.
그럼 거기에 대해서 싫으면 탈락이지. 싫으면 탈락이죠. 탈락됐다고 억울해할 필요 없어요. 왜? 원래부터 죽은 자이기 때문에 지옥 보내는 것은 죽은 자 입장에서는 별로 손해되는 거 아닐걸요. 원래 처지가 죽어있기 때문에. 죽어있다는 말을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4절에 나오지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 같이”. 나오지요? 우리를 뭐로 봅니까? 죄인으로 보지요.
여러분 죄의 값은 뭡니까? 죄가 어떤 처벌이 있지요. 그 처벌은 뭐지요? 사망이죠. 사망한 자. 사망한다는 말은 죄가 있다는 말이고 사망해야 된다는 말이고 이것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필요치 않는 존재지요. 필요 없이 생겨버린 존재. 너 자신은 필요치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기도, 주기도문입니다.
“너는 필요 없단 말이야 분명히 해. 너 필요 없는 걸 인정해? 인정 안 해?” “인정합니다.” 그게 주기도문이에요. 아 내가 필요 없는 존재구나. 이걸 분명히 하는 거에요. 여러분 쓰레기가 진지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쓰레기가. 음식쓰레기가 고민합니까? 쓰레기통에 앉아가지고 냄새나면서 어떻게 주인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저 4층에 있는 아파트 주인님이 그거 듣고 이야기합니다. 너는 내가 버렸어! 내가 버렸다면 나한테 네가 진지하지 않다면 너도 너 스스로 인생에 대해서 진지할 어떤 권한도 어떤 기대도 갖지 마라 이 말이죠.
우리 인간은 진지하거나 고민하거나 할 자격 조차가 안돼요. 심각하거나. 그럴 필요 없다고요. 로뎅의 유명한 조각이 있어요. 어떤 문인데 그 입구의 조각한 거에요. 그 입구의 문 이름이 뭐냐? 지옥. 지옥문에 있던 조각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단독 작품이 아닙니다. 문에 부착된 거에요.
이거 무슨 생각해요? 아 내가 지옥가면 안되는데. 이게 얼마나 시건방진 생각인지. 네가 무슨 자격으로 네가 지옥가면 안 된다는 그 자체가 너 지옥가게 만들거야. 그 시건방진 생각 자체가. 도대체 본인을 뭘 보고. 주님이 인간 속에 끼어든 이상은 내가 나를 판정하고 평가하고 규정하는 모든 것은 죄가 됩니다. 주님한테 물어야지요. 내가 나 스스로 내가 누구냐. 이렇게 턱 괴고 앉아가지고 고민할 권한도 자격도 없어요.
요한복음 18장 38절 한번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이냐고 빌라도가, 쓰레기가 주님에게 물어요. 진리가 무엇이냐. 주님께서 네가 쓰레기면서 진리를 궁금해? 네가 그걸 왜 궁금해? 그거 나한테 맡겨놔. 네가 궁금할 자격 조차 안돼 너는. 궁금해도 내가 궁금해 주님이 알아서 할 거지 네가 개입할 게 아니에요.
빌라도가 얼마나 모르는지 이렇게 해요. 아까 나의 나 다움에 국가도 포함된다 했지요. 빌라도가 이런 소리 합니다. 35절에 보면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자기가 왕이다 이 말이죠 이 나라의.
그러니까 3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절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왕은 왕인데 이 땅의 왕은 아니고 왕으로서 이 땅에 온 거죠. 왜? 공격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공격하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예수님께서. 주기도문 자체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담은 거에요. 그리고 12제자에게 그 기도를 가르쳤고요. 왜? 12제자가 새로운 이스라엘 12지파를 대표하니까요. 그들은 나중에 12고을을 통치할 거에요. 누가복음에 보면 나옵니다. 므나 비유에서 나와요. 다섯 고을 열 고을 이렇게 12지파가 나와함께 12세상을 통치하리라. 잘 나서가 아니라 역할을 맡은 거죠.
다시 신명기 8장을 돌아가봅시다. 그러니까 신명기 8장에서 짜장면이나 짬뽕, 탕수육 그런 거 찾지 마세요. 광야에서. 그러면 왜 주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광야를 경유하게 하셨는가? 좋은 길 있거든요. 지중해로 가는 길 있어요. 그 길 말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길로 이끌었어요. 그것도 몇 년 동안? 40년 동안 이끌었어요.
그것은 바로 약속의 땅은 너희의 땅이 아니다 이 말이죠. 네가 산다는데 의미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너희들을 데리고 주의 이름이 살 땅이 약속의 땅이에요. 우리가 사는 것은 주의 이름에 종속된 조건 하에 사는 거에요. 그걸 언약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이 하실 일은 출애굽기 6장에도 나오고 3장에도 나오지만 나는 나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내가 그들에게 언약을 주었다” 그 약속을 주님께서 주신 약속을 다른 인간들이 손을 댈 수가 없어요. 그냥 역할은 있지만 본인이 이루는 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언약을 이루실 때에 어떻게 이루느냐 하면은 바로 죄인 된 아브라함 죄인 된 이삭 죄인 된 야곱을 가지고 하시는 이유는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바꿔치기’. 주기도문은 바꿔치기를 이미 해버린 상태 그 이후의 할 기도가 주기도문이에요. 이미 바꿔치기가 완료되었어요. 주님의 나라로 완료되었을 때에 우리의 존재, 우리라는 것은 성도입니다.
양식이 있는 사람. 만나라는 양식 또는 누가복음 11장 18절에서는 뭘 받은 자? 좋은 것 뭘? ‘성령을 받은 자’. 성령을 받은 자에 있어서의 이 세상은 진지하지 않아요. 우리가 고민하거나 심각하거나 진지할 필요 없습니다. 모든 진지와 심각은 나의 나 됨, 되도 않는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고 괜히 심각한 거. 지옥 갈 인간인데 심각하면 무슨 소용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joke. 세상의 모든 것은 뭐냐? 농담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승리하고 난 뒤에는 죄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는 악마의 세계는 네 자로 하면 그냥 ‘웃음거리’에요. 이걸 세 자로 하면 ‘코미디’. 개그콘서트. 왜 개그콘서트가 그 프로가 종영됐느냐 하면은 정치판이 더 개그적이기 때문에. 재미가 없어서. 실제가 더 개그인데 뭘.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은 농담으로 보면서 세상을 떠나면 돼요. 이 세상을 히죽히죽 웃으면서 또 너무 웃으면 미친 사람 되니까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은 웃고 넘길 일이에요. 전혀 진지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 기도대로 우리에게 응답이 되어버리면 우리 자신은 해체가 되면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조크만 나오는 거에요. 코미디만 나오는 거에요. 그냥 호호 웃지요 뭐.
“너 성도로서 한 평생 어떻게 살았어?” “그냥 웃었어요.” 뭐 진지할거 있어. 나의 꿈과 희망과 이상이 없는데 무슨 진지할 게 있어요. 내가 달성할 목표가 없는데 뭐가 진지할 게 있어요. 이미 죽은 자인데 죽은 시체가 자기를 격려해가지고 무슨 하늘의 별을 따겠다는 겁니까 뭡니까.
어떤 중풍병자 친구 네 명과 중풍병자가 아주 심각하게 병 낫겠다고 본인 딴에는 너무나 심각하게 순서표 안 지키고 지붕 뚫고 막 내려왔어요. 중풍병자 낫게 해달라고. 주님께서 그 인간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살려주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죄, 그 낫겠다는 병을 낫는 것이 너한테 진지하게 여기는 그 인식, 사고방식. 그것을 죄라고 규정해서 죽여버리고 그리고 그 죄를 살려줬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죄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건데 왜 네가 하느냐. 일어나 걷는 것보다 죄 사함이 어느 것이 더 최종적이냐? 더 어려우냐? 더 놀라운 사실인가. 그까짓 거 중풍병 낫는 것보다. 첫째 시간 마치면서 이거 하나 기억하세요. 단순한 반복은 나를 배신한다.
기도 응답 받고 기도 또 하고 기도하고 본인의 기도가 배신당했어. 단순한 반복은 나를 배신한다. 남편이 뭐 한 짓이 있는지 아내 사랑한다고 뭐 선물 사줘도 다시는 이런 짓 안 할게 하면서 선물했다. 그것도 반복해요 안 해요? 또 배신하는데. 단순한 반복은 결국 우리를 배신합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얼마나 배신했는지 10분 동안 한번 생각해봅시다.
강남-누가복음 11장 2절 (주기도문) 220419b-이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해보겠습니다. 신명기 8장 2절부터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했는데 만나를 제공한 것이 어떻게 우리 마음 낮춤이 되느냐. 만나 제공과 우리 마음의 낮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주시는 양식은 어떤 경우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은 그걸 먹고 우리 마음이 낮아지는 결과를 낳으면 그건 양식이고 전혀 우리 마음이 낮아지지 않으면 그냥 만나라는 뜻이 ‘이게 뭐야?’ 라는 뜻이거든요. 이거는 여러 가지 음식 가운데서 맛 못 본 음식을 먹은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주님의 양식은 뭐를 겨냥하느냐 하면은 우리의 죄가 지금 높아져 있다.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에 전혀 들어갈 수 없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를 지적할 수 있는 양식, 곧 주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이고 주의 말씀 가지고 어떻게 지적되는가?
내가 이 땅에서 내가 이 인간 세계에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너도 이름을 가지고 나도 이름을 가졌는데 이름 가진 중에 누가 더 천국에 합당한 마음 낮춤이 되는 사람인지를 내 모습과 내 하는 행위를 통해서 비교 한번 해봐라. 그게 양식이에요. 비교해가지고 저 죄인입니다 저 같은 건 죽어 마땅합니다 하면 그건 양식 먹은 거고 내가 본받을게 이렇게 나오면 그건 아직도 멀은 거에요.
왜? 갑자기 진지해졌기 때문에 갑자기 심각해진 거에요. 심각, 진지하다는 말은 자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고 내가 따라붙을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나라 교인들 99.999%가 그래요. 주님 믿고 나 안 되네 이걸 포기하라고 십자가 졌는데 십자가 날라가 버리고 고상하기 짝이 없는 인격적으로 품위 있는 예수 상을 심어놨으니 이게 부처인지 예수인지 소크라테스인지 공자인지 분간이 안돼요.
나보다 뛰어난 인격을 가진 어떤 분 하나의 랍비로 모델로 삼아서 따라 붙자. 이게 무슨. 그럼 예수님의 산상설교만 있으면 돼요. 십자가 죽을 이유가 없다고요. 십자가가 따라 죽으라고 있는 십자가 아니에요. 그 십자가는 너는 따라 해도 너는 못 따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십자가에요.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따라한 사람이 있었어요.
누구냐 하면은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 강도가 십자가 따라 하기 위해서 강도질했습니다. 본인의 의지로 했겠어요? 안 했지요. 이게 정말 어려운 말인데 그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사후적이라고 해요. ‘사후적’. 일 터지고 난 뒤에 뒤돌아보니까 십자가가 새로 보이더라. 주님이 새로 보이더라. 일 터지고 난 뒤에.
왜 일 터지고 난 뒤에 봐야 돼요? 그것은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그걸 흔쾌히 받아들이는 거에요. 내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를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받아들이는 거에요. 그러면 이 세상에 내가 뭐 하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코미디죠. 농담이고 조크고 그런 거죠.
여러분 웃으면서 사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웃으면서 죽으면 돼요. 웃으면서 죽어가면 돼요. 밥 많이 먹어가지고 웃으면서 배 터지던지. 돈이 많아서 주체를 못해서 돈에 묻혀 죽던지 어쨌든 간에 목적은 죽는 겁니다. 죽는데 그 절차가 뭐냐? 절차가 웃으면서. 아무것도 심각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왜? 바꿔치기 당했으니까.
그래서 주기도문은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주님이 제가 아까 승리했다고 했잖아요. 승리했다는 것을 누가복음 주기도문에서는 뭐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는 뜻이에요. 반드시 이 일에 성공하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지요.
그게 누가 이루었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포함한 12제자, 물론 가룟 유다는 빼겠지요. 예수님을 포함한 12제자부터 70인 제자들. 그러니까 그들은 뭐냐 하면은 그들을 우리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 핵심은 주께서 홀로 하시는 것에 대해서 사후에 일 터지고 난 뒤에 주께서 홀로 하셨습니다를 증거하는 역할을 하는 거에요.
그 증거할려면 우리는 십자가 구경해야 하는가? 구경하기는 뭐 도망치기 바쁘죠. 그게 바로 누가복음 11장 13절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주시게 되면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다 마무리 했는가. 우리가 추가적으로 뭘 더 할 게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남아있는 게 전혀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바꿔치기하는 데 성공한 거죠.
제가 몇 일 전에 주일 낮 설교했는데 주일 날 설교하면서 제가 소름끼친 내용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너를 용서한 적이 없고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고”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너는 내 나라에 나 있는 곳에 들어온 적이 없다” 에요.
어떤 사람에게 해당되는 삶일까요. 자기 행함에 유의미, 의미를 아직도 그것을 쥐고 있는 사람이에요. 불신자죠. 성령을 안 받아 놓고도 신자인 척 하는 자들. 성령을 안 받아 놓고도 복음 전하는 자들. 성령을 안 받았는데 복음을 전해요. 십자가 복음 전하고 언약 전하고. 제가 보기엔 코미디입니다. 코미디에요. 전혀 자기 파괴가 안 되어있습니다.
인간 입장에서 가장 어렵고 기이하고 놀라운 기적은 내가 죄인이라는 겁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게 돼야 여기 주기도문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자를 용서하옵시고 이게 유효해요 이게. 이 기도가.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은 뭡니까? 우리가 한 모든 것은 뭐가 된다? 죄가 될 수밖에 없음이 사후적으로 확정지어진 거에요.
내가 어떤 기도를 하든 전도를 하든 설교를 하든 강의를 하든 뭘 하든 그건 전부 다 몽땅 죄에요. 헌금을 해도 그게 죄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내가 진짜 좀 찾고 싶어요 정말. 주께 부르심도 받지 않으면서 뭐 교회 좀 할라고 사람 끌어 모아야 돈도 생기고 목사 값한다고 뭐 복음 전하는 사람 많잖아요.
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예를 들어서 그 사람들이 복음 전한다고 “기도하는 것은 문제 있습니다.” 하면은 그러면 교인들이 “기도 안 해야 되겠네요 기도가 문제 있으면 안 해야 되겠네요.” 그러면 “성령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헌금은?” “성령으로 헌금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지금 어디서 꼼수를 쓰고 있어, 어디서. 뭐 어쩌겠다는 거에요. 뭐 교회 한번 해보겠다는 거지요. 복음 이름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비밀을 알려 드려요? 우리의 기도는 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뭘 해야 되느냐? 기도를 악착같이 해야지요. 왜? 죄인은 죄인이기에 죄를 나타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악착 같이 기도해야지요. 그걸 뭐라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이게 죄라는 것을 싱긋 웃는 거에요. 왜? 이미 사후적으로 끝난 문제니까. 이미 구원이 완료된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껏 기도하고 헌금이라는 죄를 짓는 거에요. 주여 또 죄 짓습니다 해서 한 2억 내고 또 죄 짓습니다. 주께서 진심이야? 진심일 수 있겠어요? 돈 2억이나 내는데. 그걸 죄라고 누가 하겠어요. 어디서 코스프레하고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죄 짓는 것, 기도하는 것이 죄라고 하니까 그러면 기도 안 하겠습니다. 기도 안 하는 게 죄가 돼요. 뭐든지 죄가 돼요. 뭐든지.
이걸 가지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어찌 즐겁지 아니하냐.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냐.” 모든 게 죄가 되니까 죄다 죄가 되니까 이 죄 짓는 즐거움. 어찌 기쁘지 않습니까?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항상 하는 것은 반복이거든요. 단순한 반복은 계속해서 배신이 일어나요. 배신이. 상투적이 되니까.
왜 반복이 되느냐 하면은 어제 제거를 못했어요. 일용할 양식이 아니고 나 오년 전에 은혜 받았으니까 그때부터 줄곧 나는 은혜 받았다. 계속 과거와 오늘과 본인을 일방적으로 연결시켜요. 어제 본인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권사님 코로나 걸렸다고 소문난 권사님 어디 있습니까? 없어졌어요. 누가 없앴습니까?
오늘의 일용할 양식되기 위해서 어제를 친절하게, 친절한 폭력이죠. 친절하게 그걸 없애줬어요. 우리로 하여금 낙망과 노스텔지아 어떤 회상 젊을 때의 꿈 거기 헤매가지고 옛날 팝송이나 들으면서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옛날 가요나 듣고 하지 말라고. 그때 좋았었어 그런 짓 하지 말란 말이죠. 그때 좋았으면 뒤로 한번 돌려줘?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배신합니다. 특히 사랑이라는 것 인간들의 사랑에 그런 게 많아요. 누굴 사랑하잖아요. 우리가 남을 사랑한 게 아니에요. 사랑한 게 아니라 내가 시작한 일에서 내가 책임질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내 사랑을 못 받아줬기 때문에 나는 내 사랑만큼은 나의 의로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다 뭐 이런 거에요.
나는 그 남자를 사랑했지만 그 남자는 내 성에 안 차서 계곡에 가서 밀어가지고 빠트려 죽였다. 왜? 나는 정당하다. 왜? 나는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도대체 자기 부인이 안돼요. 인간은 스스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마음 낮추라고 만나줬는데 그 이스라엘 망했습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은 무엇을 향한 공격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최종적인 공격이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더는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그들은 과거부터 계속 현재까지 어떤 동질성을 추구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그런데 그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와버렸잖아요. 와버리니까 모든 인간은 어떻게 되었다? 전혀 죽은 시체에 불구하고 그들이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에라 네가 죽어라 해서 예수님을 죽음에 넘겼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뭐냐 하면은 바리새인들이 죄 문제에요. 바리새인의 죄는 뭐냐? 바리새인의 죄는 선악체제에 의해서 규정된 죄가 돼요. 선악체제. 자, 선악체제는 선악체제 지식 보유자 누굽니까? 나죠. 모든 인간은 선악체제 다 알고 있어요. 선악체제 지식 보유자를 선한 것으로 선한 존재로 증명하는 용도로 선악체제가 작동해요.
선악체제를 알고 있는 쉽게 말해서 윤리 도덕을 알고 있는 양심이 있는 나 자신이 이 선악을 알고 있다는 이 자체가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선악체제는 작동한다니까요. 그걸 자기와 타인에게 적용시킨다니까요. 여러분 자신들에게 적용 많이 시켰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내 사랑을 안 알아줘서 우리는 헤어졌지만 내가 그녀에게 준 사랑은 나는 진실이었다. 이런 거요.
이게 뭐에요? 모든 사고방식과 어떤 말이나 태도가 항상 마지막에 뭐로 돌아오느냐? 결국 나는 최선을 다했으며 나는 의로우며 나는 하자가 없다는 거에요. 이게 쓰레기다운 태도입니까? 이게 내가 쓸모없다고 자인하는 인정하는 그런 이론과 일치되는 행동이에요? 아니잖아요. 왜 이렇게 나의 선과 의를 왜 유지할려고 하느냐? 그거는 살고 싶어서 하는 거에요.
선악체제에 의하면 선한 자만이 살아남을 복을 누린다는 거에요. 살아남을 복을. 그럼 교회 철야기도하거나 교회 기도할 때 보세요. 주일날 큰 교회 장로가 대표기도하는 것 보세요. 그 기도 내용을 함축하면 뭐에요? 우리 살아남아야 돼! 이거잖아요. 살아남는 게 뭐다? 복이고 일찍 죽는 것이 저주고. 그러면 주님은 뭐가 됩니까? 주님은 저주 받았네요. 40도 못 살고 죽었으니까.
다시 이야기할까요? 인간은 사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게 죽음의 행태다. 이미 죽은 자가 길게 시간 끄는 거에요. 시간 끄는 것. 이게 인생입니다. 아까 동영상 할 때 인생은 뭐라고 했습니까? 오류라고 했지요. ‘오류’. 이미 고장난 거에요. 오류에요. 잘못된 거에요. 뭔가 일이 틀어졌어요. 선악과 따먹어서 이미 인간 자체가 잘못 되어있는 거에요.
잘못된 내가 내 식으로 바르게 고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그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선한 것은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여튼 외우기는 잘 외워.
그러면 우리 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내가 죄인인 것을 알면 돼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게 성령이 왔기 때문에 나는 오늘부로 죽어도 뭐 내 권리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가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에 주님의 입 속으로 쏙 들어가요. 그걸 가지고 영양제라고 합니다. 오메가 3. 울금.
현대인들요 또 나이 좀 되면 아침마다 의사가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전에 병실 회진하잖아요. 본인이 본인을 회진을 해요. 영양제 거기에다가 혈압에 좋은 것, 공진당부터 해서 그리고 유산균. 본인이 의사에요. 그래서 인간은 매일 매일을 웃을 수가 없어요. 심각해요. 이러다 죽겠다. 참 주님 보기에 같잖아요. 이미 죽었는데 뭘 새삼스럽게 이러다 죽겠다니.
아니야 살려면 복을 받아야 돼. 복을 받을려면 내가 선을 행해야 돼. 선을 행할려면 교회 가서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해. 말씀대로. 이게 무슨 짓, 이게 무슨 쓰레기같은 짓이에요 이게. 하여튼 몽땅 사람들 지옥을 다 보내요. 나의 파괴에요. 나의 파괴. 주께서는 주기도문으로 제발 이 가상적인 나를 파괴, 매일같이 파괴시킵니다. 좀 쓸데없는 것 좀 얼쩡거리지 마라고요.
신명기 8장을 다시 보게 되면 8장 3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떡보다 말씀이 더 우선적이고 근원적이라는 거에요. 떡은 먹었는데 말씀은 없다. 죽은 거죠.
주님께서는 실제로 그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광야 40년 기간을 끌어버려요. 홍해에서 건너온 사람 다 죽여버렸습니다. 모세도 죽였어요. 딱 두 사람 빼놓고. 갈렙과 여호수아. 그들은 왜 안 죽었느냐? 갈렙과 여호수아는 모세 언약의 역할이기 때문에 안 죽은 거에요. 모세의 제자가 아니라 모세 역할 한 후계자. 갈렙과 여호수아가.
왜 그들은 안 죽었는가? 그들이 땅을 차지하기 전에 이미 땅을 차지한 마음가짐을 가졌기 때문에. 그게 성령을 미리 받은 거에요. 성령을. 재림 눈에 안 봐도 미리, 천국 안 봐도 미리, 미리 받은 거에요. 성령을 미리 받아버리면 이미 시작된 성령이에요. 이미 시작된 천국이고 시작된 약속의 나라입니다. 세상, 출세 그냥 웃지요. 뭐 그거 뭐라고 그거.
그래서 이 주기도문은 세상에서 우리를 떼어놓는 기도에요. 주여 빨리 세상 떠나게 하옵소서. 주기도문 외울 때마다. 이제는 더 머물 이유가 없어요. 명분도 없고. 떠나게 하옵소서 하면 역할을 받은 거에요. 역할을 받았기 때문에. “떠나고 안 떠나고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러나 네 뜻은 알았어. 너 빨리 떠나고 싶지. 그건 내가 감안하마. 언제든지 나 필요할 때 죽여줄게. 하지만 죽고 안 죽고는 너 마음대로 못해.”
이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에요? 방금 한 이야기가 제 이야기 아니고 누구 이야기에요? 빌립보서 8장에 나오는 누구 이야기죠? 사도 바울의 소원입니다. 떠나고 싶은데 소원은 뭐냐? 빨리 떠나고 싶은 거에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결혼 안 해서 그렇다 되도 않는 해석을 하는데 아내 없고 자식 없어 그렇다는데. 요새 현대신학은 그렇게 해석을 해요.
현대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인간이라는 것은 없어요. 주님이 인간이 된 게 아니고 주님이 죄인이 되셨지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게 없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존엄성 없는 죄인인줄 알고 죄인이 되신 거에요.
그래서 주의 말씀에서 뭐가 터져 나옵니까?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죽을 죄인이고 마땅히 심판 받아야 돼 지옥에 가는 게 마땅해. 그게 계속 그 내용이 계속 나오는 거에요. 주기도문도 마찬가지에요.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소서. 가르쳐 줄게. 그 가르쳐 준 내용이 뭐냐? 너는 죽어 마땅해. 너는 하늘나라에 필요 없는 존재야. 쓸데없는 거야.
그러면 쓸데없는데 왜 살립니까? 쓸데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조건하에 살려주는 거에요. 그래야 주의 일을 할 수 있거든요. 이 쓸데없는 자가 왜 천국 갔지? 그걸 증거하라고 하는 거에요. 누구 영광만 돌리겠어요? 주님이 하신 것만 영광 돌리겠다. 이미 주의 뜻은 아버지의 뜻이 이룬 것 같이 누구 몫입니까? 주기도문에.
그거는 예수님이 하셨고 그 후에 예수님의 역할 맡은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면 이게 바로 우리가 돼요. 우리. WE. 우리가 된다고요. ‘WE’. 옛날에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실패했습니다. 실패했지요. 만나 먹어도 실패했지요. 마음이 낮아지지를 않았어요. 이 광야 만나 이야기가 요한복음 6장에도 나옵니다. “내가 떡이다”
사람들은 그럼 주께서 우리에게 떡과 고기를 주실 거죠? 그거는 너희들이 떡을 먹고 배부른 것을 원해서 너희들이 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달라고 하는 것은 주께서 절대로 주지를 않습니다. 왜? 아버지가 나쁜 것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주시는 기도의 응답은 주님 보시기에 좋은 거에요. 주님 자신만 증거 되는 것만 주셔요.
그게 뭐냐? 빨리 죽어 인간아. 살 생각하지 말고. 그게 마음을 낮추는 거에요. 그게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살아온 것이 이상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는 마음이요. 난 죽어 마땅한데. 죽어 마땅한 인간이기 때문에 목적, 기대, 희망 이런 거 일체 그거 다 날라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역할 어디 하느냐?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이 세상에다가 제자들을 파견했지요.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떤 식으로 그들이 멸망해야 될 티를 내는 겁니까? 그거는 누구 중심이에요? 하나님이고 예수고 막 교회가 찼는데 그 목적이 뭐에요? 아까 선악체제 이야기했지요. 선악체제는 뭐죠? 자기가 선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왜 지키느냐? 살고 싶어서요. 왜 살고 싶으냐? 악마가 너 죽으면 안 된다고 악마의 협박 공갈의 흑암의 권세에서 못 벗어나서 이러는 거에요. 그러면 이 죄 가운데서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죄는 뭘까요? 주님의 죄는? 바로 자기가 죽을 죄인인 것을 모르는 게 죄가 되지요. 예수님 앞에서 자기 죄를 모르는 게 죄가 돼요.
그래서 제자들은 죄를 알까요? 모를까요? 이 당시에. 모르지요.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성령 오니까 비로소 제자들은 자기 죄를 알아요? 몰라요? 사도 바울은 자기 죄를 압니까? 모릅니까? 알지요.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알지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하려 입을 다물게 하려 함이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 우리에게는 일체 의가 없어야 된다. 나의 의를 따로 챙길 이유가 없어요. 그냥 이미 죽은 자만 되면 되고 그 주님이 우리를 심판할 때 그 심판 안에 비로소 생명이 있어요.
심판 받고 난 뒤에 의 주세요 하는 게 아니에요. 심판 당하는 안에 주께서 준비된 자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의를 주시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이 의를 받을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알게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전부 다 진지해요. 심각합니다.
왜? 아무리 부자가 되도 더 부자 되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살고 싶어 하는 거에요. 죽어가면서 더 살고 싶어 해요.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런 노래가사에 보면 이런 게 나와요. “약해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뒤쳐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지금 이 순간이 끝이 아니라 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외치면 돼” 하는 노래가 있어요.
“약해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말 대신 지금 이 순간이 끝이 아니라 나의 길을 간다.” 보세요 이게 얼마나 노골적입니까 이 세상에. 그 보다 더 오래 된 이런 노래 있어요. 이 노래는 어지간한 사람들 다 알거에요. 가사만 이야기하겠어요. “사랑이 이렇게 괴로울 줄 알았다면 만나지나 말았을 걸. 그 시절 그 추억이 또다시 온다 해도 사랑만은 않겠어요.” 윤수일이 불렀던 노래에요. 윤수일 – ‘사랑만은 않겠어요’
사랑이 이렇게 괴로울 줄 알았다면 만나지나 말았을 것을. 이게 뭐에요. 만남이 우연이거든요. 자기가 결정합니까? 모든 만남은 우연입니다. 본인이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게 아니에요. 결혼해놓고 다시는 너 같은 남자 안 만난다 하지만 그때 되면 그 남자뿐이에요. 또 만나서 또 망가지고 또 마찬가지에요.
왜? 모든 것이 사고적으로 주의 일이기 때문에.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강도가 강도짓 안했으면 주님 만나지도 못하고 지옥 갔습니다. 강도가 강도질을 해줘야 그래서 주님 옆에 딱 붙어서 십자가 져줘야 “네가 오늘 나와 낙원에 있으리라”가 성립이 되는 거에요. 그걸 나한테 이익이다 손해다 따지지 마세요. 본인이 마음을 낮추면 이익이다 손해다가 없어요.
자, 이 선악체제가 문제가 되는 게 뭐냐 하면은 나한테 이익이 되면 선이고 손해가 되면 악이라고 규정한다는 게 문제에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뭐냐 하면은 너 까불면 너 저주 받아서 너 가난하게 되고 못 살고 세리와 창기 된다. 네 인생 망가져 라고 바리새인들이 그런 식으로 해왔다 이 말이죠.
이것을 누가 공격하느냐? 주기도문이 공격, 주님이 공격하는 거에요. 이 바리새인을. 왜? 이스라엘은 이미 뭐가 됐느냐? 이미 애굽이기 때문에. 애굽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공격받은 그 애굽 나라가 오늘날에는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애굽이에요. 바벨론이고. 그들을 공격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기도를 하고 하나님 믿겠다는 것은 결국 뭐냐? 내 몫의 나의 소유를 내가 지켜내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내 소유를. 사람들이 복음 안다고 해도 툭 건드리면요 막 갑자기 분노가 확 일어나죠.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뭔데 내 것 건드리냐. 내 것.
자, 내 것 가운데 내 명예, 내 체면, 내 과거 화려한 이력, 나의 가치, 나의 의미 다 들어 있어요. 내 것. 물론 내 재산도 포함되어 있고요. 네가 뭔데 내 명예, 명예 누구 것이다? 내 소유의 명예가 아직도 따로 있다는 뜻이거든요. 네가 뭔데 나를 건드려? 그러니까 이 복음이 사람을 사고적으로 더욱더 죄인 되게 하는 겁니다.
목사님 저는 죄인입니다. 툭 건드려보니 왈콱. 죄인 같은 소리하고 있네. 죄인인데 왜 자꾸 이상하게 화를 내지요? 그럼 정답은 뭡니까? 씨익 웃지요. “너는 나쁜 인간이야.” “너 농담이지? 그렇지? 조크지? 내가 누군지 알거든.” “너 집구석 망해라. 너 자식 망해버려라.” “아 코미디 듣네. 오늘 또 코미디.”
이 모든 세상에 일어난 현상이 이미 죽은 자, 이미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한테는 이게 코미디입니다. “너 짐 싸들고 나가!” “아이고 또 코미디하신다. 나갈게 나갈게.” “너 진짜 나갈래? 돈 없이? 죽는데?” “죽지 뭐. 어차피 죽는 것도 코미디니까.” 이걸 가지고 히브리서에서는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감당치 못한다’에요. 이거 미친 것도 아니고.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다시 누가복음 11장을 봅시다.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주기도문 다음에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이미 우리가 악마의 시험에서 못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가 될 수 없어요. 주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부드럽게 공격하는 거지. 우리를 해체하는 겁니다. 너는 이미 죽었다고 간주하는 거에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너는 이미 죽었고 네 안에 내가 산다. “네가 사나? 내가 사나?” “주님이 사십니다.” “그렇지. 너는 살지 않고 네 안에 내가 살지.” 너는 죽어야 될 이유는 바로 주기도문에 의해서 너도 공격 받을 이 세상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격 받아야 되지요. 이미 다 이루고 난 뒤에 이 기도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주의 뜻대로 하는 기도가 되는 거에요 이게. 주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뭐냐? 내 소유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다 주께서 혼자 하셨습니다를 역할을 계속 역할을 수행하는 기도. 이게 성도의 기도입니다. 주께서 지금도 살아서 일함을 증거 하는 기도. 그게 주님의 취지에요. 내가 기도할 테니까 나한테 뭐 줄렵니까?
이거는 아직도 자기 소유 창고가 아직 자기 지킬 것을 계속 키울려고 하는 어떤 야심, 나의 나됨, 멋진 나의 미래상, 남한테 기죽지 않고 주눅 들지 않는 남한테 싸워서 지지 않는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나의 탐욕이 그대로 있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내 뜻대로 안되는데 그럼 기도나 할까? 기도나? 기도나?! 기도나 할까?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데 기도나 할까?
그런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은 암 말기 4기일 때. 교회오빠인가? ‘교회오빠’ 제가 영화 보고 제가 아주 신랄하게 비판을 했더니 누가 또 신랄하게 반박을 했어요. 교회오빠가 뭐가 잘못됐느냐. 교회오빠는 예수님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집요함, 자기 죄인인 주제에 안 죽을려고 집요함에 대한. 그게 그렇게 문제 있는 건데 그걸 아주 긍정적으로 교회오빠. 유투브에 보세요. 교회오빠 영화 2000원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프기 전에도 이미 죽은 거 아니에요? 인간의 슬픔, 아픔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너 곧 죽으라는 하나님의 징후잖아요. 반겨야지요. 그러면 약도 먹지 말고 병원에 가지 맙니까? 아까 제가 그런 실수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병원에 가는 죄를 짓고 약을 꼭꼭 챙기는 죄를 지으라 이 말이죠. 신자가 어떨 때는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성령을 안 받았나?
아니 죄 지으라는데 왜 죄는 안 짓고 왜 죄 안 짓고 싶으냐 하면은 혹시 죄 지으면 벌 받을까 싶어서. 벌은 이미 주님이 다 받았잖아요. 왜 새삼스럽게 자기 목숨 챙길라 합니까. 4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모든 인간 중에서 어떤 인간도 남을 용서할 필요 없을 정도로 남에게 죄 안 지은 인간이 없다는 뜻이에요.
뜻은 알겠지요? 어떤 인간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찌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 말이죠. 이만큼 더러운 세상 지저분한 애굽 나라였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광야에서 일용할 양식 가지고 마음을 낮춰서 건지듯이 마지막 때는 예수님 자신이 말씀 완성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날그날 살게 만들죠.
내가 애써서 산 게 아니고 주께서 역할을 준 것이기 때문에 내가 살아서는 안 되고 역할이 산다는 조건하에 우리라는 그 테두리에 현존재를 성도를 통해서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주님 이 살아있음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해주시는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이게 주기도문뿐만 아니고 모든 기도가 주의 기도가 다 그래요.
5절 봅시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제가 빨리 이야기했지요. 그만큼 다급하다 이 말입니다. 이 기도가 뭐냐? 다급해요. 주님 오셔서 하는 일은 주님 홀로 심각해요. 다급하고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입니다. 거기에 동참하는 게 이게 바로 기도의 중요성입니다.
거기 나오지요. 떡을 빌리려고 하니까 아이 내일 오지. 지금 나 잔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아라 라는 한쪽은 다급한데 한쪽은 느긋하고. 그럴 때 어떻게 하는가. 간청하지요. 간청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시간을 완전히 묵살하고 모독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자기는 다급하고 상대방은 안 따라줄 때에 강제조치에 들어가지요.
문 두드리면서 문은 이미 닫혔고 못한다고 하니까 8절에 뭡니까? 간청하지요. 문을 두드리는게 어디 나오느냐? 9절에 나오지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문을 어떻게 하라? 문을 두드려라. 이게 뭐냐? 다급함이고 간청함이에요. 그러면 이 다급함과 간청함은 누구한테만 있습니까? 그 당시에.
누구만 그 시대에 완전히 저주 받은 세상이라는 것은 누구 안목에만 누구만 알고 있어요? 예수님 본인의 기도죠. 다급함이죠. 제자들은 여기에 동참했습니까? 동참 못했습니다. 잠자고 있었어요. 그 동네가 어디냐? 겟세마네 동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전혀 다급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안 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다급함이 그 제자들 베드로, 요한, 야곱에게 삽입되지를 못했어요.
그럼 왜 자는 사람 잘 거 뻔한데 왜 데리고 왔느냐? 분리. 너희들의 기도가 너희들의 구원에 조금도 보태지 못한다는 것. 그 분리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주님과 주님 사이가 너무나 간격이 멀어서 어느 인간도 주의 가신 길에 합류할 수가 없는 처지에 있다. 너희들은 이 멸망할 세상에 같은 쓰레기로서 그냥 일부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런 질문을 했어요. 이런 질문을 했는데 베드로가 닭소리를 들었습니까? 주님 소리를 들었습니까? 질문했어요. 베드로가 들은 게 소리가 닭소리입니까? 주님 소리입니까? 주님 소리죠. 왜냐하면 네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는 그 생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러면 미물인 아무것도 아닌 아이큐가 낮다고 여기는 그 닭도 주께서 어떤 역할을 맡기니까 자기 소리를 내는 게 아니고 주님의 소리를 낸다면 닭보다 더 못한 베드로가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말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인생 경험, 신앙 연조 그거 자랑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반복적인 십자가 죽기까지 했던 경로 있잖아요. 그걸 베드로를 통해서 그 경로를 반복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 한번 읽어 볼까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아멘.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게 누가 이야기했느냐? 베드로잖아요. 베드로전서 아닙니까. 베드로가 쓴 편지잖아요. 베드로 가는 길이 뭐냐 하면은 본인이 어떻게 구원받을려고 나선 게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 따라갔던 그 많은 실수와 실패, 어리석음, 갭, 그 갭을 유지하는 거에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이야기했어요. “나는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그래놓고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졌으니” 이게 무슨 말이에요. 십자가 졌다는 말이에요 지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너를 위해서 너희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 나는 지지 않았다. 나는 다만 너희를 위해서 어떤 인간도 예수님 빼놓고 십자가 질 사람은 없다는 식으로 내가 십자가에 참여했다 이 말입니다. 죄인으로써. 이렇게 자기가 죄인 되는 것이 기쁜 일이고 즐거운 일이고 더더구나 감사한 것은 세상에 나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거는 전부 다 시시하게 웃어넘길 시시한 코미디 같은 일이다 이 말이죠.
그 코미디에 누구도 한 몫 하느냐 하면은 악마도 한몫을 해요. 악마는 악한 역할 해가지고 심술궂은 역할을 하는 겁니다. 너 그렇게 살다가 너 망한다 하는 그 역할 악마가 하는 거에요. 그 악마 역할 한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욥기에 보면은 나옵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종합하게 되면 속지 않을려고 하니 속는다. 내 것을 지킬려고 하니 내 것을 잃어버린 거에요.
처음부터 내 것이 없고 전부 주님의 선물인데 내 것 지키겠다고 철저함과 진리대로 하고 바르게 살고 하니까 그게 속아 넘어가는 거에요. 악마한테 속아 넘어가는 짓이에요.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겠습니까? 그걸 보고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영혼아.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이 기도라는 것이 이렇게 위험한 거에요. 죽을라고 기도하면 되는데 살라고 기도하는 거에요. 지금 외국에서 우리 손녀가 와서 식사기도 맨날 자기가 하겠대요. 그런데 기도가 점점 길어져요. 미역국을 해 놓고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좀 길었어요. 하고 난 뒤에 그 애 엄마, 우리 딸이 그 국을 다시 데웠어요.
죄를 지은 거죠. 손녀가 기도를 길게 한 것은 뭐 이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길게 한 것은 우리는 따뜻한 미역국을 먹을 자격이 안 되고 식은 미역국 먹고 지금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하는 식으로 기도를 하지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했을 때 제 딸이 그 국을 다시 데우는 것은 따뜻한 국을 데워먹는 죄를 짓는 오늘 배운 것 그대로입니다.
속지 않으려고 하니까 속기 때문에 아예 나를 먼저 속여버리는 거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나를 속는 죄를 먼저 지어버리면 선빵 날려버려. 주여 또 죄 짓습니다 하고 이렇게 나설 수밖에 없어요. 어차피 모든 것이 구원이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다 농담입니다. 주의 역할 빼놓고 다 농담이에요.
아무리 진지한 것도 없고 심각한 것도 없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사소한 것 중에서 제일 사소한 것이 내가 목숨 끊는 거에요. 이게 얼마나 사소한지요 성경에도 나와요. 이게 얼마나 사소한지 후~ 불면 꺼질 정도랍니다. 호흡이 있으니까. 살아볼라고 온갖 노력 공부도 하고 많이 했는데 문제는 호흡 막아버리면 죽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사야 2장 20절에. 인생이 뭐냐? 경상도 말로 하면 인생이 뭐꼬? 이런 뜻이죠. 정답은 아무것도 아니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호흡이라는 공기와 맞바꿔야 될 그 정도 값어치, 흔해빠진 공기 흐름이 우리의 긴 긴 90,80,100살 인생. 공기의 흐름.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뭐다 공기다. 에어다. 그냥 ‘공기’.
그리고 인간의 죽은 장례식 뒤쪽에 가면 그냥 적막한 공기만 흐르지요. 거기서 귀신이 나타나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거 없습니다. 그냥 흙으로 돌아가고 공기는 공기대로 돌아가고 누가 여기 살았느냐 그건 인간의 기억 속에 6개월만 지나가면 자기 일 바빠가지고 다 없어지지요. 다시 누가복음 마지막 정리하겠습니다.
자,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주님만 다급해요. 여기에 동조할 제자들 아무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다급한지. 주님이 자기 기도에 다급한 거에요. 심지어 땀방울이 어느 정도? 핏방울 되기까지. 또 이것도 따라한다고 무릎팍 다 깨져가지고 피나가지고 주님 따라간 사람 있어요. 피의 기도한다고.
아휴 왜 그런 짓하는 거에요? 자기한테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이게 모아져서 나의 구원에 뭐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얼마나 성령을 안 받았으면 얼마나 육이었으면 그냥 몸부림치는 거에요. 몸부림. 성령을 안 받아가지고. 자기 구원에 그렇게 진지한 거에요.
11절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지금 그렇게 주고 있어요 지금. 인간들은 육이 원하는 것, 마음을 높이는데 원하는 것을 기도 응답이라고 하거든요. 그게 간증집회고 그 간증집회의 기도 응답은 누가 했습니까? 악마가 한 거죠. 왜?
악마는 나쁜 아비이기 때문에 나쁜 걸 주지요. 나쁜 걸 준다는 말은 육이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살도록 나를 위해서 살도록 부추기는 그 나쁜 짓을 악마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해줍니다. 계속 해줘요.
13절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 바로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무래주는 일. “너 봐 내가 버리라고 했지. 내가 농담이라고 했지. 왜 그리 진지해? 앞으로 진지하지 마. 너 죽는 것도 사소한 일이야. 죽어도 네 생명은 하늘에 있는 거야. 시민권은 하늘에 있어. 땅에서는 이미 죽었어.” 말씀가지고 우리를 책망하시는 이런 좋은 것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기도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죄 된 기도뿐이었고 진짜 기도는 주님이 하셨고 성령님이 하신 것을 이제는 돌이켜서 감사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