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0장 36절 (텅빈 형식) 220405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0장 24절부터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무슨 내용인지 그들이 많은 선지자와 임금, 이 선지자와 임금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인간적으로 봐서 가장 엘리트 계층에 속하지요. 임금 옆에 우수한 IQ가 높고 학식이 높은 그런 보좌관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임금 옆에.
국가를 운영한다면은 국가의 모든 최고의 지혜자들을 옆에 둬야 국가가 운영된다 이 말이죠. 최고의 지혜자의 조언을 듣고 지혜를 끄집어내야 무식한 백성들로부터의 오는 모든 비난이나 불평을 능수능란하게 반박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임금은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보좌관들이 똑똑하기 때문에 이러한 국민들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그들의 요구에 이런 허점이 있으며 이것으로 반박하시면 그 요구사항 한 쪽이 자기의 과오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임금님의 위상은 더욱 더 높아지고 존경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보좌관들을 두는 거에요. 임금의 자리가. 최고의 자리에요. 모든 인간의 지혜가 집대성 중에서도 정점에 해당되는 자리, 임금. 그리고 그 보좌관은 선지자.
그런데 이들조차도 듣고자 해도 듣지 못하고 보고자 해도 보지 못한 것을 70명 너희 제자들에게 내가 알려줬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지혜냐? 그게 누가복음 10장 20절에 보면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늘에 기록된 것, 너희 이름이.
이걸 성경에서 말하기를 이거는 무슨 체계냐 하면은 하늘이죠. 하늘에 기록됐잖아요. 하늘이니까 땅에 있어요? 없어요? 그 책은? 생명책은 땅에 없습니다. 땅에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는 겁니다. 생명책이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시는 것.
인간이 여기서 요구한다고 들어가고 빼달라고 해서 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직접 만드시는 겁니다. 결국 생명책 만든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설계자가 하나님이시고 그 설계자대로 하는 실행자는 누구가 되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이 되시는 거에요. 북 치고 장구 치고 아버지와 아들이 다 해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임금이나 인간의 지혜자, 선지자들은 이런 줄도 몰라요. 왜? 그들은 땅을 관장하기 때문에. 그러나 생명책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생명책은 제조공장이 어디지요? 제조공장이? 하늘이 제조공장. 그렇다면 여기에 브랜드는? 구찌? 루이비통? 상표는 그냥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가 상표가 되는 겁니다. 왜? 제조공장이 하늘에 있고 하늘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생명책에 내 이름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인간의 요구사항이 있다고 생명책에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빼달라고 해서 빠지는 게 아니에요. 이런 것이 정말 참으로 어렵습니다. 정말 이런 게 어려워요. 어느 정도로 어려우냐?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이 두 가지를 비교해보고 차이점을 여러분들이 한번 보세요.
How many와 How much.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똑같이 얼마나 많이 그런 뜻이거든요. How many, How much. 그런데 이게 사용방법이 달라요. How many라고 하는 것은 하나하나 숫자 헤아림이 가능해요. 하나하나 숫자. 개체 헤아림이 가능.
How much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이’ 거든요. 그 개체 하나에 개체 헤아림이 무의미합니다. 무의미하다. 개체 헤아림이 가능하고 이게 의미가 되어버리면 나는 생명책에 들어갔습니까? 뺐습니까? 라는 질문이 성립이 돼요. 질문이 가능하다고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저 금은 몇 개냐 라는 이런 질문은 이건 성립이 안 됩니다. 저 금덩이가 몇 개냐가 안돼요. 왜냐하면 금은 잘게 잘라보면 무한대로 몇 개가 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금은 몇 개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How much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많이. 집단적으로 표현하는 거에요. 금은. 집단적으로.
그래서 생명책은 내가 들어가있습니까? 빠져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아요. 그 질문 허용하지 않고 그게 내 개체의 기대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생명책을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생명책은 뭐냐 하면은 연대를 이뤄요. ‘연대’. 영어로 하면 ‘Band’죠. 연대. 일종의 집단을 형성해서 그걸 하나로 양적으로 한꺼번에 처리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에 생명책이 있다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 생명책에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지요. 나 들어가게 해달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사람을 집어넣기 위해서는 이 생명책은 무엇이 되느냐?
이 생명책은 오늘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텅 빈 형식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형식은 있는데 안에 텅 비어있어요. 형식이 있는데 안에 텅 비어있다고요. 텅 비어있으면 그 안에 텅 빈 형식을 내용을 누가 채우겠어요? 당연히 생명책은 하늘에서 제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채우지요. 그러면 지상에 등장할 때는 텅 빈 형식으로 주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이러한 생명책의 설계자는 하나님이시고 그 내용은 누가 채우신다? 우리 주님이 실행자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에요. 이 땅에 와서 아무것도 안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너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 70인들아 할 때 70인 누구누구 말입니까? 하는 게 아니라 그 70인이라고 하는 것은 How many의 70인이 아니고 How much의 70인이에요. 금 덩어리 한 덩어리처럼.
똑같은 의미가 요한계시록에 7장 4절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보면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14만4천이라고 하는 것은 인 맞은 자를 표현할 때 이 숫자는 How many의 숫자가 아니라 How much의 숫자에요.
그냥 14만 4천으로 개수로 보지 마시고 중량으로 보세요. 한 덩어리. 완벽하게 구원된 사람의 Band, 연대 덩어리를 14만 4천. 12x12x1000을 한 이유가 12는 야곱의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야곱의 아들, 12지파에게 복을 내릴 경우에 그 복은 야곱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야곱 마지막에 최종 온전한 이스라엘, 온전한 교회, 이스라엘까지 12라는 복의 원리는 완료 1000, 완료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기어이 완성시키고 만다.
12x12x1000. 144가 아니에요. 12x12입니다. 12를 강조점이 있어요 강조점 엑센트를 주는 겁니다. 언약의 언약은 언약이 언약대로 완성하게 되면 1000. 다시 말해서 시대는 그걸로 종료된다. 생명책에 숫자 다 차면 시간이 멈추고 역사도 끝난다. 그럴 때 하나의 금덩어리처럼 되는 거에요.
왜 인간 세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왜 How many가 아니라 How much로 단일 양적으로 그렇게 표현하느냐. 이거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상식적이지만 인간은 인공물이 아니에요. 그렇지요? 인간을 인간이 만든 게 아니잖아요. 부모가 나를 만든 게 아니에요. 인간은 인공물이 아닙니다. 부모의 DNA를 자손이 물려받은 건 맞는데 그 DNA가 인간이 만든 게 아니에요.
DNA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는 질문은, 펜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는 질문과 별은 누가 만들었으며 달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와 동일한 질문이에요. 달이 저기 있고 달의 부피는 달의 길이는 이거는 측정할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 누가 만들었는가? 누가 만들어서 달을 저기 공중에 띄워놓았느냐? 아인슈타인이 했습니까? 뉴턴이 했습니까? 윤석열 당선자가 별 만들었어요? 누가 만들었어요? 인간들 중에 있어요? 없어요? 인간들 중에 없지요.
이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원리는 인간에게 적용되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왜? 인간이 만든 것은 인공적이고 인공적인 원리는 인간이 그걸 만들 때 원리를 인공적이기 때문에 만들면 되는 거죠. 여기 매직 만들 때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에요. 여기 어떤 원리가 있느냐?
이걸 쓸 때 이렇게 쓰면 안돼요. 뚜껑을 연다. 그거 하라고 이렇게 뚜껑을 이렇게 만든 거에요. 울산 강의에서는 이렇게 안하고 어떻게 했느냐? 새로 나온 것. 인터넷에만 판다는 것. 딱 하면 매직이 딱 나오게 되어있어요. 열다가 뚜껑 날라가서 줍고 이런 거 없고.
그렇게 만들 때 원리가 있듯이 인간은 그렇게 돼야 돼요? 안돼야 돼요? 인간은 그럴 수 없어요. 인간의 어떤 것도 인간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인간은 인공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만드신 분의 원리가 들어가야 돼요.
인간이 세포로 만들어진 것은 맞아요. 하지만 세포의 원리가 인간에게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세포가 인간을 만든 게 아니고 인간은 세포로 만들어졌지만 재료는 세포지만, 만들어진 원리는 생물학적이 아닙니다. 단순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인간의 원리란 무엇이냐? 인간이 인공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 원리 해와 달과 별과 동일하게 하나님이 적용하신 원리가 있습니다. 원리를 크게 쓸게요. ‘너를 무서워마라.’ 이 세상 사람들이 악마가 무서워요 귀신이 무서워요 코로나 무서워요. 사람이 남들이 다른 사람이 내게 다가오는 게 무서워요.
무서워하는 것은 본인이, 본인이 무섭기 때문이에요. 내가 무섭기 때문에 남들도 무서운 거에요. 내가 망가질까봐 무섭고 무너질까봐 무서운 거에요. 사람이 자기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한번 적어볼게요. 내가 나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내가 텅 빈 형식이 될까봐. 내 안에 아무것도 없어질까봐 인간은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냥 주께서 안에서 주님의 내가 인공물이 아니고 사람이 만든 게 아니고 누가 만들었다면 누가 만드신 그 원리가 나한테 오도록 우리는 자기를 텅텅 비어놔야 되겠지요. 내 것을 비워놓게 되면 내가 남을 공격할 무기는 나한테 없습니다. 왜냐? 텅 빈 형식이기 때문에.
그냥 주시는 은혜대로 그냥 받을 뿐이지요. 세리와 창기들처럼. 뭐 내세울게 없어요. 7년 동안 귀신들려서 구부러진 사람이나, 혈류병 걸린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 그리고 문둥병자 소경들. 뭐 변변하게 내놓을게 없어요. 내놓을게 없으니까 주의 뜻대로 안 될까봐 염려하는 것도 없어요. 뭐 개코라도 있어야 희망하는데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텅 빈 형식이 뭐냐 하면은 바로 누가복음 10장에 38절에 보면 마르다, 마리아하고 오빠하고 같이 사는데 마르다는 일이 많아서 분주한데 동생 마리아는 아무것도 안하고 뭐만 듣습니까? 주의 발 앞에서 그의 말씀만 듣지요. 이 마르다와 마리아 둘 중에 누가 텅 빈 형식이 될까요? 텅 비어 있을까요? 바로 주의 말씀만 채우는 마리아가 텅 빈 형식이 되는 겁니다.
언니는 자기 솜씨를 맛있는 잡채나 탕수육이나 자기 솜씨를 예수님에게 발휘해서 내 쪽에서 뭔가 내놓을게 있고 내세울게 있다고 보는 거에요. 그러나 그것은 뭐냐 하면은 인공물이에요. 인위적이고 인공물이에요.
아나니야와 삽비라 사도행전 5장에 헌금해서 사이 좋게 부부가 한날에 다 죽은 사람 있지요? 아주 사이 좋아요. 죽을 때. 님아 요단강 건널 때 같이 건너간 사람 있어요. 갔는지 안 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그 사람은 왜 죽었습니까? 텅 빈 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죽은 거에요.
헌금을 이쯤할까? 이쯤할까? 뭔가 계산이 되는 겁니다. 텅빈 형식이 없으면 How much가 아니에요. How many에요. 내가 내 것을 카운트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까지는 내것이고 이것까지는 내것 아닙니다를 서로 구분하는 거에요.
인간이 귀신 집에 갔을 때 귀신이 무섭다라는 것은 자꾸 우리가 귀신을 무서워하고 마귀를 무서워하는 것은 그것은 무엇 때문에 그런 현상이 있느냐 하면은 이미 마귀가 우리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것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 마귀가 만들어낸 인간이 자기를 만들어준 마귀보고 무서워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만든 인간이에요. 내가 채워줄게 에요. 내가 채워줄게.
어떤 청춘 남녀가 대화하는데 연애하면서 남자가 여자에게 이런 이야기해요. 당신은 왜 자꾸 나한테 심술을 부리느냐? 남자가 여자보고 당신은 왜 나 만나면 자꾸 나에게 심술을 부리고 나를 괴롭게 힘들게 하느냐? 그럼 여자가 어?! 나는 그런 적 없는데?! 당신의 그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내가 일에 집중이 안 되잖아!
나는 내 할 일이 있는데 당신의 그 빛나는 미모 때문에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너무 아름다워서. 어쩌면 좋아. 그런 소리 들어봤습니까? 텅 빈 형식은 자기로 인하여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 이렇게 하면 내가 말 이렇게 했다고 남이 욕하겠지? 그럼 나는 힘들겠지? 이런 게 없어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내가 이 말하면 얼마나 상처 받아가지고 내가 얼마나 또 저 사람한테 미안해하고. 자기가 남들 앞에서 나의 체면이 구겨지면 어떡하지? 그런 체면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텅 빈 거에요. 왜냐하면은 나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내가 만들어버리면 나는 하나의 개체가 되고 개체는 생명책에 명단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땡! 탈락이에요. 개체는 땡! 탈락이에요. 열심히 노력해서 말씀대로 살아서 생명책에 꼭 내 이름이 기록되도록 힘써 노력하겠습니다 파이팅! 이것은 주께서 전부 다 이거는 인공물로 간주해서 다 제거해버립니다.
그 당시의 선지자들과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민족의 신학을 보고 24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생명책은 나와 1:1 대응이 안 됩니다. 생명책은 우리가 보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 원리는 뭐냐? 동일한 것은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동일한 것은 하나만 있어야 되지 둘이 있으면 안돼요. 너도 생명책, 너도 생명책. 너는 따로 다 가졌다가 아니라 동일한 생명책에 원리 적용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들어 온 사람의 특이점, 특이성은 뭐냐? 존재를 보지 않아요. 보지 않는다.
인간 존재에 대해서 신경 쓰지를 않아요. 주님에게 관심 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 존재를 보지 않을 때 특히 핵심은 뭐냐? 내가 나를 볼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다. 내가 나에게 신경 쓸 그만한 권한은 주님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내가 나에게 관심사 되면 나는 How many가 돼요. 하나의 개체가 되버린다고요. 개체. 카운트되는 대상이 된다고요 내가요.
나는 어떤 집단에 속해야지 내가 따로 꼭 집어서 내가 하나의 개체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 개체를 내가 이걸 지킬까 말까 지킬까 말까 하면서 내가 혹시 못 지키면 어쩌나 내가 나를 무서워해요. 평생을 두고 하루도 쉬지 않고 내가 나를 무서워합니다.
내가 나를 붙들고 어쩔 줄을 모르고 내가 나를 감당을 못해요. 이 덩어리를 어쩌면 좋나. 코로나 안 걸려야 할 텐데 벌벌벌벌 떨고 있는 거에요. 자기가 자기한테 무서워하니까 남들이 오는 것도 다 주위 사람이 다 무서운 거에요. 누가 이야기하면 무슨 말할까 벌벌 떨고 있어요. 감당도 못해.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텅 빈 형식이에요. 형식만 있는데 안에 텅 비어있습니다. 그럼 안에 뭐를 채울 것인가? 그게 바로 누가복음 10장에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이런 주께서 일으키는 사건이 이제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그 사건을 피해서 가버렸고 그 다음에 레위인도 그 자리를 피해서 가버렸어요. 주께서 생명책에 필요한 내용을 줬건만 하늘에서 만들 생명책을 만들고자 내용이 있어야 되는데 내용을 줬건만 그 내용을 피해갔습니다. 여기서 오늘 제일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방향성’. 방향성이 달랐어요. 방향성이 다른 거에요. 예수님이 가고자 하는 그 방향이 아니고 낯을 피하여 반대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반대방향으로. 어떤 힌트가 있는데요. 30절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원래 이스라엘 정복할 때 여리고부터 정복하고 들어오잖아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
그런데 거기에 제사장, 거기에 레위인은 어디 있느냐 하면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가버린 겁니다. 왜냐하면은 레위인과 제사장이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소는 여리고가 아니에요. 어딥니까?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작자들이 레위인들과 제사장이에요.
물론 일 마치고 놀러 또 여리고 성에 갈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그런 문제도 있지만 여기서는 지리적인 방향이 우선이 아니라 제가 말한 지리적 방향 예루살렘 좋고 여리고 나쁘고 그런 게 아니고 또는 예루살렘 나쁘고 여리고 좋다는 그런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말씀을 탁 던져버리면 네가 지금 가고 있는 인생길이 주님 쪽이 아니냐, 이냐가 이게 주님께 말씀을 듣는 순간 판정이 나고 그 말씀은 사건화 되어서 일어나요. 사건화 되어서.
평소에 자기가 텅 빈 형식이라면 주님의 말씀이 사건화 되어서 오게 되면 저 사건은 나로 하여금 내가 주님 가신 쪽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주님 낯을 피해 반대로 가신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을 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텅 빈 형식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텅 빈 형식이란 그동안 맺어왔던 모든 과거와의 관계를 끊는 것. 모든 과거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 과거와의 모든 관계를 끊게 되는 게 텅 빈 형식이에요. 그 텅 빈 형식에 대해서 누가복음 10장 30절에서 예수님께서 그걸 두 자로 이야기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이웃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강도 만난 사람. 강도 만난 사람과 일체성을 이루는 이웃. 첫 번째 텅 빈 형식은 뭡니까? 강도 만난 사람. 두 번째 텅 빈 형식은 강도 만난 사람 도와주는 사마리아 사람. 그러면 이 두 사람이 어디 안에 있는가? 두 사람이 텅 빈 형식을 채우는 생명책이라는 그것을 공정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게 돼요.
그러면 그 내용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실제로 그 내용을 만드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 본인입니다. 예수님 본인 안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웃이 되고 예수님 본인이 그 이웃을 도와주는 분이 되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이냐 하면은 한쪽은 완전히 뻗어있는 사건이고 그 사건의 그 뻗어있는 것을 살려주는 사건. 이 두 가지.
십자가도 있고 그 다음에 부활은 뭐냐 하면은 전에 죽은 적이 있다는 뜻이에요. 사람들이 이제는 너한테 더 끄집어낼게 없어 가지고 갖다버린 적이 있다는 겁니다. 무덤 속으로. 사람이 죽게 되면 과거도 같이 이제는 소용없게 되지요. 과거가 다 빠진 상태다 보시면 됩니다.
그 빠진 상태에 예수님이 하신 일로 그 과거가 채워지게 되면 텅 빈 형식은 주님의 생명으로 채워지는 새로운 생명책에 해당되는 금덩어리 같은 사람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나 주님의 사건 하나 예를 들은 사건 하나 주님이 일으킨 사건 하나가 다 지금 자기 백성의 내용을 채우는 사건들로 주께서는 일으키신 거에요. 주님 자기만 챙길려고 그 사건 일으킨 거 아니에요.
25절 이제 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이야기합시다. 인간은 인공물이 아니지요. 자기가 자기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자기를 자기를 지키는 게 아니에요. 인공물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원리가 적용되어야 됩니다. 그 다른 원리 적용되는 원리를 이미 구약에서 율법으로 주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율법사가 율법으로 되어있으니까 율법사가 뭐냐 하면은 내가 그 내용을 본인이 채운다고 생각해서 이런 질문을 한 거에요. 율법의 내용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데 그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 쪽에서 뭘 해야 됩니까 라고 물은 거에요. 그 질문 자체가 생명책의 원리와 맞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인공적이에요. 인위적이고 인공적이에요. 부합되지 않습니다.
자, 이 율법사가 왜 이런 질문을 할까요. 주님 앞에. 예수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질문 왜 하느냐? 그 한 질문을 한 이유는 사는 게 지루해서 그래요. 심심해서 그런 거에요. 사람들이 아무리 바빠도 심심해요.
왜냐하면은 여러분들이 아침에 거울보고 식구들 보지요. 거울에 자기 얼굴을 본다 이 말이에요. 식구들 얼굴, 자기 얼굴 보면서 자기 얼굴이나 식구들 얼굴에 권태를 느낍니다. 왜? 늘 봤던 것이기 때문에. 멀리서 손자 손녀가 갑자기 오게 되면 갑자기 아름답고 이뻐요. 왜?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내 식구라고 하지만 오래 보면 식상해요. 지루해요. 심심해요.
사람은 일단 배부르면 같이 놀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놀아주는데 어떻게 놀아주느냐? 늘 새로운 걸 줄 사람을 필요로 해요. 자기가 자기하고 놀려면 재미가 없어요. 인간이 제일 재미없는 일이 자기가 자기하고 장기 두는 거에요. 장기를 둘 사람이 없어서 자기가 놨다. 장군! 멍군! 자기 혼자 두는 것.
또는 청량리 근처에 있는 아주머니들이 손님 없으면 아침에 화투 내놓고 치마 휙 드러내놓고 앉아서 오늘 운세 한번 보자. 화투 네 장씩 나란히 12장.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그거하고 오늘 운세와 무슨 관계있다고 딱 해가지고. 화투를 할 때 이렇게 겹쳐서 12개 합니다. 화투는 화투지만 해석은 아줌마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요. 자기가 자기 가지고 노는 거에요. 왜? 심심하니까.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농부가 농사꾼이 농사짓는 이유는요 심심하니까 하는 거에요. 인간은 배고파서도 못 살지만 심심해서도 못 살아요. 그러니까 심심하니까 누가 자기가 말 섞을 수 있는 시간 때울 수 있는 말거리 친구가 필요하잖아요.
이 율법사가 누굴 잡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잡은 거에요. 내가 아는 신학 지식과 주님이 아는 신학 지식과 견주어서 이 무료하고 권태로운 시간을 짜릿하게 한번 보내볼라고 묻는 게 뭐냐 하면은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자기가 몰라서 묻습니까? 자기는 다 알고 있는데요. 율법을 지키면 된다 다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잘 아네. 잘 아는구만. 그래서 그 옳도다 이야기 들었다고 이 율법사가 천국 갑니까? 네가 짜놓은 인공적인 것, 인위적인 그 게임을 본인이 포기하지 않고 그 게임에 예수님을 불러일으키는 거에요.
내가 바둑판 가져왔으니까 바둑 한번 두세요. 이것처럼. 내가 벌려놓은 판에 내가 이렇게 지루하지 않고 같이 좀 놀아 주세요 하는 식으로 내 판에 끼어들어서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어느 것이 영생이고 어느 것이 율법의 완성이냐 하고 노닥거리고 있는 거에요. 신학 지식 가지고 노닥거리고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심보에요. 이게 인간의 기본 심보입니다. 배부르면 놀고 싶은 거에요. 사장들이 직원들 뽑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일은 직원이 하고 사장은 그 시간이 놀려고 하는 거에요. 골프치고 놀려고. 뭐 사장 안 돼 봐서 뭐 압니까.
그래서 회사 초반기에는 사장이 빡시게 모범적으로 일해요. 좀 안정궤도 들어가면 사장은 낮에 코빼기도 안 보입니다. 놀러다니고 있어요. 누가 답답한가? 사원들이 답답해요. 왜? 회사 망하면 자기월급이 안 나오니까. 죽을둥 살둥 일해요. 사장은 지금 골프장 가 있는데.
왜? 그 사람들 사장들한테 물어보세요. 당신 왜 놉니까? 사장 말하기를 사람이 사는 이유가 뭔데? 사람 사는 보람이 어디 있는데? 그건 바로 재미나게 사는 거에요. 재미나게. 이런 질문도 내 인생 재미나게 해볼려고 이런 질문하는 거에요. 진지함의 티를 위장을 하면서. 귀신을 속여라. 어디 자기 게임에 주님을 건방지게 같이 끼어듭니까.
논다는 것은 날마다 새로움이 나와서 그 흥미로움에 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료되기를 원하는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그런 예수님 자신을 가지고 장난치는 그런 짓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잘 걸렸다 인간아’ 하고 딱 붙들고 이웃에 대해서 이웃이 무엇입니까 질문했으니까 이웃에 대해서 답변을 합니다.
답변을 하는데 텅 빈 형식, 텅 빈 형식을 본인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음을 보여주는 거에요 왜? 텅 빈 형식은 아니고 꽉 찬 형식이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강도 만난 사람은 다 뺏겼어요. 다 빼앗겨버렸어. 강도 만나서 죽은 것도 아니에요. 차라리 죽었으면 문제가 끝날 건데 거의 반 죽었어요. 여기 보면 거의 반 죽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텅 빈 형식이 어디까지 내려가는가. 텅 빈 형식이 아주 극한까지 내려가는 거에요. 삶과 죽음의 경계선, 거기까지 가는 거에요. 이 점을 이 텅 빈 형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누가복음 12장을 13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을 13절을 보면 이건 볼 것도 없어요 여러분들 다 아시는 이야기에요.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선생님 형이 아버지 유산을 혼자 다 독차지 했습니다. 내게 올 몫을 형이 다 가져갔어요. 되찾게 해주세요” 라고 예수님을 찾아 온 거에요. 예수님의 그 정의를 정의답게 나한테 좀 적용해 달라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아까 우리가 생각한 거 다시 적용해 봅시다. 이 사람은 텅 빈 형식이에요? 아니에요? 지 딴에는 텅 빈 형식인데 이거 판은 누가 깔았어요? 이건 텅 빈 형식 쪽으로 가는 게 아니고 텅 빈 형식을 안타까워하면서 내게 돌아올 내 돈으로 꽉 차기를 원하는데 형이 다 가지고 갔으니까 이걸 채워달라고 온 거에요.
예수님께서 나무라십니다. 15절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14절에 보면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지금 네가 만든 판에 나를 끌어당기지 마.
인간은 뭐냐? 자기 것으로 자기가 꽉 차 있어서 더 이상 어떤 공포, 내 것 아무것도 없다 이제 안 망하겠다는 공포심에서 좀 해방되고 싶고 그것으로 이제 인생을 이제 즐기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비유로 이야기해줄게.
어떤 농부가 있는데 그 사람의 소출이 너무 잘 되서 그래서 너무 잘 되서 창고를 크게 지었어요. 그 소출을 거기에 놓고 혼자서 뭐냐 하면은 19절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참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이 자체가 악마의 표적이에요. 나한테 관심두면 안되는데 자기가 자기한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자기가 자기하고 장기 두고 바둑 두고 다 하는 거지요. 내가 나하고 노닥거리는 재미로서 이번에 많은 재산 들어왔으니까 내가 나 보기에 흐뭇하고 사람 사는 것 같고 인간 승리한 것처럼 느끼지는 거에요. 뭐 서민부자 그런 거에요? 적어도 인생을 살았으면 이 정도 성공해야지 하고 뿌듯해하는 거에요. 뿌듯해하는 거에요. 많은 소유를 가졌지요. 많은 내용을 가졌어요.
그런데 형식 자체를 주께서 가져가버립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20절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밤새 바둑 둔다고 바둑판에다가 두 사람이 막 코피 쏟아가면서 바둑 뒀어요. 뒀는데 이게 공부도 안하고 바둑 둔 자리를 뒤엎어 버리면 안에 밤새도록 뒀던 그 돌들 어떻게 됩니까? 와르르르 다 사라지지요.
제가 아는 어떤 친구는 내 친구 동생이 바둑만 두고 자기 할 일 안하고 공부도 안하고 하니까 그 형이 도끼를 가져와서 동생의 형식을 바둑판을 두 조각냈어요. 두 조각냈는데 두 조각내니까 이제 바둑 못 두지요. 바둑 못 두니까 나중에 형이 자기가 심심한 거에요. 그래서 테이프 가져와가지고 자기가 다시 붙여가지고 동생 보고 바둑 두자고 불렀습니다. 이거는 내가 목격한 거에요. 이거는 실제 사건, 내가 목격한 사건이에요. 그 친구는 쪼개진 바둑판 위에서 바둑 두고.
하나의 객기로 오기 부리면서 인생 새 인생 산다고 비장한 각오로 내가 다시는 이런 짓하면 나는 개다 하고 결심을 했지만 내가 담배 피우면 인간도 아니다. 담배 끊었다 해놓고는 나중에 담배 끊을 때는 자기가 담배 끊을 것같이 했지요. 한 이틀 뒤에 속상한 일 일어나니까 야 이럴 때는 담배가 답이다 해서 쓰레기통 뒤져가지고 자기가 가위로 끊은 담배를 붙여가지고.
결국 인간은 자기가 무너지는 것을 무서워해요. 자기가 무서워지니까 세상에 조금만 뭐 삐그덕 해도 가을바람에 창틀이 좀 흔들려도 아이고 무서워 잠 못 자 뛰어오고 뚫어진 창호지에 달빛만 어른거려도 귀신 나타났다고 엄마 방에 뛰어가는 어릴 적 그런 거 없었어요? 어릴 때 다 부자였군요. 찢어진 창호지 집에서 안 살아봤는지.
코로나 32만 명이다. 가슴이 철렁해. 가슴이 떨려. 뭐 좋아하는 여자 친구 미모 때문에 가슴이 철렁대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이 내 걸 지키는데 하나님이 무슨 훼방질할까봐 하나님 믿으면서 하나님을 겁내고 두려워하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남자가 여자를 너무 좋아해가지고 진짜 결혼하자는 고백을 못했는데 결혼하자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여자는 집에 있고 남자는 병원에서 환자복 입고 병원 앞에 있는 공중전화 해가지고 전화를 합니다. 여러 가지 사설 늘어놓고 마지막 결론 시간에 “결혼, 합시다”만 하면 되는데 “결혼”, 했는데 동전이 뚝 떨어졌어요. “합시다”를 말을 못한 거에요. ‘사내맞선’ 드라마에 나온 내용이에요.
세상만사 내 맘대로 안 되지요.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것이 기뻐해야 돼요. 내가 나를 몰랐구나 하고 기뻐해야 될 문제를 가지고 그러면 내 맘대로 될려고 한다면 헌금을 십일조를 얼마를 해야 됩니까 이렇게 이건 마귀한테 벌벌 떨다가 이제는 하나님 믿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 앞에 벌벌 떨고 있어요. 주께서는 그런 뜻이 아닌데 그럼 주의 뜻은 어떤 뜻인가?
10분 뒤에.
강남-누가복음 10장 36절 (텅빈 형식) 220405b-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를 못 지킬까봐. 제대로 사람답게 못 지킬까봐. 내가 나한테 무서워하니까 나한테 주어지는 모든 사람이 벌레같이 느껴지고 두려움에 속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인생이라는 게 인공물이 아닌데 하늘의 원리를 적용해야지요. 하늘의 원리를 적용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인데 오늘 10장 24절 말씀처럼 우리는 하늘의 원리를 몰라요. 임금도 모르고 선지자도 몰라요. 10장 23절에 보면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아 너희들 땡 잡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어떤 비밀을 알려주시면 비밀을 제가 채택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나오지 말라 이 말이죠. 채택을 할 수 없어요. 왜냐 하면은 일방적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에 채택이라는 게 없습니다. 자, 하늘의 원리가 뭐냐? 이제 하늘의 원리를 확실히 말씀드릴게요. 뽑아버리는 거에요.
이빨 뽑듯이 뽑아버립니다. 뽑아버리고 뽑힌 자리에만 거기에 주의 일이 담기게 되어있어요. 뽑혀나갈 때 땡 잡은 거에요. 내가 내 자리에서 뽑혀나갈 때. 썩은 이빨이라고 간주되고 뽑혀나갈 때. 그러면 뽑힌 자리가 있을 거 아니에요. 빈자리에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25절에 율법교사는 뽑힐 생각이 아니고 자기를 단단히 고정적으로 단단히 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뽑힐 생각을 안 합니다. 마태복음 15장 13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심는 것 마다 아버지께서 심지 아니한 것은 다 뽑힌다 했어요.
그럼 다 뽑히는 거에요. 하늘의 원리를 심은 게 없어요. 그거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다 뽑혀요. 일단 뽑자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일단. 일단 뽑는 거에요. 그러니까 강도 만난 사람은 다 뽑힌 거에요 그냥. 텅 빈 형식이에요.
성도라는 사람은 주변의 위로 같은 게 필요치 않습니다. 성도의 입장은 어떤 입장이냐 하면은 이런 입장이에요. 충분히 너무 깊이 아파서 안 안아주어도 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너무 아파서. 너무 깊이. 너무 깊이 아파가지고 이제는 누가 다른 인간이 와서 날 안 안아줘도 상관없어요. 나는 충분히 아파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어떤 아가씨가 있는데 아가씨가 자기가 상처를 입고 가정 환경이 안 좋고 아버지가 도박하고 어떻고 가정 파탄이고 불우한 환경이다 칩시다. 그럴 때 그 아가씨가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친구를 만났을 경우에는 은근히 기대를 하지요. 내가 망쳐버린 나의 과거 인생 저 남자가 내 인생을 어두운 인생을 만회할 수 있고 보상해주면 좋겠다. 기대를 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기대하는 순간 그 남자는 떠나버리고 제1의 남자도 떠나고 제2의 남자도 다 떠나버리는 거에요. 그럴 때 그 여자가 아는 거에요. 나는 너무나 깊이 아파서 이제는 날 안 안아줘도 위로 안 해줘도 좋아요. 이 정도 될 때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을 다시 만회할 가치도 없음을 본인이 인정하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비어도 너무 텅텅 비어있는 형식만 남아있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뽑아주시는 하나님의 원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처음에는 날 버리고 간 남자 전부 다 죽어라 뭐 가평 계곡에 떨어져서 죽어라 이렇게 원망하고 저주를 퍼붓지만 자기 진짜 자기 자신을 알게 되면 이제는 어떤 사람도 나를 위로해줄려고 가까이 안 와도 저는 상관없어요.
왜? 나는 이미 너무 깊이 너무 아프기 때문에 그렇다. 너무 깊이 아프기 때문에.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아팠으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에 대한 기대한다는 자체가 나한테 내가 잘 될 것이라는 그 자체 조차도 욕심, 탐욕에 불과한 것을 아는 경우에는 몽땅 나의 것이라는 그 자리가 몽땅 다 뽑혔을 거에요.
우리 손녀가 어제 치과에 가가지고 이빨 하나 뽑았어요. 뽑고 난 뒤에 자꾸 침이 나오는 거 같애 할아버지 이러는데 비었으니까 뭐라도 나와야지 뭐. 뽑힌 자리에 이빨이 없어요. 충분히 깊이 뽑혔어요. 다 뽑혔어요. 더는 나의 How many가 되지 않아요. 나라는 개체 자체가 자리만 남기고 아무것도 없어요. 형식만 남기고 가버렸어요. 나라는 것이 빠이빠이 하고 없어졌어요.
그거 뽑아주시는 주님이 그 빈자리에 하늘의 것을 곧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거기에다가 심으시는 겁니다. 그 방법이 인공적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만든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제조하시고 생산해내시는 거에요. 뽑고 하늘의 것으로 채우고. 참 쉽지요. 코로나 걸려서 죽고 부활로 다시 태어나고. 참 쉽죠 잉.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에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강도 만난 사마리아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요한복음 2장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안 혼인잔치에 갔는데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은 물이 포도주로 변했어요. 물이.
주님께서 포도주를 갖다 주라고 하지 않고 여섯 개의 항아리에 포도주로 채워서 포도주를 갖다 준 게 아니고 물을 채워서 포도주로 갖다 줍니다. 그냥 주는 거에요. 물을 채워서. 그러면 물어봅니다. 처음에 물 채운 항아리가 물 들었습니까? 포도주 들었습니까? 답변해보세요.
물이죠. 이동할 때 1.5m 이동했습니다. 자, 물입니까? 포도주입니까? 뭐 서서히 포도주 된 거에요? 포도주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이 뭐 그런 겁니까? 아니죠. 물이죠. 3m 갔습니다. 물입니까? 포도주입니까? 역시 물이죠. 자, 거기에 잔치집에 도착했습니다. 물입니까 포도주입니까?
이 세상에서는 주께서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뽑아낼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다 무의미하고 더러운 거에요. 구약 내내 율법을 주신 이유가 더럽고 더럽고 더럽고 더러워서 율법을 더럽다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거에요. 율법을 준 것은 어느 것 하나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거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율법을 주었다는 그 자체, 더럽다고 지적하는 그 자체가 바로 거룩이에요. 주님께서 너보고 더럽다! 할 때 거룩이 도착한 걸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너 죽어!” 하면 그게 뭐다? “너는 살았어!” 라는 뜻이에요 이게. 왜?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래요. “너 죄인이야” 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의인”이에요. 참 쉽죠.
너는 더러워서 뽑아낼 거야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주님의 것으로 채워지는 자리가 텅 빈 형식이 확보된 거에요. 이 말은 뭐냐? 주의 명령 자체가 말씀 자체가 이게 포도주가 되는 거에요. 갖다 주어라 자체가 포도주가 되는 거에요. 물을 떠서 갖다 주어라. 그들이 마시는 순간 그들이 뭐가 되느냐? 포도주가 된 겁니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오병이어도 마찬가지에요. 도시락에 물고기가 몇 마리였죠? 두 마리. 보리떡이 몇 개였죠? 다섯 개. 그러면 이걸 가지고 축사 하시고 사람들에게 떼어주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몇 개 있습니까? 역시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죠.
이건 뭐냐 하면은 십자가 안에서 무한의 택한 백성에게는 무한의 죄 사함의 그 효과가 계속 나오는 거에요. 인간 치고 죄 안 짓는 사람 없어요.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거에요.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 가지고 미리 혼자서 주님께서 기도해가지고 물고기 이만큼 해서 떡 이만큼 해서 그래서 나눠주는 게 아니고 나눠줬다는 그 행위 자체에서 무한의 요소가 전달돼야 그 떡을 먹는 사람이 떡을 먹고 고기를 먹는 게 아니고 주님의 무한함이 주님의 능력을 그들이 먹고 고기를 먹는 거에요.
내 살과 내 피도 마찬가지에요. 천주교에서 그거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살과 피가 나타나는 경우는 뭐냐 하면은 주께서 뽑아내고 내 것이라는 것은 모조리 매일같이 내 것이라고 모아놓는 것은 뽑아내는 거에요. 매일같이 네 영혼 데려간다. 네 영혼 데려간다를 액자로 만드세요. 집에 붙여놓으세요.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간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그런 것 좀 붙이지 말고.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그런 것 붙이지 말고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간다’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간다 좀 필체 좋은 명필가한테 해서 액자 하나 딱 만들어 붙이세요. 붙이고 그 밑에다 뭘 하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10장 24절을 달아놓는 거에요.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사람들이 교회 갈 때 능력 받을려고 가잖아요. 그렇지요? 능력을 받을려고 하면 안 되고 뽑힐려고 가야돼요. 왜냐 하면은 자기가 아프고 자기가 겁나서 자기가 자기 이빨 못 뽑아요.
주여 내 가치 있는 나의 가치를 뭐로 만들어 달라? 요한복음 2장에서는 나를 물로 여기게 하옵소서. 물로 여기게 하옵소서. 사람들은 그 잔치집에 포도주가 없다고 마리아도 그랬어요.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나의 존재감이 떨어진 거에요. 예수님의 존재감의 효과가 떨어진 걸로 보는 거에요.
예수님 빠지고 인간들끼리만 있는 거에요. 즐기고 있는 거에요. 아직 주님의 때가 되지 않았다 해서 그 포도주가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바뀌지만 물에서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로 바뀌지요. 나중에 요한복음 마지막에 피로 바뀌지요. 나중에 요한복음 마지막에는 피로 바뀌어요.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내가 하늘나라 올 때까지는 이제는 먹지 않아도 된다 그런 말씀 나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가 나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율법사의 경우를 봅시다. 율법사가 지금 주님하고 노닥거리고 있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율법사의 이야기는 뭐냐? 예수님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내가 잘 되있는 내가 더 잘 되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왔던 이유를 알지요. 온 이유가 무슨 이유 때문에 왔습니까? 영생 얻으러 왔잖아요. 예수님이 영생 주는 카페입니까. 뭐 카페베네에요 뭐에요. 인간은 영생을 얻으러왔을 때 예수님 보기에 얼마나 기가 차겠어요. 저 주제 파악도 안 되는 인간. 저걸 뭐로 물 먹이지?
물론 부자청년은 물 먹었지요. 그야말로. 모든 걸 팔고 안 되는 건 알아요. 그래야 생명책에 How much에 포함이 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지금 이 율법사가 영생 얻었다는 것은 이거는 본인의 영생을 의미하는 겁니까? 남한테 나눠줄라고 하는 거에요? 무슨 뜻이에요?
일단 자기 거는 챙기겠다 이 말이죠. 율법사가 자기 영생을 챙기겠다는 말은 곧 자기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는 거에요. 영생 없는 나는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 나 영생 없이 사는 것은 내가 싫어. 내가 싫어. 나는 그런 인생 같으면 내가 아주 자살할거야. 이런 때가 오는 거에요.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가는 이유가 뭡니까? 뽑히러 가는 거에요? 이빨 뽑듯이 뽑아주세요 하는 거에요? 아니면 영생 얻으러 가는 겁니까? 일종의 그것도 노동이니까 영생 얻겠지요. 예수님께서 그 뒤에 사마리아 사람을 끄집어낸 이유는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방향이 다르다. 내가 가는 곳과 같이 있더라도 같은 한 자리에 같이 있더라도 주님께 관심 있는 것과 한쪽은 자기한테 관심 있는 사람, 같은 장소에 점유해 있어도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은 점점 더 멀어져가는 거에요. 점점 더 멀어져요 방향이. 한쪽 지옥 가는 방향은 뭐냐 하면은 자기를 뽑아낼 생각이 전혀 없어요.
쉽게 말해서 내가 강도 만난 사람 되기 싫어요. 강도 만난 사람도 되기 싫고 강도 만난 사람 도와주기도 싫고. 그런 사람이 오늘 몇 사람 나왔어요?? 두 사람 나오지요. 한 사람 누굽니까? ‘제사장’. 또 한사람은? ‘레위인’.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을 딱 한사람으로 지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아닌 사람을 같이 거론하는 것은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방향이. 그래서 제가 예루살렘에서 위로 간다는 것을 약간 거론하는 이유가 그들의 직업이 예루살렘에서 활동해야 존재감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볼 일 다보고 여리고로 놀러가는 사람 같으면 한가하잖아요. 자기 볼 일 다 봤으니까. 그러니까 바쁘게 그 현장을 피해야 할 이유는 없지요. 아 지금 바빠 죽겠다. 놀러 가는데 뭐가 바빠. 지금 자기 본업이 있기 때문에 바쁜 거에요. 본업 때문에. 무슨 일 하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에요. 제사장이 자기를 위해 일합니까? 그 제사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강의하러 오는데 오다가 강도 만난 사람 그만 죽게 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옆에 예수님이 팔짱을 끼고 지켜봅니다. 너 어떻게 처신하는지 한번 보자. 그러면 어떻게 처신합니까? 강도 만난 사람한테 가가지고 모가지 밟아가지고 제대로 죽게. 죽이고 난 뒤에 강의하러 오지요.
왜? 죄인이니까. 뽑혀야 될 죄인이니까. 주께서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게 하는 이유는 어떤 위인도, 아니 강도 만난 사람을 구원해줘도, 구출해도, 여비주고 병원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켜도 그 인간은 그렇게 착한 일 해도 중요한 것은 인간 자체가 내가 간직해서는 안 되는 인간으로 달라진다는 것은 어떤 인간도 그런 인간이 없다는 거에요. 어떤 인간도 없어요.
자꾸 그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이 눈에 밟힐 때는 차가 와서 어떤 사람이 치었으면 빠꾸해서 온전하게 죽이고 그래야 완전히 죽어야 나중에 장례만 치르면 되잖아요. 반만 죽으면 할 일이 많아요. 제대로 밟고 룰루랄라 강의하러 오는 겁니다. 욕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병원에 급한 환자가 들어왔어요. 배에 칼이 찔려서 피를 흘리면서 응급실에 들어왔습니다. 병원에서 의사들이 하나 안 되서 두 명 와가지고 거의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의사들이 자존심이 있지 이 죽은 자를 열심히 간호하고 혈액 채우고 간호사 동원해서 수술해가지고 드디어 수술 성공해가지고 나중에 보니까 심장박동이 돌아오면서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의사들이 어떻게 됩니까? 환호성을 지르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러겠지요. 그런데 그 환자가 누구냐 하면은 극악무도한 살인자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생명의 모순입니다. 이 사람이 살아있으면요 사람들이 10명 죽어요. 지금까지 10명 죽여 왔고.
의사는 이 사람의 생명을 살렸다고 의료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고귀함을 가지지만 다른 사람 보기에는 생명을 살린 게 아니고 죽어가는 살인 의지를 되살려놨어요. 이 심술궂음과 이 포악한 마음을 살린 거에요. 우리나라의 역사에 연산군 있지요. 연산군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 죽였습니까. 그런데 연산군이 방금 응급실에 들어왔다고 칩시다.
의사로서의 도덕 윤리적 도리 때문에 살려놓으면 그 연산군은 뭐부터 하는 줄 알아요? 자기 살려준 의사부터 죽여버려요. 그런 폭군들이 이 인류사에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자기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 이런 것은요 권력과 권세 앞에 악신 앞에 악마 앞에서 그런 것은 기대한다는 것은 사치에요.
가정에서도 평생 동안 마누라 때리고 술 먹고 도박질하고 바람피우고 이런 인간 남편, 그 남편이 술을 너무 먹고 얻어맞아서 죽어갈 때에 아내가 신고 받고 가가지고 남편을 위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해서 수술해놓으면 술 깨고 난 뒤에 그 남편이 아내한테 고맙다 할까요 행패 또 부릴까요? 어떻습니까?
인간의 고유의 성격은 과거에서 수집된 거에요. 과거에서. 의식이 있고 의식 배후에는 무의식이 있고요 이 무의식은 그 인간이 어릴 때부터 자라온 가정, 그 부모 거기서 만든 집단 무의식에서 무의식이 생기고 이 무의식에서 의식이 생긴다. 이것을 칼 구스타프 융이라는 분석심리학자, 프로이드보다 나이가 19살인가 적은 그런 사람이에요. 프로이드의 제자면서 나중에 프로이드 정신 분석하고 이렇게 결별, 헤어졌는데 이론이 안 맞아서.
그 사람의 이론에 의하면 프로이드가 이야기한 개인적 의식이 아니고 집단 무의식, 일류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 같은 아담 같은 DNA 공통적인 무의식을 갖고 있다고 보는 거에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요 의식 다음에 무의식이 아니에요. 의식 다음에 전의식이 있고 전의식 뭐냐 하면은 과거에요. 과거.
그 다음에 무의식이 있는데 무의식에 있는 그 욕망이 전의식에서 와서 이게 꿈이 되는 거에요. 꿈은 무의식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된 게 꿈이에요. 그걸 또 다시 해석한 게 이게 언어고. 그러니까 프로이드는 인간의 깊은 그 내면의 의식은 인간의 언어적 해상도가 낮아요. 무의식의 해상도보다 언어적 해상도가 낮기 때문에 언어로 다 표현을 못해요. 아이고 답답해라 이런 식이에요.
그럼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을 살려냈다. 살려냈다는 것은 숨이 끊어졌다 안 끊어졌다 그뿐이지 그 사람을 개과천선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 사람이 정신 차려서 새 사람이 됐다 그거는 소설이고요. 어떻게 집단 무의식을 한번 병원 갔다 왔다고 이게 달라집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집단 무의식인데.
집단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설정한 거 아니에요. 영향을 받은 거에요. 자기 집안에서, 자기 주변 친구에서. 북한의 아줌마들 김정은 보고 뭐라고 합니까? 욕합니까? 눈물 흘리면서 감격하고 있어요. 감격하잖아요. 전 세계가 다 욕하고 있는 푸틴은 국민의 80%가 푸틴을 지지한다는, 물론 그거는 언론이 조작한 거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거고요. 하지만 84%가 지지한데요. 우크라이나 죽던 말던.
이게 조직의 힘입니다. 조직은 내가 거기서 출생한 걸 의미하는 거에요. 애가 둘이라고 치고 둘이 집에서 막 싸운다. 형하고 동생하고 싸운다. 바깥에 나가서까지 싸울까요? 둘이 단짝이에요. 둘이 단짝입니다. 왜? 집단 무의식. 자매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싸우다가 바깥에 나가서 누구 하나 욕 얻어먹으면 누가 도와줘요? 같은 일가친척이 다 도와줘요.
그래서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에게 지옥불이 지옥 형벌이 기다린다 라고 할 때에 사실은 모든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가 살아가는 그 행태, 생활 태도 같으면 그 말 듣고 가만 있으면 안돼요.
사력을 다하여 그 사도 바울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전력을 다하여 반박을 해야 돼요. 지가 평소에 하는 행세가 그래요. 왜? 복음은 뒷전이고 우리 집단 우리끼리 복음 빼고 이야기합시다 이게 평소에 인생이 평화롭게 내 인생 편하게 사는 하나의 요령이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눈치 없이 그냥 질러버리죠. 아버지, 엄마, 자식, 조카, 아들, 딸 다 필요 없어.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는 뭐가 된다? 지옥 간다. 그 말을 못해. 왜 말을 못하느냐 다그치는 거에요. 그 말 듣고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있다면 예 예 하겠어요? 누굴 공격하겠어요? 사도 바울 공격하겠지요.
이게 뭐냐? 방향이 달라서 그런 거에요. 방향이. 평소에 얼마나 착실하냐 그걸 묻는 게 아니고요 바라보는 방향이 반대 방향이라 그래요. 그럼 사도 바울은 어떻게 알았어요? 집단 무의식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하는 것이 집단 무의식이에요? 의식이에요? 무의식 됐습니까?
그래서 심리학이라든지 정신분석학이 엉터리인 거에요. 사도 바울이 그걸 알게 된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자기가 아라비아에서 4년 동안 누구한테 배웠어요? 예수님한테 배웠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에게 배운 게 아니고 선배에게 배운 게 아니고 직접 누구한테?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받았기 때문에 나는 사도다. 됐냐?! 심지어 내가 전한 복음에 우리라 할지라도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이걸 우리 집단, 우리 가족이라는 집단을 욕하는 이웃집 불교 신자한테는 퍼부을 수 있어도 이걸 우리 집안 식구 심지어 손자 손녀에게 이걸 퍼부을 수 있습니까? 퍼붓기 힘들지요.
왜? 우리 이빨이 안 뽑히니까. 내 자신이 안 뽑혔으니까 결국 궁극적으로 가장 소중하고 귀하게 지킬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에요. ‘self’죠.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심지어 복음까지 동원하면서. 그 방향이 어느 쪽입니까? 주님 쪽이에요? 나를 뽑아주는 주님 쪽입니까? 지킬려고 하는 내 쪽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냥 물로 사세요. 그냥 평생 물로 사세요 포도주 되지 말고. 물로 사세요. 그냥. 주님 안 오면 물 돼요. 김물, 최물, 박물. 주님께서 포도주 없다는데 물 주신 이유를 알겠지요? 나 아니면 없다. 그러면 그때 사람들은 뭡니까? 누가 포도주 줬어?!
한번 보세요. 누가 이 맛있는 포도주를 마지막 때 내어놓았느냐. 누가 포도주를 주었느냐. 지금 이 질문은요 잘못된 질문이에요. 이 질문은. 잘못된 의문이라고요. 누가 포도주를 주었느냐가 아니라 주님은 어느 쪽으로 가십니까 이렇게 돼야 돼요.
물이 포도주 됐잖아요. 물이 포도주 됐다 이 말이죠. 포도주 다음에 포도주가 끝이었습니까? 포도주 먹은 사람은 천당 갑니까? 아니지요. 포도주 다음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피로 가야죠. 피. 십자가 피로 가야지요.
교회들마다 전부 다 기적 받은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병 고치는 기적, 뭐 돈 버는 기적, 땅 값 올리는 기적, 예배당 짓는 기적 말고 그거는 물이 포도주도 아니고 물이에요. 물. 기적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뽑힌 그 자리에 피가 고여 있다. 주의 찢기신 살이 고였다는 이것만이 나의 뿌리요 나의 바탕이고 근본이 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생명책에 합세된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어요. 다른 복음은 있을 수가 없어요. 사도 바울이 너무 심한 말을 한 거 같애. 사도 바울은 세상살이 안 했나? 이런 식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받은 거에요.
그럼 이 사도 바울의 말에 대해서 흔쾌히 기쁘게 동의 안 된다는 말은 결국은 우리가 사는 방향이 예수님 계신 곳이 아니고 반대쪽으로 가는 거에요. 반대로 가면서 예수님 찬양 이러고 있다고요. 방향은 반대로 가면서 찬양하고 있다고요. 코메디도 이런 코메디가 없어요. 그래서 요새 개콘이 안되는가. 이게 무슨 코메디에요. 예수님 없는 곳에 왜 예수님 찬양을 합니까.
36절 봅시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렇게 했지요. 여기 36절에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했지요.
그러면 이 사람이 이 율법사가 진짜 예수님 말씀대로 이웃이 될려면 “나는 이웃입니다” 하면 안 되고 “내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다” 이렇게 해야 된다고요. 그러면 강도 만난 자를, 있는 쪽으로 자기가 방향을 그쪽으로 틀어야 돼요. 강도 만난 자 .
그럼 강도 만난 자는 누굴 만난 자에요? 1번 강도를 만났다. 2번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을 만났다. 몇 번입니까? 일단은 강도 만난 자가 될려면 강도를 만나야지요. 그리고 그만 죽게 되었잖아요. 이분이 바로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 계신 곳을 봐야 돼요. 그리고 이웃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강도 만난 자도 아니면서 본인 자신이 강도 만난 자와 일체화시켰잖아요.
자, 다시 이야기합니다. 강도 만난 자는 모든 걸 빼앗긴 자에요. 뽑힌 자 입니다. 이 질문으로 오늘 강의의 핵심은 저는 다 되었다고 봐요. 이 질문 하나로. 질문이 뭐냐? 강도 만난 자는 둘 중에 하나에요. 움직이는 자입니까?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자입니까? 몇 번입니까?
강도 만난 자. 강도 만난 자가 손가락 이렇게 까딱까딱 합니까? 움직이지 못하지요. 이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성도. 다 뽑힌 자에요. 뭐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왜 그리 바쁜지. 움직임이 없어요. 그냥 죽었으니까. 결국 그러면 기도는 뭡니까? 죽었다는 것을 티낸다고 기도하는 거죠.
아까 낮에 기차 타고 오는데 전화가 왔어요. 어떤 분이 전화 왔는데 목사님 제가 기도할 때 마다 나 살려달라는 기도를 자꾸 하고 욕심적인 기도를 많이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 답변은 간단하지요. 그러니까 그 기도를 하셔야지요.
왜? 이러한 나를 살려 달라 나를 지켜 달라 나는 마음이 편안하게 해달라 라는 그 기도하는 행위가 그게 움직이지 못하는 행위를 대변해주고 있거든요. 왜? 무의미한 행위이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그걸 움직였다고 할 수 없는 움직임이거든. 죽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기도를 해야지요.
그리고 기도를 하고 그 기도가 잘못됐다는 그거는 주님께 맡겨야 될게 아닙니까. 이런 기도는 안해야지. 그럼 그 기도 죽은 자 티는 무슨 수로 냅니까. 엉터리 같은 기도든 뭐든 해야 자기가 죽은 자 티가 날 거 아니겠습니까. 뭐 가만있다고 점잖 빼는 그거는 죽은 자 아니에요? 어디서 꼼수를. 그건 꼼수에요 꼼수.
제가 낮 설교 때 마지막에 했잖아요. 즐겁게 살라고. 포도주는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요. 포도주 마셔가면서 즐겁게 아내와 함께 즐겨라. 전도서에서 하는 이야기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어차피 헛되잖아. 무의미하잖아 너. 뭘 해도 무의미하니까 가만히 있다고 무의미한 게 아니고 설쳐대면 설쳐댈수록 그 설쳐대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이다 이 말이죠.
이미 주님 쪽에 가버리면 주님은 우리를 뽑는 사람이잖아요. 이미 뽑아야 그 자리에 주님의 효과가 주어지니까요. 오천 명이 모였지요. 예수님 설교 들으러 오천 명이 모였는데 그들이 점심 가져왔습니까? 없지요. 자기 먹을 거 자기가 가져왔습니까? 없지요.
그야말로 다 뽑힌 거에요. 점심 전에 주께서 돌려보낸 게 아니에요. 점심 때가 되도록 자기가 전혀 지금 아무도 식사할 것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계속 설교를 해버린 거에요.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줄 자는 우리 중에는 아무도 없음을 분명히 하는 거에요.
그 방향은 어느 쪽이냐? 방향은 주님만 쳐다보는 거죠. 그 자세가 오늘날 성도의 삶 아닙니까. 방향은 주님 바라보는 거에요. 어떤 채? 아무것도 못하는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한 상태에서.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한 상태니까 이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태가 뭐냐 하면은 되게 바빠요. 무척 바쁩니다. 쓸데없는 일이지만.
하지만 성도는 알지요. 이게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이걸 기껏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이거 한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님을 아주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쓸데없는 짓을 즐기는 거에요. 자전거 타고 돌아댕기고.
그러니까 다치고 그러고 난 뒤에 일이 잘 평화롭게 돈 문제 해결 다 되고 맘속으로 기도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지만 기도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주여 살려달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주께서는 또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너는 뽑혀야 돼. 그러니까 너는 뽑혀야 된다고.
자, 38절 보겠습니다. 38절 아까 언급 약간 했는데 여기 마르다, 마리아가 나오는데 두 자매가 나오는 게 아니고 두 방향성이 서로 대비가 되는 두 자매가 나와요. 방향성이. 한쪽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요. 주님께서 내 음식 솜씨에 대해서 얼마나 만족하시고 감탄할 것인가. 줄곧 자신의 솜씨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솜씨는 뽑히는 대상이라고 보지 않고 이거는 장려돼야 될 이어줘야 될 어떤 재주 같은 걸로 생각하는 거죠. 마르다는. 그런데 마리아는 이런 경우를 가지고 싸가지 없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지 없는 거에요. 싸가지 없는 거에요. 언니가 얼마나 고생하는걸 모르고 동생은 마리아는 예수님 주님 발 앞에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부엌일 도와주지도 않아요.
원래 맏딸은 일하게 되어있고요 원래 그 맏딸 밑에 딸린 동생은 언니가 음식하면 부엌에 가서 낼름 낼름 먼저 먹기 바빠요. 원래 동생은 그렇게 크는 법이에요. 언니는 마땅히 해줘야 되고 동생은 마땅히 받는 것이 마땅하니이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아버지가 동생 보고 언니는 고생했으니까 유산 손 대지 말고 언니 다줘라 하면 나중에 여동생은 아버지 죽고 난 뒤에는 재판 걸어가지고 몽땅 다 가져오지요. 원래 언니는 엄마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당연한 걸로 생각하는 거에요. 언니가 고생했다는 생각은 거의 안합니다. 물론 말썽쟁이 언니가 있는 그런 경우도 있고요. 일반화하지 마세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서로 대비가 되고 방향이 서로 다르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답변을 우리가 보기 전에요 객관적 입장에서 우리 인간적으로 봅시다. 우리 인간적으로 따져가지고 마르다 마리아 둘 중에 누가 제대로 주님을 대접하느냐? 누가 대접해요 제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동생이 대접해요? 언니가 대접합니까? 언니가 대접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 어긋나느냐 하면은 사도행전 17장 한번 봅시다. 17장 25절 “또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그 다음에 뭡니까? “친히”,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북한의 김정은한테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세요. ‘친히 주시는 자’에요.
다시 오늘 본문 봅시다. 예수님은 지금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주시는 방향이에요. 만약에 마르다가 음식을 내서 예수님께 줘버리면 마르다 방향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돼요.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안 드러나 버려요. 차라리 텅 빈 형식과 같은 마리아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누가 뭘 줍니까?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뭘 줘요? 말씀을 주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그게 옳다는 거에요. 42절에. “여러 가지 해도 다 되지만 한 가지만 하라면 마리아 하는 편이 옳다” 왜? 마리아는 주님의 방향과 동일한 방향이기 때문에. 주님의 주 되심의 본성을 잘 들추어내는 방향. 주여 염치없지만 주시옵소서.
그럼 주님께서 시험하기 위해서 네 것 나한테 주지? 그러면 마리아가 뭐라고 하겠어요? 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뽑혔는데. 저 텅 빈 형식이에요. 아무것도 없는데 뭘 줍니까. 주님께서 채워야지요. 절 주님께서 뽑았잖아요. 확 뽑았잖아요. 뽑았으니까 이빨은 날라가 버리고 뭐만 남았어요? 자리만 남아있죠.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죽음의 자리죠.
그래서 생명책의 연대는 A,B,C,D,E 이 모든 인간의 개별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이에 연결시키는 밧줄과 같은 뭐냐? 죽음,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책의 생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 곧 자신의 생명을 자기 백성에게 밧줄로 사용하라고 주신 그 죽음이에요.
왜?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도 생명에 대해서 아는 바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거에요. 자기의 갖고 있는 생명을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줬다면 성도와 성도 사이는 죽음이라는 그 이름을, 생명이라는 이름의 그 죽음을 서로가 A,B,C,D,E 서로가 걸쳐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한 덩어리의 생명책 집단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그것이 우리가 드리는 충성과 봉사보다 월등하고 족히 비교되지 않는 다른 방향성에서 주어진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이 주시는 것만 크게 보이는 그 방향으로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